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트랜스 소시올로지 4
도미니크 레비, 제라르 뒤메닐 지음, 김덕민 옮김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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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비판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서두에서 지은이들은 분석 영역과 방법의 다양성이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이자 동시에 난점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마르크스주의적 저작으로서 이 책이 다루는 범위를 명확히 한다. 이 책은 경제학과 역사유물론의 두 이론 영역에 걸쳐 있으며, 양자의 중첩을 통해 고안한 “자본-관리주의” (capito-cadrisme) 사회구성체 개념을 통해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생산양식의 구체적 접합으로서 현상하는 사회구성체를 분석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지극히 마르크스주의적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개념이 이제까지 완전히 간과되어온 현상들을 새로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새로운 개념의 지시대상은 새로운 중간계급의 출현이나 경영자 자본주의의 등장 등을 통해 분석되어온 현실들을 포괄한다. 따라서 이 새로운 개념화를 통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의 새로움이 아닌 해석의 새로움이다.

역사적 기술
2장에서는 1869년부터 2000년까지의 시기를 미국의 이윤율[고정자본에 대한 이윤 총량의 비율]의 하강과 상승을 추적하면서 네 시기로 구분한다 [1869 - ①↘(1890년대 위기) - 1900 - ②↗(1929년 대공황) - 1953 - ③↘(1970년대 위기) - 1982 - ④↗ - 2000]. 이러한 경제순환은 자본주의에 내재한 불안정성의 표현인데, “자본주의는 결코 이러한 불안정성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 (38).

3장에서는 네 시기 중 가장 최근 국면인 신자유주의 국면을 분석하고 있는데, 지은이들의 다른 저작인 『자본의 반격』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곧 “1979년의 격변”으로 노골화된 통화주의의 대두는 부유층들의 상대적 쇠퇴를 저지, 역전시켰다. 여기에는 실질이자율의 상승, 채권자와 주주의 지위 강화, 성장을 위한 투자의 감소, 제3세계로부터의 이윤 강탈 등이 수반되었다.

불균형 미시경제학과 일반 불균형 모델
지은이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제도주의이면서 경제주의이고, 동시에 진화주의이다 (22). 이들의 설명적 가치는 결합되어야 하며, (경제이론의) 모델과 제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수학적 정식화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이 4장에서 정식화시키고 있는 불균형 미시경제학과 일반 불균형 모델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논리적 정당화이다. 마르크스는 고전파 경제학으로부터 두 가지 아이디어를 차용하였다 (62-63): 곧 “판매자가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에 상응하여 가격을 수정한다”는 것과 “경쟁 과정의 중심에는 자본의 이동이 있다”는 것. 마르크스는 이 아이디어를 “다양한 부문의 이윤율 균등화로의 경향”으로 정식화시키는데, 지은이들은 이를 경제 행위자들이 “불균형을 포착하고, 그것에 대응하여 행동을 변경한다”는 자신들의 불균형 미시경제학의 기본 가정으로 추상화시킨다.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분산된 개별적 반작용이 시장의 무정부 상태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중앙화된 화폐 메커니즘의 존재 때문이다. 이러한 기초적 전제 위에서 지은이들은 경제의 불안정화 요인과 안정화 요인을 동시에 포착하고자 하는 일반 불균형 모델을 고안한다. 그리고 이 모델에 근거하여 자본주의는 비례(경제부문 간 비율)의 안정성∙견고성과 규모(전체 경제)의 불안정성∙취약성이라는 정반대의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fallacy of composition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보다 세련화시킨 버전인 것 같다.)

이윤, 임금, 지대와 같은 소득은 전반적인 경제 상황(단기적으로는 경제순환의 어떤 국면인가, 장기적으로는 이윤율의 운동 경향)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경제행위자들 간에 파이 전체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투는 투쟁에 의해 결정된다. 임금은 또한 경제상황과 세력관계 양자의 결합에 인구 변동마저 결합된 노동 가능 인구와 고용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소득 결정에 개입하는 세력관계의 논리를 이자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점에서 지은이들은 1979년 폴 볼커의 이자율 인상이 시장 메커니즘의 효과가 아니라 권력행사의 효과라고 본다.

그러나 모든 경제 현상을 사회적 폭력의 문제로 환원할 경우, 경제학의 존립근거는 상실된다. 경제 전체 수준에서 개별 변수들이 맺는 상호관계 체계에 대한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에 대한 분석은 비록 미완이라 하더라도 정치경제학 비판의 본령의 유의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마르크스적 경향”으로 요약된다: 새로이 등장한 혁신된 기술들 중에서 초과이윤을 얻게 해주는, 즉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기술이 채택된다면, 자본과 실질임금, 생산과 고용, 자본구성은 증대하며, 이윤율과 자본생산성은 하락하고, 이윤 몫은 안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85-88). 2장에서 제시되었던 네 국면 중 이윤율 저하 국면(①과 ③)에서 이러한 마르크스적 기술변화는 관찰된다. 그러나 저하 국면 와중에 발생하는 구조적 위기 - 성장 속도의 감소, 거시경제적 불안정성의 증가, 금융적 혼란을 포함하는 전체적 통제불능의 상태 - 는 위에서 살펴본 불균형 미시경제학에서 상정된 메커니즘을 통해 기술변화 궤도를 수정한다. 이러한 수정을 통해 이윤율 저하 상쇄경향이 저하 경향을 압도하게 되며, 국면 ②와 ④에서 마르크스적 기술변화는 이윤율의 상승과 더불어 저지되었다.

역사유물론의 재구성
지은이들은 위와 같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영역에서의 이론적 세련화를 자신들의 역사적 실증작업을 해석하는 데에 동원한다. 이러한 이론과 역사의 대질은 역사유물론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진다. 6장을 읽으면서는 오래 전 읽었던 사적 유물론 교과서의 개념들을 다시 접할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상이한 생산양식의 접합의 현실태로서 “사회구성체” 개념을 복권시키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곧 18세기 프랑스의 앙시엥 레짐에서 자본가와 봉건영주가 공존하였던 복잡한 잡종형성(hybridations)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와중에 나타났던 것처럼 20세기에는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대립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관리직(cadre)과 피관리층(encadrés) 간의 새로운 계급대립을 특징으로 하는 관리주의와 중첩된다 (100, 120-126). 지은이들은 자본주의가 봉건제 내부에서 나온 것처럼 “자본주의 내부에서 그것을 지양하는 사회관계가 싹튼다”고 주장하며, 이를 관리주의(cadrisme)로 부른다. 지은이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주장의 정당함의 근거를 마르크스가 주식회사의 발전과 임금소득 경영자의 출현을 “‘새로운 생산형태’의 전조, 사회주의의 한 변종 또는 예비단계”로 간주했던 것에서 찾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서 생산양식에 대한 지양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사고되는데, 하나는 과거 마르크스주의자들 대다수가 생각했던 것처럼 비약적인 생산력 발전을 가능하게 한 기존의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오히려 생산력 발전의 질곡으로 변화함에 따라 폭력적 위기가 발생하고, 이러한 기회 속에서 “대중투쟁의 고양을 배경으로 하여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탈취”하는 시나리오이고, 다른 하나는 기능 자본가의 업무위탁처럼 제반 활동들의 점진적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것, 곧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내부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포스트자본주의 질서의 맹아로 간주했던 것의 등장이다. 지은이들은 마르크스 사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에 비추어 봤을 때, 두 번째 시나리오가 더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쟁취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혁명적 이행 노선을 기각한다. 물론 이를 대체할만한 어떠한 대안적 이행의 상도 제시되지는 않는다.

