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한 십오년전쯤이었을 것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그 당시 부장은(현재는 퇴사한 상태) 결혼하지 않은 남자사람이었는데, 사무실에서 곧잘 담배를 피곤 했었다. 그리고는 침도 뱉었었지..참 더럽고 더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은 담배에 얽힌 자신의 일화를 자랑스레 얘기했더랬다. 자신이 젊었던 시절, 길에서 담배피는 여자를 보고(길이었는지 술집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난다), 처음 보는 여자이지만 싸대기를 날렸다는 것. 그 얘길 듣고 있던 직원들은 모두 여자였는데, 그 얘기를 자랑스레 하는 그를 보노라니.....그게 뭐 그렇게 자랑스러울 일일까? 그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그 일에 대해서 언제든 자랑처럼 얘기할 수 있는가보았다. 그 일은 그의 자랑이었다. 내가 진짜 몇 번이고 누누이 얘기하지만 무엇을 욕으로 하느냐와 무엇을 자랑거리로 삼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담배 피는 여자의 싸대기를 날렸지, 를 이십년이 지나도 자랑거리로 삼는 남자사람이라니...


이 일은 비단 그 사람만의 무용담은 아니었다. 아마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일화가 아닐까. 왜, 그 유명한 드라마 [모래시계]였나, 거기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왔던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고현정이 그 일에 빡쳐서 그 남자랑 맞장 뜨는 걸로 끝났던 것 같지만... (기억 불분명)


내가 이 얘기를 왜 했냐면, 김현경 역시 그 일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공공장소에서, 공원이나 카페나 기차역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시민권을 가진 거주자들뿐 아니라 잠시 머무는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공간에서, 여성은 오랫동안(어쩌면 한번도) 남성과 동등한 정도로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였다. 여성은 인도의 달리트처럼 또는 민권운동이 시작되기 전 미국의 흑인들처럼 어떤 구역이나 건물에 출입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옷차림이나 행동거지와 관련된 다양한 금기를 통해 더욱 미묘한 통제를 받았다. 여성이 길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규칙이 그러한 예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무수히 쏟아지는 노골적인 비난의 시선을 각오해야 했고, 심지어 모르는 남자에게 뺨을 맞더라도 항변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남자들은 남자라는 것만으로도 자기에게 모르는 여자의 일탈을 훈계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 국가에서 남자라면 누구든 히잡을 쓴 여자 아무에게나 다가가서 "히잡을 똑바로 써!" 라고 야단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영화 「페르세폴리스」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히잡을 쓴다는 것은 단지 신체의 일부를 가린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모욕당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1980년 대의 우리는 히잡을 쓰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모욕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히잡을 쓴 여인들과 비슷했다. -p.290



위의 인용문은 이 책의 끝에 실린 부록 <장소에 대한 두 개의 메모>의 일부분이다. 본문도 좋지만 이렇게 부록으로 여성의 장소, 환대, 위치에 대해 써둔 게 너무 좋다.



우리는 남자들과 똑같이 공부했고, 학위와 자격증을 땄고, 직업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이냐 가정이냐' 따위의, 남자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닌 문제 앞에서 고민하지 않는가? 더 이상 우리에게 차림새나 행동거지를 보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염색을 하고, 피어싱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폭행을 두려워하며 밤거리를 걷지 않는가?

나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여성과 성공하지 못한 여성의 차이는 성공한 흑인과 성공하지 못한 흑인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결국 여성이며, 흑인인 것이다. 성폭행 당하는 여성의 수가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습격당하는 흑인의 수보다 더 많다는 점에서, 여성은 흑인보다 못한 처지라고 할 수도 있다. KKK단의 린치가 인간의 공격 본능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성폭행은 남성의 성욕으로 설명될 수 없다. 성폭행은 남성 지배 사회가 조장하고 묵인하는 일종의 의례이며, 린치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에게 '교훈'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환대는 여전히 조건적이다. 여성은 어디서나 모욕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멋진 옷과 가방도, 자격증도, 명패와 직함도 완전한 보호막이 되어주진 못한다.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이등 시민이다. 흑인 변호사나 흑인 교수 심지어 흑인 대통령의 존재가 전체 흑인의 지위를 판단하는 데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듯이, 몇몇 성공한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성은 자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환대의 권리-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는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의 어젠다를 구성할 것이다. -p.293-294



부록이지만, 이 여성에게 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글은 '너멀 퓨워'의 《공간침입자》의 구절들과 통한다.















