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 이토록 곡해된 사상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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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0.

21세기 첫 1/5 시기의 끝자락, 201912월에 읽은 책이다. 처음 이 책을 펼 때에는 맑스의 이론에 관한 기초 점검 정도의 의도로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내내 저자의 논리 전개에 대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책을 덮으면서 이 경이로운 독서 경험을 조금이라도 글로 잡아두지 않으면 아까울 것 같아서 급히 서평을 남긴다.

 

어떤 책을 읽고 대단한 재미를 느끼는 데에는 몇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에 대한 나의 경탄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이번 독서가 아마도 다음의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1) 저자의 논리 전개에 동조되어 저자가 인용하는 문헌들까지 찾아가며 읽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지식을 교정, 확장, 충실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독서;

(2)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하는 주제나 분야를 읽었을 때 이전에는 몰랐던 것, 생각하지 못 했던 것, 잘못 생각했던 것을 알게 해줌으로써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의 내가 더 이상 책을 처음 폈을 때의 내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독서;

(3) 상이한 문제 설정에 기반하고 있는 이질적 이론틀 간의 교류와 접목 지점을 알려주고, 새로운 대립과 종합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는 독서.

 

1.

어떤 책이든 기대보다 재미있으면 열심히 읽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글턴이 인용하는 문장들이 실려 있는 저작들을 다시 보았다. 오랫동안 먼지 쌓인 채 나의 책장 한 줄을 길게 차지하고 있던 맑스엥겔스 저작선들에 다시 손이 갔다. 그 중에는 이전에 읽었던 「헤겔법철학비판」, 『독일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수고』, 「공산당선언」, 「프랑스내전」, 『자본』, 『요강』, 「고타강령비판」 등도 있고, 알고 있지만 읽지 못한 「신성가족」, 『잉여가치학설사』 등도 있고, 이번에야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바그너에 관한 방주」나 인도, 중국에 관한 글, 또 다른 서한들도 있었다. 전에 읽었다고 다 기억나는 것도, 다 아는 것도 아니어서 이번의 독서는 복습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저자 이글턴의 의도는 맑스의 이론에 대한 통상적표준적 왜곡 비판에 정면대응하는 것이다. 책을 처음 잡았을 때 내 의도는 오랜만에 맑스에 대해 잘 정리한 글을 읽으면서 얼토당토 않은 왜곡에 대한 명확하고 쉬운 대응방법을 얻고자 하는 것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의도는 독서를 통해 아주 잘 실현되었다. 이글턴은 국가간 갈등도 인종적성적 불평등과 더불어 계급착취와 동일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사회학자 기든스(43), “생산력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낳는다는 맑스주의 역사학자 코헨(55), “역사가 단지 혼돈과 요행과 우발과 우연의 혼잡한 무더기라고 보는니체와 푸코(108)의 주장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맑스주의적 핵심을 무시, 과소평가, 왜곡하는 페미니즘, 식민지 민족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평화운동의 일부 조류들에 대해 가열찬 반비판을 전개한다(10). 맑스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지금 그가 맑스주의자든 아니든 상관 없이 쾌재를 부르게 하는 명확한 지적 전투성을 이글턴은 보여주고 있다.

 

2.

그런데 맑스에 대한 나의 이해에도 이글턴이 보기에는 왜곡인 요소들이 상당히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데, 비로소 생각의 변화를 야기하는 독서가 된 것이다. 그의 맑스 해석에 나는 대체로 설득되고 말았다. 그 중 세 가지만 살펴보자.

 

(1) 공산주의 사회는 평등한 사회이다? (4, 특히 101-103)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맑스는 오히려 평등을 부르주아적 가치로, “문화와 문명 세계 전체에 대한 추상적인 부정으로 비판했다(101, 『경제학-철학수고』). 「공산당선언」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시민적 소유”, 곧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철폐된 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만인의 발전이 각자의 발전의 조건이 되고 각자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의 조건이 된다.” 나의 이해의 방점은 시민적 소유의 철폐에 찍혀 있지만, 이글턴의 해석의 방점은 뒤에 찍혀 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양극화를 야기하는 근본적 요소의 철폐라는 의미에서 불평등을 줄일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완벽한 사회는 아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교통사고, 끔찍하게 못 쓴 소설, 치명적인 질투, 자만에 찬 야심, 감각 떨어지는 바지, 달랠 수 없는 슬픔이 있을 것이다. 화장실 청소 같은 일도 해야 할 것이다”(100). 이글턴의 맑스 해석이 재미있는데, “사람들을 평준화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102). 이 말을 「고타강령비판」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뒷받침하는데, 출처를 밝혀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평등이라는 주장을 역겨워하던 니체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의 서로 다른 필요를 고르게 돌본다는 의미이며, 인간과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같은 잣대로 측정할 수는 없다”. 맑스가 평등을 주장했다면, 그것은 자기실현의 평등한 권리이며, “사회적 삶을 형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평등한 권리이다. “결국 맑스에게 평등은 차이를 위해 존재한다”(103)

