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윌라>를 통해 토지1권을 듣고 있다. 내가 몇해전 읽은 종이책은 <나남출판사> 였는데 알라딘에서는 이제 검색이 안된다. 하는수없이 검색되는 마로니에북스를 들고 왔다. 윌라에서는 어느 출판사인지 모르겠고 어쨌든 윌라 독점이란다.
읽다가 중간에 시트콤도 보고 그러느라 아직 1권을 마저 다 읽지는 못햇는데, 아이고야, 이 극진한 사랑 부분에서 진짜 가슴이 뜨거워지고 막 애가 탄다. 사랑, 그게 대체 뭐라고.. 별당아씨랑 구천이와는 완전히 또 다른 사랑 이야기, 그러나 그보다 더 극진한 사랑이야기가 월선이와 용이에게 있다.
월선이의 어미는 무당이고 그래서 월선이는 제대로 된 자리로 시집을 갈 수가 없다. 용이와 젊은 시절 사랑에 빠졌지만 용이의 부모가 무당의 딸이란 이유로 반대했고 월선네도 제 딸이 멀쩡한 총각과는 결혼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용이에게 차라리 다리가 불구였으면, 눈 하나가 안보였으면 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월선이와 용이는 그래서 결혼할수 없었고 하는수없이 월선이는 월선이대로 용이는 용이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시간이 흘러 월선이는 혼자가 되었고 주막을 차려 사람들에게 술을 팔고 있다. 용이는 강청댁과 결혼했지만 그들 사이엔 사랑이 없고 다정함도 없고 아이도 없다. 강청댁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남편 잘생겨서 좋겠다는 부러움의 말을 듣지만 그건 정말 속을 모르는 소리다. 용이는 강청댁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고 아이라도 있으면 둘 사이가 나아질텐데 뭐 아이를 가질만한 상황도 좀처럼 생기질 않는다. 게다가 딱히 성실한 남자도 아니어서 강청댁은 속을 끓인다. 물론, 월선이와의 과거도 알고 있고, 그게 강청댁을 더 환장하게 하는 지점이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와의 살림에 딱히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거다. 강청댁은 시종일관 용이에게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포악하기만 한데, 그 포악함이 너무 이해가 되는거다. 강청댁의 욕망은 어느것 하나 실현되지 않은 채로 이 삶을 마주하고 있는 거다.
용이는 용이대로 장날이면 읍내로 나가 월선이 얼굴을 잠깐 보고 온다. 별 말도 없이 그냥 술이나 한잔 하면서 월선이의 얼굴을 보고 오는 것, 그게 전부이고, 강청댁도 이 사실을 안다. 월선이도 용이가 오면 오는대로 맞아주고 그들 사이에 더 깊은 교류는 생기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밤 월선네에서 밤을 보내고난 후, 그 밤이 지나고나자 그들 사이에 육체적 정이 포텐 터져서 그 뒤로 용이는 뻔질나게 월선을 찾아들게 되는거다. 마음만 주고받다 몸까지 주고 받고나니 이 사랑 제대로 폭! 발! 해버려. 그러던 어느 순간 용이 발길을 끊는다. 월선이는 애가 탄다. 왜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장날에 다른 사람들이 보이면 혹시 용이가 아픈지 물어본다. 그렇지도 않다는데 용이가 오지 않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달포가 넘어간다. 아아, 하는수없어, 월선은 용이 너무너무 보고싶다. 그래서 찾아간다. 한 밤에, 강을 넘어, 용이에게로. 용이에게로 가는 배 위에서 월선은 돌아가신 제 어머니 생각을 한다.
'우찌 그리 못 살고 왔노, 용이가 그러데요. 우찌 그리 못살고 왔겄노. 어매, 불쌍한 우리 어매. 팔자치리하고 살라 카더마는 내 신세가 어매 한세상맨치로 우찌 그리 똑같겄소. 짝도 없고 임자도 없고 어매자식 어매 안 닮고 뉘 닮았겄느냐고 했더마는… 너무 보고 저바서 왔소. 용이 사는 울타리라도 한분 보았이믄 싶어서 왔소. 어매, 날 미친년아, 기든 년아 하겄지요? 나도 모르겄소. 보고 저바서 미치고 기들겄십디다. 나도 모르겄소.' -<토지1>, 박경리, 나남출판사, p.234
아아... 밥을 먹으면서 이 부분을 듣는데, 아이고야, 세상에. 이 극진한 사랑을 도대체 어쩌면 좋은가 싶은거다. 세상에. 울타리라도 보고 싶어서 왔대. 울타리가 나에게 말을 할거야 안아줄거야. 울타리는 울타리일 뿐인데,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곳의 그 울타리라도 보고 싶어서 왔대. 너무 보고싶어서 올 수밖에 없었대. 울타리라도 보고 싶어서 왔다니. 아 진짜 미치겟는거다. 그런 한편 이정도의 사랑이라니, 이만큼의 사랑이라니, 울타리라도 보고 싶은 그런 사랑이라니. 도대체 그런 사랑은 무언가 싶은거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곳의 울타리라도 보고 싶은가? 라고 내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답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동안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보고싶어서 울타리라도 보겠다고 찾아가는 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울타리가 내게 무얼 해줄 수 있담? 게다가 상대의 허락없이 그 집앞을 서성이는 것은, 우리 둘이 사랑한 사이었다고 해도 자칫 징그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소설속의 상황이 서로에게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렇단 말이다. 나는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고 그래서 울타리라도 보러 가지는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그게 나은 것이었는가 하면, 이젠 그걸 잘 모르겠는 거다. 울타리라도 보고 싶어 찾아가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모든걸 다 해보고 기어코 바닥까지 다 보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은 나에게 늘 바닥까지 가보라고, 할 수 있는 걸 다 해봐야 털어낼 수 있다고 조언하곤 했다. 나는 번번이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런데, 사실은 그랬어야 했을까? 나는 울타리라도 보겠다고 찾아가는 사람인가? 그 마음은 알지만 찾아가진 않을 것 같다. 나는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싶다고 말을 하고 상대로부터도 만나고 싶다는 긍정의 대답을 얻은 후에 만나고 싶다. 그렇지 않고 몰래 보는 일은 너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내가 나한테 못할 짓 같은 거다. 월선이의 마음을 알지만, 그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만, 그러나 나는 울타리를 보러 가진 않을 것 같다.
