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이병천 엮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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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출판된 이 책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이다.
이제 60년 남짓 되는 남한의 역사 속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그래도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기간 동안 정권을 잡은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1998-2007)의 10년이 꼴랑 전부이다. 그러니, 이 책은 그 자유주의 세력 집권기의 한 가운데에서 출판된 셈이다. 보수우파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시기의 한 복판에서 지은이들은 왜 그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을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에서 찾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정희 신드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중권은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박정희 소동이 “한때 신문과 잡지의 지면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이제 한마당 희극으로 끝난 듯”하다고 평가절하하였다 (339-340). 그러나 당시 진중권은 몇년 후 박근혜와 이명박이 경쟁적으로 박정희의 후계자적 정통성을 주장함으로써 보수우파가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진중권은 틀렸다. 그러나 바로 그가 틀렸기 때문에 (곧 박정희 신드롬이 한마당 희극이 아니라, 747이라는 개발공약을 앞세운 이명박이 대통령이 됨에 따라 단순한 신드롬을 넘어서 정치를 바꾼 실질적 효과를 갖고 왔기 때문에), 이 책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이병천의 총론을 포함하여 모두 열 두 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개발독재의 제 측면에 대한 경제학적 고찰을 싣고 있으며, 2부는 개발독재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과 함께, 이후 자유주의 집권기의 박정희 신드롬과 소위 “우리 안의 파시즘” 논쟁 등을 다루고 있다. 글 하나 하나를 정리하는 것은 관두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가장 흥미로왔던 서익진의 글과 여러 필자에 의해 반복되어 다루어진 주제 중 세 가지 사항 – 복선적 산업화, 국가의 금융통제, 경쟁적 노동시장 – 을 중심으로 정리하겠다.

박정희 시대의 발전양식 = 차입∙수출 기반 축적체제 + 개발독재적 국가조절양식
프랑수아 셰네에 대해 큰 호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책을 한국에 소개한 서익진에 대한 기대도 무척 크다. 이병천의 총론 바로 뒤에 실린 서익진의 글은 나의 그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했다. 자본주의 정치경제에 대한 접근방식으로서 조절이론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조절이론의 중심 격인 파리학파의 강한 이론지향성, 핵심부 국가에 국한된 분석범위, 일국적 분석단위 등이 몹시도 못 마땅한 나는 서익진이 소개해온 그르노블 학파의 좀더 유연한 조절이론에 큰 매력을 느껴 왔다. 남한의 자본주의 발전 궤도에 대한 조절이론적 접근은 그 동안 초보적으로 몇 번 시도되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알랭 리피에츠의 <<기적과 환상>>(한울)이 그나마 가장 훌륭한 저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리피에츠의 “주변부 포드주의” 개념은 브와이예에 의해 모순형용으로 비판받지만, 브와이예의 이러한 비판에 의해 정작 강조되는 것은 리피에츠의 정치하지 못한 개념 사용이 아니라, 조절이론의 외부, 혹은 그것의 이론적 난점이나 공백의 시인일 뿐이다. 곧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부에 존재하는 일국적 공간을 어떻게 전체의 부분으로서 분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조절이론 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문제인 것 같다. 결코 무시될 수는 없지만 섣불리 다룰 수 없는, 그래서 뭉개고 넘어가거나 회피해 버리고 마는 문제이다.

내가 서익진의 이 글이 좋았던 것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의 [일국적 공간에서의] 결합으로 설명되는 발전양식을 대내적 측면과 대외적 측면으로 나누어 동시에, 또 양자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왔는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학파의 이론화 속에서 일국의 발전양식은 다섯 개의 위계화된 제도적 형태의 결합으로 설명되며,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일국의 거시경제가 어떻게 편입되어 있는가는 그 다섯 개의 제도적 형태 중 하나로 개념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창한 이론화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화에 의지하여 현실을 설명한 연구들은 무척 찾기 힘들다. 불임의 기간이 길어지면 그 이론에 대한 기대도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서익진의 글은 이런 내게 조절이론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해주었다. 그가 조절이론을 통해 그린 박정희 시대의 발전양식은 다음과 같다. 

                     차입∙수출 기반 축적체제    +       개발독재적 국가조절양식
대외적 측면     ●생산재 중심의 수입                           ●수입과 외환의 통제
                     ●해외차입: 차관 →국제신용
                     ●생산재의 ‘수입을 위한 수출’                ●수출지원 (환율 + 보조금)
                     ● ‘창조된 동태적 경쟁우위’    ●국내의 상대가격 체계를 국제 가격 체계로부터 단절


대내적 측면     ●중앙집권적 은행제도: 고저축→ 고투자 ●국가에 의한 경제의 계획적 운용
                     ● 복선적 공업화:                                ●잉여동원 및 배분의 국가관리
                         수출대체와 수입대체의 병행                 관치금융 + 저축 조장 및 소비 억제
                                         +                                   ●노동력의 국가관리:
                         계열상승과 계열하강의 병행                 - 저임금 : 수출경쟁력의 원천
                     ● 외연적 축적→ 내포적 축적                   - 저임금 장시간 노동 
                                                                                - 저곡가 정책

조절이론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 간의 정합성, 혹은 제도적 형태들 간의 정합성을 통해 주어진 발전양식의 내적 작동원리를 규명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서익진은 1960년대부터 80년대 중엽까지 남한의 발전양식을 이와 같은 차입∙수출 기반 축적체제와 개발독재적 국가 조절양식의 결합으로 규정하면서, 양자가 대외적 측면과 대내적 측면에서 내적 일관성을 지니고 작동해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론적 얼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 김형기, 서익진(2006)은 1980년대 중엽을 거치면서 3저호황에 힘입은 임금 상승에 의한 구매력 확장으로 인하여 내수시장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개발독재 발전모델”이 “한국적 포드주의 발전모델”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과잉생산 경향과 채무화 경향을 내적 모순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97-98년의 경제위기는 이 두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중의 복선적 공업화
박정희 시대의 복선적 공업화는 이병천 (47-51), 조영철 (139, 142) 등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이다. 이들 모두는 남한의 반주변부로의 예외적인 지위 상승의 원인을 바로 수입대체 산업화와 수출지향 산업화의 결합에서 찾는다. 서익진은 이에 더하여 전후방 산업연관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계열상승과 계열하강의 병행적 시행”을 지적하며 “이중의 복선적 공업화”론을 제시한다 (80-82). 복선적 공업화는 대내적으로 I부문과 II부문을 고루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주의 국가들이 겪었던 II부문의 저발전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아직까지는 과당경쟁의 영역이 아니었던) 선진국을 시장으로 하는 제조업 수출 분야에 발빠르게 진출함으로써 창조된 동태적 경쟁우위를 가져옴으로써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비롯한 제3세계 수입대체 산업화의 실패한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국가의 금융통제: 금융헌신과 금융제약
복선형 산업화는 발전양식을 구성하는 여타 제도적 형태들과 제도적 보완성을 갖고 작동하였는데, 국가의 금융통제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는 발전국가 문헌 중에서 앰스덴, 우커밍스, 웨이드 등에 의해서도 집중적으로 조명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조영철과 유철규가 주로 살펴보고 있다.

