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 않는 여자들
자일리 아마두 아말 지음, 장한라 옮김 / 율리시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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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것이 나에게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 권력의 옆에 어떻게든 가까이 서고 싶어진다.


아프리카에 사는 여성들이 지독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그 고통을 자꾸만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게 되는 건, 권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다처제가 징그럽고 나 외에 다른 아내의 존재가 영 신경쓰이지만, 그러나 자기 딸에게 또다시 '인내하라, 무조건 참아라'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 여자에겐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원치 않는 남자랑 결혼하게 됏을때도 '인내하라'는 말을 듣고, 사랑하는 남자랑 헤어져도 '인내하라'는 말을 듣는다. '너에게 좋은 건 네가 아니라 우리가 더 잘알아!'

남편이 강간을 해도 폭력을 휘둘러도 그래서 울거나 상처입거나 다쳐도 '인내하라'는 말을 듣게 되고, 어차피 말해봤자 참으라고만 하니까 이곳에서 도망쳐도 다시 잡혀와서는 '도망가서 망신시켰다'고 또 욕을 들어 먹는다. 이래가지고서야 정신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잖나.


소설속에서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고 여자가 여자의 잘못됨을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잘 살기 위해서 저 여자가 없어야 하니까. 내 남편의 사랑이 저 여자에게 더 가면 안되니까, 내 남편의 재산이 저 여자에게 더 가면 안되니까. 그러면 내 몫이 줄어드니까. 애초에 힘도 재산도 그리고 내 몸에 대한 권리도 내 것이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시기, 질투, 경쟁이 피할 수 없이 일어난다. 징글징글하다. 남자들에게만 힘이 있다보니 여자들이 서로를 미워합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더 살기 좋아지겠죠?


소설 속 등장하는 세 명의 여자들은 '참지 않는 여자들' 이라기보다는 '참기 싫은 여자들'이라는 게 맞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고발 소설인데, 그저 고발만 하는 것이 답답하다가도,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드러나야 하는 법. 아프리카의 일부다처제와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일이, 여성도 인간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각인시키기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일 것이다.


참지 않는 여자들은 책속 여자들보다는 작가를 지칭하는 것일테다. 이 거지같은 세상, 참지 않겠어! 내가 다 까발리겠다!!

우리 여자들은 참지 않긔!!



열일곱살에 오십살 남자의 두번째 아내로 강제로 시집보내졌는데 그의 삼십오세 첫아내에게 미움 당하는 삶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핳하하 근데 다들 시집 잘갔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좆까라 그래.



책 처음부터 끝까지 속시원한 장면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노파심에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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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17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2023년 2월에 출간되었는데 어째서 리뷰도 내꺼 하나 딸랑 페이퍼도 내꺼 하나 딸랑 … 왜죠?

DYDADDY 2023-05-17 08:57   좋아요 0 | URL
보통 책을 고를 때 분노의 감정은 배제되기에 그런 것 같아요. 읽을수록 분노하는 소설을 선정할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현실고발 소설은 르포나 기사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저도 읽고 싶은 책에 담아갑니다.

다락방 2023-05-17 09:18   좋아요 1 | URL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인것 같아요. ‘2020 고등학생 공쿠르상‘ 수상 작이라고 합니다. 그런게 있는줄은 처음 알았네요. 하핫 ;;

건수하 2023-05-17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지 않는데... 속시원한 장면은 없는건가요 ㅠㅠ

다락방 2023-05-17 09:17   좋아요 0 | URL
참지 않는 건 작가였지 책 속 주인공들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내 답답하기만 합니다. 속시원한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건수하 2023-05-17 09:18   좋아요 1 | URL
…. 그렇군요 그만큼 현실이 참담하다는 뜻일까요 …

다락방 2023-05-17 09:19   좋아요 1 | URL
참지 않으려고 소리지르고 울고 애원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다 참으라고만 해요. 아빠도 엄마도 큰아빠도 시누이도 … 답답 터지는 소설입니다 ㅠㅠ

독서괭 2023-05-1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 정말 읽으면서 너무 화나셨겠네요 ㅠㅠ 참으라 할 수밖에 없는 건 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걸 알아서겠죠..? 대안 마련이 시급합니다 ㅠ

다락방 2023-05-17 12:19   좋아요 1 | URL
뭔가 속시원한 일들이 펼쳐질 줄 알았건만 그런건 전혀 나오지 않고요, 다만 이런 남자들과 더불어 이런 현실속에 놓여있다는 걸 밝힌 건 의미있다 생각합니다. 그게 고발소설이 하는 일이겠죠. 이 책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82년생 김지영 취급받지 않을까 싶어요. 남자들이 ‘이거 읽는 여자들은 걸러라!‘ 할듯합니다. ㅎㅎ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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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스로 중년이라 칭하는 지금의 나는,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내 주변 가까운 어른들 중에는 딱히 배움이 깊다거나 넉넉한 재산을 가진 어른이 없었고, 막연하게 대학을 가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나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친구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아 학창시절이 괴로웠던 건 아니었지만 공부하기는 싫었던 여느 학생들과 같았고, 그 시절 가장 나를 재미있게 했던 건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 팝송을 듣는 것이었다. 중학생 때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를 들여놓았는데 그 후로 엄청나게 비디오테입을 빌려다 영화를 봐서 하루에 여러편을 본 적도 있고 나중엔 로보캅 1을 빌리면 사장님이 2,3 편은 그냥 빌려주시곤 했더랬다. 시험기간에도 소설책을 읽어서 여동생은 그런 나를 답답해했다. 내게 가장 재미있는 건 영화 보기와 소설 읽기 그리고 팝송 듣고 가사 해석하기 등이 있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지금에 와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고, 그런 한편 내 배경을 원망하기도 자주였다. 나에게도 나를 이끌어주는 어른이 있었으면, 내 재능을 발견해주고 내 진로를 함께 고민해주는 어른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자애가 배워 무얼 하냐는 아버지와 치열하게 싸워 가까스로 대학을 보낸 엄마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그러다가도 불쑥 불쑥 막연하게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지'가 아니라, '너에겐 이런 재능이 있으니 이런 학교에 가서 이런 과에 가 공부하면 어떻겠니' 라고 잡아줄 수 있는 어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어지는 거다. 그래서 최근에 본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3> 에서 네가 생각하는 그 대학 말고 이 대학에도 가능성을 열어봐, 라고 언니가 라라 진에게 얘기했을 때, 그게 그렇게나 부러웠다. 내게 주어진 환경은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 돕지 못했다는 생각을 간혹 하곤 한다.



