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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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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잘 써보고 싶은데 쉽지 않은 책. 읽는 내내 생각도 많이 하게 하고, 인용되는 다른 책들도 찾아보면서, 저자가 이 말을 이런 식으로 탁월하게 풀어냈구나 감탄하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은 고사하고 줄까지 쳐놓은 구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책망하게 하는 책. 바로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이다. 책을 읽은 지 꽤 되었는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 안 되어 리뷰 쓰기도 힘들고, 다른 일들이 계속 닥쳐서 미뤄뒀는데, 허접한 생각이라도 몇 자 적어둬야 할 것 같아 억지로 쓰기 시작한다.
1. 비판의 대상과 준거
이 책의 2장은 1970년대 말 “나르시시즘”을 사회현상으로 분석한 유명한 두 저서의 내용에 대한 이의 제기로 시작한다. 그 두 책은 한국어로 번역된 적 없는 리처드 세넷의 『친밀함의 독재』(1977)와 지금은 절판된 크리스토퍼 래시의 『나르시시즘의 문화』(1979, 문학과지성)다. 그리고 생소한 저자들 – 에티엔 라 보에티[『자발적 복종』(1570?, 울력>)], 헬무트 두비엘, 울리히 브뢰클링[『기업가적 자아』(2007, 한울<절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 -의 이론들도 검토된다. 다 훌륭한 책들이겠지만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저자 이졸데 카림이 정리하고 비판하는 것을 그런가 보다 하면서 따라 읽었다. 이 책들에 대한 비판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푸코(92~97, 116, 123~124, 237~241, 264~266)와 슬로터다이크(244~248)에 대한 비판였다.
그녀의 비판의 준거는 알튀세르이다. 그리고 알튀세르가 소화한 프로이트와 스피노자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두 가지 점이 인상적였다. 첫째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이고, 둘째는 프로이트가 1923년에야 가다듬은 초자아(Superego)와 자아이상(Ich-Ideal)의 구분이다(205). 프로이트가 1856년생이니 60대 후반에 이룬 이론적 업적이다.
2. 나르시시즘: 현대 자본주의 작동의 메커니즘
나르시시즘은 심리적 원리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형식이다(61). 프로이트에 따르면, 심리적 원리로서 나르시시즘은 본능이며, “모든 에너지를 자기 자아에 들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42). 이때 에너지가 투여되는 대상이 이상자아(Ideal-Ich)이고, 이는 자아이상의 부분이다(47). 나르시시즘이란 자아이상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의미한다(53, 63). 초자아는 십계명처럼 금지를 명령하지만, 자아이상은 “너는 너의 이상, 더 나은 네가 되기 위해 너 자신을 바꿔야 한다. 끊임없이...”라고 미적 압력을 행사한다(65). 오늘날 나르시시즘의 사회적 형식은 360도 피드백, 상호 평가 시스템, 랭킹 시스템이다. 이는 경쟁을 보편화, 첨예화 시킨다(150). 저자 카림은 전자를 주관적 나르시시즘으로, 후자를 객관적 나르시시즘으로 칭한다. 전자가 “스스로의 동일시를 통해, 스스로의 자아이상 추구를 통해 작동”한다면, 후자는 질서 안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자리에 대한 외부의 인정을 나타낸다. 자아이상은 전자에서는 늘 만족되지 못하는 목표인 반면, 후자에서는 개인을 움직이는 수단이다. “추동과 통제를 위한 수단”(152).
경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핵심 메커니즘이고, “나르시시즘은 경쟁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인인 우리는 우리의 예속이 마치 구원인 것처럼 예속을 위해 싸운다!”(161).
카림은 나르시시즘이 자본주의의 경쟁이 유발한 효과일 뿐만 아니라, 이제 경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고 본다. 자발적으로 경쟁과 평가 시스템을 수용하고, 그에 맞춰 빡세게 업무를 수행해서 같은 처지에 있는 남들보다 앞서나가는 것이 경쟁 저편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수 있겠나?
