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멀어진' 관계들이 존재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그 멀어진 사람들은 멀어지기 이전에 나와 '연인'이기도 했고 또 '친구' 이기도 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그 때처럼 친근해지지 않은 상황이고, 그리고 그중에 어떤 관계들은 서로를 미워하며 끝내기도 했다. 미워하며 끝냈다 해도 그 전에 연인 혹은 친구였다면, 우리 사이에는 분명 친밀함이 있었고 서로를 애정하는 마음도 역시 있었다. 우리가 한 때 연인이거나 혹은 친구였다는 것은, 그런 친밀한 관계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밀한 관계였을 때 우리는, 서로 자주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일상의 소소한 얘기들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얘기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이 가진 상처에 대해서도 얘기했을 것이다. 내 상처, 내 죄책감, 나의 아픈 과거, 나의 부끄러운 과거, 나의 수치등을 비롯한 나의 비밀들.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그 때 그 당시에 '그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그 말들을 상대에게 전하면서 우리는 그 말들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우리가 설사 그 이후에 서로 악감정만을 남긴채 서로 등을 지고 각자 갈 곳으로 가게 되었다 할지라도, 서로에 대해 미움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때, 친밀한 사이었을 때 나누었던 은밀한 이야기들을,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에 바깥으로 보내 상대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는 것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그리고 지키고 있는 룰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지금은 미워하고 꼴도 보기 싫고 아휴, 그 때 왜 그 사람과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오래 유지했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내게 말한 은밀한 것들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는다.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도 않고, 또한 그 불행을 하물며 '내'가 가져오고 싶지도 않다. 그 때, 그 당시에, 그 사람이 말한 그 비밀들은, 우리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예의로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말한 건 그 때의 나에게만 가능했던 것이니까.


나는 이것이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한다. 헤어졌다 해서 그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의 비밀을 말하고 다니지 말것. 게다가 그것을 그 사람의 불행에 이용하려고 하지 말 것.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상대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결국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어디가서 내가 그 사람에게만 말했던, 속삭였던, 다정했던 그 이야기들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것은 '그사람'이기에 믿는 것이고, 우리 사이에 '그 때'가 있기에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그런데 ,

영화 [시에라 연애 대작전]의 '시에라'는 그렇지 못했다. 친한 친구가 자신에게만 얘기했던 비밀, 상처를, 그 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용한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자신이 눈앞에서 본 장면이 바로 진실 그 자체라고 믿으며, 그녀의 비밀-상처였다-을 친구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이용했다.



'시에라'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사랑도 처음 느껴보았고, 동성의 친구도 처음 사귀어보았다. 그런 그녀가 겪게 되는 숱한 감정들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처음이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 감정들을 대하는데 서툴렀을 것이다. 먼훗날 시에라가 어른이 되어서 '내가 그 때 그런 잘못을 했었지' 라고 말한다면, 이미 어른인 나 역시 '아아 나도 그런 부끄러운 과거가 있지' 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미 그녀가 한 잘못을 본 이상, 그리고 그 잘못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선을 넘어버리는' 행동인 이상, 아무리 그녀가 영화속 주인공이라 해도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다. 물론,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에게 '너 그러는 건 진짜 아니었어' 라고 말하고 그녀를 용서하지만. 그래서 그들이 그녀의 친구이고 나는 아닌거겠지만.


이 영화는 엄청 구리다. 정말 구리다. 모두 보지 않기를 권할 정도로 구리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제목에서 혹은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 [시라노]를 원작으로 한 것인데, 아아, 인물의 대결 구도가 어찌 이따위란 말인가.


우리의 주인공 '시에라'는 '뚱뚱하고 못생기고 인기 없지만 학교 성적은 좋고 착한 학생' 이다. 한편 그녀가 미워하다가 친구가 되는 '베로니카'는 '엄청 예쁘고 몸매도 좋지만 싸가지없고 멍청한 학생'으로 나온다. 하아- 인물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누어놓은 것도 이미 불편한데,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어떤가. '시에라'가 사랑하게 되는 남자 주인공 '제이미'는 '똑똑하고 착하고 운동도 잘하고 잘생겼으면서 찌질이 친구들과 놀아주는, 다른 남자랑은 다른 학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제이미가 올려쳐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아 너무 캐릭터 설정 개망인 영화인 것이다... 


뚱뚱하고 못생긴 시에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역시 '쭉빵에 미녀인 베로니카'를 좋아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앞에 시에라 자신으로서 나서지를 못하고, 집에 가서는 엄마에게 울면서 얘기한다. '엄마는 항상 자존감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지만, 십대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건지 짐작이나 하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모든 과목에 에이를 받는 학생이지만 학교에서는 친구도, 인기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학생이다. 그래서 울고야 만다. 그러면 이 장면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역시 탈코가 답이다!'


코르셋을 벗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조이고 있는 외모 코르셋을 벗어야 한다. 꾸밈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여자로 살아가면서 존재의미를 가장 크게 부여하는 게 결코 다른 사람들로 평가받는 외모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애초에 이렇게 태어났는데, 그리고 이렇게 되었는데, 그 사실만으로 존재감이 없고 놀림감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정해놓은 미의 기준, 그대로 따르는 것을 우리가 거부해야 지금의 십대 학생들 역시 거기에서 자유로워지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그렇게 똑똑하고 착한 시에라 였지만,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 역시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이성을 잃고 '결코 해서는 안될 짓'을 그녀가 하고야 만다. 이 일은 아마 그녀 평생 따라다니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추악한 과거'가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 다른 예쁜 여자랑 사랑할 거라는 추측... 그로 인한 해서는 안될짓에 대한 결심... 아아, 왜 남자를 좋아해가지고... 갑자기 멍청해지느냐 이 말이다. 



나는 사랑을 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에게도 더 좋은 모습을 찾아주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랑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자신을 진창속으로 넣고 말았다. 나는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성장을 보길 바라지만, 그녀는 망가지고야 만다. 물론 모든 성장에는 망가지는 과정이 필수이긴 하다. 망가지고 깨지고 진창으로 빠져봐야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에라 역시 그 일을 겪고 나서 성장하긴 했다. '베로니카' 역시도 그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픔을 겪었어야 했고. 그렇지만 영화 끝까지 '제이미'가 뭔가 '다른 남자랑 달라서' 시에라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에 끝까지 구린 영화였다.


