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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20년의 재조명 - 1987년체제와 외환위기를 중심으로
홍순영.장재철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10월
평점 :
이 책은 한국 경제시스템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원근법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곧 경제시스템의 역사를 1987년과 1997년 외환위기, 이 두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세 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의 특성을 간략히 서술한 후에, 두 번째 시점(외환위기)의 전과 후를 비교한 후, 이 책의 지은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입장에 따라 향후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곧 현재 시점으로 오면 올수록 서술은 상세해지고, 주장은 강해진다.
1987년 이전의 체제는 수출주도형 성장 시스템였던 반면, 1987-1997년의 체제는 경제호황 속에서 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으로 인한 임금 증가가 내수를 확장시켜 내수주도형∙수출주도형 시스템이었다. “이 두 시기에는 소비와 설비투자 간에 피드백 효과가 있었으며 설비투자가 소비와 수출을 매개하며 경제성장의 동인 역할을 했다” (61).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에는 “내수 부문이 위축하고 대외 환경에 영향을 받는 수출 부분의 비중이 확대”되면서, “수출과 내수 부문이 괴리되고, 소비와 설비투자의 상호 연관성이 변질됨으로써 거시경제적 안정성이 훼손”되었다 (62, 65, 128-130).
지은이들은 1990년대 이후부터 실질임금증가율이 노동생산성증가율을 상회함에 따라, 기업의 임금 비용 부담이 커져서 고비용구조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이나, 당시에는 임금과 고용 구조가 경직되어 있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95-96, 98).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보다는 1987년 이후 임금인상이 소비지출로 바로 연결됨으로써 내수 확장에 기여하여 이전까지는 수출로만 먹고 살던 경제가, 이제는 수출과 내수의 쌍끌이가 투자와 선순환하며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점에 더 큰 강조가 놓여진다. [이 점은 한국이 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유혈적 테일러주의에서 주변부 포드주의로 이행했다는 리피에츠의 관찰과 일치한다.]
다른 한편, 1990년대 중반은 OECD 가입과 WTO 출범에 따라 정부가 개방과 자유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114-6, 138). 자본거래 자유화의 일환으로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국제금융시장 접근 관련 규제가 단기간 내에 과감히 완화”되었고,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금리가 낮은 단기자금을 선호했으며, 금융당국도 외채의존 경영을 우려하여 중장기 차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해외 자본 또한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의문시하지 않았다. 당시 S&P의 한국 국가신용등급은 AA-였다. 이처럼 쉽게 조달된 해외 자금은 기업의 대규모 투자 수요에 의해 소화되었다. 제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해외자금은 해외자금대로, 국내기업은 국내기업대로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세팅였던 셈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1997년 초부터 세 차례의 변곡점을 지나 IMF의 금융지원을 받아야 하는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세 변곡점은 1997년 1월의 한보 부도, 1997년 7월 기아자동차 부도유예협약 체결과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발생, 그리고 1997년 10월 외환위기가 홍콩으로까지 전파된 것을 말한다 (143-146).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단기자금이 급격하게 유출됨에 따라 나타난 외화유동성 부족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까지 늘어가만 가던 경상수지 적자였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원화 가치의 고평가가 지속된 상황과, 이 상황과 부분적으로 연결되 어 있는 교역조건의 악화를 꼽을 수 있다 (148-151).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은 내부의 정책실패와 연결되어 있다. (외환정책, 금융감독, 자본자유화정책과 기업투자 규제 완화의 동시진행 등). 요약하면,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역내의 경쟁체제 심화와 환율불균형, 세계 금융자유화 및 투기자본 확산 등의 외부적 요인이 외환위기의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외부 환경이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경직적 환율방어정책, 급진적 자본자유화 추진에 상응하는 감독의 실패, 인위적 업종전문화 정책등의 잇따른 정책 실패가 빚어낸 결과”란다 (161).
외부환경 변화와 국가 정책 실패의 결합이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는 이야기인데, 맞다. 하지만 재벌들은 경제위기의 종범이 아니라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이후에는 경제위기 이후 이루어진 제도개혁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지은이들은 주주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영미식 신자유주의로의 재편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과거 발전국가에 의해 육성되어온 재벌의 존재 기반 중 하나인 관계적 금융을 침식하고, 재벌가족의 경영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앞에 내세우는 이유는 그렇게 투명한 사익(私益) 때문이 아니다. 최근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저투자의 문제도 은행이 아니라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는데, 주식시장이 기업에 조달하는 자금보다 배당으로 추출해나가는 것이 더 많은 상황에서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은 외환위기 이후 오히려 줄어들었다 (205). [이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조영철의 책에서도 지적되는 내용이다.] 또한 국내 금융산업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권 시장 (M&A 시장)에서도 국내기업에 대한 역차별을 통해 외국 자본의 지배를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214, 220-5).
그리고 점잖게 가르친다. “자본의 국적성은 유의미하다”고 (246-7). “소유+전문 CEO 시스템” – 아마도 재벌경영체제를 가리키는 이들의 용어인 것 같다 –은 역사적 산물이며, 영미식 경제운용방식을 이상화시켜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던 그 “소유+전문 CEO 시스템”을 폐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사실 난 이 부분에서 장하준을 연상하였다.]
끝에 여러 정책 방향을 언급한다. 미국을 포함하여 전방위적 FTA를 추진하여야 하며, 요즘 산별노조로 가려는 추세가 존재하는데 기업별 노조도 좋은 점이 많다느니 “다원적 노사체제 하에서 대화와 협력”을 해야 한다느니… 사실 좀 주제 넘게 들리기도 한다. (삼성은 노조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핸드폰 위치추적이나 하지 마라.)
탄탄한 분석 위에서 중언부언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하는 좋은 책이다. 주장은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이 배웠다. 촛불집회하는 시민들 빨갱이라고 욕하고, 1인시위하던 여성을 각목으로 때리는 무서운 아저씨들이나, 양손에 태극기 성조기 흔들며 찬송가 부르는 개신교인들도 무섭다. 하지만 그 무식해서 용감한 우파와는 차원이 다른 정말 무섭고 세련된 우파는 바로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