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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 무엇이 문제인가
신장섭.장하준 지음, 장진호 옮김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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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분석한 저작으로서 이 책만큼 국내외의 주목을 많이 받았던 책은 없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IMF가 부과했던 구조조정과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다. 학문적 깊이와 대중적 넓이를 동시에 지닌 훌륭한 경제학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2.
먼저 지은이들은, 거셴크론의 논의의 독창적 연장 속에서,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의 비교역사적 특정성을 고찰하고 있다. 거셴크론은 19세기 (개별기업가와 은행에 의해 주도된) 영국, (겸업은행이 주도한) 독일, (국가 주도의) 러시아의 상이한 발전경험을 유형화하면서, 각국의 발전 궤적을 국가간 경쟁이라는 맥락 위에 자리매김한다. 거셴크론은 이처럼 다른 발전 주도 주체의 차이를 후발국에는 부재한 선발국의 이점 – 자본, 테크놀로지, 금융 상의 이점 - 을 “대체”(substituting)하기 위한 후발국의 의식적 노력의 산물로 이해한다. 지은이들은 이 점에 주목하여 거셴크론의 따라잡기 전략을 “대체” 전략이라 이름 짓고, 이를 20세기의 상황에 응용하여 미국, 일본, 한국의 발전과정에 적용한다. 20세기 일본과 한국의 따라잡기는 19세기 독일과 러시아의 따라잡기 과정과 유사성을 보인다. 상업은행과 종합상사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케이레츠 모델은 독일의 겸업은행이 했던 역할과 유사하며, 일본보다 사적 부문이 훨씬 더 취약했던 한국에서 국가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러시아의 경험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대체전략을 통한 따라잡기를 시도했던 일본이나 한국과는 달리, 싱가포르와 타이완은 선진국의 이점을 제도적 배열을 통해 대체하기보다는 “보완”(complementing)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한국, 싱가포르, 타이완 3국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국가의 중심적 역할은 공통적으로 드러나지만, 보완전략을 취했던 싱가포르와 타이완과 달리, 한국에서는 재벌이 주요 산업화를 담당하게 된다. 국유화된 은행은 국가와 재벌의 관계를 매개하는 주요 고리였다. 지은이들이 “주식회사 한국 (Korea Inc.)”이라고 부르는 정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는 이처럼 후발국가 한국이 선진경제를 따라잡는 과정 중에 선진경제의 이점을 대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그리고 지은이의 분석 초점은 바로 이 정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에 집중된다.

이 책의 몸통 격인 3장은 1997년 금융위기의 결과 강요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 지은이들은 경제위기의 전개와 이에 대한 IMF와 주류경제학의 진단과 처방을 비판적으로 검토, 기각한 후, 그것과 대별되는 자신들의 진단과 처방을 내놓고 있다.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주류의 해석은 그것이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 비효율성과 부패에서 기인한 구조적 문제라고 보고, 구조조정은 이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을 겨냥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지은이들은 주류 입장이 구조적 문제를 과장했을 뿐 아니라, 잘못 진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짧은 지면에 경제위기 전개 과정을 아주 간결하게 잘 정리한다. 1996년부터 현저하게 드러났던 한국 경제의 문제는 무역적자의 폭증이었는데, 이 자체는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 가격의 폭락이라는 주기적 문제였다. 지은이들은 만약 이 주기적 문제에 의해 야기된 경상수지 적자가 단기 외채의 급증과 결합되지 않았다면, 한국 경제는 위기를 안 겪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의해 구조적 문제로 지목된 산업정책, 정실자본주의, ‘대마불사’ 논리, 재벌 기업지배구조의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이것들이 위기를 야기한 구조적 문제였다기 보다는 과거 오히려 한국의 발전을 추동했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강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1998년 말 이후의 경제회복도 구조조정 정책의 성과가 아니었으며,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구조조정 정책은 위기를 완화시키기보다는 심화시켰고, 경제회복은 IMF가 한국 정부가 긴축정책에서 케인즈주의적 경제 팽창정책으로 정책선회를 허용하였던 1998년 중반 이후에 재개되기 시작하였고, 외국 자본도 경제가 회복된 이후에야 다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책선회가 가능했던 것은 1998년 하반기 이후의 세계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었다. 세계경제는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서서히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었지만, 1998년 8월 러시아와 브라질의 위기가 터지고 뉴욕의 헤지펀드인 LTCM이 부도 직전까지 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을 위시한 G7 경제가 이자율 인하와 통화공급 증가를 단행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이 이자율을 낮추고 원화절하를 한 것은 원래 IMF 프로그램에도 들어있지 않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이 콜시장 금리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이 글로벌 케인즈주의적 정책의 실행이라는 맥락 속에서 가능했다.

