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로보텀'은 최근의 관심작가였다. 그의 전작인 《내 것이었던 소녀》와 《산산이 부서진 남자》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소설들 속에서 나는 충분히 등장인물이 되었으므로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게 이 책, 《라이프 오어 데스》였는데,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으응?????' 했다. 이 책은 너무나 진부한데, 캐릭터도 너무나 전형적이고 매력이 없으며 이야기 자체도 뻔하기만 한데, 이게 마이클 로보텀의 책이라고? 이건 내가 읽었던 그의 다른 책들에 비해 너무 촌스러운데, 그렇다면 이것은 초기작인가? 초기작은 이렇게 썼지만 그 후엔 훨씬 나은 작품을 쓰게 된걸까? 나름 그런 추측들을 하고서는 좀전에 작품년도를 검색해봤다. 나의 추측이 틀림없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웬걸, 이 책은 그의 가장 최신작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가 2008년 작이고 《내 것이었던 소녀》가 2010년 작인거다. 그런데 《라이프 오어 데스》는 무려 2014년!! 읭??? 아니, 이렇게 근사한 책들을 썼던 작가가 이렇게 진부하기만 한 작품을 썼다고? 당황스럽군.



그러니까 이 책에서 남자주인공 '오디'는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10년형을 받게 되는데, 출소를 하루 앞두고 탈출을 한다. 우와 여기까지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마이클 로보텀이 쓰는 이런 이야기라니, 우후훗- 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오디가 누명을 쓰고 들어갔을 것까지는 추측이 되는데, 그 전에 오디의 삶이 나오는 거다. 문제아인 형을 비롯해서 대학을 중퇴하고 깡패의 운전기사가 되는 과정, 그리고 두둥- 보스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운명적 장난..... 게다가 보스의 여자는 라틴계 여자인데, 물에 젖어 옷이 온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남자주인공 오디와 처음 마주치게 된다. 거기에서 오디의 뒤로 효과음이 들리는 거다. 두두둥~ 그렇게 첫눈에 반해 보스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보스의 여자인 '벨리체'는 또 나름 사연이 있는 여자인데, 당연히 보스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보스가 자신의 기구한 삶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내주었기에 보스의 옆자리에 있게 된 거다. 밤에는 같이 침대에 누워야 하는 가사도우미의 역할로써. 나중엔 보스와 결혼하게 되지만, 어쨌든 오디와 벨리체는(그런데 이름이 벨리체가 맞던가...기억이 가물가물) 그렇게 보스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아, 이러다가 내가 진짜 또 완전 빡친게, 시간이 지나서 어느 파티를 끝낸 밤에 벨리체가 그러는 거다. 야, 오늘은 우리 만날 수 없어, 찾아오지마, 오늘은 내가 보스랑 좀 있어야 해, 라고. 이에 오디는 '밖에서 기다릴게, 나와' 라고 하는데,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거다. 그러면 아 나올 수 없는가보구나, 하고 돌아갔으면 됏을텐데, 이 놈이 ㅠㅠ 벨리체의 침실로 찾아가서는 옷 벗고 드러누워 버리는 거다. 아침이 되어서 벨리체가 빨리 일어나 가라며, 저 창문 니가 열었냐 물어보고 오디가 '아니' 라고 하니, 아 보스가 우리 둘이 누워있는 거 본 것 같다, 이러는 거다. 아니나다를까 보스는 봤고, 그 둘은 그렇게 함께 누워있는 장면을 들켰고, 그래서 두드려맞고... 


하아- 아니 지만 두드려맞으면 몰라, 여자까지 얼굴에 멍이 들었는데, 왜이렇게 진짜 말을 안듣지? 오지 말라고 하면 오지좀 말란 말이야. 못만나겠다고 하면 못만난다고 알아 쳐먹으라고 쫌!!



