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노동시장의 정치 사회학
정이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지은이는 자본주의의 다양성 대한 이론적 논의의 연장으로서 지구화라는 맥락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 노동시장 유연화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찰한다. 2부에서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했던 방식대로 북구 사민주의(4), 독일(5), 미국(6) 노동시장제도를 살펴본 , 일본, 한국, 대만 동아시아 3국의 노사관계(7) 고용안정성(8) 변화를 통계방법을 통해 비교 검토하고 있다. 3부에서는 한국의 노동시장체제의 변동을 미국과의 비교를 통해서(9), 분단노동시장의 현실과 연대의 고취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고(10), 11장에서는 한국노동시장체제 개혁의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론적 논의와 이론적 논의에 바탕이 서구의 사례들에 대한 문헌 리뷰를 , 통계를 통해 한국과 일본, 대만, 미국 노동시장을 비교 검토하고, 한국 내의 단위 사업장들에서 어떻게 비정규직 투쟁이 조직되어 왔는 살펴본 , 향후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데, 전체의 짜임새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책이 다루는 내용의 범위가 방대하면서도 상당히 전문적이므로 서평에서는 한국 노동시장이 관련되어 있는 7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에 집중해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점들을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지은이는 동아시아 노동시장이 구미국가와 대조되는 특징(기업내부노동시장의 발달,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득과 비교적 낮은 실업률 간의 양립 )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각국이 서로 다른 변화 과정을 거침에 따라, 일부의 주장과 달리 동아시아 복지 모델이나 동아시아형 노동체제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261, 292).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 일본, 대만의 상이한 노사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있다 (266 ff, 322).

                                   한국                         일본                                  대만

전체 노사관계            분권적 교섭형          (약한) 조율된 교섭형                시장형

기업내 노사관계        대립적 노사관계       협조적 노사관계                종속적 노사관계

전체 노사관계를 보면, 일본은 조율된 교섭형을, 대만은 시장형을 유지한 데에 반해, 한국은 1980년대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시장형에서 분권적 교섭형으로 이행하였다 (269). “시장형은 임금과 노동조건이 시장 원리에 의해 결정되는 유형으로서, “노동조합이나 단체교섭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노동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근로 조건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며 노동시장은 '제도화되지 않은' 시장이 된다. 분권적 교섭형은 단체교섭이 기업별 또는 산업별로 행해지면서 기업 또는 산업 간에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는 유형인데, “임금인상이나 임금평준화라는 목표는 교섭 단위 내에 국한되어 추구되며, 교섭 단위 밖에 있는 기업이나 부문과의 형평성은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 (267). 박동(2005: 165) 분권적 교섭 유형을 “파편화되고 조정되지 않은 임금결정제도”라고 표현한 있다. 지은이는 한국의 전체적 임금불평등도가 1980년대 이후 감소하다가 1990년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283).

이는 1987 노동자 대투쟁과 1997-98 경제 위기가 이러한 추세의 변동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있다. 지은이는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라는 측면에서 한국 노동시장은 1980년대 말에 통합노동시장에서 분절노동시장으로 변화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 그런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283) 진단하면서, '1987 노동체제' 개념은 노동시장 분석에도 유용하다”고 본다 (391): “노동시장이라는 측면에서 1987 노동체제는 기업별 교섭, 기업내부노동시장, 그리고 노동시장 분절 주요 특징으로 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90년대 중반까지는 높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실업률로 초래된 인력난 때문에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를 비롯한 전반적 임금 격차는 축소되어 왔다. 당시까지는 대기업의 임금인상은 전체 중소기업으로 파급되어 전체 임금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한국이 임금 상승과 함께 전반적 대중시장의 비약적 성장으로 유혈적 테일러주의에서 주변부 포드주의로 이행했다고 주장했던 리피에츠의 논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1997년의 경제위기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없는 상황으로의 급반전을 동반하며, 기업규모간 임금격차를 확대시킴으로써 노동시장 분절을 심화시킨다.  

1990년대의 불황에 대한 일본 사용자의 대처와 1997년의 격렬했던 경제 위기에 대한 한국 사용자의 대처 간의 차이는 양국 노사관계의 차이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해 거리를 던져준다: “일본에서는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공세적 인력 감축이 추진되지 않았고 이것은 기존의 협조적 노사관계를 유지하는 기여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사용자들이 추진한 인력 감축은 노사간 불신을 키우고 한국의 노사관계를 더욱 대립적으로 만들었다” (322). 이것이 단순히 불황과 짧고 강력한 경제위기라는 주어진 조건의 차이일까? 아니면 단지 협조적 노사관계나 대립적 노사관계의 지속으로 설명되는 경로의존성일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할 같지는 않다. 경제 위기 이후의 노동시장 체제는 노동시장의 분절이라는 1987 노동체제의 특징의 지속, 심화 있는 한편, 기업내부노동시장의 확장과 같은 87 체제 내부 추세의 역전으로도 있다. 그리고 이는 다름아닌 계급 역관계의 역전 아닌가? (이렇게 단언하려면 다른 많은 조건들을 고려해야 하긴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1987 노동체제의 끝은 어디까지라고 보아야 할까? 다음 체제가 시작되어야 있는 문제인가

이런 의문은 특히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의 갑갑한 노동계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다. 2006 여름에 출판된 책에서 지은이는 영미식 탈규제와 유연화는 현실적이지도 않거니와 규범적으로도 동의하기 어려운 ”(395)이라고 말하지만, 언제 세상이 우리가 규범적으로 동의하는 방향으로 굴러왔는가? 문제는 영미식 탈규제와 유연화가 자본의 공세 속에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뻑하면 비즈니스 프렌들리 외치고, 노동부 장관이란 자가 임금교섭은 앞으로 2년에 한번씩 하자고 하고, 비정규직 고용기한은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늘리자고 한다. 저들만 그런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진보정치세력은 분열되었다. 2 현실적이지도 않았고 규범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던 일이 벌어지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87 노동체제를 탄생시킨 87 여름의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계급 형성의 문제는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남자든 여자든, 대졸이든 국졸이든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되듯,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여 단결투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이제 슬로건은 촌빨 날리는 死語가 되어버렸다. 노동계급 형성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이해 관계가 상이한 노동자 집단”(358) 사이에 연대를 형성하는 일이지만, 오늘날의 프레임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전했던 가슴벅참을 허용치 않는다. 사례 연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가 바로 옆에서 일할수록, 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좋을수록, 정규직은 고용불안을 느끼고 연대를 꺼려 하게 된다  

책이 좋은 책이라는 데에는 전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없는 같다. 그러나 단지 지은이 정이환 선생이 국내 박사이고 나름 좌파임에도 불구하고 통계에 빠삭하다는 지엽적 사실에서 책의 훌륭함을 찾는 칭찬들은 참으로 짜증난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과는 다를 같다. 책이 좋은 책이라는 것은 길을 제시해준다는 것보다는 (물론 지은이가 끝에서 밝히는 방향 설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날것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갑갑함을 독자들에게 그대로 보여준다는 아닐까 싶다. 10장에서 보여지는 작업장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불평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동운동들의 좌절과 제한된 성공 사례들은 이것이 우리가 규범적으로 동의할 있는 세상의 모습을 현실 속에서 이루어 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다시 알려준다. 합리적 언어로 치장된 대안도, 분노의 수사로 점철된 선동도 믿지 않는다. 패배에 대한 냉정한 기록만을 신뢰한다. 염세주의적 매저키스트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내게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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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 - 민주적 시장경제의 길, 민주주의총서 05
조영철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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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문만 474쪽이다. 이틀을 아무 것도 안 하고 이 책만 봤다. 여느 때보다 하루 많은 그래서 고마운 요번 2월 안에 다 읽고 서평까지 쓰려고 굳세게 마음 먹고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넘어가서 그랬던 것일까? 아님 서문과 1장이 너무 재미있어서였을까? 혹은 기대가 너무 컸었나? 그것도 아님 직전에 읽은 책이 워낙 훌륭해서였나? 뭐 다일 것이다. 두께와 제목에 비해 기대에 못 미쳤다. 이 책이 별볼일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단지 내 기대가 너무 지나쳤다는 말일 뿐이다. 어찌 보면 봇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미래의 대안적 정책방향에 관한 최근의 연구 조류가 “좋은 말”을 넘어 이것이 실제로 “좋은 결과”를 갖고 올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갑갑함 때문일 수도 있다. 좋은 말은 어찌 보면 이미 차고 넘치는데, 문제는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고, 이는 그러한 연구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정치력 부재로 인한 전망의 판단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그 좋은 말들에 대한 미심쩍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1, 2, 3부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지은이 조영철 선생은 성장과 형평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확고한 케인즈주의자이다. 학문체계로서 케인즈주의 경제학에 별로 익숙하지 못한 내게는 많은 공부거리를 던져 준 것 같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금융억압과 자유화의 교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무척 재미있다. 1장에서 지은이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 19세기 – 1929년 대공황: 영국헤게모니의 성장과 쇠퇴. 자유무역 제국주의, 고도금융, 국제금본위제.
(2) 대공황 - 1970년대 말: 미국헤게모니. 뉴딜. 경영자자본주의, 케인스주의 관리금융, 포드주의 체제의 성장과 쇠퇴.
(3) 1980년대 - : 신자유주의 구조재편. 주주자본주의. 금융주도 축적체제(finance-led accumulation regime)의 형성.
여기에서 지은이는 지오바니 아리기의 “긴 20세기”의 논의를 중심으로 어떻게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축이었던 포드주의 임노동관계, 경영자자본주의, 케인스주의 관리금융체제 간의 연계가 유러달러시장의 출현,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 통화주의 긴축정책으로의 전환 등과 더불어 진행된 금융자유화와 함께 해체되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사적 고도금융의 규제자에서 강력한 지원자로 바”뀜에 따라 기존의 노사간의 계급타협을 주주자본주의가 대체한 과정도 잘 서술하고 있다.

