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민주주의 -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프리즘 총서 26
진태원 지음 / 그린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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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읽기 시작해서 해 넘어가기 전에 다 읽으려고 하였지만, 2018년 첫 독후감이 되었다. 나오자마자 냉큼 구해 읽었는데, 좀 만만하게 본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름만 들었던 유럽 철학자들의 논의가 내게는 생소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부 - 김남주, 세월호, 최장집, 푸코 - 에 대해 눈동냥한 것이 있고, 철학 이론이 생소하다 해도 그 이론을 통해 지은이가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대상 혹은 문제가 우리 사회에 관한 것이라 공부하는 마음으로 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 민주주의, 포퓰리즘, 주체화, ‘몫 없는 이들의 몫’, ‘시민다움등이 주요 주제어이다.

 

내용을 정리하자니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눈이 좀더 오래 머물고, 머리 속에서 좀더 맴돌았던 말들만 적어둔다.

 

1. 과 정치철학의 만남

책 이름이 독특한데, 아마도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들에 대한 최초의 정치철학적 성찰이 아닐까 싶다. 지극히 한국적인 독특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3부에서 지은이는 그 특이성(singularity)을 여러 현대 철학자들이 발전시킨 사유와 접목시킨다

 

그 앞에서는 라클라우(2), 최장집(4), 아렌트(5), 네그리와 하트(6), 랑시에르(5, 7), 푸코 (7), 아감벤(8) 등의 논의가 발리바르의 이론에 준거하여 비판적으로 검토된다. 최장집, 네그리와 하트에 대한 비판은 설득력이 매우 높아 공감하였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비판에 대한 정리(268-281)는 간명하면서도 충실하지만, “법에 관한 푸코의 역설을 지적하며 비판하는 부분(282-284)은 흥미로웠는데 너무 짧아서 논의가 채 마쳐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뒤에 한두 문단이 더 추가되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2. 자크 랑시에르

행여 다음에 시간이 난다면, 읽어야 할 철학자들의 계보를 정리할 수 있었다는 점은 무척 유용하였다. 일단 엄두가 안 나는 스피노자는 제껴두고아렌트 → 아감벤 랑시에르 발리바르 (5);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7); 벤야민 아감벤 발리바르 (8). 아감벤 랑시에르 라클라우 발리바르 (9). 거의 모든 장들의 소결은 발리바르의 논의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제일 끄는 인물은 (발리바르가 아니라) 랑시에르였다. 이 책의 주요 성찰대상인 은 랑시에르의 용어로는 몫 없는 이들혹은 셈해지지 않는 이들”(88-90, 286-297, 351, 454), 라클라우를 따르면 라틴어의 포풀루스와 구분되는 플레브스(87)로 다뤄진다. 이들은(신체들을 질서있게 배열하는) 치안의 장 속에 기입되어 있는 그 어떤 몫도 없고, 셈해지지도 않는, 배제된 자들이다. 정치란, 이들이 몫을 주장하고 셈을 요구하는 행위이며, 이는 바로 치안 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따라서 몫 없는 이들의 몫”,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이라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으로 읽힐 법한 개념은 시제를 달리하는 치안의 객체와 정치의 주체가 포개져 있는 개념으로 읽어야 하는 것 같다.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1832년 블랑키의 재판 장면을 다루며 주체화를 논하는 부분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 42장에서 1840년 베아스의 재판 장면을 다루는 부분과 묘하게 겹친다. 블랑키가 (능동적) 주체화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획득하는 과정” - 를 표상한다면, 베아스의 순응적 체념은 (수동적) 주체화의 사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자가 치안을 정치로 전환시키는 인물이라면, 후자는 법에 의해 규율권력의 장인 감옥으로 떠밀려지는 예속적 주체인 비행자를 대표한다. 랑시에르는 치안 체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게 만드는 것”(452)이 정치라고 하였고, 푸코는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감금 장치들이 전략적으로 분배되어 있는 여러 주변들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나중에 충분한 시간이 허락된다면, 5장에서 제시된 아렌트 - 아감벤 - 랑시에르 - 발리바르의 계보를 추적해보고 싶다. 그게 안 된다면 랑시에르의 『불화』만이라도 읽어보고 싶은데, 당장은 그것도 엄두가 안 난다. 이 훌륭한 책에 만족하지 못 하고 저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지는 현대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싶은 욕망이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 책 곳곳에서 제시되는 각종 아포리아, 이율배반, 역설들의 중요성이 철학에 문외한인 내게 그리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아포리아란, “더 이상 진전이 불가능한 논리적 궁지”, “기존의 개념들과 이론, 실천의 한계를 (나타내면서도)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극한의 노력(이면서도 그 돌파의 노력이) 아무런 성공의 보장이 없는 모험적 기획이다(445-446). ‘아포리아가 중요하긴 중요한가 본데,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하는 아마추어적 질문은 아마 내가 이들의 철학적 사유와 그 의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발리바르의 시민권 헌정과 민주주의가 맺는 이율배반”(145-7, 201), “봉기와 헌정의 차동 관계”(146, 301), 아렌트의 인권의 아포리아”(170-), 을의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그리고 민주주의 자체의 아포리아(445) 등이 그것이다.

