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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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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들을 걸러가면서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오역이 주는 짜증보다는 글이 주는 재미가 더 크다. 


자신의 Situated Knowledge를 사람들이 오독하는 것에 대해서 해러웨이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그게 아니라 이거다... 친절한 다나씨 되시겠다.

"상황적(situated)"이라는 말이 반드시 장소를 의미하는 게 아님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위치(standpoint)라는 표현은 잘못된 은유일 수 있지요. 가끔 사람들은 "상황적 지식" 챕터를 약간 평면적인 방식으로 읽는 것 같습니다. 단지 당신의 신분확인 표시가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이 문자 그대로 무엇인지를 의미하는 거라고 읽지요. 이런 의미의 "상황적"은 한 장소에 있는 것만을 의미하게 됩니다. 반면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상황적이 상황적이라는 사실입니다(what I mean to emphasize is the situatedness of situated). 달리 말하자면 저는 장소와 공간을 모두 망라하는 다층적인 끼여 넣기 양태에 도달하려는 거지요. 지리학자들이 장소와 공간의 특성을 그리는 방식 같은 겁니다. - P126

또 달리 말하자면 과학적 객관성의 컨텍스트 안에서 페미니즘의 설명가능성(feminst accountability; 페미니스트로서의 책임)에 대해 말할 때 이분법이 아닌 공명에 맞추어진 지식(a knowledge to resonance, not to dichotomy)을 요구한다고 토론하는 겁니다. (영어판, p. 71) - P126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에서는 기생충의 관점에서 볼 때 숙주가 그 기생충의 표현형(phenotype)의 일부입니다. 거는 그런 일종의 확장됨 몸에서는 자기와 타자가 어떤 의미에서는 관점의 문제라는 주장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이 자기라고 간주되는지, 그리고 무엇이 타자라고 간주되는지의 문제는 관점의 문제이거나 혹은 목적의 문제입니다. 어떤 경계들이 어떤 컨텍스트 안에서 견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생충의 관점에서 보면 숙주는 자기자신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숙주의 관점에서 보면 기생충은 침입자처럼 보입니다. ... 숙주의 관점에서 보면 치명적인 친근한 관계가 존재합니다. ... - P130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면 감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도 없는 거지요. 질명은 관계입니다. - P131

환상적인(fantastic) 것, 신화적인(mythological) 것, 이데올로기적인(ideological) 것 등 이 세 개를 다른 상상적 관게의 등록으로 유지하는 게[하나의 상상적 관계의 세 가지 상이한 기입으로 분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상적인 것은 개별적으로 일어날 뿐 아니라 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정신역학(psychodynamic) 과정들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와 관련이 있어야 하며, 사회적 이해관계를 재현하거나 잘못 재현한 관념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말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하나의 괜찮은 정의이지요. 그리고 신화적인 것은 서사(narrative) 및 이야기하는 실천(storytelling practices)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스토리들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개는 서로 연관이 있지만 상대방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어요. 이들은 다른 종류의 의미작업(meaning work)을 합니다. - P134

생물학은 분명 메타포로 가득 차 있으나 메타포 이상의 것이지요.

구디브: ... "메타포 이상의 것이다"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해러웨이: 생물학에서 발견되는 생리학적∙담론적 메타포들뿐 아니라, 스토리들도 의미하는 겁니다. ... 생물학은 어떤 다른 걸 밝혀주는 메타포일 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가 아닌 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고갈되지 않는 원천이에요. 또한 저는 사실과 픽션, 물질성과 기호성(semioticity), 대상(object)과 전의(trope, 비유) 등의 동시성에 주목하기를 원하지요.

구디브: 당신은 이런 문자 그대로의 생물학적 실재물들(entities)이 또한 "생명," 즉 생물학적∙존재론적 체계들을 이해시키는 매우 강력한 은유라고 말하시는군요. - P140

G: ... "세속적 실천"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H: 몸의 생리현상, 혈액과 호르몬의 흐름, 화학적인 것의 작용 - 유기체의 육체성 - 이 그 유기체의 전체 삶과 서로 맞물리는 내파된 물체들의 집합을 의미합니다. ...

