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멀어진' 관계들이 존재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그 멀어진 사람들은 멀어지기 이전에 나와 '연인'이기도 했고 또 '친구' 이기도 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그 때처럼 친근해지지 않은 상황이고, 그리고 그중에 어떤 관계들은 서로를 미워하며 끝내기도 했다. 미워하며 끝냈다 해도 그 전에 연인 혹은 친구였다면, 우리 사이에는 분명 친밀함이 있었고 서로를 애정하는 마음도 역시 있었다. 우리가 한 때 연인이거나 혹은 친구였다는 것은, 그런 친밀한 관계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밀한 관계였을 때 우리는, 서로 자주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일상의 소소한 얘기들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얘기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이 가진 상처에 대해서도 얘기했을 것이다. 내 상처, 내 죄책감, 나의 아픈 과거, 나의 부끄러운 과거, 나의 수치등을 비롯한 나의 비밀들.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그 때 그 당시에 '그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그 말들을 상대에게 전하면서 우리는 그 말들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우리가 설사 그 이후에 서로 악감정만을 남긴채 서로 등을 지고 각자 갈 곳으로 가게 되었다 할지라도, 서로에 대해 미움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때, 친밀한 사이었을 때 나누었던 은밀한 이야기들을,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에 바깥으로 보내 상대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는 것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그리고 지키고 있는 룰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지금은 미워하고 꼴도 보기 싫고 아휴, 그 때 왜 그 사람과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오래 유지했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내게 말한 은밀한 것들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는다.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도 않고, 또한 그 불행을 하물며 '내'가 가져오고 싶지도 않다. 그 때, 그 당시에, 그 사람이 말한 그 비밀들은, 우리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예의로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말한 건 그 때의 나에게만 가능했던 것이니까.


나는 이것이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한다. 헤어졌다 해서 그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의 비밀을 말하고 다니지 말것. 게다가 그것을 그 사람의 불행에 이용하려고 하지 말 것.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상대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결국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어디가서 내가 그 사람에게만 말했던, 속삭였던, 다정했던 그 이야기들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것은 '그사람'이기에 믿는 것이고, 우리 사이에 '그 때'가 있기에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그런데 ,

영화 [시에라 연애 대작전]의 '시에라'는 그렇지 못했다. 친한 친구가 자신에게만 얘기했던 비밀, 상처를, 그 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용한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자신이 눈앞에서 본 장면이 바로 진실 그 자체라고 믿으며, 그녀의 비밀-상처였다-을 친구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이용했다.



'시에라'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사랑도 처음 느껴보았고, 동성의 친구도 처음 사귀어보았다. 그런 그녀가 겪게 되는 숱한 감정들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처음이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 감정들을 대하는데 서툴렀을 것이다. 먼훗날 시에라가 어른이 되어서 '내가 그 때 그런 잘못을 했었지' 라고 말한다면, 이미 어른인 나 역시 '아아 나도 그런 부끄러운 과거가 있지' 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미 그녀가 한 잘못을 본 이상, 그리고 그 잘못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선을 넘어버리는' 행동인 이상, 아무리 그녀가 영화속 주인공이라 해도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다. 물론,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에게 '너 그러는 건 진짜 아니었어' 라고 말하고 그녀를 용서하지만. 그래서 그들이 그녀의 친구이고 나는 아닌거겠지만.


이 영화는 엄청 구리다. 정말 구리다. 모두 보지 않기를 권할 정도로 구리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제목에서 혹은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 [시라노]를 원작으로 한 것인데, 아아, 인물의 대결 구도가 어찌 이따위란 말인가.


우리의 주인공 '시에라'는 '뚱뚱하고 못생기고 인기 없지만 학교 성적은 좋고 착한 학생' 이다. 한편 그녀가 미워하다가 친구가 되는 '베로니카'는 '엄청 예쁘고 몸매도 좋지만 싸가지없고 멍청한 학생'으로 나온다. 하아- 인물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누어놓은 것도 이미 불편한데,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어떤가. '시에라'가 사랑하게 되는 남자 주인공 '제이미'는 '똑똑하고 착하고 운동도 잘하고 잘생겼으면서 찌질이 친구들과 놀아주는, 다른 남자랑은 다른 학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제이미가 올려쳐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아 너무 캐릭터 설정 개망인 영화인 것이다... 


