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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데올로기 1 ㅣ Marx Engels 전집 3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병창 옮김 / 먼빛으로 / 2024년 5월
평점 :
0.
<독일 이데올로기> 완역 소식을 듣고, 역자께서 대단한 일을 해내셨다 생각하면서 기뻤고, 책값이 너무 비싸서 슬펐고, 두 감정 사이에서 내 방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며 현타가 왔다.
'그래... 그냥 기뻐만 하자.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라, 둘 곳이 없어서 못 사는 거다..'
그리고 도서관 가서 이 책을 구경하면서 의문을 갖게 되었다. <독일 이데올로기>가 원래 이렇게 두꺼운 책이었던가? 영어판도 축약본이었나? 그러고 잊어 먹었었다.
영어판 <독일 이데올로기>는 모스크바에서 펴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5권에 실려 있는데, 두레판은 이 중 제1권은 2장 "성 브루노"까지, 제2권은 1장 앞부분만이 번역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영어판에 있는 제1권 3장 "성 막스"(영어판 기준 336쪽)와 제2권 4장과 5장(56쪽)이 누락되어 있다. 영어판이 520쪽쯤 되니까, 그 중 128쪽만이 번역되었고, 나머지 392쪽이 번역되지 않은 채 출판된 것이다. 영어판 <독일 이데올로기> 중 25% 정도만이 한글로 번역된 거였다.
의미심장한 것은 두레판이 처음 출판된 것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였다는 점이다. 세상 일이 그렇겠지만, 그 전까지 한국 좌파들은 맑스와 엥겔스보다는 레닌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할 때쯤에야 한국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맑스와 엥겔스의 원서들이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맑스 책을 누가 읽는가?

1.
오랜만에 <독일 이데올로기>를 펴볼 일이 있어서, 다시 도서관에서 빌리고, 원래 갖고 있던 두레에서 나온 <독일 이데올로기 I>(김대웅 역)과 함께 봤다. 쉽지 않았다.
일부지만 영어판을 번역한 두레판과 문단의 순서가 엉키는 곳이 적지 않았다.
<옮긴이 후기>를 보니, <독일 이데올로기>는 MEW판, 바가투리아판(MECW), MEGA2판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하며, 내가 알고 있는 영어판은 바가투리아판였던 것이다.
이 책은 MEW판을 기준으로 하고, 나머지 두 개 판본의 장점을 수용했다고 하고, 번역에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역자가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2.
내가 찾는 구절을 이 완역본에서 찾는 데에 한참 걸렸다. 두레판에서는 금방 찾았는데, 한참을 앞뒤로 오가다 한 구절은 드디어 찾아냈다. 그런데 다른 한 구절은 찾을 수가 없다. 두레판에서도 번역이 안 된 부분인데, 1장 포이어바흐 중 "인간의 해방"을 다루는 문단(MECW. 5: 38)은 도통 찾을 수가 없다.
두레판을 보니, 마지막으로 펴보고 표시해둔 것이 테리 이글턴의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를 봤을 때다. 그때 쓴 리뷰를 보니 2019년이다. 6년 전이군. 다음에 또 언제 <독일 이데올로기>를 펴볼 것인가?
3.
신유물론 관련 서적을 보거나, 누가 거기에 대해 발표하거나, 그후 뒷풀이 자리에서 낄낄거리며 술 마실 때, "신유물론 이전의 유물론(이라고 말하거나 쓰지만 실제로 그들이 말하는 건 주워 들은, 혹은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머릿속의 의식이 가공해낸 맑스-레닌주의의 이미지다)은 다 인간중심주의다" 따위의 소리를 듣는다.
술자리라면 분위기 싸해질까봐 못하겠지만, 공부하는 자리라면 할 말이 생겼다.
맑스가 말한 "인간"은 포이어바흐까지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하는 "인간"을 비판하면서 나온 대안적 개념으로서의 "인간"이다. 곧 사회적 관계가 소거된, 역사가 소거된, 자연과 관계하지 않는 인간, 몸과 감각이 없는 독일인에 대한 비판으로서 (자신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인간"이지, 자연을 식민화하여 수탈하는 인간,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대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투사하는 (브뤼노 라투르의) 근대인이 아니다!
19세기 사람 맑스가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21세기의 우리처럼, 일요일 아침이면 SBS _TV 동물농장_을 보고 울고 웃으며, 도나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을 읽은 우리처럼, 사고하지 않음은 너무 당연한 거 아닐까? 맑스도 말하지 않는가? 자연적인 조건들을 다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을 양해해달라고(49). 양해해주는 것이 맞다. 꼬투리 잡지 마라!
덧>
번역자께 정말 감사 드리지만, 난 mode of production을 "생산방식"(50쪽)으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래 밑줄긋기에 인용한 번역은 훌륭한 번역이다. "방식"이란 말이 문맥상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래도 난 이런 식으로 한국 맑스주의에서 통용되던 번역어가 지워지는 것이 싫다.
맑스 전공자 아닌 분들이 맑스나 맑스주의 관련 서적 번역할 때, mode를 "방식"이나 "양태"로 번역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그냥 오랫동안 통용되어온 말로 써주세요. 물론 번역이 문제가 되는 첨예한 용어가 있겠지만, 이건 그냥 "생산양식"으로 해주세요!!
인간이 자신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방식은 일단 이미 현존하고 있으며 재생산되는 생존수단 자체의 특성에 달려 있다. 생산방식은 단지 이 생산을 통해 개인의 신체적인 현존이 재생산된다는 측면에서만 고찰되어서는 안 된다. 생산방식은 그보다는 오히려 개인이 활동하는 특정한 방식이자, 개인이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특정한 방식이고, 개인의 특정한 삶의 방식이다. 개인은 그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존재한다. 그러므로 개인이 무엇인가는 그의 생산과 일치하며, 그가 무엇을 생산하는가와 일치하며 또한 그가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개인이 무엇인가는 이런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 달려 있다.
