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유형지에서 외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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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터다이크는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4장에서 이 책에 실린 카프카의 세 단편들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최초의 고민, 단식 수도자 을 다룬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무슨 책을 읽어도 카프카는 나온다. 난 왜 카프카를 이제야 읽나 후회할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읽었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제라도 읽는 것이 맞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다. 그래도 15년만 일찍 카프카 읽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1917)

유럽인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빨간 페터가 자신이 원숭이였던 시절을 학술원에 보고한 글이다. 아프리카 골드코스트(가나)에서 총 두 발을 맞고 포획된 원숭이가 좁은 우리에 실려 배를 타고 유럽으로 실려오던 중에 순차적으로 배우게 된 인간 흉내 악수, 침뱉기, 파이프 담배, 코르크를 따서 브랜디를 마시고 병 던져 버리기 의 학습과정을 회상한다. 그의 인간모방 학습은 오직 우리로부터의 출구(the way out of the cage)를 찾기 위함이었는데, 이 출구는 탈출도 아니고 자유도 아니다. 탈출은 자살행위로 여겨졌고, 인간이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여기며 동경하는 자유를 그는 이미 느꼈지만 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유는 유럽에 도착한 후 그가 있던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던 곡예사 인간들이 추구했던 것이다(212-213). 그리 적대적이지 않은 선원들을 관찰하면서 내적인 안정을 얻게 된 빨간 페터는 살려면 출구를 찾아내야 했고, 그 출구를 사람 흉내에서 찾았다. 그는 결국 사람들이 가르치지 않은 사람의 말까지 함으로써 우리에서 나오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노력 끝에 새로운 창살에 불과한 동물원이 아니라 곡마단(서커스단)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밖으로 뛰어나갔다”(219). 많은 선생들이 그를 가르쳤고, 피나는 노력 끝에 빨간 페터는 유럽인 평균 교양 수준에 도달한다.” 이는 자유를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출구였을 뿐이다. 그는 이제 밤에는 공연을 하고, 매니저를 대동하며, 숙소에 오면 훈련 중인 여자 침팬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가 바란 것은 오직 지식을 넓히는 일이었고, 그 목표에 도달했다.

 

최초의 고민 (1922)

공중곡예사는 언제나 서커스장 천장에 매달려 완전한 기술을 획득할 목적으로 끊임없이 수련한다. 순회공연은 그에게 고역이고, 흥행주는 이런 그를 경주용 자동차에 태워 초고속으로 이동시키거나, 기차 한 칸을 통째로 그에게 배정하여 그 칸에 서커스장처럼 그물을 쳐준다. 기차 안에서 곡예사는 흥행주에게 눈물을 흘리며 부탁한다. 앞으로는 그네 두 개를 써야 하겠다고. 흥행주는 그러마고 약속을 하고 전보를 보내 그네를 하나 더 만들기로 하고 곡예사를 진정시킨다.

 

단식 수도자 (1923)

단식공연이 잘 나갔을 때, 단식 수도자는 온 마을의 관심을 받았다. 감시자가 혹시 그가 무언가를 먹지 않나 불철주야 감시했으며, 단식이 끝나면 관중들의 경탄 속에서 귀부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수련을 마쳐야 했다. 수도자는 단식을 계속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40일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단식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 못 마땅했지만 단식은 늘 40일만에 환호 속에 끝났다.


시간이 흘러 단식공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식어버렸지만, 다른 일을 찾을 수 없었던 단식 수도자는 흥행주와 헤어져 곡마단에 고용되어 공연 지속을 도모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당최 단식 공연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가 있는 우리는 단지 마구간으로 가는 통로의 방해물신세로 전락한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수도자는 혼자만의 단식을 40일을 훌쩍 넘겨 진행하면서 자신만의 기록을 계속 갱신하다 밝견된다. 그를 발견한 감독이 그에게 왜 다른 일을 못하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단식을 하는 이유는 단지 맛있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긴 그는 "치워졌으며", 그 우리에는 표범이 새로 들어온다. 표범에게는 계속 먹이가 주어졌고, 사람들은 그 우리에 몰려들었다.

 

아스케시스: 자기에 대한 작업

슬로터다이크는 위의 세 단편들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밧줄을 타다 떨어져 죽은 곡예사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슬로터다이크는 릴케처럼 카프카도 니체의 관점을 내재화하였다고 본다. 곡예사가 타던 밧줄과 카프카 단편의 주인공들의 삶은 모두 내재성에서 초월성으로의 이행을 형상화한 것이라며, 곡예주의(acrobatism)에 초점을 맞춘다. 세 단편에 대한 슬로터다이크의 해석은 일반적 독자의 시각보다 약간 더 심오하다.