IMF와 달리 지은이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옛 모델에서 새로운 발전 모델로의 “이행 실패” (transition failure)에서 찾으면서 이를 (1) 발전국가 모델의 쇠퇴, (2) 금융자유화 과정의 실패, (3) 재벌의 글로벌리제이션에 대한 적응 실패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4장에서는 5대 재벌들의 ‘빅딜’과 기타 재벌들의 ‘워크아웃’을 통해 이루어진 기업지배구조 개선 문제를 살펴보고 있는데, 불공정거래로 지목된 재벌의 내부거래의 금지나 금융기관들이 자산건전성 분류기준(forward-looking criteria)이나 BIS 비율을 준수토록 함으로써 기업 대출을 힘들게 한 것 등이 기대한 효과보다는 비용이 훨씬 더 컸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결론에서는 이러한 구조조정 과정이 과거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강점이었던 국가와 재벌의 위험부담 기능을 사실상 해체시키면서 본질상 보수적 자금운용을 할 수밖에 없는 금융부문에게 이 기능을 수행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된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구조조정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특징은 바로 주요 위험부담 주체의 부재로 요약된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미명 아래 강요된 이 특징은 영미식 신자유주의 경제의 특징인데, 지은이들은 따라잡기 발전 전략을 여전히 추구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선발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거셴크론의 논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끝에서 지은이들은 한국이 경제위기로 폭발한 “이행 실패”를 딛고 “이차 추격 시스템(second-stage catching-up system)”을 마련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경제영역에서 후퇴할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궁극적인 시스템 관리자(the ultimate system manager)로서 경제체제의 획일화를 강요하는 글로벌리제이션과 국내 경제의 특수성 간의 조정자(mediator)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또 해외 자본의 유출입에 대한 규제권을 다시금 획득해야 하고, 해외 금융에 대한 개방은 국내 상황의 고려에 기반해서 협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국가가 이를 잘 수행한다면 재벌구조를 해체함으로써 금융 위험을 감소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재벌의 다각적 구조 (diversified structure)에 기반한 내부의 자원동원과 계열사간 상호지원은  바로 재벌의 국제 경쟁력의 원천인데, 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3.
분석의 철저함이나 주장의 뚜렷함 모두에서 이 책은 탁월하다. 또한 이들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28년 동안 지속되어온 레이거노믹스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라는 옛날 책 제목이 생각나는데, 오늘날 이 시점 역사의 판단은 IMF와 주류경제학은 틀렸고, 신장섭, 장하준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은이들의 반신자유주의 주장을 접하면서 이전에 서평을 썼던 책 두 권이 계속 떠올랐다. 하나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한국경제 20년의 재조명』(http://blog.aladin.co.kr/eroica/2157950 )이고, 다른 하나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조영철의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http://blog.aladin.co.kr/eroica/1948027 )였다. 전자는 금융자유화가 그것이 기대했던 원활한 기업의 자금 조달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때 떠올랐으며, 후자는 국가가 고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체제를 다시금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읽었을 때 떠올랐다. 세 저작 모두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내가 쉽게 이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 있듯, 지은이들의 초점은 국가 – 은행 – 재벌의 연계이다. 지은이들이 이 책에서 이 초점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을 테고, 또 이렇게 초점을 명확히 했기 때문에 분석과 주장이 더욱 빛난다. 그러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주요 특징인 국가와 재벌에 의해 부담된 위험은 이 연계 내부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 지은이들은 다루지 않는다. 이 연계가 과거 고도 성장을 추동해 온 발전모델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지은이들의 진단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그 연계 바깥에 수출을 통한 기업의 이윤실현에 유리한 기회구조 – 세계적으로 팽창중인 시장 – 에 적절한 타이밍에 결합할 수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연계 내부의 주요 위험 부담 주체, 곧 국가가 비용과 위험을 국민들에게 분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부터 지금까지 뿐만 아니라, 과거 발전모델에 있어 일상적이었던 것이다. 지은이들은 한국 경제 자체의 성숙과 글로벌리제이션이 과거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이 변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구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2차 추격 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지은이들의 제안대로 연계 내부를 재정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연계와 연계 외부 간의 채널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지은이들은 국가가 글로벌리제이션과 국내 경제 간의 조정자로서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다루고 있지 않다.

지은이들은 신고전파 경제학과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제도주의 경제학자들이다. 시장은 사회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라는 폴라니의 인식은 제도주의 경제학의 한 기초를 이룬다. 국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라는 제도적 배열의 변화를 통해 경제 발전과 위기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제도주의 경제학의 전범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연계 또한 그 외부의 더 큰 사회에 배태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며, 만약 2차 추격시스템이 이전의 주식회사 한국 모델처럼 다시 한 번 하층 계급에게 고통을 짊어질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시장 전제(market despotism)를 통해 위험을 전가하는 작금의 신자유주의보다도 나을 게 없을 것이다.

어떠한 책을 읽고, 지은이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적극적 의미에서의 비판이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 서평은 결코 지은이들의 이 훌륭한 책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하는 것은 “2차 추격 시스템”으로의 이행이라는 지은이들이 제시한 정책 방향에 대한 동의 여부는 그 연계 내부 자체의 재배열 문제에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은이 장하준, 신장섭에 대한 독자들의 호오 여부는 사실 재벌에 대한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재벌 체제의 존속을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인정하면 이들의 논의를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기각하고 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지은이들의 대안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어 재벌에 대한 입장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국가 - 재벌 - 은행 연계 외부로 전가되었던 위험이 어떻게 재구조화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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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이병천 엮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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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출판된 이 책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이다.
이제 60년 남짓 되는 남한의 역사 속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그래도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기간 동안 정권을 잡은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1998-2007)의 10년이 꼴랑 전부이다. 그러니, 이 책은 그 자유주의 세력 집권기의 한 가운데에서 출판된 셈이다. 보수우파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시기의 한 복판에서 지은이들은 왜 그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을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에서 찾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정희 신드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중권은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박정희 소동이 “한때 신문과 잡지의 지면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이제 한마당 희극으로 끝난 듯”하다고 평가절하하였다 (339-340). 그러나 당시 진중권은 몇년 후 박근혜와 이명박이 경쟁적으로 박정희의 후계자적 정통성을 주장함으로써 보수우파가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진중권은 틀렸다. 그러나 바로 그가 틀렸기 때문에 (곧 박정희 신드롬이 한마당 희극이 아니라, 747이라는 개발공약을 앞세운 이명박이 대통령이 됨에 따라 단순한 신드롬을 넘어서 정치를 바꾼 실질적 효과를 갖고 왔기 때문에), 이 책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이병천의 총론을 포함하여 모두 열 두 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개발독재의 제 측면에 대한 경제학적 고찰을 싣고 있으며, 2부는 개발독재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과 함께, 이후 자유주의 집권기의 박정희 신드롬과 소위 “우리 안의 파시즘” 논쟁 등을 다루고 있다. 글 하나 하나를 정리하는 것은 관두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가장 흥미로왔던 서익진의 글과 여러 필자에 의해 반복되어 다루어진 주제 중 세 가지 사항 – 복선적 산업화, 국가의 금융통제, 경쟁적 노동시장 – 을 중심으로 정리하겠다.

