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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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잘 써보고 싶은데 쉽지 않은 책. 읽는 내내 생각도 많이 하게 하고, 인용되는 다른 책들도 찾아보면서, 저자가 이 말을 이런 식으로 탁월하게 풀어냈구나 감탄하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은 고사하고 줄까지 쳐놓은 구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책망하게 하는 책. 바로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이다. 책을 읽은 지 꽤 되었는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 안 되어 리뷰 쓰기도 힘들고, 다른 일들이 계속 닥쳐서 미뤄뒀는데, 허접한 생각이라도 몇 자 적어둬야 할 것 같아 억지로 쓰기 시작한다.

 

1. 비판의 대상과 준거

이 책의 2장은 1970년대 말 나르시시즘을 사회현상으로 분석한 유명한 두 저서의 내용에 대한 이의 제기로 시작한다. 그 두 책은 한국어로 번역된 적 없는 리처드 세넷의 친밀함의 독재(1977)와 지금은 절판된 크리스토퍼 래시의 나르시시즘의 문화(1979, 문학과지성). 그리고 생소한 저자들 에티엔 라 보에티[자발적 복종(1570?, 울력>)], 헬무트 두비엘, 울리히 브뢰클링[기업가적 자아(2007, 한울<절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 -의 이론들도 검토된다. 다 훌륭한 책들이겠지만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저자 이졸데 카림이 정리하고 비판하는 것을 그런가 보다 하면서 따라 읽었다. 이 책들에 대한 비판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푸코(92~97, 116, 123~124, 237~241, 264~266)와 슬로터다이크(244~248)에 대한 비판였다.

 

그녀의 비판의 준거는 알튀세르이다. 그리고 알튀세르가 소화한 프로이트와 스피노자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두 가지 점이 인상적였다. 첫째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이고, 둘째는 프로이트가 1923년에야 가다듬은 초자아(Superego)와 자아이상(Ich-Ideal)의 구분이다(205). 프로이트가 1856년생이니 60대 후반에 이룬 이론적 업적이다.

 

2. 나르시시즘: 현대 자본주의 작동의 메커니즘

나르시시즘은 심리적 원리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형식이다(61). 프로이트에 따르면, 심리적 원리로서 나르시시즘은 본능이며, “모든 에너지를 자기 자아에 들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42). 이때 에너지가 투여되는 대상이 이상자아(Ideal-Ich)이고, 이는 자아이상의 부분이다(47). 나르시시즘이란 자아이상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의미한다(53, 63). 초자아는 십계명처럼 금지를 명령하지만, 자아이상은 너는 너의 이상, 더 나은 네가 되기 위해 너 자신을 바꿔야 한다. 끊임없이...”라고 미적 압력을 행사한다(65). 오늘날 나르시시즘의 사회적 형식은 360도 피드백, 상호 평가 시스템, 랭킹 시스템이다. 이는 경쟁을 보편화, 첨예화 시킨다(150). 저자 카림은 전자를 주관적 나르시시즘으로, 후자를 객관적 나르시시즘으로 칭한다. 전자가 스스로의 동일시를 통해, 스스로의 자아이상 추구를 통해 작동한다면, 후자는 질서 안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자리에 대한 외부의 인정을 나타낸다. 자아이상은 전자에서는 늘 만족되지 못하는 목표인 반면, 후자에서는 개인을 움직이는 수단이다. “추동과 통제를 위한 수단”(152).

 

경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핵심 메커니즘이고, “나르시시즘은 경쟁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인인 우리는 우리의 예속이 마치 구원인 것처럼 예속을 위해 싸운다!”(161).


카림은 나르시시즘이 자본주의의 경쟁이 유발한 효과일 뿐만 아니라, 이제 경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고 본다. 자발적으로 경쟁과 평가 시스템을 수용하고, 그에 맞춰 빡세게 업무를 수행해서 같은 처지에 있는 남들보다 앞서나가는 것이 경쟁 저편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수 있겠나?

 

3. 알튀세르의 호명과 이데올로기

나르시시즘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판별하는 준거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29)


이 말을 처음 읽은 직후에는 책을 읽지 않고 길을 걸을 때에도 이 말을 읊조렸었다. 처음에는 더듬거리다가 어느 정도 입에 붙어서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영어로는 뭐라 할까? 영역을 시도해봤는데, “표현한다가 걸린다. express가 아니라 represent 같았다. 찾아보니 역시 represent였다.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p. 162.


표현하다라는 번역어는 잘 읽히지만 너무 일반적이다. 실재론적 의미에서의 재현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represent되는 것이 현실적 실존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과 맺는 상상적 관계이므로 표상이라고 옮기는 게 좀더 적확하지 않나 싶다.