 

그는 <학술원 보고>에서는 빨간 페터의 자발적 스토아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최초의 고민>의 공중곡예사는 세속세계와 단절하고자 하는 종교적 은둔의 패러디로 보면서, ‘예술가와 시민이라는 이중적 삶이 초래하는 긴장을 예술가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해소/회피하고자 하는 곡예사는 늘 그 수준을 높이려는 향상에 대한 압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처세에 능한 예술가는 진정한 예술인이 아니며, 이것이 일상이 되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는 사라진다. 이 점은 <단식 수도자>에서도 관찰되는데, 이들의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완수할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 슬로터다이크는 단식은 고전적 자기수련에서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자기수련 그 자체로서 능동적인 결핍 체험인데, 음식의 결핍은 보다 고귀한 것, 곧 신이나 깨달음에 대해 갈망하는 자들이 극복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냥 지나쳤지만 슬로터다이크는 반전을 지적하는데, 단식술사가 단식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지 입맛(taste) 때문였다는 것이다. 그는 맛있는 것이 없었고, 따라서 먹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에 굶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헐... 맥빠진다. 그런데 슬로터다이크는 이 영양섭취 거절을 나를 만지지 말라”(요한, 20: 17)보다 더 심오한 내 안에 넣지 말라(don’t enter me)” 또는 나를 꽉 채우지 말라(don’t stuff me full)”로 해석한다. 단식공연의 인기 소멸은 이제 부족한 것이 없는 시대의 도래에서 기원하며, 이는 신의 죽음과 동의어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카프카의 세 단편들을 신의 죽음 이후에 행해지는 참수당한 자기수련(beheaded asceticism)”의 모습으로 해석해낸다. 머리없는 토르소의 자기수련. 토르소를 보는 자는 토르소의 우월한 근육질 몸이 자신의 열등한 지방질 몸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뒤바뀐다. 토르소를 보던 자는 이제 토르소가 보는 자, 토르소의 시선을 느끼는 자로 바뀐다. 그는 위에서 하는 명령을 느끼게 되고, 이 수직적 긴장이 차라투스트라의 외줄타기 곡예사와 카프카의 세 단편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출구와 향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수직적 명령였다는 것이다. 우월한 것이 열등한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과 그 명령을 내재화하여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아스케시스의 멘탈리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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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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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시간보다 리뷰를 쓰는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책 속에 담긴 층들이 여럿 있었고, 매력적인 아이러니들을 정리해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정말 재미있는 이 책에 대한 별 재미없는 리뷰다. 처음에 책을 읽으면서 든 인상은 <빌리 엘리어트>의 게이 버전쯤 되나보다 싶었는데, 이 책을 게이 청년의 노동자계급 탈출기만으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그 안에는 더 큰 이야기와 심오한 통찰이 담겨져 있다. 이 책에서는 개념과 경험, 또는 사회적 질문과 개인적 질문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되어 주체화/예속화 또는 재생산의 서사가 구성된다. 덜 여문 글쓰기는 보통 추상적 이론의 일반성을 전제하고, 그것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경험적 사례들을 제시하며 글을 전개한다. 그러나 에리봉은 이론과 현실이 둘 중 하나일 때에는 그 어느 것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1. 가족의 굴곡, 또는 노동계급의 우경화?

