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의 봄에는 내가 좀 미쳐있었던 것 같고, 여름에는 좀 더 미쳐있었던 것 같고, 가을에는 극에 달해 돌았었던 것 같다. 올 한해를 정리해보려고 했더니, 뭐 사실 정리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해놓은 것도 없고, 그저 미쳐있었던 봄,여름,가을만이 떠오른다. 기억에 남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생각하기가 너무 싫다.
어쨌든, 올 한 해의 남자와 멘트와 책 등등을 순전히 내 마음대로 정해보려고 하는데, 나는 당연히 공동수상같은건 하지 않을 생각이다. 둘이 나눠먹게 안한다. 하나에게만 올인. 그래야 진짜.
- 올해의 문장은 '사라 쿠트너'의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바로 그게 제 문제에요! 전 보통 슬프지 않을 때 발작이 일어나요..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게 제대로 굴러가고 있을 때요. 그럴 때면 전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아내기 위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죠. 하지만 제 머리는 마치 품질이 안 좋은 퍼즐 같아요. 조각들을 잘못 자르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아귀가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 퍼즐 말이에요! 항상 한 가지 원인을 찾으려다 보면 전 미칠 것만 같아요. 머릿속에서 마치 제대로 줄도 서지 않고 마구 소리를 질러대며 반항하는 유치원생들처럼 온갖 가능성들이 마구 뒤엉켜버리거든요!"
"그럼 그걸 중단하십시오."
"뭘요?"
"생각 말입니다." (pp.344-345)
그녀에게 생각을 그만하라고 정신과 닥터가 말해주는 장면인데, 뭔가 뻥 뚫려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게. 그녀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 때문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처럼 되어버리고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저그런 소설 쯤으로 책을 읽었다가, 여자주인공에게 흠뻑 이입해버려서 이 책은 나의 바이블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역시 책이든 뭐든 타이밍이 중요한게 아닐까 싶어졌다. 게다가 나는 몇개월전에 한 친구로부터 '당신은 당신의 기분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한테 너무 이입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 제기랄, 이 책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헤르만 양! 모르겠어요? 당신은 매우 지적인 사람이에요. 감성지수도 아주 높고요. 열정이 넘치는데다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아차리는 직감까지 뛰어나죠. 그런데 그런 능력이 자신에게는 전혀 발휘되지 않고 있어요. 자신의 감정 문제에 맞닥뜨리기만 하면 당신은 마치 머리에 널빤지라도 두른 사람처럼 우둔하게 헤매고 있어요. 정말 이상한 일이지요. 하지만 이건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당신은 다른 건 전부 느낄 수 있는데, 자기 자신만은 느낄 수 없다는거요!" (p.342)
절절하다, 진짜. 이 책이 문학적 가치가 뛰어나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아니,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순전히 내 개인적으로, 내가 '그런 때에' 만났기 때문에 별 다섯이다.
- 올해의 남자는 요리하는 남자. 이건 완전 어제 급조된건데, 그러니까 나는 어제 친구와 연극을 한 편 보고 까페에 들어가서 차를 마셨다. 거기는 와플을 비싸게 파는 까페였는데, 와플을 만들어두지 않고 주문하는 즉시 구워준다고 했다. 마침 카운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터라 우연히 카운터를 계속 쳐다보게 되었는데, 길쭉하고 하얀 남자가 와플을 굽고 있었다. 와플을 굽고, 접시에 초코시럽을 뿌리고 와플을 접시에 담고 그 위로 딸기를 올리고 다시 생크림을 올리고 또 딸기를 올리고 해서 완성한뒤에 손님에게 건넸다. 그리고 또다시 와플을 굽고 이번에는 아까와 다른 데코레이션을 해서 또 손님에게 건네고, 또 와플을 굽고...하는게 반복이었는데, 그 길쭉하고 하얀 남자가 그렇게 예쁘게 와플을 접시에 담아 건네는게 몹시 낭만적인거다! 근사해!
나의 남동생은 군시절, 장교식당 취사병이었는데 제대하고 나서 지금까지 몇년이 흘렀건만 식구들에게 요리를 해준건 딱 한번이었다. 그것도 식구들끼리 다같이 제주도 놀러갔을때, 기분으로 안주 한번.. 너는 요리하는 남자였는데 왜 대체 식구들에게 요리를 안해주는거냐며 내가 잔소리를 퍼부어대면, 녀석은 항상 이렇게 말해왔다.
"난 40인분에 맞게만 세팅되어있어."
후아- 너란 인간. orz.... 그러니까 그 와플을 구웠던 길쭉하고 하얀 남자는 집에 가면 아무것도 안할 확률이 크겠지만, 아, 그래도 멋지더라. 내가 요리를 전혀 못하는 여자라 그런건지 요리하는 남자를 보는 순간 잠시 눈이 하트가 됐었다. ♡.♡
- 올해의 영화는 『엘 시크레토』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은 아주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 맞아, 저 남자에게는 저런 형벌이 필요해, 반드시 그래야 해.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 다다를수록, 저랬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러니까 내 가치관에 혼란이 오는거다.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 반드시 그래야 했다는 신념, 그 모든것들이 정말 옳은거였냐고, 영화는 내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묵직하고 먹먹한 사건과 함께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이 영화 안에는 함께 흐르고 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잘했다고 혹은 잘못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음을, 이 영화를 보고나서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함께.