 

이 문장의 출처인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아미엥에서의 주장(김동수 역, )레닌과 철학(이진수 역, 백의)에 실려 있다. 20세기 말 어느 시점에 줄치면서 열심히 읽었던 책들이다. 그러나 카림이 인용한 저 문장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카림의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알튀세르 책들은 다시 꺼내볼 일도 없었을 것 같다. 이 책들을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알튀세르는 이 문장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과학/참과 대비되는 거짓 담론으로 사고될 수 없는 것임을,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고자 했고, 카림은 그 유지를 잘 받든다. 우리가 그저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라 하더라도, 그 현실적 실존 조건을 견디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나마 좀 살 만하려면 주체로서의 자신과 세계가 맺는 관계에 나름대로 상상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한 모습의 투사물로서의 신(포이에르바흐)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친히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나아져야 한다고. 바로 이 지점에서 참조점 전이라 칭할 만한 것이 발생한다. 포이에르바흐에서 프로이트로! (내가 만들어낸) 신께서 원하시는 나의 바람직한 모습인 자아이상이 내게 속삭인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너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105)

 

4. 푸코 비판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0강에서 푸코는 독일 질서자유주의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대조한다. 전자가 시장과 공동체의 동시적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시장논리의 전일적 관철을 강조한다. 전자가 경쟁으로부터의 보호를 강조한 반면, 후자는 경쟁의 보호를 강조한다(84~86).


사람 사이의 관계든 자기 자신과의 관계든, 모든 사회적 관계는 시장의 언어로, 경쟁의 언어로, 즉 하나의 경제적 논리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 이 담론은 기술적인 동시에 수행적이다. ...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이론은 경제 이론이면서 이데올로기다. ... 마치 이데올로기가 아닌 척하는 이데올로기. ... 현실의 관계들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익명적인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말하기는 주관적 차원, 주관적 관점을 의미할 것이다”(88).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임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감시와 처벌에서 이데올로기개념에 사망 선고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카림은 결국 푸코가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교환하는 인간이 아니라 경쟁하는 인간이 되었으며, 인적 자본이 노동력을 대체하였고,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내적 복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가 되었다(92).

 

카림의 푸코 비판은 전혀 깔끔하지 않다. 그러나 비판의 요점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상상적인 것의 차원은 몰수할 수 없다”(96). 카림은 내적 복종이 필요 없다는 말을 주체가 필요 없다는 말로 해석하면서, 푸코가 신자유주의 주체를 마치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것으로 상상한다고 비판한다(94~98). (푸코가? 게리 베커가 아니라?) 호명-사회화를 자극-반응이 대체한다고.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개인의 심리적 기질을 계산하지 않는 하나의 경제 논리라는 꿈은 신자유주의의 환상이다(100).

 

둘째, 자신의 삶을 기업처럼 운영하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는 합리적이고 주권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시장의 요구에 맞춰야 하는 주권의 모순에 맞닥뜨린다(113). 주권적이어야 하지만, 결국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자신을 부르는 호명에 지배된다. 신자유주의는 이 호명의 존재를 은폐하려고 한다(115). 카림은 (푸코를 계승하는) 브뢰클링의 현실적 허구를 자신의 상상적 호명과 대조하면서 비판한다(119).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는 상상적 관계가 있어서는 안 되며 오직 시장의 현실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현실의 질서로 위장하는 이데올로기다”(123).


자기 자신의 기업가는 상상적인 나르시시즘적 주체를 신비화하며 시장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121).


카림의 작업은 한 이데올로기가 다른 이데올로기에 의해 비판되고 폭로되는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은 이데올로기적 진실이며,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우리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나르시시즘적 호명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기만인 것이다(124). 주권적이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가 필요하며, 이 자기 의지는 대상 됨에서 나온다”(116). “자기가 대상이라는 느낌에서.” 자아이상이 나를 호명하는 것에서.

 

셋째, 자기 배려의 윤리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다.


윤리란 윤리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윤리적 주체의 생산을 뜻한다. ... 자기 배려를 동력으로 삼는 생활 태도의 규칙인 이 윤리 개념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즉시 발견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배려를 허락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요구하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228~230).


카림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초자아 윤리라면,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자기 배려는 자아이상 윤리라고 한다. 전자는 신을 섬기면서 향락을 포기하는부정적인 것인 반면, 후자는 제시된 이상을 통해힘을 제한하기 때문에 더 긍정적 성질을 띤다(240).

