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는... OO 이다
여기에 들어갈 단어들이 무수하게 지나감에도 그냥 공란으로 남겨둘란다.

사실, 설 연휴를 불평하기에는 나는 너무 하는 일이 없이 먹고, 자고, 또 먹고, 또 자고...
옆지기가 보기에는 배부른 돼지 이하도 이상도 아니니 뭐라 할 말 없음이다.
그럼에도 지겹게 시간이 가는 것은, 내 자의대로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뭐 좀 도와주려고 해도 부모님 눈치에 제대로 도와주기도 힘든 형편을 핑계 삼아
대놓고 뒹굴거리지만 그게 결코 속이 편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중에 내가 나이들고 내 맘대로 차례를 지낸다면야... 지금보다 훨씬 간편하게 할 생각이
있지만... 그건 그때 가봐야 안다는 옆지기의 매몰찬 말에 그저 머리만 긁적인다.
그래도... 이번 연휴에 싸움이나 안한게 어디냐는 생각에 슬쩍 위안을 삼아본다.  

그래도 안가는 지루한 시간에 책이라도 볼라치면... 일하는 사람들 눈치가 뵈여서 주저하게
되지만,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충분하게 볼만한 얇은 책이라면 괜찮을 듯 해서 들고간
책이 'D에게 보내는 편지'다. (편지글치고는 긴 편이지만, 머 활자크기나 부피로 보면야
아주 짧은 이야기감도 안된다...)

예전에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 서문를 읽다가 문득 발견한 구절이 이 편지를 읽게 만들
었다. 보통 자신의 책 서문에 책을 쓴 문제의식과 더불어 책을 발간하기 까지 많이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데.... 다른 서문과는 좀 다르게 의외다 싶은 구절 때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1947년부터 지금까지 내 아내 도린의 영향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지속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 없이는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의 반려자, 사랑하고, 사랑받고 느끼고 살고,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내게 보여준 여자, 도린.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입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성장하고 발전했지요.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나를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자신의 지적 탐구에 도움을 준 싸르트르를 시작으로 여러 사람을 거명하고 있지만, 자신
스스로를 받아들이게 만들어 준 사람은 '도린'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고르의 부인이었던
사람이자 평생의 동지로 곁에서 고르를 지켜준 사람.... 서문의 이 내용으로 참 특이(?)하다고
생각하면서... 이 양반..혹 공처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했었다. --;
그리고 나서 읽은 'D에게 보내는 편지' 첫 구절에 난 쓰러지는 줄 알았다.  

   
   당신은 곧 여든 두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오직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는 평생동안 그녀가 고르에게 끼친 영향과 거기에 대한 감사를 절절하게
이어가고 있다.

어린(?)시절,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러시아 문학은 어쩔 수 없이 대세인 시절이 있었고, 톨스
토이나 도프토예프스키 외에 고리키나 ~스키로 끝나는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저자의
소설을 많이 읽었다. 당시는 87년 체제를 태동시키려는 시절이었고, 연애나 사랑도 부르조아
식이 아닌 혁명적(방점찍고) 낭만에 가득찬....가부장적 질서를 배제한 동지적 사랑을 탐구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을 읽으며
어린시절 나름대로의 사랑과 연애를 꿈꾸던 시절이 불현듯 생각났다.
(아~ 지금의 내 모습은 가부장제와 어쩡쩡하게 타협하면서 그저 살아남은 연애의 찌꺼기가
아닌가? 이건 특히 명절날마다 더욱 더 느껴지는 거 아닌가 말이다.) 

평등하고 동지적인 사랑.... '고등어를 금하노라'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고, 고르와 도린에게서
그 현실성을 들여다본다. 결국 동지적 사랑이란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끌어안고 이해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경지인 것인지....
나 스스로도 그러한 사랑을 이루어나갈 자신은 없다. 그리고 꼭 그러한 사랑만이 올바르다
거나 제대로 된 사랑이라 주장하고 픈 생각도 없다. 다만, 어느 한 시절 영원히 동지로 남아
평생을 함께 한 사랑도 있고, 그 사랑의 느낌이 날 울리고 있다는 사실만을 언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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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2-16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스를 어쩌면 좋아요 ㅎㅎㅎ

머큐리 2010-02-16 12:42   좋아요 0 | URL
예리하긴...어케 수정이 안된다...ㅠㅠ

무해한모리군 2010-02-16 17:23   좋아요 0 | URL
일단 미역국부터 끓이심이ㅎㅎㅎ

비연 2010-02-17 00:05   좋아요 0 | URL
박스..정말 잘 안 고쳐지더라구요..그나저나 D에게 보낸 편지. 집에 있는데,
한번 읽어볼까나 싶은 마음이 드네요~

머큐리 2010-02-17 08:49   좋아요 0 | URL
그쵸...비연님.. ^^

섣달보름 2010-02-1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도 명절에는 괴로우시군요. ㅎㅎ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결국 바꾸지 못하고, 늘 하던 대로 답습하며, 주위 눈치를 살피는 이 어정쩡함은 언제쯤 끝이 날까요?
D에게 보낸 편지. 궁금해 지는데요.


머큐리 2010-02-17 08:50   좋아요 0 | URL
눈치보느라 괴로운거죠...몸이 힘든건 사실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