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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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나쁜 피'를 읽고서 이 현수 작가의 '토란'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고 리뷰에 썼던 기억이 있다. 한 대에서 끝나지 않는 여인의 비극적 삶의 퍼레이드 라는 점에서일 것이다. 이번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으면서 그 느낌이 계속되는 것을 보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냥 '느낌'은 아니었나보다. 그때 리뷰의 제목을 '보지 말았어야 할 인생의 비밀'이라고 붙였었는데 이 책의 제목과 어딘지 일맥상통하는 것도 같고.
 
1. 우리가 아는 삶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삶은 아니다.
구걸하는 엄마와 함께 노숙생활을 하는 소녀, 그녀의 미래 역시 엄마의 삶에서 전혀 나아질 것 같지 않으며 ('열세 살'), 가족의 빚을 떠안고 법대생이면서 대리모인 그녀, 그녀의 의뢰인, 그녀의 엄마, ('엄마들'), 어릴 때 엄마로부터 버려지고 아빠 아닌 아빠로부터의 끈 역시 놓아지려하자 그 상상만으로도 깊은 상처를 견뎌낼 엄두를 못내는 여자 ('순애보'), 결혼 후 자궁경부암 선고를 받은 여자의 병수발을 들어주던 엄마가 자궁암말기 판정을 받게 되고, 남편에게 이혼 요구를 하는 그녀에게 이제 더 이상 보낼 무엇이 남았는가 ('환상통'). 어린 것을 안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던 해내야 했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해낸 일은 남자를 죽여서 고깃간의 냉동고에 가둬버린 것 ('오늘처럼 고요히'). 온라인을 통한 세계에 의지하며 사는 그에게 문득 모르는 사람의 손에 애착이 생기게 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손'). 무대에 서서 관객을 기쁘게 하고, 무대에서 내려와서는 외로운 남자들을 위로해주는 무명 여배우의 삶은 또 어떻고 ('막'), 아무리 매일 얼굴을 보는 이웃에게도 좀처럼 보여질 수 없는 사람의 깊은 내면과 상처는 또 어쩌란 말인가 ('하루').
그래, 이런 삶이 여전히 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어. 너는 너의 고민에 묻혀 너를 중심으로만 이 세계를 보고 있지만, 네가 모르는 가운데 존재하는 이런 세상도 있단 말이야,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줄곧 내 자신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2. 그럼에도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
벙어리 흉내를 낼 것을 지시받은 열세 살의 여자 아이가 지하철 계단에서 엄마가 구걸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낡은 옷차림을 제외하면 길에서 보는 내 또래의 아이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데 화장실을 사용한 사람들은 거울 앞에 있는 나를 흘깃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거울 앞에서 표정 바꾸기 놀이를 했다. 착한 어린이 표정, 나쁜 어린이 표정, 불쌍한 어린이, 우는 어린이, 싸가지 없는 어린이, 섹시한 어린이. 씨발, 자꾸 쳐다보지 말라니까! (21,22쪽)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런 거부감은 곧 자신을 따돌리려는 이 세상에 대한 거부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열세 살 소녀도 반짝이 스타킹을 가지고 싶어 했으며 '혹시 신발을 잃어버리면 왕자가 나타날까 (11쪽)'  하는, 막연하지만 엄연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내고 있었다. 대리모 그녀가 시간 있을 때마다 맞추던 퍼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없어진 조각 하나는 불구가 된 미완성의 예고임에도, 그 한조각의 틈새가 숨통처럼 보였다는 것은 틈새처럼 여전히 남아 있는 희망을 의미한다고 보여졌다. '순애보'에 등장하는 꿩은 열세 살 소녀의 반짝이 스타킹, 대리모 여대생의 퍼즐 한 조각과 같은 역할로 삽입되지 않았을까? '오늘처럼 고요히'에서 여자가 자신의 삶과 연관지어 생각했던 것은 남편인지, 아니면 혜경 엄마인지는 아직도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아가야, 일어나, 밥 먹자, 혜경이가 말간 얼굴로 일어났다. 나는 새 내복으로 갈아입혔다.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혜경이는 찬물을 한 대접 마신 뒤에 숟가락을 들었다. 혜경이와 나는 이마를 맞대고 미역국을 마셨다 (162쪽).  
   