조영철은 “대형 상업은행의 금융헌신(financial commitment)”이 후발산업화에 갖는 중요성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금융헌신은 자본시장 중심의 “이탈효과(exit effects)를 중시하는 거리두기 관계(arm’s length relations)의 단기적 기업금융”에서 관찰되는 금융유동성(financial liquidity)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어떻게 모험적 산업화 추진을 위해 “헌신적 자본을 장기간 공급하는 기업금융체제”, 곧 지도하는 국가와 국가의존적인 재벌 간의 발전지배연합체제를 확립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136-142).

유철규는 1960-70년대 제3세계의 금융 현실에 대한 상이한 개념화, 곧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과 “금융제약(financial restraint)”으로 대변되는 시장중심 접근과 제도주의적 접근을 소개한다. 매키넌과 쇼우로 대표되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금융억압 가설과 달리, 금융제약은 “정부가 금융부문으로부터 지대를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대 취득의 기회를 창출하고 이 기회를 사적 자본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둘 중에서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이 개념만으로는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급진적 금융자유화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한다. 곧 한국의 금융자유화는 남미와 달리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으며, 기존 선별금융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산업자본이 저항하기는커녕 ‘시장주의’의 이름을 빌려 대단히 적극적으로 금융자유화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조영철과 유철규의 글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좀 다르다. 예컨대 조영철은 “정부가 신용배분에는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신용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까지는 감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의 선별특혜금융으로 야기된 사채시장의 확대를 그 사례로 들고 있다 (149). 이에 반해 유철규는 “시기나 추산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소 절반 이상의 은행신용 용처가 정부에 의해 직접 지정되었으며, 정부는 대부분의 주요 은행을 소유했고 이자율을 통제했다”고 주장한다 (177). 이러한 차이가 단지 1972년 8∙3 조치 이전과 이후의 차이인 지는 잘 모르겠다.  

[2011. 3. 16. 추기]  조영철의 주장은 장하원 (1999: 89-90)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용용처 규제에 대한 유철규의 언급은 1972년 8∙3 조치를 통한 정부의 대대적인 위장사채 단속 이후의 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장하원 (1999).「1960년대 한국의 개발전략과 산업정책의 형성」, 정신문화연구원 편,『1960년대 한국의 공업화와 경제구조』(서울: 백산서당), 77-125쪽 참조.

경쟁적 노동시장
개발도상국가의 시장 가격 왜곡은 여러 논자들(앰스덴, 쿠즈네츠, 드 버니스 등)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다. 조영철은 자본시장과 생산물 시장에서는 국가가 시장규율을 대신함으로써 이러한 가격왜곡을 주도하였지만, 노동시장, 특히 생산직 노동시장은 “경쟁적 노동시장이어서 노동이동이 활발했고, 임금은 거의 노동의 수요∙공급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152). 이는 김삼수 (207-208), 이정우(232)에 의해서도 지적된다.  


기타
다른 글들도 재미있었다.
이병천의 총론은 박정희 개발독재의 쟁점을 두루 살펴보는 글인데, 그가 소개한 일본에서의 논의들이 꽤 흥미롭게 들렸다.

이상철은 박정희 정권의 산업정책이 어떻게 유연하게 변화하면서 수출주도 산업화를 가능하게 하였는지 살펴보고 있다. 내가 본 이상철 글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는 글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김일성의 유일체제 간의 연동을 살펴보며 동시에 유사성을 비교한 이종석의 글도 재미있었고, 베트남 파병의 경제적 득실을 일본과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하는 한홍구의 글도 매우 설득적이었다.

박정희 시대는 언제까지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으로 남을까?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은 사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의 부제이다. 그 책은 19세기 시장 문명의 흥망을 다루고 있는데, 1944년에 출판되었지만 21세기 벽두에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기원으로 읽히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2차대전 전후 케인즈주의의 흥망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쇠퇴를 19세기 시장 문명의 흥망 이후의 20세기 속편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맑스는 1852년에 출판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과거의 부르주아 혁명들이 어떻게 죽은 것들을 되살려내 현재 그들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만듦으로써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지 고찰하였다. 16세기 독일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사도 바오로를 가장하였고, 17세기 청교도 혁명의 크롬웰은 구약성경의 인물들을 인용하였고,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은 로마시대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세계사적 인물이나 사건은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맑스의 말은 이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들을 가리킬 때에는 맞는 말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유신의 선포와 10∙26 암살까지 박정희 체제의 존속은 20년 가까이에 걸쳐 진행된 위로부터의 수동혁명 과정이었지, 결코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는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는 현재 자신들의 이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과거의 언어를 차용했던 부르주아의 행위가 지배계급으로서 그들의 부족한 현재적 정당성을 과거의 신화로 감추려는 시도였음을 간파한다. 이것은 지난 10년간의 박정희 신드롬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거가 동원되는 과정이 위로부터의 수동혁명 과정일 경우, 역사가 두 번 반복되고 그치리라는 보장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예외적인 데에 비하여, 수동혁명은 항상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로 집약되는 남한의 1960-70년대는 참으로 특이한 역사적 경험이다. 신자유주의의 퇴조 속에서도 갈 곳을 몰라 이전의 시장지상주의적 관성에 의존하는 현 정부의 경제운용 또한 참으로 특이하게 보인다. 10년 혹은 20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시대를 그 미래에 올 “우리 시대”의 기원으로 소급할 것인가? 미래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을 새 시대의 혁명은 정녕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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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9-01-2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에로이카 님 리뷰는 알차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줘서 늘 잘 읽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에로이카 2009-01-2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 서재글에 무려 다섯 달만에 달린 댓글인지라 무지 반갑습니다. ^^ 두서없는 리뷰에 칭찬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겨레신문에 격주 연재된다는 21세기 진보 사상 기획에 기대가 무척 큽니다. 지성의 비관이 커질수록 의지의 낙관은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들고만 있는 나날들입니다. 발마스님도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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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고객님.” 상냥함을 가득 담은 이 목소리에 우리의 마음은 한결 풀어진다. 은행 직원도, 전화상담하는 서비스센터 직원도, 대형 마트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도 우리를 이렇게 부른다. 심지어는 “시민고객님”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단어도 등장하였다. 언제부터 “고객님”이 극존칭이 되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었는가?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언제부터 이 호칭으로 호명되기 시작했는가를…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난 그것이 그저 먹고 살기 힘든 한국 사회에 특유한 호들갑스러움이라고, 대기업들이 밑바닥 서비스 노동자들을 쥐어짜내는 방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고객님”이라는 생경한 호칭이 어느새 극존칭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마 한국은 특이한 경우이겠지만, 그 기저의 변화, 곧 소비자와 투자자가 되지 않고는 사람 대접을 받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점을 두고 보면 이는 한국에만 국한 되는 현상이 아니다. 로버트 라이시의 <<수퍼자본주의>>는 미국에서 이 세계적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를 쉬운 말로 잘 설명하고 있다.