 

기독교 수도원과 대조되는 것으로,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제시한 반면,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제시한다. 카림은 이 두 윤리 모두 오늘날의 상황과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241, 그런데 베버는 물론이고, 1984년에 죽은 푸코가 고대 그리스의 상황과 1980년대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보았던가? 이것이 푸코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나? 그리고 1980년대 중반과 오늘날 2020년대 중반을 같은 시기로 보는 것인가? 나르시시즘에 관해서는 스마트폰 전후 또는 SNS 전후가 완전히 다를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세 번째 비판은 슬로터다이크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마무리된다.

 

5. 슬로터다이크 비판

카림은 푸코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부적합한 것이라고 하면서 검토의 대상을 슬로터다이크로 바꾼다. 나는 재작년쯤 슬로터다이크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5분의 4 정도 읽다 관뒀다. 지금 펴보니, 한국 책은 417장으로 되어 있는데, 꾹 참고 보다 14장에서 결국 포기했다. 그런데 카림 책을 보다 보니, 중간쯤부터 자꾸 슬로터다이크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직성의 명령이... 아니나 다를까 슬로터다이크가 나와서 반가웠다. 잘 몰라서 좋아하고 말고 할 수는 없지만, 전혀 모르는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또 카림이 슬로터다이크 책의 핵심을 아주 잘 정리해줘서 좋았다.



슬로터다이크는 푸코를 변주한다. 카림은 이것이 푸코에 대한 선택적독해라고 말한다(245, 근데 그거 카림 당신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푸코뿐만 아니라 알튀세르도?) 슬로터다이크는 수도원에서의 자기 기술이 세속화됨으로써, 자기관계의 탈영성화가 이뤄졌다고 본다(242). 수양, 향상, 강화, 요컨대 트레이닝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배려는 카림이 이야기하는 권위가 아니라 이상에서 나오는 호명으로 인한 개심의 결과다(2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슬로터다이크는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245~246). 슬로터다이크에게 이상의 부름과 수직적 긴장은 그 부름을 받은 개인이 자신을 밖으로 높이 쏘아 올리기 위한 수단이다. 평균과 평범함 밖으로. 그런데 우리는 평균에 대한 적응과 순응을 요구하기보다 향상을 규범으로 요구하는 자아이상 사회에 살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 자기 향상은 현 상태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현 상태, 즉 정상성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247). 곧 이 사회에서 자기 배려는 자발적 복종의 형식일 뿐이다.

 

이 점에서 슬로터다이크 비판은 위의 푸코 비판과 겹친다. 두 명 다 상상적 차원에 독립적 심급을 부여하지 않고, 오늘날의 현실과 맞지 않다.

 

6. 그래서 우리의 현실은?

그렇다면 저자가 그리는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자기 기술에 둘러싸여 있다. 단 구속력 있는 좋음의 표상 없이. 좋은 시민의 표상 없이. ... 우리에게는 초월적으로 고정된 좋음도, 순수하게 내재하는 좋음도 없다”(265).

구체적 개인으로서의 나만이 내 행동의 기준점이다”(268).

자기성의 도취,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의 도취다.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 복종이다. 즉 권능 부여로 체험되는 복종이다”(290)


우리에게 남은 건 나르시시즘의 이데올로기가 막다른 골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이다”(291).


이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압도하면서도 딥빡을 일으킨다. 막다른 골목에 있다...라고라고라? ... ...

 

7. 푸코 비판의 미심쩍음

재미있게 읽었지만 여러 물음표들이 남는다. 위에 적은 물음표들 중 몇을 대충 추스르면, 일단 저자의 푸코 해석이다. 첫째, 푸코가 게리 베커의 논의를 요약하는 과정을 푸코가 신자유주의를 지지한 증거로 해석할 수 있는가? 둘째, 푸코가 말년에 고대 그리스의 자기배려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이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에서 가능한 대항품행에 대한 어떤 교훈의 도출을 목적으로 했던 것인가? 그리고 셋째, 스승과의 관계에서 파레시아는 자발적 복종과는 상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푸코에 대한 선택적 독해 아닌가?

 

8.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선택적 독해는 푸코에 국한되지 않는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 역시 그러하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는 두 개의 테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카림은 이 중 첫째 테제만을 인용한다. 일종의 취사선택이 이뤄진 것인데, 버려진 두 번째 테제는 아래와 같다.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p. 165.


