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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한 십오년전쯤이었을 것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그 당시 부장은(현재는 퇴사한 상태) 결혼하지 않은 남자사람이었는데, 사무실에서 곧잘 담배를 피곤 했었다. 그리고는 침도 뱉었었지..참 더럽고 더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은 담배에 얽힌 자신의 일화를 자랑스레 얘기했더랬다. 자신이 젊었던 시절, 길에서 담배피는 여자를 보고(길이었는지 술집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난다), 처음 보는 여자이지만 싸대기를 날렸다는 것. 그 얘길 듣고 있던 직원들은 모두 여자였는데, 그 얘기를 자랑스레 하는 그를 보노라니.....그게 뭐 그렇게 자랑스러울 일일까? 그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그 일에 대해서 언제든 자랑처럼 얘기할 수 있는가보았다. 그 일은 그의 자랑이었다. 내가 진짜 몇 번이고 누누이 얘기하지만 무엇을 욕으로 하느냐와 무엇을 자랑거리로 삼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담배 피는 여자의 싸대기를 날렸지, 를 이십년이 지나도 자랑거리로 삼는 남자사람이라니...


이 일은 비단 그 사람만의 무용담은 아니었다. 아마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일화가 아닐까. 왜, 그 유명한 드라마 [모래시계]였나, 거기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왔던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고현정이 그 일에 빡쳐서 그 남자랑 맞장 뜨는 걸로 끝났던 것 같지만... (기억 불분명)


내가 이 얘기를 왜 했냐면, 김현경 역시 그 일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공공장소에서, 공원이나 카페나 기차역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시민권을 가진 거주자들뿐 아니라 잠시 머무는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공간에서, 여성은 오랫동안(어쩌면 한번도) 남성과 동등한 정도로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였다. 여성은 인도의 달리트처럼 또는 민권운동이 시작되기 전 미국의 흑인들처럼 어떤 구역이나 건물에 출입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옷차림이나 행동거지와 관련된 다양한 금기를 통해 더욱 미묘한 통제를 받았다. 여성이 길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규칙이 그러한 예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무수히 쏟아지는 노골적인 비난의 시선을 각오해야 했고, 심지어 모르는 남자에게 뺨을 맞더라도 항변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남자들은 남자라는 것만으로도 자기에게 모르는 여자의 일탈을 훈계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 국가에서 남자라면 누구든 히잡을 쓴 여자 아무에게나 다가가서 "히잡을 똑바로 써!" 라고 야단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영화 「페르세폴리스」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히잡을 쓴다는 것은 단지 신체의 일부를 가린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모욕당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1980년 대의 우리는 히잡을 쓰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모욕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히잡을 쓴 여인들과 비슷했다. -p.290



위의 인용문은 이 책의 끝에 실린 부록 <장소에 대한 두 개의 메모>의 일부분이다. 본문도 좋지만 이렇게 부록으로 여성의 장소, 환대, 위치에 대해 써둔 게 너무 좋다.



우리는 남자들과 똑같이 공부했고, 학위와 자격증을 땄고, 직업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이냐 가정이냐' 따위의, 남자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닌 문제 앞에서 고민하지 않는가? 더 이상 우리에게 차림새나 행동거지를 보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염색을 하고, 피어싱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폭행을 두려워하며 밤거리를 걷지 않는가?

나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여성과 성공하지 못한 여성의 차이는 성공한 흑인과 성공하지 못한 흑인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결국 여성이며, 흑인인 것이다. 성폭행 당하는 여성의 수가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습격당하는 흑인의 수보다 더 많다는 점에서, 여성은 흑인보다 못한 처지라고 할 수도 있다. KKK단의 린치가 인간의 공격 본능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성폭행은 남성의 성욕으로 설명될 수 없다. 성폭행은 남성 지배 사회가 조장하고 묵인하는 일종의 의례이며, 린치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에게 '교훈'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환대는 여전히 조건적이다. 여성은 어디서나 모욕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멋진 옷과 가방도, 자격증도, 명패와 직함도 완전한 보호막이 되어주진 못한다.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이등 시민이다. 흑인 변호사나 흑인 교수 심지어 흑인 대통령의 존재가 전체 흑인의 지위를 판단하는 데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듯이, 몇몇 성공한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성은 자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환대의 권리-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는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의 어젠다를 구성할 것이다. -p.293-294



부록이지만, 이 여성에게 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글은 '너멀 퓨워'의 《공간침입자》의 구절들과 통한다.















[지리학자] 도린 매시(Doreen Massey)는 젠더 범주에 따른 공간/시간을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9살인가 10살 무렵의 일인데 지금도 가끔 떠오른 꽤 선명한 장면이 있다. 당시 맨체스터 외곽에 살던 내게 ‘시내로 나가는 일‘은 비교적 큰일이었다. 이층버스에 올라타 반시간 정도를 가야 했다. 시내로 나가는 길에 머지강의 넓고 얕은 계곡을 건넜고, 내 기억으로 차갑고 안개 낀 먼 곳에까지 축축한 진흙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맨체스터 지역 전체 모든 곳이 축구경기장과 럭비경기장으로 나눠져 있었고, 시내로 나가는 토요일마다 그 방대한 공간이 공을 쫓는 수많은 아이로 가득 찬 광경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많은 수였다(버스 꼭대기에 앉아 있으며서 마치 로리(Laurence Lowry;1887-~1996)의 거대하고 활기찬 그림을 보는 듯했는데, 로리가 그린 것보다는 좀 더 밝은 빛깔의 옷을 입은 아이들, 빨간 스타킹을 신은 그들의 다리가 보였다).
이 모든 것을 매우 정확히 기억한다. 혼란스럽고 약간 사려 깊은 어린아이의 눈에도 분명하게 각인된 또 하나의 사실은, 바로 넓은 머지강 평야 전체가 완전히 남자아이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그 경기장들에 가지 않았다. 그곳은 또 다른 금지된 세계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오늘 내가 공간 침입자라는 생각과 약간의 긴장감을 품은 채 이 축구경기장 계단석에 서 있다. 나는 이것을 무척 좋아한다(Massey196: 185). - 《공간침입자》, 너멀 퓨워, p.21-22



린다 맥도웰(Linda McDowell)은 19세기 영국에 출현한 도시 생활에 주목했다.

여성들이 거리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해석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치 않은 성적 관심에 자주 노출되었다. 이를테면 후기 빅토리아 시대 케임브리지에서 초창기 여학생들은 공적 영역에 나갈 때면 도시의 많은 ‘방종한‘ 여성과 자신들을 구별짓기 위해 장갑과 모자를 착용하는 것이 의무였다(1996: 154)

이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번번이 경계선을 넘어섰고, 그들의 움직임을 제약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새롭게 정의해낸 영역과 장소들에 진입했다(Wilson 1992) - 《공간침입자》, 너멀 퓨워,p.50-51



여성은 국가와 조금 다른 관계를 맺고 이는 시민적인 것과 가족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자연과 이성의 분리와 연관된다. 여성은 가족과 자연의 상(像)으로서 시민 영역의 자리에 놓인다. 신체혐오증이-일반적으로 암묵적인 남성 개인의-정치를 지배하는 한편 국가의 신체성은 여성 이미지를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일가권속을 돌보는 이나 방관자로 내세운다. 국가의 강한 어머니, 국가의 용감한 보호자이자 돌보는 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모성, 땅, 정의와 연계된 제한된 범위의 여성성 안에서만 인정받는다. -《공간침입자》, 너멀 퓨워, p.54




재차 언급하지만 위의 부분은 부록으로 실려있는 것이다. 이 책은 비단 여성의 조건적 환대뿐만 아니라,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사회의 환대를 받지 못한 혹은 조건적 환대에 기댈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러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조건적 환대속에서 사람이 왜 늘 사람일 수 없는지 주장하는 김현경의 글을 읽는데,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들이 있었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 나는 그것에 대해서 개인의 복수심으로 그를 처벌하고 싶어하지 않았는가. 또한 외국인에 대해서, 난민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환대가 나에게 있었던가, 하면 아니었던 거다. 이 책 한 권 읽었다고 내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지도 않을테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복수에 치중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사회 계약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이 계약속에서만이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이려면 환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읽는 것은 앞으로 내가 어떤 가치판단을 할 때 분명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김현경의 말처럼 무조건 환대속의 주인공은 아니다.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이 분명 있었고, 그리고 내가 나이가 많고 회사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으며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나는 나 이후의 여성들이 무조건적인 환대 속에서 사회에 당당히, 남자들과 동등하기 위치하기를 바라지만, 그런 시간이 더디게 올 것 같아 두렵다. 예전에 비하면 여자들의 위치가 달라졌다 해도, 여전히 조건적인 환대에 머물러 있는 게 사실이니까.


자신이 있을 자리를 아직 찾지 못한, 여전히 찾는 중인 사람들을 생각하노라니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특히나 태어난 곳이 아닌 장소에서 머무르기를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터였다. 낯선 땅에서야말로 조건적인 환대 속에서 매일매일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길 결정하는 삶은 그 사람을 얼마나 주저앉힐까. 주저앉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이 힘을 내야할까. 김현경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이 책에서 줄곧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바르게 살아보자 힘이 나기 보다는 내내 나는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쓰였다.



