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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의 배신 - 플랫폼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유혹
이광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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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내용을 다 포괄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학술서적이 아니라 대중서적을 염두에 두고 쓴 저자의 의도에 맞게 오늘날 핫 토픽들 - 플랫폼 자본주의, 빅데이터, 알고리즘, 공유경제, 인류세, 그린뉴딜, 탈성장, 코로나19, 탈진실 등 -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많이 듣는 말들이고, 이미 일상 속에서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현상들이지만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말로 풀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과정의 문제점들을 잘 짚고 있다. 넓은 범위를 커버하면서 문제들을 깊게 파고들지않고 얕지만 기초적 핵심들을 잘 짚고 있다. 나 같은 기술문맹 대중들에게 딱 맞는 책이다. 그런데 사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는 이제 다들 연식이 제법 되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보면 신기해 하며 감탄하기는 하되 그것을 몸소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대면회의나 QR 체크인도 해야만 했으니 했지, 코로나19와 같은 객관적 제약이 있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1장에서는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플랫폼 세계, 2장에서는 플랫폼 자본주의와 알고리즘 경영, 3장에서는 인류세에 대한 상이한 대응으로서 그린뉴딜과 탈성장 논의, 4장에서는 코로나19와 가짜뉴스, 5장에서는 데이터3법 제정으로 문제가 된 데이터 주권 문제가 다뤄진다. 나로서는 1장과 2장의 논의가 가장 흥미로웠다. 테크놀로지가 야기한 내 주변 일상의 변화들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 동네 레코드 가게, 길보드 리어카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들이, TV, 극장, 비디오가게를 통해 보던 영화들이, 컴퓨터를 통해서 들어갔던 지메일, 페이스북, 유튜브, 인터넷뱅킹 등이 스마트폰 하나로 다 접근하게 되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익숙한 방식으로 리소스에 접근한다. 나는 여전히 일어나자마자 FM 라디오를 켜고, 좋은 앨범이 나오면 CD를 사서 소장하고(이사 다니기 힘들어서 LP는 다 기증했다), 노안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넷플릭스도 TV로 보지 폰으로는 못 본다. (물론 컴퓨터로 볼 수밖에 없던 불우한 날들도 있었다.) 나에 대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 또는 주방과 식탁의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맛의 저하, 배달용 용기, 그리고 배달요금 등의 문제로 음식은 배달시키지 않는다. 물론 당구장에서 먹던 짜장면의 맛이 그립기도 하지만, 이제 같이 당구 칠 친구도 없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아마 당구장 짜장면이 맛있었다면 내가 이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건강 상태를 정형 데이터의 형태로 제공하는 북플의 독보적활동도 안 한다(아니라 귀찮고 하기 싫다)… 생각해보면 은행 업무 말고는 스마트폰의 기본 기능 외에 앱으로 뭘 하는 경우는 곁에 컴퓨터, TV, 라디오 등이 없을 때만 쓰는 것 같다. 그렇다. 나는 기술문맹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지금보다 젊었다면 이럴 수 있을까? 대학에 갔을 때, 나는 상징적 단절의식으로 LP 듣기를 그만 두고 CD를 사서 들었다. 그리고 선후배들과 한메타자교사의 베네치아 신기록 경쟁으로 타자 실력을 키웠고, 어느 날 도트 프린터가 아닌 잉크젯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대하고 이메일을 만들었고, 휴대용 CDP를 들고 다니다 MP3 파일로 갈아탔다가 멜론, 애플 뮤직 등 유료구독 서비스를 하기 싫어서 다시 라디오, CD 세상으로 후퇴했다. 내가 그 나이에 뭔가 첨단의 미디어와 컨텐츠를 수용했던 것(또는 창비 구독)이 자연스러운 것만큼 오늘날 젊은이들이 영상과 음원 리소스, 유료 앱과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내게는 유료 구독 서비스가 첨단 테크놀로지 수용의 장벽 역할을 어느 정도 하기는 했다. 그래도 넷플릭스를 안 볼 수는 없으니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자본가-노동자 / 고용주-피고용자의 경계가 애매해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공유 경제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온라인 중개 플랫폼경제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노동 배달, 청소, 돌봄, 임상실험, 감정노동 등 이 거래되는데, 노동 수행 주체는 고용주와 근로계약을 맺은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 곧 비정규직 프리랜서가 되어 노동을 수행한다. 노동과정에 수반되는 위험들은 이 개인사업자에게 외주화되는 반면, 플랫폼 중개인은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이윤은 독점한다(66). 애덤 스미스도, 맑스도, 케인즈도, 그리고 아마 하이에크도 몰랐던 시장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시장에는 독점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했겠지만 시장이라는 플랫폼에 주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는 못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플랫폼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 중 하나로서 알고리즘 경영은 플랫폼을 매개해 인력 정보들을 수집하고 연결해 필요한 고객에게 매칭하고 노동수행과정을 통제하는 자동화 혹은 인공지능 알고리즘 기술기반형 노동관리방식을 지칭한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계약 노동자들의 플랫폼 활동을 감시, 통제하고 고객의 체험 정보를 연산 처리하는 고도화된 자동 명령어 구실을 한다”(97). 플랫폼 중개인들에게 그들과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들은 물적 자원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들은 기업조직의 상급자가 없는 대신 고객의 별점과 리뷰라는 훈육장치에 종속되고, 그 평점들 역시 인공지능 기계들에 의해 축적된다(100). 그런데 불평하고 항의할 대상이 없고, 단결할 동료가 없는 개인 사업자들은 저항이나 탈퇴보다는 적응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101-2).


그런데 이러한 기술혁신은 일상적 의미의 경제활동, 곧 돈 버는 일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로 퍼져나간다. 플랫폼 내 개인사업자는 일이 끝나면 바로 앱으로 배달 주문을 하고 평점을 남기는 소비자로 바뀐다. 그러나 생산이나 소비로 볼 수 없는 전통적 여가의 영역 역시 이 기술혁신에 종속된다. 과로사회실질문맹’, 낮은 독서율 그리고 그냥 멍하니 영상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가볍게 즐기는 콘텐츠 소비문화의 확대는 모두 동일한 과정을 구성하는 계기들인 것이다(51).


