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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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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잘 써보고 싶은데 쉽지 않은 책. 읽는 내내 생각도 많이 하게 하고, 인용되는 다른 책들도 찾아보면서, 저자가 이 말을 이런 식으로 탁월하게 풀어냈구나 감탄하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은 고사하고 줄까지 쳐놓은 구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책망하게 하는 책. 바로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이다. 책을 읽은 지 꽤 되었는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 안 되어 리뷰 쓰기도 힘들고, 다른 일들이 계속 닥쳐서 미뤄뒀는데, 허접한 생각이라도 몇 자 적어둬야 할 것 같아 억지로 쓰기 시작한다.

 

1. 비판의 대상과 준거

이 책의 2장은 1970년대 말 나르시시즘을 사회현상으로 분석한 유명한 두 저서의 내용에 대한 이의 제기로 시작한다. 그 두 책은 한국어로 번역된 적 없는 리처드 세넷의 친밀함의 독재(1977)와 지금은 절판된 크리스토퍼 래시의 나르시시즘의 문화(1979, 문학과지성). 그리고 생소한 저자들 에티엔 라 보에티[자발적 복종(1570?, 울력>)], 헬무트 두비엘, 울리히 브뢰클링[기업가적 자아(2007, 한울<절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 -의 이론들도 검토된다. 다 훌륭한 책들이겠지만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저자 이졸데 카림이 정리하고 비판하는 것을 그런가 보다 하면서 따라 읽었다. 이 책들에 대한 비판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푸코(92~97, 116, 123~124, 237~241, 264~266)와 슬로터다이크(244~248)에 대한 비판였다.

 

그녀의 비판의 준거는 알튀세르이다. 그리고 알튀세르가 소화한 프로이트와 스피노자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두 가지 점이 인상적였다. 첫째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이고, 둘째는 프로이트가 1923년에야 가다듬은 초자아(Superego)와 자아이상(Ich-Ideal)의 구분이다(205). 프로이트가 1856년생이니 60대 후반에 이룬 이론적 업적이다.

 

2. 나르시시즘: 현대 자본주의 작동의 메커니즘

나르시시즘은 심리적 원리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형식이다(61). 프로이트에 따르면, 심리적 원리로서 나르시시즘은 본능이며, “모든 에너지를 자기 자아에 들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42). 이때 에너지가 투여되는 대상이 이상자아(Ideal-Ich)이고, 이는 자아이상의 부분이다(47). 나르시시즘이란 자아이상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의미한다(53, 63). 초자아는 십계명처럼 금지를 명령하지만, 자아이상은 너는 너의 이상, 더 나은 네가 되기 위해 너 자신을 바꿔야 한다. 끊임없이...”라고 미적 압력을 행사한다(65). 오늘날 나르시시즘의 사회적 형식은 360도 피드백, 상호 평가 시스템, 랭킹 시스템이다. 이는 경쟁을 보편화, 첨예화 시킨다(150). 저자 카림은 전자를 주관적 나르시시즘으로, 후자를 객관적 나르시시즘으로 칭한다. 전자가 스스로의 동일시를 통해, 스스로의 자아이상 추구를 통해 작동한다면, 후자는 질서 안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자리에 대한 외부의 인정을 나타낸다. 자아이상은 전자에서는 늘 만족되지 못하는 목표인 반면, 후자에서는 개인을 움직이는 수단이다. “추동과 통제를 위한 수단”(152).

 

경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핵심 메커니즘이고, “나르시시즘은 경쟁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인인 우리는 우리의 예속이 마치 구원인 것처럼 예속을 위해 싸운다!”(161).


카림은 나르시시즘이 자본주의의 경쟁이 유발한 효과일 뿐만 아니라, 이제 경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고 본다. 자발적으로 경쟁과 평가 시스템을 수용하고, 그에 맞춰 빡세게 업무를 수행해서 같은 처지에 있는 남들보다 앞서나가는 것이 경쟁 저편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수 있겠나?

 

3. 알튀세르의 호명과 이데올로기

나르시시즘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판별하는 준거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29)


이 말을 처음 읽은 직후에는 책을 읽지 않고 길을 걸을 때에도 이 말을 읊조렸었다. 처음에는 더듬거리다가 어느 정도 입에 붙어서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영어로는 뭐라 할까? 영역을 시도해봤는데, “표현한다가 걸린다. express가 아니라 represent 같았다. 찾아보니 역시 represent였다.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p. 162.


표현하다라는 번역어는 잘 읽히지만 너무 일반적이다. 실재론적 의미에서의 재현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represent되는 것이 현실적 실존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과 맺는 상상적 관계이므로 표상이라고 옮기는 게 좀더 적확하지 않나 싶다.

 

이 문장의 출처인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아미엥에서의 주장(김동수 역, )레닌과 철학(이진수 역, 백의)에 실려 있다. 20세기 말 어느 시점에 줄치면서 열심히 읽었던 책들이다. 그러나 카림이 인용한 저 문장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카림의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알튀세르 책들은 다시 꺼내볼 일도 없었을 것 같다. 이 책들을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알튀세르는 이 문장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과학/참과 대비되는 거짓 담론으로 사고될 수 없는 것임을,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고자 했고, 카림은 그 유지를 잘 받든다. 우리가 그저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라 하더라도, 그 현실적 실존 조건을 견디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나마 좀 살 만하려면 주체로서의 자신과 세계가 맺는 관계에 나름대로 상상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한 모습의 투사물로서의 신(포이에르바흐)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친히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나아져야 한다고. 바로 이 지점에서 참조점 전이라 칭할 만한 것이 발생한다. 포이에르바흐에서 프로이트로! (내가 만들어낸) 신께서 원하시는 나의 바람직한 모습인 자아이상이 내게 속삭인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너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105)

 

4. 푸코 비판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0강에서 푸코는 독일 질서자유주의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대조한다. 전자가 시장과 공동체의 동시적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시장논리의 전일적 관철을 강조한다. 전자가 경쟁으로부터의 보호를 강조한 반면, 후자는 경쟁의 보호를 강조한다(84~86).