'장소'를 갖지 못한 사람들, 즉 자신들이 속한 곳이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또는 그들이 머물러도 좋은 자리, 점유할 수 있는 위치를 이 세계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p.283



모든 장소에 속한다는 말은 어느 장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올해는 이 나라에서 일하고 내년에는 저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 오늘은 이 도시에서 아침을 맞고 내일은 저 도시에서 밤을 맞는 사람은 아마 세계화 시대에 자본이 원하는 인간형이겠지만, 우리가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은 아니다. 현실의 인간은 그처럼 가볍게 삶의 근거지를 바꿀 수 없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기억의 무거운 짐을 끌고 다녀야 하는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갈 때마다 이 짐은 점점 불어나기 때문이다. 쉽게 떠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쉽게 잊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과거를 억지로 잊고 애착을 끊음으로써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정체성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의도적인 망각과 인간관계의 급격한 재편성은 자아가 불연속적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한 장소를 떠나는 것은 그 장소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며,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뿐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소'의 의미에 천찬하근 것은 이 모든 이유들에서이다. -p.285-287



기억의 무거운 짐, 불어나는 짐, 잊을 수있는 인간, 정체성의 변화, 의도적 망각, 인간관계의 급격한 재편성, 불연속적 자아, 다른 사람들의 우리에 대한 기억.. 이란 단어들을 나란히 읽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여성으로서 무조건적인 환대를 받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는 아직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 내가 단단하게 위치한 장소도 존재한다. 나는 불완전한 사람이며 완전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안정적 장소를 제공해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나란히 놓인 단어들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런 단어들 옆에 내가 무조건적인 환대를 붙여준다면, 내가 장소가 되고 공간이 되고 그렇게 내 안에서 당신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이 가능해질 거라는 생각. 사회 자체가 불안정하고 불완전해서 여전히 누군가를 배제하고 환대하지 못하고 있고, 그럼에도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체가 불완전하게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환대함으로 맞물리며 존재의 고통을 덜 수 있는게 아닐까. 나는 나 자체로 불안정한 땅을 딛고 서있고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가끔은 어깨에 힘을 주고 밀치거나 한쪽 발 먼저 들이밀어야 하지만, 또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는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라고 한 손을 크게 안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들어와, 당신에게 무조건적인 환대를 내가 줄게, 어디에서도 받아보지도 못한 그런 환대를.



좋은 책을 읽었는데 왜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나보다 다른 사람 때문에 더 슬퍼진다. 나 역시 온전히 환대받는 구성원이 되지도 못하면서, 그러나 환대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어딘가에서 내쳐지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슬프다.



프로이트 패러다임 읽으러 가야겠다. 프로이트 졸라 까면서 힘내야지.









이 가상의 대화는 ‘모두가 죽는 것보다 한 사람만 죽는게 낫다‘는 공리주의적 계산법의 모순을 폭로한다(고 나는 믿는다). ‘낫다‘는 것은 누구에게 그렇다는 뜻인가? 희생자는 희생이 결정된 순간부터 더 이상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말은 결국 ‘죽지 않기로 결정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죽지 않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 죽기로 결정된 사람에게 이 말은 완전히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사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공리주의적 계산법의 용도는 희생자들을 설득시키는 것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양심을 위로하는 데 있는 것 같다. - P275

베카리아는 오히려 범죄에 대한 처벌이 사회계약의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범죄자는 사회의 바깥에서 사회와 적대하면서 무한한 복수의 가능성에 노출되는 게 아니라, 사회 안에 있으면서 그 자신도 동의하는 규칙에 따라 정해진 만큼만 처벌받는 것이다. 베카리아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형에 반대한다. 사형은 범죄자를 사회 바깥으로 내몰고 사회의 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사회의 적이라면, 그는 더 이상 사회의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 그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의 힘은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는 법의 바깥에 있으므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다. 따라서 사형은 더이상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폭력일 뿐이다. 베카리아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형이 내포하는 역설을 정확히 지적한다. "사형은 어떤 의미에서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전쟁이다." - P234

나는 베카리아의 사형폐지론이 사회의 구성원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 통찰의 빛이 18세기 이래 지금까지 사법 개혁을 둘러싼 모든 논의의 지평선을 밝히고 있다고 믿는다. 법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환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 안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바로 환대이다. - P242

사회는 개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유사한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함이지, 사회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가해자에게 복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 P230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이처럼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벽을 없애는 것-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옹호는 사생활 침해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쉽게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공동체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공동체 정신을 추구하는 것과 사생활의 자유를 갖는 것 사이에는 본디 아무 모순도 없다.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까닭이다. - P202

사외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 P203

"가난한 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익명의 기부자"라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말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이는 증여의 논리가 환대의 논리와 전혀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환대 역시 주는 행위이지만, 이 줌은 증여로 계산되지 않는다.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 P196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조금 전에 생활보호 대상자를 애완동물에 비유했지만, 한국에서는 애완동물이 될 자격조차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폐지를 주워 팔면서 혼자 사는 노인이 장성한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사례를 조명할 때 언론은 이 장성한 자녀에게 실제로 부양 능력이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부양 느역이 있는데도 노인을 모시지 않는 거라면, 그 자녀는 ‘인륜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요컨대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도덕과 풍습이라는 것이다. ‘시스템의 한계‘가 논의되는 것은 자녀 역시 막노동을 하거나 몸져 누워 있는 등 극단적인 빈곤 상태에 처해 있을 때뿐이다. - P184

가부장제의 문제점은 피부양자-비대표자가 부양자-대표자에게 쉽게 인격적으로 종속된다는 것이다. 체사레 베카리아는 가족을 구성단위로 하는 국가에서는 자녀들이 가장의 전횡 아래 있기 때문에 온전한 의미에서 시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 사외에 10만 명의 사람이 있다고 하자. 혹은 가장을 포함한 5명으로 구성된 가족이 2만 단위가 있다고 하자. 만약 그 사회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거기에는 10만의 시민이 있고, 노예는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그 사회가 가족으로 구성된 결사체인 경우라면 그 사회에는 2만의 시민과 8만의 노예가 존재하는 셈이다." - P184

아렌트는 기독교적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이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사랑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아렌트의 신랄한 지적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랑은 타자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자에게 무관심하며 어떤 의미에서 타자를 이용한다. 타자에 대한 그 같은 헌신 밑에 있는 것은 증여를 통해 자아의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다. - P175

걸인에게 예의 바르게 적선을 하는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걸인으로서는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굴욕이기 때문이다. 그를 그 자리에 버려둠으로써 사회는 이미 그를 모욕하고 있다.
걸인의 존재는 현대 사회의 구성 원리에 내재하는 모순을 폭로한다. 현대 사회는 우리가 구조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사장이든 말단 사원이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사람으로서 서로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구조적인 위치가 남들에게 구걸을 해서 먹고살아 가야 하는 위치라면, 그는 사람으로서도 결코 다른 사람들과 동등할 수 없다. - P173

자선은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므로, 그 안에 이미 상대방의 명예에 대한 평가절하가 들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선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동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 P172

바버라 콜로로소는 학교 폭력이 발생했을 때 갈등 중재 위원회를 열어 가해자와 피해자를 억지로 화해시키는 관행을 비판하면서, "괴롭힘은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경멸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해소되어야 할 갈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괴롭히는 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 귀여운 척하고, 후회하는 척한다. 이것은 각본을 바꾼 새로운 연극일 뿐이다. 괴롭힘당하는 아이들은 어떤 휴식도, 지원도 얻지 못하며, 괴롭히는 아이 역시 진정한 공감이나 사회친화적인 행도을 배우지 못한다. 괴롭히는 아이는 보복의 기회를 노릴 것이고, 표적이 된 아이는 보복이 두려워 진술을 번복할 것이다. 괴롭힘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Babara Coloroso, The Bully, the Bullied and the Bystander, New York:Harper, 2008. p.111) - P167

제도가 사람을 모욕할 때 그것은 모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분주의든 아니든, 이런 관행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동일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 P165

의례적 평등의 실현은 경칭의 인플레이션을 수반하곤 한다. 몇 해 전 뉴욕에 갔을 때 길에서 핫도그를 파는 남자에게 손님들이 ‘써sir‘라는 경칭을 붙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한국의 경우, 마트의 계산원이나 중환자를 돌보는 간병인들이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의 제스처에는 현실적인 불평등을 은폐하는 효과도 있다. 간병인들을 ‘여사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영화 「카트」에서는 부당 해고에 맞서 싸우던 계산원들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여사님‘ 대신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이들 사이에 싹튼 연대의식과 현실에 대한 각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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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0-27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으면서 두 가지 감정이 복잡하더라구요. 하나는 환대 받지 못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해 말할 때 그게 뭔지 너무 잘 알겠는 거에요. 저는 이쪽과 저쪽에서 이루어지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저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이 가진 힘에 대해서는 인정받아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두 다 알고 있는 일상의 작은 면면을 약간은 평범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그려냈다는 거요. 그렇게 건조한 톤으로 말했는데도 그 책이 불러일으킨 그 커다란 반항과 폭풍에 대해서두요. 이 책도 너무 힘을 쏟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상태로 약간은 덤덤하게 그런 면을 지적했다는 게 너무 대단하다고 여겨지고요.

또 하나는. 만약 이 작가가 환대받지 못한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객관적‘이라고 평가받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여성‘이라는 존재가 단일한 집단으로서 환대받지 못 했다,라고 언급하는 게, 사실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계속 논문을 쓰고 살아가야할 학자라면 더더욱이요. 참, 용기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랑스럽고, 또 고맙기도 하구요.