G: ... 왜 "세속적"이란 단어를 선택했는지 궁금하군요.
H: 저는 실재론과 상대주의간의 논쟁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 단어를 선택했어요. ... 저는 죽어야 할 운명, 유한성, 육체성, 역사성, 우발성 같은 것들에 몰두하기 때문에 "세속적"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기를 잘 했어요. 세속적이라는 단어는 또한 권력과 돈 같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의미하지요.
G: ... 세속적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 관한(earthly) 단어이며 근거가 확실한(grounded)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공공연하게 허세부리지 않습니다. - P181

실뜨기놀이는 당신 손으로 할 수 있는 놀이예요. 그러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 더 재미있어요. 그것은 결투가 아닌 관계성을 구축하기 위한 형상입니다. ...

실뜨기 놀이는 유일의 모델이 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지요. 우리에게는 반대의 적대적 입장을 취하고 싶은 많은 기술과학적 실천들이 있어요. 우리에게는 가끔 경쟁과 싸움, 그리고 군대 은유들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조화와 집합성이라는 은유는 둘 다 이야기 전체가 아니지요. 그런데 그동안 기술과학 내에서는 결투(agonism)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어요. 저는 구체적으로 브루노 라투르의 책 Science in Action의 여러 양상들에 대해 반대하여 그 논문("포스트모던 몸의 생명정치")을 쓰고 있었어요. 라투르의 책은 결투와 전토의 은유들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거든요. 실뜨기놀이의 비유는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이에요. 그러므로 그것은 컨텍스트적인 은유지요. - P242

사람들은, 겸손의 이중적 의미 - 사라지기, 혹은 무능력한 것으로 잘못 듣게 되는 숨기 - 때문에, 겸손을 희생자가 되는 거라고 오해해요. 진정한 겸손은 당신이 특정한 재주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달리 말하자면, 강력한 지식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거예요. 어리석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목격과 증언에 굴복하는 겁니다. 제가 주장하는 종류의 겸손한 목격자는 상황적임을 고집하는 사람이에요. 여기에서 상호아적이라 함은, 위치가 그 자체로 유산일 뿐 아니라 복잡한 구성물인 곳을 말하지요. ... 목격자는 참여하지 않는 관찰자가 아니며 화성인도 아니에요. ... 목격자는 어떤 진리들과는 다른 진리들을 증언하는 것이므로, 언제나 위험에 처합니다. 당신은 목격을 인내합니다. ... 그들은 또한, 목격하고 진실을 말하는 걸 자신들의 책임으로 삼으며, 진실을 말하는 필요조건 속에 연루되지요. ... 여기에서 진실(truth)은 ... 역사를 초월하거나 역사 밖에 있는 진리가 아니에요.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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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 - 페미니즘과 기술과학 아우또노미아총서 14
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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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러웨이의 스트래선에 대한 의존은 여전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분적 연결들>이 아니라, 90년대 초반의 저작들이 인용된다. 


figuration과 figure(50~)를 둘 다 "비유"로 번역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자는 "형상화"로 후자는 "형상" 또는 "인물"로 옮겼어야 옳을 것 같다. 물론 이 한국말들이 다 커버하지 못하는 뜻이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비유"보다는 낫다. "비유"로 옮겨서는 안 되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푸코의 "생명정치"를 해러웨이가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오랜 궁금증을 조금 풀어주었다. Sarah Franklin의 "생명 그 자체(life itself)"라는 개념이 푸코의 "생명정치"와 해러웨이의 "technobiopolitics"를 매개하는 것 같은데, 프랭클린은 누구인가? 처음 봤다. 


참고문헌에는 르 귄의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이 있는데, 색인에는 르 귄 이름이 없어서 어디에서 어떤 맥락으로 인용되는지 한참 찾았다. 6장의 450쪽 각주 30번(영어판 미주 14번)에 나온다. 나중에라도 다시 보게 되면 잘 봐야지...


