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정치 - 증오의 정치에 관하여
아쉴 음벰베 지음, 김은주 외 옮김, 김은주 해제 / 동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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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의 MAGA, 베네수엘라 침공과 마두로 대통령 납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죽음정치(necropolitics)의 기술-신학적 폭력으로 해석되고 사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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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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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친구가 추천해준 책.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보편교양>이 제일 재미있었다. 시대가 있고, 관계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와 사유가 있다. 그런데 그 행위가 실천은 아니다. 압도적인 세계 안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노동하며, 가오도 조금 챙기고, 정신승리하며 사는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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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12-30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단편이 인상적이었어요.

에로이카 2026-01-01 17:29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지구의 철학 - 모면할 길 없는 기후위기 시대의 삶에 부침
이진경.최유미 지음 / 그린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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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 잉여가치˝보다 ˝e가치˝ 구상이, ˝탈주˝보다는 ˝동맹의 배치˝가 훨씬 더 좋다. ˝증식의 치안˝에 맞서는 ˝회복의 정치˝에는 공감했지만, ˝미토콘드리아의 철학˝은 별로다. 마지막에는 갑자기 착한 운동권 선배가 되어 위로해준다. ˝즐겁게 살아도 된다˝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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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데올로기 1 Marx Engels 전집 3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병창 옮김 / 먼빛으로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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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독일 이데올로기> 완역 소식을 듣고, 역자께서 대단한 일을 해내셨다 생각하면서 기뻤고, 책값이 너무 비싸서 슬펐고, 두 감정 사이에서 내 방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며 현타가 왔다.

'그래... 그냥 기뻐만 하자.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라, 둘 곳이 없어서 못 사는 거다..' 

그리고 도서관 가서 이 책을 구경하면서 의문을 갖게 되었다. <독일 이데올로기>가 원래 이렇게 두꺼운 책이었던가? 영어판도 축약본이었나? 그러고 잊어 먹었었다. 


영어판 <독일 이데올로기>는 모스크바에서 펴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5권에 실려 있는데, 두레판은 이 중 제1권은 2장 "성 브루노"까지, 제2권은 1장 앞부분만이 번역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영어판에 있는 제1권 3장 "성 막스"(영어판 기준 336쪽)와 제2권 4장과 5장(56쪽)이 누락되어 있다. 영어판이 520쪽쯤 되니까, 그 중 128쪽만이 번역되었고, 나머지 392쪽이 번역되지 않은 채 출판된 것이다. 영어판 <독일 이데올로기> 중 25% 정도만이 한글로 번역된 거였다.


의미심장한 것은 두레판이 처음 출판된 것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였다는 점이다. 세상 일이 그렇겠지만, 그 전까지 한국 좌파들은 맑스와 엥겔스보다는 레닌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할 때쯤에야 한국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맑스와 엥겔스의 원서들이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맑스 책을 누가 읽는가?




1. 

오랜만에 <독일 이데올로기>를 펴볼 일이 있어서, 다시 도서관에서 빌리고, 원래 갖고 있던 두레에서 나온 <독일 이데올로기 I>(김대웅 역)과 함께 봤다. 쉽지 않았다. 

일부지만 영어판을 번역한 두레판과 문단의 순서가 엉키는 곳이 적지 않았다. 

<옮긴이 후기>를 보니, <독일 이데올로기>는 MEW판, 바가투리아판(MECW), MEGA2판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하며, 내가 알고 있는 영어판은 바가투리아판였던 것이다. 

이 책은 MEW판을 기준으로 하고, 나머지 두 개 판본의 장점을 수용했다고 하고, 번역에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역자가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2. 

내가 찾는 구절을 이 완역본에서 찾는 데에 한참 걸렸다. 두레판에서는 금방 찾았는데, 한참을 앞뒤로 오가다 한 구절은 드디어 찾아냈다. 그런데 다른 한 구절은 찾을 수가 없다. 두레판에서도 번역이 안 된 부분인데, 1장 포이어바흐 중 "인간의 해방"을 다루는 문단(MECW. 5: 38)은 도통 찾을 수가 없다.


두레판을 보니, 마지막으로 펴보고 표시해둔 것이 테리 이글턴의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를 봤을 때다. 그때 쓴 리뷰를 보니 2019년이다. 6년 전이군. 다음에 또 언제 <독일 이데올로기>를 펴볼 것인가?