2.
책의 논지는 아주 간단하다. 1970년대 후반 이후 기술혁신으로 인해 소비자(즉, 고객)와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한 기업간의 경쟁이 극심해짐으로써 수퍼자본주의가 이전까지의 민주적 자본주의를 대체하였고, 경제 영역의 수퍼자본주의의 논리가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범람함에 따라 민주주의가 침식당하였다는 것이다. 곧 개인적 행위자인 투자자와 소비자가 집합적 행위자인 시민을 질식시킨 것이다.

2차대전 이후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 자본주의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경제적 풍요로부터 흑인, 여성, 극빈층 등이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황금기라고 불리우기에는 다소 미흡하였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의 시대에 비하면 좋은 시절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문 시장은 몇몇 대기업들에 의해 과점되었고, 수요와 공급은 예측 가능하였고, 상품의 가격은 과점 대기업 간의 (그리고 국가와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기업인들은 국가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과 동일시하였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통해 중간계급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주가가 폭등하거나 폭락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주식투자는 큰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으며, 포트폴리오를 바꾸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55년에는 민간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1/3 이상이 노조에 가입해 있었다.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나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책정하는 데에 지침으로 작용하였다.

민주적 자본주의의 시대였던 1950-60년대는 미소간의 냉전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기 동안 미 국방성은 천문학적인 금액을 첨단 안보 기술 개발에 투자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축적된 기술 혁신의 결과는 곧 민간 부문으로 전파된다. 첨단 무기에 사용되는 반도체의 크기는 갈수록 작아졌고, 이는 곧 가전기구나 자동차에 응용된다. 인터넷 또한 실시간 정보 통신에 대한 펜타곤의 필요로부터 유래하였다. 또 군용기 개발에 이용되었던 기술이 보잉 707과 보잉 747의 원조 기술이 된다.

한편 베트남전이 발발하자, 미국에서부터 베트남까지 군수 보급을 위해 컨테이너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베트남에 하역을 한 빈 컨테이너는 미국에 돌아가기 전에 일본에 들러 일본의 값싼 제조품들을 싣고 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글로벌 공급 체인 (global supply chain)은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되었고, 글로벌리제이션의 물적 토대를 전 세계에 걸쳐 확립하게 된다.

컴퓨터화, 전문화, 경쟁의 심화 등을 동반하며, 새로운 생산 기술이 갑자기 넓어진 시장을 확보하고자 하는 기업들 간의 경쟁을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

또한 1981년 레이건의 집권 이후, 탈규제의 흐름이 거세짐에 따라, 민주적 자본주의 시기 동안 안정적으로 과점되던 부문 시장들 간의 장벽은 허물어지게 된다. AT&T의 전화시장 독점은 무너졌고, 수많은 저가 항공사들이 출현하였다. 트럭 택배를 전문으로 했던 UPS는 비행기를 사들였고, 항공수하물을 전문으로 하던 FedEx는 트럭들을 사들여 서로의 시장을 침식하며 경쟁을 벌여갔고, DHL은 이 커져가는 시장에 새로이 뛰어들었다. 노동조합은 기업의 경쟁력 강화의 발목을 잡는 세력으로 낙인 찍혀 직접적 탄압을 받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임금 하방 압력도 거세졌다. 또한 금융 부문의 탈규제는 주식 시장의 급팽창을 갖고 옴으로써 투기적 열망을 부추겼다. 이러한 탈규제 과정은 기업들로 하여금 더 많은 소비자와 투자자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가속화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냉전 시기에 이루어진 안보기술혁신 노력은 간접적으로 (1) 글로벌리제이션, (2) 생산 혁신, (3) 탈규제를 촉진하였고, 이 결과 기업간 경쟁은 극심해진다. 경쟁은 기업의 효율성과 수익성을 제고시켰고, 상품의 가격을 하락시켰다. 소비자와 투자자는 이 수퍼자본주의 시대의 왕이었다. 그러나 수퍼자본주의의 비용은 약자들에게 전가되었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하락하였고, 직업 안정성은 위협 받았으며, 월마트 같은 대형 소매업체의 등장은 동네 구멍 가게들의 몰락을 갖고 온 동시에, 제조업체들의 비용 절감 압력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곧 임노동을 해야하는 대다수 시민의 삶은 질식당한 것이다.