테제 2: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갖는다


알튀세르는 이 두 번째 테제를 통해 이데올로기는 물질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속에 존재하며, 이데올로기 장치는 물질적 관습에 의해 제한되는 물질적 실천들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 장치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나는 이 부분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맑스주의적 심급이라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언급한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호명이 이뤄지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사회학적·비판적 분석이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 책에서 알튀세르와 그가 의존하고 있는 다른 이론적 자원들 스피노자, 프로이트 등 이 충실히 다뤄지고 있는 것과 맑스의 부재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카림이 알튀세르에게서 맑스를 지워버린 것이다. 맑스가 소거된 알튀세르, 결국 이것이 카림이 선택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절름발이 이데올로기 정의 아닌가? 맑스와 프로이트가 만나서 일으키는 부정합적 긴장이 제거된 후의 매끈함, 깔끔함, 싱거움, 그리고 허탈함. 아마 이것이 책을 읽은 후의 내 감정 아닐까?

 

9. 자기자신의 경영자 또는 나르시시즘으로부터 고통당하는 자가 아닌 사람들은?

카림은 푸코의 자기자신의 경영자라는 형상을 나르시시즘으로부터 고통당하는 자라는 형상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럴까? 그들은 인구 중 몇 퍼센트에 해당될까?

 

물론 백번 양보해서 오늘날 나르시시즘의 미적 압력이 전 사회적 범위에서 일반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것이 더 이상 올라섬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도 맞는 말일까? 나 역시 평가당한다. 그리고 좋은 점수를 받고 싶다. 그런데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내 삶이 나아지나? 아니다. 그냥 현재의 자리에 머물 뿐이다.

 

어렸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다. <패스트 라이브스>의 여자 주인공처럼 열두살에는 노벨상 수상을 꿈꾸었고, 스물넷이 되었을 때는 퓰리처상을, 그리고 서른여섯이 되자 토니상을 받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마흔 여덟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그럴까?

 

더 이상 올라섬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단지 나이듦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계급적인 문제기도 하다. 학교 졸업 후 사회에 나서는 청년들 중에 과연 몇 퍼센트가 경쟁을 통해 자신의 삶이 개선될 가능성이 있는 커리어에 들어설 수 있을까? 이들에게는 경쟁이 아니라 생존이 더 문제다.

 

경쟁이 아니라 생존이 문제인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니힐리스트다. 눈만 깜빡이는 최후의 인간, 또는 만 할 줄 아는 낙타, 노새, 나귀, 택배기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카림이 인도하는 막다른 골목에는 스마트폰 보며 좋아요못 받아 안달하는 나르시시스트들뿐만 아니라, 그들 집으로 배달 오토바이를 몰아대는 니힐리스트들도 함께 존재한다. 둘 다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파레시아 없이. 주체에게 상상적 심급을 박탈할 수 없다면 이는 너무 재미없는 그림 아닌가

 

더 투덜거리고 싶은데, 나름 진지하게 쓴 책에 이미 많이 투덜거린 것 같아 이만 줄인다. 그래도 결론은 어쨌든 아쉽다. 막다른 골목이라니...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더불어 발칙한 상상력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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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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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졸데 카림은 푸코의 "자기자신의 경영자"를 나르시시즘으로 자신을 갉아먹는 존재들로 대체한다. 이를 위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동원된다. 맑스가 소거된 알튀세르, 왠지 제 정신일 것 같고 안전해 보이는 알튀세르의 모습이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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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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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푸코가 가지 않은 길을 재구성하였다. 엘리트의 대중혐오에서 대중의 자기혐오로 발전한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변모 과정을 잘 보여준다. Commons에 대한 저자들의 논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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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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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그러니까 재작년 봄쯤 다르도와 라발의 『새로운 세계합리성』을 읽고, 신자유주의 분석에서 푸코의 쓰임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더랬다. 그때 리뷰를 제대로 안 써놓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1)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 대한 훌륭한 주석서다. 다르도와 라발은 푸코가 통치라는 관점에서 살펴봤던 질서자유주의, 하이에크, 베커 등의 선구적 신자유주의 이론들을 잘 소개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좀더 나간다. 푸코가 참조한 이론뿐만 아니라, 그 이론이 실현된 역사적 사례들 피노체트의 칠레부터 유럽연합의 탄생까지 -과의 연관성을 부각시킨다. 만약 푸코가 말년에 자기통치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연구를 계속했다면 그 출발점이 어땠을 지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연구를 동시대적으로 갱신한다면,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의 대두로 손상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거나, 그래봤자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대신, 좌파는 신자유주의 합리성/통치성에 대한 대안적 합리성/통치성과 그것을 인도하며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주체의 대항품행 개발이 절실하다는 이 책의 결론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2) 이 결론에도 불구하고, 정작 다르도와 라발만의 독창성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3) 저자들은 『새로운 세계합리성』의 한국어판 서문(2022)에서 출판 당시(프랑스에서 2009년 출판)에는 자신들이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했음을 고백하면서, 푸코의 1972~73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처벌사회』의 내전개념이 이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6년 자신들이 펴낸 『끝나지 않는 악몽: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의 핵심주장을 매우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끝나지 않는 악몽』의 내용을 무척 궁금해 하면서, 이를 비롯한 이들의 후속 저작들이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존재 자체도 아예 몰랐던 이 책 『내전, 대중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만나게 되었다. 2021년에 프랑스어로 출판되었고,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 『새로운 세계합리성』의 한국어판 서문을 다시 보니, 각주에 이미 이 책이 언급되어 있다.)



