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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1.
“고객님.” 상냥함을 가득 담은 이 목소리에 우리의 마음은 한결 풀어진다. 은행 직원도, 전화상담하는 서비스센터 직원도, 대형 마트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도 우리를 이렇게 부른다. 심지어는 “시민고객님”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단어도 등장하였다. 언제부터 “고객님”이 극존칭이 되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었는가?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언제부터 이 호칭으로 호명되기 시작했는가를…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난 그것이 그저 먹고 살기 힘든 한국 사회에 특유한 호들갑스러움이라고, 대기업들이 밑바닥 서비스 노동자들을 쥐어짜내는 방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고객님”이라는 생경한 호칭이 어느새 극존칭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마 한국은 특이한 경우이겠지만, 그 기저의 변화, 곧 소비자와 투자자가 되지 않고는 사람 대접을 받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점을 두고 보면 이는 한국에만 국한 되는 현상이 아니다. 로버트 라이시의 <<수퍼자본주의>>는 미국에서 이 세계적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를 쉬운 말로 잘 설명하고 있다.
2.
책의 논지는 아주 간단하다. 1970년대 후반 이후 기술혁신으로 인해 소비자(즉, 고객)와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한 기업간의 경쟁이 극심해짐으로써 수퍼자본주의가 이전까지의 민주적 자본주의를 대체하였고, 경제 영역의 수퍼자본주의의 논리가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범람함에 따라 민주주의가 침식당하였다는 것이다. 곧 개인적 행위자인 투자자와 소비자가 집합적 행위자인 시민을 질식시킨 것이다.
2차대전 이후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 자본주의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경제적 풍요로부터 흑인, 여성, 극빈층 등이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황금기라고 불리우기에는 다소 미흡하였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의 시대에 비하면 좋은 시절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문 시장은 몇몇 대기업들에 의해 과점되었고, 수요와 공급은 예측 가능하였고, 상품의 가격은 과점 대기업 간의 (그리고 국가와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기업인들은 국가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과 동일시하였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통해 중간계급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주가가 폭등하거나 폭락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주식투자는 큰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으며, 포트폴리오를 바꾸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55년에는 민간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1/3 이상이 노조에 가입해 있었다.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나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책정하는 데에 지침으로 작용하였다.
민주적 자본주의의 시대였던 1950-60년대는 미소간의 냉전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기 동안 미 국방성은 천문학적인 금액을 첨단 안보 기술 개발에 투자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축적된 기술 혁신의 결과는 곧 민간 부문으로 전파된다. 첨단 무기에 사용되는 반도체의 크기는 갈수록 작아졌고, 이는 곧 가전기구나 자동차에 응용된다. 인터넷 또한 실시간 정보 통신에 대한 펜타곤의 필요로부터 유래하였다. 또 군용기 개발에 이용되었던 기술이 보잉 707과 보잉 747의 원조 기술이 된다.
한편 베트남전이 발발하자, 미국에서부터 베트남까지 군수 보급을 위해 컨테이너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베트남에 하역을 한 빈 컨테이너는 미국에 돌아가기 전에 일본에 들러 일본의 값싼 제조품들을 싣고 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글로벌 공급 체인 (global supply chain)은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되었고, 글로벌리제이션의 물적 토대를 전 세계에 걸쳐 확립하게 된다.
컴퓨터화, 전문화, 경쟁의 심화 등을 동반하며, 새로운 생산 기술이 갑자기 넓어진 시장을 확보하고자 하는 기업들 간의 경쟁을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
또한 1981년 레이건의 집권 이후, 탈규제의 흐름이 거세짐에 따라, 민주적 자본주의 시기 동안 안정적으로 과점되던 부문 시장들 간의 장벽은 허물어지게 된다. AT&T의 전화시장 독점은 무너졌고, 수많은 저가 항공사들이 출현하였다. 트럭 택배를 전문으로 했던 UPS는 비행기를 사들였고, 항공수하물을 전문으로 하던 FedEx는 트럭들을 사들여 서로의 시장을 침식하며 경쟁을 벌여갔고, DHL은 이 커져가는 시장에 새로이 뛰어들었다. 노동조합은 기업의 경쟁력 강화의 발목을 잡는 세력으로 낙인 찍혀 직접적 탄압을 받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임금 하방 압력도 거세졌다. 또한 금융 부문의 탈규제는 주식 시장의 급팽창을 갖고 옴으로써 투기적 열망을 부추겼다. 이러한 탈규제 과정은 기업들로 하여금 더 많은 소비자와 투자자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가속화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냉전 시기에 이루어진 안보기술혁신 노력은 간접적으로 (1) 글로벌리제이션, (2) 생산 혁신, (3) 탈규제를 촉진하였고, 이 결과 기업간 경쟁은 극심해진다. 경쟁은 기업의 효율성과 수익성을 제고시켰고, 상품의 가격을 하락시켰다. 소비자와 투자자는 이 수퍼자본주의 시대의 왕이었다. 그러나 수퍼자본주의의 비용은 약자들에게 전가되었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하락하였고, 직업 안정성은 위협 받았으며, 월마트 같은 대형 소매업체의 등장은 동네 구멍 가게들의 몰락을 갖고 온 동시에, 제조업체들의 비용 절감 압력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곧 임노동을 해야하는 대다수 시민의 삶은 질식당한 것이다.