오디는 똑똑한 남자고 사려 깊은 남자다. 그렇지만 연관되고 싶지 않은 남자다. 오디랑 조금이라도 어떤 관계가 생길라 치면 얻어맞고 죽게 된다. 오디는 당연히 전혀 그럴 생각이 없고 오히려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는 거다. 오디도 이에 너무나 마음 아파하지만(내가 아니었다면 그 사람들은 살았을텐데!), 오디 마음 아픈 거야 마음 아픈 거고, 와, 저런 사람하고 내가 어떻게 같이 다닐 수 있겠나. 캐릭터 너무 별로야... 폭탄을 끌어 안고 다니는 사람이랄까. 그는 그 폭탄을 내게 건네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끌어 안으려고 해도, 자꾸 옆에 있으면 그 폭탄이 터져버리는 거다. 히융- 조근조근 매너있게 그리고 세심하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려고 하지만, 그러면 뭘해, 다 죽어버리는데... 아, 싫어.



보쓰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도망치고 누명 쓰고 감옥 갔다가 탈출하고.. 아 이야기가 너무 뻔해..



《산산이 부서진 남자》, 《내 것이었던 소녀》에서의 남자 주인공 '조 올로클린'은 나름의 사연과 내적 갈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이혼한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 아내와 재결합 하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아내가 바라는 대로 해줄 수가 없는 그 상황에 대한 갈등이 생생해서 나는 같이 아파할 수 있었는데, '오디'는 답답하고 짜증만 나는 거다. 휴.. 

'조 올로클린' 얘기를 더 읽고 싶다...




토요일엔 엄마와 둘이 술을 마셨다. 내가 안주를 만들었다. 참치와 김치를 볶고 그 위에 피자치즈를 잔뜩 뿌린 안주였는데, 좀 짜긴 했지만 호박전도 같이 만든 터라 함께 먹으니 먹을만 했다. 와인을 따라 마시고 나는 티비 다시보기로 나의 패이버릿,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틀어두었다. 어느 나라를 볼까, 하다가 뉴질랜드 편을 보는데, 와, 너무 좋은 거다. 거긴 진짜 자연이 너무 아름답고 웅장해서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나는 그런 자연의 모습에 우와- 하고 감탄하면서는, 그렇지만 오클랜드 도심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클랜드의 시내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가보고 싶고 걸어보고 싶은 거다. 비행기표를 검색해보니 오오, 직항이 .. 있어?? 뭔가 두근두근 하면서...


나는 지구본을 가져와서는 엄마한테 엄마, 뉴질랜드는 섬나라야, 그 나라 하나만 바다에 둥 떠있어- 하고는 지구본을 돌려 콕 짚어주었다. 여기, 여기가 뉴질랜드고, 이런 나라가 바로 위에 또 하나 있는데, 그게 호주야, 하고는 콕 짚어주었다. 여긴 주변이 죄다 바다인거야, 하고는 우리 나라를 콕 짚어서는, 이거봐, 우리는 이렇게 삼 면이 바다잖아, 이 위로는 그냥 대륙이잖아, 그런데 뉴질랜드랑 호주는 안그런거야. 그리고 여기 봐, 엄청 멀지, 이렇게 여기서 슝- 비행기 타고 가야해, 열 시간 넘게 걸려. 그런데 저 화면 봐봐, 너무 아름답지, 하고는 신나서 얘기했다. 나는 이런 시간이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좋다.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다가 지구본을 가져와서는 어디쯤 있나 다시 확인하고 콕 짚어보는 일. 그리고 여기를 가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비행기표를 검색해보는 일. 아 진짜 막 마음이 벌렁벌렁 거리면서 흥분되는 거다.



엄마랑 둘이 외국여행을 해보고 싶은데 엄마가 비행기 오래 타는 걸 싫어하셔서 가까운 데로 가봐야겠다 라고만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아아, 그치만 뉴질랜드를 가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욕심이 생기는 거다. 비행기 표가 비수기에도 백만원이 넘는 곳이니까, 돈이 너무 많이 들텐데, 그래도 이왕 갈거라면 좀 길게, 여유롭게,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을 가진 곳에 가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뉴질랜드 돌아다니려면 차 있어야 할 것 같은데..나는...면허증'만' 있는 사람인데... 



나는 뉴질랜드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 차서는 알라딘 검색창에 뉴질랜드를 넣고 읽을만한 책은 없을까 찾아보았다.





















