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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환상문학전집 3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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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해러웨이의 Staying with the Trouble  6을 읽었을 때,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는 르 귄도, 그녀의 헤인 시리즈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나의 시선이 머물던 곳은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2009)가 르 귄의 이 소설을 헐리우드 스타일로 각색한 것이라는 언급였다. 그리고 이 소설이 아니라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이 나를 더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르 귄을 읽어 왔다. 나의 느린 독서 속도로 인해 언제쯤 , 이제 르 귄 쫌 안다고 할 수 있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르 귄과 해러웨이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앎과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어떤 힘찬 기운으로 가득 찬다. 이 기분이 아마도 르 귄을 본받아 해러웨이가 애용하는 형용사 ‘mindful’로 재현할 수 있는 정동이 아닐까 싶다.

 

1972년에 처음 출판된 이 소설은 1968년 겨울 영국에서 완성되었다. 당시 이 중편에는 작은 녹색 인간들(The Little Green Men)”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출판하면서 지금과 같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The Word for World is Forest)”으로 바뀌었다. 르 귄은 미국에서 1960년대 내내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열 명쯤의 시위대에 속해 반핵과 반전 구호를 외쳤지만, 속마음으로는 무력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1968년 한 해 동안 타국땅에 머물면서 그 전에 평화시위의 조직과 참여에 쏟았던 에너지를 이 중편의 집필에 쏟아부었다. 이 소설은 당시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대응일 수도, 또는 15세기 이후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정복, 학살, 착취(<미션>)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바타>에게 영감을 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르 귄의 모든 스토리가 그렇듯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이 리뷰에서는 그동안 내가 읽은 르 귄의 다른 글들과 맞닿는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1. Terran Vs. Athshean

작품 중 갈등을 구성하는 두 축은 지구인(Terran) 정복자 데이비드슨 대위와 애스시아인(Athshean) 셀버다. 이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지구인과 애스시아인을 비교해보자. Earth, terra, tellus가 지구의 흙(soil)과 행성(planet)을 동시에 뜻하는 것처럼, Athshea는 행성 이름이면서, 세계(world, 세상)라는 뜻과 숲(Forest)이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95). 애스시아인들은 지구인과는 다른 생체 리듬으로 살아간다. 지구인처럼 밤에 자고 낮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종종 반쯤 자는 상태에서 꿈을 꾼다. 그들은 세계(==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며, 나이든 여성이 통치한다. 족장도, 사냥꾼도 여자다. 자연과의 관계나 성별분업의 측면에서는 지구와 정반대다.


지성은 남자에게, 정치는 여자에게, 윤리는 그 둘의 상호작용에 맡겨져 있지”(104).

지구인들은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이 완전히 파괴된 지구를 떠나 애스시아를 식민화해 이 행성에서 나무를 벌채하여 지구로 보내는 일을 한다. 모두 남자인데 2천여 명쯤이고, 지구에서 212명의 여자들을 태운 우주선이 도착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애스시아에는 이미 다른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지구인들은 이들을 크리치라고 부르고, 애스시아인들은 지구인들을 유멘이라고 부른다. 지구인들은 키가 1미터밖에 안 되고 녹색털을 갖고 있는 크리치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애스시아인들은 같은 인간을 죽이는 유멘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엄연히 인간 에 속하는 두 (two species of the genus Man)이다(105). 이들의 계통적 관계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헤인인들은 오래전 자신의 조상들이 지구와 애스시아를 포함한 여러 행성들을 식민화했고, 그들의 후손이 각 행성의 환경에 맞게 진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지구인들은 지구에서 사라진 아틀란티스의 거주자들이 애스시아를 식민화했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고, 그 행성에 있던 원숭이들이 오늘날의 크리치들로 진화했다고 생각한다(14).