라이시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은 소비자, 투자자인 동시에 시민으로서 존재하지만, 수퍼자본주의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의 담지자인 시민이 질식당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단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과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라이시는 민주주의를 공동선에 도달할 수 있는 게임의 규칙을 시민이 다른 시민들과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체제로 정의한다. 하지만 수퍼자본주의는 시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돌아간다. 대다수의 시민은 소비자로서 자신이 구매하는 상품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지구 저 편에서 아동 노동의 착취를 통해 생산된 제품이더라도, 환경 오염을 유발시킨 상품이더라도 가격이 저렴하다면 구매한다. 상대적으로 비싼 유기농 제품을 구입하는 것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이며, 에너지 효율 제품을 구입하는 것도 지구의 환경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연료비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투자자들은 자신이 투자하는 기업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노동자들을 취급하는지, 환경 오염을 어떻게 방지하는 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배당률이 높은 주식을 사고, 그렇지 않은 주식은 팔아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수퍼자본주의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시민으로 존재하지만, 그 우리를 구성하는 나와 당신, 그(들)와 그녀(들)는 서로를 믿지 않는 투자자, 소비자로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기업의 경쟁은 이러한 투자자, 소비자로서 존재하는 우리, 곧 “고객님”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자신의 경쟁우위(competitive advantage)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곧 경쟁 기업을 물리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한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기업의 로비스트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기업들은 탈규제를 소리 높여 주장하지만 국가 없이 시장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공화, 민주 양당을 막론하고 엄청난 인맥과 막대한 자금을 통해 워싱턴의 정치를 움직인다. 가끔 의회 청문회에서 의원들이 환경 오염 등의 문제를 두고 기업 CEO들을 추궁하기도 하는데, 라이시는 이를 단지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들도 로비스트의 손아귀에 있으며, 실제로 기업의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은 제정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정치인들이 수퍼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기업들도 그런다. 소위 “사회적 책임 경영”이 그 예이다. 하지만 기업의 자발성으로 수퍼자본주의는 극복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기업의 존재이유는 (투자자와 소비자 확보를 통한) 이윤 추구이지,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퍼자본주의의 폐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확보할 것인가? 라이시는 경제적 영역 안에서 기업, 소비자, 투자자의 행위로 이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방법이 있다면, 그 경제적 영역이 굴러가는 게임의 규칙 자체를 민주적 절차 - 대통령 선거나, 의회에서의 법안 제정 등 - 를 통해서 경제 영역 바깥에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어야지만, 그 구속성을 갖는 규칙에 따라 활동하는 행위자들의 개별 활동이 바뀌게 되는 것이지, 이들의 선한 마음에 호소해 자발성에 기반한 행위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3.