자본-관리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관리주의적 생산양식이 접합되어 있는 사회구성체이며, 이는 20세기 초 법인혁명을 통해 등장하였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의 착취를 설명하던 잉여가치론은 관리 지배계급과 피관리층 간의 착취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사용될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새로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8장에서는 경제학 영역과 역사유물론 영역에서 지은이들이 가한 마르크스주의의 수정 작업이 종합된다. 20세기 자본-관리주의의 역사를 크게 세 국면으로 구분한다. (1) 금융의 첫번째 헤게모니와 관리직의 부상, (2) 관리주의적 타협, (3) 두번째 금융 헤게모니와 신자유주의. 이러한 자본-관리주의의 역사는 금융과 관리직 사이의 협력과 투쟁으로 점철되는데, 각 세 국면은 상호관계에 있어 누가 우위에 있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곧 첫번째와 세번째 시기는 관리직에 대하여 금융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 데에 비하여, 소위 영광의 30년, 케인즈주의의 시기는 관리직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잡소리
책 맨 뒤의 옮긴이 해제는 이 책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도, 지은이들의 이전 작업과 최근 작업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무척 유익했다. 지은이들이 곧 출간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위기』나 뒤메닐과 비데의 공동저작이라는 『대안 마르크스주의』도 국내에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특히 『대안 마르크스주의』는 불어로 되어 있어 더 그런데, 이러한 작업이 지은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경제학과 일반 이론 사이의 “빈 공간”(18)을 메우는 작업으로 유의미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마르크스주의에 흥미를 느꼈던 이들이 그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는 데에는 이러한 저작들 - 곧 19세기 중후반에 정초되고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혁명을 통해 화석화된 마르크스주의와 21세기의 변화된 현실 간의 거리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매개하고자 노력한 저작들 - 의 부재, 혹은 이러한 저작들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주류/비주류 경제학들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 분석들을 생산해 내는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훈고학만 하고 있으니 현실과 이론의 괴리가 너무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론과 현실의 빈 공간뿐만 아니라, 경제학과 역사유물론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우려는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적 시도이고, 이러한 저작들이 국내 학자에 의해서도 많이 생산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 책 하나 딸랑 읽고 나서, 여전히 마르크스가 옳다라는 식으로 견강부회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지라도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부분이 여전히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하고 갱신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국내 출판은 무척 반가웠다. 다음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든 단상, 의문, 토론 거리 정도이다.

자본-관리주의, 그리고 포스트신자유주의 및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있어 대중투쟁의 장소?
두 가지 점만 보자. 20세기의 역사를 자본-관리주의로 파악하는 것과 역사적 자본주의 내의 국면 간 이행과 역사적 자본주의로부터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의 문제.

첫째, 사회구성체로서 자본-관리주의는 두 개의 추상적 생산양식인 자본주의와 관리주의가 접합된 현실태, 혹은 그 추상적 생산양식이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우클라드적 계기들이 구성하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저 ‘우클라드’라는 말 진짜 오랜만에 쓴다.) 역사적으로는 아마도 관리주의적 착취는 자본-관리주의 사회 (핵심부의 케인즈주의나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 동아시아의 발전국가들)뿐만 아니라, 20세기 국가사회주의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되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관리주의를 자본주의로부터 분석적으로 분리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서구의 역사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모태 없이 관리주의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리주의적 착취가 자본주의적 착취의 부분적 왜곡∙변형∙수정이 아닌 그와는 독립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을 경제학비판의 용어로 이론화시켜야 그것이 추상적으로는 독립된 생산양식이라는 점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어려운 부분이 나타난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관리주의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등장, 존재, 성장한 포스트 자본주의적 계기이지만, 국가사회주의에서의 노멘클라투라의 존재나 주변부와 반주변부에서 존재했던 강력한 국가주의적 자본주의 경향에까지 그 논의를 연장시키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강력한 국가의 존재란 이전까지 마르크스주의적 논의뿐만 아니라 주류/비주류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도 포스트자본주의적 계기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후진성이나 미숙성을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고, 미래의 맹아이기보다는 과거의 잔재(debris)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요약하면, 추상적인 수준에서 관리주의를 자본주의와 독립된 생산양식으로 파악하는 것과 동시에 역사적으로 이를 자본주의 내부에서 등장한 이행의 계기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양립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양립 가능하려면 이 논의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정교화가 훨씬 더 많이 수반되어야 할 듯 싶다. 특히 과거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구성체 논의에 비해 자본-관리주의 개념화가 어떤 장점을 갖는 지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시켜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둘째, 뒤메닐과 레비의 20세기 자본주의 국면 분석은 폴라니가 자기조정 시장의 전제와 그에 대한 (제도적) 저항운동 간의 역사적 진자운동으로 개념화한 것을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의 관점에서 포섭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미국, 유럽, 일본에서 신자유주의의 퇴조,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반신자유주의 블록의 등장, 미국을 견제하면서도 공존 관계에 있는 중국 경제의 부상 등은 포스트신자유주의 국면으로의 이행의 계기로 역사의 추가 다시금 (제도적) 저항운동으로 향하는 것의 현실적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을 듯 싶다. 그렇다면 폴라니 식의 제도적 저항운동과 마르크스주의적 대중투쟁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 이전에 마르크스주의적 대중투쟁은 지금 어디 존재하는가? 국면 간 이행뿐만 아니라,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대중투쟁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인가? 특히나 운동의 제도화로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제도의 운동화로서의 문화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기각했을 경우, 이행의 전망에서 대중투쟁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러한 고민의 실마리를 현실 속에 존재하는 투쟁의 계기 속에서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대답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들은 쌓여가고, 한국 현실을 생각하면 도대체 이런 질문들이 무슨 소용이나 있는지, 그저 공상에 그치고 마는 것만 같아 갑갑하다.


훌륭한 옮긴이 해제에도 불구하고 번역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해야 하겠다. 난 불어를 모른다. 따라서 이것은 번역에 대한 비판이 될 수는 없다. 나름 성의를 갖고 이 책을 읽었던 독자의 불평 정도일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문장이 좀 많다. 무지해서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렇다 쳐도, 제대로 된 한국말 문장이 아니라서 이해할 수 없는 곳들이 제법 있었다. 지금 보이는 대로 몇 개만 적어둔다.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17쪽 마지막 줄: “경제학 및 사회와 역사에 관한 더 일반적인 이론 사이의” → 경제학과 사회 및 역사에

21쪽 밑에서 세번째-두번째 줄: “양립하기는커녕” → 양립 불가능하다기보다는 ?

28쪽 마지막 줄: “기업 구성” → 형성

37쪽 세번째-네번째 줄: “에 뒤이어” → 후반에 ?

55쪽 12행: “지역 엘리트” → 국내

66쪽 14행: “지배적 미시경제학” → 주류

67쪽 13행: “집중화과정과는 별도로” → “과 함께” 혹은 “과 더불어” ?

71쪽 보론4 밑에서 세번째 줄: “나타난다” → 나타난다

86쪽 마지막 문단: “고전파와 마르크스의 텍스트 분석으로부터 나오는 (매우 단순한) 원리는 만약 현존하는 가격과 임금에서 초과이윤을 얻게 해주는, 즉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기술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뭔 소리냐? “만약”이 들어가 있는 부분을 좀 손봐야 무슨 말인지 명확해질 것 같다.

99쪽 셋째 줄: “다양한” → 상이한

112쪽 8행: “재” → 재무

113쪽 보론 세번째 문단: “관리의 진보로 노동자의 숙련에 대한 박탈이 대체되었다”  

관리의 진보가 대체한 것이 노동자의 숙련인가, 노동자의 숙련에 대한 박탈(탈숙련, deskilling?)인가? 만약 노동자의 탈숙련이라면, “관리의 진보가 노동자의 탈숙련을 대신하였다” 이게 더 낫지 않나?