사람 사이의 관계든 자기 자신과의 관계든, 모든 사회적 관계는 시장의 언어로, 경쟁의 언어로, 즉 하나의 경제적 논리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 이 담론은 기술적인 동시에 수행적이다. ...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이론은 경제 이론이면서 이데올로기다. ... 마치 이데올로기가 아닌 척하는 이데올로기. ... 현실의 관계들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익명적인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말하기는 주관적 차원, 주관적 관점을 의미할 것이다”(88).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임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감시와 처벌에서 이데올로기개념에 사망 선고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카림은 결국 푸코가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교환하는 인간이 아니라 경쟁하는 인간이 되었으며, 인적 자본이 노동력을 대체하였고,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내적 복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가 되었다(92).

 

카림의 푸코 비판은 전혀 깔끔하지 않다. 그러나 비판의 요점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상상적인 것의 차원은 몰수할 수 없다”(96). 카림은 내적 복종이 필요 없다는 말을 주체가 필요 없다는 말로 해석하면서, 푸코가 신자유주의 주체를 마치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것으로 상상한다고 비판한다(94~98). (푸코가? 게리 베커가 아니라?) 호명-사회화를 자극-반응이 대체한다고.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개인의 심리적 기질을 계산하지 않는 하나의 경제 논리라는 꿈은 신자유주의의 환상이다(100).

 

둘째, 자신의 삶을 기업처럼 운영하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는 합리적이고 주권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시장의 요구에 맞춰야 하는 주권의 모순에 맞닥뜨린다(113). 주권적이어야 하지만, 결국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자신을 부르는 호명에 지배된다. 신자유주의는 이 호명의 존재를 은폐하려고 한다(115). 카림은 (푸코를 계승하는) 브뢰클링의 현실적 허구를 자신의 상상적 호명과 대조하면서 비판한다(119).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는 상상적 관계가 있어서는 안 되며 오직 시장의 현실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현실의 질서로 위장하는 이데올로기다”(123).


자기 자신의 기업가는 상상적인 나르시시즘적 주체를 신비화하며 시장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121).


카림의 작업은 한 이데올로기가 다른 이데올로기에 의해 비판되고 폭로되는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은 이데올로기적 진실이며,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우리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나르시시즘적 호명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기만인 것이다(124). 주권적이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가 필요하며, 이 자기 의지는 대상 됨에서 나온다”(116). “자기가 대상이라는 느낌에서.” 자아이상이 나를 호명하는 것에서.

 

셋째, 자기 배려의 윤리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다.


윤리란 윤리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윤리적 주체의 생산을 뜻한다. ... 자기 배려를 동력으로 삼는 생활 태도의 규칙인 이 윤리 개념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즉시 발견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배려를 허락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요구하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228~230).


카림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초자아 윤리라면,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자기 배려는 자아이상 윤리라고 한다. 전자는 신을 섬기면서 향락을 포기하는부정적인 것인 반면, 후자는 제시된 이상을 통해힘을 제한하기 때문에 더 긍정적 성질을 띤다(240).

 

기독교 수도원과 대조되는 것으로,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제시한 반면,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제시한다. 카림은 이 두 윤리 모두 오늘날의 상황과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241, 그런데 베버는 물론이고, 1984년에 죽은 푸코가 고대 그리스의 상황과 1980년대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보았던가? 이것이 푸코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나? 그리고 1980년대 중반과 오늘날 2020년대 중반을 같은 시기로 보는 것인가? 나르시시즘에 관해서는 스마트폰 전후 또는 SNS 전후가 완전히 다를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세 번째 비판은 슬로터다이크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마무리된다.

 

5. 슬로터다이크 비판

카림은 푸코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부적합한 것이라고 하면서 검토의 대상을 슬로터다이크로 바꾼다. 나는 재작년쯤 슬로터다이크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5분의 4 정도 읽다 관뒀다. 지금 펴보니, 한국 책은 417장으로 되어 있는데, 꾹 참고 보다 14장에서 결국 포기했다. 그런데 카림 책을 보다 보니, 중간쯤부터 자꾸 슬로터다이크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직성의 명령이... 아니나 다를까 슬로터다이크가 나와서 반가웠다. 잘 몰라서 좋아하고 말고 할 수는 없지만, 전혀 모르는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또 카림이 슬로터다이크 책의 핵심을 아주 잘 정리해줘서 좋았다.



슬로터다이크는 푸코를 변주한다. 카림은 이것이 푸코에 대한 선택적독해라고 말한다(245, 근데 그거 카림 당신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푸코뿐만 아니라 알튀세르도?) 슬로터다이크는 수도원에서의 자기 기술이 세속화됨으로써, 자기관계의 탈영성화가 이뤄졌다고 본다(242). 수양, 향상, 강화, 요컨대 트레이닝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배려는 카림이 이야기하는 권위가 아니라 이상에서 나오는 호명으로 인한 개심의 결과다(2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슬로터다이크는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245~246). 슬로터다이크에게 이상의 부름과 수직적 긴장은 그 부름을 받은 개인이 자신을 밖으로 높이 쏘아 올리기 위한 수단이다. 평균과 평범함 밖으로. 그런데 우리는 평균에 대한 적응과 순응을 요구하기보다 향상을 규범으로 요구하는 자아이상 사회에 살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 자기 향상은 현 상태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현 상태, 즉 정상성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247). 곧 이 사회에서 자기 배려는 자발적 복종의 형식일 뿐이다.

 

이 점에서 슬로터다이크 비판은 위의 푸코 비판과 겹친다. 두 명 다 상상적 차원에 독립적 심급을 부여하지 않고, 오늘날의 현실과 맞지 않다.

 

6. 그래서 우리의 현실은?

그렇다면 저자가 그리는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자기 기술에 둘러싸여 있다. 단 구속력 있는 좋음의 표상 없이. 좋은 시민의 표상 없이. ... 우리에게는 초월적으로 고정된 좋음도, 순수하게 내재하는 좋음도 없다”(265).

구체적 개인으로서의 나만이 내 행동의 기준점이다”(268).

자기성의 도취,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의 도취다.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 복종이다. 즉 권능 부여로 체험되는 복종이다”(290)


우리에게 남은 건 나르시시즘의 이데올로기가 막다른 골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이다”(291).


이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압도하면서도 딥빡을 일으킨다. 막다른 골목에 있다...라고라고라? ... ...