저도 오후에는 [프로이트 패러다임] 읽어야합니다. 오늘이 10월 27일이라고 하대요 ㅎㅎㅎ

다락방 2020-10-27 13:29   좋아요 0 | URL
확실히 읽으면서 가장 쉽게 확 오는 부분은 여성에 대한 조건적 환대의 부분이었어요. 부록으로 써두긴 했지만 어찌나 확 다가오는지, 역시 사람은 자신이 처한 입장에 대해서 더 잘 받아들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리고 언급해주어 무엇보다 고마웠고요. 이렇게 멋지고 근사한 책이 제대로 할 말을 하면서 꼭 해야할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싶어 좋더라고요. 단발머리님 염려대로 그러나 여성에 대한 언급 때문에 책이 저평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대체적으로 여성의 불리한 점에 대한 언급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치우친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중립기어 딱 박고 보라고, 마치 본인들은 객관적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요. 하늘아래 객관적인 사람이란 없거늘, 어디서 자신이 중립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요...

단발머리님 말씀대로, 용기 있는 저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이렇게 명징하게 현실에 대한 분석과 또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정도 용기를 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거란 생각도 들어요.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당연해지는 용기랄까요. 아무튼 이런 글을 써주어 너무 감사하고 또 응원합니다.

언급한 책중에서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꼭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어쩐지 좀 덜 자란 저를 성숙하게 도와줄 수 있는 책일 것 같아서요.

10월 27일이고, 저는 오후에 읽을 수 없는데, 아아, 프로이트 패러다임... 아직 펼치지도 않았어요. 어쩌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뽀샤버려야 하는데!!!!!

단발머리 2020-10-2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다락방님!! 손글씨 진짜 짱입니다! 하트뿅뿅!!😍

다락방 2020-10-27 13:25   좋아요 0 | URL
다이어리가 별로 좋은게 아니라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라딘 굿즈) 글씨가 영 잘 나오질 않아요. 만년필로는 제법 글씨가 잘써지는데 말입니다. 엣헴-

유부만두 2020-10-27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명이인 김현경 작가의 소설 <담배 피우는 여자>라는 소설이 생각나고요. 옛날 소설이라 많이 갑갑했던 기억이 나요.

다락방 2020-10-27 15:20   좋아요 0 | URL
유부만두님 김형경 소설가와 헷갈리신 것 같아요.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 그 작가 말씀하시는거죠? 김형경 작가입니다. 요즘은 심리 관련 책을 더 많이 쓰시는 것 같지만... 저 김형경 소설 몇 권 읽었는데, 대학시절 운동권하면서 같은 운동권내 남학생에게 강간 당한 여자가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결국 그 강간남과 결혼하는 걸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답답한 현실에 대해 읽었던 게 생각나요. 그 소설이 근데 어떤 거였는지 모르겠네요.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 였는지 [성에] 였는지,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이었는지...

유부만두 2020-10-27 15:28   좋아요 0 | URL
맞다;;; 김형경 작가에요. 답답한 상황의 주인공에 아주 힘들었어요.

2020-10-27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8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oshot 2020-10-27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글씨가 이정도면 다락방글꼴 하나 만들어야 되는거 아닌가요? 😳 너무 감동하여 백년만에 댓글 남겨 봅니다

다락방 2020-10-28 08:14   좋아요 0 | URL
다락방글꼴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투샷님, 백년만에 나타나셔서 너무 기분 최상 만들어주시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이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쩌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좋아죽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그러면 손글씨 또올려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10-2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선 장소, 고향을 떠나온. 물론 이역만리가 아니라 지방에서 도시로 온 것이 제 삶이지만 저도 이 구절에서 눈이 머물렀어요. 외롭고 낯설어서, 취약해진 채로, 환대인양 하는 관계들에 답싹 붙잡혀 결국에는 괴로워하던.. 그런 관계들 만남들이 생각나네요. 여전히 저는 제 자리를 만들어내는 시절을 살아가고 있지만, 겨우 비집어 앉은 이 공간을 나눠쓰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환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인간이 되어 보겠습니다!! 우리존재 화이팅! ㅎㅎ

다락방 2020-10-30 09:55   좋아요 0 | URL
쟝님, 정말 그랬겠어요.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지금도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니 더 그렇고요. 우리는 결국 머무를 곳을 계속 찾아가면서 삶을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어요. 여기인가 혹은 저기인가 고민하면서 말이지요. 머물던 곳을 떠나온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김현경이 말한것처럼 기억과 사람들을 새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사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진 않을테고요. 누구에게나 무조건적 환대는 저 역시 불가할 것 같지만, 그렇지만 아끼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열린 마음으로 환대하면서 지내다보면 머무를 공간은 조금씩 넓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존재 화이팅입니다!
 

2020년 11월부터 2021년 2월까지의 책 리스트 공유합니다.


11월, 12월은 두 달에 걸쳐 푸코의 책을 읽겠습니다. 《성의 역사 1-3》
















두 달에 걸쳐 읽어주시면 됩니다. 읽다가 생각나는 것들을 그때마다 기록해 주시고요. 그러면 다른 같이 읽는 분들에게도 힘이 됩니다... 여성주의 책을 읽다보니 푸코의 성의 역사를 읽고나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겠더라고요. 2021년의 더 풍부한 여성학 독서를 위해 푸코의 성의 역사를 읽자, 여러분...



2021년 1월은 캐럴 J. 아담스 의 《육식의 성정치》입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부러 이 책 읽기를 뒤로 미룬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 읽어봅시다.

















2021년 2월은 '캐롤 페이트먼'의 《여자들의 무질서》입니다.

















자, 함께 열심히 읽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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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0-27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푸코 가는 건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른 분들 페이퍼 읽는 재미에 기대서 같이 가보렵니다.
열심히 읽어볼께요! (하려니 [프로이트 패러다임] 반이 남았네요 ㅠㅠㅠㅠ)

다락방 2020-10-27 12:57   좋아요 0 | URL
저 프로이트 패러다임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10월 27일이에요. 어떡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 우리 다음 두달간 푸코 갑시다. 빠샤!

유부만두 2020-10-2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것이 온 느낌이에요.

다락방 2020-10-27 12:56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그 느낌을 따라갑시다!! ㅎㅎ

수이 2020-10-27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근구근_ 책을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다락방 2020-10-27 12:56   좋아요 0 | URL
저도, 2,3 권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2020-10-27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10-27 12:56   좋아요 2 | URL
참여하신다니, 환영합니다!!

네, 자신의 알라딘 서재 블로그에 글을 쓰시면 됩니다. 정해진 룰은 없고요, 11,12월 두 달에 걸쳐 성의 역사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들을 그저 자유롭게 기록하시면 됩니다. 두달 동안 다른 몇몇 분들도 자신의 서재에 성의 역사 링크하고 페이퍼나 리뷰 혹은 밑줄긋기나 구매자평을 작성하실 거에요. 다른 분들이 읽고 쓰는 걸 보면 저도 완독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 같이 읽을 때 참여하신다면 아마 완독으로 가기가 혼자일 때 보다 수월할거라 생각됩니다. 엇서오세요!! ^_________^

2020-10-27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10-27 13:24   좋아요 0 | URL
이번 기회에 푸코의 성의 역사 함께 뿌셔버려욧!!

건조기후 2020-10-28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이렇게 점점 벽은 높아져만 가고... 그래도 시작은 해봐야겠죠? 불끈!

다락방 2020-10-28 16:36   좋아요 1 | URL
건저기후님, 힘내요! 뽜샤!

블랙겟타 2020-10-31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면서 성의 역사 1권을 우선 샀어요!!
당연히(?) 땡스투 하면서요. :D

다락방 2020-11-02 08:55   좋아요 1 | URL
땡스투는 사랑입니다. 전권 모두 부탁드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0-11-0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락방님 성의 역사 4권까지 나왔던데요, 왜 우리는 3권까지만 읽어요? (궁금해서 소심하게 손 들고 물어봄;;;)

다락방 2020-11-02 08:56   좋아요 1 | URL
여러분의 의견을 묻다가 걍 제가 결정했습니다. 4권까지 읽는 걸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페이퍼 다시 작성했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핳하하하. 저는 수연님의 1등을 조심스레 점쳐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의 22페이지 본문 하단에 실린 각주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무한히 긴 삶에 대한 욕구는 무한한 인식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의 주인공은 불사不死의 삶이라는 가능성 앞에서 주저하는데, 그때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와 같은 삶이 무한한 배움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실로, 무한히 오래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와, 그 언어들로 전승되고 기록된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 전체를 배울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종합하여 단 한 권의 최종적인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은 전 세계의 도서관을 합친 것과 맞먹을 것이며, 우주와 자기 자신을 향한 인류의 기나긴 탐구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이는 절대정신이 자신의 기원이자 목표로 귀환함을, 그리하여 거대한 자연사적·세계사적 원운동을 완성함을 의미한다. (p.22)


















찾아보니 국내에도 번역된 책이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으로만 알고 있다가 이렇게 소설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불사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나도 자주 생각해왔다. 내가 불사의 삶을 생각한건 단순하게도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종종 사람들에게 죽음이 두렵고 그래서 불사의 삶을 원하노라, 고 말하면 이내 '아프고 병들면서 살아있는 건 고통이지 않냐'고 반문한다. 그럴때면 나 역시 고민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불사의 삶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떠올려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늙고 병들지 않은 채로 영원히 사는 삶을 의미했던 것 같다. 가능성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운 건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죽지 않을 수 있다면 뭐든 할 것 같은 마음이 된다.