113쪽 보론 네번째 문단 첫째 줄: “소규적으로나마” → 소규적으로나마

121쪽 마지막 줄: “시나리오” → 시나리오가

130쪽 9행: “금융의 출현” → 성장

140쪽 11행: “성격화할” → 특징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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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4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9-10-14 03:10   좋아요 0 | URL
잘 읽으셨다니 제가 감사~

김덕민 2009-10-2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평 감사합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생각보다 많아서 고치고 있으며, 아마 출판사에서 수정한 부분을 인터넷에 올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로운 판을 찍을 때 전부를 반영하여 수정하려고 하는데-초판을 구입하신 분들에게 죄송하지만-, 초판이 다 나가야 말이죠. ^^

김덕민 2009-10-26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어 댓글을 남김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대로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읽으신 부분 중에 '고전파와 마르크스의 텍스트 분석으로부터 나오는 (매우 단순한) 원리는 만약 현존하는 가격과 임금에서 초과이윤을 얻게 해주어 말하자면 이윤율을 증가시킨다면 그 기술을 선택한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좀 더 쉽게 표현하려다 발생한 것이고, 두번째 '관리의 진보로...'는 오히려 직역을 하다 발생한 것으로 에로이카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에로이카님의 의문 중 첫번째 부분은 저 역시 동감하는 부분이긴하지만 이책에 나오는 것처럼 아직은 '관리자(직) 가설'로 남아있는 부분이고, 사회주의에 대해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라는 의문을 품으면서 나온 것이라 단순히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두번째 뒤메닐의 논의는 폴라니의 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뒤메닐 또한 한국에서 자신의 논의가 논쟁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데에 관심이 있으며 앞으로 나온 논문과 책에 많이 반영될 것입니다.

논쟁적 책이 저의 부족함으로 올바르게 알려지지 못한 부분을 에로이카님을 비롯한 독자들께 사죄하는 의미로 댓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앞으로 부족한 부분을 계속 수정해나갈 생각입니다. 관심있게 봐주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에로이카 2009-10-2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덕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보잘 것 없는 서평에 이렇게 친절한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죄하는 의미"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 좋은 책을 번역해 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매끄럽지 못한 표현은 다듬을 기회가 곧 오겠지요. 또 일반 독자의 서평에 역자께서 이런 식으로 피드백을 보여주셔서 황송할 정도로 고맙답니다.

제 두번째 의문에서 폴라니에 대한 언급은 그것이 뒤메닐과 레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가 그렇게 읽었다는 얘기입니다. 단지 이 텍스트에 국한될 수 없는 문제인 반자본주의 대중투쟁과 제도 개혁 간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질문, 곧 그람시적 의미의 진지전의 범위와 가능성에 관한 일반적 질문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이왕 발걸음을 하신 김에 몇 가지만 좀더 여쭤보겠습니다.
1. 이 책에서 말하는 "비례의 안정성, 규모의 불안정성"이라는 테제는 투간-바라노프스키 같은 이들이 말했던 "불비례설"에 대한 안티테제로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요?

2. 언제나 자본가들은 이윤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혁신된 기술을 채택하지만, 결과로서 나타나는 이윤율은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①과 ③ 국면처럼) 저하하기도 하고, (②와 ④ 국면처럼)상승하기도 하는데, 이 기술적 설명을 각 국면마다 좀더 구체적인 역사적 서술로 해주실 수 있나요? 좀 무리한, 무례한 요구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또 각 역사적 국면에서의 평균이윤율 변동을 한 두개의 요인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저로서는 경제변수 간의 정형화된 복합적 인과관계를 제시한 것만으로는 그 논의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3. 왜 지은이들은 "조절이론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는 조절이론이 아니다"라고 할까요? "마르크스주의가 조절이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나요? 특히 요즘 조절이론은 브뤼노프의 영향을 받은 그르노블 학파 몇몇을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완전 절연한 것으로 보이던데요. 이것은 그저 제 느낌인데, 지은이들이 다른 학파들(과소소비론, 조절이론,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등)과 각을 세울 때 좀더 명확하게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그리고 한 가지만 더요. 선생님 혹시 뒤메닐과 비데가 썼다는 [대안 마르크스주의]는 번역하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아직까지 없으셨다면 한 번 생각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

어쨌든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한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비판의 진전에 기여하실 수 있도록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가끔 오셔서 이것저것 좀 가르쳐주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에로이카 2009-10-27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첫번째 번역 부분은 이렇게 바꾸는 게 낫지 않나요?

"가격과 임금을 변화시키지 않고도 초과이윤의 획득을 통하여 이윤율을 증가시킬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자본가들은 당연히 그 기술을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전파와 마르크스의 분석으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원리이다."

김덕민 2009-10-27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번역은 에로이카님이 제시하시는 것이 좋네요. 기회가 닿으면 다시 수정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신 것들에 대해서는

1.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지만 아시는대로 고전파와 케인즈의 결합 및 경기변동의 실물/화폐적 요인을 밝히는 저자들의 중요한 기여입니다.

2. 2010년에 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될 <신자유주의 위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주 일반적인 설명은 얼마전 파리포럼에서 뒤메닐 교수가 발표한 글이 번역되어 있습니다.(번역자가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조금 허술한 번역이기는 하지만요. 뭐 그렇다고 저도 번역에 대단한 소질이 있는 건 아니지만 ^^)

3. 프랑스적 지형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며, 사실 미국의 고유한 독점자본주의론을 겨냥하는 이야기입니다. 뒤메닐 교수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아글리에타는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의 주류 경제학 및 비주류경제학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최근의 위기에 대한 브레너/아글리에타/아리기/바란과 스위지 류의 미국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이번 악튀엘 마르크스에 실릴 아리기의 <베이징의 아담 스미스 서평>에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4. 파리 포럼에서 토론한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하지만 이 토론 내용의 번역을 아주 신뢰하기는 힘듭니다.) 현재 한국에서 <대안마르크스주의>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가독성을 높여서 번역하려고 합니다. 게다가 철학 이야기가 들어가다보니 더 신중해지고요.

며칠 전에 파리에서 뒤메닐 선생을 보고 왔는데, 자신의 논의를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논의가 전해져 그 분 작업에 매우 많이 반영될 것이 기대됩니다.

사실 출판사 교정표가 올려져 있나 궁금해서 들어왔는데 서평이 달려 있어 이런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은 다른 작업을 통해 정식으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로이카 2009-10-28 22:42   좋아요 0 | URL
김덕민 선생님,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파리 포럼"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선생님 댓글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남코리아"(?)라는 나라에 사는 분들도 뒤메닐에 관심이 있군요.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안마르크스주의>가 번역되고 있다는 이야기 듣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뒤메닐과 레비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앞으로의 작업들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덕민 2009-10-3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댓글을 달았는데, 몇가지 노파심도 있고, 불성실하게 답변을 한 것 같아 몇마디 답변을 추가하려고 합니다. 에로이카님의 블로그를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식의 댓글보다도 좀 더 정교하게 소개된 작업들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두번째 질문해주신 이윤율 동학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번에 출간될 <신자유주의의 위기>에 훨씬 중요한 논의들이 포함될 텐데요. 기본적으로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의 작업은 수익성을 결정하는 소득과 기술, 두 측면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입니다. 소득과 기술의 장기적 동학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자본주의의 시기구분에 결정적 측면이 되고 특히 이번 2000년대 발생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복잡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당연히 이는 우리의 미래 전망과 대안을 설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것입니다.