1953년생인 디디에 에리봉은 이 책을 50대 중반인 2009년에 출판했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 열여섯에 낳은 에리봉의 어머니를 버리고 27세의 나이로 2차대전 당시 독일로 가서 일을 했던 외할머니의 젊은 시절이나 독일 점령 치하에서 먹을거리를 구하러 다니던 아버지의 얘기부터 나오니 대략 육칠십 년 정도에 걸친 한 가족의 역사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외할머니가 종전 후 삭발당해 곤욕을 치렀으리라는 상상의 장면은 독일군과 관계를 가졌던 여성들에게 조리돌림식 모욕주기를 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장면 그대로이다(84-85). 여기까지라면 딱히 인상적일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여성들의 성적 일탈을 처벌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력을 재확인하면서 남성적인 힘 속에서 부활하였다고(86).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거시적 설명은 곧 미시적 개인 서사로 미끄러져 넘어간다. “그녀는 독일군과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때까지의 삶보다 좀더 나은 삶을 보장받고자 했던 것일까? 이 두 가지 설명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서술이 이 책에는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단죄했던 외할머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정말 그것은 명확한 의식적 결정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그 상황에 내가 속하게 되었을 뿐인가, 그것도 아니면 지나고 나서 재구성한 기억일까? 이처럼 에리봉은 사건을 재구성할 때 일견 같이 있을 수 없는 이유들의 공존 가능성, 양가성(ambivalence), 자아 내부에 존재하는 구조화하는 양극성에 문을 열어놓는다(182, 184). 그리고 나 역시 그래왔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에리봉은 가족을 전략들의 총체”(104)라고 하면서, 부르주아들에게는 가족이 사회관계자본이며 또 그것의 획득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것이지만, 노동자 계급에게 가족은 정상적 가족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 자본일 뿐이고, 긍정은커녕 지우기 바쁜 관계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론적 일반화와 현실 간의 괴리, 그리고 현실들의 차이가 늘 고려된다. 재생산, 규범화, 주체화, 예속화 등의 개념은 이 다채로운 삶들을 재현하기에는 부족한 제한된 도구일 뿐이다. 신부들의 아동성추행, 자신이 못 이룬 계급상승의 꿈을 에리봉에게 투사하면서도 아들의 영어 시 암송이 자신을 모욕한다고 느껴 발끈하는 어머니, 늘 일을 더 많이 하는 어머니의 공장 출근이 불안해서 시빗거리를 찾아 근처 카페에 잠복하는 아버지, 자연스레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형, 저 멀리 제3세계가 아니라 자신들의 일상생활에서 감내해야 하는 비루함들에 대해 항의하고 거부하는 것을 좌파와 동일시하는 민중들의 공산당 지지, 그리고 이 와중에 가족들은 아무도 안 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계급탈출을 꿈꾸다가 트로츠키주의 활동가가 되면서 자신의 가족이 체현하고 있는 즉자적 계급과 책에서 읽은 대자적 계급 간의 괴리로 번민하던 에리봉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시간이 흘러 에리봉은 묻는다. 이들이 반이민주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에 투표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토마 피케티가 이제는 브라만 좌파가 지배하는 고학력 정당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낀 민중들의 소외감에서 그 이유를 찾았듯, 에리봉 역시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을 잃어버린 데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과거 이들의 공산당 지지는 소련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었고, 제도권으로부터 존재 자체가 체계적으로 배제된자신들을 정의롭게 대변하던 이들에 대한 지지였다(48). 그러나 오늘날 좌파 정당과 지식인들은 피치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통치자의 언어로 생각하고 말한다. 과거에는 피지배자와 피억업자라고 인식했던 이들을 그저 배제된 자들’, 불안정성 증가의 피해자, 사회적으로 탈락한 빈민들로 호명할 뿐이다(170). 이 브라만 좌파의 호명은 민중이라는 세계 내 존재를 모욕당한 존재로 열등화한다(233). 민중에게 이 브라만 좌파는 상인 우파와 똑같은 저 위에 저 멀리 있는 다 똑같은 놈들에 불과하다. 에리봉은 노동자들의 국민전선 지지를 결국 자신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서민층의 호소, ... 한때 자신들을 대표하고 방어하던 자들에 의해서까지 짓밟히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의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호소로 해석한다(151).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먼저, 정당이다. 이 정당의 근본적 역할은 바로 현실에 대한 정치적 지각 양식과 이론적 틀을 구축하기, 다른 관점들을 제공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좌파라고 불릴 만한 미래를 스케치하기이다(174-175).

 

에리봉의 성찰이 훌륭한 점은 자신의 실존적 배반을 인정한다는 것이다(30). 그는 이 문제, 오늘날 열등화된 주체의 구성 및 그에 수반되는 자기 침묵과 자기 고백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구성을 자신 역시 외면해왔음을 인정한다(23). 그의 푸코 전기는 성적 규범화를 통해 열등화, 비체화된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하였고, 이는 자신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인 민중 계급의 열등화와 사회적 소속을 어둠 속으로 밀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곧 자신을 노동자의 아들이 아닌 게이 어린이로 주체화했던 것이다(31). 따라서 이 책은 자신이 마음의 구석 안 보이는 곳 어딘가에 쑤셔 박아 두었던, 어쩌면 훌훌 벗어던지고 싶었던 출신성분에 대한 용기 있는 조명이다. 50대 중반에 이른 어떤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야 쓸 수 있는 자신, 가족,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완숙했기 때문에 쓸 수 있었지만, 이 책을 썼기 때문에 비로소 완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쓰고 출판한 것이 아스케시스 자체인 작업이다.

 

2. 게이 청년의 지방 노동계급 탈출기라는 다소 뻔한(?) 이야기

에리봉의 성장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가부장제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지방 노동계급 가정에서 성장한 유년기, 게이 정체성을 인식하고 출신성분 세탁을 위해 노력하던 청년기, 그리고 노력과 행운의 결합으로 자포자기했던 꿈을 이루게 된 장년기로 나눠보자.