보부아르와 이 하찮은 나 따위...의 생각은 바로 여기서 갈린다. 내가 영원히 살기를 바란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라는 이유 말고는 딱히 없다. 그러니까 계속 살아서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쌓고..하는 것에 대한건 없다는 거다. 단순히 죽기 두렵다 →영원히 살고싶다로 이어졌을 뿐. 그러나 보부아르는 불사의 삶이 무한한 배움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오래 살아서 오래 공부하다보면 결국은 최종적으로 모든게 담긴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라니.. 너무나 대단하지 않은가. 내가 얼마나 하찮은 쪼꼬미 인간인지를 보부아르를 보며 깨닫는다.



이런 보부아르로부터 영감을 받은걸까. 나는 불사의 삶으로부터 무한한 배움의 가능성을 보게됐다는 보부아르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자 마자, 크- '블레이크 라이블리' 주연의 《아델라인:멈춰진 시간》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속에서 주인공 아델라인은 큰 사고를 당했는데, 그 사고 후에 늙지 않은 채로 그 모습 그대로 계속 살게 된다. 그녀에게는 어린 딸이 있는데 시간이 흘러 그녀의 딸이 할머니가 되도록 그녀는 여전히 젊은 모습을 유지하게 되는 것. 그렇게 오래 살아오면서 현재,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 데이트중이다. 영화는 그런 현재를 중점적으로 보여주면서 진행되는데, 아아, 그녀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뭘했을까? 외국어를 익혔다!! 그래서 포르투갈어도 막 해! 와, 저게 가능하겠구나, 저게 가능하겠어. 오래 살면서 그녀가 계속 젊으니 그녀는 외국어를 공부한거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오래산다고 다 그렇게 살 순 없을텐데, 이거야말로 아델라인이 선택한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델라인이 해를 거듭해 살아오면서 외국어를 익혔다면, 보부아르가 말한 것처럼 무한한 배움에 대한 것도 가능성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젊음을 유지하는게 더 유리할 것 같다. 나이 들어 책읽고 공부하니 예전같지 않아서, 젊을 때 막 듣고 보고 배우는 게 너무 중요할 것 같은 거다. 외국어를 이것저것 하게 된다면 내 능력치가 커지는 것일테고, 그렇다면...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만약 지금 한 500년쯤 살고 있으면서 외국어 여러개를 마스터했다면 지금쯤은 미국에 가서 마리 루티 강의도 들어보고 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가 500년을 살면서 열심히 외국어를 공부하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것이지만...


아무튼 무한한 삶에서 무한한 배움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보부아르님이 진짜 대단하다... 나는 그런 생각 안해봤어.. 나는 역시 쪼꼬미 인간이야..쭈구리다.....


영화 아델라인을 보고 썼던 페이퍼는 여기 ☞ https://blog.aladin.co.kr/fallen77/9661834



이 책, 《사람, 장소, 환대》는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나를 건드리는 부분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사실 가장 먼저 나를 건드리는 문장은 ''공공장소에("대낮의 햇빛 아래")'라는 문장이었다.



그림자는 물론 몸과 다르다. 하지만 몸이 아니면서도 몸의 일부인 것처럼 몸을 따라다니며 몸의 연기를 돕는 물건들이 많이 있다. 가발이나 지팡이나 틀니처럼 말이다. 이런 소품들은 개인에게 신체적인 완전성을 부여하며 그가 공공장소에("대낮의 햇빛 아래") 오점 없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일상의 연극은 언제나 분장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몸과 인공적 부속물(또는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몸과 인공적 부속물들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몸)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나체의 전시가 금지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말해주듯, 순수한 몸 그 자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p.17-18)



위의 구절에서 공공장소에, 대낮의 햇빛 아래 라는 문장만이 나에게 확 볼드체로 형광펜 쳐져서 들어온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숨겨진 존재가 되어야 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보다 많이.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를 숨겨야 했던 때도 있을 것이고. 나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숨겨진 것, 숨겨야 하는 것, '들키면 안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그건 나 자신에 대해 쪽팔린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만나면서 내 존재를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내가 좋다는 이유로 계속 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수시로 생각해야 했고, 은유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얘기하자면 '대낮에' , '공공장소에서' 나를 만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존재는 그에게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나 역시 상대를 그런식으로 대한 적이 있다. '대낮에' , '공공장소에' 그를 드러내는 걸 피하려고 했던 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대낮에, 햇빛 아래서 만날 수 있지만 어둠을 선택하는 것과, 어둠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다르다. 나는 누군가 나를 햇빛 아래서 만나기보다는 어둠에서만 만나려고 해서 상심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 때의 나를 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그 당시에도 그걸 못견뎌했다. 심심풀이 땅콩이 된 것 같은, 그러니까 김현경의 이 책에서 말한것처럼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 그건 아프다기 보다는 상하고 다치는 거였다. 다시는 그런 상황 속으로 나를 몰아넣지 않겠다고 수십번 다짐을 했던 시간이 내게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나는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내가 살면서 굳게 결심하고 끝까지 가져가자고 다짐한 게 있다면, 그건 '내가 나 자신한테 쪽팔리게 살지말자'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햇빛 아래가 아닌 어둠에서만 불러내려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손을 놓을 것이다. 내가 나에게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나 역시 누군가를 그렇게 대하려고 했던 시간들에 대해서도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떠올린다. 누가 나를 어둠속에서만 불러내려 했을 때 절망했던 것처럼, 내가 누군가를 어둠속에만 불러내려 했을 때, 나 역시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가 숨지 않는 것, 대낮의 햇빛 아래에, 공공장소에서도 웃으면서 활짝 만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오늘은 어둠에서, 라고 조건을 붙여 만나도 행복할 터였다. 저 볼드체의 문장은 순식간에 나를 과거의 여러시간으로 데려다놓았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아아, 불후의 명곡, <Color Of The Night>를 찾아 듣게 했다. 다시 들어도 로렌 크리스티의 목소리는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사람 가슴을 후벼판다.






로렌 크리스티도 대낮에 그를 만나지 못하고 숨어서 만나야 했나부다... 크-



You and I moving in the dark

Bodies close but souls apart

Shadowed smiles(그림자!!)

And secrets are unrevealed

I need to know the way you feel


I'll bive you everything I am

And everything I want to be

I'll put it in your hands

If you could open up to me

Oh cna't we ever get beyond this wall


Cause all I want is just once

te see you in the light

But you hide behind

the color of the night


I can't go on running from the past

Love has turned away this mask

And now like clouds, like rain

I'm drowning and I blame it all on you

I'm lost, God save me



가사가 더 있지만 이쯤하겠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 갓 세이브미~ 에서 울고, 내가 원하는 건 한번이라도 너를 밝은 곳에서 보는 것이라는 말에 운다. 울자. 이 아침 울자..가을은 원래 울라고 있는 거다.... 울자. 크라이, 크라이... 나한테 밤에만 전화하지마... 내가 밤에만 픽업더폰 하게 하지마..... 그런건 이제 다 끝났어...........








You call me at night and I pick up the phone.....

over it


밤에만 전화하는 남자 닥치라고 하자.....수화기를 들지마!!




사람에 대해 얘기하면서 태아,군인,사형수에 대해 언급할 때도 번번이 복잡한 마음이 되었지만, 2장에서 외국인에 대해 언급할 때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p.64)



여행객으로, 관광객으로 찾아가는 외국과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외국에 대해서, 그 낯선 사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어딘가의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이 힘겨워야 할까.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p.25-26)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에게 나만큼은 철회되지 않을, 무조건적인 환대를 해주는 사람이고 싶다. 나에게 당신은 언제나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조건 따위 없다고, 대낮에 햇빛 아래에서 언제든 볼 수 있다고.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도.



좋은 책이다. 자꾸자꾸 페이지에 눈길을 멈추게 되는 책이다. 아직 75쪽까지밖에 못읽었지만 그렇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내게 어떤 책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 책 나는 지루했지만 네가 읽어준다면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는동안 달콤한 말 참 많이도 들었지..다 끝나버렸지만. 어쨌든 이 책은 내가 환대하는 이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이다. 매일매일 읽어주고 결국 한 권 다 읽어내고 싶은 그런 책. 읽어주다가 어떤 문장들에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을 것 같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대, 정말 그렇지? 사회 안에 내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너무 외로웠잖아? 같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지.



그럼 이만..