그리고 제라르 뒤메닐 본인은 이른바 '금융화' 및 '신자유주의'를 분석하는 데 있어 세계체계론적 시각을 배제하거나 부정한다는 면이 중요합니다. 이는 국내에 나와 있는 번역서를 읽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첫째 세계체계론자들의 논리나 분석도구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의 경제학적 분석이나 브로델의 역사학적 시각을 신뢰하지 않거나 부정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뉴레프트리뷰에 앞으로 번역되어 소개될 아글리에타의 글을 보면 그가 브로델적 시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메닐 선생은 자신이 미국경제를 특권화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진행되는 자신의 논의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많고 대화해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노파심이 생기기도 하는데, 다른분들도 계시지만 뒤메닐을 한국에서 소개하는 데 있어 지대한 공로를 한 사람은 윤소영 선생인데 그 분의 작업인 뒤메닐, 아리기, 그로스만 등을 결합하려는 시도 자체는 그 분의 '독창적인 작업'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분의 독창적인 작업 덕분에 뒤메닐 선생과의 토론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번 9월달에 에마뉘엘 흐노, 마이클 로위, 제라르 뒤메닐이 쓴 책 두권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습니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100가지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를 읽자>라는 책입니다. 이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특히 마이클 로위와 많은 논쟁을 했다는 것이 뒤메닐 선생의 설명입니다만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충분히 교육적 의미를 지니는 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0개의 단어>는 프랑스에서도 매우 반응이 좋았다고 합니다. 또한 <마르크스를 읽자>는 마르크스의 원문에 대한 코멘트를 붙인 것인데, 특히 뒤메닐 선생이 집필한 제3부 경제 편은 뒤메닐 선생의 마르크스의 자본의 계획과 방법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제학자에 의해 집필된 자본 및 마르크스경제학에 대한 최신의 논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마뉘엘 흐노는 제가 알기로 이번에 <자본>을 프랑스에서 새로 번역 소개한 사람인 것 같은데요.(확실치는 않습니다) 이 사람이 헤겔 전문가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이 사람의 도움을 받아 뒤메닐 선생이 앞서 말씀드린 <자본>의 플랜과 방법에 대한 연구작업을 진행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 이러한 경제학 비판 연구에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역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에로이카 2009-11-01 08:06   좋아요 0 | URL
저는 자본주의의 동학의 일면을 자신의 이론적 분석을 통해 잡아낼 수 있다면, 곧 자신이 취한 관점의 이론적 정당성을 현실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세계체계 분석이든 조절이론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계체계 분석의 전제 - 자본주의는 세계경제이다 - 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최근에는 그 시각에 기반해서 나온 현실 분석들 중에서 별로 매력적인 것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글리에타의 작업들은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는대로 놓치지 않고 읽으려고 하지만, 제가 옛날에 조절이론을 한창 좋아할 때 가졌던 애정은 이미 식어버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익진 교수가 열심히 소개하고 계시는 프랑스와 셰네나 도미니크 플리옹 같은 그르노블 학파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세계체계 분석과 조절이론을 언급하셔서 말씀인데, 뒤메닐이 셰네나 플리옹 같은 이들의 금융주도 글로벌 축적체제에 대한 저작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이들이 다 ATTAC 프랑스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을텐데요.

윤소영 교수의 작업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지만, 좀 아쉬운 것은 이론적 정당성에 대한 집착은 좋지만, 그 훌륭한 이론적 관점으로 현실 분석에 좀 기여를 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냥 운동권 지식인도 아니고 대학 교수이신데, 그 격에 맞게 신자유주의든 뭐든 현실 분석을 하셔서 학술적인 논문이나 제대로 된 저작으로 발표를 좀 하시든가 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최신 소식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정말 재미있게 들립니다. 선생님께서 이 훌륭한 저작들을 열심히 번역해주시면, 말씀하신대로 제가 경제학 비판에 계속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다른 일로도 이미 바쁘실텐데 너무 노골적인 부탁인가요? ^^) 그럼 또 뵙겠습니다.

2010-01-03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 - 새로운 위기와 조정에 직면한 세계경제
미셸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지음, 김태황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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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첫 번째 지은이인 미셸 아글리에타는 ‘조절이론’의 창시자 격인 인물이다. 1970년대 중후반 등장한 조절이론은 훗날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신고전파 경제학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이론이었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반기를 들면서, 그 이론의 근저에 자리잡은 자본주의에 대한 파국론적 인식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였다. 당시 이 이론의 주요 관심은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동안 핵심부 국가들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제도화된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타협이 어떻게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는 모순을 관리, 조절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자본 축적을 가능케 했는가, 그리고 그 모순이 새로운 위기의 형태로 진화하였는가에 모아졌었다. 곧 자본주의는 우파들의 바램처럼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않지만, 좌파들의 소망처럼 곧 없어질 체제도 아니었던 것이다. 곧 조절이론은 이전까지 탐구되지 않았던 지속적인 자본축적의 재생산을 가능케 했던 조절 기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기조정적이지도 않고 그 자체 운동만으로 파국으로 귀결되지도 않는 자본주의 축적체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였다. 2007년에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된 이 책은 그로부터 30년 후 아글리에타의 이론적 현 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이론적 패러다임이든 30년에 걸쳐 반대자들의 공박에도 불구하고 이론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론의 내구성과 동시에 유연성이 상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곧 장기간에 걸쳐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변화하는 현실을 포착해야 하는 이론 자체가 변화해야 함을 말한다.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서 큰 기대를 갖고 읽었고, 어느 정도까지는 아글리에타 자신의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론적 변신 중 일부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사실 후한 점수를 주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이론적 변화의 방향이 애초에 조절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로부터 상당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그 이론이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조절이론이 관심을 끌었던 것도 당시 좌우파 경제이론의 무능력과 이데올로기적 맹목성과 무관하지 않다. 적어도 등장 초기에 조절이론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파국론적 경제 인식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맑스주의적 경제학 비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잉여가치론과 계급 모순의 중심성을 견지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젊고 유능한 비판적 경제학자들을 그 이론을 확대재생산하는 데에 충원할 수 있었다. 조절이론은 당시까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발목을 잡고 있던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역사적 전망 제시라는 이데올로기적 족쇄를 벗어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스주의적 에피스테메 내부에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수행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리고 아마 다른 많은 이들도) 조절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심이 그 어떤 아쉬움을 동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일국적 분석단위, 강한 법칙 지향성, 서구에 국한된 분석 등은 과연 이 이론적 패러다임이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는 데에 유용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였다. 조절이론을 갖고 신국제분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 등 신흥공업국의 현실을 불완전하게나마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던 리피에츠는 브와이예 같은 또 다른 조절이론가들에 의해 조절이론의 문제의식을 전도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브와이예 같은 이의 저작은 제도주의자들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와 친화성을 보이면서, 일국적 분석단위를 고수하면서도 맑스주의적 문제설정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멀어져 완전히 절연하게 됨으로써 조절이론가 중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 모아서 하는 이가 되어 버렸다. 또한 초기에는 맑스주의적 가정에 비교적 충실하였던 리피에츠나 아글리에타 등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본격적 분석은 일국적 문제들이 충실히 설명된 연후에나 설명될 수 있는 문제라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해 왔다. 나중에 아글리에타는 네그리 등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대표적 저작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문제를 다루지 못했음에 대해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Michel Aglietta (1994). "De 'Regulation et crises du capitalisme' a la 'Violence de la monnaie' et au-dela: Interview de T. Negri, F. Sebai et C. Vercellone," Ecole de la regulation et critique de la raison economique. L'Harmantan, pp. 47-70. 이 내용은 문원에서 출판된 아글리에타의 책에 실린 전창환 선생의 역자서문에서인가 본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어쨌든 미샬레나 미스트랄 같은 국내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글리에타, 리피에츠, 브와이예 등의 파리학파 조절이론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분석에는 그닥 기여한 바가 없는 셈이다. 이 문제는 프랑수아 셰네를 비롯한 그르노블 학파에 의해 주도적으로 탐구되고 있다.