 

3. 준거로서의 발리바르

지은이는 거의 모든 장에서 발리바르에 의지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이 책의 주인공이다. 내가 발리바르를 읽었던 저 옛날 20세기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민주주의와 독재, 맑스주의에서 정치학의 부재와 그 중요성, 역사유물론의 전화 정도 되는 말들이 파편적으로 남아 있지, 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다른 철학자들의 입장과 발리바르의 입장이 잘 비교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발리바르 철학의 주요 조각들이 각 장에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아마추어가 그 퍼즐을 다 맞춰서 그의 철학의 전체적 윤곽을 가늠해보기는 힘들다. 그래도 단편적으로나마, 시민권 헌정과 민주주의 간의 이율 배반, 다수자/소수자 전략(303-312), 시민권과 시민다움, 폭력 등에 관한 그의 최근 관심들을 알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특히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의 문제가 주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발리바르 철학에서 중요한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론적 준거에 대한 지은이 자신의 성찰이 들어가 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거의 모든 장에서 지은이는 다른 철학자들의 입장을 발리바르의 그것과 대질시키며, 후자의 상대적 강점을 부각시킨다. 아주 일부분(345-348)에서만 발리바르의 모호성이 지적되고 있을 뿐 토론되지는 않는다. 잘 모르지만, 발리바르에 대한 비판들도 존재할텐데, 이 책에서 발리바르는 언제나 공세적 위치에만 존재할 뿐 수세적 위치에는 놓여지지 않는다.

 

4.  乙로 살며, 물어보며

책에 관한 짧은 메모를 쓰다 보니, 스포일러 방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는데, 정작 이 책의 주제인 乙과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비로소 乙에 대한 정치철학적 사유의 길이 열렸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나오는 유럽 철학자들의 이름은 한국의 현대사나 우리 주변의 많은 乙들, 그리고 역시 乙인 신세와 무관하게 존재했을 법하다.  책의 뒷부분에서 지은이는 의 민주주의의 아포리아를 이야기하면서 많은 질문들을 던진다. 그 열려져 있는 질문들이 다른 질문들과 실천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 또한 체념한 이지만, 가끔은 질문도 해봐야 하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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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민주주의 -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프리즘 총서 26
진태원 지음 / 그린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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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에 대한 애도로 시작해서, 다수의 이율배반과 아포리아를 거쳐, ˝몫 없는 이들의 몫˝과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로 끝남.
주연: 에티엔 발리바르 / 조연: 자크 랑시에르 / 각본 및 감독: 진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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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폴 메이슨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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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좋은 책을 끝까지 다 봤다. 이 책에 대해 얼핏 들었던 것이 올해(2017) 봄이었는데, 내용은 전혀 모르고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 같아 막연히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연말이 되어서야 짬을 낼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역사와 이론이 폭넓게 다뤄지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단과 대안 모색 노력 간의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책이다. 그 이론과 대안에 대한 판단은 잠시 유보하겠다.

 

1. 폴 메이슨

지은이 폴 메이슨은 BBC 방송 프로그램의 경제 에디터로 일한 바 있다. 아무리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고 글을 쓰고 방송을 만드는 언론인이라고 해도,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현대 사회의 정보재, 사물인터넷, 네트워크화한 개인 등의 주제에 동시에 통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 참 대단하다는 경탄을 하면서도, 구성이 그리 체계적이지 않고 난삽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의 주요 소재인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보니, 처음엔 음악 교사였다가, 정보 관련 저널리스트 일도 하고, BBC에서 꽤 오래 일하다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올해에는 파리 코뮨에 대한 희곡도 썼다 하니, 가히 자유로운 영혼이자 르네상스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2. 장기순환으로 재구성한 자본주의의 역사

메이슨은 이 책에서 오늘날의 공론장에서 사라진 이름들을 소환한다. 콘드라티에프, 보그다노프, 프레오브라젠스키 등, 100년 전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주변에서 사라진 인물들이 그들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이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적 통찰들은 이 책의 뼈대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고, 거기에 이들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전기적 요소가 양념처럼 가미되어 있어서, 해당 이론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 쉽다. 힐퍼딩,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로자 룩셈부르크보다도 관심을 훨씬 덜 받았던 이 볼셰비키들의 이론에서 메이슨이 끌어내는 유의미한 통찰은 무엇인가? 이들, 특히 콘드라티에프의 분석은 자본주의 경제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소위 정통 맑스주의의 파국론적 가정들에 도전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메이슨은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혁명가들이 주체의 의지를 발휘하면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는 당시의 맑스주의적 가정들을 기각하고, 맑스와 그의 후예들이 자본주의의 적응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메이슨은 설비투자의 동력을 50년 단위로 발생하는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본 콘드라티에프의 장기순환 분석을 연장하여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4회의 장기순환을 거쳤으나, 다섯 번째 순환의 시작은 지연되고 있다고 진단한다(105-6). 메이슨의 기여는 두 번째 순환까지를 관찰했던 콘드라티에프의 통찰을 20세기까지 연장시켰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제순환 이론에서는 보이지 않던 행위자들을 복원시켰다는 점이다(146-7, 312-343). 장기순환의 하강국면에서는 자본주의의 적응 노력이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노동력 비용의 감소 노력으로 나타나지만, 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활발해지면서 실패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본은 생산성이 낮은 실물생산에서 금융부문으로 이동하는 한편, 정부가 개입하여 본격적인 적응 노력을 하는 가운데에 더욱 혁신적인 신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게 된다. 다섯 번째 장기순환의 개시가 지연된 것은 네 번째 파동의 하강기였던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적응국면에서 등장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패배하였기 때문이었다(149, 177, 193).