이 책 읽는 동안 '너멀 퓨워'의 《공간 침입자》를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드워킨은 낙태에 대한 처벌이 곧 태아가 사람임을 함축하지 않는다면서, 완고한 낙태반대론자라도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 낙태에 찬성한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만일 태아가 사람이라면, 이는 강간에 의해 잉태된 사람은 살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로널드 드워킨, 『생명의 지배영역』, 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2008., p.104). - P32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기혼 여성은 친족이 없는kinless존재라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조선 시대에 기혼 여성에게 적용되었던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은 여자들이 혼인과 동시에 부계 친족 집단에서 영구히 성원권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출가한 여자는 부모의 제사에 참여할 수 없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다. 그리고 친정 일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출가외인이라는 표현은 여자가 친정 일에 개입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시집에서 쫓겨나도 친정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친정에 대해서 ‘외인外人,‘ 즉 아웃사이더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가 남편의 친족 집단에서 그에 상응하는 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아래 계속) - P37

그녀는 시집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지도 않고, 제사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두 집단 중 어느 쪽에서도 성원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시집살이가 종살이와 비슷하게 체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족이 없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나서줄 제삼자가 없다는 것이다. 출가한 여자는 원래 자기가 속해 있던 친족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녀의 운명은 이제 전적으로 시집 식구의 손에 달려있다. 하지만 그녀와 노예의 공통점은 여기까지이다. 노예는 아무 명예도 갖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명예가 중요하다. 또 그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시집과 혈연으로 이어지게 되며,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갖는다. - P37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로 더러운 건 아니지만, 밥그릇을 침실에 두거나 음식을 옷에 흘리면 더럽다. 마찬가지로 목욕 도구를 옷장에 두거나 옷을 의자에 걸어두는 것, 집 밖에서 쓰는 물건을 실내에 두는 것, 위층의 물건을 아래층에 두는 것, 겉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속옷이 나와 있는 것 등은 더럽다."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New York:Routledge, 2002. pp.44~45 - P73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으먕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관은 여성에게 안을, 남성에게 밖을 할당한다. 그러면서 여성이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은 공적으로 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
이 이데올로기적 구별의 핵심적 기능은 여자가 자기 집을 갖는 것-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과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을 막는 데 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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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10-2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깊이 읽고 많이 느끼시는 다락방님!! 전 조금 뒤의 우정 파트를 읽고 있어요. 이 책은 갈 수록 더 좋아요. 무조건 적인 환대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렵니다 클킁

다락방 2020-10-22 08:47   좋아요 1 | URL
아아, 우정 파트라니, 너무 기대돼요! 우정 파트 읽고 싶어요! 열심히 읽어야겠어요.
북플 보니까 공쟝쟝님 이 책 완독했던데, 고생했습니다. 꺅 >.<

공쟝쟝 2020-10-22 12:15   좋아요 0 | URL
뒤로갈 수록 그나마 잘 넘어가서 ㅋㅋㅋ 으히히 팔로팔로미
 
초콜릿
















프로이트에 따르면, 일반적인 경우에 나르시시즘은 발달의 한 단계로 간주될 수 있는데,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대상에게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사랑은 보통 부모 중 한명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자기애를 다른 사람에게로 전이시키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원래의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심각한 정신 질환을 초래하게 되고, 이는 정신병의 발달 과정을 따라 진행된다.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 정신병의 징후들에는 자기 자신만이 중요하다는 망상, 정신분열증, 환각, 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편집증적 감정이 있다. 가장 심각한 경우에 환자는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자신의 정신 바깥에 누군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그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164-165)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나는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 너에 대한 내 사랑이 너무 커." 라고 말하면서 상대에게 집착하고,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토커가 되어버리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비대한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상대가 없는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고, 상대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이해가 안되고, 상대가 내게 헤어짐을 말한 것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 자신만을, 자기 자신의 기분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다. 자기 자신이 너무 소중하고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자기 자신이 아픈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헤어진 연인에게 들러붙고, 집착하고, 그러다 상대의 주변인들에게까지 접근하고, 어떻게든 연결되려고 별별 수작을 다하면서, 그러나 자기는 그것이 상대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거다. 그건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돌아버린 것에 다름 아니다. 상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거다. 그사람이 집중하는 건 '내가 사랑하는 상대' 가 아니라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 나'인 것이다. 이런 나를 감히 떠나? 이런 나를 배신해? 이런 내가 싫어? 이런 나를 거절해? 는 결국 연인에 대한 폭력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타인과 관계맺기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타인을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기분이고 자신의 마음인데,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배려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괴롭다고, 싫다고, 아니라고 말해도 돌아서지 않는건,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리안 모리아티'가 자신의 소설 《당신이 내게 최면을 걸었나요?》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당신이 계속 전화를 걸었을 때, 패트릭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면 패트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패트릭은 그날 밤 두려웠을까요?"

이상한 건, 지난 3년 동안 나는 패트릭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작 패트릭이 어땠을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거야.

"폭력을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육체적인 폭력만 폭력인 건 아니에요. 당신은 패트릭을 무기력하게 만든 거예요."

"무기력하게 만들다뇨? 나는 패트릭을 사랑했어요. 그저 다시 함께하기를 바란 것뿐이에요."

"다시 생각해봐요, 사스키아."

내 정신과 의사는 나를 어디로든 달아나지 못하게 했어. 마치 나를 거울 앞에 세워놓고는, 내가 자꾸 외면하고 다른 곳을 보려고 할 때마다 내 어깨를 붙잡고 다시 거울 앞으로 돌려놓는 것처럼 느껴졌어. 내가 손으로 눈을 가릴 때마다 그녀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내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는 거야. 마침내 나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게 말이야. (p.621)



'나'를 너무 사랑해서 '너만 생각했다'는 것이 '너에 대한 사랑'인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타인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배려할 줄 모르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스토커가 되고 헤어지자는 연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된다.




이 책, 《프로이트 콤플렉스》를 읽다 보면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는 기본적 어휘에 대해 알게된다. 물론 우리가 그런 기본 어휘를 반드시 이 책으로만 습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책에서, 뉴스에서, 영화에서, 일상에서 들어 알고 있는 단어들일거다. '전이'나 '역전이'란 단어 역시 마찬가지. 이 책에서 처음 본 건 아니고 또 어떤 것인지 모르는 바도 아니었지만, 이 책에서는 본문에 언급되는 단어를 다시 한 번 짚어 설명을 해준다.



전이transference 강력한 감정, 특별히 성적인 감정, 그러니까 원래 다른 사람을 향해 있던 강렬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분석 과정 중에 의사에게로 이동하는 상황을 말한다. 처음에 이는 분석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문제 같았다. 의사에 대한 증오나 사랑은 환자와 의사의 공동치료 작업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곧 전이가 정신분석의 중심적인 도구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환자들은 그들이 어린 시절 느꼈던 감정들을 분석자와의 관계 속에서 실연하게 되는데, 처음에 그들은 자신이 이전의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분석자를 향한 이러한 반응을 분석하고 재구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분석이 이상적으로 수행되면 환자들은 분석자를 향한 반응들을,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원래 대상(종종 이 대상들은 환자들의 부모가 된다.)에게로 다시 이동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정신분석 과정에서 "환자들의 병의 원인이나 동기들(물론 사악한 동기들까지 포함해서)이 환기되고 환자들로 하여금 이를 의식하게 만듦으로써분석의 목적들이 설명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이 관계는 끊임없이 해체된다. 정신분석학의 가장 큰 장애물처럼 보였던 전이는, 만야 ㄱ그것의 존재가 매번 확인되고 환자에게 설명될 수 있다면, 분석을 수행하는 데 가장 강력한 협력자로 고려될 수 있다."(Freud 1905a :159) 실제로 전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분석은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p.83)



이론을 달달 외우고 암기하는 것은 때로 무섭다. 그 이론으로만 적용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다보면 젊은 여성환자가 프로이트에게 짜증을 내고 이제 상담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그 때 프로이트는 그것이 환자의 전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환자가 성인남자로부터 받은 학대를 프로이트에게 푼다고 생각하는 거다. 2020년에 이 책을 읽는 나로서는, 하아, 그냥 프로이트가 하도 내 말을 들어쳐먹질 않아서 빡친것 같은데...라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어. 내가 상담하러 갔는데 자꾸 '너는 이래서 이래', '너는 그런거라니까' 라고 뭔가 자꾸 어긋나는 말 하는 것 같으면 빡이 오잖아요, 누구나... 아무튼 그렇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다가 상담해주는 의사에게 감정이 생기는 것은, 환자에게는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 때는 내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할지 또 누구에게 말해야할지 몰라서 이르게 된것일텐데, 의사는 내 말을 잘 들어주고 거기에 대해 대꾸를 해주려고 하니까. 그런 상황에서 성적인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찾아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이가 환자가 분석자에게 생기는 감정이라면, 분석자 역시 환자에게 감정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것을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라고 한다. 나는 이 '역전이'에 대해서라면 '섀넌 도허티'가 주연한 영화 《블라인드 폴드》가 퍼뜩 떠오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성인이라고 뻥치고 친구들과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다 본 야한 영화인데, 섀넌 도허티가 야한 거 찍었다고 해서... <베벌리힐스 90210> 의 주연이 야한 영화를... 해서 보았던 영화였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줄거리는, 섀넌 도허티가 남편과의 성관계에서 만족을 통 느끼질 못해 정신과를 찾아가 상담을 한다는 거다. 상담을 받고 남편하고 다시 섹스를 해도 통 좋아지질 않았는데, 당시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었고, 섀넌 도허티는 큰 자극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연쇄살인법 역할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남편은 연쇄살인범 역할을 맡고 섀년 도허티의 눈을 가리고 침대에 묶어놓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섹스를 시도하는데, 이에 아내인 섀넌 도허티는 모처럼 흥분하게 되는거다. 아무도 이 영화 찾아서 볼 것 같지 않아 결말까지 얘기하자면,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멈추라고 할 때에도 멈추지 않았고... 실제로 바깥의 연쇄살인범은 남편이었다는 충격적인(!) 스토리... 정말 연쇄살인범에게 연쇄살인범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 정신과 의사는 자기 병실에 있다가 앗, 이런 저런 내용을 종합해보니 그녀의 남편이 연쇄살인범 같은데? 이런거 알게 되어서 어쨌든 구출해내는 내용인데, 그 남편과의 일 전인지 후인지 이 정신과 닥터는 환자에 대한 욕망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병원 책상에 .....

그리고 영화에서는 이렇게 역전이로 환자와 섹스를 하게된 의사를 결국 그녀의 삶 전체를 구하는 구원자로 만들었던 것 같다.

