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맡의 전자시계는 열한시 반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자려고 애쓰기를 그만두고 이불에서 나와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쳤다. 가스 스토브를 켜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작은 냄비에 데워 마셨다. 생강 쿠키를 몇 개 먹었다. 그리고 안락의자에 앉아 읽다 만 책을 펼쳤다. 그러나 독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온갖 이미지와 소리가 머릿속을 맥락 없이 돌아다녔다.
다른 세계에서 발신하는 의미 불명의 메시지처럼 소리 나지 않는 자전거를 탄 얼굴 없는 메신저들이 그 메시지를 차례차례 문 앞에 놓고 그대로 사라졌다.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P434
하루키의 책을 읽을때면 등장인물들의 식탐 없음에 놀라곤 한다. 맛있는 걸 느끼고 와인과 궁합이 좋은 음식을 알고 요리가 잘하는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결코 과식을 하지도 않고 당연하게도 폭식도 하지 않는다. 자려고 애쓰기를 그만두고 나와서 삼겹살을 구워 먹진 않겠지만, 그래도 우유를 데워 먹고 생강 쿠키 몇 개라니. 참 하루키 답다 싶었다. 책속에서 친해지고 싶은 여자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할 때에도 와인을 많이 쟁이거나 하지도 않고 음식도 딱 적당할만큼을 먹는 것 같다.
하루키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과식하지 않는건 하루키 본인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황혼 부엉이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간식으로 나는 초콜릿, 무라카미 씨는 도넛 반 개를, 저녁으로는 모두 함께 가락국수를 먹었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p.77
가와카미 미에코가 하루키를 인터뷰한 책인데, 가와카미 미에코는 간식으로 초콜릿을 무라카미는 고작 도넛 반 개를 먹었다는게 아닌가. 도넛 반 개.. 나이가 들면서 소화기능이 떨어지는 걸 나 역시 느끼고 있고 그래서 예전에 비하면 나도 양이 많이 줄었는제, 간식 도넛 반 개라니.. 좀 충격이었다. 저녁으로는 가락국수를 먹었다는데, 가락국수 딸랑 한 그릇식만 먹었을까? 아마 그랬겠지. 가운데 다같이 먹는 메인메뉴를 주문해둔게 아니라, 가락국수 자체가 그들의 유일한 메인이었겠지.
나는 하쿠리와 하루키가 창조한 인물들의 적당한 양의 음식 섭취를 좋아한다. 덕분에 하루키도 그리고 하루키의 주인공들도 비만과는 거리가 멀다. 과체중도 당연히 아니다. 이번 책에서도 나이 드니 어쩔 수 없이 뱃살이 나왔다는 정도의 묘사는 있지만, 읽다보면 주인공이 사십대임에도 날씬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식탐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양을 먹는다니, 좋은데, 그러니까 이런 사람 좋지만, 좋은데, 좋긴 하다. 그러나,
나는 하루키 의 생강 쿠키를 읽다가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잭 리처를 생각한다. 오, 잭 리처!
일단 커피가 급했다. 큰 포트 째로 부탁한 뒤, 햄과 치즈를 넣은 토스트 위에 계란프라이를 올린 크로크 마담과 쌉쌀한 초콜릿 스틱이 들어간 사각형의 크루아상, 팽 오 쇼콜라 두 개를 주문햇다. 아침식사로는 약간 부담스러운 분량일 수도 있겠지만 내 위장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퍼스널》, 리 차일드, 전자책 中
아니 잭 리처 봐봐, 우유를 데워먹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커피를 큰 포트 째로 부탁하는 사람이라고. 게다가 햄,치즈,계란프라이 넣은 크로크 마담을 주문하고 팽 오 쇼콜라를 두 개나 주문한다고. 만약 이 메뉴 그대로 상차림한다면 하루키는 여기서 팽 오 쇼콜라 반조각에 커피 한 잔만 먹고 손 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잭 리처, 아침식사로는 '약간 부담스러운 분량'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아, 너무 좋아, '내 위장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나. 그래, 좋아쒀, 바로 이거야! 나는 이런 사람이거든!! 나는 이 취향이야!!! 그리고 잭 리처의 근육에는 분명 이것이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고, 아아, 나의 고정관념 미안합니다, 상대가 누구든 두번째 섹스부터 너무나 좋아지는 것도 역시 이 '위장의 명령에 따르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잭 리처 읽다 보면 가끔 잭 리처 식당 가서 밥 먹을 때 많이 먹는 거 나와서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의 잭 리처, 소식하지 않는 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내가 그동안 잭 리처가 약자를 보호하고 윤리에 대한 감각이 나랑 비슷해서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아, 식탐... 이 나랑 비슷했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람이 다른 것에 끌린다고 누가 그래, 비슷한 것에 끌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나랑 비슷한 주인공은 잭 리처가 아니다. 에리카다. 에리카가 완전 맞춤한 내 얘기고, 내 남동생이 우리 식구들 다 모였을 때, '큰누나가 읽으라고 빌려준 책 보면 다 큰누나 같은 사람 나와' 이래가지고 ㅋㅋㅋ 식구들이 어떤데? 물었더니, '와인 마시고 많이 먹어' 이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에리카는 한숨을 쉬며, 허리가 고무줄로 처리되어 있는 헐렁한 조깅바지와 간밤에 입고 잔 티셔츠를 그대로 입었다. 그녀는 월요일부터 다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시작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오늘밤에 이미 세 코스짜리 저녁식사를 준비하려고 계획했던 데다, 요리로 남자를 매혹하려면 크림과 버터를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월요일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다. 그녀는 월요일부터 운동을 시작하고 웨이트 와처스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따르겠다고 만 번째로 엄숙하게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얼음공주》, 카멜라 레크베리, p.241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내가 쓴 줄 알았네? 은오 님 표현을 빌어 '난줄상' 을 주게 된다면, 나는 에리카에게 준다. 얼음공주에게 준다. 게다가 나 젊은 시절 얼음공주라는 말도 들어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메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난줄상에 빛나는 에리카 얘기 잠깐 더 볼까?