라투르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맑스에 대한 참조들도 눈에 띄는데, 이것 역시 나중에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제 짬은 그만 내고, 도망친 할 일로 다시 돌아가자. 에효~

아리스토텔레스의 "figures of discourse(담론의 비유?)"는 수사학상의 공간적 배열에 관한 것이다. figure는 기하학적인 동시에 수사학적이다. topics와 tropes는 둘 다 공간적 개념이다. "figure"는 프랑스어로 얼굴을 뜻하는데, 영어에서는 이야기의 윤곽이라는 개념의 뜻을 보유하고 있다. "To figure"는 세다, 계산하다를 의미하며, 또한 이야기 속에 끼다, 역할을 맡다 등을 의미한다. figure는 또한 그림그리기이다. figure는 graphic representation과 시각 형태 일반과 관련이 있으며, 이 사실은 시각적으로 포화된 기술과학 문화에서 적지 않은 중요성을 띠고 있다. figure는 반드시 재현적(representational)이거나 미메시스일 필요는 없지만 비유적(tropic)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figure는 문자적(literal)이거나 자기동일적(self-identical)여서는 안된다. - P55

Figures는 동일시와 확실성에 문제를 일으킬(trouble) 수 있는 자리바꿈(displacement)을 적어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Figurations는 그 안에 살 수 있는 수행적 이미지들이다. 말로 된 것이든 시각적인 것이든, figurations는 경합적인 세계들이 압축되어 있는 지도일 수 있다. 수학을 포함한 모든 언어는 figurative하다(비유적이다). 곧 비유들(tropes)로 이뤄진다. 곧 우리를 literal-mindedness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bump들로 구성된다. 나는 figuration이 모든 물질-기호론적 과정들의 비유적(tropic) 성질을 명백하고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것을, 특히 기술과학에서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 P55

Figures는 언제나 해석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종의 시간적 양상(temporal modality)을 동반한다. 나는 푸코(1978)의 생명권력 개념이 신체에 대한 관리행정(administration, 경영), 치료, 감시를 통해 그 살아있는 유기체의 힘을 담론적으로 구성하고, 증가시키고, 관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푸코는 자위행위를 하는 어린이를 묘사함으로써 그의 이론적 개념에 형상(shape)을 부여한다. 이 아이는 맬더스적인 커플, 히스테리컬한 여자, 그리고 동성애자 변태의 형상들을 재생산한다. 이 생명정치적인 형상(인물)들의 시간성은 발전적(developmental)이다. 이들은 모두 건강, 퇴화, 그리고 생산 및 생식의 유기적 효율성 및 병리학의 드라마 등과 연관되어 있다. 발전적 시간은 기독교 리얼리즘 및 기술과학적 휴머니즘의 속성인 구원의 역사의 시간성의 합법적 계승자인 것이다. - P56

이와 유사하게 나의 사이보그 형상들(figures)은 내가 기술생명권력(technobiopower)이라고 부르는 돌연변이의 시간-공간 체제 내에 거주한다. - P57

수렵인 남자(Man the Hunter)가 전후의 보편적 인간 가족 속에서 기술, 언어, 혈연관계의 결속을 구체화하였다. 동일한 적응행동 속에서 기술과 기호학의 어버이인 -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어버이인 - 수렵인 남자는, 아름답고 기능적인 최초의 물건들을 만들었고 최초의 중요한 말들을 말하였다. 이 설명 속에서 수렵은 경쟁과 공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손-눈 협조 체제를 가진 활보하는 두 발의 原人들(protohumans)에게 가능했던 새로운 생존 전략에 관한 것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거대한 두뇌와 힘든 출생을 획득하게 된 이 존재들은, 짝들과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서로 간에 전리품을 공유하는 맥락 속에서, 협동, 언어, 기술, 여행욕구 등을 개발하였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수렵가설에서는 수컷들이 인간 진화의 능동적인 추진력으로 간주되었으나, 그런 논리는 1970년대에는 지나치게 강요되지 않았다. - P449