 

2. 데이비드슨, 그 순수한 악: 영웅서사

르 귄은 의식적으로는 순수하게 악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그녀의 무의식은 달랐다고 고백한다. 빗속에 몇 명 되지도 않는 시위대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뒤로 하고 영국에서 이 작품을 집필하던 시기, 그녀의 그 무의식이 악당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슨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지구에서 온 정복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슨은 훗날 캐리어백 픽션 이론이 비판하는 뾰족한 무기를 휘두르는 영웅 이야기의 전형이다. 그는 애스시아의 자연, 여성, 식민지를 수탈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사내가 정말로 그리고 완전히 사내인 유일한 때는 여자를 소유했을 때나 다른 남자를 죽였을 때뿐이다. 그건 그가 만들어 낸 생각이 아니었다. 몇몇 옛날 책들에서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그런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크리치들은 실제 인간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87)

 

데이비드슨은 주워듣거나 책에서 본 말들을 몸으로 행함으로써, 이야기를 사실로 만든다. 크리치 여성을 강간하고 죽이고, 그에 항의하던 여성의 남편을 반쯤 죽어라 팬다. 아니 죽였을 것이다. 지구인 인류학자 류보프가 말리지 않았다면. 크리치에 대한 그의 혐오와 분노는 자신의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늘 계속된다. 전 은하계 동시 통신장비인 앤서블(ansible)을 통해 지구에서 애스시아인들에 대한 기존의 구금과 착취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때에도, 그는 상관의 눈을 속이고 크리치 살육에 나선다. 그는 애스시아인들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맞아도, 죽여도 대들지 않았다. 셀버만이 예외였다.

 

3. 셀버, 신이자 번역자: 단어의 중의성

데이비드슨의 반대편에 애스시아인 셀버가 있다. 그는 데이비드슨이 강간살인한 여인의 남편이다. 애스시아인은 원숭이를 사냥해서 먹기는 하지만 같은 인간은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 아니, 않았다. 그러나 이 오랜 전통을 깬 것이 바로 셀버다. 그리고 이 전통을 깬 순간 그는 신이 되었다. 데이비드슨에게 맞아 죽을 뻔하다 살아난 이후 그는 바뀌었다. 데이비드슨이 지구에서 새로 온 여자들과 즐기러 센트럴빌에 간 사이에 셀버는 다른 애스시아인들과 함께 뉴 타히티 기지를 완전히 불태우고, 거기 있던 모든 지구인들을 살해한다. 다시 돌아온 데이비드슨은 보고도 못 믿을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무릎을 꿇은 채 처음으로 셀버를, 애스시아인들을 올려다 보며 목숨을 구걸한다. 셀버는 그를 살려주지만, 데이비드슨은 정신 못차리고 까불다가 결국 애스시아에 있는 모든 지구인 기지들이 불타게 되고, 지구에서 온 여자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죽고, 남은 남자들은 그들이 크리치들을 가뒀던 아주 좁은 구덩이에 갇히게 된다.

 

셀버 샤압(Selver sha’ab). 샤압도 두 가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자(translator)”라는 뜻이다. 무엇이 번역되는가? 애스시아의 꿈꾸는 사람들(Dreamers)은 다 남자 말(Men’s Tongue)”, 곧 꿈과 철학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인 여자 말(Women’s Tongue)”로 옮길 수 있다. 이들은 무의식이 지각한 것을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두 현실(two realities), 곧 꿈 시간(dream-time)과 세계 시간(world-time)을 연결한다. 이들은 말함으로써 행위한다(111). 셀버는 원래 꿈꾸는 사람였지만, 이제는 신이 되었다. 꿈꾸는 사람의 말 자체가 행위이지만, 셀버는 이전에 애스시아에 없던 말, 곧 살인(murder)을 무의식 속에서 지각했고, 이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서 애스시안인들 모두를 인간을 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지구인들에게 피의 복수를 행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장자의 도덕경과 칼 융의 이론을 르 귄이 소설에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 도덕경은 못 보았지만, 호접지몽을 모티브 삼아 애스시아 인들의 동등한 두 현실을 창조해낸 것 같다. 밤의 언어(119~125)에서 르 귄은 개인의 자아(ego) 깊은 곳의 무의식의 심연은 자기(self)에 닿아 있는데, 이는 집단 무의식이며, 인류라면 공유하는 최소공통분모, 집합적인 마음(mass mind)이라는 융의 이론을 설명한다. 그때 낮의 언어에 대비되는 밤의 언어라고 칭했던 것이 애스시아인의 두 현실 중 하나, 꿈 시간에서 만나게 되는 비전(vision)일 것이다. 신의 속성인 번역밤의 언어의 키워드이다. 애스시아의 남자 말여자 말은 이 소설이 출판된 후 1986년에 발표한 브린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는 그것의 지구식 판본이라 할 수 있는 학교에서 배우는 힘의 언어인 아버지 말(Father Tongue)과 그전에 익숙하게 썼던 어머니 말(Mother Tongue)로 변주된다.