[지리학자] 도린 매시(Doreen Massey)는 젠더 범주에 따른 공간/시간을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9살인가 10살 무렵의 일인데 지금도 가끔 떠오른 꽤 선명한 장면이 있다. 당시 맨체스터 외곽에 살던 내게 ‘시내로 나가는 일‘은 비교적 큰일이었다. 이층버스에 올라타 반시간 정도를 가야 했다. 시내로 나가는 길에 머지강의 넓고 얕은 계곡을 건넜고, 내 기억으로 차갑고 안개 낀 먼 곳에까지 축축한 진흙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맨체스터 지역 전체 모든 곳이 축구경기장과 럭비경기장으로 나눠져 있었고, 시내로 나가는 토요일마다 그 방대한 공간이 공을 쫓는 수많은 아이로 가득 찬 광경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많은 수였다(버스 꼭대기에 앉아 있으며서 마치 로리(Laurence Lowry;1887-~1996)의 거대하고 활기찬 그림을 보는 듯했는데, 로리가 그린 것보다는 좀 더 밝은 빛깔의 옷을 입은 아이들, 빨간 스타킹을 신은 그들의 다리가 보였다).
이 모든 것을 매우 정확히 기억한다. 혼란스럽고 약간 사려 깊은 어린아이의 눈에도 분명하게 각인된 또 하나의 사실은, 바로 넓은 머지강 평야 전체가 완전히 남자아이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그 경기장들에 가지 않았다. 그곳은 또 다른 금지된 세계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오늘 내가 공간 침입자라는 생각과 약간의 긴장감을 품은 채 이 축구경기장 계단석에 서 있다. 나는 이것을 무척 좋아한다(Massey196: 185). - 《공간침입자》, 너멀 퓨워, p.21-22



린다 맥도웰(Linda McDowell)은 19세기 영국에 출현한 도시 생활에 주목했다.

여성들이 거리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해석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치 않은 성적 관심에 자주 노출되었다. 이를테면 후기 빅토리아 시대 케임브리지에서 초창기 여학생들은 공적 영역에 나갈 때면 도시의 많은 ‘방종한‘ 여성과 자신들을 구별짓기 위해 장갑과 모자를 착용하는 것이 의무였다(1996: 154)

이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번번이 경계선을 넘어섰고, 그들의 움직임을 제약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새롭게 정의해낸 영역과 장소들에 진입했다(Wilson 1992) - 《공간침입자》, 너멀 퓨워,p.50-51



여성은 국가와 조금 다른 관계를 맺고 이는 시민적인 것과 가족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자연과 이성의 분리와 연관된다. 여성은 가족과 자연의 상(像)으로서 시민 영역의 자리에 놓인다. 신체혐오증이-일반적으로 암묵적인 남성 개인의-정치를 지배하는 한편 국가의 신체성은 여성 이미지를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일가권속을 돌보는 이나 방관자로 내세운다. 국가의 강한 어머니, 국가의 용감한 보호자이자 돌보는 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모성, 땅, 정의와 연계된 제한된 범위의 여성성 안에서만 인정받는다. -《공간침입자》, 너멀 퓨워, p.54