학창 시절 딱히 흥미로운 공부는 없었다. 국어는 그냥 잘했지만 사실 국어를 못한다는 건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국어를 '못'할수가 있지? 그렇다고 맨날 국어 백점 받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국어는 내게 어려운 과목이 아니었다. 영어는 좋아해서 열심히 했다. 사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다기 보다는 팝송을 미친듯이 따라 부르고 해석해보고 외우고 그랬더니 영어 점수는 그냥 따라서 좋아졌다. 문제는 그 외의 다른 과목들이었다. 특히 암기를 해야 하는 과목들은 내게 쥐약이었다. 암기는, 모두가 알겠지만, 시간을 들여 외워야 했다. 시간을 들이는 만큼 외워지는데 나는 달달 외우는 것에는 영 흥미가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암기 과목 만큼은 시험 보면 높은 점수를 받곤 했는데, 나는 암기 과목에선 완전 고꾸라졌다. 나는 암기력이 겁나 떨어진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그랫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전화번호 외우는 건 너무 식은죽 먹기라서, 내가 암기력이 떨어졌던 건 암기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했으므로 하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 내가 어른이 되어, 그러니까 대략 2015-2016년부터 여성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번 언급햇지만 '최명희' 의 《혼불》을 읽다가 아니 세상이 왜이렇게 똥같지? 왜이렇게 여자들 살기가 엿같았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이걸 알게 되나? 그렇게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을수록 더 알고 싶어져서 관련 강의도 찾아다녔다. 회사 업무가 끝나면 지하철을 타고 마포로, 대학로로 그 외 다른 곳으로 이동해가며 강연을 들으러 다녔다. 페미니즘 철학 강의를 들으러 주말에 창원에 가기도 했다. 내가 알고 싶고 재미를 느끼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내 스스로 찾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진다는 것에 공부의 재미가 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식이 부족하면 상처 주는 말도 더 하게 되는 거였어. 나는 점점 더 과거의 나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페미니즘 책 읽기를 계속했고, 알게될수록 여성학이 그저 여성학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언어학, 사회학, 인문학, 신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철학등의 학문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뒤늦게 알고 깨닫게 되니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의욕만큼 잘 되지 않았고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과거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 내가 어릴 때 공부를 했다면. 암기과목을 열심히 암기했다면. 국사와 세계사 한국지리와 세계지리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그리고 윤리까지, 내가 암기과목을 제대로 다 외우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면, 이렇게 지금에 와서야 맨땅에 헤딩해가며 책을 읽지 않아도 됐을텐데. 책 읽다가 이게 무슨 말이야 찾아보는 일 없이 내 배경지식을 끌어오면 됐을텐데. 나는 과거에 내가 공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지만 그러나 내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지금의 젊은 학생들에게 지금 열심히 공부해두라고,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걸 말하는 순간, 나의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내게 그러했던것처럼, 한낱 잔소리로 들리겠지. 아마 귀에 닿기도 전에 튕겨져 나가는 잔소리겠지.



나는 헤르만 헤세가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만들어낸 인물,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반영한 인물 '한스'를 보는데 부러웠다. 작은 마을의 반짝거리는 학생, 집이 부유하지도 않고 대도시도 아니지만, 그러나 자기 스스로 빛이 나는 한스를, 마을 사람 모두가 알아보고 도우려고 하는 것이 부러웠다. 이 작은 마을에서 출세하는 길이라고는 좀 더 큰 곳으로 가 신학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의 규율을 잘 따라 종교인이 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이 마을에서 최고 잘난 학생이긴 하지만 과연 그 시험에 합격을 할 지를 두고 마을 사람 모두가 긴장과 기대를 한다.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하고 입학을 앞둔 짧은 기간에는, 그런데 네가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더 잘 따라가려면 그리스어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수학을 좀 더 예습해야 하지 않을까, 하며 교장선생님과 신부님이 앞다투어 개인 과외를 자처하는데 나는 그것도 부러웠다. 물론 여기에는 한스가 뛰어난 학생임이 전제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알아봐주고 예습을 하게 해주다니, 앞으로 쭉쭉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 잘 갖추어진 게 아닌가 싶은 거다.


그러나 기숙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따라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친구를 사귀고 그 친구와 함께 하는 일, 우정을 키워가는 일은 한스에게 바라는 일이었고, 그런데 자신이 사귄 친구와 우정을 이어나가려면 공부하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덜하고 성적이 떨어지니 학교에서는 '너 그 친구랑 놀지마!' 라고 윽박지르고, 설상가상으로 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혹은 사고로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지자 한스는 우울함을 겪는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한스는 그렇게 방황하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결국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신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아이들과 같은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보다 경력은 뒤쳐진 채로. 한스는 새로운 일을 배우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그러나 자신이 아주 아이었을 때 친구들과 노는 일은 얼마나 즐거웠는지, 자연은 또 얼마나 자신에게 주는게 많았었는지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 모든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할 정도로 그는 고통 속에 놓인다.



한스는 공부를 잘하는 뛰어난 학생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살지 못했다.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그걸 충실히 따라가려다보니 어느 순간 에너지가 소진되어져버린 거다.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이나 가지고 싶었던 과거가 한스에게 있었는데, 그런데 한스에게 그 현재는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거다. 지금의 중년인 내가 '너 그거 좋은 기회를 가진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재를 사는 한스가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예전처럼 낚시도 하고 친구들하고 놀고 싶어' 라고 말하는데.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동네 아주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 행복한 어린 시절이 지나가버렸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지식을 채우던 어린 시절이 한스에게 있었는데 한스는 그것이 괴롭다. 지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면서 놓친 수많은 것들을 갈망한다. 그리고 한스는, 그 괴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가 벅차다.



