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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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는 연주를 안 하더라도 연주자이다. 맞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도 있지만 안 하겠다˝라는 I would prefer not to가 소극적 저항일지 니힐리즘의 발현일지는 전적으로 그 상황에 달려 있다. 그 상황에 맞물려 있는 힘의 관계, 그리고 potentiality와 actuality가 맞물리는 순간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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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익 - 2집 푸른 베개 [일반반]
조동익 노래 / 뮤직앤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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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이)에 대한 기억을 담은 음반... 세번째 트랙 ˝푸른 베개˝에 깔린 것이 애월의 파도소리? 혹은 절물의 바람소리? 기타와 베이스가 없는 것이 의외인데, 여전히 그의 음악은 회화적이다. 희망, 열정, 분노, 상처, 모두 다 소금처럼 녹아내려 파도로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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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Alan Parsons Project - The Complete Albums Collection [11CD Boxset] - I, Robot + Pyramid + Eve + Eye In The Sky + Ammonia Avenue + Gaudi Etc.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The Alan Parsons Project) 노래 / Sony(수입)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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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흐린, 오후만 있는 토요일, 책 읽으며 듣기 정말 좋다.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충만해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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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강의 프리즘 총서 34
루이 알튀세르 지음, 황재민 옮김 / 그린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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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기원˝에 대한 프랑스식 사유. 루소에 대한 징후적 독해를 통해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제시. 인간불평등기원론의 형상이 배경으로 바뀌고, 배경은 형상으로 바뀜. 전제군주제 타도의 외침은 안 보이고, 역사를 우발적 계기에 의해 매개되는 원환들로 보는 관점이 특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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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테리 이글턴 지음, 전대호 옮김 / 갈마바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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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벌써 30년 전쯤인데,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철학이 완결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사가 끝났다는 말만큼이나 웃기는 말이지만, 이제 더 이상의 철학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때는 소련이나 동독의 철학아카데미에서 교과서로 출판한 콘스탄티노프, 스토이스로프, 오이저만 등의 변유”, “사유책들을 읽을 때였다. 요즘 젊은이들이 득템”, “꿀잼”, “아싸”, “ㅂㅂㅂㄱ”, “스벅”, “빠바”, “학식등의 줄임말을 쓰듯, 그 때 학생들도 줄임말을 썼다. “다현사”, “제론”, “사구체”, “BG”, “노급”, “NK”, “PT”, “가투”, “특위”, “CC” .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양에도 “diamat”, “histomat” 같은 말들이 있었으니까. 요즘 쓰이는 줄임말들에 비해, 그 때의 것들은 품위가 있었다고, 요즘 것들이 자본의 외화라면, 그 때의 그것들은 반자본주의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견강부회일까?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은 유물론, 더 정확히 말하면, 복수의 유물론들에 대한 간략하지만 훌륭한 소개이다. 여기에서 소개되는 유물론들은 거의 한 세대 전 내가 접했던 국가 이데올로기화된 맑스주의, “당의 맑스주의”, 그 자체로 완성된 진리인 양 제시되었던 변유”, “사유와는 상관없는 유물론들이다.


1.

물론 전혀 상관이 없지는 않다. 이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이 “the” materialism이 아니라, one of them으로 다뤄지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계기를 구성한다. 이 책의 부제는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인데, 원서에는 이 부제가 없다. 분명히 이 4인이 책 전체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저자가 이들 네 명의 이론에 초점을 맞춰 지면을 균등히 할애하는 것은 아니다. 책 전체로 보면 맑스>니체>비트겐슈타인>프로이트 순으로 비중이 크다. 이글턴은 맑스의 유물론과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이론에 내재해있는 유물론적 계기들간의 순접과 마찰의 지점들을 잘 보여주면서 이들을 재료 삼아 자신의 신체적 유물론(somatic materialism) 혹은 인간적(anthropological) 유물론의 윤곽을 제시한다. 예전의 변유, 사유가 모든 형이상학과 관념론 잡사상을 일소하는 무기로 제시되었듯, 그는 이 신체적 유물론의 잘 벼려진 칼끝을 만물이 인간의 사유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는 포스트모던 나르시시즘을 향해 겨누고 있다.