1부의 보론에서는 기업과 혁신, 대리인비용, 행동금융학에 대한 논의를 알기 쉽게 잘 정리해놓았다. 최근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혁신에 관한 논의를 간혹 접하면서도 그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했는데 보론을 통해 그 논의의 함의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이다.

2부의 2, 3, 4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논의에 입각하여 각각 미국, 독일, 스웨덴 모델의 역사적 전개를 위의 세 시기로의 구분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미국의 경영자자본주의의 등장과 뉴딜 금융체제, 그리고 이후 신자유주의 금유자유화와 IT, 벤처 열풍, 달러-월스트리트 체제, 독일의 종합금융(겸업은행), 공동결정제도, 스웨덴의 사회적 코포라티즘, 렌-마이드너 모델, 연대임금 정책, 이후 신자유주의적 제3의 길의 등장 등이 흥미 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의 금융화를 다루는 3부. 발전국가에서 재벌주도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추적하는 5장은 개발도상국 일반이 초기 산업화 단계에 맞는 어려움들에 관하여 아담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유명한 논의들을 대비시키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후발국이 산업화를 하려면 유치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협소한 국내 시장규모로 인하여 분업 심화∙산업 심화가 제약되는 후발국의 한계를 지적한 스미스의 논의로부터 유추될 수 있는 개도국의 전략은 협소한 국내 시장이 아닌 넓은 세계 시장을 출구로 삼음으로써 시장제약을 극복하는 것이다. 리스트적인 국내시장 보호와 스미스적인 수출지향전략은 국내 시장가격 왜곡과 세계시장 가격 순응이라는 이율배반적 과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할 필요를 제기하는 데, 발전국가는 바로 이 모순적 과제 수행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후 지은이는 발전국가의 전개를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1960-70년대 확립된 고부채∙고투자 산업화 방식은 투자위험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부담하는 체제였고, 국가는 기업에 조건부 지대(contingent rents)를 지급하는 동시에 저임금∙장시간 노동 동원체제를 보장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재벌은 전문화보다는 다각화를 통해 산업구조 고도화를 이루었고, 이 과정에서 재벌 총수의 지배체제는 공고화되었다.

1989년 삼저호황의 종식과 더불어 발전국가체제의 균열은 갈수록 가시화되었다. 정부는 재벌의 비관련 다각화를 수정하기 위해 업종전문화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오히려 재벌의 독점적 시장지배력과 경제력집중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75). 1980년대 들면서 정부가 재벌에 대한 선별적 특혜금융에서 벗어나 금융의 시장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제2금융권에 대한 진입장벽을 완화하자, 재벌은 제2금융권에 본격 진출하였다. 3저 호황 이후 국제수지 흑자와 민간기업의 대외신용도 증가로 외자차입에 대한 정부보증과 국가관리 필요성도 줄어들게 되자, 재벌은 발전국가 시기 자신에게 특혜금융을 제공하였던 기반인 금융억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3저 호황 이후 금융억압이 아니라 금융 자유화가 재벌의 이해와 일치하게 되었으며, 또한 국제자본도 금융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러한 재벌과 국제자본의 이해 일치는 OECD 가입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282). 그런데 3저호황을 전후하여 금융억압에서 금융자유화로 넘어가는 국면에 대한 지은이의 독특한 해석이 돋보인다. 지은이에 따르면, 억압으로부터 자유화로 바로 넘어가게 됨에 따라, 실제로는 금융억압과 금융자유화가 중첩되어 버림으로써 결국 금융억압이 너무 늦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승자기업 선별을 완전히 은행에 맡기는 금융제한정책을 추진하는, 곧 금융억압과 금융자유화의 중간단계로서 “금융제한”의 국면을 거쳤다면 사정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국가∙은행∙기업의 3자 관계 속에서 고저축, 고투자, 고성장을 유지했던 한국 경제발전모델은 1980년대 이후 자유화 과정에서 수직적 국가∙기업 간 관계와 관치금융을 완화하고 동시에 건전성 감독강화와 긴밀한 은행∙기업 간 수평적 협력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로 인해 외생적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차입의존경제의 위험관리체계는 더욱 약화되었던 것이다” (285).

이처럼 재벌은 금융부문에서는 “금융자유화라는 국가후퇴를 요구”했지만, 노동부문에서는 오히려 “노동억압적 국가복귀”를 요구했다 (291). 발전국가 시기 국가는 “자본시장과 생산물 시장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국가가 시장규율을 대신한 데 반해 노동시장에서는 … 노조조직화를 억제함으로써 경쟁시장의 규율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했다” (288).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이는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국가의 노동억압 기제에만 의존하는 노동시장 규율체계에 의존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해지자, 재계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같은 새로운 시장 규범을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294).

외환위기의 원인과 이후 전개를 다루는 6장에서 지은이의 시각 중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발전국가에서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이나,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 등이 단순히 외부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가 제약 속에서 나름대로 선택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6장에서 지은이는 발전국가의 지속불가능성, 곧 한시성을 강조하며 시작한다. “발전국가모델은 시장미발달, 시장 미비로 시장경제만으로는 산업화의 동인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유효한 모델이었기 때문에 산업화에 성공하고 시장경제가 점차 발달하면서 민간주도의 경제체제로 이행해야 했다” (299-300). 이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의 상이 당시에는 무척 불분명하였으나, 외환위기 이후 구조재편은 영미식 모델을 수용하면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분명히 하게 된다 (311). 그리고 이는 단지 IMF의 정책 제약 때문만이 아니라 김대중 “국민의 정부의 적극적 선택”이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또 관치금융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 도입된 주주자본주의의 확립으로 인해 재벌들도 주주가치 경영을 펴게 되었지만, 이는 이전의 발전국가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주주가치 경영은 투자의 외부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투자 결정으로 인해 바람직한 수준보다 과소투자가 이루어진다. 이전 발전국가에서 문제는 재벌의 문어발 확장으로 인한 과잉투자였다면, 이제는 과소투자가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국가에 의해 선택된 정책이었다면,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지은이가 5장에서 ‘금융제한’의 정책적 대안을 취하지 못했던 것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6장에서는 신자유주의 구조재편 이전에는 한국 경제가 은행 중심의 탈발전국가체제로 이행할 기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기회는 사라졌고, 결국 영미식 모델의 차용으로 인해 단기투자, 과소투자가 일반화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능한 대안적 방향은 어디에서 구해져야 하는가? 지은이는 제2의 선진국 따라잡기를 하여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높은 투자 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여 “모험적 장기투자”를 활발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저투자가 심각한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선뜻 수긍하기는 좀 힘들었다. 모험적 장기투자가 없는 것은 단지 주주가치 경영 때문만이 아니라, 모험적 장기투자를 할만한 꺼리가 없기 때문 아닌가? 있다면 왜 안하겠는가?