 

4. 살인 이후의 무구하지 않은 삶

애스시아 말로는 나오지 않지만, 애스시아에서는 꿈을 가리키는 말은 뿌리(root)”. 지구인들에 대한 살해로 애스시아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이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줄 알게 된 애스시아 인들은 지구인들이 물러간 다음에 과연 이전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소설의 끝은 헤인인 레페논과 셀버와의 대화로 끝난다. 레페논이 질문한다. 애스시아인들이 단결하여 지구인 정복자들을 살인한 이후에 애스시아인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지지는 않았느냐고.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셀버도 확신할 수 없다. ?


셀버: “서로를 죽이는 데 합당한 이유가 있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살인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어요.”

레페논: “우리는 갈 겁니다. ... 우리 모두. 영원히. 그러면 애스시의 숲들은 예전처럼 존재하게 될 겁니다.”


레페논의 희망이 이뤄질지에 대해서 셀버는 자신할 수 없다. 사람들 사이의 살인이든 나라 간의 전쟁이든 처음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된다면 처음의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망각된다. 상대가 죽고 내가 살아야 한다. 내가 상대를 쳐부수고 이겨야 한다. 이것만이 중요하게 된다. 지금도 전쟁이 진행중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주변 기운도 하수상한 요즘 살인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다는 셀버의 말이 마음에 무겁게 내려 앉는다.

 

Haraway(2016: 120)는 여러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영화 <아바타>와 다른 점을 두 가지 지적한다. 첫째, 이 소설에는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는 백인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인류학자 류보프가 조금 비슷할텐데, <아바타>에서는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여성 인류학자가 나오는데, 둘 다 인류학자지, 지구인 점령군에 대항해 싸우는 전사는 아니다). 둘째,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에서 나오는 구원 서사 같은 것이 르 귄의 이 작품에는 없다. 애스시아인들은 이전에는 몰랐던 살인을 할 줄 알게 되었고, 그 기억은 한 번 존재하게 된 이상 계속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무구(innocent)하지 않다. 그들이 과연 지구인들이 오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5.

레페논이 셀버에게 이제 그 누구도 당신들의 행성을 침략하거나 나무를 베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학술적인 연구 목적으로는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긴다. 이것이 아마도 단편 <제국보다 광대하고 느리게>에 대한 복선이 아닐까 싶다.

 

2023년 한해가 저문다. 하고자 했던 일 두 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저 놀면서 마음 편히 지내지는 않았다. 못한 일을 새해에는 꼭 해치웠으면 좋겠다. 한해를 마치면서 뭘 해야 하나 짱구 굴리다 고작 생각해낸 것이 이 책 읽고 리뷰 쓰는 거였는데, 어쨌든 이거 하나는 했다. 언제 읽을지 모르겠지만, 네 번째 읽기는 로캐넌의 세계가 될 듯하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평화를 빕니다~  

Shalom! May peace be with you! And a happy new "mindful"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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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환상문학전집 3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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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의 원작이라고 봐도 무방한 중편. "에코페미니즘"이란 말이 있기 전에 나온 에코페미니스트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신을 가리키는 말은 번역자, 꿈을 가리키는 말은 뿌리인 행성 애스시아에서 벌어진 지구인 침략자에 대한 행성해방 투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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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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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기보다는 나중에 이 소설이 어떻게 쓰여졌나에 대한 회고담이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자체도 훌륭한 중편 소설이지만,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그 글을 썼고, 그 안의 캐릭터들을 어떻게 창조해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빼앗긴 자들』 읽으면서, 에이이오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분위기가 고조되다 진압되는 과정을 묘사한 장면을 보면서 너무 탁월하다고 생각했었다. 오래전 나도 그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르 귄도 한 때는 데모꾼였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1960년대 반핵시위와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조직에 앞장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리뷰를 써야 하는데, 며칠이나 더 걸릴지 모르겠다. ㅋ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처음에는 순수하게 자유와 꿈을 추구하며 시작했으나, 결국 부분적으로 그런 설교단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작품이다. SF 작가들은 이런 유혹을 아주 강렬하게 느낀다.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개념(ideas)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며, 개념에 의해 다듬어지거나 개념 자체를 내포한 은유를 사용하며, 따라서 항상 개념과 의견을 혼동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 P280