1970년대에는 채집인 여자(Woman the Gatherer)가 전면에 부각되었고, 여성 오르가즘이나 아이에게 유용한 아빠를 여성이 선택하는 것 같은 몇몇 쓸모있는 가족 개혁들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아기 멜빵(baby slings), 뿌리와 견과류를 담는 가방(carrying bags), 성인들의 일상적인 가십, 아이들에게 말하기 등이 날렵하게 잘 빠진 발사체(elegant projectiles), 모험으로 가득찬 여행, 정치적 웅변, 위험에 맞서는 남성적 단결들로 이뤄지는 시초에 관한 드라마(originary drama)와 경쟁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각주 30에서 다른 페미니스트 저작들과 함께 Le Guin(1988)이 나옴.] - P450

회절 Diffraction - P63

... 나는 이 책을 <회절>Diffraction, 즉 린 랜돌프가 그린 분열된 인물(a split figure)의 그림으로 끝맺는다. 그 분열된 인물은 얇은 막을 통해 하나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 세계에서는 간섭패턴들 때문에 의미가 만들어지고 체험되는 방법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 P61

내가 발명한 의미론의 범주인 회절은 서양 철학 및 과학에서 너무나 일반적인 광학적 은유 및 도구를 이용한다. 반영성이 비판적 실천으로 추천되었으나, 나는 반영성이 반사처럼 동일한 것을 다른 곳으로 환치할 뿐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리고 복제와 원본에 관한 근심과 믿을 만한 것과 정말로 실재하는 것에 관한 탐색 문제를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반영성은 기술과학의 지식 속에 있는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과 상황적 지식에 관해 사고할 때, 리얼리즘과 상대주의 사이에서의 잘못된 선택을 피하기에는 나쁜 전의(bad trope, 부적절한 비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기호적 장치들 사이에 차이를 낳는 것, 기술과학의 광선을 회절시켜 우리의 생명과 몸의 기록 필름 위에 보다 유망한 간섭패턴을 얻는 것이다. 회절은 세계 속에 차이를 낳으려는 노력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광학적 은유이다. - P63

린 랜돌프의 ... 그림은 다른 곳으로 치환된 동일한 것의 반사가 아닌 간섭패턴을 그리고 있다. 랜돌프는 페미니즘 해석에서나 기술과학 해석에서나 내가 속한 문화의 편협한 천년 말(the end of the millennium)을 전의로 표현할 수 있도록 강력한 비유(figure, 형상!)를 제공해주었다. 다시 말하자면 랜돌프의 여성은 천년 말이 빗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을 고려하기 위한 장치이다. 목적론에 탐닉했던 사람들이 막판에 그 이상 더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겟는가? - P64

회절 패턴은 상호작용, 간섭, 강화, 차이의 역사를 기록한다. 회절은 원본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질적 역사에 관한 것이다. 반사들과 달리, 회절들은 동일한 것을 다소 왜곡된 형태로 다른 곳으로 추방하지 않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산업들을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회절은 이 고통스러운 기독교 천년 말에 또 다른 종류의 비판적인 의식을 표현하는 은유일 수 있다. 동일함이라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만드는 데 몰두하는 은유일 수 있다. 회절은, 보다 정설적인 표명 뿐 아니라 신성하고 세속적인 기술과학적 설화들 속에서, 기독교 서사와 플라톤주의의 광학이 비스듬히 일그러진 것이다. 회절은 여러 중요한 의미들을 만드는 서술적·그래픽·심리학적·정신적·정치적 기술이다. - P503