아마 한스 또래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한스의 괴로움과 고통에 더 무게를 둘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이 될 것이다. 중년의 나는 내 입장으로 보게 돼서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결코 무용한 독서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놓지 말아야 할 것, 어린 시절에 강요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한스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읽어야 하지만, 그러나 나처럼 한스 또래의 자식을 두었을법한 어른들도 이맘때쯤 읽어야 하지 않나 싶어진다. 중년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른의 눈으로 한스를 보았는데, 도대체 헤르만 헤세는 이 괴로운 어린 한스를 만들어냈을 때 몇 살이었을까. 검색해보니 1906년에 쓴 작품이더라. 헤르만 헤세는 1877년에 태어나 1962년에 죽었다. 그의 나이 서른에 한스를 통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이 고통이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나이 서른이 되어도 그 때의 괴로운 기억은 그에게 온전히 남아있었던 탓이리라.



일전에 유명한 북튜버가 자신의 뛰어난 영어 실력은 초등학교 때부터의 엄청난 교육과 훈련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따로 유학을 간게 아니어도 영어 실력이 뛰어난 거라고. 그러나, 그 때로 돌아간다면 그걸 또 겪고 싶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 시절이 괴로웠다는 거였다. 한스를 읽는데 그 북튜버의 이야기가 겹쳐졌다. 뛰어난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남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게 되는 것은, 이렇게나 '괴로웠던 때'를 함께 가져가야 하는 것일까. 좋은 대학을 가고 원하는 직업을 가지면 과거의 그 고통을 보상 받는 게 되는 건 아니라고, 헤르만 헤세가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절망하고 무릎 꿇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배경지식을 많이 다져두면 어른이 되어서도 지식을 쌓는 일이 더 유리해질텐데, 그런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니, 이 나이가 되어도 역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스는 인생이란 수레 바퀴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나는 인생이란 수레 바퀴를 가까스로 피해가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이 수레바퀴라는 건 변함없는 것이라면, 역시나,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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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5-1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 못한 길은 후회가 남아도 가지 않은 길은 아쉬움이 남겠죠. 그 후회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그 길을 대신 가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팔구십년대의 암기 과목 중에 스키마로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시험이 끝나면 달려가던 슈퍼에서 과자를 집기 전에 공부한 내용이 망각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을 보면 다락방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열심히 공부하셨다면 그 시간에 볼 수 있었던 영화나 책을 못봤다고 후회하시고 계실지도 모르죠. ㅋㅋㅋㅋㅋㅋ
잘 사는 것은 각자 생긴 것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다르겠죠. 지금 충만하고 행복하다면 그 감정에 소비될 돈을 벌며 가급적 그 감정에 충실한 시간을 늘려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보기에는 다락방님은 지금 충분히 잘 살고 계세요. ^^

다락방 2023-05-16 08:39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더 좋은 대학을 가고 더 좋은 직장에 가고 더 높은 연봉을 받게 됐다면, 내가 놓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곤 하거든요. 그게 만약의 지금처럼 책 읽고 글 쓰는 삶이라면, 저는 지금의 이삶이 더 좋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책 읽고 글 쓰는 삶에 큰 만족을 얻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고 싶어요. 그러니 어쩌면 저는 이렇게 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핫.

은하수 2023-05-15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구해 읽었던 헤르만 헤세네요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네요. 저도 한스 보면서 사실 이해가 안됐거든요. 젊을 때 읽었으니까... 저렇게 지원해주는데 자꾸 어긋나고 힘들어해서... 저도 지원 없는 대학공부하느라 힘들때였거든요. 전 정신적 고뇌를 겪을 새도 없이 무조건 앞만 보고있을 때라 함... 배가 불렀네 배가 불렀어... 저런 고뇌의 시간도 보낼수 있고... 이랬었죠! 시간이 지나고서는 이해하게 됐지만요. 그래서 제목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더라구요

다락방 2023-05-16 08:41   좋아요 0 | URL
저 어릴 때 데미안이며 싯다르타며 읽었었는데 기억이 안나서 데미안도 다시 읽어보려고 사뒀어요. 지금 읽으면 데미안도 완전히 또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요. 수레바퀴 아래서는 읽다보니 제가 읽은 것 같지 않고요. 그렇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헤르만 헤세 잘 쓰네!! 막 이러면서 읽었어요. 후훗.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닌가 봐요.

한스의 타고난 능력과 주변 어른들의 도움은 부러웠는데, 그것은 또 오지랖과 강압이기도 할것이기에 한스 입장에서는 괴로웠던 거로구나 하면 역시 어른의 역할은 어려운 것 같아요. 놔둘 수도 없고 참견할 수도 없는 적정선은 어디일까요. 좋은 어른이 되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잠자냥 2023-05-15 1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3개 눌렀습니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고 이런 글을 쓰시는 다락방 님 사......는 아니고,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 인생과 수레바퀴 문장 명문이네요.
십대 시절 <수레바퀴 밑에서>의 한스를 좋아했던 잠자냥이라서 더 이 글이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다락방 2023-05-16 08:43   좋아요 2 | URL
좋아요 세개 접수합니다. 보답으로 주기적으로, 자주 땡투 드리고 있습니다.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땡투 들어오면 아 다락방이로구나, 하시면 됩니다. ㅎㅎ

그리고 사.... 까지 하고 망설이시다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님 리뷰나 페이퍼 읽다 보면 잠자냥 님은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자냥 님은 공부 잘했지만 겸손한 분이시고 저는 공부 못했지만 자뻑 충만한 … 흠흠.

