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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9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피아노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그것을 가지고 이사해 본 사람들만이 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첫 부분에서 이런 문장을 만난다.

 

아무리 절실해도 함부로 독스를 손볼 순 없었다. 그가 나무 아래에 밤색 토러스를 세워놓고 나를 감시한다 해도,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를 때까진 아무일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해결책이라곤 하늘에서 피아노가 뚝 떨어져 그를 깔아뭉개는 정도였다. 불행하게도 그런 행운을 기다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p.42)

 

 

하늘에서 피아노가 떨어지다니, 대단히 참신하지 않은가!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나는 피아노가 얼마나 무거운지 안다. 그러니 그 피아노 아래에 깔린다면 말 그대로 '깔아뭉개질 수 밖에'없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독스에 대한 증오심, 그를 없애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바라는 부질 없는 기도가 그대로 느껴져서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

 

 

덱스터는 살인 본능을 가진 남자다. 스스로는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그는 규칙을 정한다. 자신의 살인 본능을 평소에는 억누르고 정상적인 인간처럼 살되, 연쇄살인범에 대해서는 자신의 본능대로 할 것. 그래서 그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달밤에 응징한다. 특히나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그는 용서할 수 없다. 그는 가차없이 그들 앞에 나타나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다.

 

 

나는 이런 그를 응원할 수 밖에 없다. 내 안 어딘가에서도 역시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면서도 이런 그를 응원할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이 드라마로 나왔을 때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아닐까. 그러나 전편을 읽고도 느꼈던 것처럼 이토록 흥미진진한 소재가 책으로는 그다지 훌륭하게 쓰여져 있질 못하다. 전 편에서는 무조건 '본능적으로' 살인범이 어디서 죄를 저지르는지를 알아내곤 하는게 영 찜찜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가 아무리 저주하는 상대였다한들, 그가 아무리 그의 위로 피아노가 떨어지길 바랐던 상대라 한들, 엄청난 살인범에게 잡혀간 독스를 구하러 가지 않는 그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는 독스에게 '너가 인질이 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지 않았던가.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건, 어느틈엔가는 덱스터가 독스를 향해 달려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덱스터는 보통 사람들처럼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지만, 나는 독스를 그대로 둔 덱스터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질 않았다.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책의 등장인물들이 당연히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책의 '내용상'으로 책을 싫어하게 되는 일은 뭔가 부조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덱스터에게 이별을 고했다.

 

 

안녕, 덱스터. 당신하고는 이제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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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2-10-0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께 절교선언을 듣다니!!! 덱스터 큰일 났네요. ㅋㅋ

다락방 2012-10-08 13:4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덱스터도 좋아할지도 몰라요. ㅋㅋㅋㅋㅋ
 
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본문은 345페이지에서 끝나는데 나는 192페이지까지 읽다가 포기했음을 미리 밝힌다.

 

 

이 책은 아니 에르노의 일기다. 그녀는 소련 외교관인 S 를 만나는동안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를 만나면서 그녀가 경험하게 되는 욕망과 집착과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들. 아니 에르노는 역시나 자신의 감정을 밝히는데 거침이 없다. 그녀는 그녀의 다른책에서 그랬던것처럼 이 책에서도 더할나위없이 솔직하다. 불편할만큼.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별난 감정을 가져서 불편한게 아니다. 나는 그녀가 쓰는 감정이 내가 갖게 되는 감정과 지나치게 같아서 불편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녀는 거침이 없어, 하고 읽어가다가 그만, 포기하고 만다. 이토록 솔직한 글들을 '더는' 읽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에 대한 기억들이 '허구'가 아니어서 더 불편하다. 그녀가 기록한 것들에 '그 남자의 아내'에 대한 묘사가 있는것이 나를 못견디게 만든다. 내가 하지 않아도 좋을 걱정들이 자꾸 생긴다. 맙소사. 적어도 S 와 S 주변의 사람들이라면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얘기인지 혹은 누구의 얘기인지 알 수 있을텐데. 이 책을 읽는 S 의 아내는 어떤 기분을 느껴야할까. 나는 아니 에르노가 느낀 감정에 내 감정을 덧씌워 읽으려다가도 자꾸만 튕겨져 나오고 만다. 이토록 솔직한 책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걸까. 나는 겨우 절반을 가까스로 읽어내고 이 책을 읽기를 포기했다.