라이시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은 소비자, 투자자인 동시에 시민으로서 존재하지만, 수퍼자본주의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의 담지자인 시민이 질식당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단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과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라이시는 민주주의를 공동선에 도달할 수 있는 게임의 규칙을 시민이 다른 시민들과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체제로 정의한다. 하지만 수퍼자본주의는 시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돌아간다. 대다수의 시민은 소비자로서 자신이 구매하는 상품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지구 저 편에서 아동 노동의 착취를 통해 생산된 제품이더라도, 환경 오염을 유발시킨 상품이더라도 가격이 저렴하다면 구매한다. 상대적으로 비싼 유기농 제품을 구입하는 것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이며, 에너지 효율 제품을 구입하는 것도 지구의 환경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연료비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투자자들은 자신이 투자하는 기업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노동자들을 취급하는지, 환경 오염을 어떻게 방지하는 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배당률이 높은 주식을 사고, 그렇지 않은 주식은 팔아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수퍼자본주의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시민으로 존재하지만, 그 우리를 구성하는 나와 당신, 그(들)와 그녀(들)는 서로를 믿지 않는 투자자, 소비자로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기업의 경쟁은 이러한 투자자, 소비자로서 존재하는 우리, 곧 “고객님”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자신의 경쟁우위(competitive advantage)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곧 경쟁 기업을 물리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한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기업의 로비스트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기업들은 탈규제를 소리 높여 주장하지만 국가 없이 시장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공화, 민주 양당을 막론하고 엄청난 인맥과 막대한 자금을 통해 워싱턴의 정치를 움직인다. 가끔 의회 청문회에서 의원들이 환경 오염 등의 문제를 두고 기업 CEO들을 추궁하기도 하는데, 라이시는 이를 단지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들도 로비스트의 손아귀에 있으며, 실제로 기업의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은 제정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정치인들이 수퍼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기업들도 그런다. 소위 “사회적 책임 경영”이 그 예이다. 하지만 기업의 자발성으로 수퍼자본주의는 극복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기업의 존재이유는 (투자자와 소비자 확보를 통한) 이윤 추구이지,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퍼자본주의의 폐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확보할 것인가? 라이시는 경제적 영역 안에서 기업, 소비자, 투자자의 행위로 이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방법이 있다면, 그 경제적 영역이 굴러가는 게임의 규칙 자체를 민주적 절차 - 대통령 선거나, 의회에서의 법안 제정 등 - 를 통해서 경제 영역 바깥에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어야지만, 그 구속성을 갖는 규칙에 따라 활동하는 행위자들의 개별 활동이 바뀌게 되는 것이지, 이들의 선한 마음에 호소해 자발성에 기반한 행위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3.
라이시는 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버락 오바마의 자문위원으로서 일하고 있으며, 이 책의 내용은 상당 부분 오바마의 공약에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국민의료보험 도입이나 기업수입세 (corporate income tax) 삭감 등은 2007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수퍼자본주의를 다시 민주적 자본주의로 대체하는 게임의 규칙 변화를 위한 정책 제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능성이 그렇게 높을 것 같지는 않지만, 라이시는 차기 정부의 재무부 장관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자신의 위치 때문인지, 또는/그리고 미국식 프래그머티즘 때문인지, 앞부분에서 느낀 흥미가 뒤로 갈수록 떨어진다. 다양한 사례들을 들어 자신의 주장을 탄탄하게 뒷받침하면서 설득력 있게 얘기를 전개하지만, 결론은 다소 용두사미스럽다. 현실 정치를 통해 바꿀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2007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따라서 현재의 경제위기가 본격화되기 전에 나왔다. 현 경제위기로 인해 객관적 경제 상황이 좋지 않지만, 이 상황이 국가, 특히 미국의 정책 자율성을 극대화시킬 터이니 미국 국내 정책에 관한 한은 급진적인 개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곧 책의 결론을 쓰던 당시 라이시의 정책적 상상력을 규정하던 세상의 물적 토대가 바뀐 셈이다. 이후 민주주의적 개입이 수퍼자본주의 잔치 이후의 난장판을 어떻게 청소하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세워 나갈 지, 그리고 그 개혁이 다른 나라의 이익과 어떻게 조화와 갈등을 이루게 될 지에 대해서 주시해야 할 것이다.

4.
라이시는 이론적인 논의들을 별로 인용하고 있지 않다. 수퍼자본주의의 수혜자는 투자자, 소비자이며, 희생자는 시민이라는 어떻게 보면 별로 새롭지 않은 주장일 수도 있겠으나, 라이시의 이 주장의 매력은 이 배타적 집단 정체성이 세상 사람들 내부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내면화된 이중인격이 수퍼자본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이 논의를 접하면서 나는 오래 전 읽었던 미셸 푸코의 통치성과 권력에 대한 논의를 떠올렸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배권력은 왕과 같은 중앙의 상징에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걸쳐 모세혈관처럼 퍼져있다. 계급 대 계급의 배타적 집단 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 내부의 이중인격으로서 존재하며, 하나의 (소비자, 투자자) 마인드가 다른 하나의 (시민) 마인드를 지배 억압하는 체제이고, 그것이 이 수퍼자본주의의 게임의 규칙을 따른 결과였다는 라이시의 주장을 푸코의 권력 논의와 연결시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권력이 작동하는 장소가 생산의 현장에서 소비의 현장으로, 또 그 소비의 현장에 참여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개체적 공간인 개인의 신체로 이동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 인해 생산현장에서의 자생성에 기반한 경제투쟁이 의식성의 지도를 받는 전 사회적 공간의 정치투쟁으로 승화되는 것을 상정하는 레닌주의적 계급투쟁관은 그 적실성을 잃게 된다. 개별 생산 공간의 소규모 집합적 주체들이 사회 전체의 대규모 집합적 주체로 발전하기에는 투자와 소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원자화 압력이 너무 큰 것이다. "고객님"이라는 친절한 극존칭은 바로 이 원자화를 가능하게 하는 "소마"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환각제)인 것이다. 서비스 노동자들은 하인처럼 "고객님"을 주인 대접하지만, 그것은 결국 수퍼자본주의의 노예에게 소마를 주어, 국민국가의 진정한 주인인 "시민" 정체성을 마비시켜버릴 뿐이다. 원래 말의 뜻을 보자면, 시민(citizen)은 주인이지만 고객(顧客)은 손님이다.  그런데 "시민고객"이라니... 말장난도 이런 말장난이 없다.

5.
끝으로 “고객님”이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한국 상황을 보자. 나는 투자자, 소비자, 기업의 자율적 자정 노력으로 수퍼자본주의가 그 부정적 측면들을 일소할 수 없으리라는 라이시의 인식에 동의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운동과 함께 번져나간 조중동 광고업체 상품 불매 운동을 생각해보면, 한국과 미국의 상황은 또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이 사례는 특정한 정세 속에서 시민 마인드가 소비자(곧 고객) 마인드를 추동하여 국가와 자본에 대하여 압박을 행사한 예외적인 경우일 것이다. 곧 수퍼자본주의의 핵심인 소비자, 투자자 마인드의 시민 마인드에 대한 지배가 전도된 것이다.