잠자냥 2023-05-16 09:01   좋아요 2 | URL
음… 저 수능 수학 6점 받았습니다만…. *먼산*

다락방 2023-05-16 09:03   좋아요 2 | URL
음… (같이 먼 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DYDADDY 2023-05-16 10:03   좋아요 0 | URL
거기 뭐 재미있는 거 있나요? (같이 먼 산)

새파랑 2023-05-15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이런 리뷰를 남기시는 다락방님은 천재가 맞습니다~!!
그런데 전화번호도 좋아하는(?) 사람것만 외우신거 아닌가요? ㅎㅎ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는게 인생인거 같습니다~!!

다락방 2023-05-16 08:45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이야말로 천재십니다! 맞습니다, 전화번호도 좋아하는 사람만 외워요. 그래서 전화 걸어본 적 별로 없어도 외우는 번호가 있고 자주 걸어도 못외우는 번호가 있습니다. 구남친들 중 여러명은 외우지도 못했고 지금 기억 안나지만, 열렬히 짝사랑 했던 남자의 번호는 아직도 기억 한답니다. 심지어 구남친 이름도 기억을 못합니다. 얼마전에 이메일이었나 어떤 이름 보고, 이 사람이 누구지????????? 하다가 구남친이라는 걸 늦게 깨달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란 인간, 이렇게나 감정과 뇌과 분리되지 않는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정확한 새파랑 님 같으니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05-15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르치스와 수레바퀴의 내용이 비슷한 것 같고 잘 기억나지 않네요~
그나마 데미안은 워낙 다른 책에서 많이 언급되어서 대략 기억나지만^^
10대 키우는 중년으로 다시 읽기 좋네요!
그리고 학창시절 암기과목은 시험용 아닌가요? 시험 끝나면 바로 잊어버리는..

다락방 2023-05-16 08:46   좋아요 1 | URL
나르치스와 수레바퀴 비슷해요, 햇살과 함께 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재미있었는데 수레바퀴도 재미있네요. 크- 데미안 재독 들어가야겠어요. 헤르만 헤세 재미있네요, 햇살과 함께 님.
저는 너무 건방지고 저잘난맛에 살아서 시험을 위해 암기하지 않겠어! 이러면서 암기를 안하는 그런 아이였고 그래서 성적이 엉망진창 … 저는 왜 그러고 살았을까요? 대체 왜? (절레절레)

독서괭 2023-05-15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오래전에 이 책 읽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요 ㅋㅋ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어떻게 살았든 안 가 본 길에 대한 미련은 남을 듯요.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 너무 소진되어서 나중에 어떻게 자랄지 걱정인데.. 정답 말고, 진짜 나에게 맞춤형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 곁에 있다는 건 행운일 것 같습니다. 한스에게도 그런 어른은 없었던듯요.
학창시절에 공부 열심히 했던 1인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수능 끝나고 모든 걸 잊었기 때문에 역사 지식 세계지리 등등 하나도 남은 게 없습니다 ㅋㅋ 물론 서른 넘어서도 수능공부 하느라 외웠던 시시콜콜한 지식을 그대로 외우고 있는 분들도 있긴 하더라만요;; 제 경우엔 주입식 교육으로 남은 게 없어요.. 휘발....(욕아님..) 지금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하시는 공부가 남는 공부입니다!

다락방 2023-05-16 08:49   좋아요 1 | URL
저는 데미안이 기억 안나서 이제 데미안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니 사둔 책이 이렇게나 많은데 읽었던 책 다시 읽어야 하는 이 인생, 뭐죠?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정말 방향치이기도 하면서 그림을 못외우는 사람이고 그래서 지리 과목이 전혀 흥미도 생기지 않고 기억나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훌쩍 어른이 되어 여행 다니기 시작하면서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어요. 지구본 사두고 여기에서 여기까지 가는거구나, 하면서 말이지요. 저란 인간은 관심이 생겨야만 비로소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봐요. 그러니까 공부를 못하죠. 다 관심이 없어가지고. ㅠㅠㅠㅠㅠㅠㅠㅠ

저는 그나마 주입식 교육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몰랐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나마 주입식이어서 했던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해보니 그런건 주입식 아니어도 했을 것 같고 … 어쨌든 다 지난 일이니 지금은 지금에 충실하겠습니다. 필승!!

책읽는나무 2023-05-1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이란 수레바퀴를 가까스로 피해가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다락방 님이 살아오신 인생이 또 살아갈 인생이 정답일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다시 읽어 보고, 읽을 시기에 놓인 사랑하는 조카에게 ‘이 책 읽을래?‘라고 포스트 잇을 붙여 놓고 집을 비운 이모의 행동은 수레바퀴를 잘 피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단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중학시절 국어 선생님의 한 달에 한 권 책 읽기의 의무 때문에 중학교 들어가서 사춘기가 시작되어서였는지? 책 읽는 게 너무 싫었었어요. 첫 3월 첫 책이 <백범일지>였었는데 첫 달부터 안 읽었거든요ㅋㅋㅋ 책이 제게 좀 따분하고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백범일지는 제게 늘 양심의 가책으로 다가오는 책이어 읽어야지! 생각은 늘 하고 있는 책이긴 합니다. 그래도 많이 안 읽은 와중에 수레바퀴는 완독했었던 것 같네요. 수이 님처럼 엉엉 울진 않았고 마음이 좀 슬펐던 기억만 어렴풋하게 남았던....근데 제겐 책이 좀 어려웠어요. 그리고 헤세의 작품이 좋아 그 유명한 <데미안>을 읽었었는데 그 후로 제겐 수레바퀴의 주인공이 싱클레어가 될 정도로 혼동을 하고 있었더군요.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나서 몇 년 전 수레바퀴를 다시 읽었었거든요. 그리고 데미안을 또 읽었더니 아직도 싱클레어로 혼동ㅋㅋㅋ
암튼 수레바퀴를 읽고서 헤세가 더 좋아졌고, 왜 학생들에게 권하는 건지 알 것 같았어요.
전 학창 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닥 많이 없었던 건지? 한스에게 막 공감을 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슬펐던 느낌은 진하게 남았어서 그게 뭘까? 하고 재독하니까, 부모의 입장에서 읽혀졌어요. 제게도 누구처럼 육아서였어요ㅋㅋ
그래도 슬픔은 남더군요.
저도 이번에 투비 적립금으로 딸들을 위해 수레바퀴 책 사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땡투 미리 예약 걸어놓고 갑니다^^