 

이 패배는 주변부 및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노동력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거 편입되면서 노동력의 양적 규모가 갑절로 늘어나는 과정(189)과 결합하였다. 그 결과 중심부-주변부간의 노동시장 분절이 과거의 숙련 대 미숙련간의 구분을 대체하게 되었다(353). 유연성은 중심부 노동자들에게 자기계발을 지속하여 회사의 단기 목표에 자기 자신을 맞추는 능력,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능력, 인맥을 형성하고 관리하는 능력 등을 갖추도록 한 반면, 주변부 노동자들에게는 자동화한 공정을 빨리 습득하고, 감정과 행동을 노동규율에 종속시키게 하였다(353-354). 동시에 서비스 산업 종사자의 비율이 대폭 증가하였다. 또 세계GDP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짐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과 행동이 금융화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정보노동의 증가로 일과 여가의 경계선 또한 흐려졌다. 장시간 출퇴근이 일반화되면서, 노동자들의 물리적 공동체는 위축되었다.

 

3. 네트워크 개인주의

노동자들의 존재조건의 변화는 그들의 사고와 행동양식, 그리고 인격의 변화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메이슨은 베리 웰먼과 리처드 세넷의 논의를 빌어, “네트워크 개인주의의 등장을 현대의 주요 특징으로 규정한다(206, 251, 356). 또 이 논의를 하트와 네그리의 선언』(2012)을 인용하면서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장이 되었다는 오페라이스모의 현실 진단과 연결시킨다(356-8, 385).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의 등장은 한편으로는 콘드라티에프 파동을 입증하려고 하였던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체사레 마르체타의 논의(100)와 연결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알렉산더 보그다노프의 SF 소설 『붉은 별』(1909)에 나오는 기계의 견고한 조직에 두뇌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는 화성인 이야기(368)와 중첩된다. 또한 이 이야기는 트로츠키의 만능 두뇌(universal mind, 384-5)” 이야기와 겹치고, 허버트 사이먼의 “Organization and Markets”(1991)에서 나오는 화성인이 바라본 지구의 경제 이야기와 겹쳐진다(440-443). 메이슨은 기업이나 시장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상품, 노동, 서비스의 교환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에서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증가되었던 지식경제, 정보사회, 인지자본주의 담론들의 등장으로 포착되었던 현상은 이 시대의 새로움을 반영하는 것이다. 정보기술은 새로운 안정적인 자본주의를 형성해내기보다는 시장 메커니즘을 잠식하고, 재산권을 침해하며, 임금, 노동, 이윤의 오래된 관계를 무너뜨렸다(202). 위키피디아와 리눅스 같은 공유지 기반 동료생산(commons-based peer production)의 확산은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발전하고 있는 새로운 생산양식인 것이다(230).

 

여기에서 메이슨의 논의가 피터 드러커, 요차이 벤클러, 제레미 리프킨 등의 논의와 구분되는 것은 그가 맑스의  『그룬트뤼쎄』의 기계에 관한 단상에서 한 번 언급되고 맑스 자신에 의해서도 다시 다뤄지지 않은 개념인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의 논의를 끌고 와서,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 연구와 접목시킨다는 점이다[236-243, Cf. Paolo Virno(2007), ”General Intellect”, Historical Materialism 15(3): 3-8].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에서 지식이 주도하는 생산은 투입된 노동의 양과 무관하게 무한한 부를 창출하는데, 곧 가치법칙이 폐지되는데, 이 자본주의는 지식을 향상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을 선호하는 모순이 심화된다. 그러나 그는 『자본』에서 이 개념을 언급하지 않는데, 메이슨은 이를 그의 시대에는 아직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의 정신이 사회적 지식에 의해 연결된” “일반지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맑스의 일반지성의 사회적 조건은 20세기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4. 프로젝트 제로

메이슨은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은 100년 전에 볼셰비키들이 상상했던 방식, 곧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고, 중앙계획경제를 통해 시장경제를 대체하며, 생산력을 극도로 발전시켜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방식을 통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본다. 대신 이 이행은 봉건제가 수백년에 걸쳐 자본주의로 이행했던 방식과 유사하리라고 본다. 메이슨은 특히 (1) 1300년대 이후 진행된 기근, 질병, 농민반란에 이은 임금 상승, (2) 은행업의 발달, (3)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약탈, (4) 인쇄술의 발명 등을 봉건제 붕괴의 주요 요인으로 지목하고, 이 요인들의 다른 우연한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장기간 진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398-402). 그는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세계의 내부에서 분자 단위로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주장을 기각한다(407).