 

7. 푸코 비판의 미심쩍음

재미있게 읽었지만 여러 물음표들이 남는다. 위에 적은 물음표들 중 몇을 대충 추스르면, 일단 저자의 푸코 해석이다. 첫째, 푸코가 게리 베커의 논의를 요약하는 과정을 푸코가 신자유주의를 지지한 증거로 해석할 수 있는가? 둘째, 푸코가 말년에 고대 그리스의 자기배려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이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에서 가능한 대항품행에 대한 어떤 교훈의 도출을 목적으로 했던 것인가? 그리고 셋째, 스승과의 관계에서 파레시아는 자발적 복종과는 상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푸코에 대한 선택적 독해 아닌가?

 

8.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선택적 독해는 푸코에 국한되지 않는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 역시 그러하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는 두 개의 테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카림은 이 중 첫째 테제만을 인용한다. 일종의 취사선택이 이뤄진 것인데, 버려진 두 번째 테제는 아래와 같다.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p. 165.


테제 2: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갖는다


알튀세르는 이 두 번째 테제를 통해 이데올로기는 물질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속에 존재하며, 이데올로기 장치는 물질적 관습에 의해 제한되는 물질적 실천들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 장치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나는 이 부분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맑스주의적 심급이라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언급한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호명이 이뤄지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사회학적·비판적 분석이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 책에서 알튀세르와 그가 의존하고 있는 다른 이론적 자원들 스피노자, 프로이트 등 이 충실히 다뤄지고 있는 것과 맑스의 부재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카림이 알튀세르에게서 맑스를 지워버린 것이다. 맑스가 소거된 알튀세르, 결국 이것이 카림이 선택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절름발이 이데올로기 정의 아닌가? 맑스와 프로이트가 만나서 일으키는 부정합적 긴장이 제거된 후의 매끈함, 깔끔함, 싱거움, 그리고 허탈함. 아마 이것이 책을 읽은 후의 내 감정 아닐까?

 

9. 자기자신의 경영자 또는 나르시시즘으로부터 고통당하는 자가 아닌 사람들은?

카림은 푸코의 자기자신의 경영자라는 형상을 나르시시즘으로부터 고통당하는 자라는 형상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럴까? 그들은 인구 중 몇 퍼센트에 해당될까?

 

물론 백번 양보해서 오늘날 나르시시즘의 미적 압력이 전 사회적 범위에서 일반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것이 더 이상 올라섬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도 맞는 말일까? 나 역시 평가당한다. 그리고 좋은 점수를 받고 싶다. 그런데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내 삶이 나아지나? 아니다. 그냥 현재의 자리에 머물 뿐이다.

 

어렸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다. <패스트 라이브스>의 여자 주인공처럼 열두살에는 노벨상 수상을 꿈꾸었고, 스물넷이 되었을 때는 퓰리처상을, 그리고 서른여섯이 되자 토니상을 받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마흔 여덟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그럴까?

 

더 이상 올라섬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단지 나이듦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계급적인 문제기도 하다. 학교 졸업 후 사회에 나서는 청년들 중에 과연 몇 퍼센트가 경쟁을 통해 자신의 삶이 개선될 가능성이 있는 커리어에 들어설 수 있을까? 이들에게는 경쟁이 아니라 생존이 더 문제다.

 

경쟁이 아니라 생존이 문제인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니힐리스트다. 눈만 깜빡이는 최후의 인간, 또는 만 할 줄 아는 낙타, 노새, 나귀, 택배기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카림이 인도하는 막다른 골목에는 스마트폰 보며 좋아요못 받아 안달하는 나르시시스트들뿐만 아니라, 그들 집으로 배달 오토바이를 몰아대는 니힐리스트들도 함께 존재한다. 둘 다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파레시아 없이. 주체에게 상상적 심급을 박탈할 수 없다면 이는 너무 재미없는 그림 아닌가

 

더 투덜거리고 싶은데, 나름 진지하게 쓴 책에 이미 많이 투덜거린 것 같아 이만 줄인다. 그래도 결론은 어쨌든 아쉽다. 막다른 골목이라니...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더불어 발칙한 상상력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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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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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7년경에 이뤄진 구디브와 해러웨이 간의 대담을 싣고 있다. 구디브는 해러웨이의 학생였고, 현재는 뉴욕 시각예술대학 미술사학과의 교수지만, 그때는 아직 교수가 아니었다. 해러웨이가 막 겸손한_목격자@두번째_밀레니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 만나다(1997)라는 기괴한 이름의 책을 펴낸 직후에 몇 번에 걸쳐 이뤄진 대담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두 명은 겸손한_목격자출판 20주년을 기념해서 다시 한 번 더 대담을 하였고, 그 대담은 2018년에 출판된 겸손한_목격자 2판 서문으로 실려 있다. 이 두 번째 대담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그때는 트러블과 함께하기가 나온 직후이기 때문에, 그 글을 본다면 아마도 과거 작업과 현재 작업 간의 연관성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이 책 이야기나 정리해보자.

 

이제 해러웨이에 대해 조금은 익숙해졌나?(싶다). 그녀의 글은 결들이 많아서 다시 읽어도 이전엔 안 보이던 것들이 늘 보인다. 그래서 해러웨이 독서는 공이 많이 들고, 공들인 만큼의 어떤 앎의 수확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저번에 종과 종이 만날 때는 그 기대에 못 미쳤다. 이건 어쩌면 내가 사는 상황과 그녀의 상황의 상이성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책은 2007년에 나온 책이었고, 나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016)를 처음 읽고 그녀에게 매료되었고, 해러웨이 선언문에 실린 두 글(1985/2003)과 대담(2014)을 읽고 설득되었으며, “상황적 지식들”(1987)을 보며 비로소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이해는 또한 새로운 의문을 동반한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에서는 그 질문들에 대한 해러웨이 본인의 친절한 답들이 제공된다. 출판연도가 2000년이므로, 그녀의 20세기 저작들에 대한 일종의 중간결산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서를 한 셈인데, 마음잡고 해러웨이를 알고자 하는 요량이라면 80년대 저작 중 중요한 것,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특히 그 중에서도 3부에 실린 글들을 먼저 읽고 질문을 정리한 후 이 대담집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답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비롯한 21세기 저작들을 보고, 구디브와 해러웨이의 두 번째 대담을 보면 해러웨이 이해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1. 개인사