생산은 처음에 인구의 증가와 함께 등장한다. 생산 자체는 다시 개인의 상호 교류를 전제한다. 교류의 형식은 다시금 생산을 조건으로 한다. - P50
삶의 생산이란 곧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생산하는 것이며 동시에 증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삶의 생산은 본래 이중적인 관계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관계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때 사회적 관계란 그 조건과 방식 아울러 그 목적이 어떠하든지 간에 여러 개인의 공동 작업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이 도출된다. 즉 특정한 생산방식 또는 산업화의 단계는 언제나 공동작업의 특정한 방식이나 사회의 어떤 단계와 일치하며, 바로 그런 공동작업의 방식 자체가 하나의 "생산력"을 이룬다는 점이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점도 도출된다: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생산력의 양이 사회관계를 제약하며 따라서 "인류 역사"는 언제나 산업 또한 교환의 역사와 연관해 연구되고 검토돼야만 한다. 그런데 어째서 독일에서 이러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 독일인은 ..."확실한 감각"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 P66
... 의식 또한 처음부터 "순수한" 의식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저주스럽겠지만, "정신" 자체는 처음부터 물질에 "매달려" 있다. 여기서 물질은 진동하는 공기층이나 음성, 간단히 말해 언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언어는 의식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언어는 실천적 의식에 속하며, 타인에 대해 현존하는 때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현존하는 실제적인 의식이다. 의식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욕구에서, 타인과 교류할 필요성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내 주변에 대한 나의 관계가 나의 의식이다. 어떤 관계가 현존한다면, 그 관계는 나에 대해 현존한다. 동물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계하지" 않으며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동물이 다른 동물과 맺는 관계는 그 동물 자신에게는 관계로서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식은 처음부터 이미 사회의 산물이다. - P67
당연히 의식은 처음에는 감각에 가장 가까운 주변에 관한 의식이며, 자기의식의 능력을 지닌 개인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 그리고 타인과 국부적으로 맺는 연관에 관한 의식이다. 동시에 이 의식은 자연에 관한 의식이다. 처음에 자연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낯설고 전능하며 또 감히 넘볼 수 없는 힘으로 마주한다. 인간은 이 힘에 그야말로 동물적으로 관계하며 또 이 힘 앞에 인간은 가축처럼 무기력하다. 그러므로 이런 의식은 자연에 대한 순전히 동물적인 의식이다(이때가 자연종교의 단계이다). - P68
{개인을 동물에서 구별해주는 첫 번째 역사적 행위는 인간이 사유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생존수단을 스스로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확인돼야 하는 역사의 성립 요건은 개인의 신체 조직이고 개인이 신체적인 조직을 통해 나머지 자연과 맺는 관계이다. 여기서 우리가 인간 자신의 물리적인 상태나 또 인간이 눈앞에 발견하는 자연적인 조건, 이를테면 지질학적, 지리학적, 지형학적 또는 기상학적인 상황 그리고 나머지 다른 상황까지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은 양해해 달라. {그러나 [개인과 자연의] 이러한 관계가 원초적인 신체 조직 즉 자연적으로 성장한 인간의 신체 조직을 말하자면 종족의 차이를 제약할 뿐만 아니라 그 후에 계속되어 오늘날까지 이른 모든 인간의 더 나아간 발전 또는 미발전도 제약한다.} 모든 역사 서술은 이런 자연 토대에서 그리고 역사가 지나면서 인간 행위를 통해 자연 토대에서 일어난 변용에서 출발해야 한다. - P49
...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를 다루는 중요한 문제는 (브루노의 표현인 "자연과 역사의 대립"(『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특징』110쪽)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된 두 가지 "사물"이며, 인간은 역사적 자연과 자연의 역사와 언제까지나 직접 대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지만, 심지어 이런 표현조차도) "실체"와 "자기의식"에 관한 "헤아릴ㄹ 수 없이 고매한 철학적 작업"을 불러일으키지만, 다음과 같은 통찰을 통해 저절로 해소된다. 그 통찰이란 즉 그토록 잘 알려진 "자연과 인간의 통일"이란 일찍부터 존재했으며, 시대마다 산업이 조금 더 발전함에 따라서 이런 통일은 다르게 성립했으며 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투쟁"도 마찬가지였으니 이런 투쟁은 생산력이 그것에 상응하는 토대 ㅜ이에서 발전하게 되기까지 일어났다는 통찰이다. - P95
매뉴팩처가 시작하자 그것과 동시에 유랑민의 시대가 등장했다. 유랑민 시대의 원인은 봉건적 봉사체제가 폐지되면서 국왕이 봉신에 대항하기 위해 고용했던 용병이 해산된 사실과 또한 경작 방식이 개량되고 광할한 경작 지대가 목초지로 전환된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랑민의 발생이 봉건제의 해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이미 13세기에도 비슷한 유랑민의 한 시대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일반적이고 지속해서 나타난 것은 비로소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이런 유랑민이 얼마나 많았던지, 특히 영국의 헨리 8세는 그중 12,000명을 교살했을 정도였다. 유랑민에게 노동을 시키는 일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었으며 유랑민은 극심한 빈궁을 겪을 때만 그리고 완강하게 저항한 다음에야 비로소 노동했다. 영국에서만큼은 매뉴팩처가 급속하게 번창함으로써 유랑민을 점차 흡수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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