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의 눈 - Julia's Ey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공포와 스릴러 영화는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면이 있다. 하긴... 안 그런 장르가 있겠냐만은...
이 영화를 심야에서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뒤섞인다. 어둠에 대한 공포와 보이지 않는 인간이 가하는 폭력과 광기에 대한 두려움이 영화 내내 관객을 압박한다.  

언니의 자살에 의문을 품은 줄리아는 언니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찾아가다 보이지 않는 인간에 대한 단서를 잡는다. 결코 죽을 이유가 없는 언니의 자살 뒤에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개입이 있었고 이 인간은 줄리아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의 실명을 유도한다. 방해하는 인물들을 제거하면서 줄리아를 노리는 이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부터 줄리아의 목숨을 건 저항과 탈출...이 어둠의 공포와 어우러져 영화를 지배하는 것이다.  

영화는 악인의 종말로 끝나지만, 영화 종료 뒤 남은 뭔지모를 찜찜함이 있다. 나의 삐딱한 시선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자'라 호명되는 '괴물같은 인간'에 대한 연민에 닿아 있다. 그 연민은 괴물같은 그 살인자에게 붙여진 '보이지 않는 자'라는 호명에 있고 그 호명은 역사상 구체적 인간이 아닌 인간취급을 못받는 '인간이하의 삶'을 감내했던 사람들에게 붙이는 호명이기에 그렇다. 

이런 생각의 끝에는 어쩌면 이 영화는 현 자본주의의 공포를 은유화시킨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줄리아는 현 지배부르주아 계급을 상징하고, 눈은 통치수단 내지 권력을, 보이지 않는 자는 피지배 계급을 상징한다고 하면, 이 영화는 오히려 부르주아의 공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는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일 뿐이다. 지배계급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 없는 듯 통치를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자들의 반격이 시작된다면, 그들이 통치계급의 통치수단인 '눈'을 제거하고 자신이 통치계급의 '눈'이 되어 삶을 인도하겠다고 나선다면 과연 통치계급은 어떻게 할까? 줄리아의 눈은 이렇게 이중적이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도구이자 어둠을 뚫어보는 유력한 수단인 '눈'은 이 영화의 주요한 매개체가 된다. '보이지 않는 자'는 줄리아의 눈을 실명시켜 그녀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하고 줄리아는 눈을 획득하여 자신의 의지와상관없는 삶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시력이 없다는 사실... 어둠이 지배하는 현실은 결국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현 자본주의 상태와 닮아있다. 바로 앞을 바라보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불확실성은 모든 계급주체들을 장님으로 만들었다. 지배층은 지배층대로 대규모 금융위기 이후 체제를 운영하는데 자신감을 잃었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피지배층의 위기는 적대적 저항의 형태로 분출되고 있다. 여기에 지역적 무력충돌은 21세기의 인류사회가 그리 낙관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지배계급의 의식적 불안감을 불러오는데... 그 불안감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다. 불안감의 구체적 징후는 바로 '보이지 않는 자'들의 저항이고 그 저항에 직면한 지배계급의 혼란스러운 내면의 풍경이 바로 시력 상실에 대한 은유로 나온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무시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언제나 같은 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고통을 무시하기로 결단한 '보이지 않는 자'의 심경의 변화가 가져오는 저항이 얼마나 잔인하고 맹목적인지를 보여줘 사실상 피지배계급의 권력획득에 대한 저항이 쓸모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줄리아의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의 눈을 기증한 남편의 존재는 진정한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통속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 사랑이 구한 세상은 결국 줄리아의 세상이고 그 세상이야 말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메시지는 이 영화를 그저 그냥 스릴러로 읽기 보다는 정치적인 메시지로 읽힌다. 조심하라~~ 저항은 시작되었고 저항 속에는 처절한 피의 복수와 지배가 있다는 지배계급의 절규가 들려온다.  