<기만당한 여자들: 경계선 밖의 여성들에 대한 표현> 연작을 위해 그린 이 그림에 관해 랜돌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여성의 삶 속에서 강력한 남성 비유에 관한 차단된 기억은, 변화가 일어나는 장소를 나타낸다. 연륜 및 정신적 변형에 따라 발생하는 추이들, 한 몸에 통합되어 있는 여러 자기들selves이, 두 개의 머리, 여분의 손가락, 중간 지대에 있는 형이상학적 공간 등등으로 표현된 이 중앙에 있는 인물로 구체화되어 있다. 회절은 미지의 세계라는 심연 앞에 놓여 있으며, 미래의 가장자리에 있는 한 장소에서 발생한다. 은하수에 있는 그 물질의 구조적 패턴은 목련 꽃에서도 반복될 수 있으나, 이런 생산은 아마도 텍사스 출신의 화가들에게는 특이한 시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문제가 되는 몸들을 창조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 P503

동시대의 여성들은 여성들의 현실을 SF세계 속에 놓음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간접 패턴으로 구성된 장소에 놓음으로써, 동일함이라는 성스러운 이미지와 다른 어떤 것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부적절하고, 기만적이며, 적합하지 않은, 마술적인 어떤 것, 즉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우리가 이것(즉,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어떤 것 - 역주), 즉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이것에 대해 능동적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 현실적이며(자연적이지 않으며), 삶의 불결함으로 인해 더럽혀진 이것에 대해 능동적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1993: 9). - P503

만약 당신이 쫓고 있는 것이 또 다른 종류의 세계와 세속적인 것이라면, 당신의 눈에는 질병과 치료가 실제로 동일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반영성보다는 여러 개의 차이 패턴을 생산하는 회절이 여기에서 요구되는 작업을 표현하는 데 더 유용ㅎ나 은유일지 모른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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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2022-10-17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한가해지시면 글 많이 올려주세욤

에로이카 2022-10-18 06:23   좋아요 0 | URL
네, 뚱이님. 감사합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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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자연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대륙과 온갖 층위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많은 갈등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은 통합을 고취하기는커녕 분열을 조장한다.

4. ... 기후와 에너지 그리고 생물다양성에 대한 관심은 도처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끈 변화가 그랬던 것과 달리, 이런 이슈들을 둘러싼 갈등들은 아무튼 지금까지는 대중의 결집, 대중봉기라는 형태를 띠지 않았다. 이 점에서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 ... - P12

4. ... 생태운동이 더 견실해지고 더 자율적이게 되려면, 그리하여 과거에 못지 않은 역사적 도약으로 나타나려면 이 모두가 생태 운동을 모든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통일된 행동으로 모아냄으로써 자신의 기획을 인정하고 파악하고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재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생태주의가 분열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생태주의가 낳은 새로운 유형의 갈등들의 지도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야 한다. 끝으로 단체행동을 위한 공동의 지평을 규정해야 한다. - P13

6.
"계급" ... 개념의 이점은 정치 역학을 사회의 갈등과 경험의 형성 그리고 집단의 지평이라는 관점에서 제시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물질적인 세계의 구조를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급투쟁의 개념의 역할은 분명코 기술적이면서 수행적이었다. 이 개념이 사회 현실을 묘사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정할 수 있게 자처하더라도 계급투쟁의 개념은 결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계급"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전투대형을 갖추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녹색계급"에 관해 말하기는 불가피하게 행동을 새롭게 기술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녹색"이라 부르는, 형성 중인 이 계급을 위한 분류(classement) 작업은 필연적으로 수행적이다. 이 용어가 많은 혼동을 초래한다 해도 다시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에 유용하다. - P15

7.
"계급투쟁"의 개념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생태학적 문제로 말미암아 분류투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 생태학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군과 적군이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가 난다. 따라서 녹색계급을 출현시키려면 이와 같은 분류를 둘러싼 투쟁을 받아들이고 전통적인 계급갈등을 때로는 횡단하거나, 반대로 그것과 합류하는 구별의 기준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 P16

