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내가 자주 인용하는 위 구절은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것이다. 정작 그 만화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 구절만큼은 인상깊었기에 잊지 않고 있다. 전쟁의 신이 나오고 네 딸들 중 막내가 전쟁의 신과 사랑에 빠지는,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는 만화를 싫어하지 않고 대학 시절엔 만화방에서 살기도 했지만, 내가 만화를 즐길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픽 노블도 마찬가지. 만화나 그래픽 노블에는 좀처럼 집중이 잘 되질 않는다. 각설하고,
프랑스는 내가 가보고 싶은 나라였던 적이 없다. 프랑스나 파리에 대한 낭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내게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의 헤밍웨이가 생굴과 화이트와인을 맛있게 먹었던 것만 생각나는 장소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만큼 어디에 가보고 싶다, 왜 가보고 싶다는 숱한 이유들과 장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프랑스 파리가 그 사이에 있었던 적은 없다. 이번 여행에서도 내가 가는 곳은 네덜란드였고 벨기에를 들르자, 고 동행과 진작 얘기해둔 터였지만 파리는 아니었다. 파리? 기차타고 갈 수 있으니 가도 좋겠지만 뭐 딱히. 이정도의 생각만 갖고 있다가, 마침 프랑스에 살고 계신 알라디너 분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우리가 파리를 가자! 하게 된것이었다. 무엇을 보러 가거나 여행이 아닌, 이번 파리행은 순전히 그 알라디너 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자, 그래, 우리 파리를 가는거야, 파리를 가자, 왜? 친구 만나러!! 이렇게 된 것이었다.
가기까지는 아주 힘든 과정을 겪어내야만 했다. 예약해둔 열차가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다시 돌아오는 기차편을 예약할 수 없었고 파리를 취소할라했더니 호텔은 취소불가로 예약했었고.. 하아- 게다가 내 마음은 이미 '내가 너를 만나러 간다'고 말한 이상, 그 말을 지켜내고 싶었다. 간다고 했으니 기다릴 것이고 간다고 했으니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오는 차편은 우리가 예약한 유레일이 아니라도 어떻게든 올 수 있고 여차하면 비행기라도 타자, 하고 동행과 나는 최종적으로 파리로 향했다. 백팩 안에는 파리에서 만날 친구에게 줄 책들이 들어 있었다. 한 권은 친구가 원하는 책으로 준비하고 그리고 친구가 미처 구입하지 못했을 책들을 고심끝에 두 권 더 골랐다. 마침 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굿즈로 에세 노트도 준단다. 그래, 이것도 선택하자. 알라딘 드립백 커피는 마셔봤을까? 이번 참에 가져가자. 그렇게 무거운 백팩을 메고 동행과 나는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 도착해 친구를 만나고(우리의 첫만남이었다!) 인사를 나누는데, 아니 프랑스에 사는 친구가 우리랑 고작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건만 캐리어를 끌고온게 눈에 띈다. 아니, 웬 캐리어에요?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이 호텔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따로 쓰도록 하겠다. 여러분 파리에 여행간다면 호텔에 기꺼이 돈을 투자하세요, 20만원 정도로는 한국 모텔보다 못한 곳에 묵게될 것이다...) 바깥에 나가 저녁을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숙소 안의 테이블 앞에 우리는 둘러 앉았다. 맙소사, 프랑스의 친구는 우리를 위해 와인을 가져왔고 과일과 치즈, 햄, 과자까지 안주도 가득 준비해온게 아닌가. 테이블 한가득 차려진 술과 안주를 보니 이 엄청난 환대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에어컨이 없는 호텔임을 미리 인지하고(네, 20만원짜리 호텔인데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미니 선풍기까지 가져왔는데, 이 선풍기는 그 날 90프로는 나만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런 환대를 받다니.
우리는 밤이 깊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밤을 새고 싶었지만 너무나 피곤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일어난 우리는 아침을 먹고 호텔에 캐리어를 맡기고 우리가 이왕에 파리에 간 김에 유일한 목표였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가기로 했다. 가기 전 나는 동행에게 '우리 숙소에서 40분만 걸으면 돼' 라고 말했던 터. 그러나 여행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지도에서 말하는 40분은 여행객에게 결코 40분이 아니라는 것....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초보여행자에게 반드시 이걸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러두곤 한다.
지도의 '걸어서 40분'이 '너에게도 걸어서 40'분을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니야!!