다락방 2023-05-16 08:52   좋아요 1 | URL
책나무 님, 저는 책 읽는 걸 너무 좋아해서 한글을 알고부터 바로 책읽기및 신문 읽기를 시작했는데, 학교에서 읽으라고 한 책들은 읽기 싫더라고요? 대학에서는 ‘이 책에서 시험 문제 날거니 읽어보세요‘ 라고 소설 한 권을 선택해주었는데, 원래 읽으려던 소설이었지만 그 순간 똭 읽기 싫어져서 안읽고 시험보러 갔어요. 대체 이런 똥베짱은 왜 튀어나오는 걸까요? 절레절레.
저는 책나무 님이 백범일지 언급하시니 <옥중서신> 생각나네요. 오래전에 친구가 선물로 주었는데 오래 안읽혀두고 묵혀두다가 팔았 … 저에겐 그 책이 양심의 가책으로 남아 있어요.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아직도 안읽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양심의 가책인 책 한 권쯤은 있는 건가 봅니다.

수레바퀴 아래서 참 좋고 재미있더라고요, 책나무 님. 저는 그래서 데미안 재독 들어갈 예정입니다. 데미안 다시읽어봐야지 기억 하나도 안나, 하고 진작에 사두었거든요. 헤르만 헤세 읽기 좋습니다, 책나무 님. 만세!!

물감 2023-05-1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공부랑은 거리가 멀고 먼 학생1이었고, 학교다닐때 공부좀 할걸 후회하는 성인1입니다만 그냥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시간을 돌리지도 못하는데 계속 후회하면 뭐하나 싶어 자족하는 법을 배우고 살아가고 있습죠. 한스나 북튜버처럼 살아도 후회하고, 저처럼 살아도 후회하는 게 인생이라면 누굴 부러워할 필요는 없겠다 싶고요ㅋㅋㅋ 헤세 작품의 특징이 그거 같아요. 너는 틀린게 아니야 라고 느끼게 해주는거.

다락방 2023-05-19 13:4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물감 님.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어쨌든 지금의 내 선택과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답이겠지요. 헤르만 헤세 너무 재미있어요, 물감 님! 저는 지난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책 읽으면서 헤세 꿀잼인데? 이러면서 다 뿌숴버리겠다 싶더라고요.

저 한 이십년전쯤에 데미안 읽었었는데 지금 기억이 안나거든요. 이제 다음 차례는 데미안으로 할까 합니다!!

물감 2023-05-19 13:51   좋아요 0 | URL
저는 나르치스 그거 안읽었는데 다음에는 그걸 읽어야겠습니다ㅎㅎㅎ

다락방 2023-05-19 14:01   좋아요 1 | URL
나르치스도 엄청 재미있어요, 물감 님!! ㅎㅎ
 
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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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성공했다. 이 리뷰는 여러분 미래의 퍼핏 쇼 독서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친절해 … 샤라라랑~)



영국 컴브리아 지역의 환상열석에서 불에 탄 시신들이 연달아 발견된다. 그 시신들은 살아 있었을 때 심한 고문을 당했을 것이고 불에 탔을 것이다. 피부를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고문을 했던 것도 그렇고 육체를 불에 더 잘타게 촉진제를 부은 것도 너무 고통스러웠을 것 같아서, 소설의 초반 이 시신과 시신에 남겨진 흔적을 보고는 으, 이렇게 잔혹한 고문과 화형이라니, 어떤 미친놈이 또라이처럼… 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간 읽어왔던 많은 형사, 프로파일러들이 등장했던 책처럼, 추리와 미스터리 책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이 소설 속 등장하는 범죄자이며 가해자인 인물도 소시오패스에 싸이코패스이겠거니 생각했다. 범인은 언제나 그런 보잘것 없는 놈이고, 이제 어떻게 그(들)를 잡느냐가 관건일 것이었다.


액션/추리/스릴러/미스테리로 분류되는 장르들의 소설을 내가 즐겨 읽는 까닭은, 그 안에 담겨진 이야기 때문이다. 크게는 범죄가 나오지만, 그 범죄를 추적해 범죄자를 잡는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를 쫓는 경찰들과 프로파일러, 가해자와 피해자 주변의 사람들까지, 그들이 살아온 삶과 그로 인해 형성된 성격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양한 인간을 잘 보여주고 캐릭터도 생생하게 드러난다면, 그야말로 잘 쓰여진 추리 소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게 추리 소설을 읽는 재미는 '범인은 바로 너지!'를 추적하는 과정에 있는게 아니라, 그 범죄가 일어나고 벌을 받게 되기까지 참여한 모든 인간과 그들로 구성된 구조, 삶의 이야기 속에 있었다. 


환상열석의 시신들중 하나에는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그 지역의 경사 '포'의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포로 말하자면 이전 수사 과정에서 엄청난 실수를 해 정직중이었다. 그런 포가 이 사건에 소환되는데, 과연 가해자는 그를 '왜' 불러낸것일까. 이 연쇄살인에 포는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다음 피해자를 가리킨 것일까, 아니면 포가 어떻게든 관련되어 있는 살인이라는 것일까. 알지 못한 채로 이 수사에 포가 참여하게 된다. 


소설의 처음부터 흥미로운 캐릭터가 등장한다. 상당히 높은 아이큐의 소유자, 열여섯에 대학에 입학해 박사학위를 두 개나 딴 여자, 그러나 친구가 하나도 없는 괴짜. 통계와 데이터로 모든 걸 다 추측해낼 수 있는 '틸리'가 '감'으로 증거를 따라 다니는 '포'와 파트너가 된다. 성별도 성격도 경험도 당연히 그동안의 삶의 과정도 모두 상반된 이 둘이 파트너가 되지만, 그러나 그들은 좋은 호흡을 자랑하며 이 수사에 함께 임한다.