뱀발 : 이런 정치적 해석을 하지 않고서... 실재로 존재함에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의 설정
         은 공포를 유발시키기 위한 억지로 밖에 읽히지 않고, 그 순간 이 영화는 단숨에 3류 싸구려
         공포물로 전락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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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세력 = 빨갱이 = 체제전복자 

이러한 극우적 이념등식은 여전히 유효한가보다. 한나라당에서 방사능 비를 가지고 위기를 과장하는 불순세력은 제압(?)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단다. 방사능 공포가 전 세계를 휘감아도 한반도 남쪽에서 공포에 물드는 순간 불순세력으로 둔갑한다.  

먼나라도 아니고 바로 옆에 있는 나라에서 연일 핵발전소의 붕괴로 인해 난리가 난 상황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민간인 단체에서 측정한 방사능 오염도와 정부에서 측정한 방사능 오염도의 차이가 왜 발생하는지 진지하게 설명해야 할 책임있는 자들이 무조건 전문가의 권위를 빌어 시민들을 협박하는 형세가 좋지 않아 보인다. 항상 그래왔으니 새삼 따질 것도 없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른바 불순세력이라는 것은, 이 정부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이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중 불순세력이 아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소통을 위해 노력이나 경주하고 나서 투덜대는 거라면 이해나 하겠다. 언제나 일방적으로 자신을 말만 하고 따르지 않으면 불순한 세력이 되어 버리니 이거 맘놓고 떠들어대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어디로 팔아 버리신건가 

세종시, 신공항, 과학벨트...까지 정부는 지금까지 자신의 한 말을 뒤엎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경제성과 국익이란 추상적 언사만 남발하고 있을 뿐, 결국 권력을 잡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 불순세력...운운의 심리적 기저에는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 악재를 사전에 입막음 해 보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페어플레이를 해야지 억지춘향식으로 자신을 불리하게 만드는 사람은 몹쓸 사람으로 만들면 되겠는가? 

설사 공포가 과잉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진정하고 합리적으로 설득하라고 권력을 위임한 것이지 입막음하라고 위임한 것이 아니다. 원전과 방사능에 대해 알면 알수록 괴담으로 번져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 무서운건 그게 괴담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이다. 광우병처럼 방사능 오염도 사전 예방의 원칙에 의해서 더욱 더 경각심을 갖도록 하고 피해가 없도록 정부에서 우선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문제이다. 지금처럼 자세한 해설도 없이 익명의 전문가들의 의견이라고 다른 목소리를 불순분자로 매도하는 것은 사회의 수준을 곤두박질 시키는 짓이다.  

나는 정말 가끔 한나라당을 이해해보려고 한다. 그들도 사람일진대... 그럴때마다 정말 사람같지 않은 것들이라고 치부하게 만드는 망언이나 행동을 하신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들의 내공이 지겹다.  

뉴스에서 저런 허접한 짓거리 좀 안보고 고급스런 논쟁을 볼 수는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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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4-0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박 2일 나PD 성대 묘사로 댓글을 달자면..

"없습니다.!"

기대를 할 가치조차 없는 집단이니까요.
 
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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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을 만화로 읽게 될 줄이야...  

버트란트 러셀의 인생을 짚어가면서 그 당시의 주요한 철학자들을 만나보는 행운을 누리게 하는 만화책이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진리에 대한 확실성을 추구했던 수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의 열정과 헌신을 볼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수학에 대한 확실한 토대를 추구했던 러셀과 화이트헤드, 프레게, 무어, 비트겐슈타인, 튜링, 푸앙카레, 괴델 등 당대의 논쟁 속에서 진리의 확고한 토대를 발견하고자 하는 지성을 담아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현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은 이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진리의 굳건한 토대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 그들의 사고와 실험은 결국 자명한 진리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자명함을 찾아 떠난 고행의 결과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마감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례를 떠나기 전과 떠난 후의 결과가 동일해 보일 지라도 그 동일함에는 분명한 차별이 있다. 인간의 발견... 인간이 가진 비합리성과 합리성의 충돌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과 전망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러셀의 말년에 수학자나 논리학자로서의 퐁모보다 철학자로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을 한 운동가로서의 풍모는 그런 기나긴 우회를 통하여 얻은 실천이 아닌가 한다.  