뚱뚱하고 못생긴 시에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역시 '쭉빵에 미녀인 베로니카'를 좋아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앞에 시에라 자신으로서 나서지를 못하고, 집에 가서는 엄마에게 울면서 얘기한다. '엄마는 항상 자존감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지만, 십대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건지 짐작이나 하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모든 과목에 에이를 받는 학생이지만 학교에서는 친구도, 인기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학생이다. 그래서 울고야 만다. 그러면 이 장면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역시 탈코가 답이다!'


코르셋을 벗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조이고 있는 외모 코르셋을 벗어야 한다. 꾸밈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여자로 살아가면서 존재의미를 가장 크게 부여하는 게 결코 다른 사람들로 평가받는 외모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애초에 이렇게 태어났는데, 그리고 이렇게 되었는데, 그 사실만으로 존재감이 없고 놀림감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정해놓은 미의 기준, 그대로 따르는 것을 우리가 거부해야 지금의 십대 학생들 역시 거기에서 자유로워지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그렇게 똑똑하고 착한 시에라 였지만,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 역시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이성을 잃고 '결코 해서는 안될 짓'을 그녀가 하고야 만다. 이 일은 아마 그녀 평생 따라다니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추악한 과거'가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 다른 예쁜 여자랑 사랑할 거라는 추측... 그로 인한 해서는 안될짓에 대한 결심... 아아, 왜 남자를 좋아해가지고... 갑자기 멍청해지느냐 이 말이다. 



나는 사랑을 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에게도 더 좋은 모습을 찾아주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랑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자신을 진창속으로 넣고 말았다. 나는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성장을 보길 바라지만, 그녀는 망가지고야 만다. 물론 모든 성장에는 망가지는 과정이 필수이긴 하다. 망가지고 깨지고 진창으로 빠져봐야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에라 역시 그 일을 겪고 나서 성장하긴 했다. '베로니카' 역시도 그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픔을 겪었어야 했고. 그렇지만 영화 끝까지 '제이미'가 뭔가 '다른 남자랑 달라서' 시에라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에 끝까지 구린 영화였다.


이 영화를 나보다 먼저 보기 시작한 친구에게 나는 이 영화 다 봤는데 너무 구리다, 고 얘기했더니, 그 친구는 불편해서 중간까지만 보다 말았다고 했다. 아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멍청한 영화...





[엔젤 아이즈]는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2001년 영화이다. 2001년 영화인 건 포스터 찾다가 알게된 건데.... '정체 불명의 남성과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는' 영화라고 줄거리를 보고 끌리듯이 본건데..일단 '정체불명'인 거 너무 싫고... 게다가 남자 주인공이... 너무 지저분하다 ㅠㅠ 그래서 도무지 공감이 안돼.. 제니퍼 로페즈여, 왜 이 남자를 사랑하나요? 아, 너무 양치 안하게 생겼고, 옷도 생전 안빨아 입는 것 같고...얼굴에서 각질 떨어질 것 같고..눈도 너무 맹하고... 안 씻는 남자의 전형같은 인물이다. 안 씻는 남자(어쩌면 잘 씻는데 안씻게 생긴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정체를 모르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다니..나에게는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 같은데, 그러고보면 나는 진짜로 사랑을 '머리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머리'가 사랑을 한다. 머리가... 착하고 매너가 좋고 나에게 들이대지만, 정체를 모르겠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안돼. 역시 내 사랑은 머리가 한다..


아무튼 '연애'쪽으로 선택하고 본 영화라면 이 영화는 공감도 전혀 안되고 주인공들 연기도 별로고 해서 재미도 없지만, 굉장히 중요한 메세지가 반복되어 보여진다.


여주인공 '샤론'은 시카고의 경찰관이다. 그녀는 어릴 적에 가정폭력 속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걸 보면서 자란 것. 어느 날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는데, 그 뒤에 그녀에게 돌아온 건 가족들의 따돌림이었다. '니가 가족 망신을 시켰다'는 것. 그런 부모가 그 때 헤어졌는데 재결합을 하고 심지어 재결합식을 한다고 그녀의 오빠가 그녀에게 알려준다. 그녀는 그곳에 참석해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엄마를 찾아가는데,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고 아빠는 '최근 몇년간은 안그랬다'고 말한다. 아아..이해할 수 없는 엄마여.. 샤론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한 거라고 엄마에게도 말하지만, 엄마는 샤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재결합식에 가야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이번에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온다. 자신의 오빠가 집안 기물을 파손하고 아내를 때린 폭력을 저지른 것. 이에 그녀는 달려가서 오빠에게 '오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아버지랑 똑같다, 한번만 더 언니에게 손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버럭하는데, 그녀의 오빠는 그녀에게 큰소리치고, 오빠의 아내는 그녀에게 그러지말라고 화를 낸다. 그래서 샤론은 언니에게 말한다.