8.
생태학이 더 자율적이려면 계급이라는 용어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녹색계급은 지난 두 세기의 투쟁들과 관계를 설정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 그렇지만 모든 녹색 계급이 관계의 경제화에 저항하는 사회적 투쟁들을 역사적으로 이어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녹색계급은 생산의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희생시켜 경제를 자율화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를 증폭시킨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이 점에서 녹색 계급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좌파이다. - P20

9.
그렇지만 생산의 개념과 이상에 여전히 깊이 연계된 "계급투쟁"의 전통에 보조를 맞추어야 할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새로운 상황을 기존의 틀안에 밀어넣는 것은 언제나 유혹적이지만 녹색계급이 그저 "반자본주의"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서둘러 단언하지 말기로 하자. 생태주의가 이러한 조건반사적인 단언으로 자신의 가치들을 제한하지 않은 것은 옳았다. 그러므로 이 논쟁을 종결짓고 왜 이 점에서는 필연적으로 연속성이 없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P20

10. ...
마르크스는 여전히 이 분야에 뛰어들기 위한 길잡이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뚜렷하게 구획된 어떤 시기 동안 "계급이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지, 그들이 사회적 풍경에서 어디에 위치하며, 누구와 싸움을 벌이는지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 자유주의처럼 마르크스주의도 역사에 의미를 부여했다. 녹색계급 또한 존재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마르크스주의만큼은 해야 하고 특히 역사,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 - P21

11.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는 물질적 조건 - 사회적 조건은 물질적 조건의 표현일 뿐이다 - 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마르크스의 나침반이 유용했다면 이는 사회가 지속되는 데 필요한 과정을 비교적 분명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먼저 사회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묘사하며, 이어서 이 재생산 과정에서 행위자들이 대립적으로 위치하는 방식을 평가한다. 계급에 입각한 분석이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녹색계급이 이 전통을 이어받고자 한다면 녹색계급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서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관련하여 자기규정을 시도해야 한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옛 계급투쟁만큼 유물론적인 접근을 토대로 전개되어야 한다. 연속성은 바로 이 본질적인 점에서 존재한다. - P22

12.
그러나 정말이지 그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성이 아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전통과 오늘날 떠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인 관심의 대상 사이에 상대적 불연속성이 생겨난다. ... 마르크스에게는 인간의 생존과 생식이 모든 사회와 사회사의 기본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인간 사회와 사회사에 대한 모든 분석의 첫 단계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과정과, 인간 사회 및 집단에 존속을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 - 인간이 먹는 것, 마시는 물, 입는 옷, 거주하는 집 등 -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맑스가 사회사의 토대로 간주한 것은 바로 이 물질적 재생산 조건의 생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재생산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혀 다른 역사의 지형 안에 놓여 있다. 이제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좇지 않는다. 생산은 이제 우리의 유일한 지평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이 아니다. - P23

13. ...
사회주의의 나침반은 거의 배타적으로 생산과 재생산에 입각해서만 사유하기 때문에, 오늘날 계급의 풍경이 형태를 달리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기계 문명이 생겨날 때 그랬듯이, 오늘날 신기후체제는 우리에게 사회가 재생되거나 존속하는 과정을 다시 그리도록 강제한다. 또다시 "견고성과 영속성을 지녔던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19세기에 그랬듯이 현재 우리는 사회의 하부구조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 녹색 계급에 입각한 분석은 여전히 유물론적이지만, 인간만의 생산과 재생산 이외의 다른 현상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 P25

14.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 생산체계가 몹시 거세게 가속화되어 지구와 기후의 체계를 불안정하게 했다. ... 생산체계는 파괴 체계와 동의어가 되었다. 인간이 아닌 것의 재생산에도 집중될 맑스주의적 분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유리한 물질적 조건의 재생산 이외에도 지구라는 행성의 거주가능 조건을 고려하는 것이다. 후자의 조건은 전통적인 정당의 정치경제학이 자원의 이름으로 단순화하려고 애쓴 것뿐만 아니라 지구의 새로운 물질적 현실을 고려하도록 강제한다. ... 지구의 거주가능조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는, 달리 말해서 생산에 대한 이 배타적 관심에 등을 돌려 거주가능 조건의 탐색이라는 더 큰 틀로 나아갈 수 있는 경제학은 존재하는가? 이것이 새로운 녹색계급의 관건 전체이다. 이 점에서, 다들 이해하다시피,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불연속성이 크게 돋보인다. - P26

