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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목에 사랑
최미래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5월
평점 :
얼마전에 SK하이닉스 주식을 샀다. 너나 할것 없이 주식 얘기를 하고 뉴스에서는 매일 코스피 지수가 나오고, 하이닉스 성과금이 얼마래, 주식이 3백까지 갈거래, 하는 말들 속에, 나만 하이닉스 주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던 터였다. 그래도 단가가 너무 높은데, 그래도 사도 될까, 망설이다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1,688,000원에 두 주를 샀다. 내가 사자마자 주가는 떨어졌고, 내가 바보같이 이걸 왜 샀을까, 나만 SK주식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가졌지만 마이너스 치는 사람이 됐네, 나는 역시 주식으로 돈 벌기는 그른 사람인가봐, 차라리 없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너 제일 높을 때 들어갔네, 라고 해서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다시 190만원 대가 되었고, 그래서 나는 40만원 정도의 평가수익을 갖게 되었다. 내가 매도를 해야 40만원이 내 통장에 꽂힐 터였다. 어쨌든 그래도, 나는 노동 없이 40만원이라는 돈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돈이 돈을 버는구나, 했다.
주변에는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있다. 그중 압권은 당연하게도 이미 가진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그는 7억의 돈을 투자했고 6억의 평가이익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7억을 투자해야 6억을 버는 것이었다. 나처럼 330만원을 투자하면 40만원의 이익일 보지만, 그러나 6억을 투자하면 7억의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텔레비젼에서도 주식투자를 하는 연예인들 이야기가 곧잘 나온다. 몇해전에 사두고 잊고 있었는데 그게 대박을 쳤대, 1억을 사두고 잊었대. 어떻게하면 1억을 사두고 잊을 수 있을까? 1억을 잊어도 되는 돈이기에 그랬겠지. 나라면, 1억을 사두고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1억이 없어서 살 수도 없지만, 1억은 너무 큰 돈이어서 그걸 있는지도 까먹을 수 있는 그런 형편이 아닌 것이다.
최근에 지인을 만나 또 주식 얘기를 하면서 지인 역시 삼성전자로 50만원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껌값이지 뭐, 라고 지인은 말했지만, 그런데 그 주식을 사지 않았다면 그 50만원도 없잖아, 했다. 그러자 지인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는 빈곤한 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320만원을 투자하면 40만원의 이익을 보고, 7억을 투자하면 6억의 이익을 보는데, 그런데 너무 빈곤해서 아예 주식 투자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얼마의 이익이 있을까? 당연하게도 없다. 이익을 볼 가능성조차 그에게는 없다. 그러니까 이거다. 부유한 사람은 주식으로 6억을 벌고, 그 밑에 중산층은 주식으로 50만원을 버는데, 그런데 빈곤층은, 취약계층이거나 최저시급을 받아 온 가족이 먹고 살아야 하는 빈곤층은, 주식을 살 수조차 없어서, 그래서 수익은 제로다. 수익이 제로이기만 한게 아니라, 먹고 사는 돈도 부족하다. 이렇게 되면, 가뜩이나 빈부격차가 심한데 더 심해지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모두가 주식한다고 덤벼든다면, 빈부격차는 지금보다 더 심해질 것이다. 아무리 정부에서 주식 투자에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아무리 불장이라고 해도, 아무리 코스피가 오른다고 해도, 아무리 공부 없이 뭘 사도 주식의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아무리 주식투자로 이익을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고 해도,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주식을 할 엄두조차 못내는 빈곤층이 있다. 주식을 살 돈이 없는 사람들. 주식은 여윳돈으로 하는 거라는데, 주식은 사는거지 파는게 아니라는데, 그런 말들이 아무리 들려와도 자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다. 여윳돈이 어디있어, 사두고 잊을 수 있는 돈이 어디있어. 그러니 돈이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억대의 돈을 벌고, 없는 사람들은 엄두도 못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빈부의 격차는 커지고 또 커진다. 있는 사람은 더 많아지고, 조금 있는 사람은 약간 더 많아지는데, 없는 사람은 계속 없다. 차이는 100이었다가 갑자기 5,000이 되어버린다.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30,000이 되고 그보다 더 크게, 또 크게 벌어지겠지. 