초기불교 - 94가지 주제로 풀다
임승택 지음 / 도피안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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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명하고 체계적이며, 아비담마 입문을 위한 필수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악문 투성이의 불교서적들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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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의 길
서광원 지음 / 흐름출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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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사장이 아니더라도, 한해 두해 나이를 먹어가는 걸 실감하는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삶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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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와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대표작(들)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절반만 솔직한 것이다. 진짜 솔직한 나머지 절반은 여배우들 때문이다. 나루세 미키오와 미조구치 겐지는 유난히 여자의 이야기를 많이 다뤘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에는 여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도 예쁜 여배우들이. 그들은 하나같이 연기도 잘할뿐더러, 나루세 감독과 미조구치 감독은 그들을 화면에 아름답게 담아낼 줄 안다. 더구나 두 감독의 대표작은 대부분 흑백 영화이기에 흑백 명암으로 묘사된 여배우의 얼굴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이다.

 

그렇다고 나를 덕후로 생각하지 말지어다. 안타깝게도 난 덕후가 될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일단 끈기가 부족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사람 이름을 지독히 못 외운다. 일본사람 이름은 더욱 그렇다. 일본 여배우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것은 구구단을 거꾸로 외우는 것 만큼이나 힘들다.

 

이름 못 외우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실은 일본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호기심과 명성에 현혹되어 본 영화들이 전부다. 뭐 그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 영화나 이와이 순지, 미이케 다카시, 구로사와 기요시 등... 아니면 싸구려 호러물이나 폭력물, SF물, 괴수영화, <카우보이 비밥>같은 애니메이션 시리즈 혹은 ‘살색영화’에 잠시 빠져든 것이 전부다. 내가 본 일본영화는 너무 작가적이거나, 너무 싸구려였다. 양쪽 모두 흥미로웠지만 그건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맛에 대한 탐닉이었을 뿐 일본영화에 대해 존경은 들끓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는 일본 고전영화도 솔직히 별 재미가 없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위대한 일본감독 4인방의 영화를 몇 편 보았지만 ‘참 좋은 영화다’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 묵직한 파토스가 나를 사로잡지는 못했다. 아마도 시간의 간극과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발가벗고 끌어안기가 쉽지 않았나 보다.

 

묘하게도 일본영화, 그것도 일본의 옛날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한국영화 때문이다. 우연한 계기로 50,60년대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세상의 모든 옛날영화가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나 40,50,60년대 일본영화는 한국영화와 매우 밀접한 ‘역사적 크로스오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에게서 옛 여자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묘한 흥미로움(?)이 격하게 도사리고 있더란 말이다. 그래서 그 관심에도 없던 일본의 옛날영화가 요즘 보고 있다.

 

암튼 나루세 미키오나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한편을 골라 이야기해보려고 했는데 사설이 길어졌다. 그건 다음으로 미루고 엉뚱한 이야기로 잡담을 마무리한다.

 

어디선가 읽었더라? 개화기 무렵 서양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크게 놀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사람들이 밥 먹는 모습이었다. 작은 체구의 조선사람이 자기 머리통만한 밥그릇에 밥을 가득 담아 깨끗이 비우는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었다는 거다. 생각해보니 이건 할머니나 큰아버지 세대도 종종했던 이야기다. ‘우리 때는 밥을 고봉으로 먹었어!’

 

 

 


증거 사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신상옥)에서 김진규가 먹는 밥(위 사진)을 보라. 나루세 미키오의 <밥>(1951)에서 하라 세츠코의 밥그릇(아래 사진)과 비교해 보면 고봉(그러니까 산봉우리처럼 수북이 쌓아)이란 말이 실감난다. 남녀차이를 감안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보다 많이 먹었다. 고로 우리는 한때 ‘위대’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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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9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9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책을 읽고 글을 올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요즘 책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지 책에 집중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책읽기가 힘겹고 재미없을 수밖에. 책읽기의 즐거움을 잊어먹었다.(잃어버렸다,가 맞는 표현일까? 암튼~~)