2.
아글리에타가 로랑 베레비와 함께 쓴 이 책은 따라서 이전에 그가 표한 아쉬움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함을 해소해 주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이 책은 일국적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를 수용하면서도 (2부), 그러한 일국적 정책들이 어떻게 상호의존적으로 자본주의 세계경제, 곧 “세계적 성장체제”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는가 (3부)를 탐구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이전까지 조절이론의 외부로 남아 있던 부분으로 그 이론적 지평을 확대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또한 구체적인 이론적 기여로서, 미국의 경상적자 누적 – 자국의 생산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소비 수준을 향유하는 미국 국민들의 생활양식과 저축 부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자본 흐름이 미국으로 집중되는 현상 - 으로 집약된 세계 자본주의의 불균형의 문제에 대한 실증적 탐구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전환을 가능케 한 동력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파탄시킨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장기간의 수요 부족과 금융 거품으로 인한 구조적인 초과공급”의 결합(34)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 상실이 지속”되면서 고객들의 가격 결정력이 강화됨으로써 기업에게는 이윤 압박이 심해지고, 신흥국들에게는 달러보유고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게 함으로써 달러 채무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미국에 대한 채권자 신분으로 변신한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은 순상품 수출국이면서도 채권국의 신분으로서 세계경제의 강력한 행위자로 등장한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 1980년대부터 이미 시작된 주주가치의 확장, 곧 자본주의 경제의 금융화이다. 이 두 가지 주요 변동은 결합하여 소득 불평등의 확장, 노동자 계급의 정치력 약화, 가계 채무의 증가 등을 초래하였다.

이는 조절이론이 출현했던 1970년대 당시의 경제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다. 당시 조절이론의 분석 중심에는 자본주의의 계급 모순, 곧 일국 내부의 임노동 관계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쇄도에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가속화된 세계 무역과 금융에서의 신흥국의 세력 강화가 결합함으로써 이전의 분석의 초점이었던 노동자 계급은 주변화되어 버린다. 현실에서의 정치력 쇠퇴가 이론에서의 중요성 감소로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도저히 찜찜함을 버릴 수 없다. 문제는 무엇보다 체제 자체가 그 오작동 - 혹은 지속불가능한 작동 - 에도 불구하고, 체제 변환의 가능성, 혹은 그 체제에 대한 도전세력의 형성 문제는 분석의 지평 내부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학 분석이 잠재적 위기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할 수는 있어도 혁명과 전쟁을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격발 직전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동산 시장의 폭락 가능성 등이 시사되고 있지만, 그로 인한 경제외적 여파 등은 이 책의 지평에서는 포착될 수 없다. 사실 이 점은 딱히 새롭다 할만한 약점은 아니다. 조절이론은 애초부터 사회운동이나 전쟁 등의 전개에 대한 사후적 설명 가능성은 갖고 있었을지언정 그 체제 불안의 요소가 제도적 총체 내부로 어떻게 매개되는 지에 대한 설명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석하는 대상 현실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과 전통적 조절이론 간의 연속성이라 할 만한 것들은 무엇인가? 이 책은 세계적 성장체제에 대해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조절이론과 분석단위 상에서의 상이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성장체제”라는 개념을 고수함으로써 연속성을 보인다. 개별 조절이론가마다 개념 사용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성장체제(growth regime) 혹은 발전양식(mode of development)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의 현실적 결합체로 개념화된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 그리고 조절양식을 구성하는 구조적 (제도적) 형태와 같이 이전의 조절이론이 개발해온 정치한 개념적 장치들을 사용하지 않지만, 성장체제라는 개념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적용한다.

또한 초기 아글리에타의 조절이론에서처럼 사회적 규범의 문제를 중요시한다. 이 점은 특히 일국적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다루는 2부에서 부각된다. 유럽인들은 효율성과 형평성을 상호 갈등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244)이나, 이기적 개인들 간의 계약과 이 “계약을 합법화하는 법규와 소송을 재판하는 사법기구가 시장의 바탕을 이루는” 서구의 시장경제와 “개인적 행위를 결정할 때 공동선을 고려함으로써 계약의 불완전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 중국 시장 사회주의 경제의 유교적 사회 규범 (309-310) 간의 대비에서 잘 드러난다. 재미있는 것은 지은이들이 중국 자본주의를 평가하면서 유교 자본주의에 대해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교 자본주의론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꽤 번창하였으나,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로 학계에서는 자취를 감춰 버린 바 있다. 하지만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결정체인 워싱턴 컨센서스가 시효만료된 오늘날 다시금 이 이론이 등장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이 책을 통해서 받았다. 사실 유교 자본주의론은 싱가포르의 리콴유처럼 유교는 쥐뿔도 모르는 아시아의 독재자들이 보편적 인권 개념을 서구에 특유한 규범 정도로 상대화함으로써 자신의 독재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의도와는 무관하지만, 21세기 초반 세계 경제위기 이후 나온 유교자본주의에 대한 서구 중도좌파의 긍정적 평가라는 점에서 이 책은 주목받을 만하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사실 이는 조절이론 뿐만 아니라, 일부 서구 좌파 이론들이 때때로 나타내는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열광의 연장일 수도 있다. 1960-70년대 중국 문화혁명에 대한 열광이나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한 관심 표명의 21세기 초반 버전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자세히 좀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글리에타는 New Left Review 2008년 11/12월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자신의 조절이론이 브로델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그 글을 읽었을 당시 나는 그 브로델의 영향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다. 브로델과 조절이론 간의 관계의 문제라는 측면에서는 지엽적인 부분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중국을 다루면서 “시장경제가 위계적인 중앙 집권 국가에 의해 발전되고 또 조절되는 것은 중국의 오랜 전통에 부합한다”(308)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중국에 자본주의가 번성했던 것은 시기적으로 유럽보다 한참 앞서는 1000년대 무렵부터 1세기 정도의 기간으로서 송나라(960-1279) 때” (309)라고 말한다. 유럽보다 앞서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존재했다는 이 주장은 서구 좌파들이 그 동안 기반하고 있던 맑스주의적 인식에서는 상당히 낯선 주장이지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소개된 브로델의 3층구도 내에서의 자본주의의 개념화를 이용한다면 정당화 가능한 주장이다. 곧 인간의 경제는 맨 아래의 물질생활, 2층의 시장경제, 3층의 자본주의의 중첩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 규정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자본-임노동 관계가 아니라, 시장의 작동에 개입하는 권력이자 위계의 최정상을 뜻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브로델 식으로 파악하면 이처럼 송대에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발달된 상업 경제를 자본주의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관은 아리기의 Adam Smith in Beijing이나 스기하라 카오루의 산업혁명과 근면혁명의 비교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굴러가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권력의 거처이면서도 기저의 물질문명에 녹아들어 가 있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은 축적(시장)은 조절(정치권력, 제도, 규범) 없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조절이론의 기본 명제와 통하는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개념화는 참신함만큼이나 불편함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이론적 토론이 어떻게 조직될지, 과연 조직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한 번 관심을 갖고 지켜볼만한 주제인 것 같다.

4.
이 책은 그리 좌파적인 책은 아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 기존 제도를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관한 측면에서 현 제도 바깥에 위치해 있는 세력들의 역할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체제 이후의 대안이 제시되지만,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주체는 이미 분석대상에 포함되어 있는, 곧 현 제도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세력들이다. 준달러 본위제에서 복수통화 본위제로의 이행, IMF의 개혁, 미국의 내수 억제와 신흥국들의 내수 중심 체제로의 전환, 각국 경제정책의 국제적 조율 등의 정책 제안 등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다가도 계급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급 문제는 주변화되는 이론적 역설이 몹시도 불편하다.

이 불편함은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문제, 책을 읽은 시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비극적 패배를 맞은 쌍용자동차 파업은 사실 이 책에서 분석된 금융화의 전개, 중국의 성장, 세계적 수준에서의 과잉투자로 인한 초과 생산 설비라는 맥락과 떼어놓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물론 한국 자본주의와 현 정권의 야만성에 대한 구체적 분석 없이 파업 노동자들, 그리고 남한 좌파 전체의 이 패배를 세계적 자본주의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겠지만, 이 책에서의 정책 제안을 머리 속으로 수긍하는 것과 현재 느끼는 분노 간의 괴리, 그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이론적 실천의 부재, 그리고 그로 인해 더 깊이 빠져드는 무기력의 늪에서 질식의 공포는 커져만 간다.