박정희 시대의 발전양식 = 차입∙수출 기반 축적체제 + 개발독재적 국가조절양식
프랑수아 셰네에 대해 큰 호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책을 한국에 소개한 서익진에 대한 기대도 무척 크다. 이병천의 총론 바로 뒤에 실린 서익진의 글은 나의 그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했다. 자본주의 정치경제에 대한 접근방식으로서 조절이론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조절이론의 중심 격인 파리학파의 강한 이론지향성, 핵심부 국가에 국한된 분석범위, 일국적 분석단위 등이 몹시도 못 마땅한 나는 서익진이 소개해온 그르노블 학파의 좀더 유연한 조절이론에 큰 매력을 느껴 왔다. 남한의 자본주의 발전 궤도에 대한 조절이론적 접근은 그 동안 초보적으로 몇 번 시도되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알랭 리피에츠의 <<기적과 환상>>(한울)이 그나마 가장 훌륭한 저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리피에츠의 “주변부 포드주의” 개념은 브와이예에 의해 모순형용으로 비판받지만, 브와이예의 이러한 비판에 의해 정작 강조되는 것은 리피에츠의 정치하지 못한 개념 사용이 아니라, 조절이론의 외부, 혹은 그것의 이론적 난점이나 공백의 시인일 뿐이다. 곧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부에 존재하는 일국적 공간을 어떻게 전체의 부분으로서 분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조절이론 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문제인 것 같다. 결코 무시될 수는 없지만 섣불리 다룰 수 없는, 그래서 뭉개고 넘어가거나 회피해 버리고 마는 문제이다.

내가 서익진의 이 글이 좋았던 것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의 [일국적 공간에서의] 결합으로 설명되는 발전양식을 대내적 측면과 대외적 측면으로 나누어 동시에, 또 양자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왔는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학파의 이론화 속에서 일국의 발전양식은 다섯 개의 위계화된 제도적 형태의 결합으로 설명되며,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일국의 거시경제가 어떻게 편입되어 있는가는 그 다섯 개의 제도적 형태 중 하나로 개념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창한 이론화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화에 의지하여 현실을 설명한 연구들은 무척 찾기 힘들다. 불임의 기간이 길어지면 그 이론에 대한 기대도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서익진의 글은 이런 내게 조절이론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해주었다. 그가 조절이론을 통해 그린 박정희 시대의 발전양식은 다음과 같다. 

                     차입∙수출 기반 축적체제    +       개발독재적 국가조절양식
대외적 측면     ●생산재 중심의 수입                           ●수입과 외환의 통제
                     ●해외차입: 차관 →국제신용
                     ●생산재의 ‘수입을 위한 수출’                ●수출지원 (환율 + 보조금)
                     ● ‘창조된 동태적 경쟁우위’    ●국내의 상대가격 체계를 국제 가격 체계로부터 단절


대내적 측면     ●중앙집권적 은행제도: 고저축→ 고투자 ●국가에 의한 경제의 계획적 운용
                     ● 복선적 공업화:                                ●잉여동원 및 배분의 국가관리
                         수출대체와 수입대체의 병행                 관치금융 + 저축 조장 및 소비 억제
                                         +                                   ●노동력의 국가관리:
                         계열상승과 계열하강의 병행                 - 저임금 : 수출경쟁력의 원천
                     ● 외연적 축적→ 내포적 축적                   - 저임금 장시간 노동 
                                                                                - 저곡가 정책

조절이론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 간의 정합성, 혹은 제도적 형태들 간의 정합성을 통해 주어진 발전양식의 내적 작동원리를 규명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서익진은 1960년대부터 80년대 중엽까지 남한의 발전양식을 이와 같은 차입∙수출 기반 축적체제와 개발독재적 국가 조절양식의 결합으로 규정하면서, 양자가 대외적 측면과 대내적 측면에서 내적 일관성을 지니고 작동해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론적 얼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 김형기, 서익진(2006)은 1980년대 중엽을 거치면서 3저호황에 힘입은 임금 상승에 의한 구매력 확장으로 인하여 내수시장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개발독재 발전모델”이 “한국적 포드주의 발전모델”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과잉생산 경향과 채무화 경향을 내적 모순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97-98년의 경제위기는 이 두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중의 복선적 공업화
박정희 시대의 복선적 공업화는 이병천 (47-51), 조영철 (139, 142) 등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이다. 이들 모두는 남한의 반주변부로의 예외적인 지위 상승의 원인을 바로 수입대체 산업화와 수출지향 산업화의 결합에서 찾는다. 서익진은 이에 더하여 전후방 산업연관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계열상승과 계열하강의 병행적 시행”을 지적하며 “이중의 복선적 공업화”론을 제시한다 (80-82). 복선적 공업화는 대내적으로 I부문과 II부문을 고루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주의 국가들이 겪었던 II부문의 저발전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아직까지는 과당경쟁의 영역이 아니었던) 선진국을 시장으로 하는 제조업 수출 분야에 발빠르게 진출함으로써 창조된 동태적 경쟁우위를 가져옴으로써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비롯한 제3세계 수입대체 산업화의 실패한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국가의 금융통제: 금융헌신과 금융제약
복선형 산업화는 발전양식을 구성하는 여타 제도적 형태들과 제도적 보완성을 갖고 작동하였는데, 국가의 금융통제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는 발전국가 문헌 중에서 앰스덴, 우커밍스, 웨이드 등에 의해서도 집중적으로 조명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조영철과 유철규가 주로 살펴보고 있다.