 

지난해 말, 책과의 관계가 돌연 소원해질 무렵, 잠시 TV에 빠졌다. 밤시간 TV 앞에서 멍하니 시간을 죽이고, 또 죽였다. 한동안 지속된 이 습관은 시간에 대한 인지능력을 묘한 방식으로 변화시키거나 퇴화시켰다. 가령 TV를 보는 밤시간 동안 시간의 흐름은 프로그램의 시작과 끝으로 환산된다. 요일의 변화 역시 시간대별 프로그램의 변화로 인지하고, 한주의 시작과 마무리도 고정 프로그램의 다음주 예고로 깨닫는다.


가령 일요일 저녁에 가 끝나면, ‘한주가 끝났구나!’ 혹은 ‘일요일이 끝났구나’ 뭐 이런 식. 채널을 돌리다가 MBC <100분 토론>이 방영되면, ‘어라, 오늘이 목요일이었네?’하는 반사적 반응!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체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나의 TV 중독은 심야 시간에만 편중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대가 바로 하루 중 주로 책을 읽던 때라는 것. TV 때문에 침대 옆에 쌓여있는 읽다만 책은 먼지를 위한 아늑한 안전지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멍청한 습관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방송사 파업이다. MBC가 파업을 했고, 얼마 후 KBS도 파업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더욱 한심해지거나 재방, 삼방이 반복되었다. 이미 본 프로그램을 또 보고 있을 때 드는 자괴감은, 멍청하고 한심한 프로그램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만큼이나 심각하다. 나의 병신스러움을 어찌 변명할 수 있을까? 병맛.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병맛을 떨쳐버리려고 TV를 껐다, 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어쩌다보니 TV 대신 뭐 딴 거 없을까?하는 심산으로 오랜만에 DVD플레이어를 켰다. 집에 굴러다니던 DVD, 일 년전 빌려와서 돌려주지 않은, 보지도 않을 거면서 꿀꺽하기로 작정한, 해적판 불법 리핑 싸구려 DVD, <역마차>(1939, 존 포드, 2,900원에 알라딘에서 구입할 수 있다.)를 틀었다.


그런데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다. 옛날 영화에 말이다. 이날 이후 나는 주인에게 즉각 DVD를 반납했다. 왜냐고? 다른 걸 빌려야 하니까. 그는 보지도 않은, 앞으로도 보지도 않을 옛날 영화를 꽤 가지고 있다. <역마차>를 돌려주고 <이키루>(1952, 구로사와 아키라),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7, 윌리엄 와일러)를 생포해왔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이 소위말하는 대박이었다. 특히 <이키루>는!

 

요즘은 거의 매일 밤, 맥주와 함께 옛날 영화를 보고 잔다. 고색창연한 옛날영화를 보며 희희낙락하는 것이 어찌나 깨알같은지... 이 재미가 맥주와 오징어 다리 때문인지, 위대한 감독들의 위대한 작품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즐겁다. 심히 즐겁다.
 
내가 생각하는 옛날 영화의 기준은 ‘1975년 4월 30일’ 이전에 개봉한 영화다. 앞으로 1975년 4월 30일 이전 작품만 편애하기로 했다. 왜 1975년 4월 30일이냐고?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내 생일도 아니다. 그냥 베트남전이 공식적으로 끝난 그 날이 어쩐지 현대사의 전환점인 것 같아서이고, 뭔가 역사적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시간의 흐름이 쌓인 시점인 것 같아서이다. 그러니까 1975년 4월 30일 이전 영화라면 무조건 사랑하기로 한다.


물론 옛날 영화 중에 특히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건 40년대, 50년대, 60년대 영화들이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약간의 시차와 제작 환경의 차이에 따라 흑백과 컬러 영화들이 뒤섞여 있고, 스탠다드 화면과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공존한다. 특히 50년대 영화는 정말 그렇다.