1장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녀의 성장기다. 이전에 해러웨이를 읽을 때 낯설었던 것 중 하나가 유한성(mortality)에 대한 강조였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이 딱히 학술적 담론의 일부를 이룰만한 대단한 통찰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였다. 그저 해러웨이의 전공이 생물학여서 그 사실을 좀더 민감하게 생각하나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과 지인들(친구/연인)과의 관계가 평범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한쪽의 죽음으로 끝나는 관계는 그녀에게 익숙하지만, 그것이 주는 슬픔이 어떤 이론적 통찰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듯 싶다. 그녀의 회상에는 15년쯤 후 울프와의 대담(2014)에서 보여준 담담함이 아닌 어떤 촉촉함이 느껴진다. 이 촉촉함이 유한한 존재들의 얽힘에 대한 관계적 사유에 깃들어 있는 따뜻함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

 

외국 학자나 문인들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읽다 보면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는 덜한 상황에서 열심히 한다는 것인데, 해러웨이 역시 그렇다. 생물학, 영문학, 철학을 함께 전공하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이 아니겠고, 그런다고 그것들이 어른이 된 후 자신의 작업에 직접적인 자양분을 제공한다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겠지만, 대학 전공대로 살 길을 찾는 것이 힘든 우리한테는 참 부러운 일이다. 물론 나는 그녀를 부러워할 뿐 질투하지는 않는다. 그녀를 존경하고 내 주제를 알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어렸을 때 겁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여자아이였을 뿐이다. 소련과의 핵전쟁을 두려워했고, 하느님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외국에 나가 선교를 업으로 삼는 수녀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대담에는 나오지 않지만, 학업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녀가 만든 이론대로 살고자 노력한다. 이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감사할 줄 안다(114). 이 겸손함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2. 추상적 관념에 대한 알러지, 메타포, 그리고 세속적 실천

2, 3장에서는 해러웨이의 박사논문 Crystals, Fabrics and Fields,영장류의 시각』, 그리고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를 저술할 당시 그녀의 삶과 생각을 짚고 넘어간다. 나는 그녀가 형상(figure)과 메타포에 대해 설명해주는 4장이 제일 흥미로웠다. 형상은 그 자체로 말(words)이 아니며, 비문자적(non-literal)이다(145~146). 그러나 이 형상들은 말로 이뤄진 이야기(story)로 옮겨진다. 그런데 말과 이야기는 비문자적인 형상들의 세계에 대한 문자를 통한(literal) 기술과 묘사뿐만 아니라, 은유(metaphor) 역시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해러웨이가 사실(fact)과 픽션, 물질성과 기호성, 대상과 비유(trope)의 동시성에 주목하는 이유다(141). 따라서 과학 담론인 생물학에도, 곧 생물들의 형상을 관찰하여 기술하고 설명하는 이야기에도 은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이야기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이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들에 문자화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 다른 말로 대상들은 이야기로 얼어 있다(frozen, 178).

 

해러웨이는 말과 언어가 관념(ideas)보다는 육체(flesh)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146). 구디브가 이에 대해 맞장구치면서 인용하는 롤랑 바르트의 구절은 매우 인상적이다. 언어는 피부처럼 다른 언어에 닿는다고, 말들은 손가락을 갖고 있다고. 말은 행위하고, 기호는 하나의 신체와 같은 것이 된다. 곧 해러웨이는 물질성/신체성과 기호성이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148). 더 이상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이 메타포의 문자적(literal) 본성과 상징화의 신체적 성질에 대한 그녀의 감수성은 어린 시절 성당의 성체성사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222). 심지어 우리 몸도 말 그대로 은유라고 이야기한다(178). 따라서 해러웨이의 이야기는 메타포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메타포 이상의 것이다(140). 여러 결들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대상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literal) 기술과 메타포가 그녀의 글쓰기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바로 그녀에 대한 오해가 야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179). 해러웨이의 이런 글쓰기는 추상적 관념을 피하기 위한 포석인데, 학술언어에 익숙한 독자들은 그녀의 글쓰기에서 어떤 추상적 고갱이, 문자로 딱 정리된 핵심을 캐내려고 한다는 말로, 어떤 상황에든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이 잘못된 독법 때문에 그들은 해러웨이를 상대주의자로 오해한다(182).

 

해러웨이는 실재론과 상대주의 간의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그녀 특유의 어휘인 세속적(worldly)”이라는 형용사는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182~183), 나는 그것을 현실의 특정 상황 속에 위치지어진 비전(vision)과 그에 기반한 진솔한 대화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세속적인 것의 반대편에는 목적론과 결정론이, 신성함, 곧 남신뿐만 아니라 여신이, 구세주 또는 미륵불에 대한 희구가, 또는 억압받는 세계를 해방시키는 프로메테우스적 실천의 전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인류는 멸망할 거라는 자조적 초연함(이라고 쓰고 무능함과 무책임, 응답하지 않으려고 눈감고 귀막음이라 읽는다)도 세속적인 것의 반대편에 있을 것이다.

 

3. 회절

구디브는 계속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그녀 특유의 개념과 형상에 깃든 의미를 캐묻고 해러웨이는 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회절(diffraction) 개념이다. 반영(reflection)이 원본(original)을 그대로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개념이라면, 회절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찾아보니 겸손한_목격자@두번째_밀레니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 만나다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개념이고, 훗날 캐런 바라드가 물리학적 통찰에 기반하여 또 새롭게 발전, 변주시킨 개념였다.



 

다음 인용문은 이 책의 169~170쪽에 실린 부분인데, 겸손한_목격자마지막(영문판 p. 273; 민경숙 역, 503)에 실린 것이다.


해러웨이: 회절 패턴은 상호작용, 간섭, 강화, 차이의 역사를 기록한다(170). ... 반영과 달리, 회절은 동일자를 다소 왜곡하여 다른 곳으로 옮김으로써 형이상학 산업을 성장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회절은 기독교 지배로 고통스러웠던 천년의 막바지인 오늘날 다른 종류의 비판적 의식을 위한 메타포로서, 동일자의 신성한 이미지를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낼 메타포가 될 수 있다. ... 회절은 복수의 의미들을 결과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서사적, 회화적, 심리적, 영적, 정치적 테크놀로지이다.