 

1) 유년기

일찌감치 결정된 사회적 운명을 지고 태어났지만, 어린 디디에는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와 닮지 않으려는 것에 투여한다. 때로는 아버지와 낚시를 하면서 유대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하며 책을 읽고 싶어 한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외할아버지를 좋아하면서도, 유리창을 닦는 그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누가 볼까 전전긍긍한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정치적으로는 노동자들 편이었지만, 그 세계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견디기 힘들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벽에 병들을 던져 깨고, 한 번뿐이지만 어머니 역시 무언가를 던져 아버지의 갈비뼈를 금가게 한다. 부모는 노동자이면서 비참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온갖 소비재를 열렬히 욕망하면서 새로 산 물건의 비싼 가격들을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2) 청년기

이 즉자적 계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디디에는 발버둥친다. 노동자 부모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아버지 말에 따르면 신부들이나 읽는” <르 몽드>뿐만 아니라, 맑스와 트로츠키를 읽는다. 역설적으로 맑스주의가 노동자계급 자식의 사회적 탈동일시기제였던 것이다. 자신을 인민의 아방가르드로 간주하며, “실제의 노동자들에게서 더 잘 멀어지기 위해 노동계급을 예찬했던 것이다”(100). 에리봉은 이 아이러니를 직시한다. “자기의 귀속과 변형 과정, 정체성의 구성과 거부 과정은 내 안에서 언제나 서로 연계되어 있었고, 뒤얽혀 있었으며, 서로 맞서 싸우며 제약하는 것이었다”(109).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 진학을 위한 고등학교에 진학한 에리봉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혐오했던 [그 부르주아들의] 세계에 역설적이지만 잘 적응했다”(182). 교육체계로부터 축출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을 가족의 세계로부터 구출한다. 운동선수가 아니라 심미주의자의 길을 택하고, 자신이 적극적으로 동의한 폭력을 자신에게 행한다. “진정한 수행(修行, ascése) ... 자신에 대한 교육, 더 정확하게는 과거의 내 존재를 만든 학습으로부터의 탈피를 경유하는 재교육”(187). 소위 정당한 문화에 대한 자발적 저항을 계속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굽힌다. “저항은 나를 잃는 길이었고, 복종은 나를 구하는 길이었다”(190).

 

그 와중에 멋진 이름을 가진 부유층 친구와 우정을 나눈다(192, “은 이름의 오역이다). 친구는 배우고 싶다는 갈망을 가르쳐주었고, 디디에는 그를 닮고자 열망했다(193). 친구는 디디에에게 책에 대한 취향을 갖게 했고, 둘은 영화와 소설 이야기를 함께 하고, 디디에는 친구의 필체까지 따라 하고, 각자의 필명을 짓는다. “중요했던 것은 열광이었고, “내용은 그 다음이었다”(197). 이 우정 덕택에 에리봉의 학교 문화에 대한 자발적 거부가 문화 일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거부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각자의 길을 간다. 친구는 히피의 길을, 에리봉은 트로츠키주의자의 길을...

 

에리봉이 진학한 랭스대학 철학과는 그의 지적 열망을 전혀 채워주지 못했고, 파리에 대한 선망을 더 키우게 된다. 그동안 주체의 자유를 강조한 사르트르에 매료되었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그의 석사논문은 사르트르에 관한 것이었는데, ‘역사를 부정한 레비-스트로스와 푸코를 비판했다는 것이 재미있다(216).

 

게이 정체성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지만, 그 이후에는 선택이 이어진다. “절반은 트로츠키주의자로, 절반은 게이로쪼개진 에리봉은 맑스주의 안에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사회적 탈동일시 기제였던 맑스주의 자체가 이제는 벗어야 할 외투가 된다. 게이처럼 규범에 편입되지 않은 이들에게 어디서 어떻게 사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이들은 공간과 시간을 계속해서 옮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이에 맞게 그 능력을 키워야 했다(245). 어떤 행운이 이 열망을 실현시켜 그는 파리지앵이 될 수 있었다(217). 게이라는 오염된 정체성은 푸코의 저작들에 대한 남다른 독서로 그를 이끈다(252-254).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푸코와 타자에 대해 글을 쓰는 사르트르가 에리봉에 의해서 오묘하게 결합된다(254).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 사르트르와 푸코는 에리봉이 자신을 재발명하고 과거를 재조명하는 데에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리고 수치심은 자긍심으로 변화한다(256).

 

3) 장년기

에필로그는 참 인상적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자 어떤 우연과 호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뤄진다. 물론 여기에는 하고 싶은 것을 꾸준히 했던 자신의 아스케시스가 존재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중등교원 자격도 얻지 못하고, 박사논문도 쓰지 못한다. 스물다섯 살 무렵 방황하던 중 만난 게이 친구의 친구가 <리베라시옹>에 근무하였는데, 그 친구와 말이 잘 통했고, 그 친구는 기사를 부탁한다. 그 때부터 에리봉의 비상은 시작된다. 계단형 발전의 어떤 도약이 일어난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다 잘 안 돼서 좌절하였을 때 그 기회가 왔고, 에리봉은 그 기회를 꽉 붙든다. 부르디외, 뒤메질, 레비-스트로스, 푸코와 인터뷰를 하며 개인적 친분을 쌓게 된다. 취재원과의 불가근불가원의 거리를 지키는 단순한 기자가 아니라, 친구이자 조력자가 된 것이다. 부르디외에게도 푸코에게도 그는 중요한 사람이 된다. 푸코 사후 뒤메질은 에리봉에게 푸코의 전기 집필을 넌지시 제안하였고, 이 훌륭한 제안자가 세상을 떠난 후 출판된 푸코 전기는 세계적인 히트를 친다. 그리고 단지 푸코 위인전기가 아니라, 푸코의 사상을 신보수주의 반혁명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대담집, 전기 작가에서 이제 그는 또 한 계단 올라서서 자신의 이름으로 게이와 소수자에 대한 책들을 출판하며, 유럽, 남미, 미국에서 강의를 하고 여러 상을 받는다. 그리고 아미앵대학의 사회학과 교수가 된다. 어둑해질 무렵 불안을 잊으려 파트너를 찾아 거리를 어슬렁거렸을 스물다섯 게이 청년이 포기했던 미래가 이렇게 현실이 된다.