 

지금까지 내가 정리한 방식만 본다면, 메이슨은 분명 21세기에도 여전한 맑스주의자이다. 하지만 그는 160년 전의 맑스와도, 100년 전의 볼셰비키와도 다른 세상에서 사는 맑스주의자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설명한 맑스의 잉여가치론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한 옳다고 믿지만, 시장경제를 중앙계획경제가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대략적인 스케치에 지나지 않지만 이행의 프로그램으로 프로젝트 제로”(탄소배출량, 상품 생산의 한계비용, 필요노동시간을 최대한 줄여 0에 가깝게 만든다는 이행의 비전)와 이의 실현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445-449)을 제시한다. 또한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발달한 공산주의 국가에서 실현할 수 있는 10가지 프로그램을 제시하듯, 포스트자본주의 프로젝트의 최상위 목표를 네 가지 제시한다(450-451).

 

이 과정에서 인상적인 것은 위에서 기각한 프레오브라젠스키의 다른 통찰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경제학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학문이다. 그것은 사회적 기술이다”(445). 이 책에서 처음 본 이 구절은 마치 미셸 푸코가 아담 스미스 시대의 정치경제학을 파악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이행은 경제 분야에 국한된 것일 수 없고, 전 인류의 변화, 곧 새로운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의 탄생이다(446). 메이슨은 베버를 인용하면서 포스트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이 신자유주의, 나아가서 자본주의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451). 이 새로운 정신은 자본주의라는 정글 속에서 새로운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경제의 거대 행위자인 정부는 민영화를 멈추고, 시장을 개혁하며, 인프라를 조정하고 계획하며, 기후변화, 고령화, 에너지 안보, 이민 등의 문제에 대응하고,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포스트자본주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서 협력적 노동을 확장하고, 독점은 억제하거나 사회하며, 금융 시스템 또한 사회화하고,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며, 네트워크를 통제해서는 안 된다. 메이슨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며, 요즘은 참 보기 힘든 좌파적 효능감을 보여준다.

 

5. 단상과 의문들

이 책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점에서 마이클 뷰러워이의 『생산의 정치』에 비견할 만하다. 시간이 난다면 어느 책에서 사람 이름이 더 많이 나오는 지 한 번 세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폴 메이슨을 하나의 특정한 이론적 전통에 자리매김하기는 참 힘들다. 콘드라티에프 순환을 이야기할 때에는 월러스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실버와 아리기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리기는 콘드라티에프 순환을 기각한 바 있다. 또 자본주의와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자본주의의 생존에 있어서 핵심적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통찰을 강조할 때에나 기타 부분에서는 네그리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네그리가 『제국』 31장에서 아리기가 시도했던 축적의 체계적 순환의 발견적 가치를 부정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콘드라티에프 순환에 기반한 역사해석에 반대할 것임은 자명하다. 맑스에 대해서도 비슷한데, 메이슨은 잉여가치설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일반지성에 대한 통찰을 중요시하면서도, “노동계급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틀렸다”(317)고 단언한다. 어찌 되었든 폭넓은 이론적 컨텍스트 속에서 종횡무진하며, 포스트 자본주의에 관한 일관된 주장을 펼치는 그의 안목은 참으로 대단하다.

 

 

 

다음은 책 전체의 논지를 침해할 정도의 의문은 아닌데, 일단 기록해둔다.  다뤄지는 이론의 스펙트럼이 넓고, 이들을 직조하는 역량이 탁월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의 시각을 뭉뚱그리지 않고 예리하게 벼려서, 각 이론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려고 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콘드라티에프 순환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의 순환 내에 존재하는 연속적 국면들에 대한 그의 구분이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부분들이 좀 있다. 예컨대, 메이슨은 장기순환의 상승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나라들이 국제시장에 진입한다"고 한다(89). 그런데 월러스틴에 따르면, 이것은 하강국면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생기는 일이다. 곧 격심한 경쟁을 벌이던 핵심부 자본들이 비용절약을 위하여 생산설비를 주변부로 이동하는 형태의 자본 수출이 1960-70년대의 신국제분업의 출현을 야기하였고, 이를 발판 삼아 신흥공업국들이 국제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메이슨은 4장의 한 절("그림으로 보는 파동의 붕괴", 178-192)에서 12개의 그래프를 통해 콘드라티에프 파동이 과거 50여년 동안 관철되었는 지의 여부를 보여주겠다고 하였는데,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어떤 지표가 파동과 어긋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인 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이것은 독자인 내 잘못이 아니라, 저자인 폴 메이슨의 잘못이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ㅋ).

 

 

오역

전반적으로 잘 읽히지만, 논지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오역들이 좀 있다. 또 기존에 정치경제학계에서 쓰이는 용어들이 맥락없이 역자 재량껏 직역되어서 읽기 불편하다. 예컨대, '이윤압박'을 '이윤압축'으로, 상쇄경향반작용경향으로, ‘내포적 성장내연적 성장으로, ‘이행기전환기로 옮긴 것들이 그 사례이다(170, 191, 253, 375, 382).