 

 

오래전 나의 연인은 내게 '지나치게 솔직한게 좋은건 아니야' 라고 했다. 아니, '솔직한게 꼭 좋은것만은 아냐' 라고 했던가. 아니 에르노는 나를 불편하게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닌데 나는 불편한 것처럼, 나 역시 의도하지 않았는데 나의 솔직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들에 가끔 놓이게 된다. 어쩌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더, 나와 같은 아니 에르노의 감정들을 읽어내기 버거운건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이 책을 읽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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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07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를 포기한 다락방님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은 그런 경험이 있어서 책 읽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거든요.

다락방 2012-10-08 09:53   좋아요 0 | URL
책을 포기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죠. 이번처럼 힘들어서일 수도 있고 대체적으로는 재미 없어서 포기하곤 하죠. 저는 재미없다는 이유로 책을 포기할 때가 여러번 있었어요. ㅎㅎ

blanca 2012-10-08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지독하게 솔직하죠. 때로 민망할 정도로요. 혼자 읽고 있는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저도 주변 인물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런 류의 책을 처음 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하여 담담하게 읊조리던 아니 에르노와 연결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끝가지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해요. 눈물나는 결말이랍니다.

다락방 2012-10-08 09:53   좋아요 0 | URL
윽, 블랑카님. 이 솔직한 누군가의 일기를 이만큼 읽은것도 많이 읽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단순한 열정] 이나 [집착] 정도의 분량이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탐닉]은 정말이지 너무 길더라구요. 그런데 눈물나는 결말이라니..궁금해지잖아요!! 흐음..다시..시도해볼까요? 휴..

프레이야 2012-10-0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도 회자하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않아서 더 호기심 나요. 이 책은 전에 불랑카님 리뷰인가로도 담아두긴 한 책인데 다락방님이 그만 뒀다는 그 이유가 더 끌리게 만드네요. 역시 불편할까요ㅠ

다락방 2012-10-08 12:04   좋아요 0 | URL
소설이었다면, 허구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더 잘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레이야님. 실제의 이야기, 실존 인물이라는 게 자꾸만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아서 내내 불편하더라구요. 아니 에르노의 글은 죄다 이렇게 솔직하거든요. 그나마 [집착]과 [단순한 열정]은 분량이 얇아서 읽어내기에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이 [탐닉]은 그것들의 두 배 분량이에요. 누군가의 지독하게 솔직한 일기를 그만큼 읽어내기가 제게는 쉽지가 않더라구요. 그런데 블랑카님의 댓글을 보니 마저 읽어보는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프레이야님도 한 번 읽어보세요. 아니 에르노의 글을 프레이야님은 결코 싫어하시지 않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녀의 내면을 아주 잘 캐치하실 것 같아요.

moonnight 2012-10-0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을 때 참 괴로웠던 기억이 나네요.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 안 남. 단지 괴로웠던 것만 -_-;;;

다락방 2012-10-08 13:44   좋아요 0 | URL
끝까지 읽어야하나 지금 또다시 망설이고 있어요. 너무 솔직한 글이 분량이 많으니까 참 지독한 기분이..orz
 
첫사랑
페르 닐손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언제나 어른인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서 내 사랑이 언제나 더 현명해지는 건 아니었던거다.

 

여기, '그'가 있다. 미국에 있는 한 달 동안 스웨덴에 있는 그녀에게 열두 통의 편지를 보낸 그. 그녀가 그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던 그.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자신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그녀의 집에서 바지의 단추를 잠그며 나타나는 다른 남자를 보고, 그리고 그녀가 그의 침대에서 함께 누웠던 일을 '실수'라고 말했던 일을 떠올리며, 그는 이제 파란 알약 한 통을 준비해놓는다. 그는 자신의 비극적인 사랑을 견뎌낼 수 없었으니까.

 

 

단순히 첫사랑이어서 이 사랑이 비극이었을까? 첫사랑이어서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한쪽은 사랑이라 말하고 한쪽은 영원히 오래오래 알고 지내고 싶은 친구이길 원한다면 이건 어떤 식으로 결론지어져야 할까. 그는 알약통을 눈 앞에 두고, 그녀와의 추억을 하나씩 지워가면서 그리고 전화기를 바라본다.