7장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유연성(flexibility)과 거시경제 변동성(volatility)의 증가가 소득분배에 끼친 악영향과 투자율 저하로 인해 훼손된 성장잠재력 등을 여러 선행 연구와 구체적 데이터를 통해서 논증하고 있다. 4부 8장에서는 2부에서 살펴보았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로 돌아가서 경제성장률, 고용성과, 노동생산성, 소득불평등과 삶의 질 등의 측면에서 미국모델, 라인모델, 노르딕모델을 비교하며, 노르딕 모델에 대한 지은이의 선호를 명확히 한다. 9장에서는 “민주적 시장경제모델”이라는 낯익은 단어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발전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발전국가로의 복귀도, 신자유주의 정책도 해법이 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시장경제의 효율과 역동성을 존중하되, 사회경제적 평등이라는 실질적 민주주의 가치도 함께 실현하는” 모델이며, 여기에 가장 근접한 모델은 북유럽의 사회민주적 시장경제 모델이라고 한다. 이는 사실 김대중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일관된 정책 기조였다. 물론 겉보기에 비슷한 말이 실제 정책을 통해서는 얼마나 다른 차별성을 보일 지는, 여기서 지은이가 제시하는 정책방향이 실제로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 지에 달려있을 터이고, 이는 이명박 정부 동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지금은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정책 기조와의 차이는 지은이의 확고한 케인즈주의적 입장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따르면 발전국가 시기 확립된 “수출에만 의존하는 경제성장은 비정상이며 안정적 축적체제일 수 없”고, 따라서 “생산성 향상에 기반을 둔 고임금과 복지서비스 확대”를 통해 내수 중심의 경제성장체제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분명 역대 남한 정권 모두와 차별되는 부분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른바 “고진로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금억제, 비용삭감, 사회적 덤핑 경쟁을 통해서는 중국, 인도에 당해낼 수 없기 때문에 한국 경제는 투자확대∙기술혁신∙인적자원관리∙사회신뢰 강화 → 생산성 향상 → 고임금과 복지확대 → 내수 창출의 고진로 축적 구조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럴 때 “말은 참 좋은데…”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좋은 책에 후진 서평을 한 것 같다. 당분간 서평은 쓰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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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세계화 - 기원, 비용 및 노림
프랑수아 셰네 엮음, 서익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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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그런 책이 있다. 읽고 또 읽고 줄치고 줄쳐도 좀처럼 문장 하나하나의 이해를 넘어 전체 글의 연관 속에서 그 부분이 차지하는 맥락을 파악하는 게 어렵고, 책 전체의 일관된 줄거리를 간결하게 정리해내는 게 머리에 쥐가 나도록 어려운 책. 만약 그게 책이 후져서가 아니라, 반대로 알찬 내용이 빼곡하게 차 있어서라면, 그 어려움은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 많은 시간을 들여가면서 이겨내야 한다. 프랑수아 셰네가 편집하고, 프랑스의 A급 정치경제학자들이 금융주도 축적체제의 등장에 대해 다룬 『금융의 세계화』가 바로 이런 책이다. 이런 책은 좀 길어지더라도 꼭 정리해놓아야 나중에 다시 읽게 되더라도 수월하다. 주제넘게 감상이라고 씨부리면서 이해도 못한 채 설익은 비판을 해대며 가오잡는 일은 참으로 후안무치한 일인 것 같다. 이 리뷰는 전적으로 서평자 본인의 정리를 위한 리뷰이다. 아는 것이 일천한 관계로 길고 불친절하다. 그래서 재미없을 각 장의 정리는 뒤로 돌리고, 내가 이해한 바와 전체적인 감상을 지금 생각나는대로 가급적 짧게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금융주도 축적체제는 그 자체로서 세계적 범위에서 작동하는 축적체제이다. 이는 그것에 대한 개념화 역시 전지구적 분석을 동반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반주변부나 주변부의 금융적 종속, 혹은 배제적 금융화는 그 나라가 금융주도 축적체제가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축적체제의 일부라는 것을 뜻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금융화는 다차원적으로 불균등, 불평등하게 나타난다. 금융화의 양상이 선진국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해서 한국은 금융주도 축적체제가 아니라는 정성진 식의 주장은 그래서 문제가 있다. 예컨대, 최근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론 부실 사태는 미국의 금융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2008년 2월 21일 자로 발표된 월든 벨로의 글 “Capitalism in an Apocalyptic Mood” (http://www.commondreams.org/archive/2008/02/21/7192)는 스위스, 일본, 한국 은행들도 이 사태로부터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2. 읽는 내내 한국의 금융화 상황은 어떠한가가 무척 궁금했다. 한국투자공사의 출범은 앵글로색슨계 연기금처럼 임노동자의 재산을 모아 금융자본을 창출하는 것이다. 또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더욱 노골화될 금산분리 철폐는 재벌이 단지 금융자산의 비중을 높이는 것을 넘어, 셰네가 마지막 장에서 지적하고 있듯, 더 이상 확대재생산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산업자본이 자신의 금융자본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의 한국적 형태에 영향을 끼칠 지도 모른다. 미국계 펀드들이 프랑스 소액주주를 선동해서 프랑스 은행 기업의 회장을 갈아치운 사례는 참여연대의 소액주주 운동에 대한 대안연대의 우려가 비단 우리 나라에만 특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3. ‘대한민국 학술원 선정 2003 우수학술도서’라는데 그럴 만하다. 편집서이지만, 짜임새가 극도로 높다. 특히 브뤼노프에 의해 정초된 '가상자본'(fictitious capital)의 문제틀은 각 장들의 응집성을 보장해주는 핵심어 역할을 한다. 또한 모든 저자들이 금융자본이 "손실의 사회화"를 통해 자신의 과실을 상대적 약자들에게 부담시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두 일곱 명의 학자들이 각자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응집성이 대단하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편집서들을 보면 한 사람이 쓴 글을 모은 것인데도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는 중구난방의 글들을 아주 모호하고 넓은 책 제목을 붙여가며 출판해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 만큼의 일관성과 응집성 아니면 편집서는 내지 말자.

4. 이 책은 아시아 경제위기 직전인 1996년에 출판되었는데, 그로 인해 10여년 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을 업데이트하고 있지 못하다. 무엇보다 아시아 경제 위기가 그렇고, 국부 펀드들(sovereign wealth funds)이 금융화의 기간부대로 등장한 현실이 그렇고, 고유가로 대표되는 원자재 가격 급등이 그렇다. 엔 케리 트레이드나 서브프라임모기지론 부실 사태도 그렇고…
* 이 책의 후속편 격인 책들이 있나 본데, 다음 책들 누가 번역 좀 해주시기를.
(1) La finance mondialisée (2004)
http://www.amazon.fr/finance-mondialis%C3%A9e-Fran%C3%A7ois-Chesnais/dp/2707142743/ref=sr_1_6?ie=UTF8&s=books&qid=1204078884&sr=8-6
(2) La finance capitaliste : Séminaire d'Etudes Marxistes (2006)
http://www.amazon.fr/finance-capitaliste-S%C3%A9minaire-dEtudes-Marxistes/dp/213055430X/ref=pd_bxgy_b_text_b?ie=UTF8&qid=1204078884&sr=8-6 

5. 내가 이 책을 산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2002년에 처음 번역 출판되어 나온 책이 2003년에 벌써 초판 4쇄를 찍었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관련 서적으로서는 아주 드문 성공이다. 이런 책들은 재쇄나 재판을 찍을 때마다 신경써서 번역을 대폭 손봐야 한다. 역자의 잘못도 있지만, 출판사 편집부의 부주의로밖에 볼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 상까지 받은 책인데 원저자들과 한국 독자들, 그리고 한글에 대한 예의는 좀 지키자.

장별 요약

제1장 총론에서 셰네는 80년대 초반 이후 본격화된 금융 세계화가 대단히 위계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달러의 지위와 막대한 규모의 채권 및 주식시장의 존재로 인해, 미국은 그 국제적 위계의 정점에 위치해 있으면서 다른 나라들을 지배한다. 금융 자유화와 탈규제는 국가 간의 (OECD 국가들 사이에서조차) 불균등 발전과 (금융과 통화를 통한) 경쟁을 가속화시켰다 (17). 이는 “세계화된 금융시장에 통합될 수 있는 신흥시장도, 대공업국들의 채권 또는 주식시장에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기업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개도국들에 대한 배제를 수반한다 (19). 금융 영역의 성장은 부가 생산 부문에서 금융 부문으로, 개도국(채무국)에서 선진국(채권국)으로 이전하는 메커니즘을 정착시킨다(21).