그렇다면 책을 읽고 쓰는 행위를 하는 나는, 우리는 좀 낫나? 나는 단지 공들여 읽은 좋은 책의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리뷰를 써서 알라딘 서재에 남기지만, 이 서재/북플 플랫폼에서 나의 리뷰는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쓰임을 갖게 된다. 나의 지식은 유용하거나 무용한 정보가 되어 누군가의 지출 여부의 판단을 돕고(부채질하거나 억제하고) 나의 성향을 파악하게 하는 빅데이터의 부스러기를 구성하게 된다. “좋아요와 하트를 받으면 선물 받은 기분인데, 플랫폼 경제는 등가교환 논리 바깥에 있던 선물을 주고 받는 기쁜 마음까지도 수량화하고 금전화한다(25). 2000년대 초 앙드레 고르는 『에콜로지카』에서 노동가치론이 이제 더 작동하지 않는 경제의 비물질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짚으면서도 경제의 비물질화가 지식의 상품화에 내재한 어려움을 더욱더 노정시키리라는 비판적 전망을 펼친 적이 있다(https://blog.aladin.co.kr/eroica/2588855). 그 때 고르는 빅데이타를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생태주의 간의 화해불가능성에 대한 고르의 지적은 오늘날 더 절실하게 들린다. 이 논의는 그린뉴딜과 탈성장론의 대립 구도로부터 논의를 풀어가는 3장과 코로나19와 가짜 뉴스를 다루는 4장의 내용들로 연결된다. 저자는 그린뉴딜 해법을 탈성장론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활용하자는 미카엘 뢰비의 주장에 대략 동조하고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현실적인 해법으로 들린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대선 국면을 생각해보니 갑자기 열이 오른다. 탄소중립하라고 하니까 핵발전소 더 짓자는 저들을 보고 있자니,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탈성장은커녕 그린 뉴딜도 참 먼 나라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쓸 말 많았는데, 빡쳐서 더 못 쓰겠다. 그들에게 Don’t look up에서 아리아나 그란데가 부른 Just look up의 가사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Listen to the goddamn qualified scientists
We really fucked it up, fucked it up this time


어떻게 이런 가사를 있나? ㅋㅋ

전기요금 더 낼 테니 핵발전은 그냥 니들 집 안방에서 해라. 나까지 fucked up되게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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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시대의 맑스 - 불평등과 생태위기에 관하여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안민석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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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말연초 정신없던 와중에 시간 쪼개서 읽은 것이 아까워 몇 자 적는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언제였나? 까마득하다.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순전히 『인류세 시대의 맑스』라는 책의 이름, 그리고 저자가 데이비스였기 때문이었다. 신뢰할 만한 저자의 생태 맑스주의적 저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은 틀렸다. 서론을 빼면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1장이 꽤 긴 관계로, 실제로 생태에 관련된 부분은 3, 4장 두 장밖에 안 돼서 전체 분량의 20%에 불과하다. 출판사의 한국어 서명 작명에 낚인 것이다. 영어 책의 원서는 Old Gods, New Enigmas: Marx’s Lost Theory(2018)이다. 그렇다고 내용에 크게 실망한 것은 아니다.


1장과 2장에서 데이비스는 다니엘 벤사이드, 로빈 블랙번, 에리카 배너 등의 논의를 길잡이로 삼아, 교단에서 물러나 꾸준히 읽은 영어판 『맑스 엥겔스 저작선』(MECW)에 흩어져 있는 맑스의 논의들을 재료로 하여, 그가 살고 있는 현재의 혹은 가까운 과거의 정세[국면 또는 콩종크튀르(conjuncture)]에 대한 역사사회학자이자 정치사회학자로서의 맑스의 모습을 충실히 복원하고 있고, 이 점만으로도 이 책은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생태주의자이자 인류세 이론의 선구자로서 크로포트킨의 모습을 정리한 3장은 흥미롭지만, 인상적이지는 않고, 4장은 이 책의 한 챕터라기보다는 에필로그 같다. Inside Out에서 나오는 기쁨이와 슬픔이의 대화처럼 비관적인 데이비스와 낙관적인 데이비스 간의 대화가 시도된다. 나로서는 1장이 제일 재미 있었고, 뒤로 갈수록 흥미는 줄어들었다.


2.

역사적 행위자로서 노동자계급의 지위, 이것이 데이비스가 출발선으로 삼은 지점이다. 이 출발선의 오른 편에 노동자 계급은 (이제) 역사적 행위자가 될 수 없다고 보는 마르쿠제, 고르(32), 마라치(35), 하트와 네그리(36) 같은 이들이 서있고, 왼 편에는 홉스봄, 벤사이드, 블랙번 등과 함께 데이비스가 자리잡고 있다. 이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 단서도 달지 않고 여전히 프롤레타리아가 의미 있는 행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안 될 수도 있지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가 이들의 입장일 것이다. 데이비스에게 21세기 맑스주의의 핵심 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잉여인류의 운명이다(34). 이 문제는 그가 『슬럼, 지구를 뒤덮다』(2006)를 마치며 제기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질문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퍼즐로 정식화된다. “오늘날의 맑스주의가 어떻게 이질적인 사회적 범주들을 자본주의에 맞선 단일한 저항 전선에서 서로 잘 결합하게 할 것인가?’” (36) 이 수수께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16). 1) 계급의식의 형성은 가능한가? 2)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가? 3) 전통적인 노동계급과 이 잉여들 간에 단결된 행동이 가능한가?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이론적 예비작업으로서 데이비스는 맑스의 1848년 이후 저작들에 주목한다. 위의 수수께끼에서 제기된 혁명적 행위자(agency) 형성의 문제는 다른 세 구성요소 - 1) 조직 역량, 2) 구조적 힘, 3) 헤게모니적 정치력 (49) - 로도 정식화되는데, 1848년 혁명과 그 이후의 혁명운동들에 대한 맑스의 저작들은 이 특정 국면들 속에서 행위자의 문제를 잘 포착해낸 탁월한 저작들이다. 데이비스가 초점을 맞추는 맑스의 저작은 구조가 아닌 국면(정세, 콩종크튀르)에 대한 분석들이다(51-54). 1장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러한 맑스의 통찰에 대한 훈고학적 복원을 넘어서, 그 통찰에 기대어 간략하고 다소 난삽하긴 하지만 데이비스가 1838년부터 1921년까지의 고전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훌륭한 국면적 분석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기간을 7개의 시기로 나누어 연대기적으로 고찰한 후(58-67), 이 전체 기간을 가로지르며 7개의 논제들(근본적 사슬, 공장과 노동조합, 대중파업과 노동자통제, 산업도시, 프롤레타리아 문화, 계급투쟁과 헤게모니, 계급의식과 사회주의)에 대한 통시적 분석을 제시한다. 정리는 전혀 깔끔하지 않고, 위의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도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식화에 대한 맑스 자신의 거부감”(51)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1장은 잘 몰랐던 역사적 사례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베벌리 실버의 『노동의 힘』이나 폴 메이슨의 『포스트자본주의: 새로운 시작』과 유사한데, 재미나 생각할 거리라는 측면에서는 더 뛰어난 것 같다.


3.

나중에 잊지 않기 위해 생각할 거리 중에서 두 가지만 정리해두겠다.