그렇다면, 모두가 주식을 한다고 할 수 있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척 하는거 아닌가. 내 눈앞의 40만원에 일희일비 하느라, 그동안 나는 4천원의 이익조차 시도해볼 수 없는 사람들을 잊고 지내고 있다. 눈앞에 안보인다고 아니,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소설은 세상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이야기하고 또 있을법하지 않은 일들을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은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란은 것. 대기중에 습기가 너무 많아 금붕어가 지나다닌다는 마술적 리얼리즘 속에서도, 하나의 육체이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발현될 수 있다는 이야기 속에서도, 마법 지팡이가 없던 물건을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서도, 거기에서도 인간은 사랑을 하고 배신을 하고 높은 계급을 갖고 낮은 계급으로 살면서 행복해하다가 고통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있는 이야기, 있을 법한 이야기들 속에서, 그런데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서, 바로 거기에서 소설은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약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보기 싫다고 쉽게 눈감아 버릴 것들을, 안보인다고 무시하게 될 것들을, 그러나 소설을 읽음으로써, 아 그들이 거기 있었지, 그들이 내 옆에 있었지 하는 자각을 하게 된다.
최미래가 그리는 소설 속에서 그랬다.
최미래의 이 단편집 [돼지 목에 사랑] 에서는 계속해서 빈곤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처럼 주식으로 40만원의 이익을 본 사람이라면 겪지 않았을 이야기가, 억을 투자해서 억을 벌어들이는 사람이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가, 최미래의 이야기들 속에 있다. 몸에 남들은 갖지 않은 꼬리를 갖고 있어 숨기고 사랑받지 못하고 위축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한다면, 돌봐줄 사람도 없고 돈도 없는 미성년자라서, 자신의 집을 게스트하우스로 집이 필요한 미성년자에게 빌려주는 이야기도 나온다. 돈도 없고 언제나 데이면서도 사랑에 목을 매는 사람이 나오고, 사실은 살(buy) 수도, 살(live)수도 없는 집을 마치 살 것처럼 둘러보는 사람도 나온다. 어떻게든 좀 더 낫게 살아보고자 애를 쓰지만, 그래봤자 거기에서 거기인 이야기들. 왜냐하면, 그들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내 노동과 내 육체를 사지만, 그런데 돈 때문에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 빈곤속에 놓여있다. 안되는 줄 아는데, 이건 옳은게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빠져나가야 할 것 같은데,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 빈곤 속에 있다. 빈곤하지 않다면 그들에게 손가락질 할 수도 있고 그들의 선택을 한심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그러나 빈곤한 사람들이 몰라서 그 안에 있는게 아니다.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빠져나가도 갈 데가 없어서 그곳에 있다. 나도 선을 넘기는 싫은데, 그러나 그 선은 도대체 어디일까 좌절하는 사람이 빈곤 속에 있다. 그래서,
빈곤이 말해져야 한다.
빈곤이 말하여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계속 주식 으로 축제를 벌이겠지. 그 축제들 속에 감히 주식을 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잊고 살겠지.
그래서 빈곤이 말해져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자 할 때, 그렇게 살고 있을때, 그럴때 소설은, 그리고 이야기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거봐, 너 또 잊고 있었지? 네 옆에 그들이 있어, 라고.
빈곤을 전시하는 이야기라면 읽으면서 피로할 수 있다. 아 그만 좀..
그러나 빈곤을 말하여주는 이야기라면 다르다. 나는 최미래의 단편들을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빈곤이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소설가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소설가 뿐만이 아니다. 소설가도, 인문학자도, 사회학자도, 철학자도, 경제학자도, 정치인도, 연예인도. 이 세상에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빈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만의 축제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우리만 있는 것처럼 살지 않게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