사실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 상 편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그 시대의 풍모와 지적 논쟁에 대한 단편적 이해가 전부일 듯하다. 하지만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철학은 현실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상호 통일된 정서에 대해서 이 책만큼 설득력 있게 다가서기는 힘들 듯 하다.  

철학의 앞날은 있는 것일까? 완벽한 진리를 찾지 못하는 한 철학은 영원할 듯 하다. 그리고 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거대한 인류의 꿈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것이 아닌 현실의 모순을 이해하려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도 길 위에 있을 뿐이다. 결과는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한 철학자의 인생과 그 주변의 학문적 풍경이 보여주는 지적 풍토에 푹 빠져 유한과 무한, 실재와 철학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그럼에도 언제나 철학은 나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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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몸값 1 오늘의 일본문학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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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러니까.... 난 이 책을 지레짐작했다. 워낙 유머스러운 소설을 맛깔나게 써대는 작가인지라 이 소설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튀어'의 매력적인 아니키스트가 등장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까지 했다. 올림픽 개최에 대한 으름짱으로 큰 돈을 벌어 멋지게 외국으로 도망가는 그런 소설이 아닐까....하는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이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오쿠다 히데오식의 시니컬함은 없어지지 않았고 속도감은 여전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의 전개로 한 사회를 입체적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뻔하게 보이는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하는 흡입력도 만족스러웠다.  

소설의 무대는 도쿄 올림픽... 1964년이 배경이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올림픽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일본의 일상이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사실 배경에 확실하게 공감이 가는 부분은 이미 서울 올림픽을 치루느라 우리도 역시 한번은 겪어본 일이기 때문이다. 서울 올림픽을 우리나라가 새롭게 도약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삼았다면, 당시의 도쿄 올림픽도 전후 일본의 새로운 부흥을 확인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올림픽을 인질로 삼아 도전하는 테러리스트가 있다.  

테러리스트라고 하지만 세기가 바뀐 지금의 테러리스트와는 틀리다. 그리고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거나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 반항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일본 동복부지역의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머리하나 뛰어난 이유로 도쿄대 경제학부에 재직하는 대학원생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사망한 것. 원인은 심장마비다. 그 형의 궤적을 따라 올림픽 건설을 위한 현장에서 직접 노동을 수행하면서 그의 인식에 변화가 시작된다.  

전후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의 기틀을 닦아나가던 일본은 60년데 들어서 본격적인 성장을 일구어 낸다. 전쟁이 끝난 후 19년만에 다시 경제대국으로 일어서려는 기틀을 다진 것이다. 물론 전쟁에 대한 사과도 배상도 없다. 전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낸 천황도 건재하다. 수도인 도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을 밑에서 부터 받치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은 점점 비참하다. 생산과 발전에 따라 빈부의 격차는 다시 벌어지기 시작하고 이러한 불편함을 가리는 거대한 상징이 올림픽이었다. 그리고 올림픽은 모든 모순과 갈등을 지우는 마법의 지팡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참한 바닥인생들을 겪으면서 사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지만 순진한 청년이 점점 체제내에서 양같이 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지도자가 된다. 위임받지도 않고 협력하지도 않지만 더 이상 올림픽으로 상징되는 모순된 지배구도를 파괴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된 노동으로 죽어간 형과 같이 노동을 하던 동료들... 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올림픽을 위해서라면 바닥의 인생들이 죽던 다치던 신경쓰지 않는 지배층에 대한 분노가 더해진다.   

한계가 뚜렷함에도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간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민족과 계급,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중첩되어 진행된다. 그때의 일본이 곧 지금의 일본으로 연결된다. 작가가 보기에 일본은 어떤 사회인 것일까? 그리고그가 바라보는 일본 학생운동과 좌익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사실 작가의 기준을 알지 못하겠다.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행위가 작가가 좌익에게 갖는 애증이 아닐까? 