재차 언급하지만 위의 부분은 부록으로 실려있는 것이다. 이 책은 비단 여성의 조건적 환대뿐만 아니라,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사회의 환대를 받지 못한 혹은 조건적 환대에 기댈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러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조건적 환대속에서 사람이 왜 늘 사람일 수 없는지 주장하는 김현경의 글을 읽는데,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들이 있었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 나는 그것에 대해서 개인의 복수심으로 그를 처벌하고 싶어하지 않았는가. 또한 외국인에 대해서, 난민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환대가 나에게 있었던가, 하면 아니었던 거다. 이 책 한 권 읽었다고 내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지도 않을테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복수에 치중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사회 계약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이 계약속에서만이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이려면 환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읽는 것은 앞으로 내가 어떤 가치판단을 할 때 분명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김현경의 말처럼 무조건 환대속의 주인공은 아니다.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이 분명 있었고, 그리고 내가 나이가 많고 회사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으며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나는 나 이후의 여성들이 무조건적인 환대 속에서 사회에 당당히, 남자들과 동등하기 위치하기를 바라지만, 그런 시간이 더디게 올 것 같아 두렵다. 예전에 비하면 여자들의 위치가 달라졌다 해도, 여전히 조건적인 환대에 머물러 있는 게 사실이니까.


자신이 있을 자리를 아직 찾지 못한, 여전히 찾는 중인 사람들을 생각하노라니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특히나 태어난 곳이 아닌 장소에서 머무르기를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터였다. 낯선 땅에서야말로 조건적인 환대 속에서 매일매일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길 결정하는 삶은 그 사람을 얼마나 주저앉힐까. 주저앉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이 힘을 내야할까. 김현경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이 책에서 줄곧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바르게 살아보자 힘이 나기 보다는 내내 나는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쓰였다.



'장소'를 갖지 못한 사람들, 즉 자신들이 속한 곳이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또는 그들이 머물러도 좋은 자리, 점유할 수 있는 위치를 이 세계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p.283



모든 장소에 속한다는 말은 어느 장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올해는 이 나라에서 일하고 내년에는 저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 오늘은 이 도시에서 아침을 맞고 내일은 저 도시에서 밤을 맞는 사람은 아마 세계화 시대에 자본이 원하는 인간형이겠지만, 우리가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은 아니다. 현실의 인간은 그처럼 가볍게 삶의 근거지를 바꿀 수 없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기억의 무거운 짐을 끌고 다녀야 하는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갈 때마다 이 짐은 점점 불어나기 때문이다. 쉽게 떠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쉽게 잊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과거를 억지로 잊고 애착을 끊음으로써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정체성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의도적인 망각과 인간관계의 급격한 재편성은 자아가 불연속적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한 장소를 떠나는 것은 그 장소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며,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뿐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소'의 의미에 천찬하근 것은 이 모든 이유들에서이다. -p.285-287



기억의 무거운 짐, 불어나는 짐, 잊을 수있는 인간, 정체성의 변화, 의도적 망각, 인간관계의 급격한 재편성, 불연속적 자아, 다른 사람들의 우리에 대한 기억.. 이란 단어들을 나란히 읽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여성으로서 무조건적인 환대를 받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는 아직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 내가 단단하게 위치한 장소도 존재한다. 나는 불완전한 사람이며 완전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안정적 장소를 제공해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나란히 놓인 단어들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런 단어들 옆에 내가 무조건적인 환대를 붙여준다면, 내가 장소가 되고 공간이 되고 그렇게 내 안에서 당신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이 가능해질 거라는 생각. 사회 자체가 불안정하고 불완전해서 여전히 누군가를 배제하고 환대하지 못하고 있고, 그럼에도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체가 불완전하게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환대함으로 맞물리며 존재의 고통을 덜 수 있는게 아닐까. 나는 나 자체로 불안정한 땅을 딛고 서있고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가끔은 어깨에 힘을 주고 밀치거나 한쪽 발 먼저 들이밀어야 하지만, 또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는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라고 한 손을 크게 안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들어와, 당신에게 무조건적인 환대를 내가 줄게, 어디에서도 받아보지도 못한 그런 환대를.



좋은 책을 읽었는데 왜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나보다 다른 사람 때문에 더 슬퍼진다. 나 역시 온전히 환대받는 구성원이 되지도 못하면서, 그러나 환대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어딘가에서 내쳐지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슬프다.