아아...어쩌면 이렇게 읽어보고 싶은 책이 단 한 권도 없는걸까... 뭔가 근사한 뉴질랜드 여행기를 읽어보고 싶은데, 그래서 읽고는 그대로 뉴질랜드로 떠나고 싶은데, 이 책들 표지나 제목 만으로는 읽고 싶은 마음이 1도 안드는 거다... 하아- 베트남에 가는 게 국수여행 책 읽고 시작됐던 것처럼, 그렇게 뭔가 확- 끌어당기는 게 있다면 좋을텐데, 어쩌면..이래?? 




뉴질랜드에 갔다가 뉴질랜드에 살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살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뉴질랜드의 여름을 보고 느끼고 싶은데 그러려면 이 나라는 겨울이어야 한다. 나는 겨울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는데...역시 회사를 그만두는 게 답인가. 회사 그만두고 엄마 손잡고 뉴질랜드 갔다오고 싶다. 그러면....갔다올 돈은????? 비행기값, 호텔값, 밥값은???? 회사를 다녀야 되는데.... 아아,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진짜 쉽지가 않구나. 그런채로 또 월요일이 되었어.......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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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7-02-20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이 언젠가..
돌고래가 뛰어 노는 곳 바로 옆에 레스토랑이 있다고, 가보고 싶다고 얘기한적이 있는데
거기도 뉴질랜드였죠?! ^^

뉴질랜드가서 소 키울까.. ( ˝)

다락방 2017-02-20 09:46   좋아요 0 | URL
양도 키우고 소도 키우고...나랑 가서 살래? ㅋㅋ
오래전에 뉴질랜드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 본 적 있는데 그 때는 노천 레스토랑에서 랍스타 먹는 거 나왔었지 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완전 기절. 이번 피디는 먹방을 잘 안했어요. 그래서 지금 나는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오클랜드 맛집을 검색해서 사람들의 포스팅을 보고 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박사 2017-02-2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품을 읽고 마이클 로보썸은 시리즈물을 더 잘 쓰네... 싶었습니다.

다락방 2017-02-20 10:26   좋아요 0 | URL
네, 전 진짜 황당하더라고요... 아니, 조 올로클린을 만든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썼지?? 하고요. ㅎㅎ

mira 2017-02-2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막장이야기 같아서요 아니 사랑하는 자기아이도 아니고 그것때문에 탈옥이라니 어처구니 없는 스토리 ㅠㅠ

다락방 2017-02-20 11:14   좋아요 0 | URL
남주를 너무 환상적인 캐릭터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약속한 바를 꼭 지키는‘ 남성의 이미지를 주기 위해 그랬던 게 아닌가 싶고요. 그래서 책은 지루해져버렸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ㅠㅠ

transient-guest 2017-02-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엔 참 많은 음식들이 어울립니다 ㅎ 좋은 시간 가지셨음 듯 ㅎㅎㅎ

다락방 2017-02-20 11:17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음식은 음식대로 좋고 와인은 와인대로 좋아서인 것 같아요. 으흐흐흐흐.
아 또 술마시고 싶어요. 술 너무 좋아요 엉엉 ㅠㅠ

단발머리 2017-02-2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에서 자꾸 폭탄터지는 남친이라...
그래도 넘 좋으면 어쩔수 없지만 전 별로일것 같아요.ㅋㅋ
뉴질랜드는 진짜 청정지역이라 근래의 미세먼지 정도면 정말 여행갔다가 아... 살고 싶다, 그런 생각들것 같아요. 실제로 가족여행 갔다가 이민갔다는 사람 책이야기도 들은것 같구요. ㅎㅎㅎ

다락방 2017-02-20 11:42   좋아요 0 | URL
안녕, 단발머리님?

폭탄 터져서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죽어요, 사람들이..어휴.. 저런 남친이라면 진짜 따로 떨어져 사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듯요. 이놈의 남자들은 왜이렇게 안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지들 마음대로 해.. 안된다고 했을 때 안되는구나 하고 뒤로 물러서야 되는데 들어먹질 않아요. 아우 짜증나..