2. 유물론들

1장은 유물론들이라는 제목처럼, 이 긴 역사를 지닌 다양한 조류의 유물론들이 소개된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이후 뉴턴, 스피노자, 18세기 영국 경험론(데이빗 하틀리, 조지프 프리슬리), 셸링, 맑스와 엥겔스, 니체, 베르그송, 에른스트 블로흐 등을 거쳐서 들뢰즈의 생기론적(vitalist) 유물론, 신유물론,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문화적 유물론, 의미론적(semantic) 유물론, 캉탱 메이야수의 사변적(speculative) 유물론 등이 속도감 있게 다뤄진다. 나를 포함하여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생각했던 독자들은 이 유구한 전통과 넓은 폭을 지닌 관점 속에서 자신이 유물론이라고 알았던 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이글턴은 이 유물론들을 모두 긍정하거나, 그것들의 장점들을 조합하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유물론들의 궁지들을 드러낸 후, 자신의 신체적 유물론에 대한 소개를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이글턴이 지적하는 기존 유물론들의 궁지들, 혹은 그의 이의 제기들을 조금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변증법적 유물론은 만물에 관한 이론이 되고자 하는 열망(21)을 갖고 있지만,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20)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2) 물질을 관념화하고 에테르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생기론적 유물론은 물질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물질의 육중함을 외면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23), 우주적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인간과 물질의 구분을 없애버림으로써 관조적 세계관으로 귀착된다(27). 특히, 생동하고, 창조적이며, 욕망하고, 역동적인 영역과 안정적 물질 형태들의 억압적 영역 간의 대립을 제시하는 들뢰즈의 우주적 생기론은 (모든 사물들을 신 혹은 생명력의 측면들로 보는) 노골적인 반유물론으로 귀착된다.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처럼) 인간은 신에 준하는 존재로 격상되고, 신은 초월성을 잃고 물질적 실재와 융합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전형적 오류 - 존재는 존재를 본딴 것이고, 이에 따라 신은 전능한 Super-Object가 되어버린다 - 라 본 것에 다름아니다(29-30).  

3) 사변적 유물론자 퀑탕 메이야수는 이성적 사유의 무한성을 강조하며, 우연성을 실재의 근본적 진실로 간주한다(44). 그러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의 사유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글턴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하는 특이한 유물론자다.)


이글턴의 이러한 비판은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준거에 의해 수행된다. 그는 이 유물론을 인간과 관련해서 가장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 인간의 동물성, 실천적 활동, 신체 구조 - 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정리하고 있다(50-51).


1장에서 검토되는 유물론의 제 조류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까 싶다가, 유물론인데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이글턴의 논리가 매우 궁금해진다. 당분간 짬 날 때마다 이글턴의 다른 저작들을 읽어봐야 하겠다.


2장에서는 그의 신체적 유물론의 이론적 단초들이 검토된다. 이 책의 부제에 들어가있는 니마비프 4인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몸에 대한 통찰들이 논의된다. 부제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2장의 주인공인데, 책 전체로 보면, 이글턴은 프로이트보다 더 많은 지면을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할애하는 것 같다. 이글턴은 아퀴나스가 신체적 유물론자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유물론자이며, 그와 맑스의 인식론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71). 내가 아퀴나스를 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글턴의 아퀴나스 사랑은 다른 저작들에서도 반복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중요한 것은 아퀴나스가 훗날의 니체처럼 신체와 감각을 주변화해버린 철학들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https://blog.aladin.co.kr/eroica/11402694)를 읽으면서는 니체와 아리스토텔레스적 계기가 순접되는 것을 읽고,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는데, 이 『유물론』을 읽으면서 니체와 아퀴나스의 공통적 입장이 병치되어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그 때와 동일한 당황/흥미/쾌감(?)를 느꼈다.