이 영화를 나보다 먼저 보기 시작한 친구에게 나는 이 영화 다 봤는데 너무 구리다, 고 얘기했더니, 그 친구는 불편해서 중간까지만 보다 말았다고 했다. 아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멍청한 영화...





[엔젤 아이즈]는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2001년 영화이다. 2001년 영화인 건 포스터 찾다가 알게된 건데.... '정체 불명의 남성과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는' 영화라고 줄거리를 보고 끌리듯이 본건데..일단 '정체불명'인 거 너무 싫고... 게다가 남자 주인공이... 너무 지저분하다 ㅠㅠ 그래서 도무지 공감이 안돼.. 제니퍼 로페즈여, 왜 이 남자를 사랑하나요? 아, 너무 양치 안하게 생겼고, 옷도 생전 안빨아 입는 것 같고...얼굴에서 각질 떨어질 것 같고..눈도 너무 맹하고... 안 씻는 남자의 전형같은 인물이다. 안 씻는 남자(어쩌면 잘 씻는데 안씻게 생긴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정체를 모르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다니..나에게는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 같은데, 그러고보면 나는 진짜로 사랑을 '머리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머리'가 사랑을 한다. 머리가... 착하고 매너가 좋고 나에게 들이대지만, 정체를 모르겠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안돼. 역시 내 사랑은 머리가 한다..


아무튼 '연애'쪽으로 선택하고 본 영화라면 이 영화는 공감도 전혀 안되고 주인공들 연기도 별로고 해서 재미도 없지만, 굉장히 중요한 메세지가 반복되어 보여진다.


여주인공 '샤론'은 시카고의 경찰관이다. 그녀는 어릴 적에 가정폭력 속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걸 보면서 자란 것. 어느 날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는데, 그 뒤에 그녀에게 돌아온 건 가족들의 따돌림이었다. '니가 가족 망신을 시켰다'는 것. 그런 부모가 그 때 헤어졌는데 재결합을 하고 심지어 재결합식을 한다고 그녀의 오빠가 그녀에게 알려준다. 그녀는 그곳에 참석해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엄마를 찾아가는데,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고 아빠는 '최근 몇년간은 안그랬다'고 말한다. 아아..이해할 수 없는 엄마여.. 샤론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한 거라고 엄마에게도 말하지만, 엄마는 샤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재결합식에 가야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이번에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온다. 자신의 오빠가 집안 기물을 파손하고 아내를 때린 폭력을 저지른 것. 이에 그녀는 달려가서 오빠에게 '오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아버지랑 똑같다, 한번만 더 언니에게 손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버럭하는데, 그녀의 오빠는 그녀에게 큰소리치고, 오빠의 아내는 그녀에게 그러지말라고 화를 낸다. 그래서 샤론은 언니에게 말한다.


"언니를 때린 건 내가 아니에요!"


엄마를 때린 건 아빠였고 언니를 때린 건 오빠였다. 샤론이 때린 게 아니다. 샤론이 그 폭력을 저지른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모두들 샤론에게 화를 낸다. 마치 이 가족의 불행은 샤론 때문이라는 듯이. 그녀는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는데,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자신이 옳은 일을 했는데, 가족들로부터 멀어진다.


재결합식에 참석해 사이가 껄끄러워진 아빠에게 '내가 오기를 바랐냐, 가기를 바라냐, 나를 아직 사랑하냐' 묻지만, 아빠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딸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샤론은 옳은 일을 했다. 옳은 일을 했는데 가족들에게 배척당한다. 그런 그녀는 반복해서 외친다.


'내 잘못이 아니야'

'널 때린 건 내가 아니야!' 라고.


이 불행을 가져온 건, 폭력을 신고한 '샤론'이 한 게 아니다. 아내를 때린 아빠와 오빠가 한 일이다. 가족들 모두가 그녀를 내쳐도,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멀어진다. 





연휴중에 본 영화중에 가장 좋았던 영화, 그래서 다시 보는 영화는 이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와- 이 영화는 너무 좋아서, 못 본 사람들이 없게 해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짝사랑만 했던 학생 '라라 진'이 자신의 짝사랑했던 남자들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들이 모두 주인공에게 가 닿는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라라 진 앞에 나타나 '미안하지만 너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다'고 말해 그녀를 당혹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으으,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그들에게 말해보지만, 그녀의 어릴 적 친구 '젠'과 사귀었던 남자 '피터'와는 각자의 이유로 가짜로 사귀기로 한다. 피터는 젠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므로 질투를 유발하고 싶어서, 라라 진은 조쉬를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그들은 가짜 연인이 되기로 한다. 이 가짜 연애에는 유치하게도 계약서가 존재하게 되는데, 첫번째 항목은 '키스 금지'였다. 이에 피터는 말도 안된다며, 너에게 터치 하지 않는데 우리가 연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묻자, 아아, 우리의 라라 진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좋아, 내 바지 뒷주머니에 네 손을 넣는 건 허락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빵터졌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피터는 그게 뭐냐고 궁시렁 거리고, 라라 진은 그것이 80년대 유명한 영화의 첫장면이라 말해준다. 그렇게 그들은 꼭 같이 볼 영화의 목록도 만들어가고, 학교에 데려다주게 되고,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된다.


'저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데 도대체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가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생각했던 거였는데, 아아..... 라라 진이여...



그들은 서로가 가진 상처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상황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서로에게 이야기를 하고 또 들어주며서 '너 참 잘 들어준다'고 말한다. 그렇게 아주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는 거다. 그 과정에서 피터는 라라 진에게 왜 연애를 하지 않았냐고 묻는데, 아아, 나는 이 때의 라라 진이 너무 좋다.


"나는 연애와 사랑에 대해서라면, 읽는 것도 재밌고 쓰는 것도 재밌고 상상하는 것도 재밌는데, 그렇지만 실제로 일어나면..."

"무서워?"

"응."

"왜? 왜 무서워?"

"내 인생에 사람들을 들여놓을수록 떠나는 사람도 많을 거 아냐."


아.... 나는 이 영화, 십대들의 유치한 사랑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던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 이 장면에서도 그랬다. 잃을까봐 두려워 인생에 넣지 않으려고 하려는 라라진이 너무 이해되어서. 라라 진의 경우에는 어릴 적에 엄마를 잃은 경험이 있어서 그렇다지만, 나의 경우엔 그런 게 아닌데도 나 역시 두려움이 있었다. 사랑을 하면 잃게 될까봐,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연애를 하지 말자고 늘상 생각해 왔던 거다. 라라 진 역시 그게 두렵지만 '우리 사이는 가짜니까 괜찮아'라고 말해서, 그 앞에서 잘 들어주고 있던 피터에게 상처를 주었듯이, 어쩌면 나의 이런 마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겠어'가 역시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나는 몇 명에게 상처 입혔을까... 