3.

신유물론 관련 서적을 보거나, 누가 거기에 대해 발표하거나, 그후 뒷풀이 자리에서 낄낄거리며 술 마실 때, "신유물론 이전의 유물론(이라고 말하거나 쓰지만 실제로 그들이 말하는 건 주워 들은, 혹은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머릿속의 의식이 가공해낸 맑스-레닌주의의 이미지다)은 다 인간중심주의다" 따위의 소리를 듣는다. 


술자리라면 분위기 싸해질까봐 못하겠지만, 공부하는 자리라면 할 말이 생겼다. 


맑스가 말한 "인간"은 포이어바흐까지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하는 "인간"을 비판하면서 나온 대안적 개념으로서의 "인간"이다. 곧 사회적 관계가 소거된, 역사가 소거된, 자연과 관계하지 않는 인간, 몸과 감각이 없는 독일인에 대한 비판으로서 (자신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인간"이지, 자연을 식민화하여 수탈하는 인간,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대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투사하는 (브뤼노 라투르의) 근대인이 아니다!


19세기 사람 맑스가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21세기의 우리처럼, 일요일 아침이면 SBS _TV 동물농장_을 보고 울고 웃으며, 도나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을 읽은 우리처럼, 사고하지 않음은 너무 당연한 거 아닐까? 맑스도 말하지 않는가? 자연적인 조건들을 다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을 양해해달라고(49). 양해해주는 것이 맞다. 꼬투리 잡지 마라!


덧>

번역자께 정말 감사 드리지만, 난 mode of production을 "생산방식"(50쪽)으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래 밑줄긋기에 인용한 번역은 훌륭한 번역이다. "방식"이란 말이 문맥상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래도 난 이런 식으로 한국 맑스주의에서 통용되던 번역어가 지워지는 것이 싫다. 


맑스 전공자 아닌 분들이 맑스나 맑스주의 관련 서적 번역할 때, mode를 "방식"이나 "양태"로 번역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그냥 오랫동안 통용되어온 말로 써주세요. 물론 번역이 문제가 되는 첨예한 용어가 있겠지만, 이건 그냥 "생산양식"으로 해주세요!! 

인간이 자신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방식은 일단 이미 현존하고 있으며 재생산되는 생존수단 자체의 특성에 달려 있다. 생산방식은 단지 이 생산을 통해 개인의 신체적인 현존이 재생산된다는 측면에서만 고찰되어서는 안 된다. 생산방식은 그보다는 오히려 개인이 활동하는 특정한 방식이자, 개인이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특정한 방식이고, 개인의 특정한 삶의 방식이다. 개인은 그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존재한다. 그러므로 개인이 무엇인가는 그의 생산과 일치하며, 그가 무엇을 생산하는가와 일치하며 또한 그가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개인이 무엇인가는 이런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 달려 있다.

생산은 처음에 인구의 증가와 함께 등장한다. 생산 자체는 다시 개인의 상호 교류를 전제한다. 교류의 형식은 다시금 생산을 조건으로 한다. - P50

삶의 생산이란 곧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생산하는 것이며 동시에 증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삶의 생산은 본래 이중적인 관계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관계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때 사회적 관계란 그 조건과 방식 아울러 그 목적이 어떠하든지 간에 여러 개인의 공동 작업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이 도출된다. 즉 특정한 생산방식 또는 산업화의 단계는 언제나 공동작업의 특정한 방식이나 사회의 어떤 단계와 일치하며, 바로 그런 공동작업의 방식 자체가 하나의 "생산력"을 이룬다는 점이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점도 도출된다: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생산력의 양이 사회관계를 제약하며 따라서 "인류 역사"는 언제나 산업 또한 교환의 역사와 연관해 연구되고 검토돼야만 한다. 그런데 어째서 독일에서 이러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 독일인은 ..."확실한 감각"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 P66

... 의식 또한 처음부터 "순수한" 의식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저주스럽겠지만, "정신" 자체는 처음부터 물질에 "매달려" 있다. 여기서 물질은 진동하는 공기층이나 음성, 간단히 말해 언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언어는 의식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언어는 실천적 의식에 속하며, 타인에 대해 현존하는 때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현존하는 실제적인 의식이다. 의식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욕구에서, 타인과 교류할 필요성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내 주변에 대한 나의 관계가 나의 의식이다. 어떤 관계가 현존한다면, 그 관계는 나에 대해 현존한다. 동물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계하지" 않으며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동물이 다른 동물과 맺는 관계는 그 동물 자신에게는 관계로서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식은 처음부터 이미 사회의 산물이다. - P67