 

랜돌프: 모든 여성의 삶의 기억의 스크린에는 힘센 남성의 형상이 비치는데, 이 곳이 바로 변화가 발생해야 하는 장소다. 나이가 들고 정신적 변화를 거치면서 발생하는 변화를 통해 복수의 자기들(selves)이 하나의 몸에 합체된다. 이 변화는 여기에서 두 개의 머리와 열 개보다 많은 손가락들, 그리고 중간세계의 형이상학적 공간에 존재하는 중심의 인물 형상으로 구현된다. 회절은 미래의 한 구석에 있는 장소, 미지의 심연 앞에서 발생한다. 은하계 물체(matter)의 구조적 패턴이 매그놀리아 꽃 안에서 반복될 수 있다. ... 나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몸(bodies that matter)을 창조하고자 한다. 여성의 현실을 간섭 패턴들로 구성되는 장소인 SF 세계 안에 위치지으면 어쩌면 오늘날의 여성은 동일자의 신성한 이미지와는 다른 어떤 모습, 부적절하고, 기만당하고, 이 세계에는 잘 맞지 않으면서도 마술적인 어떤 존재, 곧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할(emerge, 창발할) 수도 있다. 


동일자의 반영과 재현(representation)이 회절을 통해 창발되는 새로운 의미들과 대립된다. 회절이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있는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성에 대한 이야기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이 회절도 실재론과 상대주의 간의 양자택일을 거부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겸손한_목격자민경숙 역, 63). 이 회절 개념이 또 이번 독서에서 발견한 그녀의 새로운 결을 구성한다. 나중에 더 공부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장은 주로 사이보그와 앙코마우스라는 기술생명정치의 형상들과 인종주의가 깃든 뱀파이어가 다뤄진다. 그런데 겸손한_목격자@두번째_밀레니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 만나다를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읽었다. 나중에 새 번역본이 나오면 읽는 걸로...

 

4. 실뜨기

회절 개념 때문에 리뷰를 중단하고, 한참을 겸손한_목격자를 들춰봤다.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 그런데 랜돌프의 <회절>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 그러니까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여성인간와 앙코마우스실뜨기이야기이다. 실뜨기라면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가 다른 저자들에 대한 자신의 리뷰를 빗대 말한 것이다. 그런데 해러웨이의 훌륭한 학생 구디브는 일반 독자라면 할 수 없는 질문을 한다. 실뜨기는 그저 또 다른 형상(figure)인지 아니면 방법론인지 묻는다(241). 해러웨이는 이에 대해 그것은 소문자 methodology, 작업방식이면서도 그 작업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이면서 결투가 아닌 방식으로 관계를 맺기 위한 형상이라는 멋진 대답을 제시한다. 상대방을 적으로 취급하는 결투의 방식이 아닌 우정어린 대화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결과 전투 메타포에 대한 라투르의 지나친 의존을 비판하면서, 그녀가 계발한 대안적 스토리텔링이다(242-243). 내가 라투르보다 해러웨이를 더 좋아하는 이유에는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5.

이제는 친구가 된 선생과 학생이 함께 저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이든 해러웨이 교수님이 요즘 학생들은 너 때랑은 참 다르다고, 난 이제 얘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정한다. 난 이들의 대화가 너무 실감이 난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듯, 구디브는 겸손한_목격자2판에도 해러웨이와 함께 훌륭한 대담을 실었다. 다나 여사의 건강을 빌지만, 아마 훗날 누군가가 그녀의 전기를 써야하는 시간이 온다면 구디브는 가장 훌륭한 후보 중 한 명일 것이다. (별점은 번역과 무관하게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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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과학
샌드라 하딩 지음, 이재경, 이박혜경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0. 2023년 연말의 득템


연말, 곧 한 해의 끝이 시작되었다. 약속들이 잡힌다. 약속이 퇴근 시간에 바투 잡히지 않으면 지하철역 너댓 개의 거리는 걸어간다. 12월 역대 최고 기온을 경신하고 있는 올 연말은 더 걸을 만하다. 걸음은 빠른 편이다. 시간이 남는다. 어디서 삐댈까? 고민하며 속도를 늦춰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오. 그런데 헌책방이다. 큰 기대 없이 들어간다.


앗! 그런데... 대물을 낚았다!
짜~잔~



알라딘 중고시장에서도 고가로 거래되는 샌드라 하딩의 <페미니즘과 과학>이다. 2002년에 출판되었다 절판된, 정가가 1만2천원인 책.
서가에서 책을 뽑아 고이 사장님께 드렸더니, 대뜸 "5천원만 주세요."
대박! 땡큐 사장님~
사실 저 짧은 시간 동안 마음 속에서는 사장님께서 알라딘 중고가격 검색하시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ㅋㅋ
이 날 밤 나는 그날 있었던 마음 쓰이는 일과 다음날 해야 할 일을 다 잊고, 코알라가 되었다.


2. <사이보그 선언>(1985)과 <상황적 지식들>(1988)의 징검다리

술이 깬 다음에야 책을 찬찬히 읽기 시작한다. 일단 해러웨이 나오는 부분만 살펴봤다.
4장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남성중심주의"와 6장 "페미니스트 경험론에서 페미니스트 입장론적 인식론까지"는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의 4장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1981)에 대한 논평이다. 6장은 해러웨이보다 훨씬 더 명확한 어휘와 논리로 맑스주의를 비판한다. 더 찬찬히 봐야 하겠지만 일단 말장난하지 않고 진지해서 마음에 든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7장 "다른 '타자들'과 정체성의 분열"인데,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1985,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의 8장)에 대한 매우 진지한 논평이다. 일반 독자라면 딱히 눈치채지 못했을 해러웨이의 변화가 지목되고, 해러웨이와 자신의 일치점과 차이점에 대한 고찰이 인상적이다. 해러웨이는 하딩의 이 논평에 응답하며, "상황적 지식들"(1988)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의 9장으로 실려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3. 밑줄을 긋다가


절판되서 못 구하게 된 이 책은 그야말로 페미니스트 고전이라 칭할 만하다. 책을 다 살펴본 것은 아니어서 번역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해러웨이 번역은 워낙 어려우니 너무 극악무도하지 않으면 이해해주고 넘어가도 된다. 어쨌든 이 책은 내게 너무 귀하다. 나보다 더 진지하게 페미니즘과 과학, 해러웨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완전 새 책인데, 괜히 줄 그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이미 몇 개의 표시를 한 다음에야 들었다. 아뿔싸!) 