장마와 폭염 속에서 책을 다 읽었다. 읽은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진빠지는 일들로 책상에 앉을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잠깐 짬이 나 몇 자 적는다.    


1. 전략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이론: 내전과 대중혐오

다르도, 게강, 라발, 소베르트, 이 네 명의 저자는 신자유주의 이론을 순수 이론이 아니라, 어떤 전략을 내포한 이론으로 본다. 푸코의 주체와 권력에 따르면, ‘전략이란 적에게서 전투의 수단을 박탈함으로써 싸움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모든 방법이다(27, 354). 곧 미제스 이후의 신자유주의 이론들은 사회의 적을 격퇴하기 위한 전략적 담론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사회 안에서 적과 대면하는 내전이라는 맥락에서 구사되는데, 내전은 푸코의 1972~73년 강의록 『처벌사회』의 주요 테마였다. 그러나 내전개념은 군주권력에서 규율권력으로의 이행에 초점을 맞춘 『감시와 처벌』(1975)에서는 주변화되었고, 내가 알기로 푸코는 이를 주요 개념으로 사용한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좀더 적고, 다시 이 책 이야기로 돌아오자.


저자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 내전은 과두지배 연합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17-18). 그러나 이는 ‘1% 99%’의 싸움 같은 계급투쟁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과두지배 집단, 소위 진보적 신자유주의집단, 권위주의적 국민주의에 포획된 인민들, 그리고 평등과 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집단 등이 복잡한 긴장을 구성하며 내전에 참여한다.

                                

누가 신자유주의의 적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은 총체적 국가를 공포의 대상으로 느낀다. 이 총체적 국가란 민주주의가 경제를 침범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22-23). 이 민주주의와 사회라는 적에 맞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신자유주의는 내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고전파 정치경제학을 각색한 맨체스터학파의 자유방임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움을 수행한다(134). 그리고 이 담론은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나치즘, 집산주의, 사회국가, 복지국가, 사회주의, 노동조합 등을, 계획경제와 집산주의를 닮은 모든 것사회의 적으로 규정한다(126).

 

이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강한 국가와 자연적 구조(뢰프케, 161), 또는 자의적 강제와 자발적 진화(하이에크, 168)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본다. 보이는 주먹과 보이지 않는 손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소리다. 적과 싸우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강한 힘이 필요하겠지만, 자연적 구조나 자발적 진화는 왜 강조되는가? 그것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보는 사회주의자들의 구성주의적 오만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시장의 규칙은 자연적인 것이고, 이에 순응하지 않고 개입해서 교정하려는 시도는 무지 또는 악의 소산으로 규정된다. “시장은 옳다. 토 달지 말고, 개기지 마라. 주글래?” 이런 소리다. “대중은 만족을 얻을수록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요구를 내세우게 되고 국가는 약해진다”(발터 오이켄, 69). 평등의 요구는 시대의 병리적 증상일뿐이다(알렉산더 뤼스토프, 27~28). 민주주의 이론과 제도들은 대중의 짐재력을 긍정하지만, 신자유주의자에게 대중이란 혐오와 순치의 대상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전략에는 바로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마음가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시장에 대한 순종 여부로 순치/동원과 혐오/격멸의 대상을 구별하고, 양자간의 내전을 조직함으로써 민중의 단결이라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전 전략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전쟁은 경쟁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평등에 대항한 전쟁이다(28).

 