그 지배의 전도는 그러나 게임 규칙의 변화를 갖고 오지 못하였다. 오히려 지배세력들은 게임의 규칙을 들이대면서 억지논리를 통해 불매행위 참가 시민/소비자들을 범법행위자(규칙 위반자)로 몰고 갔다. 라이시가 이 책에서 편 주장에 비추어 '촛불'을 바라본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라이시의 말대로 소비자들이 불매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게임의 규칙을 바꾸지 못하는 한 별 의미가 없고 결국은 사그라들게 마련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야 할까?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를 경험한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와 달리 시민 마인드가 늘 소비자, 투자자 마인드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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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노조 운동 20년 - 쟁점과 과제
조돈문.이수봉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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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7년 이후 20년에 걸치는 세월 동안 노동운동이 거쳐온 길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글 13편을 모은 책이다. 한두 개의 글을 빼고는 전반적으로 훌륭한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후반부에 실려 있는 오건호와 조돈문의 글은 나처럼 노동운동(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노총)의 주체와 전망에 대한 미더움이 급감하고 있는 이들의 관심을 좀더 붙잡아 두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사실 전망에 대해 더 많은 궁금함이 생기긴 했지만, 언젠가부터 증폭되어온 노동운동에 대한 냉소의 상당 부분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나의 이 냉소가 물론 어려운 과정에서 투쟁에 나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냉소는 아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무력함이 미안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모순과 착시
1987년 6월 항쟁 직후 전국에서 터져 나온 “노동자 대투쟁”은 제도정치 영역에서 확보된 민주화를 사회 전반의 영역과 개별 사업장으로 확장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곧 정치영역의 민주화가 대중투쟁을 통해 독재정권의 반응을 끌어낸 것이었다면, 노동자 대투쟁은 그 정치적 영역의 민주화를 다시 대중투쟁을 통해 확산시켜 (국가와 자본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 유지될 수 있었던) 폭압적 노사관계를 민주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체로 참여한 이 민주화 확장 투쟁에서 민주노조 건설은 당시 노동자들이 당면한 핵심 과제였다. 노동자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자본 측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당시 15.7%에 그쳤던 노조 조직률은1989년 19.8%에 이르게 된다. 수치상의 변화는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그 와중에 기존 한국노총 소속 어용 노조들의 민주노조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나 89년 정점을 이루었던 노조 조직률은 이후 하강을 거듭하며, 2004년에는 11%에 이르게 된다 (354). 수치만 놓고 보아도 민주화 이전보다 더 못한 조직률이고, 내용을 들여다 보아도 민주노조 건설에 성공했던 정규직 노조들이 고용 불안 위협 속에서 비정규직에 등을 돌리고 개별 자본에 종속당한 사례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민주노조의 타락은 분명히 관찰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가속화된 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었다. 신자유주의화의 시발을 언제부터 잡을 것인가는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전반적인 산업구조 조정으로 인해 여성의 노조조직률은 전체 정점인1989년이 아니라 1987년 말 이미 정점(15.3%)에 도달한 후 꾸준히 하락했다는 점(강인순: 354)이나 비정규직 비중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점(김성희: 307)을 보면, 비정규직 증가와 노조조직률 하락의 문제는 민주노조 건설의 성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경제위기 이전에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곧 87년 이후 노동운동은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의 동시진행이라는 모순적 역사경로 속에 발전해 온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민중운동 진영에게나 일반 시민들에게 일종의 착시 현상을 동반하였다 (이수봉: 228; 조돈문: 463). 곧 먹고 살기는 빠듯한데, 군사독재도 무너뜨린 마당에 노동자들이 맨날 파업해서 국가경제가 거덜난다는 자본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일반 국민들이 동조하면서 노동운동에 ‘집단 이기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게 된 것이다.

전투성 게임과 제도성 게임
199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노사관계의 제도화 경향은 국가와 한국노총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준: 88-89; 노중기: 403-405). 국가는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통제권을 새로이 확보하기 위해, 한국노총은 상실한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사정 3자 협의 틀을 필요로 하였다. 자본 측은 국가의 엄호 속에 일방적 우위 관계에 있던 노사관계를 노동 측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이 협의 틀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히 꺼려하였다. 민주노조 측은 이 사회적 합의 실험에 참여와 불참을 반복하였다. 어쨌든 전투성 게임과 함께 제도성 게임에도 노동운동이 참여하게 된 것은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라면 성과였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와 자본에게는 지배와 착취의 정당성을 새로이 확보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

제도성 게임의 장이 전무하였던 87년 당시 노동운동의 전투성 게임에 상대적으로 동조적이었던 시민들은 경제위기 이후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가속화된 사회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더불어 진행된 일방적 정리해고에 대한 생존권 사수 차원에서 저항했던 노동자들의 전투성 게임에는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다 (조돈문: 475-476).

동원과 설득
오늘날 국가와 자본과의 수세적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국민들마저 등을 돌려버린 사회적 고립 속에서 노동운동은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1987년 당시 노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와 사회 민주화라는 대중적 요구의 합치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단결된 노동자의 동원을 통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현재는 국가와 자본의 개별화 공세 속에서 연대, 단결, 조율을 달성하는 것도 어렵고 설령 이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를 통한 노동자들의 동원이 국민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곤 한다. 조돈문(481)은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기업별 노조 체계 아래에서 전투적 노조 운동을 전개해 온 우리 민주 노조들은 ‘동원의 논리’에 익숙하지만 국민 여론을 향한 ‘설득의 논리’ 경험이 별로 없다. 따라서 국민 여론을 견인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전투주의는 보수 언론에 의해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되기 쉬우며, 성공적인 투쟁 동원의 파괴력이 자본과 정부에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시민들에게는 불안을 안겨줄 수 있고, 특히 위치적 권력(positional power)이 큰 네트워크 산업의 경우 불편함을 인내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보수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쉽게 호응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된 노동운동의 문제는 경험 부족과 기업별 노조체계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점은 오늘날 노동운동이 한편으로 동원의 논리에 기반한 전투성 게임을 유발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재편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책임성을 담보한 제도성 게임을 요구하는 민주화 양자 간의 내재적 모순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485-6).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신병현은 사라진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을 새로이 형성해 나갈 것을, 노중기(429)는 (1)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산별노조 건설, (2) 정치세력화, (3)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연대 구축을 핵심 과제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제들은 모두 동원의 주체 형성과 관련되어 있을 뿐, 설득의 논리를 어떻게 증진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함하지 않는다. (노중기는 세 가지 과제 중 정치세력화를 가장 관건적 요소로 꼽으면서, 설득의 논리를 진보정당을 통해 성장시킬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조돈문 식으로 하자면, 동원의 논리와 설득의 논리, 전투성 게임과 제도성 게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사회공공성 투쟁을 통한 새로운 운동 주체 형성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답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글은 오건호의 글이다. 그는 개별 작업장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의 이해를 중시하는 운동으로서 사회공공성 운동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 공공적 서비스는 비록 자본주의 체제일지라도 시장과 이윤 논리에서 벗어나 생산∙공급되어야” 하며, 이 “사회공공적 영역이 시장 논리에 지배되어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진보 운동의 핵심 과제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공공적 서비스는 개인의 ‘구입 능력’이 아니라 ‘생활 필요’에 맞추어 제공되어야 한다”(384)는 그의 참으로 멋진 말은 “고타강령 비판”에서 “능력에 따른 생산과 필요에 따른 분배”의 미래 세상을 그렸던 맑스의 인식을 사회공공 서비스의 영역으로 도입하여 현재의 “시장화∙이윤화 대항투쟁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현시기 노동운동이 설득의 논리를 개발하는 데에, 그리고 진보정당이 재구성을 통해 언젠가 다시 도약하는 데에 있어 사활이 걸린 과제라고 생각한다.