조영철은 “대형 상업은행의 금융헌신(financial commitment)”이 후발산업화에 갖는 중요성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금융헌신은 자본시장 중심의 “이탈효과(exit effects)를 중시하는 거리두기 관계(arm’s length relations)의 단기적 기업금융”에서 관찰되는 금융유동성(financial liquidity)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어떻게 모험적 산업화 추진을 위해 “헌신적 자본을 장기간 공급하는 기업금융체제”, 곧 지도하는 국가와 국가의존적인 재벌 간의 발전지배연합체제를 확립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136-142).

유철규는 1960-70년대 제3세계의 금융 현실에 대한 상이한 개념화, 곧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과 “금융제약(financial restraint)”으로 대변되는 시장중심 접근과 제도주의적 접근을 소개한다. 매키넌과 쇼우로 대표되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금융억압 가설과 달리, 금융제약은 “정부가 금융부문으로부터 지대를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대 취득의 기회를 창출하고 이 기회를 사적 자본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둘 중에서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이 개념만으로는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급진적 금융자유화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한다. 곧 한국의 금융자유화는 남미와 달리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으며, 기존 선별금융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산업자본이 저항하기는커녕 ‘시장주의’의 이름을 빌려 대단히 적극적으로 금융자유화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조영철과 유철규의 글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좀 다르다. 예컨대 조영철은 “정부가 신용배분에는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신용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까지는 감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의 선별특혜금융으로 야기된 사채시장의 확대를 그 사례로 들고 있다 (149). 이에 반해 유철규는 “시기나 추산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소 절반 이상의 은행신용 용처가 정부에 의해 직접 지정되었으며, 정부는 대부분의 주요 은행을 소유했고 이자율을 통제했다”고 주장한다 (177). 이러한 차이가 단지 1972년 8∙3 조치 이전과 이후의 차이인 지는 잘 모르겠다.  

[2011. 3. 16. 추기]  조영철의 주장은 장하원 (1999: 89-90)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용용처 규제에 대한 유철규의 언급은 1972년 8∙3 조치를 통한 정부의 대대적인 위장사채 단속 이후의 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장하원 (1999).「1960년대 한국의 개발전략과 산업정책의 형성」, 정신문화연구원 편,『1960년대 한국의 공업화와 경제구조』(서울: 백산서당), 77-125쪽 참조.

경쟁적 노동시장
개발도상국가의 시장 가격 왜곡은 여러 논자들(앰스덴, 쿠즈네츠, 드 버니스 등)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다. 조영철은 자본시장과 생산물 시장에서는 국가가 시장규율을 대신함으로써 이러한 가격왜곡을 주도하였지만, 노동시장, 특히 생산직 노동시장은 “경쟁적 노동시장이어서 노동이동이 활발했고, 임금은 거의 노동의 수요∙공급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152). 이는 김삼수 (207-208), 이정우(232)에 의해서도 지적된다.  


기타
다른 글들도 재미있었다.
이병천의 총론은 박정희 개발독재의 쟁점을 두루 살펴보는 글인데, 그가 소개한 일본에서의 논의들이 꽤 흥미롭게 들렸다.

이상철은 박정희 정권의 산업정책이 어떻게 유연하게 변화하면서 수출주도 산업화를 가능하게 하였는지 살펴보고 있다. 내가 본 이상철 글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는 글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김일성의 유일체제 간의 연동을 살펴보며 동시에 유사성을 비교한 이종석의 글도 재미있었고, 베트남 파병의 경제적 득실을 일본과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하는 한홍구의 글도 매우 설득적이었다.

박정희 시대는 언제까지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으로 남을까?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은 사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의 부제이다. 그 책은 19세기 시장 문명의 흥망을 다루고 있는데, 1944년에 출판되었지만 21세기 벽두에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기원으로 읽히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2차대전 전후 케인즈주의의 흥망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쇠퇴를 19세기 시장 문명의 흥망 이후의 20세기 속편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맑스는 1852년에 출판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과거의 부르주아 혁명들이 어떻게 죽은 것들을 되살려내 현재 그들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만듦으로써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지 고찰하였다. 16세기 독일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사도 바오로를 가장하였고, 17세기 청교도 혁명의 크롬웰은 구약성경의 인물들을 인용하였고,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은 로마시대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세계사적 인물이나 사건은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맑스의 말은 이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들을 가리킬 때에는 맞는 말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유신의 선포와 10∙26 암살까지 박정희 체제의 존속은 20년 가까이에 걸쳐 진행된 위로부터의 수동혁명 과정이었지, 결코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는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는 현재 자신들의 이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과거의 언어를 차용했던 부르주아의 행위가 지배계급으로서 그들의 부족한 현재적 정당성을 과거의 신화로 감추려는 시도였음을 간파한다. 이것은 지난 10년간의 박정희 신드롬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거가 동원되는 과정이 위로부터의 수동혁명 과정일 경우, 역사가 두 번 반복되고 그치리라는 보장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예외적인 데에 비하여, 수동혁명은 항상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로 집약되는 남한의 1960-70년대는 참으로 특이한 역사적 경험이다. 신자유주의의 퇴조 속에서도 갈 곳을 몰라 이전의 시장지상주의적 관성에 의존하는 현 정부의 경제운용 또한 참으로 특이하게 보인다. 10년 혹은 20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시대를 그 미래에 올 “우리 시대”의 기원으로 소급할 것인가? 미래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을 새 시대의 혁명은 정녕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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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9-01-2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에로이카 님 리뷰는 알차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줘서 늘 잘 읽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에로이카 2009-01-2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 서재글에 무려 다섯 달만에 달린 댓글인지라 무지 반갑습니다. ^^ 두서없는 리뷰에 칭찬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겨레신문에 격주 연재된다는 21세기 진보 사상 기획에 기대가 무척 큽니다. 지성의 비관이 커질수록 의지의 낙관은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들고만 있는 나날들입니다. 발마스님도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한국 경제 20년의 재조명 - 1987년체제와 외환위기를 중심으로
홍순영.장재철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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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경제시스템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원근법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곧 경제시스템의 역사를 1987년과 1997년 외환위기, 이 두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세 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의 특성을 간략히 서술한 후에, 두 번째 시점(외환위기)의 전과 후를 비교한 후, 이 책의 지은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입장에 따라 향후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곧 현재 시점으로 오면 올수록 서술은 상세해지고, 주장은 강해진다.