2. 신자유주의 이론들과 슈미트의 묘한 관계: 법치

사실 난 칼 슈미트를 잘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점 하나가 신자유주의 선구자들이 슈미트를 참조했다는 사실이다. 슈미트는 다당제에 비판적였다. 왜냐하면 이 특수이익들의 다원주의총체적 국가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69). 1932 7,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인간 삶 모든 영역에 침투하는” ‘총체적 국가로서 약한 국가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같은 해 11, 그는 이 약한 국가를 양적 총체적 국가로 재규정하면서, 이 현실의 국가와 대비되는 앞으로 도래할 이상적 국가로서 질적 총체적 국가를 제시한다. 이는 양적 총체적 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권위주의 국가이다. 그리고 이 매우 강한 국가만이 당파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나치즘과 공산주의라는 이중의 위험에서 독일을 구할 것이라고 구상한다. “슈미트는 전능한 민주주의 국가의 약점을 명확하게 파악했다”(하이에크, 83). 슈미트의 민주주의 혐오는 오이켄, 하이에크, 뢰프케 같은 신자유주의 선구자들(83, 90, 114)뿐만 아니라, 칠레 군사독재의 후예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42). 또 이 강한 국가는 경제 밖으로의 자진 철수를 개시할 수 있다”(295). ‘경제와 깨끗하게 절연한강한 총체적 국가,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론이 슈미트에게 빚진 요소이고,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자유주의와 극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선구적 이론가 명단에 슈미트를 추가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는 무엇보다 슈미트에 대한 하이에크의 이중적 판단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총체적 국가로의 변환을 비판한 슈미트는 긍정하지만, “모든 규칙과 규범은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으며 그에 걸맞은 유기적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 인민 공동체가 유일한 법적 주체를 구성한다는 나치의 교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비판한다(302).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민공동체가 아니라, “인민이 자유로운 개인주의적 시민사회이고, 진화의 결과인 규칙과 규범, 곧 시장질서는 그 자체로 자연적이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슈미트는 “’엄밀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외부자(304).

 

시장질서를 보호하는 법이 私法이다. 하이에크는 私法의 일반 규범 대 公法의 특수 규칙의 대립(303)을 상정하면서, 후자를 전자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한다. 민주주의 정부의 행위와 국가의 公法을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私法이라는 일반 규칙에 종속시키기를 꿈꾼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이에크가 말하는 법치이다. 그리고 이 법치주의는 유럽의 여러 조약들을 통해 실현된다(191). 따라서 법치는 좋은 거 아냐? 법을 남용한다고 법을 부정할 순 없어!”라는 순진한 말은 법이 정치를 대체한 오늘날 미국, 브라질, 한국의 현실뿐만 아니라, 하이에크의 법치 개념 앞에서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법의 전략적 사용, 법률전(lawfare)’은 신자유주의 정치에서 일반적이다(270~273). 강한 국가는 법치와 결합함으로써, 인민주권의 실현을 봉쇄하면서도 자신에게 자연의 법칙의 수호자라는 그럴 듯한 사명을 부여한다.


3. 오늘날 극우파의 성격                                                      

2008~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초까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예고하는 분석들이 한참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당시 출판되었던 『새로운 세계합리성』(pp. 682~683)에서 다르도와 라발은 통치성의 위기를 맞은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는 1938년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에서 우파 학자들의 집합적 아이디어로 등장하기 시작해서,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1980년대초 대처와 레이건, 1990년대 제3의 길, 그리고 클린턴 정부가 주도한 세계무역기구 설립 등을 거치면서 현실화되어, 새로운 합리성으로 세계경제질서, 국가정책, 개인 품행 모두를 인도하는 원리로 자리잡게 된다. 그렇다면 2024년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새로움은 무엇인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이후 더욱 주목받게 된 신자유주의의 권위주의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당시 각국 정상들은 스트롱맨들로 채워졌다. 그 전부터 권좌에 있던 푸틴은 차치하고, 에르도르안, 두테르테, 보우소나루, 오르반 등이 집권하면서 노골적 반이민 정서,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을 친시장주의와 결합시키며, 세계화 흐름은 되돌리려 하면서도 복지국가 해체는 지속하려는 정책들을 펼쳤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국민 일부의 지지도 열성적이었다. 처음 트럼프를 보면서는 공인이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저렇게도 투명하게 다 드러내나싶었다. 그러나 그를 대통령으로 뽑고 그에 대한 지지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 기반으로 삼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저학력 하층계급이다. 하층계급이 어떻게 극우파를 지지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저자들은 토마 피케티나 디디에 에리봉의 관점과 합류하는 분석을 제시한다


좌파는 글로벌리즘에 동조하고, 세계화한 엘리트로 편입하며 인민 계급의 분노를 키웠다”(195).


미국에서 세계화를 정책으로 추진한 것은 공화당이 아니라, 클린턴의 민주당였고, 여기에 토니 블레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이 장단을 맞추었다. 세계화는 도시 엘리트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었을지는 몰라도 노동계급과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그런데 이들의 박탈감을 집권 좌파들은 외면했다. 그 당시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을 과연 좌파라고 볼 수 있는가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고 서유럽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해체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유럽에서 이들의 우경화는 당연한 수순였다. 유력한 사회주의 진보정당이 없던 미국에서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냥 넘어가겠다.