내가 그랬다. 내가. 내가 잃는 게 두려워서, 멀어지는 게 두려워서, 사랑을 하면 필연적으로 끝이 있을 거란 생각에,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코 사귀지 않겠다고 늘상 다짐해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적당한 사이가 되어, 결코 멀어지지 않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았던 거다. 그런데 시작도 해보지 않고 끝을 두려워하면 어떡하냐고 나를 설득하는 바람에 내가 당신이랑 사귀었잖아... 그 말에 쏠랑 넘어갔어, 내가... 


그리고 당신을 잃었지..


내가 그래서 엉엉 소리내어 울던 그 날을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혼자 걷다가, '내가 안한다고 했잖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사귀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고 엉엉 울었던 거다. 마침 그 때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산이기에 가능했다. 아주 오래전, 삼순이가 삼식이랑 이별하고 한라산에 오르며 울고 중얼거렸던 것처럼, 나 역시 일자산을 오르면서, 그러게 내가 안한다 그랬는데 왜 하게 만들어서 이렇게 아프게 해, 하고 엉엉 울면서 말했던 것이다. 아 나여... 이리로 와라, 나여...토닥토닥... 



내가 안한다고 했잖아 이 빵꾸똥꾸야. 안했으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다정한 사이가 되었을 거 아니야. 지금은 이게 뭐야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잖아, 이 머저리야.. ㅜㅜ



라라 진은 대학에 진학하느라 집에서 따로 살게 된 언니에게 자신의 가짜 연애를 말하지 못한다. 언니와의 통화를 피한다. 나중에 언니가 집에 와서는, '왜 내 전화를 피하느냐, 나랑 얘기도 하기 싫으냐'고 했을 때, 그 때 라라 진은 언니에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말 해도 언니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 졸라 눈물터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도 매우 만족스런 영화인데, 가족 얘기로도 너무나 좋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게다가 친구로도...이 장면 보다가 또 울어버렸어 ㅠㅠㅠㅠㅠㅠㅠㅠ



피터는 이 가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젠'이 돌아오길 바라서였다. 대학생과 사귀는 젠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길 바라서, 라라 진과 가짜 연애를 하는 중에도 젠 에게 끌려다녔다. 젠은 대학생과 사귀고 있었지만, '대학생 오빠가 내 말을 잘 안들어줘, 나는 니가 필요해'라고 하면서 자신의 곁에서 피터가 멀어지지 않게 붙잡으려고 한다. 이런 관계를 이제 진심이 생겨버린 라라 진은 당연히 질투하게 된다. 피터 역시 진심이 생겨버려 라라 진과 조쉬 사이를 질투하게 되고.



'젠'은 피터가 자신이 돌아오길 바라는 게 아니라 이제 진짜로 라라 진을 좋아하게 됐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다. 화가 나서, 라라 진에게 거짓말을 한다. '어젯밤 피터랑 같이 있었다'고. 

나는 이 마음도... 이해가 안된다. 나랑 사귀지 않는다면 너랑도 사귀지 못해, 라는 이 마음.. 이 마음은 뭘까. 왜 굳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는 '니가 좋아하는 남자가 나를 좋아하지롱~' 이러는 걸까? 이 마음은..대체 어떤 마음일까. 대학생이 자신의 말을 잘 안들어주고 피터가 잘 들어줘서 피터를 붙잡고 있는 거라면, 젠은, 피터와 계속 사귀어야 했다. 대학생과 사귀는 게 아니라. 대학생도 사귀면서 피터도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젠은 대학생으로부터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뜻한다. 그렇다면 젠은 자신을 충족시켜줄 상대를 찾아, 자신 역시 상대를 충족시켜줘야 했다. 그러나, 모든 연애와 이별은 아픔이 수반되고, 그 아픔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젠 역시 이번에 실패하고 실수했지만, 아마 다음 연애에서는 다른 것들을 보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연애에 있어서는 '상대가 내 말을 잘 들어주는가'를 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연애를 업그레이드 시켜 나가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업그레이드 된 상대를 만나고 싶다면, 나 역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하니까. 



피터랑 라라 진이 헤어지자, 라라 진의 아빠는 라라 진에게 말한다.


"너가 피터랑 같이 있을 때 되게 행복해 보였어"


라고.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연애를 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야 할 말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너 행복해 보여' 라는 말. 내가 누군가와 사귀면서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그것이 바깥으로 보이고, 그래서 나를 아끼는 주변사람들로부터 '너 되게 행복해 보여' 라는 말을 듣는다는 게, 연애가 응당 가져와야 할 것이 아닌가. 많이 웃고 많이 즐거워하는 것.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연애라는 것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서로의 성장을 돕는 게 아니던가. 



일전에 본 영화 [메리 키스마스]에서 여자는 자신의 약혼자에게 이별을 고하며 '나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와 매일 깊어지는 사랑을 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나는 사랑과 연애는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터와 라라진은 그걸 했었다. 내 관심 밖의 영화를 그 사람 때문에 보게 되고, 그렇게 함께할 대화 소재를 더 찾아내는 것, 혹시 이 대화가 상대의 아픈 점을 건드린 건 아닐까, 조심스러워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상대는 아니야, 네 마음 이해해, 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 혹여라도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되는 말이나 행동을 했다면 거침없이 그에 대해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에 멀리까지 움직이는 것.


그리고 상대를 기다리는 것. 



'그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친구의 말에,

'정말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고 라라 진이 묻는다.





라라 진은, 피터가 여전히 젠을 기다리고 젠을 좋아할거라고 생각하고 의심하는데, 이 때 피터가 하는 말이 너무 좋다.


"가끔 성적 좋은 애들이 진짜 멍청하더라"


ㅋㅋㅋㅋㅋ 아 너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피터 너무 좋다. 스키 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라라 진이랑 같이 앉고 싶어서 집에서 간식도 싸왔다고 했다. 라라 진이 좋아하는 요구르트를 사오려고 멀리 있는 한국 마켓까지 갔다왔다고 말한다. 아아, 사랑 뭘까. 사랑 너무 좋은 것이야. 사랑은 멀리로도 움직이게 하고, 꼼짝없이 기다리게도 하는 것이야.