작가의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하는 따뜻한 밥상으로써 이 이야기 역시 맺음을 하는데, 어떻게 보면 밥상을 차리는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이 밥상.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생선을 구워 밥상을 차리고, 꿋꿋하게 앉아 끝까지 다 먹어내는 모습은 곧 살아내고 말겠다는 의지로 읽혀서 늘 가슴이 메였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글 중 단연 돋보였던 것은 '손'이었데,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입하고, 온라인으로 여자를 부르고, 온라인으로 나의 시간을 채우며 살아가는 남자가 어느 날 새벽 현관 문 아래 통로로 우유를 집어 넣는 손을 보게 되고, 살아있는, 살아서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의 손은 남자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유발시켰던가.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하드웨어를 온라인을 통해 공급받을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는 실체와의 교감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억울한 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8쪽).  
   

새벽 4시가 좀 넘으면 신문 넣는 소리가 들리고, 이 시각에 나만 홀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정체 모를 그 소리를 반가와했던 나의 오랜 기억이 이 작품을 읽으며 다시 소집되었고, 이 소재로 이런 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 끄덕여지게 했다.

우리는 흔히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말을 한다. 현실 같지 않은 일을 얘기할 때 하는 말이다.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소설 같다는 그것 역시 현실에서 일어나는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우리의 가슴과 머리가 아직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삶들을 통해, 타인의 눈에는 소용 없어 보이고 처절해 보일지 몰라도 끝까지 그 삶을 부둥켜 안고 피 흘리며 걷고 있는 모습은 종교만큼 숭고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곁들여, 얼마나 많은 경우의, 가지 각색의 삶을 보고난 후에야 나는 삶을 조건없이 끌어 안을 수 있게 될까, 삶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소설은 나로 하여금 그런 단계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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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0-04-0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맘이랑 참 비슷한 생각 하셨네요.
이런 삶이 주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겠죠. 삶을 안다고 하기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어떻게 보듬어 안아야 할까요?

hnine 2010-04-02 22:01   좋아요 0 | URL
아, 세실님도 그러셨군요. 읽는 내내 말씀하신대로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랬어요. 우울한 소식들이 많이 들려오는 요즘, 삶의 의욕도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도 꿋꿋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금요일 밤이네요. 이번 주는 지난 주보다 기운이 좀 나셨었는지요?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오늘 편히 주무시고요.

... 2010-04-0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서 "손"을 읽어봐야 겠군요.
잘 읽고 추천하고 갑니다.

hnine 2010-04-03 05:34   좋아요 0 | URL
우유를 배달하는 손은 아니었지만 위에 썼듯이 저도 식구들이 아직 모두 잠자는 조용한 새벽 매일 같은 시각에 엘리베이터가 끽 멈추는 소리, 신문이 현관 밖에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듣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그 단편을 더 흥미있게 읽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브론테님은 어떤 느낌으로 읽으실지 궁금해지네요.

2010-04-03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9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3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4 0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5 0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zydevil 2010-04-06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모든 여인들에 대한 소설이군요. 나인님의 리뷰만 봐도 좋은 이야기들이네요.
읽어봐야 겠네요. 근데 표지그림이 너무 무서워서요...

hnine 2010-04-06 13:09   좋아요 0 | URL
세상의 모든 여인들에 대한 소설. 아, 그래서 더 마음으로 다가왔나봐요.
남자들도 그럴까요? 여자들에게는 소설 속의 여인들의 삶이 그저 남의 얘기로만 보아지지 않는 것 같아요.
표지 그림, 실제로 보면 무섭기보다는 좀 슬퍼보인답니다. 우는 모습을 연상시키거든요.
lazydevil님께서는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실까 궁금하네요.

같은하늘 2010-04-08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구입해 놓고 아직 못보고 있어서 리뷰를 안보려 했는데 결국 보고 말았답니다.^^

hnine 2010-04-08 05:32   좋아요 0 | URL
저도 다른 분들의 리뷰 다 읽어보고서 책 읽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