 

하층계급의 상대적 박탈감을 달래줬던 것은 좌파가 아니라 국민주의적 신우파였다(198). 자유지상주의자 머레이 로스바드의 반세계화 주장은 트럼프의 고립주의 정책의 전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주권이 상실될 것이라면서, 미국인들의 손에서 결정권을 빼앗아가는 국제주의적 초국가 기관이 설립될 것이라며, NAFTA 철폐, 모든 종류의 초국적 기구(UN, ILO, UNESCO ) 탈퇴, 개발원조 중단, 이민 제한이 필요하며, 이 모든 것이 진정한 자유시장 구현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99). 그는 자유를 사회적 상호의존관계 및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내하지 않아도 될 권리로 보면서탈사회주의화를 슬로건으로 채택한다.

 

로스바드의 이 반세계화 국민주의 수사는 오늘날 정확히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새롭게 민주당 후보로 지명된 카멀라 해리스는 과격한 급진파이고, 그녀가 당선되자마자 미국 경제는 망하고, 3차 세계대전이 발생할 것이라는 호들갑이 정말이라고 믿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촌스럽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 이들이 무식한 게 문제가 아니라, 하층계급의 마음을 못 사는 진보적 좌파가 무능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저자들은 우파의 이 성공을 신자유주의가 독(유대관계 해체,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불안정)과 해독제를 동시에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해독제란 규범을 준수하고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는 착한 시민인 우리’”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주권 국가를 다시 이상화하며, 개인적 자유를 급진적으로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221~222). 값싼 제품을 수출함으로써 우리기업과 우리일자리를 없애는 중국이건, ‘우리나라 국경을 불법월경하는 멕시코이건,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적들과 싸워야 한다.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도 문제다. 그들은 외부의 적였다가 내부의 적이 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일 수도, 서구 기독교 문명을 위협하는 낙태, 동성결혼 찬성론자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는 시민들 모두에게 사회주의 급진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철지난 매커시즘의 수사가 다시 동원되기도 한다.

 

이 극우정치의 대두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 그 전에 그것은 무엇이 아닌 지부터 먼저 보자. 첫째, 이를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라고 볼 수는 없다. 파시즘과 신자유주의는 일종의 사회진화론을 공유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사회 진화론은 파시즘처럼군사 전쟁이나 영토 복속을 추구하지도 않고 열등한 종의 제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291). 모든 개인을 하나로 녹여내어 인민공동체로 집결시킬 필요도 없다. 그리고 트럼프의 예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파시즘이 조직의 근간로 삼고자 했던 체계화된 대중 조직은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다


트럼프는 개인을 찬양하고 공동체와 이성, 전체의 이익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며, 개인의 자유, 자발성, 선택, ‘잠재력을 발휘하여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모든 것을, … ‘탈규제화된사적 자유를 거의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운 방식으로 옹호한다”(292).

 

둘째, 같은 논리로 우파 포퓰리즘이라는 말도 적절치 않다. ‘포퓰리즘하나의 인민을 구축하는 것인 반면, 오늘날 극우정치는 이들을 분할한다. 인민계급 일부가 노동자 운동의 모든 성과와 복지국가, 노동법, 노동조합에 등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들은 1930년대 이래 강한 국가 정당화 논리의 등장부터 최근까지 신자유주의 전략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이 전략의 두 특징을 지적한다(318~319). 첫째,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다소 진보적인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와 반동적인 내셔널리즘 신자유주의양분된다. 둘째, “이러한 두 신자유주의 분파의 가치 전쟁 속에서 인민은 자기 자신에 대항하게 된다”(319).

두 번째 지적이 더 흥미로운데, 이 부분에서 저자들은 푸코의 자기경영하는 주체개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자기 자신을 가치화하는 경제에서는 개인이 무엇을 했는지보다 그가 약속할 수 있는 미래의 능력치가 더 중요하다”(237). 실패는 개인의 책임이고, 사회에는 책임이 없다. 성공을 위해서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과 불가분한 것으로 드러난다.”(239) 한 사회 내의 내전이 개인 안의 내전으로 더 깊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개인은 그 전쟁에서 전사의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적 노릇까지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경영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도록 강제된다”(239).


사태가 여기에 이르면, 이제 저자들이 그리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변모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이 태동하던 1930년대에 신자유주의는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대중혐오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2020년대 오늘날 이 신자유주의 합리성은 공정한 경쟁과 능력주의를 미덕으로 삼으며 빈곤청년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간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부모의 가난과 자신의 능력부족을 탓하며, 자신과 가족을 혐오하게 만든다. 사회는 내전 중이고, 이 전쟁은 가족 안에서도, 개인의 마음 속에서도 진행된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역사란 엘리트의 대중혐오에서 대중의 자기혐오에 이르는 승리의 역사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너무 악의적인 일반화일까?