이게 내가 고3때 본 영화니까 벌써 얼마전이야.... 이런 내용을 나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 적다보니 다시 보고 싶은데 구할 방법은 없겠지. 넷플 같은데에 이런게 올라와 있을 리 없겠지....





오, 그리고 아버지. 프로이트는 아버지에 대해 얘기한다. 심지어 종교와 아버지...


프로이트는 종교적 신념이 인류에게 보호를 약속하는 동시에 처벌 가능성으로 인류를 위협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이론화시킨다. 그에 따르면, 종교는 사실 소망을 충족시켜 주는 환상이다.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회에서 종교는 미신으로 간주되어 버려져야 마땅하지만, 프로이트가 보기에 종교가 미신으로 간주되어 조만간 포기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류는 미신들, 그러니까 종교가 약속하는 절대적 가치들을 뜻하는 미신들에 지나칠 정도로 의존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 느꼈던 무력함 때문에 인간은 종교에 의존하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아이에게 최초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는 부모는 종교의 차원에서 안식처를 제공하는 동시에 처벌을 내리는 신으로 재창조된다. 늘 그랬던 것처럼 프로이트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p.199-200)



이 '종교'와 '아버지', 그 강력한 존재에 대해서라면, 얼마전에 읽은 '안정혜'의 《비혼주의자 마리아》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책 속에서 기독교 신자인 여자들은 '왜 우리에겐 아버지가 그렇게 많으며,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기를 힘들어 하는가'에 대해 얘기한다. 하나님 아버지, 친아버지, 영적인 아버지의 트라이앵글.






















나는 잘 모르겠다. 주양육자도 대부분 엄마고, 자식이 무언가 잘못되면 무조건 엄마 탓을 하면서, 그러나 중요한 건 왜 아버지라고 하는걸까...



마지막으로 프로이트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남근' 그리고 남근에 대한 해석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일전에 한 유명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기차와 터널을 남근과 질의 은유라고 성적 흥분을 느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터널 질, 기차 남근" 관련 기사




2000년에 출간되고 2010년에 국내에 번역된 이 책에서, 파멜라 투르슈웰은 정확히 바로 저 은유에 대해 짚고 넘어간다.



정신분석학이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성적 욕망과 연관 짓는다는 생각은,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일반적인 (그리고 잘못된) 가정 중 하나이다. 이런 가정에 따른다면 프로이트주의자는 사람들이 성과 관련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에도, 실제로는 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어떤 환자가 소파에 누워 지난밤 꿈에 터널을 지나가는 기차가 등장했다고 말하면, 정신분석자는 흰색의 긴 수염을 어루만지며 "흠, 기차는 남근을 상징하고 터널은 여성의 질을 상징하므로 당신은 당신 어머니와 성관계를 갖는 판타지가 있는 것입니다."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정신분석학을 비웃는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장면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엉터리 분석'이라 불렀을 이런 패러디 같은 예 또한 분석 장면과 관련하여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 준다. (p.23)



헤헤..프로이트가 길쭉한건 남근이라고 그러니까 기차 남근 헤헤... 나는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을 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헤헤헤...이러고 있을 거 생각하니까 너모 기가차.. 으휴....

그 해석을 프로이트 님이 싫어하십니다...




내가 이 페이퍼를 쓰면서 지금 또(!) 깨달았는데, 정말 소설 읽기는 매우 중요하다. 소설을 읽는 것은 매우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유익한 일이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언급한 나르시시즘에 관한 것, 그러니까 스토커에 관한 것도, 리안 모리아티가 자신의 소설에서 언급하지 않나. 프로이트를 비롯한 다른 정신분석학자나 심리상담사 선생님들이 이론적으로 얘기하고 해석해주는 것들을, 소설가들은 소설을 통해서 한 편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여러분, 소설을 읽으세요!! 소설이 짱입니다!! 소설은 참말로 대단하단 말이야? 그 안에 다 있다, 한 편의 이야기와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 모두... 샤라라랑-




코로나 시대가 되고부터는 아마도 나의 저 내면 깊숙한 곳의 욕망과 일치하여 벌어진 일이겠지만, 주말에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는 것이 작은 기쁨이 되었다. 딱히 어떤 요리를 하겠다는 큰 포부는 없지마는... 텔레비젼 보다가 쉬운 요리가 나오면, 오오, 저거 주말에 해볼까? 나도 자신있는 요리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하게 되는 것.

엊그제는 퇴근해 밥을 먹고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다가 <삼시 세끼>에서 차승원이 '김치 수제비'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와, 엄청 맛있겠다. 게다가 별로 어려운 것도 없어보여. 사실 수제비는 내가 되게 싫어하는 메뉴인데(그 덩어리 밀가루. 윽!!), 얇게 만들어서 저 김치 육수랑 먹으면 끝내줄 것 같단 생각이 드는거다. 김치가 맛있으면 김치 수제비야 뭐 그냥 맛있겠지만, 차승원은 거기에 고춧가루도 좀 넣고 오뎅도 넣고 해가지고 뭔가 진한 국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기대 잔뜩 되어가지고, 언제나 그렇듯이 아빠와 엄마에게 예고했다.


"이번 일요일 점심엔 내가 김치수제비 해줄테니까 딱 기다려!"


어제 퇴근하고 가니 아빠는 내게 '나는 기다림이 있어서 행복해' 라고 말씀하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면서 덧붙이시기를 일요일 너의 수제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개터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빠 배터지게 먹게 해줄게. 잔뜩 해가지고!!" 했더니,


"조금만 해..맛없게 할텐데.."


네???????

그럴거면, 왜 기대한다 하셨나요, 아버지...



아무튼 일요일에 시도해서 성공하면, 추석 때 불렀던 친구1, 친구2 불러서 조만간 다시 대접할거다. 내가 영혼의 소울푸드로 만들어주겠어. 움화화화화화화화핫. 벌써부터 김치수제비 먹을 생각에 땀이 난다... 소주랑 먹으면 진짜 개꿀이겠지.....




라고 프로이트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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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0-1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의 전이, 역전이의 실례가 다락방님이 예전에 읽었던 소설, 예전에 보았던 영화에 진짜 딱! 똑같이 존재하고 있네요!
신기해요!!! 이런 글을 공짜로 읽어도 되나요? ㅠㅠ (공짜로 읽는 나.... ㅠㅠ)

프로이트 아직도 진도가 많이 나가지 않아서 예습의 의미로 읽는데, 참 재미있네요. 마무리의 김치수제비가 화룡점정이고, 그리고 사진이.......... 이야~~엄지척입니다!

다락방 2020-10-15 11:54   좋아요 0 | URL
저는 막연히 프로이트 어려울 거라 짐작해서 좀 두려웠는데요, 제가 그간 소설책을 많이 읽어뒀기 때문에 프로이트 읽기가 좀 수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재미있게 잘 읽히더라고요. 특히나 프로이트가 젊은 여성환자들과 불화할 때는 더 재미있어요. 저는 프로이트에게 빡치는 그 환자가 됩니다... 그건 아마도 제가 2020년을 살고 있기 때문이겠죠.
저는 아무튼 소설을 더 열심히 읽겠습니다. 지금 소설을 예전보다 덜 읽어서 초조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언젠가 단발머리님 초대해 김치수제비 끝내주게 끓여서 대접하고 싶습니다. 독립해야지...(뒤돌아 터벅터벅 걸어간다..)

syo 2020-10-1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영감님은 세워놓고 대각선으로 보니까 더 녹록지 않게 생겼다는 느낌이다.... 별로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0-15 18:12   좋아요 0 | URL
흐음.. 눕힐걸 그랬나요? 🙄

공쟝쟝 2020-10-15 2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페이퍼다🤯 이렇게 엮어서 쓰고도 마지막은 김치수제비야!!!!
이렇게 지적이고 감성적이며 맛있는 음식까지 들어있는 페이퍼를 쓰려면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0-16 07:44   좋아요 1 | URL
소설을 읽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그렇다고 제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건 아니고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근데 나 프로이트 페이퍼에 재능 있나봐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공쟝쟝 2020-10-16 07: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알고보니 그토록 싫어하던 프로이트는, 글쓰기 영감의 보고!!! 자, 전이 역전이 다음번엔 투사! 방어기제! 가죠! 맞춤 소설 추천츄천😣

다락방 2020-10-16 08:54   좋아요 1 | URL
좋아한다고 다 잘맞는 것도 아니고 싫어한다고 다 안맞는 것도 아니듯이 프로이트... 저랑 나름 잘 맞는 사람이었나봐요.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엄청 틱틱대면서 베프 먹었을지도 몰라. 또 모르지, 내가 집으로 불러서 김치수제비 해줬을지도..그러면서 ‘야 판타지 같은 개소리하지마‘ 라고 하는거야..소주 따라주면서....
 
















여성학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듣는등, 여성학에 대해 관심있게 공부하다보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프로이트를 깐다. 그는 남성을 '남근이 있는' 사람으로 기준화시키고 여성은 남근이 '없는'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많은 여성들이 어릴적 성학대를 받았다는 걸 인지해 잘 진행해나가다가 그 사례가 너무 많아 그걸 성적 욕망으로 돌려버렸다는 얘기를, 나는 프로이트 관련 책보다는 프로이트를 까는 여성학 책들에서 먼저 접했다.