(1) 메시아주의

내 인생 중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애정이 가장 컸을 때는 대학교 2, 3학년 때였다. 애정이란 앎보다는 몰입, 헌신, 믿음의 요소가 더 크게 작동하는 어떤 감정일텐데, 그 때는 왜 그랬을까? 아마도 맑스주의 이론과 퇴조가 시작되긴 했지만 학생운동이 여전히 결합되어 있던 공간-정세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행합일이라는 오랜 윤리적 덕목은 이 정세 안에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란 말로 정리되었고, 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며 지냈다. 그 때 우리는 니체가 약한 자가 갖는 원한이라고 조롱한 것을 집단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 날이 오면”,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해방을 향한 진군같은 노래들은 이 원한의 해소, 정의실현의 염원, 혁명의 열망을 정제하여 표현한 것이었다. 감정은 그 감정과 연관된 행동 없는 감정 자체로서, 혼자 했던 공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 사이에는 일치감과 공감이 있었고, 그 공감은 적과의 대면 앞에 극대화되었다. 지금은 과거가 된 그 감정이 움텄던 현재에는 동지와 적밖에 없었고, 미래에는 메시아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잊고 지냈던 이 아스라한 감정의 편린을 떠올린 것은 데이비스가 1840년대의 파리 사회주의 분파 중 하나였던 이카루스파는 메시아적 슬로건을 내세웠고 프롤레타리아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 뢰비트는 맑스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역사적 주체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그가 유대인이므로) 그의 역사 이론에 유대-기독교적 목적론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점 역시 지적된다(47-48). 앨버트 O. 허시만도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서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사상을 이런 식으로 언급했던 것 같다. 이 유대-기독교적 해방 관념은 특히 장인들과 가난한 농민들에게 강하게 어필하였고, 이 상황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담론은 유물론과 민중적 천년왕국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갔다. 이에 대해 맑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자미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화해라는 이카루스적 환상을 거부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45). 훗날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에프는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지위가 메시아냐고 묻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메시아나 메시아주의 같은 모호한 말보다는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라는 과학적인 용어를 더 선호한다고 대답한다(49). 이처럼 메시아주의는 핍박받는 기층 대중들이 저항에 나설 때 자생적으로 생기는 집합 감정이지만, 맑스와 그 후의 맑스주의자들은 밖에서 도래하는 메시아라는 관념을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적어도 말로는.


이처럼 메시아주의는 뢰비트나 허시먼처럼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나,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나, 경원시되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맑스의 유령들』에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주요 모티브로 삼아 자신이 맑스의 정신 중 어떤 것을 계승하고 있다면, 그것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또는 약한 메시아주의라는 어떤 명령 혹은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위의 비판가들이나 맑스주의자들은 메시아주의를 목적론 또는 종말론과 동일시하며 그것을 맑스주의로부터 귀신 내쫓듯 쫓아버리려고 하지만, 데리다에게 이 메시아적인 것은 불러와야 하는 맑스의 유령인 것이다. 그것을 메시아주의로 부르던 약한 메시아적인 것으로 부르던, 이 메시아주의에 대한 상이한 지위 규정간의 긴장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2) 비선형적 주체 형성

데이비스는 벤사이드가 Marx for Our Times에서 제시한 비선형적(non-linear) 맑스해석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면서, 이를 비선형적 프롤레타리아화 (주체 형성)”의 개념으로 연장한다(12, 94, 198). 주체는 점진적으로 형성된다기보다 어떤 사건과 비전이 필요하다. 시에예스가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했던 유명한 자문자답(“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치질서 속에서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이 예시하듯,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모든 것으로 바뀌는 어떤 도약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편적 자유라는 환상으로 둔갑시켰다(38).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주인으로 보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화가 대표적이다(94-96). 데이비스는 맑스가 낭만적 인간주의를 저주하면서, (자신의 과학적 언술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판테온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199). 그 판테온에는 프로메테우스, 스파르타쿠스, 호메로스,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등이 모셔져 있었다. 맑스 또한 이 타락한 세상에 대한 어떤 영웅적 해결책을 긍정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상당히 데리다적인 약한 메시아성의 긍정에 다름 아니다. 사회주의는 실리를 초월한 행위자, 이 비공리적 행위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맑스에 대한 이런 해석은 책의 마지막 부분 4장에서 시도되는 데이비스의 비관적 지성과 낙관적 상상 간의 대화로 현재화되어 재현된다. 비관적 지성은 인류세에 도달한 인간과 그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 부재, 여러 스케일에서 전개되는 생태 불평등이 파멸적 미래를 야기할 것을 경고한다. 반면, 낙관적 상상은 (도시에서의 사적 부와 소비가 아니라) 도시 공간, 자본의 흐름, 자원의 보관 및 대규모 생산 수단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상상한다(291). 이 비관과 낙관 사이에 열리는 것이 바로 맑스주의자가 개입해야 하는 실천의 공간-정세-국면-콩종크튀르일 것이다. 만약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현실주의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메두사의 머리를 주시하는 것처럼, 우리를 그저 돌로 변하게 할 뿐이다”(295). 곧 냉정한 현실주의적 비관이 아니라, 상상력에 기반한 실천이 필요하며, 이 국면 속에서 어떠한 주체로의 도약이 가능해야 하리라는 말이다. 이 맺음말은 앞 부분에서 그가 발리바르를 인용하며 제시했던 맑스의 모습, “영원히 새롭게 시작하는 철학자를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51). 물론 그 맑스는 진정한 맑스가 아니라 우리에게 유용한 맑스이다.


- 번역

전반적으로 잘 읽히는 번역이다. conjuncture에 대한 이론가로서의 맑스의 모습을 부각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다면 적어도 이 conjuncture라는 말에 대해서는 그것을 하나의 개념어로 통일해서 번역해야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국면”, “당대”(12), “접합적 국면”(18) 등으로 다르게 번역된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한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는데, 역자와 출판사가 더 고민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이것 외에도 동일한 개념에 대해서 다르게 번역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다. Holocene완신세”(270)라고 하다가 홀로세”(286)라고 하고, “실질적진정한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상승”(282)이라고 하다가 시너지”(286)라 하기도 하는 등. 또 기존에 통용되는 맑스주의 개념어들을 무시해 읽기 피곤한 경우들도 있다. 불균등 결합발전, 전형, 집적 등을 다 이상하게 번역해 놓았다. 또 코포라티즘을 답합주의”(166), shop-stewards노동조합 대표자로 부적절하게 오역한 것도 있다. 눈에 띄는 몇 개만 지적하겠다.