 

(2) 맑스가 그린 공산주의 사회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9)

나는 맑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사회의 역사인 계급투쟁의 역사가 진정한 인류역사의 前史로 되어버린 공산주의 사회에는 계급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글턴은 『자본』 제3권 제23장에서 맑스가 국가의 기능을 특정 계급을 위한 기능과 계급중립적 기능 – “모든 공동체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공동의 활동들을 관할하는 기능 을 구분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맑스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소멸하리라 희망했던 것은 부르주아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의 기능였을 뿐, 중앙 행정부라는 의미의 국가 기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맑스가 자본주의 국가를 시민사회로부터 떨어져나간, 곧 소외된 국가로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 기제로 보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고하였던 것은 시민들의 자기지배”(185)였고, 이는 아나키즘적 이상과는 다른 중앙 행정부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토대-상부구조 모델은 맑스주의가 포기해야 할 낡은 도식이다? (6 141쪽 이후)

(20세기말 나름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었고 좋아했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든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논의를 도입한다고 해도 맑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라는 단순도식이 뒤집어 씌우는 혐의는 너무 치명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토대나 상부구조 이 둘 중 하나에 꼭 속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관이 변함없이 그 둘 중 하나인 것도 아니다. “어떤 제도는 수요일에는 상부구조적이지만 금요일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144). 이글턴은 기본을 강조하면서도 본인만의 독특한 해석을 가미하여 맑스주의의 약점으로 치부되는 이 오래된 모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에 따르면, 모델이란 원래 정태적이며 단순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맑스는 이 둘 간에 많은 소통의 흐름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141). 이것은 기본이다

 

이글턴의 독특한 해석이란 무엇인가? 1) “상부구조는 하나의 장소라기보다는 실천”(144)이며, 2) “토대는 정치적 가능성의 외부적 한계”(147)이다. 먼저, 상부구조의 존재이유는 토대가 착취를 내포하고 있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곧 상부구조가 필수적인 것은 착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상부구조를 말 그대로 건축적 구조의 윗부분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착취로 인한 갈등을 조절-억압-은폐-선별-봉합하는 실천적 기제로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조절이론에서 상정한 조절양식과 매우 유사한 이해이다. 그 다음으로, 이글턴은 토대도 건축물의 아랫부분이 아니라, 다른 모든 개혁들은 다 양보해도 해당 자본주의 체제에서 결코 바꿀 수 없는 것, 곧 사회주의적 압박에 대한 최종적 장애로 이해한다. 토대-상부구조의 기존 모델(에 대한 나 자신을 포함한 통상적 이해)이 구조적 개념화였다면, 이 재개념화는 행위중심적 이해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곧 토대와 상부구조를 모두 지배계급의 계급적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직하다.

 

3.

