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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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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022년, 그러니까 재작년 봄쯤 다르도와 라발의 『새로운 세계합리성』을 읽고, 신자유주의
분석에서 푸코의 쓰임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더랬다. 그때 리뷰를 제대로 안 써놓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1)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 대한 훌륭한 주석서다. 다르도와 라발은 푸코가 “통치”라는 관점에서 살펴봤던 질서자유주의, 하이에크, 베커 등의 선구적 신자유주의 이론들을 잘 소개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좀더 나간다. 푸코가 참조한 이론뿐만 아니라, 그 이론이
실현된 역사적 사례들 – 피노체트의 칠레부터 유럽연합의 탄생까지 -과의
연관성을 부각시킨다. 만약 푸코가 말년에 자기통치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연구를 계속했다면
그 출발점이 어땠을 지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연구를 동시대적으로 갱신한다면,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의 대두로 손상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거나, 그래봤자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대신, 좌파는 신자유주의 합리성/통치성에 대한 대안적 합리성/통치성과 그것을 인도하며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주체의 대항품행 개발이 절실하다는 이 책의 결론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2) 이 결론에도 불구하고, 정작 다르도와 라발만의 독창성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3) 저자들은 『새로운
세계합리성』의 한국어판 서문(2022)에서 출판 당시(프랑스에서
2009년 출판)에는 자신들이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했음을 고백하면서, 푸코의 1972~73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처벌사회』의 ‘내전’ 개념이 이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6년
자신들이 펴낸 『끝나지 않는 악몽: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의 핵심주장을 매우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끝나지 않는 악몽』의 내용을 무척 궁금해 하면서, 이를 비롯한 이들의 후속 저작들이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존재 자체도 아예 몰랐던 이 책 『내전, 대중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만나게 되었다. 2021년에 프랑스어로 출판되었고,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 『새로운 세계합리성』의 “한국어판 서문”을 다시 보니, 각주에 이미 이 책이 언급되어 있다.)
장마와 폭염 속에서 책을 다 읽었다. 읽은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진빠지는
일들로 책상에 앉을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잠깐 짬이 나 몇 자 적는다.
1. 전략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이론: 내전과 대중혐오
다르도, 게강, 라발, 소베르트, 이
네 명의 저자는 신자유주의 이론을 순수 이론이 아니라, 어떤 전략을 내포한 이론으로 본다. 푸코의 “주체와 권력”에
따르면, ‘전략’이란 “적에게서 전투의 수단을 박탈함으로써 싸움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모든 방법”이다(27, 354). 곧 미제스 이후의 신자유주의 이론들은 “사회의 적”을 격퇴하기 위한 전략적 담론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사회 안에서 적과 대면하는 “내전”이라는 맥락에서 구사되는데, 이 “내전”은 푸코의
1972~73년 강의록 『처벌사회』의 주요 테마였다. 그러나
‘내전’ 개념은 군주권력에서 규율권력으로의 이행에 초점을
맞춘 『감시와 처벌』(1975)에서는 주변화되었고, 내가
알기로 푸코는 이를 주요 개념으로 사용한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좀더 적고, 다시 이 책 이야기로 돌아오자.
저자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
내전’은 과두지배 연합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17-18). 그러나
이는 ‘1% 대 99%’의 싸움 같은 계급투쟁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과두지배 집단, 소위 ‘진보적 신자유주의’ 집단, 권위주의적
국민주의에 포획된 인민들, 그리고 평등과 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집단 등이 복잡한 긴장을 구성하며 내전에
참여한다.
누가 신자유주의의 적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은
‘총체적 국가’를 공포의 대상으로 느낀다. 이 총체적 국가란 민주주의가 경제를 침범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22-23).
이 민주주의와 사회라는 적에 맞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신자유주의는 내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고전파 정치경제학을 각색한 맨체스터학파의 자유방임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움을 수행한다(134).
그리고 이 담론은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나치즘, 집산주의, 사회국가, 복지국가, 사회주의, 노동조합 등을, 곧 “계획경제와
집산주의를 닮은 모든 것”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한다(126).