내가 "작은 녹색 인간들 The Little Green Men"을 처음 쓴 것은 ... 1년간 런던에 체류하던 와중인 1968년 겨울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60년대 내내 비폭력 시위를 조직하는 일을 돕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핵무기 실험 반대 시위였고, 나중에는 베트남전 속행 반대 시위가 되었다. 무력하고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이 된 기분으로, 열 명이나 스무 명이나 백 명의 다른 무력하고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올더 가를 거닌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시위는 평화적이었고, 나는 거기 참여하며 내 작품과 완벽하게 유리된 방식으로 내 도덕 및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수 있었다. - P281

류보프도 셀버도 단순히 ‘위풍당당한 미덕‘(Virtue Triumphant) 그 자체인 인물은 아니다. ... 그러나 데이비드슨은 복잡하지 않은 인물은 아니지만 순수하다. 그는 순수한 악이다. 그리고 나는 의식적으로는 순수하게 악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 무의식은 의견이 다르다. 무의식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데이비드슨 사령관(Captain Davidson; 대위)이라는 인물을 창조해 냈다. 그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 이야기 속의 훈계조가 이제 또렷이 드러나 보인다. 후회가 되기는 하지만 이 또한 부인할 생각은 없다. 작품을 살아남거나 스러지게 만드는 요소는 결국 모든 특정한 분개와 항변 속에 숨은 내밀한 갈망이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 정의나 재치나 우아함이나 자유를 향해 아무리 머뭇거리는 손을 뻗어봤자 변명은 될 수 없다. - P282

가상의 외계인을 홀로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세노이 족을 묘사하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잘 찾아보면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인물은 데이비드슨 대위뿐이 아니다. 서로를 살해하지 않는 조용한 부족도 그 안에 존재한다. 사실 무의식 안에는 꽤나 많은 것들이 존재하는 듯싶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따라서 부인하는) 것들도,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따라서 부인하는) 것들도.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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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문학사상 세계문학 13
밀란 쿤데라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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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편지들> 중에서...


르 귄은 <세상 끝에서 춤추다>에 실려 있는 "캘리포니아를 차가운 곳으로 보는 비유클리드적 관점"(1982)에서 쿤데라의 이 구절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 말을 필립 로스의 쿤데라 인터뷰, "The Most Original Book of the Season: Philip Roth Interveiws Milan Kundera"(Nov. 30th., 1980)와 연결시킨다. 



흔히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는 따위로 외쳐대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미래란 다만 아무의 관심도 끌지 않는 무심한 공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는 생명이 넘쳐 우리를 못살게 굴고 도발하고 모욕하고 우리가 과거를 다시 고쳐 쓰고 다시 칠하게끔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는 과거를 고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미래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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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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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1974)(https://blog.aladin.co.kr/eroica/14627603)의 진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다. 그 책에서 주인공 셰벡은 원고를 다듬던 오도가 보이는 비전(vision)을 접한다. 나도 빼앗긴 자들을 쓰던 당시 르 귄의 모습과 생각이 궁금해서 작품 밖의 그녀가 보고 싶었고, 50년 전쯤에 쓰인 글들이 모여 있는 이 책을 통해 살짝이나마 본 것 같아 좋았다. 따뜻한 음색의 명료한 영어를 구사하는 지금 내 나이 또래의 똑똑한 백인 여성. 이 책에서 만난 르 귄은 그렇다. 원래부터 유명하지만 나는 몰랐던,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내게 르 귄이 그렇다.

 

1979년에 처음, 그리고 1989년에 다시 손봐서 출판된 책이다. 수록된 글들은 1973년부터 79년까지 출판된 에세이들이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https://blog.aladin.co.kr/eroica/13896013)1976~88년 시기에 쓰여진 글들의 모음이니, 그 책과 시기가 살짝 겹치면서도 약간 더 오래된 글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생각하기에 따라 큰 흠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판은 편집자 수잔 우드가 주제별로 배열한 순서를 해체하고 발표 연대순으로 글을 재배열해놓았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유를 밝혀놓았는데, 별로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1. 르 귄의 창작법과 예술론: “SF와 브라운 부인