액션/추리 소설이 아니라도,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왜'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를 왜 하느냐가 바로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심과 사고일 것이다. 작품에는 어쩔 수 없이 작가의 사상이 들어가고, 독자인 나는 그걸 읽으면서 그에게 동의하느냐 설득하느냐 혹은 반목하느냐로 작품의 재미가 결정될 것이다. 좋은 문장은 당연히 소설에 있었으면 좋겠고 나는 확실히 좋은 문장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매혹당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완전히 매력적이라면, 좋은 문장쯤은 건너뛰고 갈 수도 있다. 《퍼핏 쇼》가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만약 이 책이 이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했다면 나는 별을 넷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별점이 뭣이 중한디… 그러나, 다섯을 줄 수 밖에 없었으니, 그건 'M. W. 크레이븐'이 하고자 하는 《퍼핏 쇼》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속에 담긴 사상이, 내가 가진 사상과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는 말에 나는 우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한다면 아마 폭력은 절대 끊어지지 않겠지. 그런데 자, 이 책을 읽다 드러나는 폭력을 만나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왜 안돼?' 가 되어버리는 거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이건 이래야 하는거 아니야? 가 되어버리는거다. 분명 잘못된 건데, 그리고 그러지 않는 쪽이 낫다는 걸 아는데,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는 걸 이해하게 되는거다. 우리는 또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고 말한다. 나 역시 당연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말에도 모든 가해자가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가해자에게는 서사를 주고 어떤 가해자에게는 주지 않는 것은 누가 결정하는 일일까? 그건 아마도 그 사건을 맞닥뜨린 제삼자가 할 일은 아닐 것이다. 피해자가 결정하는 일일까? 글쎄 그것도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정의가 불의가 될 수도 있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일은, 사람이 사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면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서, 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보고 하게 되는 말과 그러나 그 이야기의 다른 면까지 알게된 후에 하게 될 말이 다를 수 있는 거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내가,



가해자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 미친 또라이 가해자를 안타까워했기 때문에. 이제 그쯤에서 멈추라는 말 대신, 내가 다른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마저 다 읽지 못하고 범인을 쫓는 과정의 포와 틸리를 보고난 후 잠들었는데, 새벽에 벌떡 일어나서 나는 가해자가 누군지 갑자기 알았다. 아니, 정확히 가해자를 맞혔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이 사람이어야 해, 그래야 맞아!' 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범인을 맞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이야기이고 결국 삶이며 그 안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의 흔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고통 받은 사람은 누구일지를 깨달은 까닭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작가도 안다. 그래서 등장 인물의 입을 통해서도 여러번 얘기한다. 포가 괴로운 까닭은 잘못임을 알기 때문이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돌린다면 자신은 같은 '실수 아닌 실수'를 다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반복해 얘기해주고 있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야, 그렇지만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 라고. 독자인 내가 가해자의 편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과연, 정의는 무엇이고 불의는 무엇인가. 정의는 선이며 언제나 나는 정의와 선의 편에 서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정의와 불의로 감춰진 인간을 맞닥뜨리면 그러나 정의가 선인가를 고심하게 되고, 불의는 정말 불의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떤 불의는 불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퍼핏 쇼는 보여준다.



최근 내가 읽은 추리/스릴러/형사물 중에 가장 좋은 책이었다. 처음 인물들이 등장할 때부터 마음에 쏙 들었는데 그들이 사건을 쫓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고 무엇보다 그들 하나하나가 가진 이야기들과 그리고 이 잔혹한 사건이 가진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 내가 잘못하는 거라는 거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아? 를 묻는 것도 그렇다. 응징이 어느 틈에 나에게 정의가 되었다. 나는 포가 마지막 버튼을 누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리고 (스포일러가 될까봐 말하지 않겠지만)어떤이의 간절한 '생'을 바라면서 소설의 마지막장까지 내처 읽었다. 


다음 시리즈가 얼른 번역되어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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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5-04 11: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거 다른 분들 리뷰 슬쩍 눈 감고 봤는데(응?) 이 시리즈 기대된다, 파트너 캐릭터 조합이 재미나다는 평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읽어보려고 합니다.....
시리즈라는 것에서 일단 놀람. ㅋㅋㅋㅋ

다락방 2023-05-04 11:51   좋아요 4 | URL
정말 오랜만에 불쾌함없이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에요. 작가가 캐릭터에도 애쓴것 같아요. 전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라서 좋았어요. 막판에 계속 울었네요 ㅠㅠ 시리즈 죄다 챙겨볼 참입니다!! 으하하하.

리뷰대회 하려면 그러니까, 이렇게 재미있는 책으로 해야 되는거 아닙니까? 그래야 리뷰 쓰는 사람 마음이 평온하죠.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잠자냥 2023-05-23 16: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부장님 혹시 이거 현금 10만원 받음? (문득 궁금해서 지금 찾아봄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5-23 16:17   좋아요 3 | URL
22프로 세금 떼고 준대요. 아직 못받았고 5월달 내로… 내 돈 22,000 원 ㅠㅠ

잠자냥 2023-05-23 16:21   좋아요 2 | URL
와우 만천하에 자랑해야죠! ㅋㅋㅋㅋㅋㅋㅋ
돈 받는 날 자랑하시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거운 세상 속 부서진 나를 위한 책 - 우울한 나를 돌보는 법 INFJ 데비 텅 카툰 에세이
데비 텅 지음, 최세희 옮김 / 윌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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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에서 데비 텅은 자신에게 찾아왔던 우울증과 불안, 자책, 그로 인해 괴로웠던 경험과 상담을 받으며 서서히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고, 세상에 자신의 경험을 알렸을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저같은 사람이 또 있네요'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우울한 나를 돌보는 법'이란 부제가 붙었으니 아마도 우울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데비텅이 언제나 내세우는 MBTI 인 INFJ 인 사람들은 더 공감할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나는 아니었다.