1987년 이전의 체제는 수출주도형 성장 시스템였던 반면, 1987-1997년의 체제는 경제호황 속에서 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으로 인한 임금 증가가 내수를 확장시켜 내수주도형∙수출주도형 시스템이었다. “이 두 시기에는 소비와 설비투자 간에 피드백 효과가 있었으며 설비투자가 소비와 수출을 매개하며 경제성장의 동인 역할을 했다” (61).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에는 “내수 부문이 위축하고 대외 환경에 영향을 받는 수출 부분의 비중이 확대”되면서, “수출과 내수 부문이 괴리되고, 소비와 설비투자의 상호 연관성이 변질됨으로써 거시경제적 안정성이 훼손”되었다 (62, 65, 128-130).

지은이들은 1990년대 이후부터 실질임금증가율이 노동생산성증가율을 상회함에 따라, 기업의 임금 비용 부담이 커져서 고비용구조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이나, 당시에는 임금과 고용 구조가 경직되어 있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95-96, 98).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보다는 1987년 이후 임금인상이 소비지출로 바로 연결됨으로써 내수 확장에 기여하여 이전까지는 수출로만 먹고 살던 경제가, 이제는 수출과 내수의 쌍끌이가 투자와 선순환하며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점에 더 큰 강조가 놓여진다. [이 점은 한국이 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유혈적 테일러주의에서 주변부 포드주의로 이행했다는 리피에츠의 관찰과 일치한다.]

다른 한편, 1990년대 중반은 OECD 가입과 WTO 출범에 따라 정부가 개방과 자유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114-6, 138). 자본거래 자유화의 일환으로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국제금융시장 접근 관련 규제가 단기간 내에 과감히 완화”되었고,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금리가 낮은 단기자금을 선호했으며, 금융당국도 외채의존 경영을 우려하여 중장기 차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해외 자본 또한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의문시하지 않았다. 당시 S&P의 한국 국가신용등급은 AA-였다. 이처럼 쉽게 조달된 해외 자금은 기업의 대규모 투자 수요에 의해 소화되었다. 제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해외자금은 해외자금대로, 국내기업은 국내기업대로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세팅였던 셈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1997년 초부터 세 차례의 변곡점을 지나 IMF의 금융지원을 받아야 하는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세 변곡점은 1997년 1월의 한보 부도, 1997년 7월 기아자동차 부도유예협약 체결과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발생, 그리고 1997년 10월 외환위기가 홍콩으로까지 전파된 것을 말한다 (143-146).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단기자금이 급격하게 유출됨에 따라 나타난 외화유동성 부족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까지 늘어가만 가던 경상수지 적자였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원화 가치의 고평가가 지속된 상황과, 이 상황과 부분적으로 연결되 어 있는 교역조건의 악화를 꼽을 수 있다 (148-151).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은 내부의 정책실패와 연결되어 있다. (외환정책, 금융감독, 자본자유화정책과 기업투자 규제 완화의 동시진행 등). 요약하면,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역내의 경쟁체제 심화와 환율불균형, 세계 금융자유화 및 투기자본 확산 등의 외부적 요인이 외환위기의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외부 환경이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경직적 환율방어정책, 급진적 자본자유화 추진에 상응하는 감독의 실패, 인위적 업종전문화 정책등의 잇따른 정책 실패가 빚어낸 결과”란다 (161).

외부환경 변화와 국가 정책 실패의 결합이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는 이야기인데, 맞다. 하지만 재벌들은 경제위기의 종범이 아니라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이후에는 경제위기 이후 이루어진 제도개혁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지은이들은 주주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영미식 신자유주의로의 재편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과거 발전국가에 의해 육성되어온 재벌의 존재 기반 중 하나인 관계적 금융을 침식하고, 재벌가족의 경영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앞에 내세우는 이유는 그렇게 투명한 사익(私益) 때문이 아니다. 최근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저투자의 문제도 은행이 아니라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는데, 주식시장이 기업에 조달하는 자금보다 배당으로 추출해나가는 것이 더 많은 상황에서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은 외환위기 이후 오히려 줄어들었다 (205). [이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조영철의 책에서도 지적되는 내용이다.] 또한 국내 금융산업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권 시장 (M&A 시장)에서도 국내기업에 대한 역차별을 통해 외국 자본의 지배를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214, 220-5).

그리고 점잖게 가르친다. “자본의 국적성은 유의미하다”고 (246-7). “소유+전문 CEO 시스템” – 아마도 재벌경영체제를 가리키는 이들의 용어인 것 같다 –은 역사적 산물이며, 영미식 경제운용방식을 이상화시켜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던 그 “소유+전문 CEO 시스템”을 폐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사실 난 이 부분에서 장하준을 연상하였다.]

끝에 여러 정책 방향을 언급한다. 미국을 포함하여 전방위적 FTA를 추진하여야 하며, 요즘 산별노조로 가려는 추세가 존재하는데 기업별 노조도 좋은 점이 많다느니 “다원적 노사체제 하에서 대화와 협력”을 해야 한다느니… 사실 좀 주제 넘게 들리기도 한다. (삼성은 노조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핸드폰 위치추적이나 하지 마라.)