 

3. 매개자로서의 맑스주의와 정당

맑스주의는 에리봉의 성장에 유용한 것이었다. 그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탈출시키는 사회적 탈동일시의 기제였지만, 탈출이 완료되자 벗어던지는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역설의 역설이다. 책에서 배운 대자적 계급이 현실의 즉자적 계급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고, 에리봉으로 하여금 진짜 노동자들은 볼 엄두도 못 내는 어려운 철학 책으로 이끌었으며, 나중에는 둘로 쪼개진 자기 중에서 트로츠키주의자 에리봉을 버리고, 게이 에리봉을 택한다. 이것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에리봉이 이 책을 통해 이론과 정당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케 할 어떤 이론-실천 복합체라는 매개자의 재등장을 염원한다는 점이다. 그는 자크 랑시에르를 겨냥하며, 노동자 계급이 본성상 좌파적이고 따라서 이들의 자생적 지식에 기반한 비판과 변혁의 전망을 도출해내는 것은 지식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171). 이러한 주장은 얼핏 보면 의식성의 외부 도입 테제와 전위정당의 역할을 강조한 레닌의 주장과 무척 유사해보인다. 그러나 그가 염원하는 이 새로운 좌파 정치의 지침은 젊은 날의 트로츠키주의를 포함한 과거의 맑스주의와는 다른 실천철학일 것이다. 어떤 궁극적인 전복해방도 존재하지 않는다(258). 무언가 전복시켰다 해도 그것은 약간의 자리 이동을 만들어낼 뿐이고, 이전의 모순을 다 해결하지도 못하며,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낼 것이다. 인민의 자생성과 해방의 전망에 대한 의존 없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끝나지 않는 전투를 사고하고 그에 복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 그것은 어떤 것일까? 재등장하는 매개자(reappearing mediator)”에 대한 염원은 카르멘의 대사를 떠오르게 한다. Love comes and goes, and then comes back. 그러나 사랑이라는 어떤 행운은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그냥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온 사랑도 떠나간 사랑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4. 아스케시스, 그리고 친구가 준 행운

이 책에서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것은 에리봉이 자신의 존재의 원칙으로 삼은 아스케시스(askesis)이다. 푸코가 말년에 주목했던 개념인 아스케시스는 자기연마”(성의 역사3), “자기수련”(주체의 해석학), ”자기수양“(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수양)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수행(修行, ascése)으로 번역된다. 사실 권력에서 통치성에 이르는 푸코의 1970년대 작업들에 비해 말년의 연구에 관심이 덜 했는데, 이는 기독교적 금욕주의(asceticism) 이전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그의 연구가 내 삶과 무관하게 느껴졌기 때문였다. 그런데 에리봉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부단한 아스케시스 과정으로 형상화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묻어 놓았던 또 다른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 곧 아스케시스 작업을 수행한다. 자기는 구원을 위해 억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 수양, 연마, 수련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는 작업 중인 작품이다. 안주하고자 하는 이에게 아스케시스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삶을 도모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면 변신을 위한 아스케시스를 시도해야 할터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나를 만드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나의 어떤 부분과는 단절하고, 어떤 부분은 더 키우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우리의 현재다. 따라서 우리는 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재표명되고 재창조된다 (무한정 재착수해야 하는 과업처럼)“(257).