 

 

분명 나도 사랑의 비극에 있어서 가해자가 된 적이 있다. 내가 아팠던 만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한 적이 있다. 그 모든 비극들속에 내가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 만큼 누군가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비극들이 있기 전, 거기에는 햇살 찬란한 기억들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나. 우리는 우리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상대를 용서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 비극 역시도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지고 말것이다. 사랑을 잊고 상대조차도 잊혀지는 순간들. 그건 십 대여도 삼십대여도 마찬가지. '햇빛 가득한 어떤 기억'(p.188) 이 그를 녹여준다. 그는 알약통을 눈 앞에서 치운다. 사노라면 다시 눈 앞에 알약통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통을 다시 치우게 되는 기억들을 불러낼 수 있다. 햇빛 가득한 일들은 다시 찾아와서 켜켜이 기억으로 쌓일테니까.

 

 

 

그의 몸속에 있는 커다랗고 무거운 덩어리는 콘크리트로 된 것이 아니었다.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햇빛 찬란한 기억이 덩어리를 녹이기 시작하는 지금, 그는 그 사실을 깨닫는다.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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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2-10-08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받았던 상처보다는 내가 상처를 줬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커져가더군요.

도서관에 신청한 '소수의견'이 얼마전에 왔길래 주말에 읽었어요. 법률쪽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작가가 쓰면서 공부 많이 한듯 하더군요. 전 소설이 너무 현실적이면 '에잇, 소설에서라도 좀 비현실적이게 해피앤딩이면 안돼?' 이러다가도 또 해피앤딩의 소설을 만나면 '뭐냐 이게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세상에 해피앤딩이 어딨어?'이러면서 혼자 투정을 부려요. 소수의견도 그랬답니다 '에잇!!!'하고 말이에요.

월욜 아침부터 머그잔을 씻다가 놓쳐서 홀랑 깨뜨려 먹었네요. 에잇!!

다락방 2012-10-08 09:55   좋아요 0 | URL
마중물님, 저도 그랬어요. [소수의견]을 읽을 때, 에잇, 소설에서만이라도 좀 다르게 끝나면 좋잖아, 했다가 아니 그러면 현실적이질 못하지, 현실은 이따위인거야, 하고.

아니, 그나저나 머그컵을 깨버리셨다니!! 흑흑. 그런 기억은 빨리 잊으세요, 빨리. 마중물님 다음 책은 어떤걸 읽으려고 골라두셨나요?

아무개 2012-10-08 10:11   좋아요 0 | URL
<생의 이면> <굿바이 카뮈> <인간의 굴레에서> <이반데니소 비치,수용소의 하루>를 대출해왔어요.
지금 회사에서 읽고 있는 책은 <굿바이 카뮈>입니다.

머그컵이 깨져서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까봐 신경쓰였는데
'김치찌개'를 먹고싶다는 생각으로 올인 되버렸습니다.
다락방님 덕.분.입.니.다! ^^

다락방 2012-10-08 12:05   좋아요 0 | URL
[굿바이 카뮈]는..뭔가요. 제목 되게 어렵게 생겼어요. ㅎㅎ [인간의 굴레에서] 도 어려울 것 같고. ㅎㅎ

저는 어이없게도 [연애와 결혼의 원칙]을 시작했어요. 이게 좀 황당한게, 이런 책(?)인줄 모르고 읽었는데 이런 책(?)이라서 당황스러워요. 그런데 좀 재미있기도 해서 일단 끝까지 읽어보려구요. ㅎㅎ

moonnight 2012-10-08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책부터 보관함에 넣고;;
저는요. (뜬금없지만;;) 파란 알약 한 통. 이 무척 부럽습니다. 뭐랄까.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해질 것 같아요.

다락방 2012-10-08 12:36   좋아요 0 | URL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면서 파란 알약을 한 통 준비해놓은 주인공 때문에 애가탔어요, 문나잇님. 이것은 그의 첫사랑이었고 또 아팠죠. 그가 이 순간을 견뎌내야하는데, 그걸 할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더라구요. 애잔하다고 해야하나, 여운이 있는 책이에요, 문나잇님. 게다가 아주 빠르게 읽히고요.
 