그는 이와 같은 위계적 금융 세계화가 진행되어온 1960년부터 95년까지의 35년의 역사를 세 개의 국면으로 구분한다 (30쪽 표 1-1, 289쪽 표 8-1). 그는 유로달러 시장이 형성되고,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함(1971)에 따라 변동환율제로 이행 (1973)하고, 이로 인해 통화 및 이자율 시장에서 선물, 옵션 등의 파생상품들이 출현하는 한편, 제3세계 국가들은 외채 위기의 길로 빠지게 된 1960년부터 79년까지의 시기를 국민적 금융제도들의 ‘간접’ 금융 국제화 시기로 본다. 두 번 째 국면은 폴 볼커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총재에 임명되고, 대처가 영국 수상으로 등장(1979)하면서 본격화된 통화주의 정책과 국민적 금융제도들의 자유화가 이루어진 1980년부터 1985년까지의 금융의 탈규제화 및 자유화 국면인데, 이 시기에 국제적으로 상호 연계된 채권시장들이 급속하게 팽창하게 된다. 이는 선진국 정부들이 재정적자 보전을 위하여 국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는 데에 앞다투어 나선 결과였다. 선진국 정부들의 채권 발행으로 인한 가장 큰 수혜자는 연기금이나 뮤추얼 펀드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 째 국면은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민간연기금을 가지고 있던 영국의 시티에서 ‘빅뱅’(1986)이 일어난 후, 자유화가 다른 모든 금융센터들에 전파됨에 따라 대규모 금융 운용기관들의 결정이 개별 국가(특히 “‘신흥’ 금융시장을 가진 신흥공업국들)의 거시경제정책에 끼치는 영향이 엄청나게 커진 이 글이 쓰여지던 시점(1995) 직전까지의 기간이다.

2장에서 쉬잔느 드 브뤼노프는 환율 문제(곧 복수의 국민통화들의 공존이라는 현실)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통하여 첫 번 째 국면에서 이루어진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와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이라는 역사적 전환을 고찰한다. “자본의 국제화는 임노동의 국제화가 아니며, 임노동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주어진 영토 위에서 수행된다” (51). 또한 이 일국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임노동이 연루된 소득의 생산과 분배는 국민화폐로 표시된다. 이 국민통화들의 교환이 가능하려면 국제적인 화폐적 계량단위를 필요로 한다. 1880-1914년 동안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이들에게 종속되어 있던 대부분의 나라들에 의해 채택되었던 금본위제는 고정환율제였고, 이는 1차대전으로 인해 붕괴된 이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이후 금이 아니라, 기축통화가 이 준거 계량단위의 역할을 수행한다(55). 이 기축통화는 국민통화들의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하지만, 동시에 다른 통화들과 경쟁 관계에 놓이는 하나의 금융자산”이다 (56). 곧 준거 계량 단위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상품으로서 그 자체의 가격은 다른 통화, 특히 마르크(현재는 유로)와 엔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역관계에 따라서) 결정된다. 국제적 통화 불안정은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브뤼노프는 민간금융에 의한 조절(신자유주의)과 결별하고, 현재와 같은 달러의 특권을 박탈한 ‘통화 다중심주의’를 대안으로 지지한다. 그녀는 세 개의 지배 통화를 인정함으로써 달러-“마르크”-엔 복합 단위의 시대를 여는 것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일”이라고 웅변한다. 

구트만의 글은 브뤼노프의 이론적 논의를 더욱 심화시키는 동시에, 이 이론적 논의를 자신과 이 책에 실린 다른 이들이 펼치는 역사적 논의와의 매개고리를 보다 세밀하게 다듬고 있다. 그는 뉴욕에 있는 대학에 몸담고 있지만, 유럽, 특히 프랑스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과 조절이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그는 가상자본(fictitious capital)에 대한 브뤼노프의 고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며, 아글리에타와 리피에츠 등처럼, 통화의 조절 방식이 어떻게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이 어떻게 포드주의의 해체에 기여했는가 등의 문제에 천착한다. 또 , 투자의 회로를 산업자본의 회로와 금융자본의 회로로 구분하는 그의 논의는 오래 전 Christian Palloix가 자본의 국제화를 다루는 글에서 circuit of productive capital과 circuit of money capital을 구분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브뤼노프는 셰네가 <표 1-1>과 <표 8-1>에서 요약한 세 개의 국면 중 첫째 국면에 논의를 국한했지만, 구트만은 브뤼노프의 관점을 앞으로는 1931년 금본위제의 붕괴 이후 루스벨트의 통화 및 은행 제도에 관한 뉴딜 개혁까지 뒤로는 셰네가 구분한 세 국면 전체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는 셰네의 첫번째 국면의 특징을 정부의 재정적자와 최종대부자로서의 역할에서 기인한 스태그플레이션(80)으로 꼽는다. 당시의 인플레에 기초한 화폐제약의 완화는 산업자본과 차입자에게 유리한 반면 금융자본과 대부자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인플레는 한편으로는 최종 공산품 가격의 상승을, 다른 한편으로는 명목금리의 상승으로 인한 금융자산의 가격 하락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가격운동을 동반했다” (81). 그러나 첫번째 국면을 특징짓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의한 금융자본의 약화는 같은 시기에 진행된 (미국 내의 은행들과는 달리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유로달러 시장의 발달과 (이것이 어느 정도 기여한) 브레턴우즈체제 붕괴로 인한 변동환율제의 채택으로 인해 역전되어 버린다. 두번째 국면(1980-85)에 이루어진 통화주의 정책과 탈규제는 고금리를 낳았고, 이는 “소득의 배분이 임금과 이윤에게는 불리한 반면 이자에게는 유리하게” 만들었고, 금융자산을 보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소득과 부의 분배도 악화시켰다 (89). 고금리 정책은 산업투자를 억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회임기간이 긴 투자들을 기피하게 만들었고, 기업들로 하여금 규모를 축소하고 임금과 퇴직금을 감축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금을 생산자본으로 재투자하게 하기보다는 유동자산(유로달러 등)에 투자하게 함으로써 금융자산을 급속하게 증대시켰다 (90-91). 구트만은 이러한 고금리의 출현을 20세기 초에 발생했던 경쟁적 조절양식으로부터 일국 차원의 독점적 조절양식으로의 이행에 비견할 만한 “현재 출현 중인 특정 축적체제에 조응하는 새로운 조절양식”의 등장으로 간주한다.

그는 맑스가 금융자본을 (1) 이자를 낳는 중장기 대부자본과 (2) ‘가상자본’으로 구분했던 사실을 환기시킨다 (92-94): “대부자본의 경우 그 소득인 이자는 차입자들의 산업이윤이나 여타 소득의 일부로서 이에 직접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반면, “가상자본은 실물생산 영역으로부터의 자금 이전을 바탕으로 성장하지만 자신을 산업에서 활동하는 생산자본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99-100). [내가 갖고 있는 김수행 역 비봉판 『자본론』 3권 하권 초판(1990) 569-70쪽에서 이 개념은 "의제자본"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구분에 비추어 보면, 첫번째 국면에서 두번째를 거쳐 세번째 국면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금융자본의 우세한 형태가 대부자본에서 가상자본으로 완전히 역전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미국의 경우가 특히 두드러지는데, 힐퍼딩의 금융자본 분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프랑스, 독일, 일본의 경우 은행과 증시의 분리가 미국만큼 뚜렷하지 않았다). 1981-82년 경 스태그플레이션의 종결은 엄청나게 과소평가되어 있던 주식과 채권의 가치상승을 가능케 하였고, “인수∙합병 및 적대적 주식매입을 통한 산업재편”이 빈번해지면서 금융시장은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기업들은 은행으로부터의 고금리 대부보다는 증권을 선호하게 되었고, “증권시장에서 활동하는 금융기관들 특히 뮤추얼 펀드와 연기금 등이 자본시장 전반을 주도하게 되었다” (95).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중은행들 또한 증권시장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가상자본의 우위를 확립시킨 주요한 요인이었다. 은행들은 새로운 금융상품들(선물 금융수단 및 파생상품들)을 개발하여 금융시장에 내놓았고, 이는 외환시장에 대한 금융투기를 더욱 부추겼다 (98-99). 대부자본으로부터 가상자본으로 금융자본의 지배적 형태가 변화한 것에 조응하여, 화폐의 공공재적 성격은 약화되고, 화폐의 사적 상품으로서의 측면이 가장 폭력적인 형태를 띠며 나타나게 되었다 (99). 구트만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서 2장에서 브뤼노프가 제시했던 바와 같이 ”달러, 마르크 및 엔의 세 통화를 중심으로 하는 복수통화제도”의 정착(105)과 더불어, 정부가 “한편으로, 화폐의 공공재의 측면과 사적 상품의 측면 사이의 최선의 균형이 무엇인지를 재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를 통해서 금융자본이 다시 산업자본의 성장 잠재력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운동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03). 그의 글은 폴라니를 연상시키는 다음의 언급과 함께 마무리되고 있다: “화폐는 상품 이상의 그 무엇이다. 즉 화폐는 그 관리가 민간 주체들과 이들의 이윤 동기에 맡겨져서는 안 되는 하나의 사회적 기관이다. 정확한 규정에 따른 발행, 단절 없는 순환 및 안정된 가치로 표현되는 화폐의 공공재로서의 측면들은 화폐의 올바른 국가 관리를 요구한다” (114).