15. ...
생산만을 지향하는 이러한 관심에서 벗어나 경제화에 대한 (칼 폴라니의 표현을 빌리건대) 사회의 저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20세기의 몇몇 투쟁은 명백히 맑스주의의 전통에 의해 고취되었지만, 다른 많은 투쟁은 단순히 생산의 확대에 대한 거부를 명분으로, 그리고 생산이 나머지 사회생활의 틀 밖으로 벗어난다는 그 끔찍한 주장을 거슬러 수행되었다. ... Lucas Chancel이 말했듯이, "노예제의 폐지, 사회보장, 보통선거권, 무상교육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질 생산의 조직화 문제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 사회가 경제화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없다는 대단히 중요한 표현이다. 따라서 맑스주의적 발상의 유물론이 갖는 몇몇 한계를 비판하는 것은 또한 경제화에 대한 다양한 투쟁의 전통을 갱신할 수 있게도 해준다. 그러므로 사실 결정적이지만, 이 미묘한 차이를 제외하면, 녹색 계급은 해방을 주장하는 좌파의 역사를 이어받아 확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 P27

16.
현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제는 모두가 파국을 막기 윟나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행동을 가능하게 해줄 중계점, 동기, 지침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예전에는 이상이 정열을 끓어오르게 했고 상황의 이해가 동원을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에는 파국의 확실성이 오히려 행동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어쨌든 세계의 재현, 에너지의 용출, 가치의 수호 사이에 본능적인 동조는 없다. 반대로 모든 본능이 생산을 이해하는 옛 방식의 완전히 동일한 "되풀이" 쪽으로 향해 있다. 이러한 마비 상태를 진단하고 불안, 집단행동, 이상과 역사의 방향 사이에 새로운 동조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 녹색 계급의 의무이다. - P30

17.
물론 자유주의의 다양한 형태와 대다수 사회주의의 전통 사이에 수많은 알력이 있어 왔다. 하지만 생산량을 높이는 데에는 양쪽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 ...
갑자기 생산의 증대, 발전의 개념 자체, 진보의 개념이 고쳐야 할 착오로 나타난다. 생산이 지구에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의 파괴와 연결되면서 동원의 역량은 위기에 처한다. ...
오늘날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지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줄 새로운 장치는 아직 고안되지 않았다. 누구나 불안, 죄의식,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 녹색계급의 역할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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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 인간공학에 대하여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문순표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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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는 Übung (practice)을 주로 "수행"으로 번역했는데, 문맥에 따라 "실천"과 "수양(수련)"으로 번역했어야 했다. 

그래야 performance를 "수행"으로 번역할 수 있다. 

466쪽 이후에는 "연습"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괜찮다.

번역이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문제작을 이런 식으로 번역출판해놓으면 어떡하나?

번역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문제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지적하기 귀찮다.


그리고 리뷰든 페이퍼든 이 책에 관해 올라온 저 쓰레기 같은 광고들은 저것을 조장한 출판사든 방조한 알라딘이든 좀 치워라. 악취가 진동한다!!!