3. 알튀세르의 호명과 이데올로기
나르시시즘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판별하는 준거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29)
이 말을 처음 읽은 직후에는 책을 읽지 않고 길을 걸을 때에도 이 말을 읊조렸었다. 처음에는 더듬거리다가 어느 정도 입에 붙어서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영어로는 뭐라 할까? 영역을 시도해봤는데, “표현한다”가 걸린다. express가 아니라 represent 같았다. 찾아보니 역시 represent였다.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p. 162.
“표현하다”라는 번역어는 잘 읽히지만 너무 일반적이다. 실재론적 의미에서의 “재현”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represent되는 것이 현실적 실존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과 맺는 상상적 관계이므로 “표상”이라고 옮기는 게 좀더 적확하지 않나 싶다.
이 문장의 출처인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는 『아미엥에서의 주장』(김동수 역, 솔)과 『레닌과 철학』(이진수 역, 백의)에 실려 있다. 20세기 말 어느 시점에 줄치면서 열심히 읽었던 책들이다. 그러나 카림이 인용한 저 문장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카림의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알튀세르 책들은 다시 꺼내볼 일도 없었을 것 같다. 이 책들을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알튀세르는 이 문장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과학/참과 대비되는 거짓 담론으로 사고될 수 없는 것임을,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고자 했고, 카림은 그 유지를 잘 받든다. 우리가 그저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라 하더라도, 그 현실적 실존 조건을 견디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나마 좀 살 만하려면 주체로서의 자신과 세계가 맺는 관계에 나름대로 상상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한 모습의 투사물로서의 신(포이에르바흐)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친히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나아져야 한다고. 바로 이 지점에서 참조점 전이라 칭할 만한 것이 발생한다. 포이에르바흐에서 프로이트로! (내가 만들어낸) 신께서 원하시는 나의 바람직한 모습인 “자아이상”이 내게 속삭인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너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105)
4. 푸코 비판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제10강에서 푸코는 독일 질서자유주의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대조한다. 전자가 시장과 공동체의 동시적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시장논리의 전일적 관철을 강조한다. 전자가 경쟁으로부터의 보호를 강조한 반면, 후자는 경쟁의 보호를 강조한다(84~86).
사람 사이의 관계든 자기 자신과의 관계든, 모든 사회적 관계는 시장의 언어로, 경쟁의 언어로, 즉 하나의 경제적 논리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 이 담론은 기술적인 동시에 수행적이다. ...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이론은 경제 이론이면서 이데올로기다. ... 마치 이데올로기가 아닌 척하는 이데올로기. ... 현실의 관계들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익명적인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말하기는 주관적 차원, 주관적 관점을 의미할 것이다”(88).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임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감시와 처벌』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에 사망 선고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카림은 결국 푸코가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교환하는 인간이 아니라 경쟁하는 인간이 되었으며, 인적 자본이 노동력을 대체하였고,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내적 복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가 되었다(92).
카림의 푸코 비판은 전혀 깔끔하지 않다. 그러나 비판의 요점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상상적인 것의 차원은 몰수할 수 없다”(96). 카림은 “내적 복종이 필요 없다”는 말을 “주체가 필요 없다”는 말로 해석하면서, 푸코가 신자유주의 주체를 마치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것으로 상상한다고 비판한다(94~98). (푸코가? 게리 베커가 아니라?) 호명-사회화를 자극-반응이 대체한다고.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개인의 심리적 기질을 계산하지 않는 하나의 경제 논리라는 꿈은 신자유주의의 환상이다(100).
둘째, 자신의 삶을 기업처럼 운영하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는 합리적이고 주권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시장의 요구에 맞춰야 하는 주권의 모순에 맞닥뜨린다(113). 주권적이어야 하지만, 결국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자신을 부르는 호명에 지배된다. 신자유주의는 이 호명의 존재를 은폐하려고 한다(115). 카림은 (푸코를 계승하는) 브뢰클링의 “현실적 허구”를 자신의 “상상적 호명”과 대조하면서 비판한다(119).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는 상상적 관계가 있어서는 안 되며 오직 시장의 현실만이 있어야 한다. 곧 “그것은 현실의 질서로 위장하는 이데올로기다”(123).
자기 자신의 기업가는 상상적인 나르시시즘적 주체를 신비화하며 시장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121).