그러나 아스케시스는 혼자서 도를 닦아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필요하다. 에리봉은 자신이 잘 나서 또는 혼자만의 각고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했다고 떠벌이지 않는다.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함으로써 문화 일반에 대해 접근하는 고유의 길을 알게 해준 히피 친구, <리베라시옹>에 기고를 부탁한 친구의 친구, 보수화된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근무하게 된 자기 때문에 그 정치적 성향을 알고 있음에도 인터뷰를 하고 원고를 보내준 부르디외, 푸코 전기의 집필을 권해준 뒤메질, 이 모든 이들이 없었다면 에리봉의 아스케시스는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친구들의 역할은 행운을 전해줄 수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교류해야만 자신의 기준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다. 무엇에 복종할 것인가,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때로는 복종이 나를 구하고, 때로는 저항이 나를 지키는 것이지만, 그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햄릿의 고뇌 끝에 내리는 결정이 과연 단독적인 것인가? 혼자만의 선택과 결정은 세상에 없다. 선택의 순간에 옳아 보였던 결정은 그 후에는 후회할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잘못된 선택을 한 시점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 선택 이후의 행보의 문제였을까? 선택의 순간에도 그 후의 과정에도 친구는 필요하다. 따라서 아스케시스에는 쉰우지아가 수반되어야 한다.

 

에리봉 덕에 푸코 말년의 작업의 진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아스케시스, 혹은 이미 해온 아스케시스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이 오랫동안 잊고 살던 질문을 다시 꺼내들게 한 책이다.

 

5. 애도와 화해

에리봉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와 닮고 싶지 않았고, 그와 같은 세상에 속하고 싶지 않았고, 그 세계를 떠난 후 절연하고 살았다. 그런 그가 이 책을 마무리지으며, 그 때까지 읽지 않고 남겨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변경 지방의 결말부 -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의 심장마비 소식을 듣고 기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부고를 듣는 장면 - 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께서는 이제 많은 것을 잊으신 듯 행복해 보이고, 나도 이제 그게 좀 편하다. 그런데 당신의 모습에는 아직도 내가 닮고 싶지 않은 것, 나의 존재와 반대되는 것 특히, 신앙과 정당 이 있다. 살아있는 이와의 절대적 화해는 죽은 이에 대한 애도보다 어렵다.

 

리뷰를 다 썼는데도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층들이 많은, 아이러니가 살아 있는, 무지개빛 생애사이다. 훌륭한 아스케시스, 닮고 싶은 삶이다. 즐겁게 읽고 힘들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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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4-06 12: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리 정말 잘 하셨는데요. 저도 정리가 정말 너무 어렵고 잘 안 됐어요. 워낙 심오하고 여러 결의 통찰이 담겨 있어 그 통잘을 내식으로 제대로 소화하려면 저도 뭔가 공부를 더 해야 가능하겠다는 생각, 내가 내 삶을 객관화해서 세상에 내어 놓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싶은 준거점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사적 경험을 공적 시선으로 철저히 해부, 해체하고 해석한 보고서인데 왜 중간중간 눈물이 났던지...아,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라 말이 길어졌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에로이카 2022-04-06 13:19   좋아요 2 | URL
blanca님 안녕하세요? 네, 독자가 누구이든 자기를 돌아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할 말이 있게 만드는 좋은 책이지요.
 
현자와 목자 : 푸코와 파레시아
나카야마 겐 지음, 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Synousia

"함께 사는 것", "공재(共在, 함께 있음)", "사제동행" 등으로 번역된다.


나는 수누지아(sunousia)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리스어의 영어 표기이고, 아마 "쉰우시아(synousia)"가 맞는 한국어 표기법인 것 같다. 플라톤의 『편지들』 중 「일곱째 편지」에서 논의되었고, 푸코는 이를 1982~83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자기와 타인의 통치1983년 2월 16일 강의에서 다뤘다.    


가장 직접적인 정의는 아래 밑줄긋기의 174쪽, 각주 31번 참조.

나머지는 이 대화의 맥락.


[신플라톤주의 전통(플로티노스, 포르피리오스, 아우구스티누스)과 달리], 플라톤은 이러한 신적인 것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더불어 진실을 향한 길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 P121

플라톤은 ... 대화의 길, 디알렉티케의 길만이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사랑의 변증법에서의 세번째 단계인데, 젊은이나 사랑하는 자나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상대와 진실을 더불어 사랑하는 주체로서 행동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게 젊은이와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 모두가 주체가 되어 진실에 이르는 길을 나아가는 비의를 가르친다. ...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진실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가 진실에 이르는 길에 스스로 참가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것이 젊은이와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의 ‘공동생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P124

푸코는 플라톤이 이 대화편들에서 사랑의 문제 속에 진실의 문제를 근본적인 문제로서 도입했다고 지적한다.
<향연>과 <파이드로스>는 상대방의 자유와 ‘환심을 사려는 행위‘에 맞추어진 만들어진 연애술로부터 주체의 금욕과 진리[진실]를 향한 공동의 접근에 관심의 초점이 놓여진 연애술로의 이행을 보여 준다.[<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p. 278]

푸코는 이 자기 제어 자체가 윤리적 파레시아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곱째 편지>에서는 진실이 책에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밝혀져 있다. 함께 사는 삶에서, 진실은 영혼 속에 머무른다. 진실은 말해지는 말 속에, "영혼 속에 쓰인 말"(<파이드로스>, 276a)로서만 나타난다.
플라톤은 진실을 위한 존재론적 조건이 충족되는 최고의 장이 에로스의 장이라 여기고 있다. 이 에로스는 성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신체적 관계를 포기하고 타자를 진심으로 배려함으로써 타자와 함께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P125

서로 바라보는 행위 속에서 사람은 주체임과 동시에 객체가 된다. ... 나를 보는 눈은 내가 보는 눈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소크라테스는 제안한다. 바라보는 상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눈동자가 비춰지고 있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133a).