이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강한 국가와 자연적 구조(뢰프케, 161), 또는 자의적 강제와 자발적 진화(하이에크, 168)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본다. 보이는 주먹과 보이지 않는 손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소리다. 적과
싸우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강한 힘이 필요하겠지만, 자연적 구조나 자발적 진화는 왜 강조되는가? 그것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보는 사회주의자들의 구성주의적 오만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시장의 규칙은 자연적인 것이고, 이에 순응하지 않고 개입해서 교정하려는
시도는 무지 또는 악의 소산으로 규정된다. “시장은 옳다. 토
달지 말고, 개기지 마라. 주글래?” 이런 소리다. “대중은 만족을 얻을수록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요구를 내세우게 되고 국가는 약해진다”(발터 오이켄, 69). 평등의
요구는 시대의 ‘병리적 증상’일뿐이다(알렉산더 뤼스토프, 27~28). 민주주의 이론과 제도들은 대중의
짐재력을 긍정하지만, 신자유주의자에게 대중이란 혐오와 순치의 대상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전략에는 바로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마음가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시장에 대한 순종 여부로 순치/동원과 혐오/격멸의
대상을 구별하고, 양자간의 내전을 조직함으로써 민중의 단결이라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전 전략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전쟁은
경쟁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평등에 대항한 전쟁”이다(28).
2. 신자유주의 이론들과
슈미트의 묘한 관계: 법치
사실 난 칼 슈미트를 잘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점 하나가 신자유주의 선구자들이 슈미트를 참조했다는 사실이다. 슈미트는
다당제에 비판적였다. 왜냐하면 이 “특수이익들의 다원주의”는 ‘총체적 국가’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69). 1932년 7월,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인간 삶 모든 영역에 침투하는” ‘총체적 국가’로서 ‘약한
국가’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그는 이 약한 국가를 ‘양적
총체적 국가’로 재규정하면서, 이 현실의 국가와 대비되는
앞으로 도래할 이상적 국가로서 “질적 총체적 국가”를 제시한다. 이는 양적 총체적 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권위주의 국가이다. 그리고
이 ‘매우 강한 국가’만이 ‘당파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나치즘과 공산주의라는 이중의 위험에서 독일을 구할 것이라고 구상한다. “슈미트는
전능한 민주주의 국가의 약점을 명확하게 파악했다”(하이에크, 83).
슈미트의 민주주의 혐오는 오이켄, 하이에크, 뢰프케
같은 신자유주의 선구자들(83, 90, 114)뿐만 아니라, 칠레
군사독재의 후예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42). 또 이 강한 국가는 “경제 밖으로의 자진 철수를 개시할 수 있다”(295). ‘경제와 깨끗하게
절연한’ 강한 총체적 국가,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론이 슈미트에게
빚진 요소이고,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자유주의와 극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선구적 이론가 명단에 슈미트를 추가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는 무엇보다 슈미트에
대한 하이에크의 이중적 판단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총체적 국가로의 변환을 비판한 슈미트는 긍정하지만, “모든 규칙과 규범은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으며 그에 걸맞은 유기적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 “인민 공동체가 유일한 법적 주체를 구성한다는 나치의 교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비판한다(302).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민공동체가 아니라, “인민이 자유로운 개인주의적 시민사회”이고, 진화의 결과인 규칙과 규범,
곧 시장질서는 그 자체로 자연적이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슈미트는 “’엄밀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외부자”다(304).