알지 못하고 욕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쉽다. 그러나 제대로 까기 위해서라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프로이트가 실제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무엇을 연구하는지를 안다면 여성주의자들이 왜 까는지도 더 잘 알게 될것이었다. 설사 프로이트의 주장이 틀렸다한들, 그가 주장한 바를 토대로 그 뒤의 주장들과 연구들이 나온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에 수정이나 추가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라면 프로이트가 한 일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말을 해야 잘못된 걸 알 수 있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진지 다른사람들에게 보여야 혹여라도 잘못된 걸 누군가 짚어줄 수가 있다. 나 혼자만 속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자, 그렇게 나는 '파멜라 투르슈웰'이라는 '영어과 강사'가 쓴 프로이트를 읽는다. 프로이트를 읽는다기 보다는 프로이트에게 다가가는 방법 정도가 맞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185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오스트리아 빈으로 옮겨 공부하고 직업을 갖게 되는데, 그곳에서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여성들을 상담하기 시작한다.



프로이트가 처음 치료했던 환자들은 신경 관련 질환을 앓고 있던 빈의 중상류 계층 여성들(남성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지만)이었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는 신경성 질환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신경성 질환은 진단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性 과 현대 도시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와 긴밀하게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시 신경증 환자의 수가 눈에 띌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는 상황에 주목한 영국의 한 주석가에 따르면, "신경증과 연관된 문제들은 처음에 여성들에게서 발견되었다. 1890년대에 사람들은 매일 신경증 환자와 신경 쇠약자, 히스테리 환자들을 목격했다. …… 모든 대도시에는 신경 전문의들이 넘쳐났고, 그들의 사무실은 환자들로 가득찼다."(Showalter 1985:121) 19세기 동안 신경증은 그 범주를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 때문에 육체적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병은 일단 신경성 질환으로 명명되는 경우가 잦았다. -p.43



'육체적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병'이 여성들에게 훨씬 더 많이 일어났고, 그것 때문에 프로이트를 찾은 여성환자가 많았다는 것인데, 이 부분을 읽다보니 여러가지가 떠올랐다.


일단은 '베티 프리단'이 말한 이름 붙일수 없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문제를 느낀 여성들은 결혼 생활이나 자기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성들은 자기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엌 바닥에 윤을 내면서 불가사의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도대체 자기는 어떻게 된 여성이란 말인가? 그런 여성은 자기 불만을 인정하는 행동을 너무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같은 불만을 지니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다. 남편에게 말해보려고 애썼지만 남편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조차도 정말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15년 넘게 미국 여성들은 섹스보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훨씬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들조차 이런 증상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랬듯이 정신과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러 간 어느 여성은 "무척 수치스러워요" 또는 "전 절망적일 정도로 신경질적이에요"라고 말했다. 교외의 어느 정신과 의사는 불안해하며 말했다. "요새 여자들이 뭐가 문제인지 통 모르겠어요. 우연찮게도 환자가 대부분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겠어요. 성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도 알겠는데……." 그러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대체로 정신과 의사에게 가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었다. "정말 문제될 게 없어. 아무 문제도 없단 말이야."

1959년 4월의 어느 날 아침, 나는 뉴욕에서 15마일 떨어진 교외의 새 주택가에서 주부 네 명과 커피를 마시다가 아이가 넷 있는 엄마가 절망적인 어조로 조용히 '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 나머지 부인들은 그가 남편이나 아이들 또는 가정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자신들이 모두 똑같은 문제, 설명할 수도 없는 그 문제를 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달았다.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이들을 보육원에서 데려와서 낮잠을 재운 두 명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순수한 안도감에 울음을 터뜨렸다.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 지음, p.67-68





베티 프리단은 1950-60년대에 걸쳐 많은 여성들이 앓고 있는 이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여성성의 신화라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프로이트가 빈에서 중상류 계층 여성들의 신경질환을 상담해주던 때와는 몇십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흘러 베티 프리단이 깨달은 문제를 그 당시 프로이트가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여자가 아니니까. 자신이 원하는대로 공부할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던, 가사노동을 제공 받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육체적 원인이 분명치 않은 신경질환이라고 상담을 시작했지만,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자신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원인 파악하는게 베티 프리단과 관점, 입장 자체가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지적으로 굉장히 성숙한 아이었으므로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히브리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또 의학도 공부했다고 했지만, 육체정 증상이 없는 여성들의 질환에 대해서는, 외국어를 수십개 한다고 잘 접근하는 걸 보장하는 건 아닐것이기 때문이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이었으며, 그들의 문제를 그리고 고통을 눈 앞에서 보는 사람이었다.



두번째는, 여성이 앓고 있는 육체적 증상에 대해서 그간 의학계가 연구하지 '않은' 것들이 여성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을 신경성 질환이라 부르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비평가들은 히스테리든, 신체화든, 스트레스로 인한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이든 심인성 질환이라는 개념에 오진의 위험이 크게 내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논쟁은 영국 정신과 의사 엘리엇 슬레이터 Eliot Slater 가 1965년에 쓴 사설에서 한 경고다. 히스테리 진단을 너무 자주 내리는 의사는 자신이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의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경고했다. 슬레이터 본인을 포함한 런던 국립병원에서 1950년대에 히스테리를 진단받은 환자 85명을 추적한 결과, 9년 후 환자의 60%이상이 뇌종양과 뇌전증 같은 기질성 신경계 질환을 진단받은 것이다. 이 중 열두 명은 사망했다. "히스테리 진단은 무지를 위장하려는 것에 불과하며, 풍성한 임상 오류의 원천이다. 사실 착각일 뿐만 아니라 유혹이기도 하다."라고 슬레이터는 결론 내렸다.-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마야 뒤센베리, P120



실제로 2000년에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실린 논문은 심장마비 증상으로 미국 응급실 열 곳에 실려 온 수천 명의 환자 기록을 분석해서 오진으로 퇴원당환 환자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 추정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 오진받은 심장마비 환자가 최소 1만1천 명이라고 한다. 55세 이하의 여성은 다른 환자들에 비해 집으로 돌려보내질 확률이 7배나 높았다. 오진의 결과는 대단히 심각했다. 집으로 돌아간 환자의 사망률이 두 배나 높았기 때문이다.-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마야 뒤센베리,P165



이는 심장마비의 증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증상은 교과서를 벗어나 더 다양하게 나타난다. 남성 연구를 통해 도출된 대표적인 증상은 극심한 가슴 통증과 왼쪽 팔을 타고 흐르는 통증으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나이 지긋한 과체중인 백인 남성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의자에 털썩 쓰러지듯 앉는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할리우드 심장마비‘로 알려지면서 문화적인 인식 속에 스며들었다. 이 상황은 의학 교과서에도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여성, 특히 폐경 전 여성이라면 심장마비가 왔을 때 ‘비전형적인 증상‘을 더 많이 보이며, 증상이 며칠에서 몇 주 동안 이어지기도 한다. 목, 목구멍, 어깨, 등 위쪽의 통증이나 체한 증상, 숨이 차는 증상, 메스꺼움이나 구토, 발한, 불안감, 눈앞이 깜깜해지는 증상, 어지럼증, 일상적이지 않은 피로감이나 불면증을 들 수 있다.-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마야 뒤센베리,P171



이 역시 프로이트가 신경성 질환으로 환자들을 진찰했을 때로부터 몇십년 뒤의 일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당시의 다른 정신과 의사들이 신경성 질환이라 명명했던 것들은, 물론 그 당시에 사람들이 '그것은 여성들의 능력을 억압한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에서 비롯됐어' 라고 말하지도 못했고, '여성들의 신체적 증상으로 아무도 병이나 약을 연구하지 않았어' 하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야 '그것은 이런 것일 수 있었다' 한 것이었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팠고 앓았으되, 제대로 된 치료나 상담을 받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나름대로 상담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치료하고자 했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제대로 치료받은' 사람이 있었을까, 라고 하면.. 그의 분석은 분석 자체로 의미가 있었으되 실제의 치료와는 좀 거리가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아직 내가 프로이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실린 사례를 보면 딱히 막 치료를 잘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게 필요하다. 무엇이 문제인줄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데, 그것 자체가 어긋나있던 게 아닌가 싶은 거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환자들이 어린 시절과 관련하여 드러내는 기억들은 자주 때 이른 성적 경험들, 곧 아버지나 아버지를 대신할 만한 인물에 의한 성적 공격과 같은 것을 수반한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이라 부르게 되는 것은, 그의 생각에 일어난 두 가지 중요한 변화, 즉 이론적 차원과 실제 치료 기술적 차원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이론적인 차원에서 그는 환자들이 어려서 경험했다고 하는 성적 학대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판타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환자들의 이야기가 모두 꼭 판타지였던 것은 아니지만, 판타지일 수도 있었다. 프로이트가 유혹 이론을 거부하는 과정과 관련된 최근의 논쟁은 마지막 장에서 다시 논의될 것이다.) -p.59



신경질환을 앓고 프로이트를 찾아오는 사람들중에는 어릴 때 성적 학대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을 제대로 원인분석했지만, 이내 그 수가 많아 프로이트는 '판타지'로 방향을 바꾼다. 이에 대해서는 주디스 허먼이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히스테리아에 관한 모든 사례의 밑바탕에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지나치게 이른 성적 경험'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 발생은 아동기 초기에 일어난 것이고, 수십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방해하고 있지만, 정신분석을 통하여 밝혀질 수 있다." -《트라우마》, 주디스 루이스 허먼,  p.36




