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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평점 :
내 스스로 중년이라 칭하는 지금의 나는,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내 주변 가까운 어른들 중에는 딱히 배움이 깊다거나 넉넉한 재산을 가진 어른이 없었고, 막연하게 대학을 가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나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친구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아 학창시절이 괴로웠던 건 아니었지만 공부하기는 싫었던 여느 학생들과 같았고, 그 시절 가장 나를 재미있게 했던 건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 팝송을 듣는 것이었다. 중학생 때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를 들여놓았는데 그 후로 엄청나게 비디오테입을 빌려다 영화를 봐서 하루에 여러편을 본 적도 있고 나중엔 로보캅 1을 빌리면 사장님이 2,3 편은 그냥 빌려주시곤 했더랬다. 시험기간에도 소설책을 읽어서 여동생은 그런 나를 답답해했다. 내게 가장 재미있는 건 영화 보기와 소설 읽기 그리고 팝송 듣고 가사 해석하기 등이 있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지금에 와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고, 그런 한편 내 배경을 원망하기도 자주였다. 나에게도 나를 이끌어주는 어른이 있었으면, 내 재능을 발견해주고 내 진로를 함께 고민해주는 어른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자애가 배워 무얼 하냐는 아버지와 치열하게 싸워 가까스로 대학을 보낸 엄마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그러다가도 불쑥 불쑥 막연하게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지'가 아니라, '너에겐 이런 재능이 있으니 이런 학교에 가서 이런 과에 가 공부하면 어떻겠니' 라고 잡아줄 수 있는 어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어지는 거다. 그래서 최근에 본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3> 에서 네가 생각하는 그 대학 말고 이 대학에도 가능성을 열어봐, 라고 언니가 라라 진에게 얘기했을 때, 그게 그렇게나 부러웠다. 내게 주어진 환경은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 돕지 못했다는 생각을 간혹 하곤 한다.
학창 시절 딱히 흥미로운 공부는 없었다. 국어는 그냥 잘했지만 사실 국어를 못한다는 건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국어를 '못'할수가 있지? 그렇다고 맨날 국어 백점 받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국어는 내게 어려운 과목이 아니었다. 영어는 좋아해서 열심히 했다. 사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다기 보다는 팝송을 미친듯이 따라 부르고 해석해보고 외우고 그랬더니 영어 점수는 그냥 따라서 좋아졌다. 문제는 그 외의 다른 과목들이었다. 특히 암기를 해야 하는 과목들은 내게 쥐약이었다. 암기는, 모두가 알겠지만, 시간을 들여 외워야 했다. 시간을 들이는 만큼 외워지는데 나는 달달 외우는 것에는 영 흥미가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암기 과목 만큼은 시험 보면 높은 점수를 받곤 했는데, 나는 암기 과목에선 완전 고꾸라졌다. 나는 암기력이 겁나 떨어진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그랫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전화번호 외우는 건 너무 식은죽 먹기라서, 내가 암기력이 떨어졌던 건 암기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했으므로 하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 내가 어른이 되어, 그러니까 대략 2015-2016년부터 여성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번 언급햇지만 '최명희' 의 《혼불》을 읽다가 아니 세상이 왜이렇게 똥같지? 왜이렇게 여자들 살기가 엿같았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이걸 알게 되나? 그렇게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을수록 더 알고 싶어져서 관련 강의도 찾아다녔다. 회사 업무가 끝나면 지하철을 타고 마포로, 대학로로 그 외 다른 곳으로 이동해가며 강연을 들으러 다녔다. 페미니즘 철학 강의를 들으러 주말에 창원에 가기도 했다. 내가 알고 싶고 재미를 느끼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내 스스로 찾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진다는 것에 공부의 재미가 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식이 부족하면 상처 주는 말도 더 하게 되는 거였어. 나는 점점 더 과거의 나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페미니즘 책 읽기를 계속했고, 알게될수록 여성학이 그저 여성학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언어학, 사회학, 인문학, 신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철학등의 학문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뒤늦게 알고 깨닫게 되니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의욕만큼 잘 되지 않았고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과거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 내가 어릴 때 공부를 했다면. 암기과목을 열심히 암기했다면. 국사와 세계사 한국지리와 세계지리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그리고 윤리까지, 내가 암기과목을 제대로 다 외우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면, 이렇게 지금에 와서야 맨땅에 헤딩해가며 책을 읽지 않아도 됐을텐데. 책 읽다가 이게 무슨 말이야 찾아보는 일 없이 내 배경지식을 끌어오면 됐을텐데. 나는 과거에 내가 공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지만 그러나 내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지금의 젊은 학생들에게 지금 열심히 공부해두라고,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걸 말하는 순간, 나의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내게 그러했던것처럼, 한낱 잔소리로 들리겠지. 아마 귀에 닿기도 전에 튕겨져 나가는 잔소리겠지.