피터는 내내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라 진은, 내내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피터에게로 간다. 







얼마전 단발머리님의 페이퍼로 이 책의 원작 있다는 걸 알게됐다. (왜때문인지 번역서는 정가인하라고 지금 현재 5,400원에 판매중이다. 만세!!)
















영화는 연애 이야기로도, 가족 이야기로도, 성장 드라마로도 무척 좋다. 영화를 보고 나서 계속 영화가 생각난다. 피터와 대화하는 라라 진이, 아빠랑 대화하는 라라 진이, 언니랑 대화하는 라라 진이, 동생이랑 대화하는 라라 진이. 그리고 연애 소설 열심히 읽는 라라 진이. 

좋은 영화다. 그리고 좋은 연애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상대를 이겨내고 그들은 서로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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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9-2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일 동안 나를 행복하게 했던 라라진과 피터의 이야기를 다락방님에게서 듣는 새벽이라니...
난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하트뿅뿅!!!

이 시리즈는 3권인데 1권의 내용만 영화로 만들어진듯해요.
저희집은 넷플릭스를 안 보는데,
다락방님이 이 영화 못 본 사람 없게 빌고 싶은 심정이시라니 한달 무료 신청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피터 나오는 부분만 골라 읽었지만서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저는 3권까지 다 읽었습니다!!
아이 러브 피터! 아이 러브 피터 카빈스키!

다락방 2018-09-27 08:08   좋아요 0 | URL
단발님, 저는 이 책을 읽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중이에요. 이미 영화가 제게 완벽했는데 책까지 읽어야 할까 싶으면서, 또 3권이라 하시니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고...
피터 너무 좋아요! 피터도 젠을 겪으면서 그리고 라라 진과 사귀면서 성장하는 것 같고요, 라라 진 역시 자신의 두려움을 피터를 통해 이겨내고 있어요. 너무 좋은 이야기에요.
게다가 라라 진의 가족 이야기도 너무 좋아요. 언니랑 투닥대는 막내 동생도 너무 좋고요, 동생에게 자신이 필요 없을까봐 겁내면서 동생을 어떻게든 도우려 하는 큰 언니 마고도 너무 좋고요! 아빠는 어떻고요! ‘엄마가 돌아가시고난 후 내가 너희들에게 너무 기댔지‘라고 대화를 시도하는데, 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아주 다정한 아빠였어요. 이 가족의 이야기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정말 좋은 이야기였어요, 단발머리님.
이 이야기를 단발머리님과 공유할 수 있다니 행복합니다.
아아, 우리는 트와일라잇도 잭리처도 공유하다가 이제는 라라 진도 공유하는 것입니다!! 꺅 >.<

무해한모리군 2018-09-27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사랑했던 메모메모 꼭 봐야지.

다락방 2018-09-27 13:36   좋아요 0 | URL
아주 재미있고 좋은 영화였어요, 모리님. 추천합니다!!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불행은 너무 힘이 세다. 낙관적 희망은 언제나 그앞에서 무력하게 패배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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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거 아니야.
















일전에 유연석 주연의 영화 《그날의 분위기》를 보고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 유연석은, 기차의 옆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여자에게 '나는 오늘 그쪽이랑 잘겁니다'라고 말한다. 미친 개소리를 씨부린건데, 이 장면에서 어떤 남자들이 '야, 유연석 정도면 여자들도 자겠지'라고 생각한다는 걸 보고는 기가 찼다. 잘생겼기 때문에 저런 발언이 허용될 것이고 여자들도 섹스를 허락할 것이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그리고 저 자리에서 '미친놈아 웃기지마' 라고 내가 대답한다면, 나는 '처음 만난 남자와 자지 않는 조신한 여자'같은 게 되는걸까?



당연히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가 만나, 그 만난 첫 날 섹스를 할 수 있다. 나 역시 만난 첫날 섹스를 한 적도 있다. 그 날 그 남자랑 하고 싶어서 그랬다. 처음 만난 날 섹스를 하자는 상대의 말에 나도 너무 하고 싶어서 갈등을 한 적도 있다. 할까, 말까? 오늘 내가 이 남자랑 섹스를 하면 나는 이 남자랑 어떤 관계가 될까? 망설이다 고개를 저은 적도 있다. 나를 포함한 여자들도 처음본 사람과 당연히 섹스할 수 있고, 섹스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상대의 제안에 응하거나 혹은 내가 제안했을 때는, 상대를 그 날 처음 본거라 하더라도 얼마만큼은 '괜찮은'사람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상대가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유연석이 그랬던것처럼,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갑자기 '나는 오늘 너랑 잘겁니다' 하면, 내가 걔를 뭘 믿고 '오케바리, 나도 오늘 섹스 땡겨, 고고씽!!' 하겠는가? 어디서 저런 생각을 하지? 미쳤나? 상식 같은 거 1도 없나?



그리고 마리 루티의 책에서, '여자들은 하룻밤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멍청한 연구를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연구자는 여자들의 '삶'을 1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갑자기 모르는 남자가 다가와서 '너 몇 번 눈에 띄더라, 오늘 나랑 잘래?' 이러면, '오 네 눈에 띄었다니 기뻐. 그래 자자' 하는 여자가 어딨냐. 그 남자가 강간범일지 살인범일지 어떻게 알고. 내가 마실 물에 약을 타서 납치를 할지 불법촬영을 할지 어떻게 알고... 어떻게 저런 실험을 해서 여자들이 '아니'를 말했다고, '여자들은 첫만남 섹스를 안좋아해' 라고 결론을 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너무 멍청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무슨 데이트앱에서 설문조사 하니, 여자들은 자신이 만나게 될 상대가 강간살인범일까봐 가장 무섭다고 했고 남자들은 상대가 뚱뚱한 여자일까봐 가장 무섭다고 했다. 와...진짜 남자들 인생 편하게 사는구나..뚱뚱한 여자 만나는 게 가장 무섭다니... 아무튼,


나와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고, 스토리도 없고, 대화로 알아가는 과정도 없이, 심지어 나는 본 적도 없는데 나를 여러번 봤다는 스토커 같은 새끼랑 내가 어떻게 자냐...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그런데 여기에 안잤더니 여자는 갑자기 남자보다 성욕 없는 사람 되어버리고.......