엄마도 때론 사표 내고 싶다 -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
문현아 지음 / 지식노마드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네가 세상에 태어나서 접하는 모든 것들이 다 처음이듯이, 나도 너를 통해서 엄마가 되는 게 처음인 거다. 네가 새롭게 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런 아이를 가진 엄마로, 그렇게 처음 엄마가 되는 거니까." (p.58)



당연히 엄마도 엄마가 되는게 처음인데, 우리 모두는 마치 엄마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줄 아는 것 같다. 당연히 엄마의 역할로서.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는 여동생을 옆에서 보아오면서 엄마라는게 정말 힘들다는 걸 깨달아가던 내게, 그래서 차마 그건 내가 못할 것 같은 엄청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던 내게 '나도 너를 통해서 엄마가 되는 게 처음인거다' 라는 문장은 구원처럼 다가왔다. 그래, 그렇지. 이 당연한 말을 왜 그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 너무 당연해서인가, 아니면 그들 모두 그걸 모르는채로 지내는 편이 더 편했기 때문인가?



여동생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체력이 많이 약해졌고 몸무게도 많이 줄었다. 아이를 막 낳고 나서는 행복과 슬픔 사랑과 절망 그리고 분노까지 그 많은 감정들을 순식간에 왔다갔다했다. 몸 여기저기가 고장나서 육체적으로도 힘겨워했고 그런 복합적인 감정들을 이겨내느라 우울증까지 걸렸었다. 그토록 원하던 순간순간들이었는데,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면서 이제 동생은 많이 안정을 찾았고 어떻게 자신을 돌봐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잠든 후에 차를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자기를 위한 시간을 갖기도 하고, 과외선생님을 하면서 자신이 녹슬지 않았음을 깨닫고 기뻐하기도 한다. 



여동생이 아이를 낳고 힘들어할 때 무엇보다 그런 여동생을 더 힘들게 한건 주변 어른들의 한마디 말이었다. 야, 옛날 엄마들은 애를 여럿 낳았다, 남들도 다 하는데 너는 왜 유난이냐, 하는 그런 말들. 세상에 그렇게 무식한 말이 어딨을까. 남들도 다 해낸 일이니 나 역시도 쉽게 해내야 한다는 건 대체 어디서 온 논리일까. 누구는 애를 열을 낳았고 누구는 하나를 낳았다고 해서 그게 힘들지 않은건 아니다. 열을 낳든 하나를 낳든 힘들다. 똑같이 둘을 낳았다 해도 누군가에겐 더 벅차고 힘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가 같은 과정을 거치고 같은 경험을 하면서 받게 되는 고통의 강도는 다 다르다. 물론 기쁨의 강도도 다르고. 그걸 이겨내기 위해서 각자가 나름의 위치에서 애쓰고 있는데 거기에 '남들도 다 했어' 라는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그 힘겨움을 들어주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쪽이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남들도 다 했어, 라니. 그럼 못하는 나는 병신이란 말인가?



그런차에 이 책, 『엄마도 때론 사표 내고 싶다』는 꽤 반가웠다. 무엇보다 그런 엄마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서 무척 안심이 됐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는 엄마가 처음인 사람들의 편에 서려고 한다는 것, 그들이 괜한 엄살을 하는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려고 하는 것 같아서 나도 한 편이 되어 응원해주고 싶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될 것 같다.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과정에서 당연히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그 과정이 행복하기만 하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갖는 환상 아닐까. 그 과정이 왜 무섭지 않겠는가, 왜 두렵지 않겠는가. 나의 스케쥴이 내가 아니라 다른 생명으로 인해 정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내가 먹고 싶은걸 내가 아니라 다른 생명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끔찍하게 두렵지 않은가 말이다. 내 생활이 그동안 몰랐던, 알지 못했던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지다니, 그걸 마냥 환영하고 기뻐하기에는, 사실, 엄마인 당사자 말고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먹지 않아야 하고, 자지 못하게 되고, 참아야 하는 것들이 왜 모두 엄마의 역할인걸까. 그런데 왜 그것들을 감당하는 것을 그토록 당연스럽게 여겨야 한단 말인가. 



뒷부분에서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부담도 나온다. 왜 강남 엄마는 있고 강남 아빠는 없는것일까. 왜 아빠의 무관심이 아이들 교육에 더 도움이 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와야 하는걸까. 왜 할아버지의 재력이 아이의 교육에 영향을 미친다는 농담아닌 농담이 돌아야 하는걸까. 왜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엄마만 존재하고 바짓바람을 일으키는 아빠는 존재하지 않는가. 그들은 돈을 벌기 때문에? 그렇다면 돈을 버는 엄마는 교육에서 무관심해도 좋은가? 엄마가 직장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가정과 사회는 아이들의 교육을 당연히 엄마가 책임지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인터뷰한 몇몇 엄마들은 그것이 엄마들의 잘못이 아니라 이 사회의 잘못된 시스템 탓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엄마들을 보는것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지금 당장 그들이 액션을 취하는게 아니라도, 일단 그들은 '내 잘못' 혹은 '내가 엄마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야'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교육 시스템이 잘못됐다는 걸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게 좋아서. 일류대를 보내려는, 인 서울을 하려는 엄마들을 만나는 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이 사회가 그런 대학만을 위에 올려놓았으니까. 거기에 가야만 살아남는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 책에서 인용된 신문기사들을 보더라도 끔찍한 교육으로 아이들을 몰아넣은건 모두 엄마들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멍청하기 짝이없다.