당연히 의식은 처음에는 감각에 가장 가까운 주변에 관한 의식이며, 자기의식의 능력을 지닌 개인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 그리고 타인과 국부적으로 맺는 연관에 관한 의식이다. 동시에 이 의식은 자연에 관한 의식이다. 처음에 자연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낯설고 전능하며 또 감히 넘볼 수 없는 힘으로 마주한다. 인간은 이 힘에 그야말로 동물적으로 관계하며 또 이 힘 앞에 인간은 가축처럼 무기력하다. 그러므로 이런 의식은 자연에 대한 순전히 동물적인 의식이다(이때가 자연종교의 단계이다). - P68

{개인을 동물에서 구별해주는 첫 번째 역사적 행위는 인간이 사유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생존수단을 스스로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확인돼야 하는 역사의 성립 요건은 개인의 신체 조직이고 개인이 신체적인 조직을 통해 나머지 자연과 맺는 관계이다. 여기서 우리가 인간 자신의 물리적인 상태나 또 인간이 눈앞에 발견하는 자연적인 조건, 이를테면 지질학적, 지리학적, 지형학적 또는 기상학적인 상황 그리고 나머지 다른 상황까지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은 양해해 달라. {그러나 [개인과 자연의] 이러한 관계가 원초적인 신체 조직 즉 자연적으로 성장한 인간의 신체 조직을 말하자면 종족의 차이를 제약할 뿐만 아니라 그 후에 계속되어 오늘날까지 이른 모든 인간의 더 나아간 발전 또는 미발전도 제약한다.} 모든 역사 서술은 이런 자연 토대에서 그리고 역사가 지나면서 인간 행위를 통해 자연 토대에서 일어난 변용에서 출발해야 한다. - P49

...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를 다루는 중요한 문제는 (브루노의 표현인 "자연과 역사의 대립"(『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특징』110쪽)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된 두 가지 "사물"이며, 인간은 역사적 자연과 자연의 역사와 언제까지나 직접 대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지만, 심지어 이런 표현조차도) "실체"와 "자기의식"에 관한 "헤아릴ㄹ 수 없이 고매한 철학적 작업"을 불러일으키지만, 다음과 같은 통찰을 통해 저절로 해소된다. 그 통찰이란 즉 그토록 잘 알려진 "자연과 인간의 통일"이란 일찍부터 존재했으며, 시대마다 산업이 조금 더 발전함에 따라서 이런 통일은 다르게 성립했으며 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투쟁"도 마찬가지였으니 이런 투쟁은 생산력이 그것에 상응하는 토대 ㅜ이에서 발전하게 되기까지 일어났다는 통찰이다. - P95

매뉴팩처가 시작하자 그것과 동시에 유랑민의 시대가 등장했다. 유랑민 시대의 원인은 봉건적 봉사체제가 폐지되면서 국왕이 봉신에 대항하기 위해 고용했던 용병이 해산된 사실과 또한 경작 방식이 개량되고 광할한 경작 지대가 목초지로 전환된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랑민의 발생이 봉건제의 해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이미 13세기에도 비슷한 유랑민의 한 시대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일반적이고 지속해서 나타난 것은 비로소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이런 유랑민이 얼마나 많았던지, 특히 영국의 헨리 8세는 그중 12,000명을 교살했을 정도였다. 유랑민에게 노동을 시키는 일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었으며 유랑민은 극심한 빈궁을 겪을 때만 그리고 완강하게 저항한 다음에야 비로소 노동했다. 영국에서만큼은 매뉴팩처가 급속하게 번창함으로써 유랑민을 점차 흡수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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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망한 사랑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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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덕이며 살다 맞은 쉬는 시간이다.

일을 해야 하는데, 그 동안 에너지 소진이 너무 컸다.


극소수에게 빚은 leverage, 날개지만, 대부분의 채무자에게 빚은 짐이고, 죄다. 


반려빚. 기발한 조어다.

나도 반려빚이 있다. 