탄탄한 분석 위에서 중언부언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하는 좋은 책이다. 주장은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이 배웠다. 촛불집회하는 시민들 빨갱이라고 욕하고, 1인시위하던 여성을 각목으로 때리는 무서운 아저씨들이나, 양손에 태극기 성조기 흔들며 찬송가 부르는 개신교인들도 무섭다. 하지만 그 무식해서 용감한 우파와는 차원이 다른 정말 무섭고 세련된 우파는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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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 - 민주적 시장경제의 길, 민주주의총서 05
조영철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본문만 474쪽이다. 이틀을 아무 것도 안 하고 이 책만 봤다. 여느 때보다 하루 많은 그래서 고마운 요번 2월 안에 다 읽고 서평까지 쓰려고 굳세게 마음 먹고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넘어가서 그랬던 것일까? 아님 서문과 1장이 너무 재미있어서였을까? 혹은 기대가 너무 컸었나? 그것도 아님 직전에 읽은 책이 워낙 훌륭해서였나? 뭐 다일 것이다. 두께와 제목에 비해 기대에 못 미쳤다. 이 책이 별볼일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단지 내 기대가 너무 지나쳤다는 말일 뿐이다. 어찌 보면 봇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미래의 대안적 정책방향에 관한 최근의 연구 조류가 “좋은 말”을 넘어 이것이 실제로 “좋은 결과”를 갖고 올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갑갑함 때문일 수도 있다. 좋은 말은 어찌 보면 이미 차고 넘치는데, 문제는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고, 이는 그러한 연구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정치력 부재로 인한 전망의 판단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그 좋은 말들에 대한 미심쩍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1, 2, 3부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지은이 조영철 선생은 성장과 형평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확고한 케인즈주의자이다. 학문체계로서 케인즈주의 경제학에 별로 익숙하지 못한 내게는 많은 공부거리를 던져 준 것 같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금융억압과 자유화의 교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무척 재미있다. 1장에서 지은이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 19세기 – 1929년 대공황: 영국헤게모니의 성장과 쇠퇴. 자유무역 제국주의, 고도금융, 국제금본위제.
(2) 대공황 - 1970년대 말: 미국헤게모니. 뉴딜. 경영자자본주의, 케인스주의 관리금융, 포드주의 체제의 성장과 쇠퇴.
(3) 1980년대 - : 신자유주의 구조재편. 주주자본주의. 금융주도 축적체제(finance-led accumulation regime)의 형성.
여기에서 지은이는 지오바니 아리기의 “긴 20세기”의 논의를 중심으로 어떻게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축이었던 포드주의 임노동관계, 경영자자본주의, 케인스주의 관리금융체제 간의 연계가 유러달러시장의 출현,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 통화주의 긴축정책으로의 전환 등과 더불어 진행된 금융자유화와 함께 해체되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사적 고도금융의 규제자에서 강력한 지원자로 바”뀜에 따라 기존의 노사간의 계급타협을 주주자본주의가 대체한 과정도 잘 서술하고 있다.

1부의 보론에서는 기업과 혁신, 대리인비용, 행동금융학에 대한 논의를 알기 쉽게 잘 정리해놓았다. 최근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혁신에 관한 논의를 간혹 접하면서도 그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했는데 보론을 통해 그 논의의 함의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이다.

2부의 2, 3, 4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논의에 입각하여 각각 미국, 독일, 스웨덴 모델의 역사적 전개를 위의 세 시기로의 구분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미국의 경영자자본주의의 등장과 뉴딜 금융체제, 그리고 이후 신자유주의 금유자유화와 IT, 벤처 열풍, 달러-월스트리트 체제, 독일의 종합금융(겸업은행), 공동결정제도, 스웨덴의 사회적 코포라티즘, 렌-마이드너 모델, 연대임금 정책, 이후 신자유주의적 제3의 길의 등장 등이 흥미 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의 금융화를 다루는 3부. 발전국가에서 재벌주도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추적하는 5장은 개발도상국 일반이 초기 산업화 단계에 맞는 어려움들에 관하여 아담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유명한 논의들을 대비시키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후발국이 산업화를 하려면 유치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협소한 국내 시장규모로 인하여 분업 심화∙산업 심화가 제약되는 후발국의 한계를 지적한 스미스의 논의로부터 유추될 수 있는 개도국의 전략은 협소한 국내 시장이 아닌 넓은 세계 시장을 출구로 삼음으로써 시장제약을 극복하는 것이다. 리스트적인 국내시장 보호와 스미스적인 수출지향전략은 국내 시장가격 왜곡과 세계시장 가격 순응이라는 이율배반적 과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할 필요를 제기하는 데, 발전국가는 바로 이 모순적 과제 수행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후 지은이는 발전국가의 전개를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1960-70년대 확립된 고부채∙고투자 산업화 방식은 투자위험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부담하는 체제였고, 국가는 기업에 조건부 지대(contingent rents)를 지급하는 동시에 저임금∙장시간 노동 동원체제를 보장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재벌은 전문화보다는 다각화를 통해 산업구조 고도화를 이루었고, 이 과정에서 재벌 총수의 지배체제는 공고화되었다.

