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22페이지 본문 하단에 실린 각주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무한히 긴 삶에 대한 욕구는 무한한 인식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의 주인공은 불사不死의 삶이라는 가능성 앞에서 주저하는데, 그때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와 같은 삶이 무한한 배움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실로, 무한히 오래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와, 그 언어들로 전승되고 기록된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 전체를 배울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종합하여 단 한 권의 최종적인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은 전 세계의 도서관을 합친 것과 맞먹을 것이며, 우주와 자기 자신을 향한 인류의 기나긴 탐구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이는 절대정신이 자신의 기원이자 목표로 귀환함을, 그리하여 거대한 자연사적·세계사적 원운동을 완성함을 의미한다. (p.22)


















찾아보니 국내에도 번역된 책이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으로만 알고 있다가 이렇게 소설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불사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나도 자주 생각해왔다. 내가 불사의 삶을 생각한건 단순하게도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종종 사람들에게 죽음이 두렵고 그래서 불사의 삶을 원하노라, 고 말하면 이내 '아프고 병들면서 살아있는 건 고통이지 않냐'고 반문한다. 그럴때면 나 역시 고민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불사의 삶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떠올려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늙고 병들지 않은 채로 영원히 사는 삶을 의미했던 것 같다. 가능성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운 건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죽지 않을 수 있다면 뭐든 할 것 같은 마음이 된다.


보부아르와 이 하찮은 나 따위...의 생각은 바로 여기서 갈린다. 내가 영원히 살기를 바란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라는 이유 말고는 딱히 없다. 그러니까 계속 살아서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쌓고..하는 것에 대한건 없다는 거다. 단순히 죽기 두렵다 →영원히 살고싶다로 이어졌을 뿐. 그러나 보부아르는 불사의 삶이 무한한 배움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오래 살아서 오래 공부하다보면 결국은 최종적으로 모든게 담긴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라니.. 너무나 대단하지 않은가. 내가 얼마나 하찮은 쪼꼬미 인간인지를 보부아르를 보며 깨닫는다.



이런 보부아르로부터 영감을 받은걸까. 나는 불사의 삶으로부터 무한한 배움의 가능성을 보게됐다는 보부아르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자 마자, 크- '블레이크 라이블리' 주연의 《아델라인:멈춰진 시간》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속에서 주인공 아델라인은 큰 사고를 당했는데, 그 사고 후에 늙지 않은 채로 그 모습 그대로 계속 살게 된다. 그녀에게는 어린 딸이 있는데 시간이 흘러 그녀의 딸이 할머니가 되도록 그녀는 여전히 젊은 모습을 유지하게 되는 것. 그렇게 오래 살아오면서 현재,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 데이트중이다. 영화는 그런 현재를 중점적으로 보여주면서 진행되는데, 아아, 그녀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뭘했을까? 외국어를 익혔다!! 그래서 포르투갈어도 막 해! 와, 저게 가능하겠구나, 저게 가능하겠어. 오래 살면서 그녀가 계속 젊으니 그녀는 외국어를 공부한거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오래산다고 다 그렇게 살 순 없을텐데, 이거야말로 아델라인이 선택한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델라인이 해를 거듭해 살아오면서 외국어를 익혔다면, 보부아르가 말한 것처럼 무한한 배움에 대한 것도 가능성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젊음을 유지하는게 더 유리할 것 같다. 나이 들어 책읽고 공부하니 예전같지 않아서, 젊을 때 막 듣고 보고 배우는 게 너무 중요할 것 같은 거다. 외국어를 이것저것 하게 된다면 내 능력치가 커지는 것일테고, 그렇다면...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만약 지금 한 500년쯤 살고 있으면서 외국어 여러개를 마스터했다면 지금쯤은 미국에 가서 마리 루티 강의도 들어보고 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가 500년을 살면서 열심히 외국어를 공부하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것이지만...


아무튼 무한한 삶에서 무한한 배움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보부아르님이 진짜 대단하다... 나는 그런 생각 안해봤어.. 나는 역시 쪼꼬미 인간이야..쭈구리다.....


영화 아델라인을 보고 썼던 페이퍼는 여기 ☞ https://blog.aladin.co.kr/fallen77/9661834



이 책, 《사람, 장소, 환대》는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나를 건드리는 부분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사실 가장 먼저 나를 건드리는 문장은 ''공공장소에("대낮의 햇빛 아래")'라는 문장이었다.