구트만이 세 개의 국면을 조감하는 대하논문을 썼다면, 플리옹은 두번째 국면, 즉 조절양식의 이행기에 더욱 집중한다. 그는 조절이론 (그 중에서도 특히 다섯 가지의 제도적 형태가 특정 조절양식 혹은 성장체제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파리학파적 정식화)에 어느 정도 기대어, 제2차 대전 후 1970년대까지의 "영광의 삼십 년"을 특징 짓는 세 가지 제도적 요체인 (1) ‘포드주의적’ 임노동 관계, (2)케인시언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 (3)관치 금융제도가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 1973년의 석유파동 등을 계기로 흔들리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장의 둔화와 인플레의 가속이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의 도래를 민스키의 ‘평온의 역설’을 통해 설명한다. 곧 모든 게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던 "영광의 삼십 년" 같은 ‘평온의 시기’가 지속되면 경제주체들이 자신감에 차서 투자를 증대시키게 되고, 이로 인해 물가는 상승하며, 기업들의 채무는 증가함에 따라 금융 취약성이 증대하고, 금리는 상승한다. 또 최종대부자로서 통화당국이 개입한다고 해도, 성장의 둔화를 피할 수는 없게 된다. 플리옹은 1979년을 결정적인 분수령이라고 보는데, 이는 이 해에 있었던 도쿄 G7 정상회담에서 주요 공업국의 지도자들이 역사상 최초로 반인플레 투쟁에 절대적인 우선권을 두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그가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전까지의 선진국 경제를 특징 짓던 위의 세 가지 제도적 형태들의 해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통화주의와 자유주의가 전면에 등장하였고, 임금긴축을 통한 탈인플레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전의 조절양식을 구성하던 “생산성 및 물가의 변동과 임금 상승 사이의 연계”는 단절되어 버리고 만다. 이러한 긴축정책으로 인해 인플레율의 하락은 달성할 수 있었으나, 명목금리의 급격한 상승, 더 나아가 낮은 인플레율로 인한 실질금리의 상승으로까지 이어진다. “고수준의 실질금리의 지속은 … 새로운 국제 금융 조절양식의 출현과 조응한다. 한편으로는 거시경제적 긴장이 통화 발행과 인플레에 의해서 국민적 차원에서 흡수되는 체제로부터 변동성이 증대된 고금리에 의해서 조정이 이루어지는 체제로의 이행이 … 이루어졌다.” 이는 또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지배”를 확립했다 (121).

그는 또 글로벌 자유금융의 부상과 1980년대 초 이래 증대 일로에 있는 선진국들의 공공적자 간의 직접적인 관련을 강조한다. 선진국 정부들은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했고, 이를 국제 투자자들 (특히 기관투자자들)에게 구매할 것을 호소하였고, 이를 위해 자국의 금융제도들을 자유화하였다. 또한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균형 상태에 있었던 미국의 재정수지도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속히 악화되는데, 이는 미국 또한 자금조달을 위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도 최대 채권국에서 주요 채무국으로 전락하게 되며, 이 미국의 공공적자는 금융 세계화를 추동하게 된다. 79년을 전후한 변화는 선진국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전까지는 개도국들의 구조적 적자가 주요 공업국들이 제공한 자금으로 보전됨으로써 자본의 국제적 흐름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들어갔지만,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악화된 상황이 달러와 금리가 급등하게 되자 개도국들의 과잉 채무화는 본격화되었고, 지불불능 상태에 빠져버렸다. “자본의 국제 이전은 방향을 바꾸어 북-북 논리를 따르기 시작했다. 즉 이제 일본과 유럽의 흑자가 미국의 거대한 적자를 메꾸게 되”었다 (130). 또한 이전에는 국제적 자금조달이 은행제도의 중개를 거쳤지만, 이제부터는 직접(탈중개) 금융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국제 금융시장은 거대 단일화폐시장으로 발전하였다. 금융자본의 국제적 순환의 강화가 전지구적으로 관철되었다. “1983-84년에 주로 미국 당국의 강요하에서 일본의 금융제도가 개방되었으며, 그후 1990년에 유럽에서 단일 자본시장의 창조와 더불어 유럽 각국의 외환통제 제도들이 철폐되었다. 미국과 IMF의 강제하에서 신흥공업국들이 자유화운동을 뒤따랐으며, 그 결과 ‘신흥 금융시장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제 신흥공업국들이 금융 자유화를 시행해야 할 차례가 되었는데, 그 목적도 공업국들과 마찬가지로 공공적자의 보전 자금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플리옹 역시 브뤼노프, 구트만 등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가상 자본’ 개념에 주목한다 (145). 그는 가상자본을 “그 가치가 시장의 상태에 달려 있으며 산업의 위험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양도성 금융자산”으로 정의하면서, 이 자산들은 “시장에서의 양도 가능성 덕분에 차입자본에 대응하는 채권보다 높은 유동성”을 갖기 때문에 투기적 속성을 띠게 되고, “생산자본의 조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거래를 통해 잉여가치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특성은 전체 거래의 75%가 투기의 성격을 띠는 파생상품 시장에서 잘 나타난다.

구트만과 플리옹이 금융세계화에 기여하는 국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클로드 세르파티는 5장에서 대기업(그룹)들의 능동적 역할을 다룬다 (이는 셰네가 『자본의 세계화』, 특히 그 책의 10장에서 주로 살펴보았던 것이다). 그룹들의 활동이 세계화됨에 따라 그룹의 재산 또한 외환시장에서 운용되었으며, 이처럼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화된 금융체제의 능동적 구성원이 된 현실은 ‘기관투자자들’로 하여금 이 기업들을 ‘수익자산’으로 간주하게 하였다. 그룹의 최정점에 위치한 이사회에는 기관투자자들을 대변하는 이사들이 파견된다. 화폐자본은 다양한 종류의 주식과 채권을 집중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그룹들을 매개로 다른 곳에서 창조된 ‘가치 연쇄’의 일부에 대한 통제를 실시한다. 이는 그 그룹들과 협력 또는 하청 계약을 체결한 하위파트너들과 대그룹 내부의 기업망 전체에까지 그 효력을 발휘한다 (171-2). [이런 언급은 우리나라의 재벌구조를 연상시킨다.] 이제 한 그룹이 생산활동을 통해 얻게 되는 소득과 주식이나 채권의 보유를 통해 그룹과 무관한 생산에서 창조된 가치의 일부를 포획함으로써 얻는 소득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게 된다. 금융세계화는 대그룹들로 하여금 ‘금융시장들’에서 자본의 가치실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그룹들은 중앙집권적 재무관리를 통해서 자본의 이동성을 증대시키고 외환시장의 개입을 위한 효과적인 금융 ‘타격력’을 구비할 수 있게 되었다: “헤지펀드들이 공격의 전위대였다면 금융 타격력의 본대는 기관투자자들과 비금융기업들 (즉 거대 다국적기업들)”이었다 (178).