:

원서 쪽

안민석 국역 (창비)

수정 제안

11: 9

xii

가치의 전환

가치 전형 (transformation)

34: 12

5

진정한 종속

실질적 종속[포섭]

37: 8

7

맑스주의 비평가들이

맑스의 비판자들(Marx’s critics)

48: 20-21

17

비평에 대한 비평

비판에 대한 비판” (Cf. 68)

54: 14

22

추세와 역추세를

경향과 반[상쇄]경향을

56: 18

24

진정한 포섭

실질적 포섭

59: 17

26

설립자이자 과거 쌩시몽의 추종자였던

설립자 쌩시몽의 과거 추종자였던

61: 21-22

28

자타공인 맑스주의자 카를 카우츠키가 작성한 강령이

카를 카우츠키가 작성한 명백히 맑스주의적인 강령이

75: 4-5

40

불균등하고 혼성적인 발전의

불균등 결합 발전의

77: 10

42

사회권력이나

사회적 힘이나

78: 4-6

42

노동이 자본 아래 단순히 형식적으로 포섭되는 경우에도, 자본-관계 일반에 존재하는 신비화가 과거에 그랬던

자본-관계 일반에 존재하는 신비화는 과거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에서 그랬던

81: 21-23

46

벨 에뽀끄 시기와 서구의 쇠퇴시기 사이 당대 역사에 대한 유럽인들의 전망은,

당대 역사에 대한 유럽인들의 전망은 벨 에뽀끄부터 서구의 쇠퇴까지,

85: 17

49

노동조합이 그리 뛰어날 것이 없다

노동조합만큼 뛰어난 것은 없다

92: 21

55

노동조합 대표자

현장 대의원

93: 11

56

프랑스에서는 이런 일이 흔치 않았는데,

프랑스는 특이한(unusual) 경우였는데,

94: 14-15

57

공적 영역과 의회 민주주의가 상정하는

의회 민주주의가 상정하는 공적 영역

94: 15-16

57

비합법성/합법성

부당성/정당성

95: 21

58

불균등하고 혼성적인 발전이라는 뜨로쯔끼

뜨로쯔끼의 불균등 결합 발전

96: 21

59

이 경우에 프롤레타리아트

이 경우에 당시 형성 중이던 프롤레타리아트

104: 3

65

비당파적으로

당과 무관하게 [당의 지도 없이]

116: 5

76

자주관리제

자주관리 공장

135: 8

92

지주를

건물주를 [임대인을]

142: 15

98

부정선출(cooptation)

매수(cooptation)

149: 19

104

프로이센-독일 전쟁이

프로이센-독일에서 전쟁이

166: 2

118

담합주의

코포라티즘

170: 2

121

언어로의 전환

언어적 전환

172: 1

123

안보 기관을

정보 기관을

172: 11-12

123

이는 통상 동아시아의 발전에서 문예가 기여한 간주되는

이는 선행 연구들이 통상 동아시아의 발전에 기여한 간주하는

177: 1

127

자가당착

이율배반

179: 12

129

보호

보호무역

180: 11

130

자본 집중의

자본 집적(concentration)

[Cf. 정치경제학에서 집적과 집중(centralization)은 구분함]

191: 18

140

명백한

현상적인(apparent)

199: 12

146

범위다.

영역이다.

238: 14

178

중간 단계

중범위(middle level)”

250: 20

187

자연적점진적

자연적불가역적(progressive)

262: 21

197

한국인들의

한반도의 (in Korea) [그 때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269: 14-15

201

작품의 분위기로 봤을 때, 이 장면은 자기 자신과의 논쟁,

작품의 정신(spirit)을 담은 이 장(chapter)은 나 자신과의 논쟁,

281: 24

211

기후변화를

현상유지를

282: 21

212

해수면 수위의 절정

수자원 고갈 정점 (peak water) [286 1행에서는 제대로 번역]

314: 12

236

다양하다는

가변적(variable)이라는

326: 23

오트리아

오스트리아

344: 16

Rogers

Roger

351: 11

20세기 중반부터는

19세기 중반부터는


- 이 책을 보고 읽고 싶게 된 글

1)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2) 율리우스 푸치크, 『교수대의 비망록』

3) 다니엘 벤사이드, Marx for Our Times

4) 칼 뢰비트, 『헤겔에서 니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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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노중기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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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여 년 동안 한국의 노동체제 변동이라는 주제로 한 우물을 파온 노중기 선생이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여러 지면에 발표한 열세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1부에서는 87년 노동체제와 그 전후의 노동체제의 성격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1, 2, 3장은 모두 대상 시기를 소시기로 구분하여 노동체제 변동의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97년 이후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성립을 다루는 4장은 발표 당시인 2006년에도 해당 노동체제가 지속 중이어서 그런 지, 소시기 구분은 없었다. 1부에 소개된 노동체제 변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1) 군부 독재기의 억업적 배제 체제 (1961-87), (2) 1987년 체제 (1987-1997), (3)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 (1997-)로 나눠볼 수 있다. 1부는 술술 읽히는 데에 반해서 지은이의 주장이 이제는 너무 평이하게 느껴져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나마 좀 흥미로웠던 부분은 3장에서 1960-70년대의 노동체제를 “국가 코포라티즘의 배제적 하위 유형”으로 규정했던 최장집을 비판하는 부분이었다. 지은이는 최장집의 이 시도를 라틴아메리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무시한 “과도한 이론화의 한계”를 보이고 있고, 한국노총이 외형적 코포라티즘 기제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체제 규정적 요소”는 아니었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83-87).

1부를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역시 노중기스럽다는 것이었다. 진지하고 맞는 말만 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 아마도 이 중 몇몇 글들을 이전에 읽어보았기 때문에 더 그랬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부를 읽으면서 나의 이런 판단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1996년 이후를 살펴보는 5장부터 10장까지의 글들은 주로 사회적 합의 시도들과 이에 대한 주요 논자들의 이론적 전제에 해당하는 코포라티즘 담론을 겨냥하고 있다. 5장과 10장은 1부의 1, 2, 3장처럼 소시기별로 사회적 합의 시도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경제위기가 그 직접적 원인이었던 노사정 합의 실험은 “노동의 저항 없이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킨다”(233)는 전략적 목표를 지닌 국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경제위기와 노사정위원회는 “노사관계의 자유화•민주화”라는 노동 측의 압력과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이라는 국가•자본 측의 압박 사이에서 해체될 운명에 놓였던 1987년 체제의 종식을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241).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합의 시도들을 코포라티즘으로 볼 수 있는가? 또 신자유주의와 코포라티즘은 양립 가능한가? 사민주의 국가들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제3세계에서 코포라티즘의 이식은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어떠한 결과를 갖고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지은이의 논의는 1부와 달리 아주 흥미롭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한 원론적 논의들(274, 285)을 살펴보면서 이를 “국가의 경제 개입을 통해서 조직적 강제와 동의가 동시에 조직화되는 계급적 타협 체제”(243)로 정의한다. 코포라티즘은 원래 2차 대전 후 “포드주의 체제의 거시적 계급 타협을 유지시킨 통제와 이익 대표의 교환 체제” (309-310)로 인식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코포라티즘은 전통적 사민주의 국가들이 갖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나라들에서 출현하였다는 점에 지은이는 주목한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 모델이나 아일랜드 모델 등을 들먹이면서, 미래 한국 사회 노동체제는 “신자유주의의 길이 아니라면 ‘사회통합적인 노사관계, ‘사회적 합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의 단순 이원론을 고집했던 사회적 합의론자들은 다양한 경로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무시한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305). 지은이의 이 비판은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자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나저나 이전에 읽었던 조영철과 정이환의 책도 그랬지만, 후마니타스 출판사는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길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퇴조 속에서 이 이론적 흐름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도 무척 흥미로운 볼거리일 것이다.] 8장에서는 한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던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경험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제3세계, 특히 동유럽에서 시도된 코포라티즘의 이식 시도들 또한 고찰된다. 그는 서구의 연구들이 “서구 내부의 차이를 강조했으나 제3세계 내부의 차이를 완전히 간과”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코포라티즘의 역사적 조건 상의 차이를 구별한다: “불안정한 민주화 이행과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스페인),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정치 경제적 혼란(동유럽 국가), 경제 위기와 기존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의 연장 (멕시코), 배제적 노사관계로부터의 이행과정(브라질, 칠레, 한국) 등”.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취약한 정권이 행위자들을 전략적으로 포섭해 헤게모니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다는 점 또한 지적된다 (319).