카림의 작업은 “한 이데올로기가 다른 이데올로기에 의해 비판되고 폭로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은 이데올로기적 ‘진실’이며,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우리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나르시시즘적 호명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기만”인 것이다(124). 주권적이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가 필요하며, 이 자기 의지는 “대상 됨에서 나온다”(116). “자기가 대상이라는 느낌에서.” 자아이상이 나를 호명하는 것에서.
셋째, 자기 배려의 윤리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다.
윤리란 윤리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윤리적 주체의 생산을 뜻한다. ... 자기 배려를 동력으로 삼는 생활 태도의 규칙인 이 윤리 개념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즉시 발견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배려를 허락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요구하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228~230).
카림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초자아 윤리’라면,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자기 배려는 ‘자아이상 윤리’라고 한다. 전자는 “신을 섬기면서 향락을 포기하는” 부정적인 것인 반면, 후자는 “제시된 이상을 통해” 힘을 제한하기 때문에 더 긍정적 성질을 띤다(240).
기독교 수도원과 대조되는 것으로,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제시한 반면,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제시한다. 카림은 이 두 윤리 모두 오늘날의 상황과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241, 그런데 베버는 물론이고, 1984년에 죽은 푸코가 고대 그리스의 상황과 1980년대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보았던가? 이것이 푸코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나? 그리고 1980년대 중반과 오늘날 2020년대 중반을 같은 시기로 보는 것인가? 나르시시즘에 관해서는 스마트폰 전후 또는 SNS 전후가 완전히 다를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세 번째 비판은 슬로터다이크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마무리된다.
5. 슬로터다이크 비판
카림은 푸코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부적합한 것이라고 하면서 검토의 대상을 슬로터다이크로 바꾼다. 나는 재작년쯤 슬로터다이크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를 5분의 4 정도 읽다 관뒀다. 지금 펴보니, 한국 책은 4부 17장으로 되어 있는데, 꾹 참고 보다 14장에서 결국 포기했다. 그런데 카림 책을 보다 보니, 중간쯤부터 자꾸 슬로터다이크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직성의 명령이... 아니나 다를까 슬로터다이크가 나와서 반가웠다. 잘 몰라서 좋아하고 말고 할 수는 없지만, 전혀 모르는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또 카림이 슬로터다이크 책의 핵심을 아주 잘 정리해줘서 좋았다.
슬로터다이크는 푸코를 변주한다. 카림은 이것이 푸코에 대한 “선택적” 독해라고 말한다(245, 근데 그거 카림 당신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푸코뿐만 아니라 알튀세르도?) 슬로터다이크는 수도원에서의 자기 기술이 세속화됨으로써, 자기관계의 ‘탈영성화’가 이뤄졌다고 본다(242). 수양, 향상, 강화, 요컨대 “트레이닝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배려”는 카림이 이야기하는 “권위가 아니라 이상에서 나오는 호명”으로 인한 개심의 결과다(2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슬로터다이크는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245~246). 슬로터다이크에게 이상의 부름과 수직적 긴장은 그 부름을 받은 개인이 자신을 밖으로 높이 쏘아 올리기 위한 수단이다. 평균과 평범함 밖으로. 그런데 우리는 “평균에 대한 적응과 순응을 요구하기보다 향상을 규범으로 요구하는 자아이상 사회”에 살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 자기 향상은 “현 상태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현 상태, 즉 정상성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247). 곧 이 사회에서 자기 배려는 자발적 복종의 형식일 뿐이다.
이 점에서 슬로터다이크 비판은 위의 푸코 비판과 겹친다. 두 명 다 상상적 차원에 독립적 심급을 부여하지 않고, 오늘날의 현실과 맞지 않다.
6. 그래서 우리의 현실은?
그렇다면 저자가 그리는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자기 기술에 둘러싸여 있다. 단 구속력 있는 좋음의 표상 없이. 좋은 시민의 표상 없이. ... 우리에게는 초월적으로 고정된 좋음도, 순수하게 내재하는 좋음도 없다”(265).
“구체적 개인으로서의 나”만이 “내 행동의 기준점이다”(268).
“자기성의 도취,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의 도취다.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 복종이다. 즉 권능 부여로 체험되는 복종이다”(290)
“우리에게 남은 건 나르시시즘의 이데올로기가 막다른 골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이다”(291).