뉴질랜드 너무 가보고 싶어요. 여행 포스팅 막 찾아보는데 음, 차 없이 시내만 왔다갔다 하는 거 가능할 것 같고요. 아아, 저 언제 갈 수 있을까요, 단발머리님? 제가 뉴질랜드 가게 되면 엽서 보낼게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ㅋㅋ)

moonnight 2017-02-2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된다고 해도 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랑해서 그런다고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남자.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치솟네요-_-;

저도 뉴질랜드 못 가봤어요. 가본 사람들 말로는 과연, 폐가 막 깨끗해지는 느낌이라고^^

다락방 2017-02-21 08:32   좋아요 0 | URL
폐가 막 깨끗해지는 느낌이라니.. 아아 정말 너무나 가고싶습니다, 문나잇님. 뉴질랜드의 여름을 제가 경험해보고 싶어요. 뉴질랜드의 여름 안에 제가 있어보고 싶습니다! 엉엉 ㅠㅠ

비연 2017-02-2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로보썸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슴다 ㅜㅜ
<산산이 부서진 남자> 보관함에 넣었다가 올해 초 싹 지울 때 함께 증발한 듯...
일단 이것부터 읽어야겠어요. 괜찮겠죠?
뉴질랜드.. 뉴질랜드... 아직 못 가봤네요. 저도 엄마랑 여행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는 편찮으신 후 좀 자중하시느라... 스페인 생각했다가 표 없어서 다른 데로 ... 으헝.

다락방 2017-02-21 22:14   좋아요 0 | URL
네 비연님. 산산이 부서진 남자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내 것이었던 소녀까지 읽으시고 라이프 오어 데스는 패쓰하세요 ㅋㅋㅋ 그래도 됩니다 ㅋㅋㅋㅋㅋ

엄마랑 같이 가고 싶긴한데 비행시간이 길어서 엄마가 괜찮으실지... 그리고 일단 저는 여름 휴가 말고는 시간을 낼 수가 없는데 뉴질랜드 여름은 우리의 겨울이래요. 하아- 역시 퇴사가 답이에요. 불끈!

비연님, 스페인 표 없으면 포르투갈은 어떠세요??
 
라이프 오어 데스 스토리콜렉터 50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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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인물 진부한 스토리.
역시 한 작가에게서 늘 좋은 이야기만 나올 순 없는 건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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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껴안았는데, 왜? - 2021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도서관 어린이인권도서 목록 추천, 2021 경기도학교도서관사서협의회 추천 바람그림책 40
이현혜 지음, 이효실 그림 / 천개의바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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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서적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성적 대상화'란 말이 쉽게 와닿질 않았다. 일상적으로 늘 겪고 있는, 경험하고 듣고 보는 일이면서도 그 용어 자체는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 더 쉽게 쓰여진, 더 잘 읽히는 페미니즘 서적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성적 대상화, 가시화 등의 용어들을 처음 접했을 때, 책을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아 페미니즘은 어려운 거구나' 라고 자칫 관심을 닫아 버릴까봐 조금 더 쉽게 쓰여진 책을 원했던 거다. 훅- 다가설 수 있도록. 나처럼 생각했던 사람이 많았는지 이제는 쉽게 쓰여진 페미니즘 책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전에, 그러니까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페미니즘이란 용어 자체의 설명도 어려울 때, 그때는 어떤 책이 좋을까? 



어릴 적에 누구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을 견뎌야했던 적이 많을 거다. 수시로 치마를 들추고 머리를 잡아당기고 끌어안고 뽀뽀하고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기고... 내 경우엔 지금 언급한 모든 일들을 수차례 당했는데, 사실 나는 가만있는 성향의 사람이기 보다는 해결해보고자 하는 타입이었다. 선생님께 일러바친 적도 있었는데(선생님, 쟤가 저 껴안아요!), 그때 선생님은 내게 '너 좋아해서 그러는건데 그런걸로 이르지마라' 고 했더랬다. 여자 선생님인데도 그랬다. 그래서 그 뒤로는 선생님이 안계신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 숨었던 적도 있더랬다. 종치면 나가야지, 하고.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치마를 들출 때도 마찬가지. 선생님한테 일러봤자 해결되는 건 없었다. 오히려 소문만 무성해진다. 쟤가 쟤를 좋아한대요~ 하고. 다른 반 남자아이가 쉬는 시간에 찾아와 공개적으로 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가기도 했다. 그 때 내가 얼마나 얼굴이 시뻘개졌는지는 어휴- 말해 다 무엇해. 한 번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를 하는 틈을 타 내 앞자리 남자아이가 내 다리를 만지면서 니 속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수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지마 개새끼야!