9장에서는 한국과 멕시코의 비교 연구를 통해 코포라티즘이 신자유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섣불리 이식되었을 경우 어떠한 파멸적 결과가 양산되는 지를 경고하고 있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비교들이 시도된다. “국가-지배 정당-공식 노조로 이어진 강력하고 집중적인 권력 체제, 그리고 노동계급에 대한 거의 완벽한 포섭과 통제의 역사”를 갖고 있는 멕시코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와 달리 한국은 “기업별로 분산된 노조 체제, 노동 정당의 부재와 반노동자 이데올로기의 만연, 오랜 국가 폭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이한 역사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모두 “신자유주의 하의 통제의 위기”라는 동일한 구조적 변인을 공유하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위기는 코포라티즘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반면, “한국에서 위기는 사회 협약의 실험을 끊임없이 야기한 힘이 되었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새로운 사회 협약”은 다시 여러 공통성들을 보인다: (1) “사회협약은 실질적 교환 체계라기보다 ‘참여와 협조'라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장치, 정당화 기제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2) “협약은 노동계급에 대한 분할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 (3) “‘협약의 정치’는 ‘국가 폭력’이라는 또 다른 통제 장치로 보완되어야 했다.” (4) “전 과정을 국가가 주도하며 흔히 강압적 수단을 동원해 합의를 도출했다.” (5) "‘사회 협약의 정치’는 모두 신자유주의 정책에 종속된 하위 정책 수단일 뿐이었다.” (358-360) 곧 이들 두 나라에서 사회협약은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의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곧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달 벨트”였을 뿐이다 (347).

1부는 다소 지루했고, 2부는 재미있었다면, 3부는 어떠한가? 3부, 특히 그 중에서도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전망을 다룬 마지막 13장은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본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관한 글 중에서 가장 잘 쓴 글인 것 같다. 또 그동안 전투적 노조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해야 한다는 노중기 선생의 말을 그냥 ‘맞는 말’ 정도로 가벼이 여겼었는데, 이 생각도 바꾸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요 비판 대상은 노동운동 내 국민파로 대변되는 흐름의 ‘사회적 조합주의’ 노선이었다. [사실 난 이 노선 자체에 대해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읽는 시점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전 얼토당토 않은 노동자 항복 선언을 사회적 “합의”로 포장한 “노사민정 합의”는 이 정권에서 노동자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만들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판 ‘사회적 조합주의’는 남아공의 ‘사회운동적 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와 유럽의 사회적 코포라티즘(societal corporatism)의 異種交配”이다 (409).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에 대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연대와 계급적∙대중적 정치투쟁의 원리를 제거했다. 또 사민주의에서는 역사구조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합의주의와 정책 참가만을 수입했다” (409-410).

13장의 서두에서 지은이는 “1987년 노동체제는 노무현 정권 기간에 거의 완전히 해체”된 반면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지난 10년 동안 형성된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위력은 압도적”으로 발전한 변화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맞게 된 위기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극복 방향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9장에서 코포라티즘의 다양성을 살펴보았다면, 이 13장에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역사적 다양성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이것의 세 가지 역사적 기원을 준별한다: (1) 1970-90년대 남아공, 브라질, 한국 등 급속한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경험한 제3세계 일부에서 전개된 “강력한 억압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매우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 (2) 1990년대 중반 이후 비즈니스 노조주의를 비판하면서 전개된 미국 노조 운동, (3) 신자유주의 하에서 “본래의 순수한 경제주의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이 정치적 지향성을 강화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선 유럽 사민주의 노조 운동. 이 일반적 분류 속에서도 그는 한국과 브라질, 남아공의 차이 또한 주목하고 있다 (474).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다양성 때문에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의 사용 범위는 무척 넓고, 그 개념적 경계는 무척 모호하다. 그냥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노중기는 여기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크게 네 가지의 이념적 지향들, 곧 민주성∙자주성∙연대성∙변혁성의 이념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노동운동의 노선”으로 개념적 정의를 분명하게 한다 (476-479).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과거 제3세계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주요 지향은 민주성(조합원의 자발적 가입과 적극적 참가,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감시)과 자주성(노조는 지배 세력의 통치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요구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자주적 기구)이었던 반면, 1990년대 이후 서구, 특히 미국의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강조점은 연대성(노조가 조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 대중과 중간계급 집단과 조직적으로 연대)과 변혁성(사회주의 사회 건설 지향)에 있었다.

지은이는 또 이러한 개념화에 입각하여 1987년 노동체제의 산물인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전투적 조합주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네 가지 요소와 함께 기업별노조 체제 및 그것에 기인한 협소한 경제주의를 동시에 내포한 운동 전략”이었다 (485). 민주노조가 법적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에게 민주성과 자주성의 확보는 당면 과제였지만, 연대성은 “기업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는” “자족적인 노조 활동을 전제로 한 연대”에 그쳤으며, “변혁성은” 과격한 구호와 이념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자유와 국가와 자본의 노조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소극적 내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진단을 통해 전투적 노조주의에 대한 국내외의 상반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87년 노동체제의 구조적 제약은 전자[민주성, 자주성]의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했고 이는 서구의 학자들에게 우리 민주 노조 운동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 반대로 1997년 이후 구조조정 정치과정에서 후자의 측면[연대성과 변혁성의 한계]이 중요해지자 사회적 노조주의 지향의 이론가와 활동가는 전투적 노조주의 전체를 부정하는 오류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487). 이 문장에 대한 각주에서 지은이는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이 사회운동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 귀결은 일본식 기업 단위 노사 협력주의(혹은 미시 코포라티즘)의 아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1987년 체제 하 노동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연발생성이 지금은 비정규 노동자들 일부에서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는 위로부터 지도부의 목적의식적 노력을 매개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운동과 미조직 부문, 비정규 노동자의 현장 의지를 묶는 이중적 전략 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이 새로운 단계 사회운동성의 핵심은 “연대성과 변혁성의 확장 및 제도화”에 있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발전방향을 언급한 것이지만, 그는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과도한 평가 또한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적 모델은 아니”기 때문이다.