엄마가 아닌 저자가 엄마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인터뷰를 하고 책을 쓰려는 의도도 좋았고, 무엇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반가워서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지만, 오타가 지나치게 많다. 툭툭 어색한 문장도 튀어나온다. 게다가 재미도 없다. 육아서적도 그리고 엄마의 아이덴티티에 관한것도 읽고나서 위로가 될만하다 싶으면 여동생에게 건네주는데, 강남 엄마에 대한 부분부터는 의미는 있으되 재미는 없어서 책장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읽어보라 권하지를 못하겠다. 단어와 문장을 조금 더 손보았다면, 그리고 음, 좀 더 '재미있게' 썼다면 약간 찝찝한 별 넷이 아니라 확실한 별 넷을 줄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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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24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게 쓸려 그랬는데 또 길어졌어..병인가..orz

비로그인 2012-09-2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육아관련서적이라곤 오직 베이비위스퍼 하나뿐인 엄마사람인데 이런 책도 읽으시는 다락방님 일단 존경합니다... 진작에 읽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육아서적을 앞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지금으로선 다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은 자기계발서적과 마찬가지로 쉽게 손이 안가요...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도 아이들 키우며 스스로 정립해나가는 걸 더 소중히 여기게 되네요. 아이들을 대하는 기본은 사랑임이 당연하고 같은 인간으로서 예의를 지키는 것, 그렇지만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자신을 아이들보다 하찮게 여기지 말 것 등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데...가끔 불필요한 조언을 하는 사람들에겐 "그럼 니가 키워봐" 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못된?? 엄마네요,저는.ㅎㅎㅎ

다락방 2012-09-24 11:16   좋아요 0 | URL
저도 몇 권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책에서도 육아서에 대한 언급이 있거든요. 아이들마다 다 다른데 육아서대로 어떻게 키우느냐는 거죠.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들조차도 성격과 취향이 다 다르잖아요. 그 애들한테 대응하는게 다 달라야 하고요. 육아서는 참고할 순 있어도 유일한 혹은 유능한 지침서는 결코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만약 제가 엄마였다면, 혹은 제 여동생이 엄마가 아니었다면 아마 육아서를 읽지 않는 여자사람이었을 거에요. 그런데 제 여동생이 엄마가 되었고, 저는 여동생이 엄마라는 역할을 함에 있어서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여동생보다 제가 더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고요. 읽는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이왕 여동생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한다면 가급적 재미도 있었으면 좋겠구요.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요. 비혼이고 아이도 낳지 않았지만, 그런 언니지만, 아이를 가진 여동생의 훌륭한 동무가 되고 싶어요.


아른님 댓글중에 '같은 인간으로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제 마음과 같아요. 아이들에게도 약속을 잘 지키는 어른이 되는것이 중요해요. 아이라고, 금세 까먹을거라고 말만 내뱉는 건 정말 나쁜것 같아요. 예의를 지키자고 생각하는 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치니 2012-09-24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아서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제가 읽은 교육론(?) 중에는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박혜란 저, 이적 어머니죠)이 제일 마음에 와닿았던 기억이 있어요. 시대가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엄마들이 엄마 역할에 대해서 너무 모르거나 너무 힘을 주는 오류에서 벗어나기 힘든데, 기본적으로 읽어두면 좋을 책이다 싶어요. 기억이 가물한데, 아무튼 박혜란 씨가 여성학자이자 세 아들의 엄마로서 주지한 것 역시, 엄마라고 다 해줄 필요는 없다, 일단 아이를 인격체로서 믿어라, 니까요. 이적이 이미 패닉으로서 성공한 이후 나왔다는 게 함정, 이긴 하지만. ㅎㅎ

윗분 말씀대로 다락방 님은 참 부지런하고 배움을 두려워 않는 미덕을 갖춘 분. 동생분이 든든할 것 같습니다. :)

다락방 2012-09-26 12:19   좋아요 0 | URL
치니님의 댓글을 읽고 검색해봤는데 품절이네요. '여성학자'라는 본인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면서 이적의 어머니이기도 하군요.