1989년 삼저호황의 종식과 더불어 발전국가체제의 균열은 갈수록 가시화되었다. 정부는 재벌의 비관련 다각화를 수정하기 위해 업종전문화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오히려 재벌의 독점적 시장지배력과 경제력집중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75). 1980년대 들면서 정부가 재벌에 대한 선별적 특혜금융에서 벗어나 금융의 시장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제2금융권에 대한 진입장벽을 완화하자, 재벌은 제2금융권에 본격 진출하였다. 3저 호황 이후 국제수지 흑자와 민간기업의 대외신용도 증가로 외자차입에 대한 정부보증과 국가관리 필요성도 줄어들게 되자, 재벌은 발전국가 시기 자신에게 특혜금융을 제공하였던 기반인 금융억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3저 호황 이후 금융억압이 아니라 금융 자유화가 재벌의 이해와 일치하게 되었으며, 또한 국제자본도 금융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러한 재벌과 국제자본의 이해 일치는 OECD 가입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282). 그런데 3저호황을 전후하여 금융억압에서 금융자유화로 넘어가는 국면에 대한 지은이의 독특한 해석이 돋보인다. 지은이에 따르면, 억압으로부터 자유화로 바로 넘어가게 됨에 따라, 실제로는 금융억압과 금융자유화가 중첩되어 버림으로써 결국 금융억압이 너무 늦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승자기업 선별을 완전히 은행에 맡기는 금융제한정책을 추진하는, 곧 금융억압과 금융자유화의 중간단계로서 “금융제한”의 국면을 거쳤다면 사정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국가∙은행∙기업의 3자 관계 속에서 고저축, 고투자, 고성장을 유지했던 한국 경제발전모델은 1980년대 이후 자유화 과정에서 수직적 국가∙기업 간 관계와 관치금융을 완화하고 동시에 건전성 감독강화와 긴밀한 은행∙기업 간 수평적 협력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로 인해 외생적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차입의존경제의 위험관리체계는 더욱 약화되었던 것이다” (285).

이처럼 재벌은 금융부문에서는 “금융자유화라는 국가후퇴를 요구”했지만, 노동부문에서는 오히려 “노동억압적 국가복귀”를 요구했다 (291). 발전국가 시기 국가는 “자본시장과 생산물 시장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국가가 시장규율을 대신한 데 반해 노동시장에서는 … 노조조직화를 억제함으로써 경쟁시장의 규율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했다” (288).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이는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국가의 노동억압 기제에만 의존하는 노동시장 규율체계에 의존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해지자, 재계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같은 새로운 시장 규범을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294).

외환위기의 원인과 이후 전개를 다루는 6장에서 지은이의 시각 중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발전국가에서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이나,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 등이 단순히 외부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가 제약 속에서 나름대로 선택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6장에서 지은이는 발전국가의 지속불가능성, 곧 한시성을 강조하며 시작한다. “발전국가모델은 시장미발달, 시장 미비로 시장경제만으로는 산업화의 동인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유효한 모델이었기 때문에 산업화에 성공하고 시장경제가 점차 발달하면서 민간주도의 경제체제로 이행해야 했다” (299-300). 이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의 상이 당시에는 무척 불분명하였으나, 외환위기 이후 구조재편은 영미식 모델을 수용하면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분명히 하게 된다 (311). 그리고 이는 단지 IMF의 정책 제약 때문만이 아니라 김대중 “국민의 정부의 적극적 선택”이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또 관치금융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 도입된 주주자본주의의 확립으로 인해 재벌들도 주주가치 경영을 펴게 되었지만, 이는 이전의 발전국가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주주가치 경영은 투자의 외부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투자 결정으로 인해 바람직한 수준보다 과소투자가 이루어진다. 이전 발전국가에서 문제는 재벌의 문어발 확장으로 인한 과잉투자였다면, 이제는 과소투자가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국가에 의해 선택된 정책이었다면,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지은이가 5장에서 ‘금융제한’의 정책적 대안을 취하지 못했던 것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6장에서는 신자유주의 구조재편 이전에는 한국 경제가 은행 중심의 탈발전국가체제로 이행할 기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기회는 사라졌고, 결국 영미식 모델의 차용으로 인해 단기투자, 과소투자가 일반화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능한 대안적 방향은 어디에서 구해져야 하는가? 지은이는 제2의 선진국 따라잡기를 하여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높은 투자 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여 “모험적 장기투자”를 활발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저투자가 심각한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선뜻 수긍하기는 좀 힘들었다. 모험적 장기투자가 없는 것은 단지 주주가치 경영 때문만이 아니라, 모험적 장기투자를 할만한 꺼리가 없기 때문 아닌가? 있다면 왜 안하겠는가?

7장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유연성(flexibility)과 거시경제 변동성(volatility)의 증가가 소득분배에 끼친 악영향과 투자율 저하로 인해 훼손된 성장잠재력 등을 여러 선행 연구와 구체적 데이터를 통해서 논증하고 있다. 4부 8장에서는 2부에서 살펴보았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로 돌아가서 경제성장률, 고용성과, 노동생산성, 소득불평등과 삶의 질 등의 측면에서 미국모델, 라인모델, 노르딕모델을 비교하며, 노르딕 모델에 대한 지은이의 선호를 명확히 한다. 9장에서는 “민주적 시장경제모델”이라는 낯익은 단어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발전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발전국가로의 복귀도, 신자유주의 정책도 해법이 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시장경제의 효율과 역동성을 존중하되, 사회경제적 평등이라는 실질적 민주주의 가치도 함께 실현하는” 모델이며, 여기에 가장 근접한 모델은 북유럽의 사회민주적 시장경제 모델이라고 한다. 이는 사실 김대중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일관된 정책 기조였다. 물론 겉보기에 비슷한 말이 실제 정책을 통해서는 얼마나 다른 차별성을 보일 지는, 여기서 지은이가 제시하는 정책방향이 실제로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 지에 달려있을 터이고, 이는 이명박 정부 동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지금은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정책 기조와의 차이는 지은이의 확고한 케인즈주의적 입장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따르면 발전국가 시기 확립된 “수출에만 의존하는 경제성장은 비정상이며 안정적 축적체제일 수 없”고, 따라서 “생산성 향상에 기반을 둔 고임금과 복지서비스 확대”를 통해 내수 중심의 경제성장체제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분명 역대 남한 정권 모두와 차별되는 부분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른바 “고진로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금억제, 비용삭감, 사회적 덤핑 경쟁을 통해서는 중국, 인도에 당해낼 수 없기 때문에 한국 경제는 투자확대∙기술혁신∙인적자원관리∙사회신뢰 강화 → 생산성 향상 → 고임금과 복지확대 → 내수 창출의 고진로 축적 구조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럴 때 “말은 참 좋은데…”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좋은 책에 후진 서평을 한 것 같다. 당분간 서평은 쓰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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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발전의 사회학 나남신서 170
윤상우 지음 / 나남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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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상우 교수가 이전에 발표했던 논문 10편을 모은 것인데, 7-80년대에 유행하던 발전이론들과 동아시아 발전국가에 대한 이론적 검토로부터 시작하여, 개별 발전 국가의 상이한 형성·성숙·쇠퇴의 역사적 경로와 타이밍에 대한 비교를 시도하고 있다. 5(한국의 금융정책 변화와 발전국가해체), 8(대만)에서는 한 국가를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3, 4, 7장에서는 한국과 대만이 비교되며, 6장에서는 한국, 일본, 대만이 비교된다. 9장에서는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발전경로를 기존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과의 비교를 통해서 분석한다. 10장에서는 비교 방법이 아니라, 대만과 중국 간의 양안관계 변동과 이것이 양국의 국가 정책 및 대만 기업에 끼친 영향에 대한 다층적 분석이 시도된다.