하고 소리를 질렀더랬다. 휴- 이런 일화야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선생님에게 일러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게 폭력이었다. 크- 나는 나를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을 때렸다. 나를 안을라 치면 주먹으로 때리고 또 안으려고 다가오면 필통을 들고 때렸다. 그냥 막 때렸다. 내 옆에 오지 못하게 저리가! 이러면서 맨 손을 때로는 무기를 휘둘렀다. 체육 시간에 한 번은 몸이 아파 교실에 혼자 남아 있었는데, 혼자서 칠판에 낙서를 하고 있었는데 같은 반 남자아이가 뭔가를 가지러 교실에 들어왔다가 내게 다가왔다. 아무도 없을 때 안아보자며 내게 다가오길래, 나는 거침없이 녀석의 뺨을 때렸다. 꺼져, 라고 하면서. 언제였더라, 수학여행 때는 내가 자고 있는 여학생들 방에 다른 반 남자아이들이 떼로 몰려왔다. 밤이었고 우리는 불을 켰는데, 찾아온 남자아이들 중에 대장은 일전에 우리 반에 와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놈이었다. 여자아이들이 꺅 소리를 지르며 애들에게 나가라고 하는데도 애들은 히죽거리면서 방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자다 깨서는 그 애들을 향해 말했다.



야, 죽고 싶지 않으면 나가라.



그러자 남자 아이들은 '나가자' 이러면서 다같이 나갔다. 나는 하도 폭력을 휘둘러서, 당시에 깡패로 소문이 나있었다. 깡패로 소문나기 전까지의 나는, 전교부회장 선거에 후보로 나갔었고(떨어졌지만), 신문과 티비에 나온 적도 있었으며, 공부잘하고 예쁘기로(응?) 소문이 났었더랬다. 그런데 깡패...로 바뀌어 있었다. 그나마 6학년이 되어서는 남자아이들 때리는 걸 멈출 수 있었는데, 그때는 남자아이들이 안는다는 식으로 내게 접근하지 않았었다. 


내게 다가오는 남자아이들을 때리면서 나는 진짜 피곤했다. 어린 나이에 피곤했어 ㅠㅠ 아이들과 맞서 싸우면서 피곤한 게 아니라, 그냥 그 상황 자체가 피곤했던 것 같다. 나는 싸워서 피곤했지만, 나처럼 남자아이들을 때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또 그 아이대로 피곤했을 것 같다. 싫은데 어쩔 수가 없으니까. 이게 좋아해서, 예뻐서라고 하니까 다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 자신만의 소극적 저항을 하면서 얼마나 피곤했을까.




일전에 조카가 아래 위로 까만 색을 입었는데 너무 잘 어울려서 예쁘다, 귀엽다 했더니 조카는 그렇게 입기 싫다고 했다. 아빠가 자꾸 놀린다는 거였다. 나는 조카의 그 말을 듣고 '아빠가 타미 귀여워서 그러는거야' 라고 했는데, 그때 조카가 그랬다.


이모, 귀여우면 귀엽다고 해야지 놀리면 어떡해!



아!! 내가 지금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거지? 무심결에 내가 어른들로부터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말을 해버렸어! 문제 해결엔 아무것도 도움이 안되는 말을 내가 했어! 그 때 진짜 내가 무서웠다. 나는 얼른 아이에게 사과했다. 아 미안해 타미야. 타미 말이 맞아. 귀여우면 귀엽다고 해야지 놀리면 안되는거야, 타미 아빠가 잘못한거네, 라고. 이 일이 내게 오래 남았다.