   


도나 해러웨이는 인본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설명에서 근본적인 세 가지 경계들이 현대 사회 경험 속에서 깨져 버렸다고 지적한다. 첫째,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는 완전히 깨어졌다. 놀이공원으로 보내지지는 않았다 해도 독특성의 마지막 교두보는 오염되었다 - 언어, 도구 사용, 사회 행동, 정신적 사건, 어느 것도 인간과 동물의 분리를 진정으로 확실하게 이루어 내지 않는다." 둘째, 현대의 기계들이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정신과 육체, 자생적인 것과 외적으로 고안된 것 사이의 차이와, 유기체들과 기계들에 적용되곤 하던 다른 많은 구분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의 기계들은 불온하게도 살아 있고, 우리 자신은 자력으로 움직일 힘이 놀라울 정도로 없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경계의 실패의 부분집합은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것 사이의 구분의 부정확성의 증대이다(Haraway 1985, 68-70). - P250

그러나 ‘인간‘이라는 인본주의적 가공물은 동물이나 기계와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혹은 물리적인 것들과 비물리적인 것들이라는 구분 가능한 요소들로 - 이러한 것들이 물질과 정신인지, 몸과 영혼인지, 신경물리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인지, 내분비학적인 것들과 문화적인 것들인지 -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질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의 계, 특 ‘여성‘을 본질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 페미니스트 경험론 및 입장론의 정당화 전략들이 호소력을 갖는 사회 경험을 한 ‘여성‘은 없고 대신에, 여성들이 있다. 즉 멕시코계 미국 여성들과 라틴계 미국 여성들, 흑인, 백인, 한국 전자 공장에서 일하는 ‘해외의‘ 여성들과 카리브의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있다. - P250

‘유색인 여성들‘이라는 개념 속에서 해러웨이는 그것이 되살려 내는 많은 미국 페미니즘 이론이나 인본주의 담론들 속에서처럼 - 통합의 정치학으로 본성화되거나 본질화된 정체성보다는 ‘대항 의식(oppositional consciousness)‘과 연대의 정치학에서 나온 정체성과 세계에 대한 관점을 본다. - P250

나아가, 그녀는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이 기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대상 관계 이론들, 그리고 여성을 남성적 섹슈얼리티의 희생물로 보는 급진적 페미니즘 속에 우리 시대에 적절한 정치학과 인식론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다고 본다. 이 세 가지 분석들 모두 자아 본래의 통일로 복귀하는 것이 ... 바람직하다는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해러웨이는 이렇게 계속 주장한다. 우리의 ‘분열된 정체성들(fractured identities)", 말하자면 흑인 페미니스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레스비언 페미니스트 등을 포용함으로써 생겼던 설명상의 이점을 보라. 본성화되고, 본질화되고, 특유의 ‘인간적인‘ 것들이라는 가공물에 대한, 그리고 이러한 가공물에게 행해진 왜곡, 전도, 착취, 억압에 대한 우리의 반대 속에서 정치적 인식론적 연대를 구하면 왜 안 되는가? 페미니즘 관점의 영원한 당파성을 인식함으로써 열려진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구하면 왜 안 되는가?

- P251

해러웨이의 주장은 서구 인본주의의 기본적인 금기들을 광적으로 훼손하고서 나온 지식 주장들만을 정당화하는 인식론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페미니즘 입장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대항 의식‘을 가진 - 정확히 서구 과학의 정신적 동력이었던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를 갈망하는 것에 대한 반대 - 정치적 투쟁에서 나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다. ... - P251

이러한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에 대해서, 우리는 근대 과학의 정당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흔히 제기되는 인식론의 가정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가정들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식 주체‘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은 우리의 비본질적이고, 비본성적이고, 조각난 정체성들과 ‘본래의 통일성‘에로의 복귀의 망상에 대한 거부이다. 그러나 지식 주체들은 분리되었지만 세계는 하나가 될 수 있다. 본질적인 이분법들로 구성되어 있는 밖의 ‘하나의‘ 세계에 대한 가정에, 설명을 통해서 이것을 다시 연결시키는 것이 과학의 일인데, 대조적으로 대항 의식의 종류만큼 상호 관련되고 부드럽게 연결된 많은 현실들이 있다.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를 말하려는 목표를 포기함으로써, 대신에 우리는 페미니즘 연구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당파성을 포용하는 것이다. - P252

해러웨이는 페미니스트 입장론 전략(feminist standpoint strategy)과는 분명히 반대로 설명을 전개하지만, 나는 그 설명이 입장론 전략의 두 가지 주요 요소들을 유익하게 통합시킨다고 생각한다. 첫째, "누가 이야기를 가졌는가(who‘s got one)"에 대해서 입장론적 인식론보다 해러웨이의 개념이 인종과 젠더 지배의 상호 관련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둘 다 대항 의식의 형성에 의존하고 있다. 둘째, 많은 주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대조적으로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입장론적 접근들처럼 매우 정치적이다.(각주 42. ... 해러웨이는 그녀가 탐구하는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도덕주의와 전위 정치학을 피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며, 특정한 종류의 도덕주의를 포용하는 것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 그것이 많은 ‘부모격의‘ 담론과 불일치를 보이는 것도 역시 여기서이다. - P252

내가 보기에, 해러웨이의 분석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적 가정들 안에 너무 갇혀 있기 때문에 약해진다. 이것은 사실상 정치경제학에 대해서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그녀의 노골적인 가정 속에서 알 수 있다. 그녀는 원리상 발달심리학은 역사 제도의 규칙성과 기저의 인과적 경향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또한, 우리가 처음으로 급여를 받았을 때나, 여성이라면 처음 성인으로 사회적 이익을 위해 성적 호의를 교환하기 시작할 때라야, 우리는 독특한 사회적 인간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 P25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러웨이의 공헌을 포함하여)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지 ‘죽은 것들의 역사‘, 즉 ‘남성‘, ‘그의 문화‘, ‘그의 지식‘ 그리고 그의 본성화되고 본질화된 ‘여성‘ - 인본주의 과학이 만들고 근대적 형태로 유지하는 데 분명한 역할을 했던 그 개념들-의 역사 그 이상의 것들을 탐구하는 데에 풍부한 개념적 도구들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강력한 내부 긴장을 발생시킨다. 즉 입장론적 인식론들은 포스트모던주의 인식론들이 위험한 거짓 이야기라고 여기는, 우리 자신과 세계에 관한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를 말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입장론적 인식론이 당파적이긴 하지만 ‘덜 거짓된‘ 이야기들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모더니스트 조상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을까?