그림자는 물론 몸과 다르다. 하지만 몸이 아니면서도 몸의 일부인 것처럼 몸을 따라다니며 몸의 연기를 돕는 물건들이 많이 있다. 가발이나 지팡이나 틀니처럼 말이다. 이런 소품들은 개인에게 신체적인 완전성을 부여하며 그가 공공장소에("대낮의 햇빛 아래") 오점 없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일상의 연극은 언제나 분장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몸과 인공적 부속물(또는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몸과 인공적 부속물들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몸)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나체의 전시가 금지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말해주듯, 순수한 몸 그 자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p.17-18)



위의 구절에서 공공장소에, 대낮의 햇빛 아래 라는 문장만이 나에게 확 볼드체로 형광펜 쳐져서 들어온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숨겨진 존재가 되어야 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보다 많이.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를 숨겨야 했던 때도 있을 것이고. 나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숨겨진 것, 숨겨야 하는 것, '들키면 안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그건 나 자신에 대해 쪽팔린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만나면서 내 존재를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내가 좋다는 이유로 계속 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수시로 생각해야 했고, 은유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얘기하자면 '대낮에' , '공공장소에서' 나를 만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존재는 그에게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나 역시 상대를 그런식으로 대한 적이 있다. '대낮에' , '공공장소에' 그를 드러내는 걸 피하려고 했던 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대낮에, 햇빛 아래서 만날 수 있지만 어둠을 선택하는 것과, 어둠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다르다. 나는 누군가 나를 햇빛 아래서 만나기보다는 어둠에서만 만나려고 해서 상심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 때의 나를 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그 당시에도 그걸 못견뎌했다. 심심풀이 땅콩이 된 것 같은, 그러니까 김현경의 이 책에서 말한것처럼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 그건 아프다기 보다는 상하고 다치는 거였다. 다시는 그런 상황 속으로 나를 몰아넣지 않겠다고 수십번 다짐을 했던 시간이 내게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나는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내가 살면서 굳게 결심하고 끝까지 가져가자고 다짐한 게 있다면, 그건 '내가 나 자신한테 쪽팔리게 살지말자'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햇빛 아래가 아닌 어둠에서만 불러내려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손을 놓을 것이다. 내가 나에게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나 역시 누군가를 그렇게 대하려고 했던 시간들에 대해서도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떠올린다. 누가 나를 어둠속에서만 불러내려 했을 때 절망했던 것처럼, 내가 누군가를 어둠속에만 불러내려 했을 때, 나 역시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가 숨지 않는 것, 대낮의 햇빛 아래에, 공공장소에서도 웃으면서 활짝 만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오늘은 어둠에서, 라고 조건을 붙여 만나도 행복할 터였다. 저 볼드체의 문장은 순식간에 나를 과거의 여러시간으로 데려다놓았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아아, 불후의 명곡, <Color Of The Night>를 찾아 듣게 했다. 다시 들어도 로렌 크리스티의 목소리는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사람 가슴을 후벼판다.






로렌 크리스티도 대낮에 그를 만나지 못하고 숨어서 만나야 했나부다... 크-



You and I moving in the dark

Bodies close but souls apart

Shadowed smiles(그림자!!)

And secrets are unrevealed

I need to know the way you feel


I'll bive you everything I am

And everything I want to be

I'll put it in your hands

If you could open up to me

Oh cna't we ever get beyond this wall


Cause all I want is just once

te see you in the light

But you hide behind

the color of the night


I can't go on running from the past

Love has turned away this mask

And now like clouds, like rain

I'm drowning and I blame it all on you

I'm lost, God save me



가사가 더 있지만 이쯤하겠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 갓 세이브미~ 에서 울고, 내가 원하는 건 한번이라도 너를 밝은 곳에서 보는 것이라는 말에 운다. 울자. 이 아침 울자..가을은 원래 울라고 있는 거다.... 울자. 크라이, 크라이... 나한테 밤에만 전화하지마... 내가 밤에만 픽업더폰 하게 하지마..... 그런건 이제 다 끝났어...........








You call me at night and I pick up the phone.....

over it


밤에만 전화하는 남자 닥치라고 하자.....수화기를 들지마!!