사실 예전의 발전 이론들을 검토하는 1장을 보면서 너무나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재단 때문에 실망이 컸지만, 이후의 장들은 그 실망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았다. 특히 나로서는 한국과 대만 발전국가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를 다룬 3장이 제일 인상적이었고, 한국 발전국가의 해체를 금융자유화의 전개 속에서 고찰한 5, 중국의 경제성장을 다룬 9, 중국과 대만 간의 경제통합이 대만의 발전국가 해체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10장도 좋았다.

먼저, 일본, 한국, 대만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추출된 발전국가 모델은 다음과 같은 이념적, 조직적, 정책적, 관계적 특성으로 구성된다 (284-285, cf. 46, 324).

(1)    이념적 요소: 경제성장이 국가 정책의 최우선적 고려사항이었으며, 동시에 실적 정당성의 근거.
(2)    조직적 요소: 자율적이고 조직적 응집력을 확보한 유능한 국가관료기구에 의해 행사되는 전략적 시장개입.
(3)    정책적 요소: 여러 적극적인 정책수단을 통해 자원의 전략적 할당과 민간부문의 생산적 투자를 유도하고 경제의 효율성을 강화.
(4)    관계적 요소: 배태된 자율성.

카스텔에 따르면, 이러한 발전국가 모델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보다 산업화가 늦은 후발산업국가이면서도,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의 종속을 모면하며 국제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the politics of survival, 83, 268, 285). 그러나 이 생존의 정치가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달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국가관료기구의 일관된 방향설정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세계체제적인 기회구조, 헤게모니 세력의 개입과 같은 외적 요인, 그리고 최고권력의 리더십, 관료조직 내의 갈등과 같은 내적 요인의 복합적 산물이었다 (67, cf. 137). 이는 발전국가의 성공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해체 또한 복수의 요인들의 복합적 산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기존의 발전국가론은 발전국가 해체의 요인을 주로 국가자율성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야기되는 일종의 '무덤 파는 세력'(grave-digger)의 출현과 국가관료기구의 응집력 및 제도적 능력의 약화에서 찾고 있는데, 지은이는 발전국가론이 발전국가 위기의 원인을 지나치게 사회내적인 요인에서 찾고 있다고 비판한다 (107-109). 윤상우세계체제의 기회구조가 압박구조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이에 대한 보완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113-114).

윤상우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구분되는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일반적 특성을 위와 같이 제시하면서도, 동아시아 발전국가들, 특히 그 중에서도 한국과 대만의 상이한 발전경로를 비교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대만이 약탈국가(본토의 국민당 정권 시절과 대만으로 패퇴 후 외삽국가로서 존재했던 1950년대까지) → 발전국가(1960년대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연성발전국가(soft-developmental state,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경로를 걸었던 반면, 한국은 약탈국가(이승만 정권) → 발전국가(1960-1980년대 중반) 탈발전국가(post-developmental state,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경로를 거쳤다 (130-136).

한국의 탈발전국가경로와 대만의 연성발전국가경로 간의 대비는 한국의 1997년 경제위기와 비슷한 시기 대만의 생존 간의 대비로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윤상우는 마지막 10장에서 대만의 연성발전국가 모델 역시 중국 경제와의 통합 속에서 위험에 처해있음을 암시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장을 제외하곤, 각 장의 질과 완결성이 무척 높다. 좋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트집을 잡자면, 비단 이 책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독립적으로 발표되었던 논문들을 묶은 것이라, 반복되는 내용이 꽤 많다. 출판 업적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과학계의 고질병 중 하나이겠지만, 이전에 발표한 논문들을 묶어서 책으로 낼 때에는 원래 논문에서는 지면 제약 때문에 자세하게 못 다루었던 사실을 풍부하게 담아내는 것을 넘어서, 좀더 유기적인 체계를 갖춘 하나의 책의 모습을 갖췄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윤상우의 후속 작업들이 무척 기대된다. 특히, 그가 탈발전국가연성발전국가처럼 기존에 나온 발전국가와의 대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정적 개념화를 넘어서 현재 등장하고 있는 국가 유형에 대한 좀더 긍정적(affirmative)인 방식의 개념화를 시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마지막 10장에서 시도된 중국과 대만 경제 간의 연동을 분석한 것을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남북한 경제 간 연동 분석에 적용하고, 나아가 두 경제 연동 간의 비교를 할 수는 없을까. 물론 어렵겠지만 그럴 수 있다면, 그가 이 책에서 시도한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다양성의 추적을 1장에서 잠시 소개되고 있는 필립 맥마이클의 통합적 비교방법론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21세기 동아시아 자본주의 이해의 새 지평을 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현재 유치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분단체제론'을 발전, 지양하는 하나의 길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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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3 0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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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3 0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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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0 0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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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0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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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0 0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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