'좋아해서' 여자아이를 끌어 안던 남자아이들은 자라서 '좋아하니까' 성희롱을 하는 남자 어른이 된다. 여자들이 싫다고 해도 그것을 '에이 좋으면서 뭘그래' 라고 받아들인다던가, '이렇게 좋아하는 데 내 마음 왜 몰라줘' 라고 하면서 강제적으로 스킨십을 시도한다. 진짜 씨발스러운 경운데, 이건 헤어지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하나씩은 갖고 있는 찌질한 전남친들의 경우, '연락하지마' 라고 하는데도 계속 연락하고 찾아오고를 반복하지 않나. 새벽 두 시에 '자니?' 라는 것도 싫고, 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차단을 걸어도 계속 다른 식의 접근을 시도하는 그 행위는 폭력이다. '너를 잊지 못해서' 라고 상대에게 그 이유를 덮어 씌우지만, 그건 실제로 자기 자신을 위한 거다. 너를 잊지 못해서 '나는' 너를 다시 가져야겠어, 다시 내 옆에 두어야겠어, 라는 이유. 그래놓고 '너를' 잊지 못한다고,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고 징징댄다면, 그건 상대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다. '안돼' 라고 하면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상대를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서를 떠나,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너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라고 한다면,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안돼 라는 말은 안된다는 거다. 




나는 아무리 친한 사람,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과도 거리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늘 그렇게 주장해왔다. 물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야 매번 든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밀착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상대의 마음이 아니다. 그렇기에 매번, 좋아하면 할수록,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면 그럴수록, 더 조심하게 된다. '조심하지좀 마' 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조심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건 아마도 내 스스로가 내 경계선 안으로 침범하려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가 허락한 적 없는데 밀고 들어오는 거 진짜 너무 싫고 소름 돋는다. 나한테 밀착하려는 것도 싫고, 내가 싫다고 하는데도 밀고 들어오려는 거 싫고, 나를 열 번 찍는 것도 싫어한다. 그럴수록 정나미가 떨어진다. 이 사람들(대체적으로 남자사람들)은, 왜 내가 싫다는데도 이렇게 밀고 들어오지? 싫다고 하면 '너는 왜이렇게 자신을 압박하냐' 등의 개소리를 하기도 하더라. 좀 더 마음을 열어야 되지 않겠냐 등등.... 내 마음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열겠다는데 지들이 뭔상관? 나는 이 남자들이 다들 경계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쳐둔 경계선을 멋대로 무시하려 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얼마전에 글 썼던 것처럼, 상대의 허락받지 않고 상대 얼굴 사진을 전시하는 일 따위, 그런 건 상대가 쳐둔 경계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이며 상대의 몸을 상대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들에게 '경계'라는 게 무엇인지 처음부터 교육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들 모두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 하고 싶다.




'준수'는 '지아'가 너무 좋아서 껴안았는데 지아가 싫어한다. 준수로서는 좋아서 끌어안았는데 왜 지아가 싫어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선생님은 경계선에 대해 설명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나라를 구분해주는 선이 있고, 인도와 차도처럼 차와 사람 사이에도 선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허락없이 넘어서는 안되며, 그럴 경우 다칠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 친구의 장난감을 내 마음대로 갖고 놀지 않아야 하고 친구의 과자를 내멋대로 먹어서도 안된다. 친구의 공간에 들어갈 때, 친구의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을 때, 우리는 반드시 친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다. 몸도 마찬가지. 지아의 몸은 지아의 것이다. 그런데 지아의 몸을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끌어안아서는 안된다. 지아에게 묻지 않고서는 지아에게 무엇도 해서는 안된다. 친구를 놀리는 것도 마찬가지. 상대가 '싫어, 하지마' 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해도 된다'고 허락하는 게 아니다. '안돼'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나쁜 짓은 나쁜 짓이다. 이 경계선에 대해 이해하게 된 준수는 지아에게 사과의 편지를 쓴다. 네 몸은 네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어, 라고.