13장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는데, 현재의 노동운동이 처한 내우외환을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지은이의 진단과 처방이 대부분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강요되었던 사회적 합의의 신자유주의적 결과의 파괴성이 누적된 지금 지은이의 주장은 더욱 돋보인다. 또 현 정권의 시대착오적 신자유주의 유지 기조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퇴조 흐름은 분명 경쟁력 코포라티즘으로 정리되는 사회적 합의에의 참여 압력의 명분을 대폭 침식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자신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여된 실낱 같은 희망을 실력을 통해 입증하지 못한다면, 지은이의 경고대로 일본의 미시 코포라티즘이나, 과거 멕시코의 국가 코포라티즘, 그리고 현재의 한국노총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행복한 노예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이러한 암울한 전망의 실현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좋은 책에 걸맞는 좋은 서평도 못하고 괜히 현실에 대한 갑갑함만 토로한 것 같아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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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3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9-03-13 23:37   좋아요 0 | URL
^^..님께서도 재미있어 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회운동노조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맨 마지막 장만 보세요. 요즘과 같은 시국에서는 이 책의 주요 비판 대상인 사회적 합의주의 자체가 쟁점이 아니라, 민주노총 자체의 존립 근거가 더 문제가 되기 때문에, 다른 글들은 허벅지 찔러가면서 공부한다고 마음 먹지 않으면 자칫 지루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2009-05-16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7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민주 노조 운동 20년 - 쟁점과 과제
조돈문.이수봉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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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7년 이후 20년에 걸치는 세월 동안 노동운동이 거쳐온 길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글 13편을 모은 책이다. 한두 개의 글을 빼고는 전반적으로 훌륭한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후반부에 실려 있는 오건호와 조돈문의 글은 나처럼 노동운동(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노총)의 주체와 전망에 대한 미더움이 급감하고 있는 이들의 관심을 좀더 붙잡아 두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사실 전망에 대해 더 많은 궁금함이 생기긴 했지만, 언젠가부터 증폭되어온 노동운동에 대한 냉소의 상당 부분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나의 이 냉소가 물론 어려운 과정에서 투쟁에 나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냉소는 아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무력함이 미안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모순과 착시
1987년 6월 항쟁 직후 전국에서 터져 나온 “노동자 대투쟁”은 제도정치 영역에서 확보된 민주화를 사회 전반의 영역과 개별 사업장으로 확장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곧 정치영역의 민주화가 대중투쟁을 통해 독재정권의 반응을 끌어낸 것이었다면, 노동자 대투쟁은 그 정치적 영역의 민주화를 다시 대중투쟁을 통해 확산시켜 (국가와 자본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 유지될 수 있었던) 폭압적 노사관계를 민주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체로 참여한 이 민주화 확장 투쟁에서 민주노조 건설은 당시 노동자들이 당면한 핵심 과제였다. 노동자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자본 측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당시 15.7%에 그쳤던 노조 조직률은1989년 19.8%에 이르게 된다. 수치상의 변화는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그 와중에 기존 한국노총 소속 어용 노조들의 민주노조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나 89년 정점을 이루었던 노조 조직률은 이후 하강을 거듭하며, 2004년에는 11%에 이르게 된다 (354). 수치만 놓고 보아도 민주화 이전보다 더 못한 조직률이고, 내용을 들여다 보아도 민주노조 건설에 성공했던 정규직 노조들이 고용 불안 위협 속에서 비정규직에 등을 돌리고 개별 자본에 종속당한 사례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민주노조의 타락은 분명히 관찰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가속화된 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었다. 신자유주의화의 시발을 언제부터 잡을 것인가는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전반적인 산업구조 조정으로 인해 여성의 노조조직률은 전체 정점인1989년이 아니라 1987년 말 이미 정점(15.3%)에 도달한 후 꾸준히 하락했다는 점(강인순: 354)이나 비정규직 비중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점(김성희: 307)을 보면, 비정규직 증가와 노조조직률 하락의 문제는 민주노조 건설의 성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경제위기 이전에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곧 87년 이후 노동운동은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의 동시진행이라는 모순적 역사경로 속에 발전해 온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민중운동 진영에게나 일반 시민들에게 일종의 착시 현상을 동반하였다 (이수봉: 228; 조돈문: 463). 곧 먹고 살기는 빠듯한데, 군사독재도 무너뜨린 마당에 노동자들이 맨날 파업해서 국가경제가 거덜난다는 자본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일반 국민들이 동조하면서 노동운동에 ‘집단 이기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게 된 것이다.

전투성 게임과 제도성 게임
199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노사관계의 제도화 경향은 국가와 한국노총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준: 88-89; 노중기: 403-405). 국가는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통제권을 새로이 확보하기 위해, 한국노총은 상실한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사정 3자 협의 틀을 필요로 하였다. 자본 측은 국가의 엄호 속에 일방적 우위 관계에 있던 노사관계를 노동 측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이 협의 틀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히 꺼려하였다. 민주노조 측은 이 사회적 합의 실험에 참여와 불참을 반복하였다. 어쨌든 전투성 게임과 함께 제도성 게임에도 노동운동이 참여하게 된 것은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라면 성과였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와 자본에게는 지배와 착취의 정당성을 새로이 확보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

제도성 게임의 장이 전무하였던 87년 당시 노동운동의 전투성 게임에 상대적으로 동조적이었던 시민들은 경제위기 이후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가속화된 사회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더불어 진행된 일방적 정리해고에 대한 생존권 사수 차원에서 저항했던 노동자들의 전투성 게임에는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다 (조돈문: 475-476).

동원과 설득
오늘날 국가와 자본과의 수세적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국민들마저 등을 돌려버린 사회적 고립 속에서 노동운동은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1987년 당시 노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와 사회 민주화라는 대중적 요구의 합치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단결된 노동자의 동원을 통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현재는 국가와 자본의 개별화 공세 속에서 연대, 단결, 조율을 달성하는 것도 어렵고 설령 이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를 통한 노동자들의 동원이 국민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곤 한다. 조돈문(481)은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기업별 노조 체계 아래에서 전투적 노조 운동을 전개해 온 우리 민주 노조들은 ‘동원의 논리’에 익숙하지만 국민 여론을 향한 ‘설득의 논리’ 경험이 별로 없다. 따라서 국민 여론을 견인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전투주의는 보수 언론에 의해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되기 쉬우며, 성공적인 투쟁 동원의 파괴력이 자본과 정부에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시민들에게는 불안을 안겨줄 수 있고, 특히 위치적 권력(positional power)이 큰 네트워크 산업의 경우 불편함을 인내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보수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쉽게 호응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된 노동운동의 문제는 경험 부족과 기업별 노조체계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점은 오늘날 노동운동이 한편으로 동원의 논리에 기반한 전투성 게임을 유발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재편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책임성을 담보한 제도성 게임을 요구하는 민주화 양자 간의 내재적 모순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485-6).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신병현은 사라진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을 새로이 형성해 나갈 것을, 노중기(429)는 (1)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산별노조 건설, (2) 정치세력화, (3)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연대 구축을 핵심 과제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제들은 모두 동원의 주체 형성과 관련되어 있을 뿐, 설득의 논리를 어떻게 증진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함하지 않는다. (노중기는 세 가지 과제 중 정치세력화를 가장 관건적 요소로 꼽으면서, 설득의 논리를 진보정당을 통해 성장시킬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조돈문 식으로 하자면, 동원의 논리와 설득의 논리, 전투성 게임과 제도성 게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사회공공성 투쟁을 통한 새로운 운동 주체 형성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답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글은 오건호의 글이다. 그는 개별 작업장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의 이해를 중시하는 운동으로서 사회공공성 운동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 공공적 서비스는 비록 자본주의 체제일지라도 시장과 이윤 논리에서 벗어나 생산∙공급되어야” 하며, 이 “사회공공적 영역이 시장 논리에 지배되어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진보 운동의 핵심 과제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공공적 서비스는 개인의 ‘구입 능력’이 아니라 ‘생활 필요’에 맞추어 제공되어야 한다”(384)는 그의 참으로 멋진 말은 “고타강령 비판”에서 “능력에 따른 생산과 필요에 따른 분배”의 미래 세상을 그렸던 맑스의 인식을 사회공공 서비스의 영역으로 도입하여 현재의 “시장화∙이윤화 대항투쟁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현시기 노동운동이 설득의 논리를 개발하는 데에, 그리고 진보정당이 재구성을 통해 언젠가 다시 도약하는 데에 있어 사활이 걸린 과제라고 생각한다.