그간 데비텅 읽고 좋았던 적은 없었지만, 이번 책은 그중 제일 별로였다. 내가 우울하지 않아서 그런건지 성격이 너무 달라서 그런건지 읽는 내내 친구라면 관계 끊고 싶어지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뭐가 됐든 살을 붙이지 않고 뼈대만 말하자면, 그러니까 인정사정 없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아픈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싫다.



자기가 가진 부정적 감정들 혹은 고통스러운 감정들, 그것이 크던 작던 표현하지 못하고 차곡차곡 감추고 쌓다가 우울증으로 터져나온 걸로 데비 텅은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데비 텅이 자기 자신을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몫의 행동들을 해내지 못함으로써 자신을 혹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행동들이 분명 사소하게 나타나는데-그래서 내가 친구하기 싫은거임- 자기가 표현을 안한다고 혹은 감춘다고 생각하는 게 나로서는 영 수긍이 되질 않는 거다. 중간까지는 읽다가 그냥 팔아버릴까 생각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사랑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한 사람이 1인분의 몫을 살아가는게 제일 좋고, 그게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가끔 이렇게 우울증이든 뭐든 어떤 연유로 채 1인분을 못해낼 때, 0.7인분 정도의 몫만 해내고 있을 때, 그럴 때에 짜증내거나 돌아서는 게 아니라 부족한 0.3인분을 채워갈 수 있도록 옆에서 머물고 들어주고 감싸 안아주는 것. 데비 텅이 서서히 세상 속에 다시 섞여들어가고 자기를 돌볼 수 있게 된 건, 너 상담 선생님 찾아가면 어때? 너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오늘은 기분이 어때? 라고 물어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은 거다. 한결같이 옆을 지켜주는 사람, 0.7인분이 되어도 떠나지 않는 사람.


데비 텅은 전작에서도 INFJ 인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건 자신의 애인이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연결해줘야만 세상과 이어지는 것 같은데, 나는 그 때에도 그 연결을 내가 해주고 싶진 않다는 생각을 했다.

또 이번 책에서 데비 텅 보면서 데비 텅 옆에 나는 못있겠다 싶은거다. 


역시 나는 사랑을 못하는 사람이군,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야,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자신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옆을 지켜주는 애인이 데비 텅 옆에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데비 텅이 보냈던 시간을 마찬가지로 보내는 사람들이라면, 성향이 데비 텅 같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맞춤한 연인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나 말고. 나는 그런 사람 아님. 



아무튼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저마다 다른 사람들과 친구하고 사랑도 하고 그래서 천만다행이다. 0.7인분 한다고 떠나버리는 나같이 싸가지 없는 사람만 있으면 세상 각박해서 어찌 사누.. 온정없는 월드가 되겠지. 데비 텅 같은 사람이 더 많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으로 감싸주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데비 텅의 작품이 한국에 번역도 되는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겠지. 



조카가 데비 텅 좋아해서 신간 나왔다길래 주려고 산거였는데 나는 여태 읽은 데비 텅 중에 제일 별로였다. ㅎㅎ

그래도 조카는 내가 아니고 내가 조카도 아니고, 조카 엠비티아이 뭔지 모르겠지만(다른 사람꺼 들어도 까먹고 내꺼 외우는 것도 3년 걸림), 조카는 또 좋아할 수 있으니,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임을 존중하며 조카에게 역시 계획대로 주도록 하겠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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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4-06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위에서 하도 MBTI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종종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서 해봤는데 (결과 INT*) 해설을 보면 꼭 다 맞는 것은 아니더군요. 그리고 살아가면서 성격은 변하기 마련이니 재미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요. ^^

다락방 2023-04-07 15:12   좋아요 2 | URL
저는 하긴 했지만 딱히 관심도 없었고 그리고 해봤자 ‘이걸로 나를 어떻게 알아, 나는 나다!!‘ 이런 마인드여 가지고 ㅋㅋㅋ 아무튼 데비 텅은 제 타입이 아닙니다. 흠흠.

책읽는나무 2023-04-07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우울할 땐 뇌과학>을 읽고 있는데요. 뭔가 죄다 내 얘기인 것 같아 급 우울하다가, 우울증 예방법? 치료법 같은 얘기들이 뒤에 나올 것 같아 귀 쫑긋입니다.
다락방 님은 긍정적인 뇌 회로가 발전되어 있는 사람이시군요? 뇌 회로쪽이 발달되어 있는 구조가 긍정적, 부정적으로 발달된 부분이 다르다는군요. 부정적인 편향이 심한 사람들이 당연히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크구요. 예방하는 방법은 낮에 햇볕 보고 밤에 잘 자야 한다던데 다락방 님은 매일 예방하고 계시기에 우울증을 앓지 않으시는 건가?싶습니다ㅋㅋㅋ
그런 영향을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우울하려다가도 우울증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락방 2023-04-10 09:37   좋아요 1 | URL
저는 부정적인 사람들하고 얘기하면 피로해집니다. 될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기보다 안될 가능성을 품고 얘기하는 건 정말 기빨리고요, 그렇게 안된다는 생각만 하는데 될게 뭐람 싶어서요. 말씀하신 대로 긍정적인 뇌 회로와 부정적이 뇌 회로가 있는거라면 저는 긍정적인 쪽만 발달한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낮에 부지런히 햇빛도 보고 밤에도 잘 자네요. 책만 펼치면 잠이 쏟아지는... ㅋㅋㅋㅋㅋ

책나무님 해 좋을 때 부지런히 걸읍시다. 걷는게 최고인 것 같아요! >.<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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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는 마술사다. 마술사였던 아버지가 쓴 책을 교본으로 삼아 언제나 몸에 지니면서 마술의 기술을 터득하고 연습하고 그리고 쇼를 한다. 아직 관객이 많지도 않고 무대라고 해봐야 시장에서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게 전부이지만, 마술을 사랑한다. 그런 제니에게 탐정 '로버트'가 찾아와 자신의 일을 도와주기를 바란다. 종교로 자리잡은 심령학에 대한 비밀을 함께 파헤치자는 것. 폭스 자매들이 이끄는 강력한 심령학회 회원이 되어 영매를 만나 상담도 받고 그렇게 죽은 남편을 불러내달라고 하면서 그들의 사기 행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조사해달라는 거다. 게다가 그렇게 이 탐정회사의 직원이 되면 수당도 크게 받는 터라, 그 돈이라면 생활비는 물론 마술 쇼도 더 해볼수 있고 게다가 심령이라니 호기심도 생겨 제안을 수락한다.