 

96: 18-20: "장기파동 이론의 통계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계산자의 시대인 17세기부터 리눅스의 시대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곧 나온 지적이다."

 

말도 안 되는 번역이다. 콘드라티에프는 20세기 초반의 사람인데 17세기라니... 17세기에 누가 장기파동을 이야기했단 말인가? 원문은 다음과 같다.

 

It[the data problem] has pursued long-cycle theory all the way through from the era of the slide rule to that of the Linux box. (영어본 42쪽)

 

번역자가 계산자(slide rule)가 17세기부터 쓰였다는 정보에 착안했는지. 17세기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 같다.

 

통계 데이터에 대한 의문은 슬라이드룰의 시대부터 리눅스 박스의 시대인 오늘날까지 장기순환 이론을 계속 괴롭혀 왔다.

 

189: 15-16: 밀라노 밀라노비치

193: 9: 34

296: 6: OCED → OECD

 

313: 22: "그들은 사명을 완수했다."

It's complicated (영어본 182쪽).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406: 24: 21세기 초의 사회주의자들은 20세기 초의 사회주의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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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의 권력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3~74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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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셸 푸코의 1973-74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다. 푸코의 강의록은 이번에 처음 봤다. 이보다 유명한 강의록들, 특히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강의록들을 먼저 볼까 하다가, 그나마 친숙한 『감시와 처벌』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기여했을 이 책 『정신의학의 권력』을 택했다. 사실 나는 정신의학에는 별 관심이 없다. 따라서 권력을 다루는 부분들은 치밀하게 읽고, 나머지 부분들은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갔다. 『감시와 처벌』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3, 4강이 제일 흥미로웠고, 『광기의 역사』로부터 『감시와 처벌』로의 주제와 방법론의 이행 과정을 잘 보여주는 1, 2강도 흥미로웠다. 나머지 5강부터 12강까지는 다음에 이 책을 참고할 일이 있어도 다시 볼 것 같지는 않다. 푸코가 쓴 강의 요지중에서는 삼중의 권력을 정리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맨 뒤에 실린 옮긴이 해제도 길지만, 매우 충실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리뷰를 쓰기 위해 목차를 다시 보니, 각 강의의 핵심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유용하다.

 

2. 『광기의 역사』로부터 『감시와 처벌』로의 이행

그 동안 막연하게 푸코는 「니체, 계보학, 역사」(1971) 이후 고고학적 방법론에서 계보학으로 이동하였고, 1970년대 계보학 시기의 정점에서 『감시와 처벌』(1975)과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1976)가 출판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1, 2강을 읽으면서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자신이 시도한 작업이 도달했거나 중단된 지점이 곧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밝히며, 이전까지의 고고학적 작업들에 대한 자기 정정을 시도한다(33-39). 이제 그의 연구는 (1) ‘표상(representation)’ – 광기의 이미지, 광기가 불러일으킨 공포, 광기와 관련된 지식 등 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을 야기하는 심급으로서의 권력장치를 분석의 대상이자, 출발점으로 삼게 된다. (2) 그 전에는 권력을 폭력과 연관시켜서 생각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폭력적 형태를 띠든 아니면 합리적으로 계측되고 관리되는형태를 띠든, 권력의 적용 지점은 언제나 신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폭력의 수반 여부는 그의 연구에서 주변화된다. 마지막으로, (3) 규칙성을 체현하고 있는 제도에 대한 강조는 그 제도 안팎에서 작동하고 있는 힘의 관계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게 하므로, 중요한 것은 제도의 분석이 아니라, “권력의 불균형”, 제도들을 가로지르는 전술적 배치에서 어떤 힘의 관계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7, 64, 69-71, 372, 510, 559). 고고학이 담론의 불연속적인 역사를 다루었다면, 계보학은 권력을 다룬다고 이전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의 세부적 사항들을 좀더 잘 알게 되었다. 곧 표상, 폭력, 제도는 이제 주변화되고, (1)장치, (2)신체, (3)서로 대결하는 힘 속에서 활용되는 전술과 이들 간의 불균형 혹은 비대칭에 대한 주목, 곧 권력의 미시물리학이 그의 권력 분석의 핵심부에 포진하게 된 것이다.

 

푸코는 역사적 장면의 무대(scene) 위에서 자신의 이론을 연출하는 것에 탁월하다. 다미앵의 신체형, 파리 소년감화원의 시간표, 페스트 도시, 죄수 호송차, 마지막 쇠사슬 행렬, 라스내르, 비독, 베아스의 일화들이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정신의학적 치유와 규율의 여러 장면들이 제시된다. 2강은 비세트르에서 정신이상자들을 쇠사슬에서 풀어준 것으로 유명한 피넬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미친 왕 조지3세의 치료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는 주권권력과 규율권력의 대립 장면이자, 전자의 거시물리학으로부터 후자의 미시물리학으로의 이행을 대변한다. 비대칭적인 힘을 지닌 서로 다른 의지의 대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규칙의 집요함을 통해 작동하는 은밀하고 분산된 규율권력, 그 귀결로서 한 의지에 대한 다른 의지의 지속적 순종이 그 무대 위에서 상연된다.