여자가 처음 본 남자와 섹스하지 않는 건, 섹스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에 따른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에휴.....



엊그제부터 매일, '오늘 책을 사자', '오늘 사자' 이러면서 지금까지 미뤄왔다. 미루다보니, 장바구니 목록이 자꾸 달라진다. 도대체 나는 어떤 것들을 정해야 하는가. 북마크도 살거라서 오만원이상 구입하면 잉천점 마일리지가 생겨...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까...























《성폭력을 다시 쓴다》는 이미 읽었고 가지고 있고 밑줄도 박박 그어져 있다. 그런데 내가 가진 책이 구판으로 너무 오래된거라... 2018년 개정판이라는 책으로 새로 꽂아 놔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야하지 않는가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순결한 피해자'라는 것에 나 역시 갇혀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분, 이 책 읽으세요.


《비바, 제인》은, '개브리얼 제빈'의 책이다. 《섬에 있는 서점》과《마가렛 타운》을 읽어본 나로서는, 비바 제인 역시 읽어볼만하지 않을까 싶다.


《불온한 검은 피》는 내가 '허연' 시인의 <오십 미터>라는 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다른 시들을 읽고 싶어졌다.


오십 미터를 옮겨 놓으면서 이 페이퍼를 마치기로 하겠다. (어쩐지 숭고한 마지막...)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너머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 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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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 진화심리학이 퍼뜨리는 젠더 불평등
마리 루티 지음, 김명주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어떤 말을 써도 나는 마리 루티가 하는 말을 반복할 뿐일 것 같다. 이 책 읽으면서 앞으로 마리 루티의 책은 다 읽을거라고, 리베카 솔닛과 정희진 책처럼 다 내 책장에 꽂아둘거라고 결심에 또 결심을 했다. 진화심리학의 모순과 견고한 성차별 앞에 완전 성난 어조가 이 책 내내 유지되는데, 나는 그런 감정이 이 똑똑한 책을 통해 전해지는 것도 좋았다.


화성남자 금성여자라면, 그냥 남자들은 화성가서 살고 여자들은 금성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킁킁.








남성 학자들은 자신들끼리 논쟁은 안하는지 주로 대중을 상대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를 망라한 ‘성과학 이론‘을 주장하는데 이런 표현은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혀서 "머리에서 불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솔직히 저들이 ‘지식인‘인가 싶을 정도다. (추천사, 정희진, p.9-10)

나는 진화심리학자들이 학계에서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비전문가인 일반 독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이 분야를 알면 알수록 놀라움도 커졌다.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가장 나쁜 성 고정관념들의 과학적 타당성을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이 학문의 주된 목적처럼 보였다. 이 학문은 전반적으로 뻔한 성 고정관념들에 기대고 있는 분야였다. 남성은 공격적이고 여성은 보살핀다. 남성은 독립적이고 여성은 관계중심적이다. 남성은 공간을 갈구하고 여성은 친밀함을 갈구한다. 남성은 생산하고 여성은 생식한다. 남성은 재미를 보려 하고 여성은 애정 표현을 좋아한다. 남성은 전봇대와도 섹스하려는 반면 여성은 조신하고 성욕이 별로 없다. 남성은 여성의 젊음, 아름다움, 연약함에 끌리지만, 여성은 남성의 권력, 지위, 돈에 끌린다. 남성은 유전자에 바람기가 새겨져 있고, 여성은 정절이 새겨져 있다. 남성은 포르노에 흥분하지만 여성은 미세한 설렘에 흥분하기 때문이 긴 구애-꽃, 대화, 비싼 저녁, 멋진 이벤트-가 필요하다.(밑에 계속)

높은 자리에 있는 남자 사장님이 어린 여비서와 자는 동안, 속이 문드러진 그의 아내는 현명하게도 그것을 모른 척 하는 세계. 문제는, 이것이 덜 계몽한 시대의 남녀 관계를 비판하기 위해 설정된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과학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p.16-17)

여성에 대해 다윈이 했던 말 가운데 압권은, 여성은 성욕이 거의 없는 천사 같은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현대 진화심리학은 이것을 여성들이 타고나기를 성적으로 소극적인 존재라는 개념으로 해석했다. 여성의 성에 대한 다윈의 평가에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이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진화심리학자들이 시인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대개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논리의 왜곡을 통해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즉, 다윈의 당대의 남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해도, 여성에 대한 그의 평결은 여전히 옳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도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싶을 정도로 이러한 평결에 비판적 거리를 두지 않는다. (p.18-19)

‘과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때 편리한 점은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비과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진짜 과학과 조금도 닮은 점이 없을 때조차 그렇게 할 수 있다. (p.26)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쾌한 생각조차 박해받지 않고 말할 자유가 있다. 그러니 남성의 공격성과 여성의 조신함을 기본 축으로 하는 성 문화를 예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단 이러한 예찬이 과학적으로 정당하다는 말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 (p.35)

한 과학 이론이 "수많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아마 문제가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이론일 것"이라고 러프가든은 지적한다. (p.58)

진화심리학자들이 한목소리로 여성은 조신하게 타고난다고 되풀이 하는 것은 여성이 조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님을 우리더러 믿으라는 것이다. 나는 속지 않는다. 나를 냉소주의자라고 부른다 해도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타고나기를‘ 조신하다는 증거가 거의 없고, 따라서 이 주장은 처음부터 이념적 조작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그 주장을 입증하는 데 쓰인 과학적 ‘방법‘은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사실처럼 들리게 하는 것이다. 이념을 세뇌하는 방식이 정확히 이것이다. 우리가 어떤 말을 자주 들을수록 그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처음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처럼 보이던 것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믿음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 믿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잊고,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여성의 조신함이라는 수사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p.83)

"많은 남성 과학자들이 여성들은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인지와 선택이 불가능한 존재인 것처럼 썼다" (밀러의 말 재인용, p.87)

과학자의 성별에 많은 것이 달려 있는 과학 이론은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 물론 남성 과학자와 여성 과학자는 초점이 약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구자 개인이 어떤 사람인지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과학 지식의 생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남성 과학자와 여성 과학자가 상호 배타적인 가설에 이른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성 과학자들은 여성들이 성적으로 소극적이라고 말하는 반면 여성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실은 여성 과학자들이 "내부자의 시선으로 본 여성의 심리"를 남성 과학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 신호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여성이 똑같은 심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분야가 ‘내부자‘의 시선에 의존하는 과학이라는 가정에서 나온다. (p.89)