"언니를 때린 건 내가 아니에요!"


엄마를 때린 건 아빠였고 언니를 때린 건 오빠였다. 샤론이 때린 게 아니다. 샤론이 그 폭력을 저지른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모두들 샤론에게 화를 낸다. 마치 이 가족의 불행은 샤론 때문이라는 듯이. 그녀는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는데,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자신이 옳은 일을 했는데, 가족들로부터 멀어진다.


재결합식에 참석해 사이가 껄끄러워진 아빠에게 '내가 오기를 바랐냐, 가기를 바라냐, 나를 아직 사랑하냐' 묻지만, 아빠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딸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샤론은 옳은 일을 했다. 옳은 일을 했는데 가족들에게 배척당한다. 그런 그녀는 반복해서 외친다.


'내 잘못이 아니야'

'널 때린 건 내가 아니야!' 라고.


이 불행을 가져온 건, 폭력을 신고한 '샤론'이 한 게 아니다. 아내를 때린 아빠와 오빠가 한 일이다. 가족들 모두가 그녀를 내쳐도,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멀어진다. 





연휴중에 본 영화중에 가장 좋았던 영화, 그래서 다시 보는 영화는 이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와- 이 영화는 너무 좋아서, 못 본 사람들이 없게 해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짝사랑만 했던 학생 '라라 진'이 자신의 짝사랑했던 남자들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들이 모두 주인공에게 가 닿는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라라 진 앞에 나타나 '미안하지만 너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다'고 말해 그녀를 당혹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으으,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그들에게 말해보지만, 그녀의 어릴 적 친구 '젠'과 사귀었던 남자 '피터'와는 각자의 이유로 가짜로 사귀기로 한다. 피터는 젠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므로 질투를 유발하고 싶어서, 라라 진은 조쉬를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그들은 가짜 연인이 되기로 한다. 이 가짜 연애에는 유치하게도 계약서가 존재하게 되는데, 첫번째 항목은 '키스 금지'였다. 이에 피터는 말도 안된다며, 너에게 터치 하지 않는데 우리가 연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묻자, 아아, 우리의 라라 진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좋아, 내 바지 뒷주머니에 네 손을 넣는 건 허락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빵터졌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피터는 그게 뭐냐고 궁시렁 거리고, 라라 진은 그것이 80년대 유명한 영화의 첫장면이라 말해준다. 그렇게 그들은 꼭 같이 볼 영화의 목록도 만들어가고, 학교에 데려다주게 되고,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된다.


'저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데 도대체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가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생각했던 거였는데, 아아..... 라라 진이여...



그들은 서로가 가진 상처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상황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서로에게 이야기를 하고 또 들어주며서 '너 참 잘 들어준다'고 말한다. 그렇게 아주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는 거다. 그 과정에서 피터는 라라 진에게 왜 연애를 하지 않았냐고 묻는데, 아아, 나는 이 때의 라라 진이 너무 좋다.


"나는 연애와 사랑에 대해서라면, 읽는 것도 재밌고 쓰는 것도 재밌고 상상하는 것도 재밌는데, 그렇지만 실제로 일어나면..."

"무서워?"

"응."

"왜? 왜 무서워?"

"내 인생에 사람들을 들여놓을수록 떠나는 사람도 많을 거 아냐."


아.... 나는 이 영화, 십대들의 유치한 사랑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던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 이 장면에서도 그랬다. 잃을까봐 두려워 인생에 넣지 않으려고 하려는 라라진이 너무 이해되어서. 라라 진의 경우에는 어릴 적에 엄마를 잃은 경험이 있어서 그렇다지만, 나의 경우엔 그런 게 아닌데도 나 역시 두려움이 있었다. 사랑을 하면 잃게 될까봐,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연애를 하지 말자고 늘상 생각해 왔던 거다. 라라 진 역시 그게 두렵지만 '우리 사이는 가짜니까 괜찮아'라고 말해서, 그 앞에서 잘 들어주고 있던 피터에게 상처를 주었듯이, 어쩌면 나의 이런 마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겠어'가 역시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나는 몇 명에게 상처 입혔을까... 