사람에 대해 얘기하면서 태아,군인,사형수에 대해 언급할 때도 번번이 복잡한 마음이 되었지만, 2장에서 외국인에 대해 언급할 때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p.64)



여행객으로, 관광객으로 찾아가는 외국과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외국에 대해서, 그 낯선 사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어딘가의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이 힘겨워야 할까.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p.25-26)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에게 나만큼은 철회되지 않을, 무조건적인 환대를 해주는 사람이고 싶다. 나에게 당신은 언제나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조건 따위 없다고, 대낮에 햇빛 아래에서 언제든 볼 수 있다고.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도.



좋은 책이다. 자꾸자꾸 페이지에 눈길을 멈추게 되는 책이다. 아직 75쪽까지밖에 못읽었지만 그렇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내게 어떤 책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 책 나는 지루했지만 네가 읽어준다면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는동안 달콤한 말 참 많이도 들었지..다 끝나버렸지만. 어쨌든 이 책은 내가 환대하는 이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이다. 매일매일 읽어주고 결국 한 권 다 읽어내고 싶은 그런 책. 읽어주다가 어떤 문장들에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을 것 같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대, 정말 그렇지? 사회 안에 내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너무 외로웠잖아? 같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지.



그럼 이만..



이 책 읽는 동안 '너멀 퓨워'의 《공간 침입자》를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드워킨은 낙태에 대한 처벌이 곧 태아가 사람임을 함축하지 않는다면서, 완고한 낙태반대론자라도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 낙태에 찬성한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만일 태아가 사람이라면, 이는 강간에 의해 잉태된 사람은 살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로널드 드워킨, 『생명의 지배영역』, 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2008., p.104).- P32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기혼 여성은 친족이 없는kinless존재라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조선 시대에 기혼 여성에게 적용되었던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은 여자들이 혼인과 동시에 부계 친족 집단에서 영구히 성원권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출가한 여자는 부모의 제사에 참여할 수 없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다. 그리고 친정 일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출가외인이라는 표현은 여자가 친정 일에 개입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시집에서 쫓겨나도 친정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친정에 대해서 ‘외인外人,‘ 즉 아웃사이더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가 남편의 친족 집단에서 그에 상응하는 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아래 계속)- P37

그녀는 시집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지도 않고, 제사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두 집단 중 어느 쪽에서도 성원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시집살이가 종살이와 비슷하게 체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족이 없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나서줄 제삼자가 없다는 것이다. 출가한 여자는 원래 자기가 속해 있던 친족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녀의 운명은 이제 전적으로 시집 식구의 손에 달려있다. 하지만 그녀와 노예의 공통점은 여기까지이다. 노예는 아무 명예도 갖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명예가 중요하다. 또 그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시집과 혈연으로 이어지게 되며,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갖는다.- P37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로 더러운 건 아니지만, 밥그릇을 침실에 두거나 음식을 옷에 흘리면 더럽다. 마찬가지로 목욕 도구를 옷장에 두거나 옷을 의자에 걸어두는 것, 집 밖에서 쓰는 물건을 실내에 두는 것, 위층의 물건을 아래층에 두는 것, 겉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속옷이 나와 있는 것 등은 더럽다."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New York:Routledge, 2002. pp.44~45- P73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으먕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관은 여성에게 안을, 남성에게 밖을 할당한다. 그러면서 여성이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은 공적으로 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
이 이데올로기적 구별의 핵심적 기능은 여자가 자기 집을 갖는 것-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과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을 막는 데 있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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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10-2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깊이 읽고 많이 느끼시는 다락방님!! 전 조금 뒤의 우정 파트를 읽고 있어요. 이 책은 갈 수록 더 좋아요. 무조건 적인 환대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렵니다 클킁

다락방 2020-10-22 08:47   좋아요 1 | URL
아아, 우정 파트라니, 너무 기대돼요! 우정 파트 읽고 싶어요! 열심히 읽어야겠어요.
북플 보니까 공쟝쟝님 이 책 완독했던데, 고생했습니다. 꺅 >.<

공쟝쟝 2020-10-22 12:15   좋아요 0 | URL
뒤로갈 수록 그나마 잘 넘어가서 ㅋㅋㅋ 으히히 팔로팔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