이제 기업들은 스스로의 생산활동으로 이윤을 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산활동과는 무관한 금융시장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이윤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금융화는 “가치실현의 직접회로인 A ∙∙∙∙∙ A’ (즉 생산 사이클을 경유하지 않는 회로)의 다양화를 의미한다” (192). 세르파티는 1980년대 후반 이후 프랑스계 그룹들을 분석하면서, “금융자산의 취득이 상당히 증가한 동시에 그 소요 자금 조달을 위한 차입이나 자기자본 또는 준자기자본 역시 증가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역시 한국의 재벌을 연상시킨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정성진이 ‘한국은 금융주도 축적체제가 아니라 금융종속상황’이라고 했던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6장에서 리샤르 파르네티는 앵글로 색슨계 연기금과 뮤추얼 펀드가 글로벌 금융의 출현과 팽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살펴보고 있다. 이 기금들은 국제 원자재 시장과 외환시장에서 주요 행위자로 활약하면서, “국제 투기경제”의 출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1960-70년대의 위기들을 촉발했던 주요 행위자들이 은행과 다국적 기업의 재무부서들이었다면, 1980년대의 금융 자유화는 예의 두 행위자를 대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투기운동의 주요 행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고, 이 기금들의 거대한 유동성이야말로 외환시장에서 헤지펀드의 위력을 가능케 해준 원천이었다. 이 기금들의 위력은 금융시장에서 큰 손으로 활약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corporate governance를 통해 기업지배구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파르네티는 1995년 소액주주들에 의한 수에즈은행 그룹의 회장 해임 사건의 예를 들면서, 이는 사실 이 은행의 자본을 16% 이상 소유하고 있었던 두 미국 펀드들이 소액주주들을 꼬드겨서 이전 회장을 경영권으로부터 몰아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시 한국의 사례를 떠올리게 된다. Cf. 장하성 - 참여연대와 장하준 - 대안연대 간의 입장 차이]

파르네티는 이처럼 앵글로색슨계 기관투자자들에 의해서 강제되는 기업지배구조의 원칙들의 국제적 전파로 인해 “세계화된 지대적 조절의 국제화” (번역 별로 안 좋다!)가 용이해졌다고 분석한다. 곧 거대 네트워크의 중심에 위치한 집중된 화폐자본이 세계의 다른 곳에서 생산한 가치로부터 징발해가는 지대의 양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금융자본의 지대 포착은 생산영역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없이 이루어지며, 자신의 손실을 다른 행위자들에게 감수토록 한다. 이로 인한 생산투자의 부족은 건전한 기업들마저 위기에 처하게 한다. 연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은 금융시장과 대기업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국고채 시장에서도 큰 손으로 활약하며, 이는 주권국가의 정책행위에 심각한 제약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금융자본으로 활약하는 이 연기금들이 사실은 “임노동자들의 돈을 활용함으로써” 이 거대한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의가 주로 핵심부 경제들에서 나타난 금융화에 국한되었다면, 7장에서 피에르 살라마는 금융화의 라틴아메리카 버전을 다루고 있다.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좋았던 장을 꼽으라면, 약간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단연 살라마의 7장을 꼽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금융화와 노동의 유연화 간의 연관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살라마는 고금리는 자원의 최적배분을 유도하리라는 맥키넌과 쇼의 명제의 비판으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이들의 “신고전파 접근에서는 저축이 투자에 시간적으로 우선하여 투자 자금의 조달원이 되는 반면 케인시언 패러다임에서는 투자행동이 저축에 선행한다”(250). 따라서 신고전파는 이자율이 높아야 예금주가 저축을 많이 하고, 이 저축액이 대출을 통해 투자로 이어지리라고 가정하는 반면, 케인시언은 이자율이 낮아야 투자가 증가하고, 사후적으로 저축의 증가를 가져온다고 본다. 살라마는 198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가 거친 두 국면, 곧 80년대 초반 인플레의 급등과 80년대 말 이후 둔화 과정을 고찰하면서 후자의 입장이 옳았다는 것을, 곧 고금리와 초인플레에도 불구하고 저축률과 축적률은 현저하게 하락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또한 “달러와 연동된 고도의 금융상품들의 창조, 가속적인 금융화” 등이 수반되었다 (256). 기업들의 금융화(총자산에서 차지하는 금융자산의 비중의 증가)가 진행되지만, 기업들은 신용대출을 통해 자금을 (외부로부터) 조달하기보다는 자기금융을 통해 투자자금을 마련한다. 고금리는 기업들에게 높은 차입비용을 의미하며, 덜 효율적인 기업들을 도태시킨다는 순기능적 가정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기업들에게조차 “그보다 낮은 금리라면 실현할 수 있었을 투자안들을 실행할 용기를 꺾어 버린다” (260).

살라마는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을 두 국면 – (1) 1980년대 초인플레 시대인 ‘상실의 10년’과 (2) 90년대의 반짝회복과 경제위기의 재발 – 으로 나누고, 금융화가 양 국면에서 갖는 상이한 의미와 함께 어떻게 각각의 국면에 상이한 노동력 관리 방식을 야기하였는지 분석하고 있다. 곧 금융화가 첫 번째 국면에서는 고인플레와 관련이 있었던 반면, 두 번째 국면에서는 “시장 전반의 급속한 자유화와 통화의 고평가 정책에 바탕을 둔 위기 탈출 전략의 산물”이었다. “첫번째 경우엔 잉여가치의 창조와 점유에 있어서 낡은 고대적인 노동력 관리 방식들로의 복귀가 조장되는 반면 두번째 경우엔 이러한 고대적 형태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노동강화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력 관리 방식이 득세한다” (261).

그는 금융이 부정적 측면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생산적인 측면, 곧 비용을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잉여가치의 획득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 역시 갖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좋은 (virtuous) 금융과 사악한 (vicious) 금융을 구분한다. 그리고 “금융화가 가파른 물가 상승을 동반할 때 ‘호’금융은 ‘사악한’ 금융으로 변질된다”(268). 이 때 (1980년대)는 절대적 잉여가치 착취의 고대적 메커니즘 - 노동일의 연장을 통한 부불 노동량 증대 - 이 전면적으로 작동한다. 감소한 실질임금과 이로부터 야기된 구매력 감소로 인한 소득상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이들은 더 많이 일해야 하며, 이는 저질의 일을 더 오래, 더 많은 사람이 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가족 구성원 중 노동자 수를 늘림으로써 가족재생산의 조건을 악화시킨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를 자유화가 불충분했던 탓으로 돌렸지만, 금융화와 자유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된 1990년대에도 경제실적은 80년대에 비해 나아졌을 뿐, 그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국민경제들을 대규모 투기자본의 유입에 철저하게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이는 위기 가능성을 상존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력 관리에 있어서 유연성을 극도로 제고시켰다. 곧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실질금리는 자본의 지속적 유입과 대달러 환율의 상승 방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미국보다 더 높게 유지되어야 했다. 두번째 시기 동안 사악함은 첫번째 시기만큼은 심하지 않았지만, 앞선 시기의 절대적 잉여가치 착취의 고전적 형태(노동시간 증대)와 더불어 근대적 형태(노동 강화)가 결합되어 나타나게 된다.

8장에서 셰네는 앞서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몇 가지 의미심장한 지적들을 한다.
(1) ‘체계적 취약성’이나 ‘체계적 위험’과 같은 새로운 표현들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경제적 경기변동과 직접적인 관련 없이 금융 충격들이 반복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294).
(2) ‘금융화된 세계적 축적 체제’의 출현은 “‘영광의 30년’이라 불리는 시기 동안의 장기 축적이 종국적으로 부닥친 막다른 골목, 즉 ‘포디스트적 조절’ 위기의 탈출구로 등장한 것이며, 임노동 관계의 심각한 손상을 기반으로 한다” (297).
(3) 이 축적 체제에서는 “산업자본의 축적이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더 이상 확대 재생산을 지향하지 않”게 되었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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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종말 동녘선서 99
엘마 알트파터 지음, 염정용 옮김, 이병천 감수 / 동녘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1.
2008년 1월 2일, 뉴욕상업거래소가 1983년 문을 연 이후 최초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다. 언론에서는 파키스탄 부토 전 총리의 암살과 나이지리아에서 무장세력의 봉기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하지만 페르낭 브로델의 표현을 빌자면, 이러한 사건들은 유가 급등에 있어 아마도 ‘먼지’만큼의 무게를 갖는 비중의 원인일 것이다. 조금 더 브로델 식으로 접근해보면, 유가 급등은 상이한 시간대에 걸친 역사적 진행의 중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지속적인 석유의 금융상품화와 이로 인한 투기자본의 장난, 중기지속적인 미국 달러화의 하락, 장기지속적인 세계 석유소비의 증가와 이 결과로서 석유 매장량의 고갈. 만약 이 세 요소 중 하나에서라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국제유가의 상승세는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래를 예측할 때 과거의 역사는 힌트를 제공한다.