라이시는 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버락 오바마의 자문위원으로서 일하고 있으며, 이 책의 내용은 상당 부분 오바마의 공약에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국민의료보험 도입이나 기업수입세 (corporate income tax) 삭감 등은 2007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수퍼자본주의를 다시 민주적 자본주의로 대체하는 게임의 규칙 변화를 위한 정책 제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능성이 그렇게 높을 것 같지는 않지만, 라이시는 차기 정부의 재무부 장관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자신의 위치 때문인지, 또는/그리고 미국식 프래그머티즘 때문인지, 앞부분에서 느낀 흥미가 뒤로 갈수록 떨어진다. 다양한 사례들을 들어 자신의 주장을 탄탄하게 뒷받침하면서 설득력 있게 얘기를 전개하지만, 결론은 다소 용두사미스럽다. 현실 정치를 통해 바꿀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2007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따라서 현재의 경제위기가 본격화되기 전에 나왔다. 현 경제위기로 인해 객관적 경제 상황이 좋지 않지만, 이 상황이 국가, 특히 미국의 정책 자율성을 극대화시킬 터이니 미국 국내 정책에 관한 한은 급진적인 개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곧 책의 결론을 쓰던 당시 라이시의 정책적 상상력을 규정하던 세상의 물적 토대가 바뀐 셈이다. 이후 민주주의적 개입이 수퍼자본주의 잔치 이후의 난장판을 어떻게 청소하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세워 나갈 지, 그리고 그 개혁이 다른 나라의 이익과 어떻게 조화와 갈등을 이루게 될 지에 대해서 주시해야 할 것이다.
4.
라이시는 이론적인 논의들을 별로 인용하고 있지 않다. 수퍼자본주의의 수혜자는 투자자, 소비자이며, 희생자는 시민이라는 어떻게 보면 별로 새롭지 않은 주장일 수도 있겠으나, 라이시의 이 주장의 매력은 이 배타적 집단 정체성이 세상 사람들 내부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내면화된 이중인격이 수퍼자본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이 논의를 접하면서 나는 오래 전 읽었던 미셸 푸코의 통치성과 권력에 대한 논의를 떠올렸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배권력은 왕과 같은 중앙의 상징에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걸쳐 모세혈관처럼 퍼져있다. 계급 대 계급의 배타적 집단 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 내부의 이중인격으로서 존재하며, 하나의 (소비자, 투자자) 마인드가 다른 하나의 (시민) 마인드를 지배 억압하는 체제이고, 그것이 이 수퍼자본주의의 게임의 규칙을 따른 결과였다는 라이시의 주장을 푸코의 권력 논의와 연결시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권력이 작동하는 장소가 생산의 현장에서 소비의 현장으로, 또 그 소비의 현장에 참여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개체적 공간인 개인의 신체로 이동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 인해 생산현장에서의 자생성에 기반한 경제투쟁이 의식성의 지도를 받는 전 사회적 공간의 정치투쟁으로 승화되는 것을 상정하는 레닌주의적 계급투쟁관은 그 적실성을 잃게 된다. 개별 생산 공간의 소규모 집합적 주체들이 사회 전체의 대규모 집합적 주체로 발전하기에는 투자와 소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원자화 압력이 너무 큰 것이다. "고객님"이라는 친절한 극존칭은 바로 이 원자화를 가능하게 하는 "소마"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환각제)인 것이다. 서비스 노동자들은 하인처럼 "고객님"을 주인 대접하지만, 그것은 결국 수퍼자본주의의 노예에게 소마를 주어, 국민국가의 진정한 주인인 "시민" 정체성을 마비시켜버릴 뿐이다. 원래 말의 뜻을 보자면, 시민(citizen)은 주인이지만 고객(顧客)은 손님이다. 그런데 "시민고객"이라니... 말장난도 이런 말장난이 없다.
5.
끝으로 “고객님”이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한국 상황을 보자. 나는 투자자, 소비자, 기업의 자율적 자정 노력으로 수퍼자본주의가 그 부정적 측면들을 일소할 수 없으리라는 라이시의 인식에 동의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운동과 함께 번져나간 조중동 광고업체 상품 불매 운동을 생각해보면, 한국과 미국의 상황은 또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이 사례는 특정한 정세 속에서 시민 마인드가 소비자(곧 고객) 마인드를 추동하여 국가와 자본에 대하여 압박을 행사한 예외적인 경우일 것이다. 곧 수퍼자본주의의 핵심인 소비자, 투자자 마인드의 시민 마인드에 대한 지배가 전도된 것이다.
그 지배의 전도는 그러나 게임 규칙의 변화를 갖고 오지 못하였다. 오히려 지배세력들은 게임의 규칙을 들이대면서 억지논리를 통해 불매행위 참가 시민/소비자들을 범법행위자(규칙 위반자)로 몰고 갔다. 라이시가 이 책에서 편 주장에 비추어 '촛불'을 바라본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라이시의 말대로 소비자들이 불매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게임의 규칙을 바꾸지 못하는 한 별 의미가 없고 결국은 사그라들게 마련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야 할까?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를 경험한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와 달리 시민 마인드가 늘 소비자, 투자자 마인드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