일본 이야기다 보니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나온다. 놀라운 것은 재일 조선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이 소설에 많이 보인다는 것이고, 이것 역시 좌파의 시각에 경도된 작가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한다. 소설 속에서도 재일 조선인에 대한 평가가 나올때나마 주의 깊게 바라보는 내 자신도 결국 민족적 한계를 벗어나진 못하나 보다.  

평창 올림픽 유치가 국민적 이슈가 되고 있다. 지배층이나 언론이 표를 의식해서 국가적 행사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이제 21세기다. 쉽게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영향력은 아직 건재하다. 소설의 주인공의 고향은 이번 원전으로 유명해진 일본 동북지역이다. 가난한 지역이다 보니 원전이 들어선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나도 역시 가난해서 힘든 지역에 원전이 들어서려고 하고 있다. 무엇보다 비핵 평화의 문제에는 계급적 문제가 스며있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자그만 부를 통해 빈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물건을 던지려 한다. 그리고 그 전후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그저 고마워할 뿐이고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믿어버린다.   

그것이 일본사회와 동일하게 움직이는 우리의 모습이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끌려가면서도 저항한번 제대로 못하는 양들의 사회가 우리 사회임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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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정미경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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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고 집어들었다가 정신없이 빠져 들었다. 그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 시대를 견뎌냈던 사람들의 방황이기 때문이며 그 시대를 견뎌내고도 극복하지 못한 자본의 시스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전정보 없이 그냥 '정미경'이란 이름으로 집어든 책이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항상 비릿한 무언가가 있다. 사랑도 생활도 소비도 자본의 비릿함을 견뎌야 하는 현재의 속성이 잘 포착하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신경숙류의 아련함이나 애상과는 다른... 여성특유의 섬세함 속에서 표현되는 비릿함은 그녀의 매력이다.  

80년대의 회고류의 작품들도 많았고, 얼핏 보면 그저그런 회고담으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패배한 자들의 고백이라는 진부하고 지루함을 넘어서는 또 다른 무언가를 던져주고 있다. 그건 변화하고 있는 사회이고 또 변화해 가는 사회이며 그 사회를 겪어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지는 문제이다. 그 과거는 잊어버릴 수도 청산할 수도 없는 과거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항상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는 과거이다. 그 부채감과 새로운 길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이렇게도 형상화 시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한 시절의 아픔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생활에 정착하면서도 웬지 모를 슬픔과 공허함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화려함 속에서 텅비어 있는 무언가를 묻고 있다.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아마 한 걸음도 진전하지 못할 것이다. 무언인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독기와 오기로라도 버텨낸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을 경우엔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쟁이 무서운건 경쟁은 사회를 발전시키기 보다 사회를 정체시키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한 빠른 성장과 발전은 초기 효과이고 전체가 고루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 기득권자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경쟁을 제한하다. 자신이 잃을 수 있는 게임의 룰을 고쳐서 다른 식의 경쟁의 룰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경쟁에 대한 실체가 아닐까? 경쟁을 외치면서 경쟁을 제한하는 것. 이것이 보수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다다른 현실은 과거의 암울한 가난도 아니고 핏발선 눈으로 싸워야 할 대상이 뚜렷한 세상도 아니다. 거리는 붉은 물결이 넘실대는 2002년의 월드컵이었고 광장은 싸움이 아닌 축제의 장으로 넘실거린다. 이런 변화의 세월을 쉽게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이러한 자유속에 보이는 불온한 느낌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었는데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고 오히려 예전이 그리운... 까닭모를 슬픔이 치밀어 오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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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4-03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머큐리님, 정미경을 읽으셨네요! 저도 이 소설 먹먹하게 읽었었어요. 물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녀의 작품은 아니지만요. 정미경의 소설은 언제나 슬픔을 '극한의 슬픔'으로 몰아가기 보다는 서늘하게 그려내는 것 같아요. 전 그런점을 참 좋아해요. 슬픔으로 치닫지 않아서요.

머큐리 2011-04-03 13:29   좋아요 0 | URL
정미경은 다락방님 때문에 알게 되었다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