3. 맑스의 신체적 유물론

3장에서는 맑스의 초기 저작들을 중심으로, 맑스가 인간을 생각하는 사물이 아니라, 활동하는 몸으로 보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까지 간과되었던 몸에 관한 맑스의 관심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맑스와) 이글턴은 감각을 지닌 몸으로 살며 실천하는 인간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고, 이 몸은 자연 현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산물(86)이며, 자연과 역사의 영역 모두에 속하는 것(89)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류의 역사의 근저에는 몸이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는 인간이 역사적 본성과 자연적 역사를 동시에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글턴은 여기에서 역사를 갖는다는 말의 의미를 훌륭하게 풀어낸다(89-97). 맑스가 유적 존재라고 칭한 인간의 물질적 본성에는 자신의 실존 조건들을 바꾸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이 역사를 갖는다는 말이 뜻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가져야 한다는 결정은 (자연의 일부인) 몸이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기반해서 맑스에게 몸(으로 수행하는 노동과 몸과 떼어서 논할 수 없는 섹슈얼리티)은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지점이다(98-99).


이글턴의 논리 전개가 뛰어난 것은 신체적 유물론자로서의 맑스의 모습을 소묘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역사적 유물론과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교환가치와 도구적 합리성은 감각이 그 자체로 인식하는 대상의 특수한 질(사용가치)을 탈물질화하는 힘(86)으로서, 생산자의 몸을 그 자체의 감각 능력을 지닌 것으로 보지 않고, 노동하는 도구로 격하시킨다(101). 베버가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찬양하였던 금욕주의는 사람의 몸에서 실체를 빨아들이는 흡혈귀인 자본의 마수에 걸린 소외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102). 이처럼 자본주의는 인간을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시킨다”(103, 『경제학-철학수고』). 따라서 사회주의의 목표 중 하나는 몸이 강탈당한 역량들을 몸에게 돌려주어 감각들이 제구실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103-104).


3장은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에서 제시된 많은 주제들을 다른 앵글에서 잡은 샷들을 보여줘서 더 재미있는데, 그 중 하나가 토대-상부구조에 관한 논의이다. 그 책에서 토대-상부구조를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탁월하게 재해석해냈는데, 이번에도 이와 관련된 흔한 오해를 정정하며, 새로운 해석을 선보인다(109-112).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처럼 행동이 사유를 결정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여기에서 의식에 대한 존재의 선차성은 사유가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몸과 욕구의 산물이라는 점을 뜻한다. 그리고 의식은 법, 예술, 정치, 이데올로기 같은 상부구조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활동에 내재하는 사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은 맞지만, 행동이 사유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의식은 사회적 존재의 한 부분이므로, 존재로부터 독립적인 의식을 상정할 수 없다. 이 분리 불가능성은 선차성이 결코 아닌 것이다. 사유가 물질적 실재로부터 자유롭다는 착각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라는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117-118).


이처럼 맑스는 철학을 철학 너머의 영역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한다. 니체와 비트겐슈타인도 다른 방식으로 이를 수행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발리바르가 반철학자로 부른 유형에 해당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4. 니체: 보이스카웃 정신으로 가득찬 개인 트레이너

3장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맑스와 니체가 이글턴의 뇌 속에서 때로는 어깨동무도 하고 때로는 주먹다짐도 하는 모습이 제시되는 4장이 가장 재미있었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를 읽으면서 일었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니체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생긴 몇몇 의문들도 해소할 수 있었고, 니체에 대한 나의 미심쩍음의 정당함의 근거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니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단지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ㅎㅎ..