 

TV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흘러간 옛날영화를 보며 소일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TV는 병맛이고, 옛날 영화는 고상한가? 절대 아니다. 중요한 건 옛날영화는 나를 야릇하게 흥분시킨다는 점이다. TV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극’이 옛날영화에는 있다.

 

이 흥분에 관한 변태적인 반응에서 소외되는 것은 TV 뿐만 아니다. 요즘 영화도 마찬가지다. 최근 아는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건축학개론> 봤어?” 당연히 안 봤다. 꽤 괜찮은 영화라며 추천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마도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심미안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인과 수지보다 지난밤에 본 나루세 미키오의 <밥>(1951)에 출연한 하라 세츠코와 하나이 란코가 더 예쁘게 보인다.(물론 난 이들보다 최은희나 조미령, 윤인자 같은 우리나라 여배우를 더 좋아한다!) 그러니까 딴 여자가 더 예뻐 보인단 말이다. 뭐 사랑이 변한 거지.

 

책읽기의 재미를 잊어먹어(혹은 잃어버려) 속상하다. 책읽기에 대한 사랑은 변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뭔가 서로 엇갈리고 있을 뿐 곧 서로 뜨거운 밤을 불태울 것으로 믿는다! 뭐, 언젠가 그 분이 다시 오시겠지. 당분간은 옛날영화와 맥주와 오징어다리로 만족하자. 책을 못 읽어서 알라딘 리뷰 좀 못쓰면 어때! 언젠 열심히 썼나?, 싶다!

 

 

유치하지만 올려본다, 두 분의 여신님이 함께 한 흐뭇한 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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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4-03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1951년 영화라니...제가 본 제일 오래된 영화가 뭘까 생각해보았는데, 아마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최은희, 조미령까지는 알겠는데 윤인자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호기심 급증이고요.
제가 생각하는 옛날 영화의 기준은 내가 그 영화 제목을 얘기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을 때 라고 할까요? 오늘은 글쎄, 영화 Trainspotting 제목을 댔는데 앞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ㅠㅠ 이건 너무 심했지요? 아무리 제가 나이 좀 어린 친구들 앞에서 얘기했기로서니.

lazydevil 2012-04-04 01:06   좋아요 0 | UR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더 옛날영화. 근데 컬러필름이죠. 어린 시절 재개봉을 할 때 봤는데, 상영시간이 길어서 한밤중에 집에 들어간 기억이 나네요.ㅎ
<트랜스포팅> 옛날영화 맞아요. '나이 좀 어린 친구들'이 모를 수 밖에요. 이완 맥그리거도 한때 청춘스타였는데, 이젠 아저씨~ㅎㅎ
윤인자는요... 언제 우리나라 여배우 이야기로 잡담 한번 늘어놓을까요?^^

카스피 2012-04-0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마를린 먼로는 알겠는데 옆에 계신 한복 입으신 분은 누규??

lazydevil 2012-04-04 01:08   좋아요 0 | URL
최은희 누님입니다.ㅎㅎ
1954년 몬로가 주한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때 대구 비행장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라네요.

2012-04-03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4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4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합성사진이 아니었군여.. 저도 이제껏 안 봤고 앞으로도 안 볼 것만 같은 디비디 끼고 사는 사람인데 대여나 해줘야겠군요.;;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lazydevil 2012-04-04 12:40   좋아요 0 | URL
합성같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는 게 현실인가봐요^^
어허~ 섬님에게 딸린 디비디 리스트가 궁금하네요.
목록 공개하시고, 저 좀 빌려주세...욯ㅎㅎ
 
스포츠 라이터
리처드 포드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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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도서관에서 닉 혼비의 <피버피치>가 스포츠서가, 그것도 축구분야에 꼽혀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어이없는 분류가 오히려 닉 혼비에게 어울리는 거 같아 키득거렸다. 닉 혼비라면, ‘우스꽝스럽지만 불만 없음!’, 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스포츠라이터>는 장편소설이라는 문구가 책표지에 버젓이 인쇄되어 있기에 <피버피치>같은 황당한 대접을 받지는 않을 테지만, 그 제목이 풍기는 명백한 뉘앙스로 인해 누구처럼 생각없는 독자는 분명히 스포츠에 관한 신나는 소설로 오해할거다. 그러나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깨닫게 된다. <스포츠라이터>는 ‘스포츠’ 소설이 아니다. <스포츠라이터>는 ‘라이터’인 한 남자에 관한 쓸쓸하고 서늘한 소설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소설을 쓴 리처드 포드라는 정말 글을 ‘개잘쓰는’ 작자라는 것도 알게 된다.