한 페이퍼 안에 이것저것 마구 링크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건 그래도 '올해의 페이퍼'니까, 아쉽게 뽑히지 못한 다른 영화들을 좀 골라보자면 다음과 같다.
- 올해의 멘트는 '샬레인 해리스'
앗, 나는 올해 『완전히 죽다』와 『죽어 버린 기억』만 읽었는데, 언제 『돌아올 수 없는 죽음』까지 나왔구나. 사야겠네..이 책을 읽다보면 나는 아주 궁금해진다. 작가는 책속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의 멘트를 다 들어본걸까? 아니면 상상인걸까? 대체 여자가 듣고 싶어하는 모든 말들을 어떻게 그녀는 다 써낼 수 있을까?
『죽어 버린 기억』에서는 이런 멘트가 나온다.
「당신 바쁘네요. 전화하지 말걸.」
나는 금세 주눅이 들어 말했다.
「농담해요? 당신 전화는 하루 종일 내가 겪은 일 중에서 최고로 좋은 일이었어요!」 (p.139)
얼마전에 나는 한 청년에게 이 책의 이 멘트에 대해 얘기해주면서, 여자를 녹이고 싶다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그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간에, 그러니까 어머 좋아, 부터 시작해서 혹은 웃기시고 있네, 라는 시니컬한 대답까지, 여하튼 그게 뭐든간에 그여자는 속으로는 완전 흐물흐물 녹진녹진해졌을 거라고. 그러니 나만 믿고, 사랑을 얻고 싶은 여자에게 저 멘트를 날리라고 했다. 당신 전화는 하루 종일 내가 겪은 일 중에서 최고로 좋은 일이었어요, 라니. 어떻게 안 녹을 수 있을까! 하하하핫. 근데 왜 슬프지? ㅠㅠ 이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숨을 곳이 필요하다면, 당신 등 뒤를 지키거나 당신을 방어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내가 당신에게 그런 남자가 되지요.」 (p.203)
뭐, 이쯤되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지키고 방어해주고..그런 남자가 되어주고...아, 뭐 똑바로 서있기조차 힘들다. 대체 이 작가는 어디서 이런 말들을 다 배워가지고 ㅠㅠ 당신은 다 들어본 말입니까? 네? 그래요?
『완전히 죽다』에서는 완전히 날 기절시킨 멘트가 나온다.
「우리는 함께 있으면 서로 즐거워해요. 나는 내 침대 안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요. 그런 마음이 너무 심해서 아플 지경이에요. (중략)내게는 슈리브포트에 아파트가 하나 있어요. 당신이 나와 함께 머무는 것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p.214)
후아- 생각해보고 말고 할게 어딨니. 나랑 함께 있고 싶어서 아프다는데. 니가 아프면 나도 아퍼. 그러니까 그냥 너의 아파트로 내가 갈게. 함께 머물게.
- 올해의 책은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로 정했다. 마지막까지 천재작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두고 갈등했는데, 안나 카레니나는 '천재 작가'의 글이라면,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작가 본인'의 글이라서, 도무지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책 속에서의 쌍둥이가 아프면서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아서 나를 더 미치게 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대신 아파해야 한다. 그게 독자의 몫이다. 만약 그들이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울부짖고 토로했으면 나는 그들의 아픔을 이다지도 생생하게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통이든 아픔이든 느끼는 만큼 절규하는 쪽이 빨리 덜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쌍둥이들이 그걸 못하니까 대신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그래야 얘네들이 살지, 하면서.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에 대해서는 읽을때마다 미치게 페이퍼를 썼으니까, 이쯤하고. 이 책 때문에, 좋았지만 올해의 책에 뽑히지 못했던 책 몇 권을 골라보자면 다음과 같다.
올해의 통화, 올해의 이성, 올해의 동성, 올해의 문자메세지, 올해의 술자리, 올해의 만남, 올해의 친구, 올해의 노래, 올해의 연극, 올해의 유머, 올해의 사진, 올해의 눈물, 올해의 사랑, 올해의 서운함, 올해의 이메일 등등을 다 써보고 싶지만, 그러면 오늘 하루가 페이퍼 쓰다가 끝날것 같아서 이제 그만 두기로 한다. 아, 올해의 진통제는 우먼스 타이레놀이다. 그리고 올해의 최악의 찌질함은 지난주 토요일의 아이라이너. 집에서 나갈때는 나 오늘 좀 예쁘다며 혼자 들떠있었는데, 친구와 만나고 있으면서 화장실에 가 거울을 보고 기절했다. 아무리 트윈케익 떡칠해도 도무지 감추어지지 않는 팬더눈. 내 다시는 아이라이너를 하지 않으리라. 후아- 내가 왜했을까, 아이라이너를... 3년만에 해보는 아이라이너였는데, 이런 미친 찌질함을.. 난 아이라이너가 싫다. 정말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