긴장과 약간의 아쉬움
서로 다른 지은이들의 여러 글들이 실려 있고, 상당수의 글들이 이들의 더 큰 저작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초점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책 전체의 짜임새는 근래 본 국내의 편집서 중에서 꽤 훌륭한 편이다. 그런데 글들마다 약간의 긴장이 엿보이기는 한다. 제도성 게임과 전투성 게임을 동시에 슬기롭게 사용해야 한다는 조돈문과 전투적 노조주의는 당시 노동운동의 합리적 대응 결과였다는 노중기 사이에는 극한적인 의견 차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긴장을 감지할 수 있다. 또 개별 글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김성희의 글은 비정규직의 비중 변화라는 측면에서 1980년대 중반이 결정적이었다는 중요한 주장을 제시하면서도, 주요 내용을 각주에 나온 저서를 참고하라는 식으로 넘어가는데, 너무 불친절하다. 신병현은 노동자 계급 형성 과정에서 선진활동가 문화가 노동자 대중문화와 유리되어 엘리트주의로 빠져 하위문화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적 장소들이 사라졌다는 점을 잘 분석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현장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소를 형성해야 한다는 그의 결론은 다소 안이하게 느껴져서 용두사미스러웠다.

이수봉의 글은 도입부터 행간의 뜻을 읽어 달라며 필자로서 독자에게 참으로 무례한 부탁을 하더니, 다소 중구난방으로 느껴지는 글을 썼다. 전반적으로 “짱나”(238)는 글이었는데, 결론은 이거다. “정규직의 이해 관계와 결부된 사회구조 자체의 근본적 변혁, 이른바 혁명을 [정규직 노동자] 자신의 이해로 설정할 수 있다”(254)고. 물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또 민주노총 중앙과 현장 노동자 사이에 끼어 열심히 살고 있는 정규직 현장 활동가들을 탓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이수봉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이진경과 네그리 식의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여 하는 말이 고작 이거라면, 이수봉은 이진경과 네그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난 별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노동의 자본에 대한 형식적∙실질적 포섭을 넘어 “활동 일반이 자본에 의해 기계적으로 포섭”되어 (노동 과정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인간 활동으로부터 자본이 “사회적 잉여가치”를 추출한다는 이진경의 핵심 논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이진경의 논리는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하는 공공연금 조성을 요구하는 오건호의 논리와 훨씬 더 잘 부합한다. 오건호와 이수봉의 글 사이에는, 조돈문과 노중기 사이에 존재하는 실강이 아니라, 태평양 바다가 존재하는 것처럼 읽힌다. 이수봉의 요구대로 행간을 읽자면, 내가 마음이 비뚤어져서 그런지, 민주노총 중앙 책임자의 변명으로밖에 안 읽힌다. 정말 힘들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편히 앉아 투정하듯 비판하는 것이 참으로 호사스럽게 느껴져 정말 죄송하다. 그렇지만 이수봉이 요구하는 징후적 독해를 통해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민주노총 중앙의 변명, 그리고 민주노총이 직면하고 있는 갑갑한 현실과 그의 욕망 사이의 괴리와 그것의 힘겨움일 뿐이다.

사족
나는 ‘노동해방’을 믿지 않는다. 그건 ‘천국’과 같은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이 맑스의 저작에 거의 안 나오듯, 천국에 대한 언급도 성경에 거의 안 나온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깡패짓을 하고 있는 일부 광신도들을 시민들은 외면한다. 혹 “노동해방” 구호도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은 유한자로서 인간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을 찾고 종교에 귀의한다. 혹은 정말 훌륭한 인품을 지닌 종교인을 만났을 때 그를 따른다. 노동자들은 나약한 개별 노동자로서 억울함에 처했을 때 단결하여 계급 운동을 전개한다. 혹은 훌륭한 노동운동가를 접했을 때, 노동운동에 대한 의혹을 조금씩 거둔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노동해방이 있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천국이나 노동해방은 내부자의 동원에는, 특히나 한 때 내부자였다가 동요하는 이들을 다루는 데에는 아주 약간의 효과를 얻을 지 모르지만, 외부자의 설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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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20년의 재조명 - 1987년체제와 외환위기를 중심으로
홍순영.장재철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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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경제시스템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원근법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곧 경제시스템의 역사를 1987년과 1997년 외환위기, 이 두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세 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의 특성을 간략히 서술한 후에, 두 번째 시점(외환위기)의 전과 후를 비교한 후, 이 책의 지은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입장에 따라 향후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곧 현재 시점으로 오면 올수록 서술은 상세해지고, 주장은 강해진다.

1987년 이전의 체제는 수출주도형 성장 시스템였던 반면, 1987-1997년의 체제는 경제호황 속에서 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으로 인한 임금 증가가 내수를 확장시켜 내수주도형∙수출주도형 시스템이었다. “이 두 시기에는 소비와 설비투자 간에 피드백 효과가 있었으며 설비투자가 소비와 수출을 매개하며 경제성장의 동인 역할을 했다” (61).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에는 “내수 부문이 위축하고 대외 환경에 영향을 받는 수출 부분의 비중이 확대”되면서, “수출과 내수 부문이 괴리되고, 소비와 설비투자의 상호 연관성이 변질됨으로써 거시경제적 안정성이 훼손”되었다 (62, 65, 128-130).

지은이들은 1990년대 이후부터 실질임금증가율이 노동생산성증가율을 상회함에 따라, 기업의 임금 비용 부담이 커져서 고비용구조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이나, 당시에는 임금과 고용 구조가 경직되어 있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95-96, 98).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보다는 1987년 이후 임금인상이 소비지출로 바로 연결됨으로써 내수 확장에 기여하여 이전까지는 수출로만 먹고 살던 경제가, 이제는 수출과 내수의 쌍끌이가 투자와 선순환하며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점에 더 큰 강조가 놓여진다. [이 점은 한국이 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유혈적 테일러주의에서 주변부 포드주의로 이행했다는 리피에츠의 관찰과 일치한다.]