시장질서를 보호하는 법이 私法이다. 하이에크는 “私法의 일반 규범 대 公法의 특수 규칙”의 대립(303)을 상정하면서, 후자를
전자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한다. 곧 “민주주의 정부의 행위와
국가의 公法을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私法이라는 일반 규칙에 종속시키기를 꿈꾼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이에크가 말하는 “법치”이다. 그리고 이 법치주의는 유럽의 여러 조약들을 통해 실현된다(191). 따라서
“법치는 좋은 거 아냐? 법을 남용한다고 법을 부정할 순
없어!”라는 순진한 말은 법이 정치를 대체한 오늘날 미국, 브라질, 한국의 현실뿐만 아니라, 하이에크의 법치 개념 앞에서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법의 전략적 사용, 곧 ‘법률전(lawfare)’은 신자유주의 정치에서 일반적이다(270~273). 강한 국가는 법치와 결합함으로써, 인민주권의 실현을
봉쇄하면서도 자신에게 자연의 법칙의 수호자라는 그럴 듯한 사명을 부여한다.
3. 오늘날
극우파의 성격
2008~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초까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예고하는 분석들이 한참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당시 출판되었던 『새로운 세계합리성』(pp. 682~683)에서
다르도와 라발은 통치성의 위기를 맞은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는
1938년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에서 우파 학자들의 집합적 아이디어로 등장하기 시작해서,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1980년대초 대처와 레이건, 1990년대
제3의 길, 그리고 클린턴 정부가 주도한 세계무역기구 설립
등을 거치면서 현실화되어, 새로운 합리성으로 세계경제질서, 국가정책, 개인 품행 모두를 인도하는 원리로 자리잡게 된다. 그렇다면 2024년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새로움은 무엇인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이후 더욱 주목받게 된 신자유주의의 권위주의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당시 각국 정상들은 스트롱맨들로
채워졌다. 그 전부터 권좌에 있던 푸틴은 차치하고, 에르도르안, 두테르테, 보우소나루, 오르반
등이 집권하면서 노골적 반이민 정서,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을 친시장주의와 결합시키며, 세계화 흐름은 되돌리려 하면서도 복지국가 해체는 지속하려는 정책들을 펼쳤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국민 일부의 지지도 열성적이었다. 처음 트럼프를
보면서는 “공인이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저렇게도 투명하게 다 드러내나”
싶었다. 그러나 그를 대통령으로 뽑고 그에 대한 지지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 기반으로
삼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저학력 하층계급이다. 하층계급이
어떻게 극우파를 지지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저자들은 토마 피케티나 디디에 에리봉의 관점과 합류하는
분석을 제시한다.
좌파는 글로벌리즘에 동조하고, 세계화한
‘엘리트’로 편입하며 인민 계급의 분노를 키웠다”(195).
미국에서 세계화를 정책으로 추진한 것은 공화당이 아니라, 클린턴의 민주당였고, 여기에 토니 블레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이 장단을 맞추었다. 세계화는 도시 엘리트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었을지는 몰라도 노동계급과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그런데 이들의 박탈감을 집권
좌파들은 외면했다. 그 당시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을 과연 좌파라고 볼 수 있는가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고 서유럽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해체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유럽에서 이들의 우경화는 당연한 수순였다. 유력한 사회주의 진보정당이 없던 미국에서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냥 넘어가겠다.
하층계급의 상대적 박탈감을 달래줬던 것은 좌파가 아니라 “국민주의적 신우파”였다(198). 자유지상주의자
머레이 로스바드의 반세계화 주장은 트럼프의 고립주의 정책의 전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주권이
상실될 것이라면서, 미국인들의 손에서 결정권을 빼앗아가는 ‘국제주의적
초국가 기관’이 설립될 것이라며, NAFTA 철폐, 모든 종류의 초국적 기구(UN, ILO, UNESCO 등) 탈퇴, 개발원조 중단, 이민
제한이 필요하며, 이 모든 것이 진정한 자유시장 구현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99). 그는 자유를 사회적 상호의존관계 및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내하지 않아도 될 권리로 보면서 ‘탈사회주의화’를 슬로건으로 채택한다.