프로이트 패러다임 읽으러 가야겠다. 프로이트 졸라 까면서 힘내야지.









이 가상의 대화는 ‘모두가 죽는 것보다 한 사람만 죽는게 낫다‘는 공리주의적 계산법의 모순을 폭로한다(고 나는 믿는다). ‘낫다‘는 것은 누구에게 그렇다는 뜻인가? 희생자는 희생이 결정된 순간부터 더 이상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말은 결국 ‘죽지 않기로 결정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죽지 않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 죽기로 결정된 사람에게 이 말은 완전히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사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공리주의적 계산법의 용도는 희생자들을 설득시키는 것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양심을 위로하는 데 있는 것 같다. - P275

베카리아는 오히려 범죄에 대한 처벌이 사회계약의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범죄자는 사회의 바깥에서 사회와 적대하면서 무한한 복수의 가능성에 노출되는 게 아니라, 사회 안에 있으면서 그 자신도 동의하는 규칙에 따라 정해진 만큼만 처벌받는 것이다. 베카리아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형에 반대한다. 사형은 범죄자를 사회 바깥으로 내몰고 사회의 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사회의 적이라면, 그는 더 이상 사회의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 그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의 힘은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는 법의 바깥에 있으므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다. 따라서 사형은 더이상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폭력일 뿐이다. 베카리아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형이 내포하는 역설을 정확히 지적한다. "사형은 어떤 의미에서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전쟁이다." - P234

나는 베카리아의 사형폐지론이 사회의 구성원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 통찰의 빛이 18세기 이래 지금까지 사법 개혁을 둘러싼 모든 논의의 지평선을 밝히고 있다고 믿는다. 법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환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 안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바로 환대이다. - P242

사회는 개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유사한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함이지, 사회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가해자에게 복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 P230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이처럼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벽을 없애는 것-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옹호는 사생활 침해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쉽게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공동체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공동체 정신을 추구하는 것과 사생활의 자유를 갖는 것 사이에는 본디 아무 모순도 없다.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까닭이다. - P202

사외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 P203

"가난한 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익명의 기부자"라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말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이는 증여의 논리가 환대의 논리와 전혀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환대 역시 주는 행위이지만, 이 줌은 증여로 계산되지 않는다.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 P196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조금 전에 생활보호 대상자를 애완동물에 비유했지만, 한국에서는 애완동물이 될 자격조차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폐지를 주워 팔면서 혼자 사는 노인이 장성한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사례를 조명할 때 언론은 이 장성한 자녀에게 실제로 부양 능력이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부양 느역이 있는데도 노인을 모시지 않는 거라면, 그 자녀는 ‘인륜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요컨대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도덕과 풍습이라는 것이다. ‘시스템의 한계‘가 논의되는 것은 자녀 역시 막노동을 하거나 몸져 누워 있는 등 극단적인 빈곤 상태에 처해 있을 때뿐이다. - P184

가부장제의 문제점은 피부양자-비대표자가 부양자-대표자에게 쉽게 인격적으로 종속된다는 것이다. 체사레 베카리아는 가족을 구성단위로 하는 국가에서는 자녀들이 가장의 전횡 아래 있기 때문에 온전한 의미에서 시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 사외에 10만 명의 사람이 있다고 하자. 혹은 가장을 포함한 5명으로 구성된 가족이 2만 단위가 있다고 하자. 만약 그 사회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거기에는 10만의 시민이 있고, 노예는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그 사회가 가족으로 구성된 결사체인 경우라면 그 사회에는 2만의 시민과 8만의 노예가 존재하는 셈이다." - P184

아렌트는 기독교적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이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사랑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아렌트의 신랄한 지적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랑은 타자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자에게 무관심하며 어떤 의미에서 타자를 이용한다. 타자에 대한 그 같은 헌신 밑에 있는 것은 증여를 통해 자아의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다. - P175