다른 한편, 1990년대 중반은 OECD 가입과 WTO 출범에 따라 정부가 개방과 자유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114-6, 138). 자본거래 자유화의 일환으로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국제금융시장 접근 관련 규제가 단기간 내에 과감히 완화”되었고,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금리가 낮은 단기자금을 선호했으며, 금융당국도 외채의존 경영을 우려하여 중장기 차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해외 자본 또한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의문시하지 않았다. 당시 S&P의 한국 국가신용등급은 AA-였다. 이처럼 쉽게 조달된 해외 자금은 기업의 대규모 투자 수요에 의해 소화되었다. 제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해외자금은 해외자금대로, 국내기업은 국내기업대로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세팅였던 셈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1997년 초부터 세 차례의 변곡점을 지나 IMF의 금융지원을 받아야 하는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세 변곡점은 1997년 1월의 한보 부도, 1997년 7월 기아자동차 부도유예협약 체결과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발생, 그리고 1997년 10월 외환위기가 홍콩으로까지 전파된 것을 말한다 (143-146).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단기자금이 급격하게 유출됨에 따라 나타난 외화유동성 부족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까지 늘어가만 가던 경상수지 적자였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원화 가치의 고평가가 지속된 상황과, 이 상황과 부분적으로 연결되 어 있는 교역조건의 악화를 꼽을 수 있다 (148-151).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은 내부의 정책실패와 연결되어 있다. (외환정책, 금융감독, 자본자유화정책과 기업투자 규제 완화의 동시진행 등). 요약하면,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역내의 경쟁체제 심화와 환율불균형, 세계 금융자유화 및 투기자본 확산 등의 외부적 요인이 외환위기의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외부 환경이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경직적 환율방어정책, 급진적 자본자유화 추진에 상응하는 감독의 실패, 인위적 업종전문화 정책등의 잇따른 정책 실패가 빚어낸 결과”란다 (161).

외부환경 변화와 국가 정책 실패의 결합이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는 이야기인데, 맞다. 하지만 재벌들은 경제위기의 종범이 아니라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이후에는 경제위기 이후 이루어진 제도개혁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지은이들은 주주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영미식 신자유주의로의 재편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과거 발전국가에 의해 육성되어온 재벌의 존재 기반 중 하나인 관계적 금융을 침식하고, 재벌가족의 경영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앞에 내세우는 이유는 그렇게 투명한 사익(私益) 때문이 아니다. 최근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저투자의 문제도 은행이 아니라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는데, 주식시장이 기업에 조달하는 자금보다 배당으로 추출해나가는 것이 더 많은 상황에서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은 외환위기 이후 오히려 줄어들었다 (205). [이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조영철의 책에서도 지적되는 내용이다.] 또한 국내 금융산업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권 시장 (M&A 시장)에서도 국내기업에 대한 역차별을 통해 외국 자본의 지배를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214, 220-5).

그리고 점잖게 가르친다. “자본의 국적성은 유의미하다”고 (246-7). “소유+전문 CEO 시스템” – 아마도 재벌경영체제를 가리키는 이들의 용어인 것 같다 –은 역사적 산물이며, 영미식 경제운용방식을 이상화시켜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던 그 “소유+전문 CEO 시스템”을 폐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사실 난 이 부분에서 장하준을 연상하였다.]

끝에 여러 정책 방향을 언급한다. 미국을 포함하여 전방위적 FTA를 추진하여야 하며, 요즘 산별노조로 가려는 추세가 존재하는데 기업별 노조도 좋은 점이 많다느니 “다원적 노사체제 하에서 대화와 협력”을 해야 한다느니… 사실 좀 주제 넘게 들리기도 한다. (삼성은 노조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핸드폰 위치추적이나 하지 마라.)

탄탄한 분석 위에서 중언부언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하는 좋은 책이다. 주장은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이 배웠다. 촛불집회하는 시민들 빨갱이라고 욕하고, 1인시위하던 여성을 각목으로 때리는 무서운 아저씨들이나, 양손에 태극기 성조기 흔들며 찬송가 부르는 개신교인들도 무섭다. 하지만 그 무식해서 용감한 우파와는 차원이 다른 정말 무섭고 세련된 우파는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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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태동 - 민주화, 세계화, 그리고 한국의 복지정치, 사회복지학 총서 80
송호근.홍경준 지음 / 나남출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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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특히 한국의 복지국가에 관한 책 한 권을 본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야말로 문외한이다. 따라서 책에 대한 비판보다는 지은이들의 핵심논지를 정리하는 정도가 이 글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1부에서는 세계화와 복지국가의 일반적 관계에 관한 서구의 이론을 주로 다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화가 복지국가의 재편을 초래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축소로 귀결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주장은 근거없는 낭설이라고 주장한다. 곧 세계화에 대응하는 국가마다 그 나라에 고유한 복지정치를 통해 복지제도가 확장될 수도 있고, 부분수정을 통한 현상유지를 할 수도 있고, 전면축소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곧 미국, 영국, 중남미에서는 축소가 일어났으며, 북구 사민주의국가와 유럽대륙의 보수적 복지국가들에서는 재조정이, 한국의 경우에는 확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103쪽). 


2부에서는 1부에서 소개된 개념적 장치들이 민주화 이후 태동한 한국의 복지국가가 1997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지은이들은 한국이 본격적 복지국가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하더라도 복지국가를 향한 시동은 이미 걸려 있는 상태라고 본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초기형성과정이라는 사정은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복지국가 유형 중 하나로 한국을 범주화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따라서 지은이들은 한국을 일종의 ‘혼합형’ (곧 사회보험의 기본 설계는 ‘보수주의 복지국가’와 유사한데, 그 혜택요건은 ‘임금생활자 복지국가’와 유사하며, 노동시장정책과 공적부조는 ‘자유주의 복지체제’와 유사하지만, 재정부담과 수혜기준은 ‘가톨릭 보수주의 복지체제’와 유사한) 체제로 분류하고, 이처럼 독특한 체제가 존재하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무엇보다도 이는 “민주화와 세계화의 이중적 전환을 거치면서 가족과 기업에의 의존성을 낮추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복지동맹과 반복지 세력의 거부권(veto point) 간의 복지정치의 산물이었다 (111).