파트리크는 짙은 레드 와인으로 가득 채운 와인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에리카는 와인 향이 풍기도록 잔을 살짝 돌리고, 코를 잔 안으로 깊숙이 넣은 다음, 입을 다문 채 향을 들이마셨다. 강한 오크향이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발끝까지 쫙 퍼지는 듯했다. 기분 좋았다. 에리카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맛보았다. 입안에서 와인을 굴리며 공기를 약간 빨아들였다. 향만큼이나 맛도 좋았고, 파트리크가 와인에 꽤 돈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트리크는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환상적이야!"
"그래, 지난번에 네가 와인 맛을 안다는 걸 깨달았어. 유감스럽게도 난 한 상자에 50크로나 하는 와인이랑 한 병에 수천 크로나나 하는 와인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너도 알 수 있어. 이건 습관의 문제이기도 해. 와인을 제대로 맛보려면 벌컥벌컥 마시지 말고 시간을 들여야 하거든."
파트리크는 부끄러워하며 손에 든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벌써 3분의 1이나 비어 있었다. 그는 에리카가 스토브에서 요리를 확인하려고 등을 돌렸을 때 그녀의 와인 시음법을 흉내 내려고 애쎴다. 정말 전혀 새로운 와인을 맛보는 것 같았다. 그는 에리카가 했던 대로 와인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랬더니 갑자기 완전히 다른 맛이 났다. 심지어 아주 약간의 초콜릿 맛, 다크 초콜릿 맛, 다소 강한 레드베리 맛, 약간의 딸기 맛이 섞여 있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굉장했다. -《얼음공주》, 카멜라 레크베리, pp.258-259
그녀는 잘 때 입는 티셔츠를 벗었다. 티셔츠를 입고 재면 항상 몇 그램 정도가 더 나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지어 팬티도 무게가 나가는지 궁금했다. 아니겠지.에리카는 오른발을 먼저 올려놓았지만 아직 바닥을 딛고 있는 왼발에 체중을 어느 정도 싣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 오른발에 체중을 실었고, 체중계 바늘이 60킬로그램에 도달했을 때 그대로 멈춰 있길 바랐다. 그러나 아니었다. 마침내 모든 체중을 싣자, 체중계 바늘은 무자비하게도 73킬로를 가리켰다. 그렇군. 그녀가 걱정한 대로, 예상 몸무게보다 1킬로그램이 더 나갔다. 1킬로그램 정도는 더 나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지난번, 그러니까 알렉스를 발견한 날 아침에 몸무게를 쟀을 때보다 무려 2킬로그램이나 더 찐 셈이었다. -《얼음공주》, 카멜라 레크베리, pp.240-241
사. 랑. 해. 요. 에. 리. 카!!
우. 윳. 빛. 깔. 에. 리. 카!!
오래전에 친구와 빕스에 가 막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그당시 호감을 가지고 연락하던 남자사람으로부터 갑자기 문자메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과식하지 말아요' 라고 쓰여있었다. 헉, 나 보고 있나? 나는 레스토랑 안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그 일에 대해 물었었다. 그 때 왜 그렇게 보냈냐고, 깜짝 놀랐다고. 그러자 그는 '넌 늘 과식하니까' 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 자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나의 과식은 큰 문제로써, 역시나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다이어트, 해보자.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