4.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신자유주의 내전에 맞서, 민주주의와 사회적 평등을 옹호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내면화시키는 경제와 정치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주술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슈미트의 말을 빌려 기초 결정혹은 제헌적 결정이라고 부른다. 이 말을 대처는 아주 쉽게 대안은 없다라는 말로 바꿨다. 대안이 없다면 정치도 없다. 그러나 정치는 있고, 정치가 있다는 것은 가능성의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정치적 협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공통의 사안이며, 저자들은 이를 커먼스(commons)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저자들은 레닌 이후의 2단계 전략, 곧 혁명을 통해 먼저 국가를 바꾸고, 그 다음에 세계를 바꾼다는 고전적 전략을 폐기한다.


국가는 결코 피지배자의 무기가 될 수 없다. 급진적으로 비국가적인 정치, 즉 커먼스의 정치만이 시장의 영향력과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오직 인민의 혁명만이, 시민들에 의해 전개되고 통제되는 혁명만이 신자유주의적 내전 전략에 대항할 수 있다”(326).

저자들은 파리 코뮌이 내전에 대항한 혁명였음을 주지시키면서, 제도화된 실천이 아닌 탈제도화된 힘의 구성을 주장한다. 이들은 과거 좌파의 노동자 중심성, 보편정당, 해방 주체의 형성 등이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다고 진단하면서도, 우파 포퓰리즘을 미러링하는 것에 불과한 좌파 포퓰리즘(무페)이나 페미니즘이나 인종정의 운동 일부에서 보이는 정체성 물신주의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주장은 단순하다


오직 하나의 전략이 있을 뿐이다. 모든 분야에서 평등을 우선으로 하는 모든 요구를 결집하는 것이다”(333).

그런데 여기서 좀 맥이 빠진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 방향은 대략 공감할 수 있지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작은 모델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신자유주의 내전에 대한 혁명 전략으로서 커먼스의 실천적 사례들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이 좀더 익어가기를 응원해본다.


5. 푸코가 가지 않은 길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다. 사실 제일 쓰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나는 저자들이 푸코가 가지 않은 길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성 개념에 기반한 최근의 연구들은 주로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79) 9~12강의 주제인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논의를 『감시와 처벌』(1975)의 규율권력이나 옴네스 에트 싱굴라팀”(1979)의 사목권력 논의에서 다룬 행위의 인도(conduct of conduct)로서의 품행에 대한 규율과 연결시켜 다뤄왔다. 그런데 이들 논의에서 국가와 사회의 형상은 주변화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 통상적 흐름과 달리, 저자들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처벌사회』(1973)내전개념과 니체, 계보학, 역사”(1971)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79) 7강에 등장하는 법치또는 법의 지배개념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형상을 재조명했다.


푸코는 1979년 이후 자기와 타자에 대한 통치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반면, 저자들은 바로 그 문제를 푸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늘날의 시점으로 끌고 온다. 이제까지의 푸코 연구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점이 이 저작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오랜만에 읽은 푸코 관련 저작인데, 만족스러웠다. 이 저자들의 다른 저작들도 한국어로 속히 번역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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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9년 글로벌 위기에도 신자유주의가 죽지 않았듯, 2021년 미 국회의사당 점거 진압에도 MAGA 정치를 앞세운 트럼프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극우 세력들이 약진하고 있으며, 보수당의 우경화가 가속화된다. 그 와중에 2024년 올해 영국에서는 오랜만에 노동당이, 프랑스에서는 신인민전선(NFP)이 우익의 집권을 막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영국에서는 무슬림 축출을 주장하는 극우파의 과격폭력 시위가 진행 중이고, 올림픽을 핑계로 마크롱이 총리 지명을 미룬 프랑스도 향후 어떤 양상이 전개될 지 미지수다. 11월 미국 대선도 그렇다. 한국은? 현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공산전체주의 운운할 때보다 총선 이후 수그러든 것도 같지만, 대통령 거부권은 계속 행사되고, 극우인사들이 계속 기용되는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국회에서 사라진 정의당의 빈 자리가 크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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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 진지한 민주주의자를 위한 선언
수전 니먼 지음, 홍기빈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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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좌는 없는데 극우만 설치는 세상에서 보편주의, 정의, 진보의 가능성에 대한 옹호가 반갑다. 또 쉽게 잘 읽힌다. 그녀의 정치적 입장도, 슈미트나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론적 입장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푸코 비판은 허수아비에게 주먹질하는 듯한 느낌이다. 푸코는 워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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