고대는 실천적으로 수련의 특성을 띠고 반대로 근대는 노동의 특성을 띤다는 명제는 수행 세계와 노동 세계, 완성 세계와 생산 세계의 대립과 아울러 내적 연관을 주장한다. ... 양쪽 체제를 특징짓는 것은 인간의 힘을 대규모의 노력 프로그램에 통합하는 능력이고, 이 체제들을 분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갈라진 동원의 방향이다. 근대의 경우, 소생된 활력이 대상(객체) 내지 생산물의 우위에 완전히 종속되다가 결국에는 이윤이라고 하는 추상적 생산물이나 혹은 ‘작품‘으로 전시되며 수집되는 심미적 물신에까지 종속된다. 고대의 경우는 모든 힘이 수련 과정에서 훨씬 더 높은 단계의 순수 수행적인 존재 방식으로 발전하는 수행하는 주체를 강화하는 데 유입된다. 활동하는 삶vita activa에 대립시키기 위해 관조하는 삶vita contemplativa으로 지칭했던 것이 실제로는 퍼포먼스(遂行)하는 삶, vita performativa이다. ... - P340

니체는 그의 독자들이 그를 정말 이해하길 원한다면 근대인이 되어서는 안 되며 노동 논리가 수련으로 회귀하는 그 시작을 알리는 명상가 혹은 ‘되새기는 자‘가 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와 달리 푸코가 1980년경 ‘자기배려‘(돌봄)에 대한 고대 담론을 현재의 논의 속에 다시 가져왔을 때 이것은 치료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종결됐다는 신호였다. 그때부터 중요한 의제가 된 것은 고대철학과 근대의 예술 실천과 육체 실천의 출처들에서 어떤 일반화된 수행의식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다. - P343

운명을 거스르는 어떤 단단한 피부를 기르길 원하는 사람은 먼저 편안한 것에 대한 자연적인 선호를 버려야만 한다. - P350

헤테로토피아는 푸코에 따르면 ‘다른 장소적‘ 공간의 창조로, 한편으로는 어떤 특정 문화의 사회적 자리들의 구조에 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 전체의 논리에 보통 역행하는 완고한 규칙들이 통용되기 때문에 일상적인 연속에서 떨어져 나온다. 헤테로토피아의 예로 묘지, 수도원, 도서관, 귀족의 유곽, 영화관, 식민지와 선박을 든다. 힘들이지 않고 이 목록을 체육시설, 섬 휴양지, 순례지, 성지, 주차장과 다양한 종류의 접근 금지 구역 같은 현상들로까지 연장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헤테로토피아적 공간 발명 가운데 우주정거장은 가장 중요한 혁신들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 P355

한 명의 재능 있는 수공업자나 혹은 유능한 음악가가 되려면 옛 요강에 따라 최소한 1만 시간 동안 연습하는 ‘실천‘(practicing ‘praxis‘)이 꼭 필요하며, 더 높은 단계의 장인 능력을 고려한다면 서슴없이 그 수를 곱절하거나 3배로까지 해야 한다. 천재라고 불렀던 것은 얼마 전까지 평균 수련(practice) 시간을 화려하게 단축한 경우들을 가리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는데, 음악 신동들을 떠올려보자. ... 이 유형은 행위자가 대상의 생산이나 효과의 유발에 몰두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이와 같은 활동을 하는 자신의 능력을 재생산하고 확장하는 어떤 연습하는 일(practicing work)을 고무한다. - P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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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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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을 만들어라, 아기 말고!

Make kin, not babies!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6393623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부제인데, 한국어판은 kin을 "친척"으로, babies를 "자식"으로 번역하였다.

(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Comment_12900997)

원어대로 음차하는 것이 번역자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번역으로 원래의 뜻을 훼손·왜곡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다. 

더구나 전례가 있고, 그것이 꽤 유려한 번역으로 되어 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전의 저작들에서 "존재론적 안무", "부분적인 연결들", "소중한 타자", "합생" 등의 개념을 통해 포착된 관계맺기의 방식인 kin의 어원은 아마도 직접적으로 버틀러의 이 소설 『킨』(Kindred)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 인용 부분이 바로 해러웨이가 "kin"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kin"은 "친척"으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그냥 "킨"이라고 하자. "찐친"이 더 나으려나... ㅋ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어야 했다. 정말로 혈연관계만으로 내가 그에게 두 번이나 끌려온 일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설명도 있을 수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낯설고 이름조차 없는 무엇인가가. 혈연관계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상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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