르 귄이 좋은 글을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글을 아주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에세이에는 언제나 독서 이력이 진하게 묻어난다. 던세이니, 자먀친, 톨킨, 스타니스워프 렘, 필립 K. 딕 같은 판타지/SF 작가들뿐만 아니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D. H. 로렌스, 솔제니친 같은 소설가들, 카를 융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등장한다. 사실 나는 이들 모두에 대해 이름만 들어봤을 뿐 문외한이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만 약간의 정성을 더 기울여 르 귄이 다루는 울프 글을 읽어봤지만, 정작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아 공들인 것이 좀 아쉽다. “SF와 브라운 부인”(1975)은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1924)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 또는 업데이트다. 울프의 글은 100년 전 글이고, 르 귄의 글은 50년 전 글이다. 두 글 간에는 50년 정도의 격차가 있고, 르 귄이 “SF와 브라운 부인을 쓴 시점과 독자인 내가 그 글을 읽는 시점 사이에도 50년의 시차가 있다.

 

울프는 브라운 부인으로 상징되는 인물(character)에 대한 글을 썼다. 브라운 부인은 “Catch me, if you can!”을 외치고 사라지며 작가들에게 글을 쓰게 만든다. 르 귄은 그 글을 물고 늘어지면서 묻는다. “SF 작가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람직한 것일까?”(200). 르 귄에 따르면, SF는 오웰이나 헉슬리 등에 의해 1930년대에야 태동하였고, 1920년대 초에 그 글을 쓰던 울프는 SF의 존재를 몰랐다. 그리고는 넌지시 말한다. 판타지 문학은 브라운 부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문학 분야라고, 판타지는 민담, 동화, 신화처럼 인물(character)이 아니라 원형(archetype)을 다룬다고 말이다. 그러나 곧 다시 반문한다.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본 나도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과 이름이 나온다. “프로도 배긴스!” 톨킨이 대단한 점은 프로도라는 하나의 캐릭터에 실제로는 너댓 원형들(archetypes)을 조합해낸 것이다. 프로도, , 골룸, 스미아골, 그리고 아마 빌보까지 다섯 개의 부분이 프로도라는 하나의 퍼스낼러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어서 SF 소설 두 작품(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D. G. 콤튼의 인조쾌락)의 사례를 들어 이제 SF에도 브라운 부인, 그러니까 캐릭터, 또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the spirit we live by)”이 존재함을 확언한다.

 

[“the spirit we live by”212쪽에서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218쪽에서는 우리가 그 인도를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다르게 번역된다. 갈라디아서 525절의 구절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그러나 역자가 이 말이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의 맨 마지막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한 것 같다. 알았다면 좀더 번역이 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spirit영혼으로 옮겨도 되나?]

 

반지의 제왕이야기가 나올 때는 재미있었는데, 다른 SF를 몰라서 살짝 지루해졌다. 그런데 때마침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르 귄은 책에 대한 영감을 줄거리나 메시지의 형태가 아니라, 문득 보이는 사람의 모습, 사람이 있는 어떤 비전(vision)에서 얻는다고 한다(214).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람과 그가 있는 곳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사람을 보면, 그곳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르 귄은 빼앗긴 자들의 메인 캐릭터인 셰벡도 그렇게 보았다고 한다. 이 남자 물리학자의 모델은 젊은 시절의 로버트 오펜하이머란다. 원자폭탄 발명가. 때마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도 개봉 예정이다. 외모는 그렇게 보였다 한다. 그 다음은?



 

르 귄은 원래 이 이야기를 단편으로 썼다. 그런데 이것이 “30여년 작가 인생 최악의 작품, 정말 한심한 단편였다나... 이 단편을 발표했을까? 발표했다면 제목을 언급했을텐데, 그런 이야기는 없다. 어쨌든 그 실패작 단편에서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남자 물리학자 캐릭터가 르 귄에게 말한다. 아마 썩소를 날리면서 말했을 것이다. “Catch me, if you can.” 이때부터 르 귄의 캐릭터 잡기 = 둘 간의 대화 = 르 귄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이 시작된다.


르 귄: 이름이 뭐니?

셰벡: 셰벡. (이 때에야 비로소 이름이 지어진다.)

르 귄: 그래서 당신은 누구지?

셰벡: 글쎄... 아마도 유토피아의 시민?  