게다가 그가 사는 집을, 그의 울타리의 위치를
모른다
그런데 월선이는 갔다. 월선이의 사랑은 내가 하는 사랑보다 더 극진했던 것일까? 울타리가 뭘 해준다고 울타리를 봐, 울타리라니. 울타리가 도대체 내게 뭘 해줄 수 있다고. 그런데 그 울타리라도 보고 싶어서 월선이는 배를 타고 강을 지난다.
ㅋ ㅑ-
그렇게 숨어서 그 집 울타리를 보려는데 마침 강청댁의 말소리가 들린다. 마실을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서는거다. 그러니 이 집에, 이제 용이만 혼자 있다. 그토록 보고싶던 용이가,
혼
자
있는 거다. 으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울타리라도 보고싶었고 그렇게 울타리를 보았으니 돌아서 가면 되는것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혼자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의 모습이 바로 내 눈앞에 있는데, 불러보고 싶다. 나를 보게하고 싶다. 마주하고 싶다.. 라는 마음 완전히 들지 않나. 대체 그걸 어떻게 참나.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 월선은 마을 외딴 곳에 있는 제 집으로 가려고 수수밭을 나섰다. 열려진 삽짝 앞을 지나가려다가 걸음이 멎는다. 기둥에 걸어둔, 초롱불빛이 비치는 마루에 용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소."
분명 입 속으로 중얼거린 것 같았는데 용이 번쩍 얼굴을 쳐들었다.
"누고?"
"……"
곰방대를 팽개치고 용이 달려나온다.
"누, 누고?"
월선임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고 난 뒤에도 그는 누구냐고 물었다.
"나 집에 다니러 왔소. 지나는 길에,"
여자의 목소리를 쌀쌀했다.
"지, 집에, 집에 온다고?"
한동안 우리에 갇힌 짐승같이 용이는 뱅뱅이를 돌았다.
"그라믄, 그라믄 거기 가 있거라. 내 곧 갈 기니, 곧 갈 기니!"
"오지 마시오."
했다. 용이는 여전히 삽짝 앞에서 왔다갔다 뱅뱅이를 돌고 있었다.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숱한 하늘의 별도 보이지 않았지만 월선이는 울타리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오지 마소, 오지 마소, 오지 마소, 내 새북녘에 나릿선 타고 떠날기요." -<토지1>, 박경리, 나남출판사, p.237-238
아, 오지 말기를 바랐다면 월선이는 제 등장을 알리지 않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쌀쌀하게 오지 말라고 그에게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원망을 담고 있고 그런 한편 보고싶었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 비록 입으로는 오지 마소, 하고있지만, 그러나 그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면 제 등장을 왜 알린단 말인가. 볼 일이 있어 집에 들르러 왔다니, 이 뻔한 거짓말을 용이라고 모르겠는가. 집에 왔는데 유부남의 집앞을 왜 서성이며 들른단 말인가. 너무나 뻔한 거짓말,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 뻔한 거짓말. 오지 마소, 라고 말해서 만약 용이가 오지 정말 오지 않는다면, 그 날밤 월선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찢어지고 무너지지 않았을까. 아프지도 않고 특별한 일도 없었으면서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던 날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여기 있음에도 내게 오지 않다니,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은 이제 식어버린 걸까 원망하지 않았을까.
용이는 온다. 월선에게로 온다. 월선을 으스러지게 끌어안는다.
"가, 가소, 이, 이러믄 안 될 기요, 보고 저버서, 어, 얼굴만 보고, 우, 울타리라도 보고, 이러믄 안 될 기요." <토지1>, 박경리, 나남출판사, p.243
너가 너무 보고싶어서 왔어, 울타리라도 보고 싶어서 왔어, 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안으면 안되는거야, 라고 하는 말은 도대체 얼마나 설득력을 갖는단 말인가. 하아.