부지런하다뇨..전 게으름의 화신인걸요!! 무언가를 배우기엔 노력하는 성향도 없고..부족한 인간인겁니다. 흑흑. 이제 점심 먹을거에요!

dreamout 2012-09-2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책꽂이엔 남편.이 놓여 있네요. 엄마,, 남편,, 아. 손님.도 있네요. ㅎㅎㅎ

다락방 2012-09-26 12:55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아직 엄마가 되지 않았고 남편도 없으며 절 찾아온 손님도 없네요. ㅎㅎㅎㅎㅎ 책들 다 갈아치워버렸어요. ㅎㅎ
 
블루 발렌타인 - 아웃케이스 없음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 미쉘 윌리엄스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아, 이건 정말이지 가슴이 서늘해서 견딜수가 없다.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상대방이 하지도 않은 말에 조차 귀를 기울인다. 혹시라도 내가 그의 말을 놓치지는 않을까 내 모든 감각은 섬세해진다. 그의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을 것 같고 그의 모든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만큼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것 같고, 역시 그 만큼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사람이 왔을까, 어쩌면 나는 신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던건 아닐까, 몇 번이고 고맙고 감사하다고 속삭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버리고 마는걸까. 세상에 변하지 않는건 아무것도 없다지만, 왜 이제는 더이상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는걸까. 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는걸까. 왜 한마디를 꺼내면 그 말은 비틀리고 꼬여서 상대의 귀에 가 닿는걸까. 왜 더이상 속삭이지 못하고 크게 소리치게 되는걸까. 사랑의 제스쳐조차 상대의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일들은 대체 왜 일어나는걸까. 왜 이제 그들은 더이상 함께 있어도 웃지 못할까. 마주보던 그들이 이제는 왜 뒷모습만을 보게 된걸까. 왜 그들은 이제 더이상 함께 있는걸 견디지 못하게 된걸까. 왜 그들은 이제 이런 말을 내뱉게 되는걸까, 



이렇게는 더이상 살 수 없어.



달콤한 순간이 없었다면 고통스러운 순간도 결국 찾아오는 일이 없었을텐데. 언제 여름이었냐는 듯 바람이 찬데, 바깥에서 부는 바람보다 내 가슴에 부는 바람이 더 차다. 뜨거운 커피를 내렸는데도 도무지 마음까지 따뜻해지질 않는다. 사랑이 참, 별 게 아니다. 그건 고작 이따위였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꿀 듯 보였던 그것이, 이젠 바닥을 보여준다. 그래, 그게, 참 별게 아니라니까. 사랑 따위.


운명적 사랑? 웃기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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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2-09-1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봤어요. 너무 괴로웠어요. ㅠ_ㅠ 역시 변치않는 사랑 따윈 없구나. 했어요. 소주 한 병 마시고픈 맘이 들게 하는 영화였어요. 그치만 젊은 날의 라이언 고슬링이랑 미셸 윌리엄스는 너무, 너무 싱그러웠어요. +_+;

다락방 2012-09-18 17:53   좋아요 0 | URL
우앗, 문나잇님은 이 영화를 보셨군요. 이 영화를 본 다른 사람을 만나다니, 너무 반가워요!

아우, 이거 그냥 가슴이 서늘해져서 좀처럼 그 서늘함이 사라지질 않아요. 다 부질없구나, 영원한 건 없구나, 사랑 그게 대체 뭐냐, 하는 생각이 들고 말이지요. 어휴..진짜 혼자 앉아서 술이나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지더라구요. 커피로는 도저히 위로가 되지 않는 영화였어요. 격한 싸움 없이도 이렇게 사람을 흔들어놓네요, 이 영화는. 아, 추워요, 문나잇님.

프레이야 2012-09-18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려다 놓친 영화ᆢ 미셀 윌리엄스도 그렇고요. 이런 영화였군요. 찾아봐야쥐^^

다락방 2012-09-19 11:0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 영화 꼭 보세요. 프레이야님도 가슴이 서늘해지실 거에요. 아우, 전 한동안 진짜 추웠다니깐요.

2012-09-21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4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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