긴장과 약간의 아쉬움
서로 다른 지은이들의 여러 글들이 실려 있고, 상당수의 글들이 이들의 더 큰 저작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초점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책 전체의 짜임새는 근래 본 국내의 편집서 중에서 꽤 훌륭한 편이다. 그런데 글들마다 약간의 긴장이 엿보이기는 한다. 제도성 게임과 전투성 게임을 동시에 슬기롭게 사용해야 한다는 조돈문과 전투적 노조주의는 당시 노동운동의 합리적 대응 결과였다는 노중기 사이에는 극한적인 의견 차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긴장을 감지할 수 있다. 또 개별 글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김성희의 글은 비정규직의 비중 변화라는 측면에서 1980년대 중반이 결정적이었다는 중요한 주장을 제시하면서도, 주요 내용을 각주에 나온 저서를 참고하라는 식으로 넘어가는데, 너무 불친절하다. 신병현은 노동자 계급 형성 과정에서 선진활동가 문화가 노동자 대중문화와 유리되어 엘리트주의로 빠져 하위문화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적 장소들이 사라졌다는 점을 잘 분석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현장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소를 형성해야 한다는 그의 결론은 다소 안이하게 느껴져서 용두사미스러웠다.

이수봉의 글은 도입부터 행간의 뜻을 읽어 달라며 필자로서 독자에게 참으로 무례한 부탁을 하더니, 다소 중구난방으로 느껴지는 글을 썼다. 전반적으로 “짱나”(238)는 글이었는데, 결론은 이거다. “정규직의 이해 관계와 결부된 사회구조 자체의 근본적 변혁, 이른바 혁명을 [정규직 노동자] 자신의 이해로 설정할 수 있다”(254)고. 물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또 민주노총 중앙과 현장 노동자 사이에 끼어 열심히 살고 있는 정규직 현장 활동가들을 탓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이수봉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이진경과 네그리 식의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여 하는 말이 고작 이거라면, 이수봉은 이진경과 네그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난 별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노동의 자본에 대한 형식적∙실질적 포섭을 넘어 “활동 일반이 자본에 의해 기계적으로 포섭”되어 (노동 과정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인간 활동으로부터 자본이 “사회적 잉여가치”를 추출한다는 이진경의 핵심 논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이진경의 논리는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하는 공공연금 조성을 요구하는 오건호의 논리와 훨씬 더 잘 부합한다. 오건호와 이수봉의 글 사이에는, 조돈문과 노중기 사이에 존재하는 실강이 아니라, 태평양 바다가 존재하는 것처럼 읽힌다. 이수봉의 요구대로 행간을 읽자면, 내가 마음이 비뚤어져서 그런지, 민주노총 중앙 책임자의 변명으로밖에 안 읽힌다. 정말 힘들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편히 앉아 투정하듯 비판하는 것이 참으로 호사스럽게 느껴져 정말 죄송하다. 그렇지만 이수봉이 요구하는 징후적 독해를 통해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민주노총 중앙의 변명, 그리고 민주노총이 직면하고 있는 갑갑한 현실과 그의 욕망 사이의 괴리와 그것의 힘겨움일 뿐이다.

사족
나는 ‘노동해방’을 믿지 않는다. 그건 ‘천국’과 같은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이 맑스의 저작에 거의 안 나오듯, 천국에 대한 언급도 성경에 거의 안 나온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깡패짓을 하고 있는 일부 광신도들을 시민들은 외면한다. 혹 “노동해방” 구호도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은 유한자로서 인간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을 찾고 종교에 귀의한다. 혹은 정말 훌륭한 인품을 지닌 종교인을 만났을 때 그를 따른다. 노동자들은 나약한 개별 노동자로서 억울함에 처했을 때 단결하여 계급 운동을 전개한다. 혹은 훌륭한 노동운동가를 접했을 때, 노동운동에 대한 의혹을 조금씩 거둔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노동해방이 있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천국이나 노동해방은 내부자의 동원에는, 특히나 한 때 내부자였다가 동요하는 이들을 다루는 데에는 아주 약간의 효과를 얻을 지 모르지만, 외부자의 설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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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태동 - 민주화, 세계화, 그리고 한국의 복지정치, 사회복지학 총서 80
송호근.홍경준 지음 / 나남출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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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특히 한국의 복지국가에 관한 책 한 권을 본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야말로 문외한이다. 따라서 책에 대한 비판보다는 지은이들의 핵심논지를 정리하는 정도가 이 글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1부에서는 세계화와 복지국가의 일반적 관계에 관한 서구의 이론을 주로 다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화가 복지국가의 재편을 초래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축소로 귀결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주장은 근거없는 낭설이라고 주장한다. 곧 세계화에 대응하는 국가마다 그 나라에 고유한 복지정치를 통해 복지제도가 확장될 수도 있고, 부분수정을 통한 현상유지를 할 수도 있고, 전면축소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곧 미국, 영국, 중남미에서는 축소가 일어났으며, 북구 사민주의국가와 유럽대륙의 보수적 복지국가들에서는 재조정이, 한국의 경우에는 확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103쪽). 


2부에서는 1부에서 소개된 개념적 장치들이 민주화 이후 태동한 한국의 복지국가가 1997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지은이들은 한국이 본격적 복지국가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하더라도 복지국가를 향한 시동은 이미 걸려 있는 상태라고 본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초기형성과정이라는 사정은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복지국가 유형 중 하나로 한국을 범주화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따라서 지은이들은 한국을 일종의 ‘혼합형’ (곧 사회보험의 기본 설계는 ‘보수주의 복지국가’와 유사한데, 그 혜택요건은 ‘임금생활자 복지국가’와 유사하며, 노동시장정책과 공적부조는 ‘자유주의 복지체제’와 유사하지만, 재정부담과 수혜기준은 ‘가톨릭 보수주의 복지체제’와 유사한) 체제로 분류하고, 이처럼 독특한 체제가 존재하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무엇보다도 이는 “민주화와 세계화의 이중적 전환을 거치면서 가족과 기업에의 의존성을 낮추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복지동맹과 반복지 세력의 거부권(veto point) 간의 복지정치의 산물이었다 (111).