 

3. 규율권력과 권력 장치들

3강의 앞 부분은 마치 연극이 상연된 후 진행되는 연출자와 관객 간의 대화 같다. 미친 왕 조지 3세의 치료 장면에서 제시된 주권권력과 규율권력의 대비를 거론하면서, 푸코는 자신의 규율권력 가설을 제시한다. 규율권력은 중세의 수도사 공동체들에서 형성되어, 이후 평신도 공동체들로, 그리고 17-18세기에는 사회 속으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일반화되어 개인의 신체와 맞닿은 최말단의 수준에서 모세관을 침투하여 뇌의 말랑말랑한 섬유를 관리하기에 이르는 권력과 신체의 시냅스적 접촉”(72) 같은 양태(modality)를 띠게 되었다고 한다. 규율권력 이전의 주권권력은 징발-지출로 매개되는 군주와 신민의 비대칭적 관계, ②권력관계의 토대가 되는 표식과 그것의 끊임없는 재현동화(reactualization), 그리고 부가적 폭력, ③비동위체적인 주권 장치들의 다발로 구성되어 있었다(75-80). 이에 비하여, 규율권력은 개인의 신체, 몸짓, 시간, 품행을 총체적으로 포획하며(↔생산품이나 용역의 징발), ②완전한 가시성 하에서 점진적이고 단계적 훈련을 통해 규율을 증대시키며, 문서기록을 통해 중앙집중화된 개별성을 구축(경찰적 개별화)하여 품행의 잠재성 자체를 규율하여 행위 자체 이전에 개입하려는 일망감시적 특징을 보이고, ③동위체적인(isotopic, 상이한 체계 간의 충돌이나 양립불가능성이 없고, 한 장치에서 다른 장치로의 이행이 용이하지만, ‘분류불가능한잔재들을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으므로 규율 권력의 여백을 갖고 있는) 규율장치로 특징지워진다(80-92). 주권 권력 하에서는 신체의 단일성에 결부되지 않았던 주체-기능이 신체를 포획하는 규율권력 하에서 신체의 단일성에 정확히 합치된다. 곧 규율권력은 예속된 신체를 생산하고, 개별화하고, 배열한다(94). “주체-기능, 신체의 단일성, 지속적인 시선, 문서기록, 세세한 형벌 메커니즘, 영혼의 투영,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규율권력의 계열을 이루게 된 것이다(94).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푸코는 개인에 대한 독창적 시각을 제시한다. 통상적인 법률적 개인주의는 (계약으로 동의된 경우 외에는 어떤 권력도 제한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닌) 개인을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부르주아의 정치적 요구 속에서 등장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반하여, 푸코는 (감시의 체계에 둘러싸여 규범화의 절차에 따라야 하는 예속화된 신체로서) 개인을 (역사적 현실이자, 생산력의 요소이자, 정치력의 요소로서) 출현시킨 것은 규율테크놀로지라는 규율적 개인주의를 개진한다(96).

 

중세부터 18세기까지 주권적 관계의 일반적 플라즈마 내부에 작은 섬 같은 것으로서 존재하였던 규율장치들은 17-18세기를 경과하면서 점차 확장되어 전체 사회에 기생하게 됨으로써 규율사회를 구성하고 주권적 사회를 대체하였다(105-6). 이러한 규율장치의 기생적 침투는 학생, 식민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방랑자·걸인·유랑자·비행자·창녀 등에 대한 내적인 예속지배, 곧 고전주의 시대의 구금, 종교 단체들, 군대, 노동계급의 작업장과 거주촌 등으로 확산 되어 사회 전체를 뒤덮어가기 시작하였다 (114). 규율장치의 확산은 바로 자본의 축적에 필요한 인간의 축적을 원활히 하는 것이었다.

 

3, 4강에서는 『감시와 처벌』의 소재들[칸토로비치의 『왕의 두 신체』 (79), 프리드리히 2세와 프로이센 군대(83), 고블랭 직물제조소의 직업훈련학교(84-86), 판옵티콘(117-126), 메트레 소년감화원(133) ]이 등장하는데, 『감시와 처벌』의 번역이 매우 이상한 관계로 해당 부분이 나올 때 참조하면 유용할 것이다.

 

4. 삼중의 권력  

정신의학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5강 이후는 건너뛰고, 푸코는 강의요지에서 광기에 대한 비광기의 절대적 권리가 체현된 삼중의 권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490-1). ①(정신의학의) 전문지식, ②(환자의) 착오를 수정하는 양식, ③정상성. 이 과정에서 권력과 지식의 상호강화와 정상/비정상의 구분에 기반한 권력 행사가 전면에 부각된다. 이 삼중 권력 도식은 비단 광기를 다루는 정신의학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소재로 푸코의 권력 논의를 이어갈 때에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다.