1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의 기원에 놓인 외상 이론을 비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프로이트의 대응은 그의 가설이 담고 있는 급진적인 사회적 함의에 스스로 계속 불편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히스테리아는 여성에게 너무 흔한 것이었고, 만약 그의 환자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의 이론이 정확하다면, "아동에 대한 도착 행위"라고 말한 것은 만연해 있는 무엇이 되어 버린다. 그가 처음 히스테리아 연구를 시작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개업의로 일하고 있는 빈의 존경받는 부르주아 가족들 사이에서도 아동 학대가 빈발한다고 결론지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딜레마에 빠진 프로이트는 여성 환자에게 귀 기울이기를 그만두었다. -《트라우마》, 주디스 루이스 허먼, p.36-37


십대의 도라는 아버지의 정교한 성적 술책의 볼모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실제적으로 도라를 성적 장난감으로 친구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도라의 분노와 모욕감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러한 착취 상황이 그녀의 욕망의 충족인 것처럼, 그녀의 에로틱한 흥분을 탐색하려고 하였다. 프로이트가 어떤 행위를 복수로 해석하자, 도라는 치료를 그만두었다. 《트라우마》, 주디스 루이스 허먼, p.37



주디스 허먼과 파멜라 투르슈웰은 같은 프로이트를 읽고 접근하는 방향이나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둘은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파멜라 투르슈웰은 '판타지일 수도 있었다'고 프로이트에게 좀 더 가까이 서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주디스 허먼은 가차없게 내치는 느낌. 판타지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주디스 허먼이 하는 말쪽에 좀 더 마음이 기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도라는 치료를 그만두었는데 -마침 이 책에서도 도라 부분을 읽고 있다-, 정말 프로이트에게 제대로 치료받고 비로소 안정적인 삶을 살게된 사람이 있기는 한걸까? 내가 프로이트를 앞으로 좀 더 읽어보면 그런 사례들을 자주 마주칠 수 있게 될까? 프로이트를 읽는 건 분명 의미가 있고 또 내가 이 시점에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의 치료에 대해서라면 좀...


어쨌든 내가 주디스 허먼을 더 신뢰하고 그쪽으로 마음이 더 기우는 것은, 며칠전부터 '조르쥬 비가렐로'의 《강간의 역사》를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앙시앵 레짐 시대의 강간의 역사로부터 시작되는데, 미성년자 강간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아주 많은 수의 강간 피해자들이 10대 미만이었다. 이 책에는10세 미만의 강간 피해 아동에 대한 사례가 끊임없이 나온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강간범들이 희생자의 나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과 어린아이들을 '자발적으로' 결정하고 유혹을 할 수 있는 행위자로, 음란한 행위에 도오하는 '논리적인' 상대자로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1769년 5세 여아를 강간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르몽은 희생자가 "그짓을 훤히 알고 있었으며 직업여성들과 같은 언사를 쓰는 방탕한 아이"였다고 거듭 주장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변호한다. 강간범은 언제나, 어린아니들이 그 미숙함 때문에 법적 보호를 바독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쪽에서 먼저 성인을 유혹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 《강간의 역사》, 조르쥬 비가렐로, p.46



5세 아이가 그 짓을 훤히 알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말이 안되지만, 설사 주변 환경으로 인해 그 짓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아이와 실제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거기에 대한 반성 없이 나를 유혹한 다섯살 꼬마가 음탕해! 라고 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해지는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당시의 프랑스는 강간범에 대한 처벌이 약했다. 오히려 사회질서를 해치는 노상 강도에 대한 처벌이 더 강했다. 강간에 대해서라면 반항하는 여성에게 '서로 좋자고 이러는데 왜 반항하느냐'고 윽박지를 수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앙시앵 레짐 시대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빈에서 신경성 질환을 상담하던 프로이트가 살던 시대와는 거리와 시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차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오래전부터 남자들은 어린 아이들을-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이웃집 아저씨가, 삼촌이- 강간해왔다. 심지어 앙시앵 레짐 시대에는 아버지로부터 강간당한 꼬마를 함께 처벌했다. 더러운 물이 옮겨졌다고. 이런 압박들은 여성들에게 그대로 남을텐데 -강간당한 나도 더러운거구나..- 그렇게 시간을 거쳐오며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고나서도 그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해 상담을 찾아가게 되기까지 그렇게나 시간이 걸렸던 것이 아닌가. 앙시앵 레짐 시대에 강간당한 꼬마들이 성인이 되어 프로이트를 찾은 건 아니지만, 그 다음 세대의 여성들과 그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나는 괴롭다', '나는 이것으로부터 낫고 싶다'고 찾게된 게 아닐까 싶은 거다.


그런 사람들을 프로이트는 제대로 상담했었고 제대로 접근했었으나, 그런데 그런 사례가 너무 많았다. 어릴 때 성학대가 있었군, 너무 이른 나이에 성적 경험을 했군, 아버지나 아버지를 대체한 자들이 그리했군, 이라고 접근했으나 그걸 판타지로 돌려버리는 것은, 역시나 그가 그 시대의 유럽 남성이어서 그랬던 것이다. 비단 그당시의 그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한국의 남성들도 여성들의 성추행, 성폭행 경험에 대해 얘기를 들으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본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게 그렇게 많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다. 그러나 여자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면 정말로 대부분이 그런 경험이 있다. 피해자가 되었던 때가, 아이었을 때 그리고 청소년이었을 때, 성인이 되었을 때도 여자라는 신체적 조건 때문에 남자들로부터 추행과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다. 아주 많이 말하여지지 못하고 감추고 있던 것들이, 누군가 이런 적이 있노라고 털어놓기 시작하면 갑자기 다들 쏟아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판타지'라고 명명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이 든다. 온몸으로 거부하고 싶다. 판타지라니, 나도 그게 판타지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이고 실재이다.




그래서 300쪽도 안되는 어렵지 않은 프로이트 개론서를 읽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읽다가 수시로 내가 읽었던 다른 책들을 찾아보아야 했으니까. 계속 읽고 더 읽고 더 읽다보면 아마도 더 할말이 많아지겠지. 책의 뒷표지에는 '프로이트에 찬성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는데, 찬성과 반대를 넘어서서 프로이트를 읽고 알아두는 것은 분명 유용할것이다. 그래서 또 프로이트를 주문했다. 사실 프로이트를 주문했다기보다는, 프로이트에게 접근하는 법을 주문했다는 게 맞는 것이지만.





















요즘은 사는 것에 즐거움도 의욕도 없다. 이런 시기가 곧 지나겠지, 라고 그저 흘려보내는 중이다. 시간이 가는 건 너무 안타깝고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동료가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주었다. 커피를 내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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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10-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하셨군요! 글 좋습니다^^

다락방 2020-10-13 10:51   좋아요 1 | URL
얇은데 속도는 잘 안나네요 ㅠㅠ
저는 사람,장소, 환대보다 이 책을 먼저 시작합니다. 이거 빨리 읽어야 사.장.환. 도 읽을텐데, 초조합니다. 으하핫

비연 2020-10-13 12:52   좋아요 0 | URL
사.장.환을 읽다가 잠시 홀딩 중인데 얼른 읽어야겠어요 ㅎㅎ
프로이트도 읽어야 하고.. 으윽. 초조하네요 정말 ㅜ

다락방 2020-10-13 13:34   좋아요 0 | URL
시간이 왜이렇게 빠른건가요, 비연님 ㅜㅜ

2020-10-13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3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20-10-13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어마하다!! 잘 썼다!! 역시....

다락방 2020-10-14 07:33   좋아요 0 | URL
무슨... 길기만 한 글이죠....

수이 2020-10-14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말씀 맞아요, 새삼 감탄했어요, 다락방님이 더 좋아진 글입니다.

다락방 2020-10-14 09:32   좋아요 0 | URL
아이고 말씀 감사합니다 ㅠㅠ

공쟝쟝 2020-10-1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번 동감해요. 그 많은 추행을 여성의 판타지라고 생각해버린 건 프로이트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베티프리단의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가 신경증 환자와 비슷하다는 지적 역시 매우 고개를 끄덕입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어떻고 저떻고 보다는 ‘우리가 조금 더 집중해서 이야기 나눠야 할 부분’ 치유되고자 했던, 문제를 문제로만 병을 병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았던 내담자 - 환자들- 그녀들의 치유 의지를 다락방님이 읽어내신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겠지요.
당대의 환자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열심히 고민해서 낫게하고자, 정신분석을 내놓은 (비록 유럽남이었으나) 프로이트에게 고맙습니다. 이상하게 꼬아 듣긴 했어도 진지하게 들으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그의 이론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겠죠. 가야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기 위해 편견없이 책장를 펼치는 것. 저도 슬슬 따라갈게요! (찡긋-)

다락방 2020-10-16 08:57   좋아요 0 | URL
정신분석을 내놓은 건 정말 유의미한 일이죠. 필요한 일이었고요.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분명 발판을 마련한 것이니, 그 점은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길이라도 일단 들어서야 수정해서라도 앞으로 가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이크 이 길이 아니구나 하고 돌아갈 수라도 있으니, 다른 길이라도 찾아볼 수 있으니, 일단 길을 쫙 펼쳐놔준건 좋은 일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저도 프로이트 더 읽어보려고요. 이 할아버지가 ㅋㅋㅋ 읽으면 읽을수록 내 안의 영감 끄집어내 책 나오게 하고 소설 나오게 하고 난리터진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랑 의외로 궁합 맞는 할아버지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곧 사장환 시작하겠습니다. 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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