우리에게 어릴 적이 필요했던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의 모든 찌질한 전남친들, 잘 헤어지지 못하는 옛 연인들과 또 세상에 모든 '성적대상화에 익숙해진' 성인남성들에게 부족했던 게 바로 이런 게 아니었나 싶다. 내 몸은 내 것이듯이, 다른 사람의 몸 역시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것을 상대의 허락도 없이 품평하고 대상화 시켜서는 안된다. 이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우리는 어릴 적에 교육받지 못했던 것같다. '좋아해서 그래'라니, 이 말은 얼마나 많은 성희롱과 성폭력을 잠재하고 있는가. 더이상 '아이스케키~' 가, 끌어안는 일이, '좋아서 그래'로 덮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자기 몸의 주인은 자기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알고 자랐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렇게 말해주고 있고,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도 필요하지만 쥐뿔도 모르고 마음대로 경계를 넘으려 하는 성인들에게도 필요한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싫다고 했으면 싫은 거다.

안된다고 했으면 안되는 거다.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내 의사에 반해 네 마음대로 행동하면 안되는 거다. 내 몸의 주인은 나니까. 나의 주인은 나니까. 당신은 내 경계선을 내 허락없이 넘어서도, 지워서도 안되는 거다. 이 단순하고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살자. 




조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래서 이 책은 조카에게 선물할 것이다.

조카야, 누가 네 경계선을 넘으려 하면 안된다고 말해주고, 너 역시 다른 사람의 경계선에 들어가고 싶다면 반드시 노크를 하도록 해. 

이 말을 내 대신 이 책이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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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7-02-2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

이 책 보관함에 넣고, 선물할 리스트에도 넣을게요.

참 좋은 글이다. 다락방! 땡큐!!

다락방 2017-02-20 10:19   좋아요 0 | URL
히힛. 좋다고 말해주니 기분이가 참 좋으네요. ㅎㅎ
고마워요!
:)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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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중인데)

.......나 이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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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2-1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아, 다락방님 입에서 이런 말도 나올 수 있군요!^^ 왓~~ 신기 신기!!!

다락방 2017-02-16 21:02   좋아요 1 | URL
저 끝까지 못읽겠어요, 그장소님. 어떡하죠? ㅋㅋㅋㅋㅋ ㅠㅠ

[그장소] 2017-02-16 22:04   좋아요 0 | URL
대체 얼마나 시끄럽길래...하하핫~ 누군가의 고독이 말그대로 농도 짙은 독인 모양입니다~^^

수평선 2017-02-16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저랑 똑같은 생각을!!!

다락방 2017-02-17 09:40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하도 좋다고 하길래 읽어보려 한건데 저는 ??????????????????????????? 이렇게 되었어요. ㅎㅎ

hellas 2017-02-17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인지 알것만 같은 그 기분ㅋㅋㅋㅋㅋ 힘내세요:)

다락방 2017-02-17 09:40   좋아요 0 | URL
힘내려고 어제 더 읽기를 시도했지만 끝에 조금 남겨두고 아아, 이걸 계속 읽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글읽기연습인가...했습니다. Orz

고양이라디오 2023-07-06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다락방님 100자평에 위안을 얻습니다. 지금 반쯤 읽었는데 재미가 없네요. 계속 읽어도 똑같을 거 같네요ㅠ

다락방 2023-07-06 18:2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전 이게 뭔소리여~ 이러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
 
혼자를 기르는 법 1
김정연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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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특히나 자신이 기르는 햄스터를 보며 ‘어떻게 하면 너의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부분은 내내 기억에 남는다. 물론 주인공이 가끔 쌍욕하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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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2-15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하면 너의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을까?‘
사랑할때 그런 생각 많이 했던것 같아요..

다락방 2017-02-15 16:0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나와같다면님! 실제로 사랑을 하게 되면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인 것 같고요. 상대로 인해 나의 마음이 충족되고 또 나로 인해 상대의 시간들이 행복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은 쑥 올라가잖아요. 사랑을 한다면 자존감도 높아지고 또 삶의 질도 높아지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사랑하면서 그런 생각 했어요. 우리는 서로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사람이구나, 하는 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