여성의 욕구에 대한 장에서 버스(욕망의 진화)는 자신의 연구에서 "상호 끌림 또는 사랑"은 여성에게 2.87점, 남성에서 2.81점을 받아 남녀 모두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자질로 밝혀졌음을 시인한다(이 연구에서 3.0은 ‘없어서는 안 되는 자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남녀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또한 버스는 조사 대상에 포함된 37개국 가운데 32개국에서 "배우자감의 열세 가지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중 하나로 남성과 여성 모두 친절함을 꼽았다"고 시인한다. 하지만 버스는 같은 장의 관련 절을 마무리하면서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과 친절을 요구하는 것은, 자식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원을 확보하는 중요한 적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단정 짓는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남성과 여성이 사랑과 친절을 똑같이 가치 있게 여긴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들에서 어떻게 이러한 자질들이 여성에게 특히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을까? (p.102)

신뢰성이라는 자질에서도, 버스는 37개의 문화 가운데 21개 문화에서 남서오가 여성이 똑같은 선호를 보이고, 그리고 37개국 평균을 보면 여성들이 2.69, 남성들이 2.50점으로 이 자질을 남녀가 비슷하게 중요하게 꼽는다고 밝힌다. ‘정서적 안정 또는 성숙함‘의 경우, (모든 문화의 평균을 냈을 때) 여성들은 2.68점을 주고 남성들은 2.47점을 준다. 하지만 그 단락을 결론짓는 문장은 이렇다. "사실상 모든 문화에서 여성은 이 자질에 대단히 높은 가치를 둔다." 많은 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이 그 자질을 거의 똑같이 평가한다고 인정해놓고, 동시에 그 자질을 가치 있게 여기는 쪽은 ("모든 문화에서")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순이다. 버스는 자신의 책을 읽는 비전문가 독자들에게 이런 식의 왜곡된 논리를 주입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제시한 모든 사례에서 그는 남성과 여성이 배우자에게 선호하는 자질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음을 시인해놓고 갑자기 말을 바꾸어 특히 여성이 그 자질을 가치 있게 여기며 그들은 진화적 이유로 그렇게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p.102-103)

나는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 이런 종류의 성급하고 부주의한 추론에 화가 난다. 버스는 열여덟 가지 변인을 조사한 연구에서 여성들이 배우자에게 바라는 자질들 가운데 교육정도와 지적 능력을 5위로 꼽았음을 강조한다. 그는 남성이 그 자질을 6위로 꼽았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37개 문화 가운데 27개 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이 지적 능력을 똑같이 높게 평가했음을 시인해놓고, 결론에서는 "우리 조상들의 사회에서 지적 능력이 높은 배우자를 선호한 여성들은 자기 자신과 자식들을 위한 사회적, 물질적, 경제적 자원을 홥고하는 데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현대 여성들은 모든 문화에 걸쳐 이러한 선호를 보인다"고 말한다. 표본의 거의 4분의 3에서 남성과 여성이 이 자질을 똑같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식의 특정한 성에 초점을 맞추는 논증("모든 문화에 걸친"‘ 여성에 대한 논증)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여성이 지적 능력이 높은 배우자를 원치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버스 본인의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많은 곳에서 남성 역시 그러한 배우자를 원한다. (p.103)

전반적으로 버스가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성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할 때조차 필사적으로 성차별화된 결과를 생산하려는 망상이 엿보인다. (p.103)

어떤 행동이 여러 문화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그것이 생물학적 본성임이 자동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버스의 저격수 중 한 명인 행동심리학자 린다 캐포라엘Linda Caporael의 명쾌한 지적에 따르면, "진화한 성차이를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 기반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성차이들과 구분할 방법은 없다." 남성과 여성은 "똑같은 선호를"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사회 구조가 성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동감한다. 그리고 나는 생물학적 힘을 문화적, 사회 역사적 힘과 분리할 수 없을 때 생물학적 본성을 내세우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화적, 사회역사적 조건화의 경우와 달리 불변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본성도 진화하지만, 진화는 한 세대 내에 뭔가를 바꿀 만큼 빠르게 일어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에,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유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차이가 사람의 한평생 동안에는 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p.114)

버스는 마치 순결과 정절이 동일한 개념이라도 되는 듯 두 가지 문제를 융합한다. 사실 그는 순결-사전 성경험이 없는 것-이 결혼 이후의 정절을 예측하는 변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논리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신앙심이 특별한 사람이라면 모를까)아무도 결혼할 때까지 성생활을 미루지 않는 현대 서구 사회의 성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어떤 남성은 특정한 여성과 결혼하기 전에는 상당히 자유로운 성생활을 했어도, 결혼하고 나면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여성은 한 남자와 처음 만난 날 동침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녀가 문란해서가 아니라-그 여성은 이날까지 수년 동안 한 트럭분의 남성들을 거절했을지도 모른다-그녀를 진정으로 흥분시키는 남성이 마침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사례에서 그녀가 ‘순결‘하지 않은 것은 앞으로의 부정을 미리 귀띔하는 징후라고 생각한다면 상황을 완전히 오판하는 것이다. (p.120-121)

인간의 성적 표현이 변화무쌍한 것이 이토록 명백한데도 진화심리학이 그 모범 답안을 여태 개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못 놀랍다. 사실 모범 답안과 인간의 성 현실 사이의 괴리를 해결할 방법은 경험적 증거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밖에는 없다. 피임이 보편화되면서, 많은 사람이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 없이 섹스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무시해야 한다. 물론, 생식이 목적이 아닌 섹스에 눈을 흘기는 사회들이 여전히 있지만, 이유는 늘 종교적 또는 문화적인 것이다. 생식이 목적이 아닌 섹스를 ‘자연적‘ 이유로, 즉 사회역사적 문제와 무관한 이유로 꺼리는 사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많은 사회가 성-특히 여성의 성-에 제약을 가하는 데 그토록 열을 올리는 것은 인간의 성욕이 생식의 요구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p.145)

미첼은 두 개의 시내가 소용돌이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주문한다. "그 물줄기들이 만나기 전에는 각각을 분리해서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두 물줄기가 만난 뒤에는 그 안의 물방울들이 서로 섞인다. 이때부터는 소용돌이에서 물 한 컵을 떠서 각각의 물줄기에서 온 물방울들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성과 양육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p.149)