 

5. 충실한 옮긴이 해제

옮긴이 해제 111쪽에 달할 정도로 길다. 처음에는 뭐 이렇게 긴가 하면서 투덜거렸는데, 푸코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매우 유용하였다. 그 전에는 푸코가 정신과 진료를 받았고, 정신병리학 학사학위를 받았는지도, 『광기의 역사』(1961) 이전에 『정신병과 인격』(1954)를 냈는지도, 이 저작을 『정신병과 심리학』(1962)으로 개작하면서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지도 전혀 몰랐다. 이 긴 옮긴이 해제는 푸코의 지적 여정 속에서 이 강의록이 갖는 의미를 충실히 설명하고 있고, 강의록 본문의 내용들을 요약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장황하지만 잘 정리하고 있다. 또 맨 끝에 나오는 경제적 세계화에 관한 리카르도 페트렐라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626-7).

 

6. 번역 실수?

전반적으로 훌륭한 번역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심쩍은 부분이 몇 개 있어 적어둔다. 아래에 적어둔 것들은 실수일 수도 있고, 영역판의 실수를 교정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문맥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 133: 10: “아버지, 큰 형이라는→ “아버지, 할아버지라는” (father, or grandfather, 영문판, p. 85)

- 142: 19: “제 생각에 1838년의 법률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사항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 “다시 말해앞에 짧은 한 문장이 누락되었음. [I think the 1838 law consists in two fundamental things. The first is that confinement overrides interdiction. (첫째, 감금이 금치산에 비해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That is to say, in taking charge of the mad, the essential component is now confinement, interdiction only being added afterwards, …, 영문판, p. 95]

- 151: 20: “성무일과서를 옆구리에 끼고→ “성무일과서를 내팽개치고” → “puts aside his breviary, 영문판, p.100)

- 230: 6: “마지막으로 [네번째] 장치에 대해 …” 영문판 157쪽에는 “Finally, the [fifth] apparatus is …”로 되어 있는데, 몇 번을 세어보았는데, 이 부분은 국역본이 맞는 것 같다.

- 408: 1; 437: 8: “19세기의 2/3분기” → 대략 1800-1866년 동안의 시기에 (the first two thirds of the nineteenth century, 영문판, p. 284,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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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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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일 조간신문을 통해 바우만이 영국 시간으로 9일 유명을 달리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기사를 오려서 읽다 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 고이 접어 넣었다. 그 날 오전에는 후배가 바우만이 죽었다는 소식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며 안부를 물었다. 자기 주변에는 바우만을 좋아했던 사람이 나밖에 없다며. 언제쯤 그 후배에게 무슨 맥락에서 그 말을 했는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바우만 책을 이전에 대여섯 권 정도 읽었다. 그의 주저라 할 수 있는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와 『액체근대』를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쏟아져 나오는 그의 저작들과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액체근대』일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애도를 좀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였다.

 

 

바우만의 주요 테마

목차는 해방, 개인성, /공간, , 공동체를 다루는 다섯 개의 장과 사회학적 글쓰기에 관한 보유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이 책뿐만 아니라 2000년대에 나온 거의 모든 저술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들을 정리하는 방식부터 시작하는 것이 책 전체의 이해에 효과적인 것 같다.

 

(1) 액체 근대

안토니 기든스, 울리히 벡, 스캇 래쉬 등과 마찬가지로 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티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다. 유튜브 강의 Liquid Modernity Revisited를 통해서 그는 이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힌다. 첫째, 그는 탈근대라는 시대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근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근대의 성격이 바뀌었을 뿐이다. 둘째, 포스트모더니티가 갖고 있는 개념적 부정성(negativity)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티 개념이 전제되어야 전개될 수 있는 논의이고, 그 자체로서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서 실정적으로(positively) 기술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만 때문에 기든스, , 래쉬 등은 2차 근대, 성찰적 근대, 위험사회 등의 개념을 사용하였고, 바우만은 액체성 (liquidity) 혹은 유동성 (fluidity)근대 역사에서 여러모로 새로운 단계인 오늘날의 속성을 파악하기에 적합한 은유이므로 액체 근대라는 개념을 사용한다(9, 55). 곧 오늘날은 근대 이후가 아니라, 무거운 고체적 근대 이후의 가벼운 액체적 근대로 볼 수 있다. “과거의 근대성은 (오늘날의가벼운근대성과 대조되는) ‘무거운것으로, (‘유동‘ ‘액체혹은용해와 구분되는) ‘고체의 특성을 지닌 (확산이나모세혈관식 분산과는 대조되는) 응축된 상태이고, 마지막으로 (그물망식 조직과 다르게) 체계적이다”(43).

무거운 고체적 근대에서 가벼운 액체적 근대의 단계로 이행함에 따라, 장기-지속성, 고착성, 상호의존성이 즉시성, 일시성, 이동성, 개인화로 대체되었다. 또 이는 역사적 과정이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믿음과 인류, 민족, 혹은 어떤 집단이 고유의 과제와 책임이 있다는 믿음의 종말을 갖고 왔다. 이제 인류 전체의 이성이나 정의보다는 개인의 권리, 책임, 자질이 더 중요시된다(49). 또 고체 근대에서 사회학의 주제는 인간의 복종과 순응의 조건들이었지만, 액체 근대에서 사회학은 자유와 자율성의 촉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339).