우리가 “1차 석유위기”라고 부르는 1973년의 사건은 산유국들이 유가를 배럴당 2.89달러에서 갑자기 11.65달러로 올린 것을 말한다 (229). 배럴당 100달러 시대에 피부에 잘 안 와닿을 수 있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유발하였다. 특히 석유를 수입해야 했던 개발도상국가들과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해야 했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이는 재앙적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런 일, 곧 기름값이 하루 아침에 네 배나 뛰는 일이 앞으로 또 일어날 수 있을까? 배럴당 100달러에서 400달러로? 아마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것이다. 왜? 당시 산유국들은 달러 외의 대안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 달러화로 유가를 인상하였지만, 지금처럼 달러의 가치가 계속 하락하는 상황 속에서는 유로화 같은 다른 통화를 결제 통화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242).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하나 확실한 것은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보다는 이 보이는 패를 갖고 딜에 나서게 되는 당사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예측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이 거대한 판짜기의 용틀임 국면을 목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난 2007년 11월 17-18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7년만에 열렸던 OPEC 정상회의에서 이란과 베네주엘라는 원유결제통화를 달러에서 다른 통화로 바꾸자고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2008. 3. 26. 추기: 어찌 보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재임 기간 8년 동안 석유값의 등귀는 꾸준히 이루어져서 1차 석유위기의 상승폭을 달성한 셈이다. 2001년 IT 버블이 터졌을 당시, 원유의 가격은 배럴당 26달러였다. 최근 배럴당 100달러 안팎을 오르내리는 상황과 비교해보면, 부시는 8년에 걸쳐 1차 석유 위기 때처럼 원유 값을 네 배나 올려놓은 셈이다. 물론 중국의 산업화나 엄청난 투기 자금의 유입 등의 요소도 고려해야 하긴 할테지만, 참 장하다.]   

[2009. 10. 10. 추기: http://www.hani.co.kr/arti/SERIES/59/380754.html . 원유결제통화 변경에 관한 논의에 대한 유철규의 분석. 산유국들의 원유결제통화 바스켓의 설치 문제를 미-중간의 글로벌 불균형 해소 문제와 맞물린 것으로 제시하는 흥미로운 글이다. 1985년의 서독과 일본처럼 중국이 미국의 뒷정리를 군소리 없이 해줄 수 있을지, 아님 미국 달러가 나락으로 급락할 지 흥미롭다. 지켜보자.]

2005년에 독일어로 출판된 이 책, 『자본주의의 종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장기적인 추세로는 배럴당 100달러를 훨씬 넘어설 수도 있는 가격으로 상승한다” (224). 불과 2-3년 전에만 해도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것은 미래의 어느 날 올 수 있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오늘이라니… 다소 황당해서 2005년의 유가를 찾아보았더니, 6월에는 배럴당 60달러를 돌파했고, 8월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여파로 80달러를 상회했다고 한다. 확실히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유가 급등은 그 상황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그 상황은 시간이 걸리긴 해도 허리케인에 의해 파손된 멕시코만의 정유시설들이 복원되면 정상의 상태로 내려오리라는 가정을 희망으로 갖게 하였다. 지난 2년의 시간은 그 가정이 단순한 희망이었음을 분명히 웅변하고 있다. 아마도 이 국제유가 급등은 부시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수행한 뻘짓의 직접적인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버락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다고 이 유가 급등세가 잠잠해질 수 있을까? “테러와의 전쟁”이 유가급등의 직접적인 원인일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는 앞에서 말한 중기지속적 진행과 장기지속적 진행에 대한 미국 보수파의 대응 결과이지, 그 진행 자체를 뒤집을만한 원인은 될 수 없다. 이란이 달러가 원유결제통화로 사용되는 것을 거절한다면, 대통령이 누구건 과연 미국이 전쟁이라는 패를 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유가 급증세를 둘러싼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보다 근본적인 역사적 진행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 책 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은 이를 위한 훌륭한 지침서 역할을 한다.

2.
엘마 알트파터는 1970년대 서독 국가도출논쟁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독일어와 영어의 거리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거리보다도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인지, 독일어로 주로 작업하는 사람들의 저작은 영어로도 잘 번역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을 보기 전에는 알트파터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도 사실 잘 몰랐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 전망 없이 부유하는 좌파들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장이 아니다. 

알트파터의 책은 페르낭 브로델의 잘 알려져있지 않은 구절에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시작한다 (이 책의 14쪽에 인용되는데 번역이 별로다. 따라서 주경철이 번역한 까치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II-2』861쪽을 따른다.): “사실 나는 자본주의가 ‘내부적인’ 쇠퇴로 인해서 저절로 붕괴하리라는 예상은 전적으로 틀린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붕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격렬한 외부충격과 믿을 수 있는 대체방안이 있어야만 한다.” 브로델의 이 말은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암묵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붕괴론적 가정에 대한 정면비판인 셈이다. 알트파터는 브로델의 이 진술이 어떻게 옳을 수 있는 지 설명하는 것에 이 책 한 권을 다 할애하고 있다. 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그의 역사적 설명과 정치적 전망에 완전히 설득되고 말았다.

3장에서 알트파터는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사적 전유를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전유’appropriation는 쉽게 특정 사용가치에 대한 특정인의 소유가 새로이 확립되거나 이전되는 과정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1. 아직 가치화되지 않은 것을 최초로 “가치화”하는 것. 자본의 본원적 축적.
2. 절대적 잉여가치의 창출.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
3. 상대적 잉여가치의 창출. 자본에 대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 포드주의.
4. 새로운 제국주의. 박탈에 의한 축적.
사적 전유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데이비드 하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기계적 잉여가치’와 ‘사회적 잉여가치’라는 범주를 발명한 것을 그 범주에 상응하는 독립적 실체를 발견한 듯 하는 이진경의 주장보다는 훨씬 더 겸손하면서도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진경의 주장은 일단은 좀 미심쩍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있노라면, 이 범주들을 과연 어디에 쓸 수 있을 지 대략 난감하다. 인간주의 비판? 그거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거든요… 알트파터는 애매모호한 잉여가치의 종류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전유의 형태를 구분함으로써 각 형태에 고유하게 연결되어 있는 역사적 특징들에 주목하게 한다. 예컨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창출이라는 세 번째 유형은 화석 에너지원과의 연결 속에서만 가능하였고, 케인스주의와 포드주의라는 포지티브 섬 게임이 가능했던 틀을 만들어 냈다. 이에 반해 네 번째 유형인 새로운 제국주의는 이전의 포지티브 섬 게임의 틀을 해체한다. 금융 자유화와 더불어 실질금리와 투자 수익률이 상향 조정됨에 따라 임금의 분배 몫은 줄어 들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원료였던 석유가 투기의 대상으로서 금융상품으로 변한다.

사실 알트파터의 독창성이 빛을 발하는 것은 4장 이후부터이다. 그는 4장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체제는 (1) 자본주의적 형태, (2) 화석 에너지원, (3) 유럽 합리주의의 삼위일체라고 주장한다. 맑스는 주로 (1)에 대해 말했고, 베버는 (3)이 어떻게 (1)을 갖고 왔는지를 분석하였다면, 알트파터는 그 엄청난 중요성에 비해 이제까지 간과되어 온 (2)가 어떻게 (1)과 (3)과 맞물려 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는 “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모든 경제∙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 ‘국가의 부’를 크게 증대시킨다” (107). 동시에 이는 세계 불평등의 심화와 자연의 파괴를 야기한다. 화석 에너지 체제 외의 그 어떤 것도 자본주의가 지난 200년 동안 거둔 엄청난 성과를 가능하게 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화석 에너지는 자본주의의 가속화와 영토 확장의 극단적 비약을 가능케 하였다.

이 삼위일체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황금기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을 노정하면서도 비교적 잘 굴러 왔다. 무엇보다 경제 성장의 측면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이는 불평등의 증가와 생태적 문제를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문제로 대두시켰다 (5장). 6장부터 9장까지는 본격적으로 앞서 소개된 브로델의 진술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6장에서는 브로델보다는 맑스의 목소리에 가깝게 금융화 현상을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첨예화로서 다룬다. 7장에서는 브로델이 말하는 외부의 충격이란, 곧 삼위일체 중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화석 에너지 체제의 소진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8장에서는 브로델이 그나마 약간의 희망을 가졌던 사회 내부에서 움트는 신빙성 있는 대안들을 다룬다. 알트파터는 사회운동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신자유주의 질서로부터 탈환할 것을 주장한다 (‘사회영토운동’과 ‘시간의 자치권’). 또한 아래로부터 ‘도덕적’ 혹은 ‘연대적’ 경제의 출범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 (292-4). 또한 이러한 연대적 경제의 출범을 위한 세계적 수준의 제도적 배열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월든 벨로를 인용하며 역설하고 있다 (294-298). 또한 결정적으로 전세계적으로 피크 오일(peak oil, 석유채굴의 정점)이 경과하고 있는 시점에서 지속 가능한 태양 에너지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브로델이 현실적으로 희망할 수 있었던 자본주의 이후 사회가 오는 방식이었다. 외부의 충격 (석유시대의 종말)이 내부 모순의 전개 (신자유주의 금융화) 속에서 배태된 신빙성 있는 대안들 (연대적 경제와 태양 에너지 사회)과 결합하는 것.