문화는 생물학적 기원을 갖지만, 일단 생기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생물학에서 분리하기는 불가능하다. 문화는 진화의 경로를 결정하는 환경의 일부가 되었다. (p.150)

밀러가 인간의 성행동을 로맨틱 코미디로 보자고 제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명하기 위한 ㅏㅇ의성뿐 아니라, 새로운 성적 관계를 맺을 때마다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 각기 다르게 행동한다 …. 구애할 때 우리는 자기 생가겡 매력적일 것으로 여겨지는 배역 속으로 들어간다." (p.154)

밀러의 주장처럼, 어느 시점에 약간의 이타심이 배우자로서 매력적인 형질이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면, 요즘 사회의 평등주의적 사고방식이 번식 적응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밀러는 이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 같다. 그는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악몽에서 벗어난 것은 유전적 진화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변화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잠시 진화론의 사고방식을 채택한다면, 나는 오늘날 평등주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 남자가 정기적으로 섹스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라고 주장할 것이다. (p.159)

현대의 남성과 여성들이 평등주의적 역할 모델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이것이 그들이 현실에서 남녀관계를 경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이 그들이 경험하고 싶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와 텔레비전의 판타지 요소는 현대 관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공정하고, 품위 있고, 정서적으로 열린 관계를 원한다. (p.160)

나는 대부분의 독자보다 바람피우는 남자들-그리고 바람피우는 여성들-의 심정을 잘 이해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렇다고 용서 운운하며 오버하지는 말자. 한 남자가 아내를 두고 바람피우면 그것은 그 남자 잘못이다. (p.218)

라이언과 제타는 이와 관련한 맥락에서, 1960년대에 멜라네시아의 한 섬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던 인류학자 윌리엄 데이븐포트William Davenport의 연구 결과를 만족스러운 어조로 보고한다. 이 섬사람들은 성적 고민이 별로 없었고, 모든 여성이 오르가슴을 충분히 느낀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파트너가 오르가슴을 한 번 느낄 때마다 여러 번의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보고했다. 데이븐포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면 남편들이 아내에게 흥미를 잃고 더 젊은 여자를 취하는데, 그 섬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섬의 아내들은 남편의 정부들을 지위 상징물로 간주했고, 남편의 혼외 섹스에 전혀 질투심을 보이지 않았다.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섹스 하기 시작할 때 그 아내들의 오르가슴을 잘 느끼는 몸은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p.219)

나는 10년 동안 한 여성과 결혼 생활을 한 남성이 다양한 성경험을 찾아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단, 이 남성과 1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여성에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자. 여성이 남성보다 욕구를 행동에 덜 옮긴다고 해서 욕구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러한 욕구에 대한 사회적 금지가 여성에게 더 강력하다는 뜻일 뿐이다. (p.220)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실제로는 당신의 성장에 장애가 될 때, 그것은 잔혹한 낙관주의와 관계가 있다. -로랜 벌랜트 Lauren Berlant 재인용 p.231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 결정이 ‘선택‘인 줄 안다. 하지만 생물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인생을 꾸려가는 가장 합당하고 가치 있는 방식이 결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복잡한 문화적 조건화 기제의 결과다. 그리고 내가 이미 강조했듯이 결혼하라는 설득은, 비교적 예측 가능하고 비교적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인구 집단을 생산하는 엄청나게 효과적인 수단이다. 간단히 말해, 결혼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생활을 덜 관습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는 사람들보다 매일 아침(결근하거나 지각하지 않고)출근할 가능성이 높다. (p.242)

우리의 욕망은 사회적 조건화에 처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식민화될 수는 없다. 실제로 예로부터 욕망에 가해졌던 수많은 사회적 제약들-특히 여성의 욕망에 대한 제약드-은 그러한 욕망을 원천 봉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증명할 뿐이다. 욕망을 포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참는 만큼 불만이 생긴다. 그리고 키프니스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불만족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대로는 비판적인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강한 충동, 일시적 욕망, 새로운 생각으로 발전한다.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 이런 견지에서 욕망의 불만족은, 인생에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다는 자각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그러한 "다른 것"을 떠올리면, 습관적인 삶의 기준에 반발하기 시작한다. (p.269)

젠더 프로파일링은 단지 생기를 앗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얻어 가기를 바라는 것을 딱 하나만 고른다면, 그것은 젠더 프로파일링이 관계를 다루는 폭력적인 방식임을 아는 것이다. 우선 무엇이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만드는가에 시선을 고정할수록, 우리는 사랑한다고 고백한 상대방을 포함한 타인들의 특이성을 볼 수 없게 된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타인들이 품고 있는 특이한 의심, 욕망, 고난, 불안, 불안정, 혼란, 갈망을 덮어버리고, 그럼으로써 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어렵게 만든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남성과 여성을 파넹 박힌 틀에 끼워 맞추기 때문에, 우리는 좁은 시야를 통해 사람들을 판단하려는 유혹에 빠지고, 그 결과 어떤 한 사람이 남성 또는 여성 외의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천 가지 이상의 방식을 놓치게 된다. (p.283-284)

물론 집단적인 성 고정관념들을 빈틈없이 내재화함으로써 이러한 고정관념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조차 우리가 고정관념에 머문다면,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러한 고정관념을 포착한다면, 관계는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작은 통찰을 한 가지 제공할 때마다 무수히 많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고정관념이다. 그것은 고정관념이 조건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정관념에 의존하면 할수록, 우리의 관계는 얄팍한 수준에 머물게 된다.
나는 서로 존중하는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으며 값진 인생을 영위하려는 복잡한 일에, 판에 박힌 성 고정관념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p.284)

이분법적 사고가 폭력저깅 ㄴ것은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 중간 지대를 모두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특이하ㅗㄱ 비교가 불가능한 존재를 짓밟기 위해, 사람들을 두 개의 작은 상자에 깔끔하게 분리해 넣으려고 한다. 그리고 잘 맞지 않거나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을 무정하게 배제해, 부적절한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런 식의 사고가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을까? 이분법이 인생의 복잡한 문제들에 명료한 해답을 제공한다는 생각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이러한 사고의 억압적인 잠류를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젠더 이분법의 경우,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여길수록, 그들은 더 불평등해진다. (p.286)