책 내용에 대한 세세한 정리는 관두고, 느낌만 정리하면 이렇다. 이 책은 내가 조절이론에 대해 갖고 있던 기대와 실망을 전도시킨 책이다. 나는 애초에 조절이론이 임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자본주의의 축적과 조절의 동학 속에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고, 세계경제에 대한 설명 부재에 실망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세계경제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제시하지만, 계급 분석은 완전히 주변화시켜 버린다. 물론 조절이론이 아글리에타만의 것도 아니고, 다른 훌륭한 이들도 있겠지만 그 이름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읽고 나서는 지적 희열보다는 공허감이 앞서는 것을 감출 수는 없다.  

사족  

개인적인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번역, 출판은 그 값어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훌륭하고, 오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한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가 어떻게 세계성장체제 전체의 재구성에 기여했는 지에 관한 이론화 자체는 무척 새롭다. 현 경제 위기에 대하여 아글리에타가 대중적인 책을 하나 쓴 모양인데, 그것도 좀 번역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추기 2009. 8. 13] 

2009년초부터 미국 가계 저축률이 급상승했다는 글. 이 책의 지은이들이 제시하는 글로벌 불균형 시정의 필요조건인 미국 저축률의 상승에 관한 마틴 펠트스타인의 분석.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710532 

 

[추기 2009. 9. 21.] 

G20 정상회의에서 세계경제 불균형을 다룬다는 기사. http://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unit/377937.html  

 

[추기 2009. 11. 30] 

아글리에타에 실망한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다. 프랑수아 셰스네[르몽드 디폴로마디티크 한국판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셰네'가 아니라 '셰스네'가 맞다고 한다]가 최근에 프랑스에서 나온 경제위기 관련 저작들에 대한 비판을 실어 놓았다.  셰스네가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듯 보이는 프레드릭 로르동의 <과도한 위기 - 파산한 세계의 재건>과 앙드레 오를레앙의 <도취에서 공포로: 금융위기를 생각한다>가 무척 보고 싶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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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9-08-1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llnaru님 안녕하세요. 출판사나 옮긴이들이 보기에, 제 서평은 정말 짜증날 것 같아요. 이 어려운 책을 고생고생하며 한국어로 번역 출판했는데, 책 재미없다고 광고하고 있으니까요. 이 책 읽는데 사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한 달이 좀 못 걸렸는데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읽었을 때 재미있게 느꼈던 부분들 같은 것은 서평에 못 쓴 것 같아요.

<<좌파 현대 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보다는 엄청 재미없고 더 이해하기 힘든 책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사실 그 책은 조절이론 비판이 지나치게 단순명쾌한 데에 비해 지은이 자신의 주장은 별 것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책에 비하면, 이 책은 지루하지만 지은이들의 목소리는 확실하지요. 저는 그 주장에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한테 듣고 싶었던 얘기가 그것만은 아닌데...'라고 투덜거리고 있는 셈이구요.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아마 현재까지 한국의 경제학자 중에서 장하준 교수만큼이나 세계적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경제학자를 여간해서 보기 힘든 것은 아마도 경제란 게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상생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루는 학문인 경제학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수식과 모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의 경제정책이나 경제학자들의 학문은 현실 정치의 역관계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읽는 경제서적이라고 해야 고작 재테크 관련 서적밖에 없었던 와중에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장하준의 이 책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데에는, 2007년부터 본격화된 세계 경제 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퇴조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계적 시류와 동떨어져서 이 책을 국방부 금지도서 목록에 올려놓고 여전히 신자유주의만을 - 그것도 아주 질 나쁜 신자유주의를 - 고집하는 남한의 갑갑한 현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2.
세계경제의 역사와 제반 경제이론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장하준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윤색해온 세계 자본주의의 공식적 역사 서술의 부당함을 일반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현재의 선진국들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 칭하면서 선진국들의 발전의 실제 과거 역사와 그들이 현재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하는 자유무역의 원리 간의 이율배반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요약하면, 선진국들의 경제발전은 보호무역을 통한 유치산업의 보호와 선진기술의 탈법적 도입 등을 통해 이루어져 왔고, 이들이 자유무역과 지적 재산권 보호 정책으로 선회한 것은 오로지 그들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이후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무역이 후진국들에게 경제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선진국들과 주류 경제학의 주장은 그들의 실제 경제발전의 경험과 상반되는 것이며, 후진국들과의 무역을 통해서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후진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것은 마치 여섯 살짜리 아이한테 학교 가지 말고 나가서 돈 벌어오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나, 브라질 대표팀과 여중생들이 축구시합을 하는 것만큼이나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나 헥셔-올린 공리 등에 기반한 자유무역 원리, 또 그에 기반해 진행되는 세계화는 개별 국민경제가 경제발전의 미래를 위해 그 어떤 준비와 육성을 하는 것을 애초부터 부정하고, 현재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가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의해서 후진국에 부과되는 불공정한 룰은 비단 자유무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 국영기업의 사유화, 지적 재산권 등의 문제에 있어서도 불공정한 룰은 부과되어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다. 나는 국영기업의 비효율성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의 비판을 반박하는 5장을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장하준은 공공성의 확장, 수호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와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5장의 서두에서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의 작업을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좌파적 비판"으로 칭한다. 아마도 이 말이 갈브레이스 뿐만 아니라, 장하준의 작업을 가장 잘 기술하는 말일 것 같다. 장하준은 다방면에서 일관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자유시장 지상주의의 폐해와 부조리함, 불공정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전면적 계획경제를 통한 시장의 철폐를 이야기했던 과거 현실 사회주의나, 후진국의 보호주의에 대한 전면적 관용을 내세우는 자력갱생 (autarky) 같은 급진적 주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4장 끝부분에서 인용한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 착취는 끔찍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착취조차 당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존 로빈슨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 것은 장하준의 이러한 현실 인식을 뒷받침해준다. 급진적 대안 대신 장하준은 책 전체에 걸쳐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그로부터 초래된 경쟁의 부정적 결과의 규제 간의 올바른 “균형”을 강조한다. 특히 지적 재산권을 다룬 6장에서 이 점은 무척 두드러진다.  


3.
그렇다면 이런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장하준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스스로의 반성과 교정을 희망한다. 에필로그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케인즈의 일화를 인용한다. 자신이 비일관적이라는 지적을 받은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고 한다. "사실이 바뀌면, 나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이 인용은 현재 공공정책 강화에 역점을 두고 있는 오바마 정부의 경제 각료들이 클린턴 집권기 신자유주의 정책의 초석을 다진 이들이라는 점을 두고 보면 무척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미국 국내경제 문제에 한해서는 신자유주의의 폐기가 공식화되었다 해도, 그것이 과연 개발도상국과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에 관해서는 사실 회의적이다. 장하준은 보호무역을 통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성장은 장기적으로 선진국 기업들에게 시장을 제공해주리라는 근거를 들어 이러한 회의적 시각을 불식시키려 한다. 또한 (흔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칭해지는) 2차대전 이후부터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기 전인 1970년대까지의 시기 동안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샬 플랜을 그것의 사례로 들고 있다. 하지만 냉전으로 인한 미소간의 대립이 없었다면, 과연 그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행동이 가능했겠는가 하고 물어봐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전후의 마샬플랜과 같은 움직임을 보일 동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내경제의 어려움을 개발도상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 확장함으로써 만회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장하준의 주장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순간,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우리 역시 비현실적이라는 궁색한 처지에 처하고 만다. 신자유주의보다 나은 그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장하준보다 급진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건설이 그러한 세상을 갖고 올 수 있으리라고 주장할 경우, 그 주장은 장하준이 하는 주장보다 더 비현실적인 주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한 주장을 할 수도 있으나, 그러려면 충실한 내용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선진국들 스스로가 개발도상국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책 강요를 철회하리라는 장하준의 기대가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질문으로 장하준의 주장에 흠집을 내는 것은 그 비판이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로의 다른 경로를 보여주지 않는 한 온당치 못해 보인다.  