내가 그랬다. 내가. 내가 잃는 게 두려워서, 멀어지는 게 두려워서, 사랑을 하면 필연적으로 끝이 있을 거란 생각에,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코 사귀지 않겠다고 늘상 다짐해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적당한 사이가 되어, 결코 멀어지지 않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았던 거다. 그런데 시작도 해보지 않고 끝을 두려워하면 어떡하냐고 나를 설득하는 바람에 내가 당신이랑 사귀었잖아... 그 말에 쏠랑 넘어갔어, 내가... 


그리고 당신을 잃었지..


내가 그래서 엉엉 소리내어 울던 그 날을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혼자 걷다가, '내가 안한다고 했잖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사귀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고 엉엉 울었던 거다. 마침 그 때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산이기에 가능했다. 아주 오래전, 삼순이가 삼식이랑 이별하고 한라산에 오르며 울고 중얼거렸던 것처럼, 나 역시 일자산을 오르면서, 그러게 내가 안한다 그랬는데 왜 하게 만들어서 이렇게 아프게 해, 하고 엉엉 울면서 말했던 것이다. 아 나여... 이리로 와라, 나여...토닥토닥... 



내가 안한다고 했잖아 이 빵꾸똥꾸야. 안했으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다정한 사이가 되었을 거 아니야. 지금은 이게 뭐야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잖아, 이 머저리야.. ㅜㅜ



라라 진은 대학에 진학하느라 집에서 따로 살게 된 언니에게 자신의 가짜 연애를 말하지 못한다. 언니와의 통화를 피한다. 나중에 언니가 집에 와서는, '왜 내 전화를 피하느냐, 나랑 얘기도 하기 싫으냐'고 했을 때, 그 때 라라 진은 언니에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말 해도 언니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 졸라 눈물터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도 매우 만족스런 영화인데, 가족 얘기로도 너무나 좋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게다가 친구로도...이 장면 보다가 또 울어버렸어 ㅠㅠㅠㅠㅠㅠㅠㅠ



피터는 이 가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젠'이 돌아오길 바라서였다. 대학생과 사귀는 젠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길 바라서, 라라 진과 가짜 연애를 하는 중에도 젠 에게 끌려다녔다. 젠은 대학생과 사귀고 있었지만, '대학생 오빠가 내 말을 잘 안들어줘, 나는 니가 필요해'라고 하면서 자신의 곁에서 피터가 멀어지지 않게 붙잡으려고 한다. 이런 관계를 이제 진심이 생겨버린 라라 진은 당연히 질투하게 된다. 피터 역시 진심이 생겨버려 라라 진과 조쉬 사이를 질투하게 되고.



'젠'은 피터가 자신이 돌아오길 바라는 게 아니라 이제 진짜로 라라 진을 좋아하게 됐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다. 화가 나서, 라라 진에게 거짓말을 한다. '어젯밤 피터랑 같이 있었다'고. 

나는 이 마음도... 이해가 안된다. 나랑 사귀지 않는다면 너랑도 사귀지 못해, 라는 이 마음.. 이 마음은 뭘까. 왜 굳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는 '니가 좋아하는 남자가 나를 좋아하지롱~' 이러는 걸까? 이 마음은..대체 어떤 마음일까. 대학생이 자신의 말을 잘 안들어주고 피터가 잘 들어줘서 피터를 붙잡고 있는 거라면, 젠은, 피터와 계속 사귀어야 했다. 대학생과 사귀는 게 아니라. 대학생도 사귀면서 피터도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젠은 대학생으로부터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뜻한다. 그렇다면 젠은 자신을 충족시켜줄 상대를 찾아, 자신 역시 상대를 충족시켜줘야 했다. 그러나, 모든 연애와 이별은 아픔이 수반되고, 그 아픔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젠 역시 이번에 실패하고 실수했지만, 아마 다음 연애에서는 다른 것들을 보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연애에 있어서는 '상대가 내 말을 잘 들어주는가'를 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연애를 업그레이드 시켜 나가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업그레이드 된 상대를 만나고 싶다면, 나 역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하니까. 



피터랑 라라 진이 헤어지자, 라라 진의 아빠는 라라 진에게 말한다.


"너가 피터랑 같이 있을 때 되게 행복해 보였어"


라고.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연애를 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야 할 말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너 행복해 보여' 라는 말. 내가 누군가와 사귀면서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그것이 바깥으로 보이고, 그래서 나를 아끼는 주변사람들로부터 '너 되게 행복해 보여' 라는 말을 듣는다는 게, 연애가 응당 가져와야 할 것이 아닌가. 많이 웃고 많이 즐거워하는 것.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연애라는 것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서로의 성장을 돕는 게 아니던가. 



