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레시피 - 레벨 3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이미애 지음, 문구선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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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라는 단어보다 더 피부로 와닿는 우리 말은 한 솥밥을 먹는다는 뜻의 '식구'가 아닐지.
여름 방학을 맞아 바쁜 엄마 아빠 품을 잠시 떠나 시골 외할머니 댁에 내려가서 지내게 된 초등학교 5학년 서현이는, 방학 숙제를 안해도 된다는 것과 예쁜 블라우스 인형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 때문에 내려오긴 했지만 막상 내려오고 나니 할머니의 그 투박하고 거친 말투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골집,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심심한 시골 생활로 만족스럽지 못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매일 매일 할머니께서 만들어주시는 음식으로 차려진 밥상에서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으며 조금씩 할머니와 친하지게 되고, 사먹는 음식이 아닌 손수 만들어주시는 음식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옆에서 지켜보며 할머니와의 사이에 비로소 따뜻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간다.
매콤달달 양념 찜닭에서부터, 주물럭주물럭 감자떡, 약고추장, 추어탕, 상추 시루떡, 오미자편, 약과, 정구지 찌짐, 제물칼국수, 증편에 이르기까지, 실제 레시피가 할머니의 말투 그대로 책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어떤 재료가 몇 그램, 몇 숟가락 식은 아니지만 그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 그려지게 하는 레시피였다. 내게도 처음 보는 음식의 이름도 있었는데 정구지 찌짐의 정구지는 부추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며, 감자떡은 먹기는 많이 먹어보았지만 감자를 가지고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지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오미자편은 본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데 아마 말랑말랑한 우리식 젤리 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 되고, 국수 장국을 따로 만들지 않고 국수 삶은 물을 그대로 국물로 이용한다는 제물칼국수도 처음 들었다. 고디국의 고디를 책 속의 우리 서현이도 '고등어'로 알아듣더니 나도 그것이 '다슬기'를 뜻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상추 시루떡은 그 중에서 제일 해보고 싶은 음식. 떡을 만들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고수레'라는 것도, 어떤 과정으로 한다는 것도 처음 배웠다.
과연 우리 음식을 만들면서 배우는 것은 단순히 그 요리법이 아니라, 기다려서 얻을 수 있다는 것, 그 기다림에 대한 가르침이 아닐까. 지갑에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 돈으로 원하는 음식을 '사'먹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기다린다는 것에서 자꾸 멀어져 간다.  
할머니와 정이 잔뜩 들었지만 방학이 끝나서 서현이는 외할머니께서 혼자 계신 집을 떠나 엄마 아빠가 계신 집으로 돌아오고, 다음 방학이 될 즈음 할머니가 문풍지에 손으로 직접 쓰신 편지와 음식 만드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노트를 전해 받는다.

   
  서현이 니가 내보고 부뚜막 각시라 불러 줘서 참말 고맙대이. 평생 아무 것도 아니었던 촌 할마시가 우리 서현이 덕에 뭔가가 되었는 기라. ... 우리 서현이는 내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요리할 줄 알았으이끼네 진짜로 훌륭한 요리사였는기라....내하고 있어 줘서 고맙대이. 참말 고맙대이. 요리사가 되었으면 좋았을낀데 하면서 내처럼 죽기전에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내가 뭐가 되어서 참 좋았다고 뿌듯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알았재? (203, 204쪽)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읽고 있었다.
실제로 어릴 때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되살려 쓰게 되었다는 저자의 후기가 참 진솔하다. 가슴에 남아 있는 추억을 이렇게 고운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부터 나도 매일 타성에 젖어 밥상을 차리기 보다는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할머니가 편지에 쓰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떠올려 질 것인가.

   
  특별한 맛내기가 어딨겠노? 내 생각엔 그런 게 있다 카면 그거야말로 '정성'이 아니겠나. 음식 만들 때는 이 음식을 먹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기라. 그라면 씻고 썰고 볶고 끓이고 버무리는 기 쪼매 귀찮고 성가셔도 대충 건너뛸 수가 없재. 그기 바로 특별한 맛내기다 아이가. (199쪽)  
   

할머니의 레시피 만큼이나 소박하고 담담하게 쓰여진 따뜻한 책 한권과 만나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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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4-02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렇게 멋진 리뷰를 ^^

hnine 2010-04-02 16:32   좋아요 0 | URL
이 책 순전히 하늘바람님 리뷰 보고 읽게 된 책이랍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려요.

bookJourney 2010-04-0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을 한참 비워내야 하는데, hnine님 리뷰를 보니 다시 책 욕심이 스물스물 생겨요. --;

hnine 2010-04-04 17:20   좋아요 0 | URL
지금 '뢰제의 나라' 리뷰 쓰던 중에 책세상님 댓글을 보았네요.
저처럼 되도록 책 안사고 빌려보는 주의에, 그나마 산 책도 잘 안 쌓아두고 비워내는데 선수임에도 책이 어느새 자리를 못찾아 방바닥에 쌓이기 시작하는걸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책도 도서관에서 빌려다 봤어요.
저야말로 책세상님 서재에 가면 아이가 읽으면 좋을만한 책들이 어찌나 많은지 노트에 적어놓기 바쁘다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