10년도 더 남은 대출만기일을 보니, '저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까? 저 해 여름 지구는 올해보다 얼마나 더 덥고 비가 더 많이 내릴까?' 하는 가늠할 수 없는 질문이 생긴다. 

반려빚은 지병처럼 안 생기면 제일 좋고, 늦게 생길수록 좋은 것이다. 

생겼다면 어쩔 수 없는 것. 


그래도 청년에게 반려빚은 가혹하다. 

만약 반려빚이 20~30대 다수의 삶의 조건이라면, 그것은 이들의 계급위치를 규정하는 구조적 요소다.

소비자/채무자/임금노동자/납세자의 악순환, 이 예속적 주체화 기제의 쳇바퀴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꼭 덜 욕망하고, 더 일해야만 하나?

욕망하는 사용가치를 시장 안에서 최대한 싸게 얻는 것을 넘어 아예 시장 밖에서 얻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기회가 흔치 않지만, 청춘의 이야기를 듣고 읽는 일을 계속 해야 하겠다 싶다. 



마침내 0이 된 기분. 정현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 해서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었다. - P105

"응. 오래 사귀어서 편하지만, 그래서 설렘 같은 건 없잖아. 그런 거 다시 느껴보고 싶지 않아?" ...

설레는 게 좋은가. 긴장되고 불안하기만 한데. 속을 알 수 없어서, 확신이 안 들어서 서글프기만 한데. 문애는 익숙함이 좋았다 권태를 좋아했다. 나른함, 무기력함, 나태함이 문애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거의 매일이 뚜렷한 희로애락이 없는 희미한 감정의 연속이었고 어쩌면 그건 감정적으로 빈곤한 상태인 지도 몰랐지만 문애는 아무런 이벤트가 없다는 것이, 매일을 겹쳐보면 다른 점이라곤 거의 없는 반복되는 일상이 만족스러웠다. 지루함 속에서 무한정으로 행복했다. 그건 문애가 어렵게 이룩한 것, 마침내 구한 것, 쟁취한 것이었다. - P118

아무튼 저를 위해서 거의 매일 기도를 한다고 했어요. 저는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좀 그렇잖아요? 그게 무슨 힘이 있어요. 뭔가 고대의 기복 신앙 같은 느낌이고 낯간지러운 거예요. 그래서 됐다고, 난 무신론자고 애초에 그딴 거 믿지도 않는다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나를 위해 기도할 시간은 다른 사람한테 쓰라고 말했죠. 지금 생각해보니까 확실히 좀 재수가 없긴 한데 그땐 그네 논리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걔는 정말 착한 애였거든요. 됐어, 내 맘이야, 계속할 거야, 그러더라고요. 그땐 그러고 넘어갔는데, 그뒤로 좋은 일이 생긱 때마다 걔 생각이 났어요. 명은이 기도발인가? 이런 것까지 빌어줬을까? 하고 말이에요. - P219

‘기도하는 일‘이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옆에는 입을 앙다문 표정의 K의 사진이 작게 붙어 있었다. 나는 별달리 기대하는 바도 없이 그 글을 읽어내려가다가 적잖이 놀랐다. ‘너에게는 비밀이 있다. 너는 아직 모르는‘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 칼럼에는 내가 혜미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내용의 이야기. K는 자신은 기도의 힘 같은 건 믿지 않지만 점점 각박해져가는 세상 속에서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갖는 일을 아예 저버리지는 말자고, 서로의 안위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그걸 전달할 기회가 생기면 표현하자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몇몇의 평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도 했다. - P232

지수의 엄마는 파고를 헤아리며 매일 새벽 기도를 했다. 누구를 향한 기도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지수도 모르고 아빠도 모르고 삼촌도 몰랐다. 엄마 자신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절에도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이장 아저씨의 배에서 일하는 네팔 출신의 수전처럼 힌두교도도 아니었다. 애초에 기도가 누군가를 향한 것일 수 있을까. 기도는 자신을 잠재우기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엄마의 기도는 모든 불필요한 말을 없애고 필요한 말을, 바라는 말을 수없이 외는 식이었다. 반복 속에서 그 말에 익숙해지면 다른 말들은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가짜였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들. 그러고 나면 엄마는 조금 진정이 되었다. 형수는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그래요. 삼촌은 자주 기도를 방해했고 그때마다 엄마는 입술을 악물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들. 일어날 수 없는 일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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