나는 헤르만 헤세가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만들어낸 인물,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반영한 인물 '한스'를 보는데 부러웠다. 작은 마을의 반짝거리는 학생, 집이 부유하지도 않고 대도시도 아니지만, 그러나 자기 스스로 빛이 나는 한스를, 마을 사람 모두가 알아보고 도우려고 하는 것이 부러웠다. 이 작은 마을에서 출세하는 길이라고는 좀 더 큰 곳으로 가 신학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의 규율을 잘 따라 종교인이 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이 마을에서 최고 잘난 학생이긴 하지만 과연 그 시험에 합격을 할 지를 두고 마을 사람 모두가 긴장과 기대를 한다.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하고 입학을 앞둔 짧은 기간에는, 그런데 네가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더 잘 따라가려면 그리스어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수학을 좀 더 예습해야 하지 않을까, 하며 교장선생님과 신부님이 앞다투어 개인 과외를 자처하는데 나는 그것도 부러웠다. 물론 여기에는 한스가 뛰어난 학생임이 전제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알아봐주고 예습을 하게 해주다니, 앞으로 쭉쭉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 잘 갖추어진 게 아닌가 싶은 거다.
그러나 기숙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따라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친구를 사귀고 그 친구와 함께 하는 일, 우정을 키워가는 일은 한스에게 바라는 일이었고, 그런데 자신이 사귄 친구와 우정을 이어나가려면 공부하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덜하고 성적이 떨어지니 학교에서는 '너 그 친구랑 놀지마!' 라고 윽박지르고, 설상가상으로 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혹은 사고로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지자 한스는 우울함을 겪는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한스는 그렇게 방황하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결국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신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아이들과 같은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보다 경력은 뒤쳐진 채로. 한스는 새로운 일을 배우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그러나 자신이 아주 아이었을 때 친구들과 노는 일은 얼마나 즐거웠는지, 자연은 또 얼마나 자신에게 주는게 많았었는지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 모든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할 정도로 그는 고통 속에 놓인다.
한스는 공부를 잘하는 뛰어난 학생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살지 못했다.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그걸 충실히 따라가려다보니 어느 순간 에너지가 소진되어져버린 거다.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이나 가지고 싶었던 과거가 한스에게 있었는데, 그런데 한스에게 그 현재는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거다. 지금의 중년인 내가 '너 그거 좋은 기회를 가진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재를 사는 한스가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예전처럼 낚시도 하고 친구들하고 놀고 싶어' 라고 말하는데.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동네 아주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 행복한 어린 시절이 지나가버렸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지식을 채우던 어린 시절이 한스에게 있었는데 한스는 그것이 괴롭다. 지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면서 놓친 수많은 것들을 갈망한다. 그리고 한스는, 그 괴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가 벅차다.
아마 한스 또래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한스의 괴로움과 고통에 더 무게를 둘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이 될 것이다. 중년의 나는 내 입장으로 보게 돼서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결코 무용한 독서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놓지 말아야 할 것, 어린 시절에 강요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한스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읽어야 하지만, 그러나 나처럼 한스 또래의 자식을 두었을법한 어른들도 이맘때쯤 읽어야 하지 않나 싶어진다. 중년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른의 눈으로 한스를 보았는데, 도대체 헤르만 헤세는 이 괴로운 어린 한스를 만들어냈을 때 몇 살이었을까. 검색해보니 1906년에 쓴 작품이더라. 헤르만 헤세는 1877년에 태어나 1962년에 죽었다. 그의 나이 서른에 한스를 통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이 고통이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나이 서른이 되어도 그 때의 괴로운 기억은 그에게 온전히 남아있었던 탓이리라.
일전에 유명한 북튜버가 자신의 뛰어난 영어 실력은 초등학교 때부터의 엄청난 교육과 훈련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따로 유학을 간게 아니어도 영어 실력이 뛰어난 거라고. 그러나, 그 때로 돌아간다면 그걸 또 겪고 싶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 시절이 괴로웠다는 거였다. 한스를 읽는데 그 북튜버의 이야기가 겹쳐졌다. 뛰어난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남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게 되는 것은, 이렇게나 '괴로웠던 때'를 함께 가져가야 하는 것일까. 좋은 대학을 가고 원하는 직업을 가지면 과거의 그 고통을 보상 받는 게 되는 건 아니라고, 헤르만 헤세가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절망하고 무릎 꿇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배경지식을 많이 다져두면 어른이 되어서도 지식을 쌓는 일이 더 유리해질텐데, 그런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니, 이 나이가 되어도 역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스는 인생이란 수레 바퀴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나는 인생이란 수레 바퀴를 가까스로 피해가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이 수레바퀴라는 건 변함없는 것이라면, 역시나,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