로스바드의 이 반세계화 국민주의 수사는 오늘날 정확히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새롭게 민주당 후보로 지명된 카멀라 해리스는 과격한 급진파이고, 그녀가 당선되자마자 미국 경제는 망하고,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할 것이라는 호들갑이 정말이라고 믿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촌스럽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 이들이 무식한
게 문제가 아니라, 하층계급의 마음을 못 사는 진보적 좌파가 무능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저자들은 우파의 이 성공을 “신자유주의가
독(유대관계 해체,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불안정)과 해독제를 동시에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해독제란 “규범을
준수하고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는 착한 시민인 ‘우리’”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주권 국가를 다시 이상화하며, 개인적
자유를 급진적으로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221~222). 값싼 제품을 수출함으로써 ‘우리’ 기업과 ‘우리’ 일자리를 없애는 중국이건, ‘우리’나라
국경을 불법월경하는 멕시코이건,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적들과 싸워야 한다.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도 문제다. 그들은 외부의 적였다가 내부의 적이 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일 수도, 서구 기독교 문명을 위협하는 낙태, 동성결혼 찬성론자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는 시민들 모두에게 사회주의 급진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철지난 매커시즘의
수사가 다시 동원되기도 한다.
이 극우정치의 대두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 그 전에 그것은 무엇이 아닌 지부터 먼저 보자. 첫째, 이를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라고 볼 수는 없다. 파시즘과 신자유주의는 일종의 ‘사회진화론’을 공유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사회 진화론은 파시즘처럼 “군사 전쟁이나 영토 복속을 추구하지도 않고 열등한 종의 제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291). 또 “모든 개인을 하나로
녹여내어 ‘인민공동체’로 집결시킬 필요”도 없다. 그리고 트럼프의 예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파시즘이 조직의 근간로 삼고자 했던 “체계화된 대중 조직”은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다.
트럼프는 개인을 찬양하고 공동체와 이성, 전체의 이익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며, 개인의 자유, 자발성, 선택, ‘잠재력’을 발휘하여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모든 것을, … ‘탈규제화된’ 사적 자유를 거의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운 방식으로 옹호한다”(292).
둘째, 같은 논리로
‘우파 포퓰리즘’이라는 말도 적절치 않다. ‘포퓰리즘’은 ‘하나의
인민을 구축하는 것’인 반면, 오늘날 극우정치는 이들을 분할한다. 곧 “인민계급 일부가 노동자 운동의 모든 성과와 복지국가, 노동법, 노동조합에 등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들은 1930년대
이래 강한 국가 정당화 논리의 등장부터 최근까지 신자유주의 전략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이
전략의 두 특징을 지적한다(318~319). 첫째,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다소 진보적인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와 반동적인
‘내셔널리즘 신자유주의’로 양분된다. 둘째, “이러한 두 신자유주의 분파의 가치 전쟁 속에서 인민은 자기 자신에 대항하게 된다”(319).
두 번째 지적이 더 흥미로운데,
이 부분에서 저자들은 푸코의 “자기경영하는 주체” 개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자기 자신을 가치화하는 경제”에서는
“개인이 무엇을 했는지보다 그가 약속할 수 있는 미래의 능력치가 더 중요하다”(237). 실패는 개인의 책임이고, 사회에는 책임이 없다. 성공을 위해서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 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과 불가분한 것으로 드러난다.”(239) 한 사회 내의 내전이 개인 안의 내전으로 더 깊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개인은 그 전쟁에서 전사의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적 노릇까지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경영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도록 강제된다”(239).
사태가 여기에 이르면, 이제
저자들이 그리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변모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이 태동하던 1930년대에 신자유주의는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대중혐오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2020년대 오늘날 이 신자유주의 합리성은 공정한 경쟁과 능력주의를 미덕으로 삼으며 빈곤청년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간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부모의 가난과 자신의 능력부족을 탓하며, 자신과 가족을 혐오하게 만든다. 사회는 내전 중이고, 이 전쟁은 가족 안에서도, 개인의 마음 속에서도 진행된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역사란 엘리트의 대중혐오에서 대중의 자기혐오에 이르는 승리의 역사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너무 악의적인 일반화일까?