먼저 맑스와 니체의 공통점부터 보자. 두 명 다 고귀한 것이 저속한 것에 기원을 둔다고 보며, 앎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몸이 앎의 토대라고 보는 유물론자이다.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둘 다 권력에 관심을 기울이며, 관념론의 위로를 경계하는 비도덕주의자이며, 인류 역사를 폭력, 갈등, 억압의 피비린내 나는 서사시로 이해하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역사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역사주의자이다. 이글턴이 보기에, 이들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보다 나은 미래가 오리라는 희망으로 그 공포조차 직시하는 비극적 사상가들이다. 이 두 사람이 다 받아들이는 낭만주의적 자기실현의 윤리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자기 역량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또 이 둘은 추상적인 평등관을 거부한다.

 

양자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저자의 관심을 공통적인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요소들을 갖고 있다. 이글턴은 이를 다음처럼 잘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다.


1) 맑스라면 세계를 몸들이 다른 몸들을 지배함으로써 성장하고 번창하려는 장소로 보는 니체의 관점, 곧 권력의지에 대한 논의를 일종의 우주적 자본주의로 일축했을 것이다(126),

2) 맑스는 역사로부터 이해가능한 패턴을 식별해내려고 하는 반면, 니체는 역사를 무의미와 우연의 섬뜩한 지배로 본다(127).

3) 인류의 역사는 니체에게 극소수의 초인이 도래함으로써 극복되는 반면, 맑스에게는 공산주의라는 더 보편적인 구원이 상정된다(128).

4) 맑스는 종교를 이데올로기와 똑같이 일축했지만, 니체는 종교를 장황하게 공박한다.

5) 삶을 도덕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생각한 니체는 대부분의 도덕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번영(human flourishing)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반면, 맑스는 행위자의 역량을 상호적으로 타인들의 유사한 자아실현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권장할만한 기준으로 갖고 있다(148).


맑스(1818-1883)는 니체(1844-1900)를 몰랐고, 니체는 여러 저작에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표시하면서도 정작 맑스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듣보잡였을까? 맑스가 니체를 몰랐던 것은 이해가 가지만, 니체가 맑스를 몰랐다는 것은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사상가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은 걸출한 학자들 베버, 푸코, 들뢰즈 등 도 정작 양자를 비교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못 봤다. 그러므로 나는 맑스와 니체의 이러한 비교 자체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글턴이 제시한 벤다이어그램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비극적 역사관을 지닌 신체적 유물론자라는 교집합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을 보라」의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1015828)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표시한 바 있다.

19세기 말 니체는 도덕을 비판하였다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에 니체 혹은 니체주의가 비판하는 것은 무엇인가그것도 도덕인가? 그렇다면 오늘날의 도덕은 무엇이고, 아니라면, 도덕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가?”


이글턴은 그 때의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줬다. 니체에게 도덕은 삶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사람들을 길들이고, ⓑ진실을 부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144). 다 니체의 저작 어디에선가 본 말들인데,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저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없었다. 오늘날의 도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올 수가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도덕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실마리를 얻은 것 자체로 큰 수확이다.


이글턴은 맑스와 니체 사이에서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니체 저작의 급진성들을 상당히 잘 정리하면서도 초인이라는 니체의 정치적 해법에 대해 부정적이다. 아마도 이는 그가 숙적으로 삼고 있는 포스트모던 나르시시스트들이나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니체 사랑이 못 마땅하기 때문인 것 같다. 두 가지만 보자. 먼저, 이글턴은 높은 산을 홀로 오르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니체의 저술들에서 보이스카우트 증후군을 읽고, 그가 개인 트레이너처럼 몸의 건강, 정신의 쾌활함, 힘 등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니체가 대학생 시절 매독에 걸린 덕일지도 모른다고 야유한다(136). 이글턴의 조롱과 야유는 니체 특유의 조롱과 야유의 뺨을 친다. 둘째, 이글턴은 니체의 저작에 대중의 끔찍한 복수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고 본다(131). 니체를 따르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니체의 정치학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회피한다(132). 니체의 극우파적 기질에 대한 변호는 그가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를 혐오했다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약자들과 체질이 나쁜 자들은 소멸할 것이라는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가 한 말을 오버해서 악의를 갖고 해석해보자면, 기저질환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오늘날의 코로나19바이러스 팬데믹이 바로 니체가 바라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혁명적 좌파는 니체와 싸울 수밖에 없다고 이글턴은 주장한다.