여기서 주체인 눈동자는 살아있는 인간 안에서 객체인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자기‘를 인식하려 한다면 자기 자신의 영혼으로 다른 영혼을 들여다 보고 거기서 자기를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말, 로고스이다. "그러니까 나와 너의 말(로고스)를 사용해서 혼으로 혼을 상대로 서로 교제"(130d)해야 한다.
영혼이 자기이고 주체라는 것은 영혼이 타자의 영혼과 ‘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영혼을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영혼은 자기를 인식할 수 없다. - P150

푸코는 플라톤이 철학과 그 외 학문간의 차이를 중시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다른 학문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이것을 암기하여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것이 습득의 길이다. 이에 비해 철학은 실천(프라그마)이며 공동생활(쉰우시아스)이라 여겨지고 있다. 푸코는 이 쉰우시아스라는 표현이, 함께 사는 것이자 거의 성적인 관계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는 데 주목한다. (각주 31: 푸코의 1983년 2월 16일 강의. ‘함께 사는 것‘을 원래 의미로 갖는 쉰우시아는, 보통 사회적 교류를 의미하지만 성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269c에서 ‘남성 상호 간의 교섭‘, 즉 소년에 대한 남성의 ‘쉰우시아‘라는 말을 사용하며, 플라톤은 <향연>, 206c에서 ‘남녀의 성교‘에 ‘쉰우시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진리는 이 생활 속에서 램프의 불이 타는 것처럼 영혼 속에서 빛나며, 쓴다는 행위도 이 공동생활의 일부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 P174

철학에서의 진리 개념은 책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것은 푸코가 이제까지 다루어 온 파레시아의 실천적 개념과 공통되는 요소이다. - P174

플라톤은 철학 행위가 진리를 보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실천으로서 나타냈다. 이 실천에서 진리는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영혼 속에 머무르는데, 이것은 친구와의 대화에서, 말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대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영혼 속에 그 진리의 램프를 타오르게 하기 위한 행위이며 그 자체가 진리를 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진리가 진리로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거의 언제나 진리의 부재를 보이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곤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는, 이를테면 ‘용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푸코가 주목하는 바는, 플라톤이 이 서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친구와의 대화라는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자로 쓰여진 책에서가 아니라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진리가, 자기와 타자의 진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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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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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이 바뀌면, 걷는 것도, 소리 내는 것도, 먹고 맛을 느끼는 것도, 분비물도, 활동 범위와 동선도, 보는 것도, 시선 느낌도, 그 시선에 담긴 마음에 대한 짐작도, 변신 전후를 함께 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 사람들이 하는 일도, 그 관계맺는 타자의 마음도, 심지어 그 타자의 몸까지도 다 바뀐다.

 

변신 이전,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세일즈맨을 하면서 부친의 사업 실패로 빚이 있는 가족의 생계를 건사하는 가장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아침 곤충으로 변한 그레고르는 그 변신의 이유를 물으려,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쉽지 않지만 적응하려 한다. 곤충의 몸으로 새롭게 겪음과 여전한 인간의 의식 간의 마찰이 내내 전개 된다. 의식은 기억하고 계획한다. 그레고르는 여동생 그레테를 음악학교에 보내겠다고 크리스마스에 가족들 앞에서 선언하기로 계획했던 것을 실행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한다. 곤충으로 변한 직후 어떻게 해야 할까를 세세히 계획하지만 그것 역시 실행 불가능한 것이고, 이전에 역할이 있었던 관계 바깥으로 튕겨져 나와 잠긴 방에 유폐되었을 뿐이다.

 

가장이 곤충이 되면서 가장에게 의존했던 모든 가족들은 다 돈을 벌어야 했다. 사업 실패 후 충분히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그레고르에게 의존했던 아버지도 일을 하고, 어머니도 삯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레고르가 진심을 전하려 했던 그레테는 변신한 그레고르를 처음에는 거의 유일하게 동정하며 돌봐주었지만 그녀 자신이 일을 하면서 돌봄노동에 소홀하게 된다. 돌봄이 노동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돈을 받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아주 큰 소진일 뿐이다.

 

곤충의 몸, 인간의 의식을 지닌 그레고르는 이 관계의 변형 속에서 가족들이 원하는 해결을 위해 인간다운 선택을 한다. 곧 죽음을 선택한다. 이 죽음과 함께 이 단편에서 그레고르 외에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였던 그레테도 숙녀로 변신한다.