3.
이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저자들이 나온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알트파터는 존 홀로웨이,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이클 하트와 토니 네그리, 에르난도 데 소토 등이 제시하는 현실 분석과 이에 따르는 대안들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반면, 그의 주장은 맑스, 브로델, 폴라니, 하비, 비릴리오, 퍼킨스, 벨로 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준 출판사와 역자에 감사한다 (책 내용 중 일부가 Socialist Register 2007에 영어로 발표되었을 뿐이다). 번역자가 전공자가 아닌 독일어 전문 번역자이기 때문에 출판사 쪽에서는 이병천 선생에게 감수를 부탁하였나 본데, 읽어본 결과 번역은 엉망이다. 감수를 제대로 안한 것 같다.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비전공자들이 하는 실수들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예컨대, 당연히 “매판 부르주아지”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을 원문대로 “콤프라도르 부르주아”라고 번역한다든가, 문맥이 안 맞아서 중간에 번역하기 힘든 부분을 건너뛴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곳도 많다. 가장 황당한 오역은 수잔 스트레인지를 수잔 손탁으로 옮긴 부분이다. 감수자까지 있는 번역 치고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책 읽으면서 오자와 오역들을 표시해두었는데, 긴 서평을 쓴 후 또 그것까지 할 성의와 여유가 내겐 없다. 어쨌든 좋은 책이다. 번역이 후졌지만, 그래도 원문을 접할 길 없는 내게 이 좋은 책을 접하게 해주었으니 여전히 출판사와 번역자에게는 감사한다. 많이 팔아서 재판 찍을 때에는 좀 제대로 성의 있게 고쳐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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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천 2008-03-2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훌륭한 서평입니다. 오자와 오역 표시부분을 알고 싶읍니다

에로이카 2008-03-2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이 책을 감수하신 이병천 선생님이신가요? 그렇다면 영광입니다. 일단 표시해둔 부분만 여기 올리겠습니다. 지금 읽은 지 꽤 돼서 잊어 먹긴 했는데, 단지 맞춤법 문제만이 아닌 부분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14쪽 브로델 인용 부분은 까치에서 나온 주경철 번역 861쪽대로 고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53쪽 14행: “민속학자” → “나로드니크” 혹은 “인민주의자”
54쪽 1행: “괌같” → 삭제!!
82쪽 1행: “자본에 노동의” → “노동의 자본에”
94쪽 6행, 15행, 19행: “포드식” → “포드주의(적)”
96쪽 12행: “실질 자본” → “실물 자본”
97쪽 5행: “전유하는 아니라” →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120쪽 3행, 149쪽 3행: “체이스-둔” → “체이스던”
120쪽 12행: “카타리나” → “카트리나”
122쪽 9행: “정치경제학 '보상테제'” → 이게 뭔가요? 역주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최소한 이것의 원어가 무엇인지라도 병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124쪽 2행: “타탕” → “타당”
147쪽 19-20행: “대전환(이것은 1929년 이후의 세계 대공황을 지칭한다 – 저자)” → 이것이 정말 저자 알트파터의 주인가요? 누구의 주이든 틀린 말입니다. 알트파터가 인용한 이 부분은 까치에서 나온 주경철 번역본 854쪽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1929년 이후의 세계 대공황이라고 볼 근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대공황을 대전환의 예로 들었을 수는 있겠지만, 브로델이 한 말의 문맥과는 완전히 따로 노는 주입니다. 오히려 이 책의 문맥에 비추어보면, 세계 대공황보다는 산업혁명, 곧 산업화 이전의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의 이행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79쪽 15행: “수잔 손택이” → “수잔 스트레인지가”
180쪽 15행: “본위” → 이 말의 원어 표현이 뭔지 병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어의 collateral에 상응하는 독일어인가요? 아니면 그냥 standard인가요?
181쪽 1행: “지폐본위제” → 이런 말이 있나요? 과문하여 여쭙습니다.
183쪽 20행: “1971과” → “1971년과”
185쪽 12행: “개인 활동가” → “개별 행위자” 혹은 “개인 투자자”
186쪽 13행: “개인과 공공 활동가” → “사적∙공적 투자자”
187쪽 8행: “속죄일 전쟁” → “욤키퍼 전쟁 (Yom Kippur War)”
195쪽 18행: “활동가” → “행위자”
231쪽 17행, 22행, 259쪽 15행: “과두체제의 재화” → 원문을 병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 혹시 “과점적 부(oligarchic wealth)”를 뜻하는 것은 아닌지요?
233쪽 21-22행: “콤프라도르 부르주아” → “매판 부르주아”
 
무화과나무 뿌리 앞에서 - 캄보디아에서 박정희를 보다 유재현 온더로드 3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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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캄보디아는 이미지의 파편, 정보의 조각일 뿐이었다. 가까이는, 아마 1년도 더 된 일인 것 같은데, **님의 알라딘 서재에서 봤던 인상적인 사진과 글들이었다. 그 전에는 앙코르와트 사원이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화양연화였다. (왕가위도 좋고, 장만옥, 양조위도 좋아하지만, 이 영화는 난 참 별로였다. 서사가 너무 약하다. 글쎄요즘 다시 본다면 어떨지사랑에는 서사보다는 격정과 이미지가 더 중요한 것일텐데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화양연화를 봤을 때보다는 나이가 먹은 것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기억의 아주 먼 저 편, “킬링필드”…

이 책은 이런 캄보디아의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지식과 연결시켜주었다. 6개월 동안 프놈펜에서 머물면서 찍은 사진들과 짧막한 글들을 통해 현재 캄보디아의 독재자 훈센과 정희의 이미지를 오버랩시킨다.

"위대한 박정희는 남한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살아있고 건재하다. 중국공산당을 훈육한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은 경의를 표하고 있다. … 그 중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에서도 특출하게 박정희유훈을 실현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적극적이다. … 2006 7월에서 그 해 12월까지 6개월 동안 프놈펜에 머물면서, 나는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박정희 시대의 인간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캄보디아의 훈센 개발독재라는 부활한 박정희 시대가 풍기는 비역하고 참혹한 냄새를 통해 내 자신이 관통했고 우리 모두가 관통했던 그 시대의 벌거벗은 실체를 더듬을 수 있었다. 박정희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인간의 얼굴과 체온이 그곳에 있었다." (11-12)

지은이 유재현이 훈센의 캄보디아에서 한국의 6-70년대 박정희와 그 시절의 인간의 데자부를 보았다면, 유재현의 글을 보면서 얼마전 서평을 썼던 조희연의 책을 연상하게 되었다. 유재현이 훈센을 보면서 박정희를 떠올리는 것은, 조희연역사적 박정희현재적 박정희와 대면시키겠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하여서,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을 통하여 그러한 체제 성격 – “이런 체제는 사회를 군대식으로 조직화해서 성장효과를 극대화하고, 독재자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만든다” (조희연, 2007: 13) – 이 남한의 박정희 정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유재현의 이 책은 마치 조희연의 주장을 알고서 뒷받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박정희에 대한 세계의 유명한 독재자들 (북한의 김정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싱가포르의 리콴유)과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그들의 찬양을 싣고 있다 (80-81).

유재현박정희 신드롬의 연장 속에서 이명박을 해석한 것도 흥미롭다. 스승이 제자를 두어 후대를 예비하는 데, 첩첩산중에 유폐되었다거나 하는 비상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혈육을 적제(適弟)로 삼는 우둔한 짓은 멀리하는 법이다. 근친교배란 열성유전자밖에는 보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후대를 위해 천릿길이라도 헤매야 하는 법인데, 예컨대 무림의 세계가 그렇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혈육에게 심심풀이로 무공을 전수하는 경우에도 진정한 제자는 어느 날인가 어느 곳에서 흘러들어온 까까머리가 차지하게 마련이다. 무림의 국민교육헌장에 명시된 철칙 조항이다. 누가 박정희의 신실한 제자인가? 이명박이다 (9).

이명박은 2000년부터 현재까지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의 직함을 갖고 있다고 한다 (58). 캄보디아 한국 교민지에 실린 말에 따르면 훈센은 죽은 사람 중에서는 박정희,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전두환을 제일 존경한다고 한다 (80).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내일 저녁, 그는 아마 웃고 있을 거다. 그가 이명박이든, 캄보디아의 훈센이든, 전두환이든, 지하의 박정희든 말이다.

캄보디아가 어떤 나라인 지 알고자 하는 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권해주고 싶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게 지식이 아니라, 네이버의 지식인이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정보 쪼가리라면 이 책은 좀 머리가 아플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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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0 1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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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0 1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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