파리는 웅장했다. 정말로 대도시였다. 암스테르담과 네덜란드의 작은 다른 지역들을 둘러보고 온 터였고 브뤼셀까지 다녀온 터라 파리의 웅장함은 더 크게 와닿았다. 와, 진짜 웅장하다 웅장해. 우리는 그날 땡볕에 엄청나게 걸었고, 처음 가 본 파리의 웅장함에 감탄하기도 잠시, 지독한 냄새에 깜짝 놀랐다. 브뤼셀에서도 맡았던 냄새였는데, 이 찌린내... 와. 공중화장실이 유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걸까? 어떻게 이렇게 냄새가 지독하지? 나는 파리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던 남동생에게 '여기 왜이렇게 찌린내가 나냐' 했더니 남동생도 이내, '거기 진짜 찌린내 심하지' 답해왔다. 와. 너무 놀랍게도 지독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어. 굳이 이걸 맡아보러 파리까지 오진 않아도 되겠지만, 파리에 오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까지 땡볕에 걸으면서 우리는 노틀담 성당도 (지나가며) 보았고, 루브르 박물관도 지나쳤다. 루브르 박물관은 그 압도적인 사이즈에 놀라서, 와 여기 관람하라면 2박3일은 걸리겠는데? 했다.
세느강을 지나치게 되는건 덤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비포 선셋>을 다시 보았는데, 우리가 파리에 가게 되면 그들이 걸었던 세느강을 우리도 걷게 되는 것인가, 후훗, 했고, 그렇게 마침내, 세느강에 닿았던 것!
그리고 이건 동영상
(30초밖에 안되는 영상인데 왜케 어지러워..)
세느강 앞에 서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파리에 대한 로망이 있든 없든 그것과 별개로, 내가 세느강에 와있다니. 그러니까 나는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세느강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예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브뤼셀에 가고 싶었고 암스테르담에 가고 싶었다. 내가 가고 싶다면 내가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 그곳들을 계획하고 넣을 수 있을 것이지만, 세느강에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느강에 와있었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벅참과 설렘 그리고 기쁨이었다. 행복했다. 내가, 세느강에 와있네? 내가 세느강에 언젠가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앞이었다. 순전한 기쁨이 몰려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우연함과 설렘 그리고 기쁨과 행복이 이렇게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그것은 앞으로 내 인생에 또 얼마든지 찾아들지 않겠는가. 내 인생의 지금 시점에 세느강을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와, 그렇다면 앞으로 내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까? 내 미래에 대한 기분 좋은 전망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세느강 앞에서 짧게 영상으로 촬영하면서, 와, 내 미래, 진짜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하다, 하게된 것이었다.
내 인생의 지금 시점에 세느강이 있다니, 앞으로 내 미래는 어떻게 진행될까.
그것이 내가 파리에서 느낀 것이었다.
누가 내게 파리에 다시 가고 싶냐고 물어보면 나는 고민없이 '아니'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파리에 다녀온 경험은 자지러지게 좋았다. 어쩐지 내 미래가 밝게 뻗어나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준 곳이었다.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내 인생에 의미가 가득가득해질 것 같은 거다.
파리에 다녀오길 잘했다. 정말 잘했다. 좋은 시간이었다.
몇해전 친구와 한참 여행을 다니던 때, 핏빗을 샀더랬다. 그 때 매일 회사에도 차고 다녔었는데 그래봤자 매일 만 보가 넘는터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던져두다가, 여행을 갈 때면 착용해서 지도에 내가 걸은 길을 체크했었는데 그게 꽤 재미있었다. 나는 여행을 가면 주로 걸으며 이동하는데-그러려고 여행을 간다- 걷기 전에 출발 에 체크해두고 어느 정도 걸음을 멈추면 완료라고 체크하면 된다. 그러면 내가 걸었던 곳의 흔적이 고스란히 지도에 표시되어 남는다.
이번 여행이 하도 오랜만이라 먼지 쌓인 핏빗을 다시 꺼내고 작동되나 테스트도 해보고 여행에 가져갔다. 그러나 오래된 탓인지 내가 자꾸 시작을 누르는 걸 까먹었다. 멈춤을 누르는 걸 까먹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기록들이 남았다.
기록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재미없지만, 살아가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재미있다.
여행에서 돌아와 독서 멈춤 상태가 되어있고 그것이 좀 초조하지만 이러다 곧 회복하겠지, 하고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얼마나 지내는가 보자. 그렇지만 책을 사기는 하자. (응?)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