일전에 본 영화 [메리 키스마스]에서 여자는 자신의 약혼자에게 이별을 고하며 '나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와 매일 깊어지는 사랑을 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나는 사랑과 연애는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터와 라라진은 그걸 했었다. 내 관심 밖의 영화를 그 사람 때문에 보게 되고, 그렇게 함께할 대화 소재를 더 찾아내는 것, 혹시 이 대화가 상대의 아픈 점을 건드린 건 아닐까, 조심스러워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상대는 아니야, 네 마음 이해해, 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 혹여라도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되는 말이나 행동을 했다면 거침없이 그에 대해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에 멀리까지 움직이는 것.


그리고 상대를 기다리는 것. 



'그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친구의 말에,

'정말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고 라라 진이 묻는다.





라라 진은, 피터가 여전히 젠을 기다리고 젠을 좋아할거라고 생각하고 의심하는데, 이 때 피터가 하는 말이 너무 좋다.


"가끔 성적 좋은 애들이 진짜 멍청하더라"


ㅋㅋㅋㅋㅋ 아 너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피터 너무 좋다. 스키 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라라 진이랑 같이 앉고 싶어서 집에서 간식도 싸왔다고 했다. 라라 진이 좋아하는 요구르트를 사오려고 멀리 있는 한국 마켓까지 갔다왔다고 말한다. 아아, 사랑 뭘까. 사랑 너무 좋은 것이야. 사랑은 멀리로도 움직이게 하고, 꼼짝없이 기다리게도 하는 것이야.



피터는 내내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라 진은, 내내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피터에게로 간다. 







얼마전 단발머리님의 페이퍼로 이 책의 원작 있다는 걸 알게됐다. (왜때문인지 번역서는 정가인하라고 지금 현재 5,400원에 판매중이다. 만세!!)
















영화는 연애 이야기로도, 가족 이야기로도, 성장 드라마로도 무척 좋다. 영화를 보고 나서 계속 영화가 생각난다. 피터와 대화하는 라라 진이, 아빠랑 대화하는 라라 진이, 언니랑 대화하는 라라 진이, 동생이랑 대화하는 라라 진이. 그리고 연애 소설 열심히 읽는 라라 진이. 

좋은 영화다. 그리고 좋은 연애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상대를 이겨내고 그들은 서로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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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9-2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일 동안 나를 행복하게 했던 라라진과 피터의 이야기를 다락방님에게서 듣는 새벽이라니...
난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하트뿅뿅!!!

이 시리즈는 3권인데 1권의 내용만 영화로 만들어진듯해요.
저희집은 넷플릭스를 안 보는데,
다락방님이 이 영화 못 본 사람 없게 빌고 싶은 심정이시라니 한달 무료 신청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피터 나오는 부분만 골라 읽었지만서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저는 3권까지 다 읽었습니다!!
아이 러브 피터! 아이 러브 피터 카빈스키!

다락방 2018-09-27 08:08   좋아요 0 | URL
단발님, 저는 이 책을 읽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중이에요. 이미 영화가 제게 완벽했는데 책까지 읽어야 할까 싶으면서, 또 3권이라 하시니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고...
피터 너무 좋아요! 피터도 젠을 겪으면서 그리고 라라 진과 사귀면서 성장하는 것 같고요, 라라 진 역시 자신의 두려움을 피터를 통해 이겨내고 있어요. 너무 좋은 이야기에요.
게다가 라라 진의 가족 이야기도 너무 좋아요. 언니랑 투닥대는 막내 동생도 너무 좋고요, 동생에게 자신이 필요 없을까봐 겁내면서 동생을 어떻게든 도우려 하는 큰 언니 마고도 너무 좋고요! 아빠는 어떻고요! ‘엄마가 돌아가시고난 후 내가 너희들에게 너무 기댔지‘라고 대화를 시도하는데, 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아주 다정한 아빠였어요. 이 가족의 이야기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정말 좋은 이야기였어요, 단발머리님.
이 이야기를 단발머리님과 공유할 수 있다니 행복합니다.
아아, 우리는 트와일라잇도 잭리처도 공유하다가 이제는 라라 진도 공유하는 것입니다!! 꺅 >.<

무해한모리군 2018-09-27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사랑했던 메모메모 꼭 봐야지.

다락방 2018-09-27 13:36   좋아요 0 | URL
아주 재미있고 좋은 영화였어요, 모리님.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