 

<스포츠라이터>를 퍽이나 오랫동안 읽었다. 몇 주가 걸렸는지 모른다. 초반 80페이지 가량은 아마 세 번쯤 읽었을 거다. 지루하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도록 하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출몰한다. 인물들의 사연을 듣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며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멘탈붕괴 직전이다. 겉으로는 부족한 거 없이 멀쩡하게 보이는 아저씨, 아줌마 들. 하지만 속은 균열 그 자체다. 이런 지경이니 술술 책장을 넘기며 폭주하는 즐거운 독서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작품이 진정 무서운 것은 ‘희망없음’과 ‘멘붕’을 이야기하는 태도다. 앞서 말했지만 주인공은 모두 먹고 살만하다. 그러니까 그냥 사는 건 문제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자신만의 분명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남은 인생도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여태껏 고수해온 삶의 태도가 그들을 붕괴직전으로 몰고 갔다는 거다. 꼰대가 된 그들은 이것을 깨닫고 있다. 그런데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다. 아니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기껏해야 애써 멀쩡한 척 연기하며 버티거나, 머리통에 총알을 박고 자살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들이 좀비처럼 시시때때로 출몰하니 애초에 훈훈함과는 삼만 광년 떨어져있을 수밖에.

 

이런 생각을 해봤다. 레이먼드 카버가 장편소설을 쓴다면 이런 작품을 쓰지 않을까? 그만큼 <스포츠라이터>는 미국적이다. 부활절, 대도시, 중산층 거주지역의 풍경은 너무 미국적이라 낯설고 또 낯설다. 특히나 뉴저지, 뉴욕, 디트로이트 등 동북부 도시의 봄풍경을 내가 어찌 생생히 떠올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주인공의 상처와 어리석음에 크게 공감하는 순간 ‘미국소설’ <스포츠라이터>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다.
(스타인벡과 피츠제럴드, 셀린저, 필립 로스 등을 언급하며 미국소설 어쩌구저쩌구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이 번쩍-!!!했기에 집어치운다. 이건 내가 오늘 내린 결정 중 가장 현명한 결정인 거 같다.)

 

어리석음에 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스포츠라이터>를 읽으며 느낀 건데, 인물의 어리석음은 독자를 사로잡는 가장 큰 무기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떠올려보면, 주인공들은 대개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에 꼭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고 만다. 그 결과 주인공은 회복불능의 상태가 된다. 파국, 파멸, 파탄, 파경, 파산... 이 모든 것은 어리석은 결정을 한 주인공의 몫이다. 퍼뜩 떠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위대한 개츠비>가 그렇고..., 영화 <레슬러>가 그랬고..., 드라마 <로스트>가 그러하며..., 챈들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어리석은 자에 대한 연민은 분명히 독자와 관객을 사로잡는 비급이었던 것 같다.(적어도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일지라도 말이다.) 더욱 슬픈 것은, 본인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는 점이고, 그들이 대부분 남자라는 거다.(아, 문득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싶다. 어리석음의 종결자로 불릴 만한 인물로 누가 있던가?)

 

리처드 포드는 퓰리처상 수상작가다. 수상작은 <스포츠라이터>의 후속작 <독립기념일>이란다.(<스포츠라이터>는 제목을 ‘부활절’로 달아도 무방한 소설이다.) 제목부터 오지게 미국적이라 정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 읽고 싶다. 편집자님 역자님 들이시여,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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