르 귄은 유토피아가 어떤 모습일까 알기 위해 여러 해에 걸쳐, 엥겔스, 마르크스, 폴 굿맨, 셸리, 크로포트킨을 읽는다. 셰벡과 대화하며 상상하는 과정은 아직은 캐릭터로 구현되지 않은 spiritlive by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르 귄에게 셰벡이 있는 곳, 그가 돌아갈 곳 등을 고민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사회와 세계에 대한 고민과 겹쳐 있다. “Catch me, if you can!”하며 달아나는 셰벡을 르 귄은 결국 잡아내서 빼앗긴 자들안에 온전히 담게 된다.

 

이쯤에서 끝나도 좋았을 글인데, 르 귄은 계속한다.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우리는 객체가 아닌 주체이며, 자연이라는 위대하고 궁극적인 객체도 오직 우리가 함께 해야 전부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베넷씨가 주체를 객체에 대한 묘사로 대체해버리려 했다는 울프의 비판에 동참하면서, 르 귄은 베넷식의 소설작법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소설’,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당시의 대중적 SF를 싸잡아 비판한다. 곧 이들은 신 흉내를 내면서 불편부당함을 강조하는 과학자들처럼 주체의 경험을 무시하는데, 이는 비전(vision)을 재생산해야 한다는 예술가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한다(230, 그런데 번역이 잘못되어 있어 이런 말인지 알기 힘들다).

 

르 귄은 픽션의 매력을 언제나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찾는다(231). 시와 음악과 달리, 픽션은 초월, 곧 이해(understanding)를 건너뛴 평화를 줄 수 없다. 픽션의 본질은 바로 진창(muddle)이다. 진창은 흐느적거리며 유연하고,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무언가가 새롭게 생겨나는 진흙탕이 바로 소설인 것이다. 소설은 거짓 희망이 아닌 진실한 희망을 주며, 빵은 아니지만 우리가 의지해 살아갈 대상”(what we live by)을 준다. 그리고 브라운 부인이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을 약속한다.

 

이 글 “SF와 브라운 부인은 르 귄의 판타지처럼 글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다(74, 125). 버지니아 울프에서 출발해서 톨킨과 다른 SF를 거쳐서 자신의 빼앗긴 자들, 그리고 다시 애초에 울프의 글로 돌아가서 멋진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던 당시 르 귄은 몰랐을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 그녀가 남긴 실의 형상(string figure)이 도나 해러웨이라는 걸출한 생물학자이자 SF 팬에게 넘어가 트러블과 함께 하기라는 흥미로운 저작이 태어나는 진창 역할을 하게 될지를. 마치 1923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을 쓰고 있던 울프의 실이 50년 후 르 귄에게 넘어가 새로운 형상의 실뜨기 모습으로 릴레이되리라는 것을 울프가 몰랐듯이.

 

2. 판타지는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의 책을 읽을 때에는 그것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집이라 해도 제목에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밤의 언어”? 무슨 말일까? 영어책 맨 앞에 실린 수잔 우드의 Introduction은 한국어판에서는 책 뒤에 실린 해설이다. 어쨌든 우드의 그 글은 르 귄이 1976년에 발표한 에세이의 한 구절을 제사(題詞)로 택한다. “...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은 일단 출판한 글을 다시 손대는 일을 타부로 생각했지만(6), 그녀의 팬이 편집자가 되어, 자신의 수많은 글들을 추리고, 그 중에 나오는 멋진 말 밤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night)”를 콕 집어 제목으로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밤의 언어란 무엇인가? 먼저 우드의 요약에 따르면, 꿈은 말이 아닌 이미지(nonverbal images)로 되어 있는데, 의식의 정신(conscious mind)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꿈이 단어-상징(word-symbols)으로 번역되어야 한다(362). 그래서 우드는 이 책의 핵심어로 번역을 꼽는다. 실제로 르 귄은 아이와 그림자”(1974)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한 훌륭한 비평(130~131)을 제시하는데, 바로 이것이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직관적인 과정을 이해가능한 언어-상징으로 번역한 것이다.

 

르 귄은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능하지만, 밤의 언어로 창작하는 것에 더 능한 이이다. 르 귄의 출중한 밤의 언어 구사 능력에는 칼 구스타프 융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 르 귄이 융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얼핏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난 융을 모르고, 사실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르 귄은 내게 융의 매력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좀처럼 하지 않는 일인 것 같은데, 르 귄은 아주 친절히 융을 독자에게 설명해준다.