용이는 용이대로 말한다. 밤마다 너를 찾아가는게 부끄러웠노라고, 니를 술청에 내어놓고 밤에 찾아가는 게 부끄러웠노라고. 그래서 발길을 끊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이 밤을 같이 보낸 용이는 월선에게 '우리 도망갈까?' 라고 묻지만, 그러나 정말 도망갈 수 있어서 묻는 것은 아니다. 용이는 이 땅을, 부모가 묻혀 있는 이 땅을 떠날 수 없노라고 했다. 자식된 도리로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밤이 깊어가고 월선이는 용이에게 이제 그만 가라고 한다. 너 가봐야 하지 않겠니, 니 와이프가 알면 빡칠텐데..
"보, 보소, 가봐야 … 가보시요."
별안간 월선이는 날카롭게 말했으나 손은 오히려 용이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용이 팔이 파르르 떨린다.
"와?"
"어 가시요. 이자 나는 마음놓고."
움켜쥐었던 옷자락을 놓으며 월선은 일어나 앉으려 했다.
"머할라꼬."
"불 킬라요."
"키지 마라. 이대로 좀더 있다가."
어둠 속에서 용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자거라, 니가 잠들믄 갈 기니." -<토지1>, 박경리, 나남출판사, p.245
나는 이 지점에서 용이에게 대단히 빡쳤다. 후레자식이라고 갈겨주고 싶었다. 월선이가 이미 용이를 사랑하는 마당에 네가 잠든걸 보고 가겠다는 용이의 말은 얼마나 다정한가. 그동안 찾아오지 않아 무심한 태도에 상처받았다가 너 자는거 보고 갈게, 하는 그 말은 월선이에게 얼마나 위로인가.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졌을까. 이 상황의 월선이에게 용이는 기꺼이, 마땅히 사랑할 사람이다. 이 사람 말고 대체 누굴 사랑하란 말인가, 할 것이다. 그러나 용이가 제대로 된, 월선이를 사랑하는 태도가 올바른 사람이라면, 너 자는 거 보고 '갈게' 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잠든 걸 보고 제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의 남자가 좋은 남자일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용이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에게) 자식된 도리를 지키고도 싶고 또 월선이랑 사랑도 하고 싶고, 이 모든 걸 다 가지려고 하는 바람에 월선이의 마음에도 수시로 창을 꽂고 함께 사는 강청댁에게도 언제나 불행한 삶을 주고야 만다. 내 아내가 강청댁인 이상 나는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겠다, 라고 월선이랑 이별하거나, 내 사랑은 월선이인데 네 옆에서 살 순 없다고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 이 둘중의 하나를 용이는 해야만 한다. 지금 이걸 못하고 자기 마음 편하자고 아내 옆에 살면서 섹스하러 월선이한테 가는 것은 이 두 여자 모두에게 못할짓이란 거다. 그래놓고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 울타리라도 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강을 건너온 월선이는 극진한 사랑을 품었지만, 그러나 그녀가 극진하게 사랑을 품은 대상은 그 사랑을 받기에 가치가 없다. 그 정도의 사랑을 받을만한 남자가 아니다. 용이 진짜 졸라 싫다.
결국 강청댁은 그 먼 월선이네 주막을 한 밤중에 찾아가 기어코 머리끄댕이를 잡고야 만다. 한쪽은 극진한 사랑을 품고 한쪽은 껍데기만 갖고 있는 공허함을 품고 그 둘은 싸우는데, 그 남자는 우유부단하게 결정도 못내리고 무심하여라. 여자들이 남자를 놓고 싸운다면, 그 남자가 좋을 남자일 확률은 없다. 좋은 남자라면, 두 여자를 싸우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용이를 사랑하는 월선에게 내 말은 안들리겠지... 에휴...
여자들아, 내가 다른 여자랑 이 남자를 놓고 싸우고 있다? 그러면 그 남자는 반드시 구린 남자다. 명심해야 해. 좋은 남자는 애초에 싸우게 만들지 않는다. 유 노 왓 아 민? 아무튼 남자 때문에 누가 나한테 싸움 건다면 저는 무조건 항복입니다, 양보입니다, 그 남자 가져가세요. 저는 그런 남자는 반사...용이 진짜 졸라 싫음 개 싫음.
지난 주에는 두 권의 책이 도착했다.
김지승의 《짐승일기》는 선물 받았다. 선물 받지 않았다면 몰랐을 책이었을 것. 역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야. 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산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위태로운 삶》단 한권이다. 내가 지난주에는 딱 한 권의 책을 샀어. 만세! 이 책을 왜 샀는지는 한 번 페이퍼 쓴 적 있으므로 링크로 대신한다. ☞ [디지털 미디어와 페미니즘] 취약성 과 행복 찾기 (aladin.co.kr)
지난주에 단 한 권의 책을 샀으니 이번 주엔 아예 안사는 게 목표이긴 한데 … 화이팅!!
그나저나 여러분 오늘 9월 26일 입니다. 이제 슬슬 디지털 미디어와 페미니즘 완독했다는 글들이 올라와야 하지 않겠어요?
라고 아직 다 읽지 못한 사람이 씁니다.
그리고 월선이에게는 오늘 이 노래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