승계 과학 프로젝트들을 포기하는 문제는 페미니즘 이론이나 페미니즘 정치학이 가부장제 이론 및 정치학에 대해 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 P253

... 만일 인본주의를 곡해함으로써 이익을 보는 우리 서구 수혜자들이 - 많은 페미니즘 사상가들도 이러한 수혜자들이다 - 분열된 자아의 대항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 종의 대다수 성원들을 위한, 단지 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당파적인 과학의 이론화에 참여하겠다면, 우리에게는 우리들 대부분이 품어 왔던 것보다 더 강고한 연대의 정치학이 필요하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우리가 이익을 얻고 있는 구조적 인종 차별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입장론적 이론가들이 지적하듯이, 대항 의식은 "모두가 참여하게 된 사회 관계의 표면 아래를 보는 과학"만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으로부터만 자라날 수 있는 교육"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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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8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8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록비 2024-02-07 0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구해보고 싶었는데 부럽네요 ;;;

2024-02-08 0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9 0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9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9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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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서평을 써야지 다짐하고 앉았다. 다 읽는 데 한 달 좀더 걸린 것 같다. 중간쯤 읽을 때에 가끔 가는 꽤 큰 전통시장에서 송이버섯 구경을 하면서 높은 가격에 입맛만 다시기도 했다. 갓이 핀 송이는 더 쌌지만, 그 가격도 내게는 벅차 포기했다. 만약 그때 송이버섯을 살 여유가 있었다면 좀더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ㅋ 처음엔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중엔 계속 똑같은 이야기 같아서 지겨웠다. 소위 포스트휴먼 인류학도 그저 그렇다.


1. 주변자본주의에서의 구제 축적

애나 칭은 송이버섯 채집현장에서의 참여관찰과 심층면접에 기반해서 버섯 채집인, 구매자, 중개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자연 존재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자 하는 인류학적 방법을 성실하게 실행한다.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모두에 대하여 귀기울여 듣기와 알아차리기의 기술을 실행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그녀가 머리속에 갖고 있는 패치(patch) 자본주의의 밑그림에 기반하여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재현한다. 패치는 어떤 장소에 자리잡고 있는 얽힘의 배치(assemblage, 56~61)이고, 이 배치들은 상품사슬에 의해 연결된다. 상품사슬의 각 마디에서는 일종의 번역이 이뤄진다. 여기에서 번역은 라투르가 정화의 대립항으로 쓰는 번역과는 조금 다르다. 상품사슬의 상류에서 번역은 야생의 노동과 자연이 자본증식 과정에 투입되어 조율되는 과정을 가리키기도 하고, 하류에서는 상품이 선물로 바뀌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칭은 상류의 번역을 구제(salvage)”라는 말로 포착하고자 하는데,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겠는데, salvage구제로 옮기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딱히 대안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이 송이버섯이 채집되어 구매인에게 넘겨지는 구제 축적의 장소는 자본주의의 내부인지 외부인지가 애매하므로, 주변자본주의(pericapitalism)라는 그녀만의 용어로 불리운다. 칭은 그곳에 단일경작 플랜테이션 농장의 임금노동의 규율과 확장가능성(scalability)과는 대비되는 채집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해석한다. 이 자유는 그 순간 그 장소에 존재하지만, 상품사슬에 편입되면서 송이버섯이란 비인간 존재도 소외를 겪는다.


2. 교란과 오염으로 함께 만드는 다종의 세계 만들기

미국, 중국, 일본 등의 송이버섯 숲의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교란과 오염을 자연과 송이버섯에 해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미국식 이해가 오히려 그것이 송이버섯 키우기에 도움이 된다고 이해되는 일본식의 이해와 대조된다. 중국 윈난성에서는 이것이 절충적인 방식으로 실행된다. 같은 윈난성에서도 티벳 채집인이 한족 구매자에게 버섯을 판매하는 과정에는 열띤 흥정이 존재하지만, 채집인과 구매자가 모두 이족인 마을에서는 신뢰와 장기적 관계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흥정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해러웨이와 카옌의 관계 같은 것, 곧 마굴리스의 이론을 발전시킨 공동발생 이야기의 연장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얽히면서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고전파 정치경제학과 집단유전학의 개체주의적 전제가 비판된다.


3. 잠복되어 있는 공유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중심에서건 아니면 안팎의 경계가 불확실한 주변자본주의에서건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칭은 이 제도화된 소외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얽힘의 일시적 순간들에서 잠복해 있는 공유지(latent commons)”의 가능성을 탐색한다(450~452). 꼭 있으라는 보장도, 꼭 더 좋으라는 보장도, 구원의 보장도 없지만 이 잠재적 공유지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가 함께 여기에서 만들어가는 희망의 과정이다.  


큰 꿈은 꾸지 말되 포기는 하지 말자. 뭐 이런 이야기 같다. 일상 속의 작은 희망, 그래그거 중요한 거다. 에효


4. Anti-ending??

연구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는 글들은 보통 결론 대신 결론에 대신하여같은 이름의 결말부로 끝나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런데 이 책처럼 마지막 장 직전 챕터인 20장의 제목이 “Anti-ending”인 글은 처음 본다. 이 책은 끝맺기를 거부한다(503). 나는 대체로 열린 결말로 끝나는 서사구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도, 영화도. 왠지 저자가 내지 못하는 결론을 독자, 청중, 관객에게 미룬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도 그래서 끝부분이 좀 실망스러울 뻔했다. 마지막 부분에 인용한 글이 르 귄의 「소설의 운반 가방 이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https://blog.aladin.co.kr/eroica/14149146#Comment_14149146)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 책의 독서경험은 나의 고정관념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정형으로 제시한 시작, 중간, 끝이 있는 이야기에 반대하며, 오우로보로스가 상징하는 원환의 이야기를 긍정한다. 칭이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인용한 르 귄의 스토리는 실뜨기가 되어 해러웨이의 손으로 넘어간다.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 제2장을 보라. 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책은 끝나지만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계속된다. 포스트휴먼 인류학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너무 지루해져서 별 네 개 줄까 하다가 르 귄 이야기로 끝나서 별 다섯 개다.