이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압도하면서도 딥빡을 일으킨다. 막다른 골목에 있다...라고라고라? 하... 참...
7. 푸코 비판의 미심쩍음
재미있게 읽었지만 여러 물음표들이 남는다. 위에 적은 물음표들 중 몇을 대충 추스르면, 일단 저자의 푸코 해석이다. 첫째, 푸코가 게리 베커의 논의를 요약하는 과정을 푸코가 신자유주의를 지지한 증거로 해석할 수 있는가? 둘째, 푸코가 말년에 고대 그리스의 자기배려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이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에서 가능한 대항품행에 대한 어떤 교훈의 도출을 목적으로 했던 것인가? 그리고 셋째, 스승과의 관계에서 “파레시아”는 자발적 복종과는 상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푸코에 대한 선택적 독해 아닌가?
8.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선택적 독해는 푸코에 국한되지 않는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 역시 그러하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는 두 개의 테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카림은 이 중 첫째 테제만을 인용한다. 일종의 취사선택이 이뤄진 것인데, 버려진 두 번째 테제는 아래와 같다.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p. 165.
“테제 2: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갖는다”
알튀세르는 이 두 번째 테제를 통해 “이데올로기는 물질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속에 존재하며, 이데올로기 장치는 물질적 관습에 의해 제한되는 물질적 실천들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 장치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나는 이 부분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맑스주의적 심급이라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언급한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호명이 이뤄지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사회학적·비판적 분석이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 책에서 알튀세르와 그가 의존하고 있는 다른 이론적 자원들 – 스피노자, 프로이트 등 –이 충실히 다뤄지고 있는 것과 맑스의 부재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카림이 알튀세르에게서 맑스를 지워버린 것이다. 맑스가 소거된 알튀세르, 결국 이것이 카림이 선택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절름발이 이데올로기 정의 아닌가? 맑스와 프로이트가 만나서 일으키는 부정합적 긴장이 제거된 후의 매끈함, 깔끔함, 싱거움, 그리고 허탈함. 아마 이것이 책을 읽은 후의 내 감정 아닐까?
9. 자기자신의 경영자 또는 나르시시즘으로부터 고통당하는 자가 아닌 사람들은?
카림은 푸코의 자기자신의 경영자라는 형상을 나르시시즘으로부터 고통당하는 자라는 형상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럴까? 그들은 인구 중 몇 퍼센트에 해당될까?
물론 백번 양보해서 오늘날 나르시시즘의 미적 압력이 전 사회적 범위에서 일반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것이 더 이상 올라섬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도 맞는 말일까? 나 역시 평가당한다. 그리고 좋은 점수를 받고 싶다. 그런데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내 삶이 나아지나? 아니다. 그냥 현재의 자리에 머물 뿐이다.
어렸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다. <패스트 라이브스>의 여자 주인공처럼 열두살에는 노벨상 수상을 꿈꾸었고, 스물넷이 되었을 때는 퓰리처상을, 그리고 서른여섯이 되자 토니상을 받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마흔 여덟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그럴까?
더 이상 올라섬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단지 나이듦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계급적인 문제기도 하다. 학교 졸업 후 사회에 나서는 청년들 중에 과연 몇 퍼센트가 경쟁을 통해 자신의 삶이 개선될 가능성이 있는 커리어에 들어설 수 있을까? 이들에게는 경쟁이 아니라 생존이 더 문제다.
경쟁이 아니라 생존이 문제인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니힐리스트다. 눈만 깜빡이는 최후의 인간, 또는 “네”만 할 줄 아는 낙타, 노새, 나귀, 택배기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카림이 인도하는 막다른 골목에는 스마트폰 보며 “좋아요” 못 받아 안달하는 나르시시스트들뿐만 아니라, 그들 집으로 배달 오토바이를 몰아대는 니힐리스트들도 함께 존재한다. 둘 다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파레시아 없이. 주체에게 상상적 심급을 박탈할 수 없다면 이는 너무 재미없는 그림 아닌가?
더 투덜거리고 싶은데, 나름 진지하게 쓴 책에 이미 많이 투덜거린 것 같아 이만 줄인다. 그래도 결론은 어쨌든 아쉽다. 막다른 골목이라니...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더불어 발칙한 상상력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