4.
이 책은 주로 선진국과 후진국 간 관계의 신자유주의적 배열에 대한 포괄적 비판이다. 그러나 장하준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국제 관계에 국한되어 있지만은 않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않지만, 그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시행되어온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일관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훌륭한 학자 장하준은 한나라당에 가서도 이명박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904/h2009040703195321060.htm), 민주당에 가서도 지난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48672). 적어도 그는 자신의 관점에 충실하였고,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을 바꾸는 정치인스러운 행보는 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학자로서 장하준은 그 자신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은 그와는 다른 몫이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이라고 해봤자, 국회 내에는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밖에 없고, 이들 의석을 다 합해봤자 한 줌도 안 된다. 장하준은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임을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작금의 세계경제 위기로 그의 선견지명은 더욱 돋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정치적 힘으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반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몫이지, 장하준의 몫은 아닌 것이다.   


노무현 서거 이후의 상황은 오히려 이 반신자유주의 세력들에게 그리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반MB의 당위가 반신자유주의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MB 연대의 주체로 거론되고 있는 제 세력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은 꼭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 반신자유주의 연대가 아니면, 반MB 연대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때문에 피해 보는 서민들한테 반MB 연대가 그 의미 이상의 괜한 희망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설령 그래서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바보 노무현이 했던 실패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거라도 이명박에 대면 감지덕지라고 얘기하면 맞는 말이지만, 노무현 정권처럼 신자유주의 강행하다 지지세력 이반해서 똑같이 정권 내주면 다음에는 더 이상한 꼴통이 등장할 지 모른다. 한나라당이 자기 손으로 신자유주의를 포기할 리도 만무하고, 설령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한들 립서비스에 그치거나 박정희식 파시즘의 부활로 경도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박근혜는 공식석상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605295

 
문제는 민주당과 친노세력이다. 알라딘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도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벤트를 하던데, 그 중에는 장하준 교수의 다른 책, 『국가의 역할』도 들어가 있다. 아마도 그 책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가에 있었나 본데, 그리고 그가 진보주의에 대한 연구도 계획했다는데, 도대체 이들에게 진보주의는 뭐고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화살은 민주당과 친노세력에게만 겨눠져서는 안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장하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내가 알기로는 제대로 나와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장하준은 크게는 반MB 연대, 작게는 반신자유주의 연대의 이론적 공약수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반MB 연대는 해야 한다. 그리고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그것을 반신자유주의 연대로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반신자유주의 연대가 안된다고 반MB연대의 형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문제는 연대의 수준일 것이다. 낮은 수준에서의 연대나마 가능하려면, 제 세력의 반성과 쇄신 노력이 상호 간에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민주당과 친노의 행보가 결정적일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만약 노무현이라면, 학자로서 장하준의 말은 다 맞는데 정치인으로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라고 말했을까? 그렇다면 다음에 조금 더 잘하려면 뭘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한편으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과 친노는 장하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만약 여기에 대한 대답들이 제 세력들로부터 제시된다면 반MB연대의 수준을 가늠하기는 더 쉬워질 것 같다. 사실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들린다. 이것은 상대방에 따라 말이 바뀌는 정치인의 생리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좌파적 비판”에 반MB 세력들이 좀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떤 부분을 긍정하고 어떤 부분을 부정하는가는 그들의 자유일테지만, 만약 스스로에게 그 부분들이 분명해진다면 상대방과 이야기하기는 좀더 편해질 것 같고, 보는 사람들도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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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6-2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공감해요^^

에로이카 2009-06-22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엔 감사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리뷰가 좀 산만하네요.
 
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노중기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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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여 년 동안 한국의 노동체제 변동이라는 주제로 한 우물을 파온 노중기 선생이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여러 지면에 발표한 열세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1부에서는 87년 노동체제와 그 전후의 노동체제의 성격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1, 2, 3장은 모두 대상 시기를 소시기로 구분하여 노동체제 변동의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97년 이후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성립을 다루는 4장은 발표 당시인 2006년에도 해당 노동체제가 지속 중이어서 그런 지, 소시기 구분은 없었다. 1부에 소개된 노동체제 변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1) 군부 독재기의 억업적 배제 체제 (1961-87), (2) 1987년 체제 (1987-1997), (3)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 (1997-)로 나눠볼 수 있다. 1부는 술술 읽히는 데에 반해서 지은이의 주장이 이제는 너무 평이하게 느껴져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나마 좀 흥미로웠던 부분은 3장에서 1960-70년대의 노동체제를 “국가 코포라티즘의 배제적 하위 유형”으로 규정했던 최장집을 비판하는 부분이었다. 지은이는 최장집의 이 시도를 라틴아메리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무시한 “과도한 이론화의 한계”를 보이고 있고, 한국노총이 외형적 코포라티즘 기제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체제 규정적 요소”는 아니었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83-87).

1부를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역시 노중기스럽다는 것이었다. 진지하고 맞는 말만 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 아마도 이 중 몇몇 글들을 이전에 읽어보았기 때문에 더 그랬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부를 읽으면서 나의 이런 판단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1996년 이후를 살펴보는 5장부터 10장까지의 글들은 주로 사회적 합의 시도들과 이에 대한 주요 논자들의 이론적 전제에 해당하는 코포라티즘 담론을 겨냥하고 있다. 5장과 10장은 1부의 1, 2, 3장처럼 소시기별로 사회적 합의 시도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경제위기가 그 직접적 원인이었던 노사정 합의 실험은 “노동의 저항 없이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킨다”(233)는 전략적 목표를 지닌 국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경제위기와 노사정위원회는 “노사관계의 자유화•민주화”라는 노동 측의 압력과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이라는 국가•자본 측의 압박 사이에서 해체될 운명에 놓였던 1987년 체제의 종식을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241).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합의 시도들을 코포라티즘으로 볼 수 있는가? 또 신자유주의와 코포라티즘은 양립 가능한가? 사민주의 국가들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제3세계에서 코포라티즘의 이식은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어떠한 결과를 갖고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지은이의 논의는 1부와 달리 아주 흥미롭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한 원론적 논의들(274, 285)을 살펴보면서 이를 “국가의 경제 개입을 통해서 조직적 강제와 동의가 동시에 조직화되는 계급적 타협 체제”(243)로 정의한다. 코포라티즘은 원래 2차 대전 후 “포드주의 체제의 거시적 계급 타협을 유지시킨 통제와 이익 대표의 교환 체제” (309-310)로 인식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코포라티즘은 전통적 사민주의 국가들이 갖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나라들에서 출현하였다는 점에 지은이는 주목한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 모델이나 아일랜드 모델 등을 들먹이면서, 미래 한국 사회 노동체제는 “신자유주의의 길이 아니라면 ‘사회통합적인 노사관계, ‘사회적 합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의 단순 이원론을 고집했던 사회적 합의론자들은 다양한 경로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무시한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305). 지은이의 이 비판은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자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나저나 이전에 읽었던 조영철과 정이환의 책도 그랬지만, 후마니타스 출판사는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길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퇴조 속에서 이 이론적 흐름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도 무척 흥미로운 볼거리일 것이다.] 8장에서는 한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던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경험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제3세계, 특히 동유럽에서 시도된 코포라티즘의 이식 시도들 또한 고찰된다. 그는 서구의 연구들이 “서구 내부의 차이를 강조했으나 제3세계 내부의 차이를 완전히 간과”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코포라티즘의 역사적 조건 상의 차이를 구별한다: “불안정한 민주화 이행과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스페인),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정치 경제적 혼란(동유럽 국가), 경제 위기와 기존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의 연장 (멕시코), 배제적 노사관계로부터의 이행과정(브라질, 칠레, 한국) 등”.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취약한 정권이 행위자들을 전략적으로 포섭해 헤게모니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다는 점 또한 지적된다 (319).