걸인에게 예의 바르게 적선을 하는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걸인으로서는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굴욕이기 때문이다. 그를 그 자리에 버려둠으로써 사회는 이미 그를 모욕하고 있다.
걸인의 존재는 현대 사회의 구성 원리에 내재하는 모순을 폭로한다. 현대 사회는 우리가 구조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사장이든 말단 사원이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사람으로서 서로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구조적인 위치가 남들에게 구걸을 해서 먹고살아 가야 하는 위치라면, 그는 사람으로서도 결코 다른 사람들과 동등할 수 없다. - P173

자선은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므로, 그 안에 이미 상대방의 명예에 대한 평가절하가 들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선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동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 P172

바버라 콜로로소는 학교 폭력이 발생했을 때 갈등 중재 위원회를 열어 가해자와 피해자를 억지로 화해시키는 관행을 비판하면서, "괴롭힘은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경멸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해소되어야 할 갈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괴롭히는 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 귀여운 척하고, 후회하는 척한다. 이것은 각본을 바꾼 새로운 연극일 뿐이다. 괴롭힘당하는 아이들은 어떤 휴식도, 지원도 얻지 못하며, 괴롭히는 아이 역시 진정한 공감이나 사회친화적인 행도을 배우지 못한다. 괴롭히는 아이는 보복의 기회를 노릴 것이고, 표적이 된 아이는 보복이 두려워 진술을 번복할 것이다. 괴롭힘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Babara Coloroso, The Bully, the Bullied and the Bystander, New York:Harper, 2008. p.111) - P167

제도가 사람을 모욕할 때 그것은 모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분주의든 아니든, 이런 관행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동일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 P165

의례적 평등의 실현은 경칭의 인플레이션을 수반하곤 한다. 몇 해 전 뉴욕에 갔을 때 길에서 핫도그를 파는 남자에게 손님들이 ‘써sir‘라는 경칭을 붙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한국의 경우, 마트의 계산원이나 중환자를 돌보는 간병인들이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의 제스처에는 현실적인 불평등을 은폐하는 효과도 있다. 간병인들을 ‘여사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영화 「카트」에서는 부당 해고에 맞서 싸우던 계산원들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여사님‘ 대신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이들 사이에 싹튼 연대의식과 현실에 대한 각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 P153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0-10-27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으면서 두 가지 감정이 복잡하더라구요. 하나는 환대 받지 못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해 말할 때 그게 뭔지 너무 잘 알겠는 거에요. 저는 이쪽과 저쪽에서 이루어지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저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이 가진 힘에 대해서는 인정받아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두 다 알고 있는 일상의 작은 면면을 약간은 평범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그려냈다는 거요. 그렇게 건조한 톤으로 말했는데도 그 책이 불러일으킨 그 커다란 반항과 폭풍에 대해서두요. 이 책도 너무 힘을 쏟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상태로 약간은 덤덤하게 그런 면을 지적했다는 게 너무 대단하다고 여겨지고요.

또 하나는. 만약 이 작가가 환대받지 못한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객관적‘이라고 평가받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여성‘이라는 존재가 단일한 집단으로서 환대받지 못 했다,라고 언급하는 게, 사실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계속 논문을 쓰고 살아가야할 학자라면 더더욱이요. 참, 용기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랑스럽고, 또 고맙기도 하구요.

저도 오후에는 [프로이트 패러다임] 읽어야합니다. 오늘이 10월 27일이라고 하대요 ㅎㅎㅎ

다락방 2020-10-27 13:29   좋아요 0 | URL
확실히 읽으면서 가장 쉽게 확 오는 부분은 여성에 대한 조건적 환대의 부분이었어요. 부록으로 써두긴 했지만 어찌나 확 다가오는지, 역시 사람은 자신이 처한 입장에 대해서 더 잘 받아들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리고 언급해주어 무엇보다 고마웠고요. 이렇게 멋지고 근사한 책이 제대로 할 말을 하면서 꼭 해야할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싶어 좋더라고요. 단발머리님 염려대로 그러나 여성에 대한 언급 때문에 책이 저평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대체적으로 여성의 불리한 점에 대한 언급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치우친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중립기어 딱 박고 보라고, 마치 본인들은 객관적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요. 하늘아래 객관적인 사람이란 없거늘, 어디서 자신이 중립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요...