 

융 이론의 핵심은 자아ego는 더 큰 자기self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것이며, 모든 인류, 어쩌면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것, 어쩌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로의 연결 고리이다. 곧 자기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으로서, 이 안에서 우리 모두가 만난다. 곧 진정한 공동체의 근원이다(121). 이 곳에 가는 방법은? 융은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라고 말한다. 그림자는 인간 의식의 그늘 속 형제, 카인, 칼리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하이드 씨, 골룸, 도플갱어다. 의식에 의해서 부정당한 자신의 일부분. 그러나 그림자는 단순히 열등하고, 원시적이고, 서투르고, 짐승 같고, 아이 같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강인하고, 생명력 넘치고, 즉홍적이다. 막 사춘기를 벗어난 젊은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총체적인 악으로 취급하곤 하지만, 결국 그것 역시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해야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그림자는 그에게 안내자가 된다. 판타지는 그 그림자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여행자가 그 여행을 통해 바뀌는 여행(74, 128, 188).


자기라는 집단 무의식의 존재가 바로 인간의 소통가능성을 보장한다. 아마도 이것이 프로이트와 융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내 속에서 자아(ego)id, superego와 겹쳐 있다는 프로이트 이야기는 이제 좀 지겹다. 융은 저마다의 자아가 그 깊은 곳에 최소공통분모(the lowest common denominator), mass mind[120,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라 그런지 역자가 번역을 안 했다]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다 같은 인간이고, 같은 우주의 부분이다. 이 말은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바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르 귄은 이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정리한다.


예술가는 타인의 내면에 닿으려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 자신의 내면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갈수록 타인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188).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 말이 가능한 것은 바로 융이 말하는 자기, 곧 집단 무의식의 존재 때문이다.


책꽂이나 텔레비전에서 살아 있는 원형(archetype)을 찾을 수는 없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 공통의 마음 속 어둠에 도사린, 개인성의 핵심에서 말이다”(189).

타인은 (사르트르처럼) 지옥이 아니라 구원이다”(254).

르 귄의 판타지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르 귄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녀의 독자를 포함한 인류의 집단 무의식, 곧 자기에 잘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 경험을 다른 이들의 내면에 맞닿아 있는 밤의 언어로 뛰어나게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나의 그림자

처음 아이와 그림자”(1974)를 읽으면서는 <악귀>머리를 풀어헤친 그림자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그림자가 나오는 장이 떠올랐다. 한국과 서양은 그림자에 대한 의미 부여가 좀 다른 것 같다. 프로도의 골룸, 나의 또 다른 나.

 

그림자는 평상시 잊고 지내던 과거의 나의 어떤 모습을 투사한 것이다. 아니 반대로 투사하기를 거부하려는 것, 투사되지 않고 안에 남은 불편함의 응어리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가끔 꾸게 되는 힘든 꿈. 보통 나는 그 꿈이라는 직관의 과정을 번역하지 않는다. 아니, 번역을 거부한다. 그리고 나는 잊었다 말한다. 그랬다. 조금 더 어른이 되면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려고 할까? 그러면 뭐가 좀더 좋을까?

 

공상은 이어진다. 그래. 나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밤에 이대로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다. 날씨가 좀 좋아져서 밤에 걷기 좋을 때쯤 그림자랑 대화를 한 번 해봐야 하겠다. 낮으로 넘어온다.

 

4. 쉬었다 계속하는 꼬리물기처럼...

베넷 부인이 버지니아 울프에게, 꺽다리 물리학자가 어슐러 르 귄에게 말했다. “Catch me, if you can!”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처음에는 순진한 호기심에, 그 후에는 오기도 생기고 재미도 있어 그 캐릭터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창작자가 아닌 나는 덕질하는 팬의 마음으로 르 귄의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여기에만 탐닉하면 안 될 것 같아 강도와 속도 조절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내가 따라가던 르 귄은 트릭스터처럼 모습을 바꾼다. 바로 나의 그림자로... ... 이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란... 내가 따라가던 것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따라가던 나도 달라진다. 책장을 덮은 나는 책을 읽으려고 첫 장을 읽던 나와 달라져 있다


어슐라, 이번에도 재미있었어요. 당분간은 못 와요. 다나 해러웨이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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