9장에서는 한국과 멕시코의 비교 연구를 통해 코포라티즘이 신자유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섣불리 이식되었을 경우 어떠한 파멸적 결과가 양산되는 지를 경고하고 있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비교들이 시도된다. “국가-지배 정당-공식 노조로 이어진 강력하고 집중적인 권력 체제, 그리고 노동계급에 대한 거의 완벽한 포섭과 통제의 역사”를 갖고 있는 멕시코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와 달리 한국은 “기업별로 분산된 노조 체제, 노동 정당의 부재와 반노동자 이데올로기의 만연, 오랜 국가 폭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이한 역사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모두 “신자유주의 하의 통제의 위기”라는 동일한 구조적 변인을 공유하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위기는 코포라티즘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반면, “한국에서 위기는 사회 협약의 실험을 끊임없이 야기한 힘이 되었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새로운 사회 협약”은 다시 여러 공통성들을 보인다: (1) “사회협약은 실질적 교환 체계라기보다 ‘참여와 협조'라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장치, 정당화 기제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2) “협약은 노동계급에 대한 분할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 (3) “‘협약의 정치’는 ‘국가 폭력’이라는 또 다른 통제 장치로 보완되어야 했다.” (4) “전 과정을 국가가 주도하며 흔히 강압적 수단을 동원해 합의를 도출했다.” (5) "‘사회 협약의 정치’는 모두 신자유주의 정책에 종속된 하위 정책 수단일 뿐이었다.” (358-360) 곧 이들 두 나라에서 사회협약은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의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곧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달 벨트”였을 뿐이다 (347).

1부는 다소 지루했고, 2부는 재미있었다면, 3부는 어떠한가? 3부, 특히 그 중에서도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전망을 다룬 마지막 13장은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본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관한 글 중에서 가장 잘 쓴 글인 것 같다. 또 그동안 전투적 노조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해야 한다는 노중기 선생의 말을 그냥 ‘맞는 말’ 정도로 가벼이 여겼었는데, 이 생각도 바꾸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요 비판 대상은 노동운동 내 국민파로 대변되는 흐름의 ‘사회적 조합주의’ 노선이었다. [사실 난 이 노선 자체에 대해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읽는 시점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전 얼토당토 않은 노동자 항복 선언을 사회적 “합의”로 포장한 “노사민정 합의”는 이 정권에서 노동자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만들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판 ‘사회적 조합주의’는 남아공의 ‘사회운동적 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와 유럽의 사회적 코포라티즘(societal corporatism)의 異種交配”이다 (409).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에 대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연대와 계급적∙대중적 정치투쟁의 원리를 제거했다. 또 사민주의에서는 역사구조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합의주의와 정책 참가만을 수입했다” (409-410).

13장의 서두에서 지은이는 “1987년 노동체제는 노무현 정권 기간에 거의 완전히 해체”된 반면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지난 10년 동안 형성된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위력은 압도적”으로 발전한 변화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맞게 된 위기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극복 방향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9장에서 코포라티즘의 다양성을 살펴보았다면, 이 13장에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역사적 다양성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이것의 세 가지 역사적 기원을 준별한다: (1) 1970-90년대 남아공, 브라질, 한국 등 급속한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경험한 제3세계 일부에서 전개된 “강력한 억압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매우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 (2) 1990년대 중반 이후 비즈니스 노조주의를 비판하면서 전개된 미국 노조 운동, (3) 신자유주의 하에서 “본래의 순수한 경제주의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이 정치적 지향성을 강화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선 유럽 사민주의 노조 운동. 이 일반적 분류 속에서도 그는 한국과 브라질, 남아공의 차이 또한 주목하고 있다 (474).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다양성 때문에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의 사용 범위는 무척 넓고, 그 개념적 경계는 무척 모호하다. 그냥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노중기는 여기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크게 네 가지의 이념적 지향들, 곧 민주성∙자주성∙연대성∙변혁성의 이념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노동운동의 노선”으로 개념적 정의를 분명하게 한다 (476-479).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과거 제3세계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주요 지향은 민주성(조합원의 자발적 가입과 적극적 참가,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감시)과 자주성(노조는 지배 세력의 통치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요구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자주적 기구)이었던 반면, 1990년대 이후 서구, 특히 미국의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강조점은 연대성(노조가 조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 대중과 중간계급 집단과 조직적으로 연대)과 변혁성(사회주의 사회 건설 지향)에 있었다.

지은이는 또 이러한 개념화에 입각하여 1987년 노동체제의 산물인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전투적 조합주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네 가지 요소와 함께 기업별노조 체제 및 그것에 기인한 협소한 경제주의를 동시에 내포한 운동 전략”이었다 (485). 민주노조가 법적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에게 민주성과 자주성의 확보는 당면 과제였지만, 연대성은 “기업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는” “자족적인 노조 활동을 전제로 한 연대”에 그쳤으며, “변혁성은” 과격한 구호와 이념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자유와 국가와 자본의 노조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소극적 내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진단을 통해 전투적 노조주의에 대한 국내외의 상반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87년 노동체제의 구조적 제약은 전자[민주성, 자주성]의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했고 이는 서구의 학자들에게 우리 민주 노조 운동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 반대로 1997년 이후 구조조정 정치과정에서 후자의 측면[연대성과 변혁성의 한계]이 중요해지자 사회적 노조주의 지향의 이론가와 활동가는 전투적 노조주의 전체를 부정하는 오류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487). 이 문장에 대한 각주에서 지은이는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이 사회운동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 귀결은 일본식 기업 단위 노사 협력주의(혹은 미시 코포라티즘)의 아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1987년 체제 하 노동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연발생성이 지금은 비정규 노동자들 일부에서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는 위로부터 지도부의 목적의식적 노력을 매개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운동과 미조직 부문, 비정규 노동자의 현장 의지를 묶는 이중적 전략 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이 새로운 단계 사회운동성의 핵심은 “연대성과 변혁성의 확장 및 제도화”에 있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발전방향을 언급한 것이지만, 그는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과도한 평가 또한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적 모델은 아니”기 때문이다.

13장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는데, 현재의 노동운동이 처한 내우외환을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지은이의 진단과 처방이 대부분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강요되었던 사회적 합의의 신자유주의적 결과의 파괴성이 누적된 지금 지은이의 주장은 더욱 돋보인다. 또 현 정권의 시대착오적 신자유주의 유지 기조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퇴조 흐름은 분명 경쟁력 코포라티즘으로 정리되는 사회적 합의에의 참여 압력의 명분을 대폭 침식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자신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여된 실낱 같은 희망을 실력을 통해 입증하지 못한다면, 지은이의 경고대로 일본의 미시 코포라티즘이나, 과거 멕시코의 국가 코포라티즘, 그리고 현재의 한국노총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행복한 노예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이러한 암울한 전망의 실현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좋은 책에 걸맞는 좋은 서평도 못하고 괜히 현실에 대한 갑갑함만 토로한 것 같아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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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3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9-03-13 23:37   좋아요 0 | URL
^^..님께서도 재미있어 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회운동노조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맨 마지막 장만 보세요. 요즘과 같은 시국에서는 이 책의 주요 비판 대상인 사회적 합의주의 자체가 쟁점이 아니라, 민주노총 자체의 존립 근거가 더 문제가 되기 때문에, 다른 글들은 허벅지 찔러가면서 공부한다고 마음 먹지 않으면 자칫 지루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2009-05-16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7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노중기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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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갈수록 재미있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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