단발머리님 말씀대로, 용기 있는 저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이렇게 명징하게 현실에 대한 분석과 또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정도 용기를 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거란 생각도 들어요.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당연해지는 용기랄까요. 아무튼 이런 글을 써주어 너무 감사하고 또 응원합니다.

언급한 책중에서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꼭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어쩐지 좀 덜 자란 저를 성숙하게 도와줄 수 있는 책일 것 같아서요.

10월 27일이고, 저는 오후에 읽을 수 없는데, 아아, 프로이트 패러다임... 아직 펼치지도 않았어요. 어쩌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뽀샤버려야 하는데!!!!!

단발머리 2020-10-2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다락방님!! 손글씨 진짜 짱입니다! 하트뿅뿅!!😍

다락방 2020-10-27 13:25   좋아요 0 | URL
다이어리가 별로 좋은게 아니라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라딘 굿즈) 글씨가 영 잘 나오질 않아요. 만년필로는 제법 글씨가 잘써지는데 말입니다. 엣헴-

유부만두 2020-10-27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명이인 김현경 작가의 소설 <담배 피우는 여자>라는 소설이 생각나고요. 옛날 소설이라 많이 갑갑했던 기억이 나요.

다락방 2020-10-27 15:20   좋아요 0 | URL
유부만두님 김형경 소설가와 헷갈리신 것 같아요.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 그 작가 말씀하시는거죠? 김형경 작가입니다. 요즘은 심리 관련 책을 더 많이 쓰시는 것 같지만... 저 김형경 소설 몇 권 읽었는데, 대학시절 운동권하면서 같은 운동권내 남학생에게 강간 당한 여자가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결국 그 강간남과 결혼하는 걸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답답한 현실에 대해 읽었던 게 생각나요. 그 소설이 근데 어떤 거였는지 모르겠네요.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 였는지 [성에] 였는지,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이었는지...

유부만두 2020-10-27 15:28   좋아요 0 | URL
맞다;;; 김형경 작가에요. 답답한 상황의 주인공에 아주 힘들었어요.

2020-10-27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8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oshot 2020-10-27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글씨가 이정도면 다락방글꼴 하나 만들어야 되는거 아닌가요? 😳 너무 감동하여 백년만에 댓글 남겨 봅니다

다락방 2020-10-28 08:14   좋아요 0 | URL
다락방글꼴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투샷님, 백년만에 나타나셔서 너무 기분 최상 만들어주시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이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쩌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좋아죽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그러면 손글씨 또올려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10-2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선 장소, 고향을 떠나온. 물론 이역만리가 아니라 지방에서 도시로 온 것이 제 삶이지만 저도 이 구절에서 눈이 머물렀어요. 외롭고 낯설어서, 취약해진 채로, 환대인양 하는 관계들에 답싹 붙잡혀 결국에는 괴로워하던.. 그런 관계들 만남들이 생각나네요. 여전히 저는 제 자리를 만들어내는 시절을 살아가고 있지만, 겨우 비집어 앉은 이 공간을 나눠쓰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환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인간이 되어 보겠습니다!! 우리존재 화이팅! ㅎㅎ

다락방 2020-10-30 09:55   좋아요 0 | URL
쟝님, 정말 그랬겠어요.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지금도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니 더 그렇고요. 우리는 결국 머무를 곳을 계속 찾아가면서 삶을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어요. 여기인가 혹은 저기인가 고민하면서 말이지요. 머물던 곳을 떠나온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김현경이 말한것처럼 기억과 사람들을 새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사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진 않을테고요. 누구에게나 무조건적 환대는 저 역시 불가할 것 같지만, 그렇지만 아끼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열린 마음으로 환대하면서 지내다보면 머무를 공간은 조금씩 넓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존재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