4.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신자유주의 내전에 맞서, 민주주의와
사회적 평등을 옹호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내면화시키는 경제와 정치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주술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슈미트의 말을 빌려 ‘기초 결정’ 혹은
‘제헌적 결정’이라고 부른다. 이 말을 대처는 아주 쉽게 “대안은 없다”라는 말로 바꿨다. 대안이 없다면 정치도 없다. 그러나 정치는 있고, 정치가 있다는 것은 가능성의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정치적 협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공통의
사안’이며, 저자들은 이를 ‘커먼스(commons)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저자들은 레닌 이후의 2단계
전략, 곧 혁명을 통해 먼저 국가를 바꾸고, 그 다음에 세계를 바꾼다는
고전적 전략을 폐기한다.
국가는 결코 피지배자의
‘무기’가 될 수 없다. 급진적으로
비국가적인 정치, 즉 커먼스의 정치만이 시장의 영향력과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오직 인민의 혁명만이, 시민들에 의해 전개되고 통제되는 혁명만이
신자유주의적 내전 전략에 대항할 수 있다”(326).
저자들은 파리 코뮌이 내전에 대항한 혁명였음을 주지시키면서, 제도화된 실천이 아닌 ‘탈제도화된 힘’의 구성을 주장한다. 이들은 과거 좌파의 노동자 중심성, 보편정당, 해방 주체의 형성 등이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다고 진단하면서도, 우파 포퓰리즘을 미러링하는 것에 불과한 좌파 포퓰리즘(무페)이나 페미니즘이나 인종정의 운동 일부에서 보이는 “정체성 물신주의”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주장은 단순하다.
오직 하나의 전략이 있을 뿐이다. 모든 분야에서 평등을 우선으로
하는 모든 요구를 결집하는 것이다”(333).
아… 그런데 여기서
좀 맥이 빠진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 방향은 대략 공감할
수 있지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작은 모델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신자유주의 내전에
대한 혁명 전략으로서 커먼스의 실천적 사례들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이 좀더 익어가기를 응원해본다.
5. 푸코가 가지 않은
길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다. 사실 제일 쓰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나는 저자들이 푸코가 가지 않은 길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성 개념에 기반한 최근의 연구들은 주로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79) 9~12강의 주제인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논의를 『감시와
처벌』(1975)의 규율권력이나 “옴네스 에트 싱굴라팀”(1979)의 사목권력 논의에서 다룬 행위의 인도(conduct of
conduct)로서의 품행에 대한 규율과 연결시켜 다뤄왔다. 그런데 이들 논의에서 국가와
사회의 형상은 주변화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 통상적 흐름과 달리,
저자들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처벌사회』(1973)의 “내전” 개념과 “니체, 계보학, 역사”(1971)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79) 7강에 등장하는 “법치” 또는 “법의 지배” 개념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형상을 재조명했다.
푸코는 1979년 이후 자기와 타자에 대한 통치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반면, 저자들은 바로 그 문제를 푸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늘날의 시점으로 끌고 온다. 이제까지의 푸코 연구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점이 이 저작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오랜만에 읽은 푸코 관련 저작인데, 만족스러웠다. 이 저자들의 다른 저작들도 한국어로 속히 번역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덧.
2008~9년 글로벌
위기에도 신자유주의가 죽지 않았듯, 2021년 미 국회의사당 점거 진압에도 MAGA 정치를 앞세운 트럼프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극우 세력들이 약진하고 있으며, 보수당의 우경화가 가속화된다. 그
와중에 2024년 올해 영국에서는 오랜만에 노동당이, 프랑스에서는
신인민전선(NFP)이 우익의 집권을 막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영국에서는 무슬림 축출을 주장하는 극우파의 과격폭력 시위가 진행 중이고, 올림픽을 핑계로 마크롱이 총리 지명을 미룬 프랑스도 향후 어떤 양상이 전개될 지 미지수다. 올 11월 미국 대선도 그렇다. 한국은? 현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공산전체주의 운운할 때보다 총선 이후 수그러든 것도 같지만, 대통령 거부권은 계속 행사되고, 극우인사들이 계속 기용되는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국회에서 사라진 정의당의 빈 자리가 크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