1987년 이후, 복지제도는 ‘확대’되었으나, 그것이 초기설계를 넘는 시스템적 개혁은 결코 아니었으며, 경제발전이 국가의 복지역량을 향상시킨 결과로서 나타난 ‘따라잡기적 확대과정’(expansionary catching-up)이며 “초기설계의 성숙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점진주의적 확대”이다 (126, 140-1). 복지확대는 고용연계성과 비정규직의 배제라는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노동시장 분절에 의해 촉진된 소득불평등이 국가복지를 통해 재생산되는 역설적 결과가 초래되었다. 저자들은 이를 한국 복지제도의 “구조적 한계”라 칭하는 데, 세 가지 구조적 한계로 (1) 고용연계적 자격요건, (2) 사각지대의 지속, (3) 취약계층 중심의 사회서비스를 들고 있다. 이 구조적 한계는 애초의 제도설계에 내재된 제약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1990년대의 복지 개혁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데, 이는 비용절감에 목을 맨 국가와 기업이 노동시장의 삼분적 분절구조 - 관리사무직 / 정규직 핵심노동자 / 비정규직으로 분리되어 있는 노동시장구조 - 라는 “구조적 덫” 안에서 가장 강한 정치력을 획득한 정규직 핵심노동자만을 선별하여 복지를 제공하고, 관리사무직과 비정규직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70-71, 311). 1995년부터 불어닥친 대량감원과 해고 바람은 당시 막 정상조직으로 설립되었던 민주노총으로 하여금, 조직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정규직 핵심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해 비정규직을 포기하게끔 한다. 이는 “고용연계성이 강한 제도적 설계 위에 취업자의 50%에 이르는 비정규직이 국가복지로부터 배제된 결과”를 낳게 되며, 이는 당시 민주노총 “조직 결성의 성공요인이었지만, 향후 민노총이 풀어야 할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176-7). 이러한 구조적 한계로 인해 “한국의 복지개혁은 초기설계로부터 결코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정치인, 관료, 시민들에게 장기간 내면화된 복지이념과 의식에 의해 재생산됨에 따라 강력한 경로의존성을 구성하게 된다 (201-2).


이러한 경로의존성이 관철되는 와중에도 한국 사회복지 정책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하나의 전환점”을 통과하는데, 1998년에는 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규모가 11%까지 늘어났으며 이후에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권위주의 시절만큼 축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되었다. 지은이들은 이 과정을 “글로벌 스탠더드의 준수와 그에 따르는 구조조정”을 구실로 삼아 기업들에게 위임되었던 복지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된 기회, 곧 국가가 기업에 위임하였던 복지의 책임을 이제는 가져가야 하는 상황으로 이해한다 (270).


10장에서는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세계적 추세가 한국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위기를 전후한 1996년의 개정 노동법과 1998년 사회협약을 통해 자본 측은 끈질기게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시간제 도입을 통한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를 추구한다. 이에 반해 노동 측은 고용 안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는 교환된다. “자본가는 유연성을 얻고, 노동자는 고용보호를 약속받았다. 바로 이 점이 문제다. 유연성과 고용보호라는 상반된 목표가 어떻게 맞교환 되었는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분절시장을 전제로 해야 비로소 이해된다. 위 두 개의 목표를 맞교환할 때 정규직 노동자들만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비정규직을 유연성 증대의 대상 집단으로 내주고 자신들은 엄격성(고용보호)을 약속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비정규직 비율이 급증하던 당시의 현실에서 자본에게도 그리 불리하지 않은 교환형식이었다. 1998년 중반 이미 비정규직은 취업자의 45%선을 돌파하였다” (289-90).


한국적 복지의 특성인 “고용연계적 복지”(employment-entitled welfare)는 바로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 간의 제도적 분절 고착을 뜻하는 것인데, 노동조합과 기업의 저항으로 인해 분절시장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 민주노총에서 내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는 사회보험의 확대가 필수적으로 수반되는데, 이는 고용주에게는 사회보험 부담금의 증가를 뜻하고, 기업의 고용능력 저하로 이어질 우려가 많단다 (196).

유연노동시장, 관대한 복지제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황금삼각형으로 대변되는 덴마크식 유연안정성 모델과 같은 개혁정치가 한국에서 이루어지려면, 고용연계적 복지제도와 정규직 중심의 보호정책이라는 노동시장제도의 양대 초기 설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노무현 정권 말기 (이 책이 쓰여진 후) 발효된 비정규직 보호법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표하고 있다 (300).


 

마지막 11장 결론에서는 앞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노무현 정권 말기 복지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일별하고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지은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하다. 결론 내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던 이정우 전 정와대 정책실장의 글 (성장지상주의의 폐기와 분배를 통한 성장을 주장)을 인용하면서, 정당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이 먹히지 않는가를 자문하며 그 이유를 당시의 경기침체 (그 때 그게 경기침체면 지금은 뭐냐?)와 더불어 다른 구조적 요인에서 찾고 있다. “복지제도의 성장과 확대를 결정하는 계기가 ‘국가’에 있다기보다 ‘기업과 생산체제’로부터 기인한다는 한국적 특성”이 그것인데, 그동안 한국의 국가는 미래대응적이기보다는 반응적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대기업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이는 국가복지가 “생산체제 변화의 함수”로서, “생산체제의 구조변화가 낳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국가복지의 영역으로 흡수하는 것이 국가의 주된 역할”이었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들은 노무현 정권이 겪었던 저항을 반응적 조치로부터 미래대응적 조치로 복지정치의 기조를 옮긴 탓으로 해석하고 있다. (글쎄?) 

 

서평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간단한 느낌이나 몇 자 적자. 서구의 논의들을 정리한 1부는 다소 지루했지만, 2부, 그 중에서도 6, 7, 10장은 꽤 재미있었다. 지은이들은 한국노총은 “한국노총”이라고 하면서 민주노총은 계속 “민노총”이라고 하는 게 사실 좀 짜증났었는데, 또 막상 노동조합과 긴밀한 연대력을 가진 계급정당이 출현한다면 기업차원의 정치가 국가차원의 정치로 원활히 전환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함으로써 미래대응적 조치들이 가능할 거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예전에 누가 복지국가 공부한다고 하면, “드디어 맛탱이가 갔구만”하고 깐죽거리기도 했는데, 그 때 나한테 그 소리 들었던 그 친구가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걸 알면 뭐라 그럴까? 웃으면서 “그래, 이제 정신 차렸구나”라고 하려나.. 만약 그러면 난 “난 아직도 너랑은 달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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