 

(2) 개인화

울리히 벡에 의해서 정초되고 발전한 개념인 개인화가 바우만의 깊은 사색에 의해 독특하게 정의된다. 바우만은 엘리아스의 『개인들의 사회』를 인용하며, 개인이 사회와 대립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단위로 자리매김된 것을 근대의 특성으로 파악한다. 근대는 사회와 개인을 양립가능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상정하였다. 바우만에 따르면, “’개인화 [신분 같은] ‘주어진것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과제로 삼아 그 과제를 수행할 책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는 [계급 같은] 이다. 이는 실제적(de facto) 자율성의 확립과 상관없이 법적(de jure) 자율성이 확립되는 것이다(53). 근대성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강제적이고 의무적으로 결정되던 것을 개인의 결단의 결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개인화는 각 국면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고체근대에서 개인화는 기존의 귀속적 신분을 해체하면서, 후천적 행위에 의해 구성원의 자격이 주어지는 계급으로 개인들을 합류시켰던 반면, 액체근대에서 개인화는 이전의 계급과 같은 새로운 집단성이라는 목적도 전망도 없이, 개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게 된다. 불확실성은 사회로부터 발생되지만, 그 책임은 이제 개인이 져야 하는 것이다.

액체 근대에서 개인의 고충들은 유사할 수는 있지만, 더해질 수 없는 것이 된다(58). 이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무관심한 개인은 시민의 적이다(59). 하버마스의 관찰과 정반대로, 이제 사적인 관심이 공적 공간을 식민화하고 있다(60, 64, 112, 219). 이제 생활세계를 체계의 식민화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해방을 위해서라도 공적 영역, 곧 정치를 강화해야 한다(82). 그리고 이 정치(Politics)의 임무는 법률상의 개인의 여건과 실제 개인이 될 수 있는 기회, 즉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진정 바라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극복하는 것, 공적 공간을 정비하여 사람을 채워넣는 일인 것이다(63-64). 곧 공동의 대안적 삶은 생활정치(life politics)로 후퇴하여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대문자 정치(Politics)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83). 액체 근대의 개인화된 사회에서 정치의 임무를 도출하는 바우만의 이러한 방식은 벡의 개인화와 하위정치(subpolitics)에 관한 논의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으로 보인다. [더 자세한 것은 289쪽에서 스치듯 언급되는 In search of Politics(1999)를 봐야할 것 같다.]

 

(3) 소비자 사회

무거운 근대의 포드주의 하에서 자본과 노동은 견고하게 바닥에 고정되어 모두 쇠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92-96, 187, 232-236). 그러나 오늘날 자본의 이동성은 급증하였으나, 노동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다. 노동은 쇠우리 안에서 고용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본은 쇠우리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194). 이러한 자본과 노동의 상호결속의 종말은 푸코의 규율사회가 기반하고 있는 원형감옥 모델의 종말이기도 하다. 규율하는 자와 규율당하는 자가 무거운 원형감옥 안에 가까이 존재했던 고체 근대와 달리, 액체 근대에서 규율하는 자의 편에 속하는 이들은 더 이상 피통치자들을 가까이서 감시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19-21, 195-6).

전체 경제에 있어서나, 개인의 정체성 형성 모두에서 이제 생산자의 역할보다는 소비자의 역할이 중요시된다(122-142, 195-198)). 이제 자본의 결속 대상은 노동자가 아니라 구매자/고객/소비자가 되었다(239-242). 고체 근대의 탄생을 특징 짓는 만족의 지연’, 곧 금욕적 노동윤리는 액체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제 최소한으로 줄일수록 좋은 희생이자 곤경으로 간주된다(251-5). 만족의 지연은 없을수록 좋고, 불가피하다면 최소화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노동윤리가 소비의 미학으로 대체된다. 욕망이 소비를 통해 충족되고 끝나면, 또 다른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의 대상이 생기고 이를 또 소비하게 되는 과정이 무한히 지속되는 것이다(251-4).

 

바우만의 서술 스타일

『액체근대』는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아무래도 사회과학적 글쓰기라고 하기에는 저자의 스타일이 돋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우만의 관심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의 글은 스마트폰, SNS, 토크쇼, 인공지능, 첨단무기 등 오늘날의 테크놀로지가 이룬 변화들에 무척 민감하다. 또 쇼핑, 연애, 여가, 일시성 등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서술들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그의 뛰어난 점은 이러한 사례들로부터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 공포, 사랑, 불의 등에 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며, 이것이 독자들의 개인적 감정의 경험들과 공명한다는 것이다. 바우만의 매력은 바로 그가 사회적 현실의 변화와 독자들의 감정적 경험을 훌륭한 통찰로 매개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전과 현대의 文史哲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독서가 현인의 지혜를 통해 숙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며

그러나 그의 탁월한 문제진단에 감탄하는 독자라 하더라도, 그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마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부분, 곧 대안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는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 문제적 상황에 대한 윤리적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다 함께 세상에 대한 대안을 계속 고민해보자고 하는 것 같다. 액체근대에서 또 다른 견고성을 가정하는 대안은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완전한 대안이 다 준비된 다음에 하는 싸움이란 세상에 없다. 대안이란 것은 고쳐야할 현실이 지양된 이며, 액체근대의 가능한 대안이란 아마도 유동적인 liquid alternatives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현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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