역자는 매우 훌륭한 번역을 하셨지만, 칭이 인용한 르 귄의 이 글 맨 앞 부분을 오역했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이수현 역, 황금가지) 297쪽이니 찾아보시기를…. 번역에 관해서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다. 정말 훌륭한 번역이다. 아무나 이렇게 유려하게 못한다. 그러나 putting-out내놓기로 번역하면 안 된다. Putting-out system(영어판 pp. 114~115, 한글판 214)은 보통 선대제(先貸制)로 번역한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비롯하여 경제사 책에 산업혁명 이전의 자본주의 관계의 등장을 이야기할 때 빈번히 나오는 개념이다. “주변자본주의의 구제축적 이야기를 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인본주의적 개념화라고 깔보기 전에 말이다. 짜잘한 이의제기들을 더할 수 있지만, 역자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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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역자의 번역을 신뢰하지 않는다. 한 번 마음이 삐딱해졌기 때문일까? 


"가슴풍만하고 성기당당한"... 원래 이런 말이 있나? 나만 모르나?

여러분, 이 말의 영어가 짐작이 되나요???


내 대안적 번역이 물론 틀릴 수도 있다.




19쪽 18행: 전문가 회의 -> 학회 학술대회(professional meetings)


23쪽 17행: 가슴 풍만하고 성기 당당한 존재를 -> 좋은 신체(능력, 재능)를 타고난 존재를


가슴 풍만하고 성기당당한? "well-endowed"가?

이 뭔 변태적 번역인가? 



41쪽 13행: 그는 더 나아간다. -> 그녀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44쪽 15행: 그러나 늑대와 개의 대립은 농담조가 아니다. -> 그런데 이 늑대와 개 대립 이야기는 재미없다 (농담인 것 같은데 거슬린다). 


47쪽 19-20행: 지상의 생명체는 형상으로든 일시적 존재로든 -> 지구 생명체의 형태와 시간성(temporality)은

=> 역자가 temporal과 temporary를 혼동했음; temporal이라는 말을 모를 수도.. 


63쪽 16-17행: 먼지를 -> 오물을


63쪽 24행: 살아있는 자본의 체제에 -> 생명자본 체제(the regime of Lively Capital)에


74쪽 22행: 인간의 노예가 -> 인간 노예가


123쪽 2행: 검증된 삶 -> 검사되는/시험되는 생명(examined lives)


131쪽 16행: 개 이빨을 -> 송곳니를


139쪽 1행: 개 활동가들이 있는 광경이나 -> 개활동가들의 현장이나


141쪽 16행: 리스트서버 -> 리스트서브


196쪽 6행: 책략가 -> 트릭스터(trickster)


315쪽 2행: 사체-절도는 -> 신체 강탈/전용(body-snatching)


341쪽 1행: 시골 캘리포니아주 -> 캘리포니아주 시골


348쪽 1-2행: 떠돌이 고양이들이 추적용 번호를 부여받고 백신 접종 의무가 있다는 것 외에 커뮤니티 칼리지[전문대학]의 학생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간단한 대답으로는 양쪽 모두 역사적인 상황 속의 테크놀로지 속에서 내부-작용을 통해 "교육"된다는 점이다.


What do feral cats have to do with community college students, besides having numbers assigned to them for tracking purposes and being required to get vaccinations? The short answer is that both classes of beings are "educated" through their intra-actions within historically situated technology. (281)


추적용 번호가 부여된다는 것과 백신 접종 의무가 있다는 것 말고도 길고양이와 커뮤니티칼리지 학생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선 간단한 대답으로는 두 집단 모두 역사적으로 위치지어진 테크놀로지 내부에서 발생하는 내부-작용을 통해서 "배우는" 존재라는 것이다. 


348쪽 6행: 가축 -> 집에서 키우는 동물(domestic animals)


350쪽 11-12행: 분리주의자와 미국이 지원하는 마닐라 혁명운동 양쪽 모두의 억압에 의해 죽었다.


... students who were mostly dead a few years later from the repression of both separatist and revolutionary movements by the US-supported regime in Manila. (p. 283)


-> 미국이 지원하는 마닐라 정부가 분리주의 운동과 혁명운동 양자 모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360쪽 2~12행: 나는 이 대리자를 ... 열림 속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사실 나는 이 대리자를 "퀴어"라 부르고 싶고, 보통의 이성애자들에게도 이게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에 약간의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서 그친다면, 피치니니는 자신의 작품 이미지 사용을 허가한 것을 분명히 철회할 것이다. 여전히 이 대리자는 소화불량에 양분을 공급하는 창조물로 남아있다. 그것은 적절한 장소와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소화불량이다. 사실 퀴어 이론이 말하는 전부가 장소와 기능의 적절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제자리에서 벗어난 양육의 속삭이는 달램(mutter)/문제(matter)이다. 이 양육의 달램/문제가 바로 소위 재생산이라는 여성을 정의하는 기능의 (충분조건은 아닐지 몰라도) 필요조건의 조각(cut)이다. 제자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개는 위험에 처하는 것임을, 그러나 때로는 개방된 공간, 그러니까 아직은 가치와 의도가 대못을 쳐서 폐쇄하지 않은 공간에서 자유롭다는 것임을 뜻한다.  (p. 292)




380쪽 27행

백정 -> 정육업자(butcher)


butcher는 오늘날 정육점 주인이나 점원을 다 가리키는 말인데...

프랑스 센강 하류에서 고기 잘라 파는 사람을 "백정"이라고 번역하면 어떡하나? 그 사람이 도살을 하건 안 하건, 이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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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02-07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well-endowed 번역에 웃고 갑니다. 오래 기다리던 번역인데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로군요.

에로이카 2024-02-08 03:48   좋아요 0 | URL
네, 여러모로 아쉬운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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