5.

마지막 5장의 주인공은 비트겐슈타인인데, 잘 모르고 별 관심도 없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갔다.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이글턴은 맑스, 니체, 아퀴나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를 신체적 유물론자로 보면서 자신의 관점을 정립하고 있다. 위에서도 썼듯, 나에게는 맑스와 니체에 대한 이글턴의 통찰이 돋보였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은 또 다른 느낌을 갖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맑스는 잘 모르지만 니체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꽤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대학교 1, 2학년 때 "변유", "사유" 읽은 것으로 스스로를 유물론자로 칭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유물론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고민을 안 하게 해준 것은 물론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은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였지, 실제로 어떤 지적 문제를 해결해주었을까? 아니 그러려고 노력한 적이 있나? 물론 그 때까지 나를 오래 짓누르던 종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했고, 이 진리가 나를 자유케 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고의 투철함으로 이어졌던 것 같지는 않다. 이글턴은 내게 유물론의 내용뿐만 아니라, 유물론자의 지적 투철함까지도 보여 준 것 같다.


나를 매료시킨 이글턴의 책들을 당분간 읽어나갈 생각이다그리고 이글턴 읽기보다는 좀더 힘든 니체 읽기도 지금 당장은 못 해도 짬짬이 해나갈 것이다아마 다음에 니체를 읽을 때에는 니체를 읽으면서 느끼는 내 불편함에 조금은 더 자신감이 생길 것 같다.


6. 번역

번역은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긴 문장을 짧게 잘 끊어 번역하면서도 이글턴의 유머 감각을 옮기려고 한 점이 엿보인다. 그런데 번역자가 헤겔 전공자여서 그런지, object / objective / objectification을 무조건 객체”/”객체적”/”객체화로 번역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 “객관적”, “대상화라고 옮기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 때가 간혹 있었다. mode도 거의 양태로 옮기는데, “양식으로 옮겨야 맞거나 더 자연스러운 곳도 있었다. 반면, 15-16쪽에서는 mind spirit을 구분하지 않고 다 정신으로 옮겨 놓았다. 이해할 만한 번역의 어려움인데, 뭐라 번역하면 더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은 내가 읽기에 오역 같은 것들 아니면 좀 어색한 부분들이다.


p.29: 들뢰즈는 제약(constraint)을 부정적으로만 본다. 이 관점은 저잣거리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한다. 시장 이데올로기 (marketplace ideology): 자유방임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p.30: 전능한 주체-객체 (an all-powerful Super-Object): 하이데거의 개념 중에 Supergegenstand라는 것이 있나 본데, “초대상쯤 될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떻게 번역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저 주체-객체는 오역 같다.


p.35: 비개인적 힘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들도 우리를 방해한다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에게 부과된다?) (They, too, weigh in upon us like impersonal powers,)


p.49: “세계가 환상이라면앞에 “(속류 힌두교의 주장처럼)” 누락.


p.72: “역사적 생산양태와 같은” → 역사적 생산양식과 같은


p.85: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포이어바흐에 관한 첫 번째 테제


p.87: (commodification)


p.90: (bearers)


p.106: 후자의 상태를 상태를


p.126: 세계를 모든 물체모든 물질적 신체 (every material body)


p.127: 도덕 도덕주의자


p.127 / p.173: 분쟁 갈등(conflict)


p.137 11: “반영한다.”사물에사이에 한 문장 누락. The strongest will is one that can dispense with the myth of inherent meaning. 가장 강한 의지는 내재적 의미라는 신화 따위는 필요없는 의지인 것이다.


p.155: 볼 일 없는 특색 없는(nondescript)


p.166: 거품 찌꺼기 인간 쓰레기 (scum)


p.168: 존적인 인지 양의지할 만한 (dependable) 인지 양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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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4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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