그러나 제니가 도대체 어떤 사기가 벌어지는지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어쩌면 심령을 정말 만날 수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이 심령을 본다는 세 자매에게 이끌린다. 가짜 신분을 만들어 죽은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찾았건만, 엉뚱한 병사가 찾아와 말을 거는거다. 제니는 그 병사가 자신이 본 적 없던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고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난걸까 궁금해한다. 자매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비밀을 알아보고자 하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나고, 이에 그녀는 세자매의 대장인 언니 리아를 찾아가 '나도 영매가 될게' 라고 한다. 그렇게 계약서를 쓰고 나서야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심령과 만날 수 있었는지를 듣게 되고 충격을 받게 된다. 



처음 제니에게 일을 도와달라고 했던 탐정 로버트와 그리고 자매들에 얽힌 사연들이 차차 드러나면서 책은 결말을 향해 간다. 죽은 영혼을 불러내 대화를 한다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가 어느 틈에 나도 제니처럼 '아니 잠깐만, 그런데 정말로?' 이렇게 되어버린다. 이야기는 흥미롭게 진행되고 게다가 영화 <사랑과 영혼GHOST>를 몇번이나 보았으므로 영혼과 대화하고 빙의되는 것도 머릿속에 너무 잘 그려졌다. 대수롭지 않았던 하나의 작은 일이 그러나 큰 일로 닥쳐오고 그 일들이 여기와 저기에서 얽혀있고 어릴 적의 죄책감이 시간이 오래 지난후에도 여전히 남아있고 하는 이야기들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펼쳐진다. 읽으면서 영화화 되어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이야기로도 재미있고 캐릭터로도 아주 매력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읽는 내내, 그들이 정말로 죽은 영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 넓은 지구 어딘가에 그런 사람이 좀 있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거다. 



얼마전에 '유키 하루오'의 《방주》라는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불쾌하고 짜증이 났더랬다. 1993년의 남자 작가가 쓰는 글은 이런거란 말인가. 나는 젊은 남자 작가들에 대한 편견이 생겨버렸다.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 팔리는 책을 쓸 순 있겠지만 그 책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렇게 윤리도 없고 철학도 없는 책을 써내다니. 필립 로스가 그리워지는 거다. 필립 로스는 안타깝게도 책 속에서 페미니스트를 비아냥 댈지언정, 글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썼거등? 그리고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고! 그런데 젊은 남자 작가들은 늙은 남자 작가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거야? 막 이렇게 되었단 말이다. 화딱지가 났다. 그런데,


《심령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의 '조나탕 베르베르'는 달랐다. 이 1994년의 남자 작가는 무엇보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캐릭터도 생생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알고 그러나 역사도 공부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줄 분명히 알고 하는 이야기를 나는 읽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젊은 남자 작가들이 다 그런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아닌' 쪽에 있는 그런 작가였다. 그래서 기분이가 좋아졌다. 


일전에 '김영하'가 어떤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느꼈지만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는 것들을 책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조나탕 베르베르의 책에서 그걸 느꼈다. 음, 정확히는 그것과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표현하고 있었던 문장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이거지! 했던 구절은 이거였다.



「내가 탐정 일을 시작하기전에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뭔가를 당신에게 알려 줘도 되겠소? 핑커턴 지침서」에서 읽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자비로 배워야만 했던 교훈이지. 모든말은 그 말을 믿는 사람만을 얽어맨다.」 - P228



나는 사람들이 각자가 믿는 것이 있고, 믿는다면 거기에는 힘이 실린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꿔 말하면, 그걸 믿는 사람들을 얽어매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의 결말이 좋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건 정말 읽는 독자인 내 몫의 만족감이었는데, 음, 그러니까 그런 거다. 내가 물잔에 새로운 물을 받고 싶다면 내 물잔을 비워야만 가능해진다는 것.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삶의 진리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이야기로 다시 만나야 하는 때가 온다. 새로운 물을 받아야 하는데 물잔이 가득 차서 받고 있지 못했고 나는 그러나 이미 가득찬 물잔에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물을 받을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이제 내 물잔을 비워내야 한다고, 그리고 새로운 물을 받아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자정을 넘겨있었고 자려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가, 그 물잔을 비워내는 일을 미룰게 뭐람, 하고 다시 불을 켜고 일어나, 침대 헤드에 오래 머물렀던 어떤 사진을 치웠다. 



「가장 힘든 일, 그건 놓아 버리는 거예요.」 마거릿이 말했다. -P.603


「가장 힘든 일, 그건 놓아 버리는 거예요.」 마거릿이말했다.
제니는 불길 위로 책을 갖다 댔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선택을 다그치는 열기가 곧 팔뚝을 휘감아옴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떨렸고, 제니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유일한 해결책은 이 책을불길에 던지는 것임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에 매달려 보려고 애를 썼다. 제니는 자기 자신만의길을 개척하는 유일한 방법이 남들이 다 갔던 길을 따라가기를 그만두는 것임을 깨닫고,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 P603

제니는 자신의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응시했고, 그 손을, 벽난로의 오렌지 빛에 물든 장밋빛 손가락을, 처음으로발견한 듯했다. 그녀의 등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의 무게가 마침내 그녀의 어깨에서부터 떨어져 나간것 같았다. - P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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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3-27 10: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식 사진을 치웠군요.

다락방 2023-03-27 10:56   좋아요 1 | URL
그건.. 아닙니다. 음식 사진은 결코 치울 수 없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