 

2.

문학무식자인 나는 사람들이 왜 이 단편에 열광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들뢰즈도, 라투르도... 카프카는 내가 읽는 책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나의 앎 속에서 그는 언제나 괄호쳐진(bracketed) 존재였다. 무언가를 알고자 읽는 책에 등장하지만, 그 앎을 구성하면서도 괄호쳐진 곧 그렇다 치고 넘어가는, 질문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 괄호를 풀고 싶었다. 괄호를 푸니 낯선 모르는 것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최근 어떤 만남을 통해서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아는 것이 아님을 경험했다. 나는 그 몸들을 보아왔을 뿐, 그 몸들이 겪는 것은 몰랐다. 그 몸으로서 겪지 않고, 단지 그 몸을 보는 것으로는 전혀 모르는 앎이 있다. 그것은 단지 몸의 차이만이 아니라, 어떤 전체 구조 내에서 자리매김된 위치의 차이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대상의 지속성을 보전시키기 때문에 다른 감각들보다 앎에 우선적으로 기여한다.

 

하지만 봐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 읽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사이에는 무수한 괄호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봐서, 읽어서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카프카처럼... (물론 내가 이제 카프카를 좀 안다는 그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 몸이 되어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 변신하여 그 몸이 되어야 비로소 겪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만약 늙음이나 병처럼 자연스러운 변신이라면, 그 앎을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많이 들어 왔고, 또 때로는 나도 했던 다 크면 알게 될거야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말의 청자에게는 하나마나 한 소리일 뿐이고, 화자에게는 난문을 피해가는 전가의 보도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앎보다는 커도 알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내 몸으로는 겪을 수 없는 몸들의 경험에 대한 앎이 가능할까? 모든 앎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그 앎은 모름의 모름,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이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지식은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름을 안다는 것이 출발이다. 일반화의 성급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내 몸으로 겪을 수 없는 경험에 관한 상대적 지식은 그것을 겪은 사람의 호의와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이 다정한 친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것이 그 친구로 변신할 수 없는 나의 최선이다.

 

3.

괄호를 떼어내니, 평생 몰랐던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안다고 떠들었던 것, 지금도 그러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반성이 완전한 인간을 만들지는 못한다. 반성 이후의 실천이 이전보다 반드시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또 다른 새로운 실수를 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담한 무지에 대해서는 소심한 상대적 앎이 절대적으로 옳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봄(seeing)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둘 다 인식에 필요하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듣고 생각함이다. 그 몸을 보는 것 없이, 그 몸이 겪는 것을 들을 수 있고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어떤 앎에 기여할 것이다. 지배의 욕망이 배제된 어떤 앎이 가능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와 그의 상대방보다는 더 평등하고, 때로는 소크라테스 역할을 바꿔서 할 수 있는 친구 간의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것을 해보자는 이심전심과 그 두 마음에 대한 믿음이 이제 나는 생겼다.

 

앎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히 생각하면, 앎은 물음표를 허용하는 것이고, 독단적 믿음은 질문들을 배제, 추방, 거리두기, 가스라이팅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종교인은 나의 부모님을 포함하여 후자인데, 아주 드물게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좀 기쁘다. 그러나 나의 앎 역시 어떤 믿음에 기반해 있다. 앎과 믿음은 상호배제적이지 않다. 앎 역시 믿음에 기반하고, 믿음 역시 앎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반이 앎이든 믿음이든 늘 물음표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앎과 믿음은 상대적인 것이 되고, 물음표 없음에 대한 절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 다른 앎과 믿음의 조합 간에도 대화와 설명이 가능하다.

 

나는 그로 변신하지 못하고, 그도 나로 변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을 들이면 우리의 관계는 만들 수 있고, 나도 너도 변할 것이다. 이 변신이 무엇으로 변할지는, 이 함께 하는 대화가 무엇을 낳을지는 장담하지 말자. 존재(있음, being)에서 생성(, becoming)으로... 듣고 생각하고 말하며 감응하는 대화를 통해 나는 변신할 것이다. 나비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어도, 괄호친 것들이 더 많은 지금의 허물을 벗을 것이다. 괄호라는 허물을 벗으면, 물음표라는 분비물들이 나올 것이다. 이 의지의 표명은 나의 대화자가 나의 알기 위한 노력, 곧 괄호떼기로 우수수 쏟아진 모름들을 다정히 보살피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다.

 

"진리는 실천 속에서, 대화 속에서만 드러난다. 진리는 말해진 진리로서 대화 속에서 표현되어야 하고, 대화 상대자 속에서 등불처럼 타오르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 친구와의 대화라는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 문자로 쓰여진 책에서가 아니라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진리가, 자기와 타자의 진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 나카야마 겐, <현자와 목자: 푸코와 파레시아>(전혜리 옮김, 동문선), pp. 176,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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