1987년 이후, 복지제도는 ‘확대’되었으나, 그것이 초기설계를 넘는 시스템적 개혁은 결코 아니었으며, 경제발전이 국가의 복지역량을 향상시킨 결과로서 나타난 ‘따라잡기적 확대과정’(expansionary catching-up)이며 “초기설계의 성숙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점진주의적 확대”이다 (126, 140-1). 복지확대는 고용연계성과 비정규직의 배제라는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노동시장 분절에 의해 촉진된 소득불평등이 국가복지를 통해 재생산되는 역설적 결과가 초래되었다. 저자들은 이를 한국 복지제도의 “구조적 한계”라 칭하는 데, 세 가지 구조적 한계로 (1) 고용연계적 자격요건, (2) 사각지대의 지속, (3) 취약계층 중심의 사회서비스를 들고 있다. 이 구조적 한계는 애초의 제도설계에 내재된 제약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1990년대의 복지 개혁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데, 이는 비용절감에 목을 맨 국가와 기업이 노동시장의 삼분적 분절구조 - 관리사무직 / 정규직 핵심노동자 / 비정규직으로 분리되어 있는 노동시장구조 - 라는 “구조적 덫” 안에서 가장 강한 정치력을 획득한 정규직 핵심노동자만을 선별하여 복지를 제공하고, 관리사무직과 비정규직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70-71, 311). 1995년부터 불어닥친 대량감원과 해고 바람은 당시 막 정상조직으로 설립되었던 민주노총으로 하여금, 조직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정규직 핵심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해 비정규직을 포기하게끔 한다. 이는 “고용연계성이 강한 제도적 설계 위에 취업자의 50%에 이르는 비정규직이 국가복지로부터 배제된 결과”를 낳게 되며, 이는 당시 민주노총 “조직 결성의 성공요인이었지만, 향후 민노총이 풀어야 할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176-7). 이러한 구조적 한계로 인해 “한국의 복지개혁은 초기설계로부터 결코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정치인, 관료, 시민들에게 장기간 내면화된 복지이념과 의식에 의해 재생산됨에 따라 강력한 경로의존성을 구성하게 된다 (201-2).


이러한 경로의존성이 관철되는 와중에도 한국 사회복지 정책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하나의 전환점”을 통과하는데, 1998년에는 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규모가 11%까지 늘어났으며 이후에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권위주의 시절만큼 축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되었다. 지은이들은 이 과정을 “글로벌 스탠더드의 준수와 그에 따르는 구조조정”을 구실로 삼아 기업들에게 위임되었던 복지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된 기회, 곧 국가가 기업에 위임하였던 복지의 책임을 이제는 가져가야 하는 상황으로 이해한다 (270).


10장에서는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세계적 추세가 한국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위기를 전후한 1996년의 개정 노동법과 1998년 사회협약을 통해 자본 측은 끈질기게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시간제 도입을 통한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를 추구한다. 이에 반해 노동 측은 고용 안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는 교환된다. “자본가는 유연성을 얻고, 노동자는 고용보호를 약속받았다. 바로 이 점이 문제다. 유연성과 고용보호라는 상반된 목표가 어떻게 맞교환 되었는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분절시장을 전제로 해야 비로소 이해된다. 위 두 개의 목표를 맞교환할 때 정규직 노동자들만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비정규직을 유연성 증대의 대상 집단으로 내주고 자신들은 엄격성(고용보호)을 약속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비정규직 비율이 급증하던 당시의 현실에서 자본에게도 그리 불리하지 않은 교환형식이었다. 1998년 중반 이미 비정규직은 취업자의 45%선을 돌파하였다” (289-90).


한국적 복지의 특성인 “고용연계적 복지”(employment-entitled welfare)는 바로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 간의 제도적 분절 고착을 뜻하는 것인데, 노동조합과 기업의 저항으로 인해 분절시장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 민주노총에서 내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는 사회보험의 확대가 필수적으로 수반되는데, 이는 고용주에게는 사회보험 부담금의 증가를 뜻하고, 기업의 고용능력 저하로 이어질 우려가 많단다 (196).

유연노동시장, 관대한 복지제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황금삼각형으로 대변되는 덴마크식 유연안정성 모델과 같은 개혁정치가 한국에서 이루어지려면, 고용연계적 복지제도와 정규직 중심의 보호정책이라는 노동시장제도의 양대 초기 설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노무현 정권 말기 (이 책이 쓰여진 후) 발효된 비정규직 보호법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표하고 있다 (300).


 

마지막 11장 결론에서는 앞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노무현 정권 말기 복지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일별하고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지은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하다. 결론 내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던 이정우 전 정와대 정책실장의 글 (성장지상주의의 폐기와 분배를 통한 성장을 주장)을 인용하면서, 정당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이 먹히지 않는가를 자문하며 그 이유를 당시의 경기침체 (그 때 그게 경기침체면 지금은 뭐냐?)와 더불어 다른 구조적 요인에서 찾고 있다. “복지제도의 성장과 확대를 결정하는 계기가 ‘국가’에 있다기보다 ‘기업과 생산체제’로부터 기인한다는 한국적 특성”이 그것인데, 그동안 한국의 국가는 미래대응적이기보다는 반응적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대기업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이는 국가복지가 “생산체제 변화의 함수”로서, “생산체제의 구조변화가 낳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국가복지의 영역으로 흡수하는 것이 국가의 주된 역할”이었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들은 노무현 정권이 겪었던 저항을 반응적 조치로부터 미래대응적 조치로 복지정치의 기조를 옮긴 탓으로 해석하고 있다. (글쎄?) 

 

서평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간단한 느낌이나 몇 자 적자. 서구의 논의들을 정리한 1부는 다소 지루했지만, 2부, 그 중에서도 6, 7, 10장은 꽤 재미있었다. 지은이들은 한국노총은 “한국노총”이라고 하면서 민주노총은 계속 “민노총”이라고 하는 게 사실 좀 짜증났었는데, 또 막상 노동조합과 긴밀한 연대력을 가진 계급정당이 출현한다면 기업차원의 정치가 국가차원의 정치로 원활히 전환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함으로써 미래대응적 조치들이 가능할 거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예전에 누가 복지국가 공부한다고 하면, “드디어 맛탱이가 갔구만”하고 깐죽거리기도 했는데, 그 때 나한테 그 소리 들었던 그 친구가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걸 알면 뭐라 그럴까? 웃으면서 “그래, 이제 정신 차렸구나”라고 하려나.. 만약 그러면 난 “난 아직도 너랑은 달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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