관계의 윤리학이란 어떤 부분은 영원히 얽힌 채로, 질퍽한 채로,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p.289)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사랑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는 항상 내 이해 능력 밖에 있기 때문에-그리고 확실히 내 통제 밖에 있기 때문에- 정서적 투자의 안전을 보증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재앙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설계의 비극적인 흠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진정한 탐험으로, 진정한 발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숙한‘ 사랑은 연애에서 환상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냉철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현실을 겨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것은 관계 맺기라는 양가성의 땅으로 용기 있게 들어가는 문제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상대방을 다 알지 못하고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변화의 여지가 생긴다.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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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9-20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서 아주 후련했던 기억들이, 다락방님 페이퍼 읽으니 솔솔 돌아오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특히 이 문단....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쾌한 생각조차 박해받지 않고 말할 자유가 있다. 그러니 남성의 공격성과 여성의 조신함을 기본 축으로 하는 성 문화를 예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단 이러한 예찬이 과학적으로 정당하다는 말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 (p.35)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다만 그게 과학적이라는 말만은 하지 말아 달라.
나도 일정 정도 내 ‘주관‘에 휘둘린다는 점을 인정한다.
너도 그렇다는 걸 인정해라.
여자인 너의 의견 말고, 남자인 내 의견은 ‘객관적‘이라고 ‘과학적‘이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다락방 2018-09-20 14:04   좋아요 0 | URL
저도 아주 재미있고 유익하게 그리고 속시원하게 잘 읽었어요.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포스트잇은 또 얼마나 많이 붙였다고요!!

마리 루티의 이 책을 읽는데 다른 책 [하버드 사랑학 수업]도 떠오르더라고요. 문화, 사랑, 젠더 등에 관해서 정말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이해하는 학자구나 싶었어요. 이 책 에서는 진화심리학 때문에 빡쳐한 게 막 너무 느껴져서 너무 좋았어요! 빡쳐서 내가 다 반박해주마!! 하고 화르르 불타오른 느낌이에요. ㅎㅎ

여기 말고 또 밑줄 그은 부분 있는데, 그건 잠시 후에 페이퍼로 쓸 예정이에요. 근데 너무 졸려서 페이퍼를 쓸 수 있을지..

아무튼 마리 루티 만세에요! 저 하버드 사랑학 수업 중고로 팔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시 사야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책장에 마리 루티, 리베카 솔닛, 정희진은 반드시 꽂아두는 걸로!!

카알벨루치 2018-09-2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리 루티가 마틴 루터로 첨에 보였다는 ㅋㅋㅋ

다락방 2018-09-20 16:4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18-09-20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다락방 2018-09-20 18:38   좋아요 1 | URL
인용문만 잔뜩인 이 글 말씀이십니까!! ㅎㅎ 좋은 책입니다, 공장쟝님. 읽어보세요! :)
 
친환경 애견 배변봉투 개똥이


지난 주에 만난 친구1, 친구2는 모두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남동생네 회사에서 만든 <친환경 생분해 다용도 비닐봉투>에 대해 얘기하니, 고양이 변처리에 비닐이 꼭 필요하므로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겠다는 말을 그 친구들로부터 들었다. 어? 고양이는 모래위에 응아 하고... 그거 변기에 버리는 거 아니었어? 고양이랑 살지 않는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이게 모래를 어떤 모래를 쓰느냐에 따라서 변기에 버리지 못하고 반드시 비닐에 버려야 되는 상황이 있는가 보았다. 오, 그렇다면 생분해 비닐봉투가 정말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벤트 합니다.



조건 없고요, 반드시 냥이들과 같이 살지 않아도, 봉투 자체가 다용도로 쓰일 수 있으니, 필요하다 써보고 싶다 하시는 분은 댓글 주세요. 선착순 12분께 30매씩 보내드리겠습니다. (등기발송 안하고 우편발송 하겠습니다~)


봉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링크를 참고하세요. ☞ 친환경 생분해 다용도 비닐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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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9-18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다락방 2018-09-18 15:16   좋아요 1 | URL
오, 굿굿. 주소삼종셋트 비밀댓글로 적어주시면 보내드릴게요~ 후훗.

2018-09-18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8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8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8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9-18 15:27   좋아요 0 | URL
네 주소 삼종셋트 비밀댓글로 달아주세요~

2018-09-18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각양배추 2018-09-1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도요! 친구네 집 강아지 생각나서 주고싶어요!

다락방 2018-09-18 15:37   좋아요 0 | URL
네네. 생각해보니 제가 등기발송할 게 아니라서 핸드폰 번호는 안적어주셔도 될 것 같아요. 이름과 주소만 비밀댓글로 적어주세요~

2018-09-18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18-09-1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요렇게 이벤트를 하시는 거였어요오!!!

다락방 2018-09-18 16:44   좋아요 0 | URL
ㅎㅎ 댓글로 주소랑 이름 남겨주세요.

2018-09-18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8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9-18 17:27   좋아요 0 | URL
일반우편으로 발송할 거예요. 우편함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꼬마요정 2018-09-18 18:39   좋아요 0 | URL
넵 고맙습니다^^

Forgettable. 2018-09-1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깐.. 제가 고양이도 필요하다고 했자나여 ㅠㅠㅠ 헤헤 암튼 마케팅 타겟이 두배가 되니 좋네요. 번창하시길!!!

다락방 2018-09-18 17:12   좋아요 0 | URL
개똥이는... 개똥이가 잘팔려야 되는데, 개똥이 에코(페이퍼에 올린 생분해 비닐봉투)가 더 잘나갈 것 같아요. 우리는 개똥이가 메인인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뭐든 잘만 팔려라, 잘만!! >.<

2018-09-18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9-18 20:06   좋아요 0 | URL
물론이죠! 주소랑 이름 남겨주세요~~

2018-09-18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8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9-18 21:03   좋아요 0 | URL
네네네네 기꺼이 보내드릴게요!!!!!

다락방 2018-09-1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섯분 남았습니다~

코코몽 2018-09-19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내주실 수 있나요???:)

다락방 2018-09-19 19:01   좋아요 0 | URL
네 주소랑 이름 알려주세요~

2018-09-19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9-19 19:04   좋아요 0 | URL
네 보내드리겠습니다~

2018-09-19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9-20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분 남았습니다~

2018-09-20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9-20 14:31   좋아요 1 | URL
보내드리겠습니다~

릴리송 2018-11-14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받을수 있을까요? 고양이 키우는데 안그래도 친환경봉투 생각했거든요~부탁드려요~

다락방 2018-11-14 05:41   좋아요 0 | URL
얼마든지요!! 주소랑 이름 적어주세요~

2018-11-1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