지금까지는 이글턴의 이 책이 어떻게 맑스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가다듬게 했는지와 관련된 부분을 썼다면, 이제부터는 이전까지 무관하거나 갈등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상이한 문제틀 간의 교류 지점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이글턴은 맑스주의를 세계에 대한 비극적인 비전”(65, 80)으로 이해한다. 세계, 역사, 실천, 자신의 운명까지도두려움에 떨면서, 공포로 얼룩진 표정으로 긍정하는 것”, “최악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최악을 넘어설 수 있는 것”, 이것이 이글턴이 말하는 비극적 비전이다. 맑스주의를 비극적 비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비극적 비전이란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곧 삶의 필수적 부분으로 고통마저 긍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사랑하는 것. 위에서 보았듯, 이글턴은 니체의 역사관을 부정하는 듯 싶지만, 이 책은 맑스의 저작에 대한 니체적 독해로 가득 차있다. 비극뿐만 아니라, 니체의 주요 주제들 - (109, 126, 129-138, 210-211), /권력(139, 192), 지식-권력(139), 도덕주의 비판(149), 기원의 트라우마(169), 생명(195), 원한/죄의식(204) 이 이글턴의 맑스 이해의 독창성을 구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아주 짧지만, 권력(power)에 대한 맑스와 니체에 대한 비교가 나오는데 무척 인상적이다. 맑스는 권력을 사회적 환경에서 떼어내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는 물화를 거부하였지만, 이러한 접근은 니체와 프로이트가 취했던 접근 방식과는 반대이다. 맑스의 접근에도 분명 어떤 장점이 있겠지만, 그것은 권력의 어떤 주요한 특징을 간과하게 하였다. “권력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그저 지배 자체를 위한 지배에 탐닉하는 요소, 아무런 특정 목적도 없이 그저 힘이 있음을 과시하기를 즐기며 애초에 그것이 종사하기로 되어 있는 실질적 목표를 항상 초과하는 요소가 있다”(192).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맑스주의를 세계에 대한 비극적 비전으로 바라보는 이글턴은 맑스에게 바람직한 삶의 모델은 예술적 자기표현이라는 생각에 토대를 둔 것으로 본다(216). 이러한 파악 역시 니체적 렌즈를 통한 맑스 독해의 결과일 것이다.

 

이글턴은 내게 맑스와 니체에 대해 큰 화두를 던졌다. 니체를 읽을 때마다 1)평등, 민주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 2)변증법 기각, 3)사회제도 분석의 부재/불가능성, 4)집합적 실천 전망의 결여 등이 참 불편/불쾌했다. 그리고 이러한 불편함의 근저에는 내가 오랫동안 상대적 준거로 삼았던 맑스(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글턴의 이 책을 읽으면서, 맑스 역시 평등을 마냥 긍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의 관심 대상였던 니체와 오래된 준거였던 맑스를 둘 다 모두 다시 보게 되었다. 주요 모순을 상정하지 않고 화해/해방이라는 전망 없이 실천하는 것, 이런 것이 변증법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비극적 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정적으로나마 하게 한 것은 내가 이 책에 진 큰 빚이다. 화두란 충격이지만 당장에는 말로 잘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무언가 성찰하게 하여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면 좋겠다. 이번 달이 지나고 짬이 좀 나면 그의 최근작인 『유물론: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부터 좀 봐야할 것 같다. 기대된다. 

 

4.

분량이 얼마 되지 않지만, 매우 충실한 내용의 책이라 할 말들이 더 많다. 특히 맑스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결시키는 부분들(96, 134, 150, 152)이 나오는데, 니체가 철천지 원수로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가 맑스 안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여기서 이 주제에 대해 지금 더 다루기에는 버겁다.

 

역도 상당히 훌륭한 편이다. 이 좋은 책은 꼭 다시 출판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때에는 아래에 적어놓은 오역들도 수정된다면 더 좋겠다.

 

26: 마지막 행: “뿐이다. 아무것도사이 한 문장(All you will get is socialized scarcity.) 누락: “그 사회주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사회화된 결핍(희소성)밖에 없을 것이다.”  

30: 9: 집중된 국내 노동 분업 집약적 국제분업 (intensive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r)

33: 17: 지령경제에 명령경제(command economy)

60: 8: 하지만 또한

64: 22: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가

72: 17: 잘 익은 고급 (fine)

76: 15: 더욱 많은 현재라고 현재가 더 이어진 것이라고

82: 11: 사실에 이 사실에

96: 14: 선이다! 좋은 것이다!

211: 23: 영원한 외재적(exte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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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3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 10월에 산 책인데 여적도 안
읽고 버티고 있네요...

솔직히 말해서 어디에 있는지도...

리뷰를 보고 나서 도전정신이 불
끈불끈합니다.

에로이카 2019-12-3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저도 그리큰 기대를 갖고 읽지 않았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올해 가기 전에 서평 다 쓰고 싶었는데 약속 시간 맞추느라 아직 미완입니다. 곧 완성할게요. 저도 이 책에 대한 레삭메냐님 서평을 보면 더 할 얘기가 생각날지 모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 이토록 곡해된 사상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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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제대로 알기 위하여 읽어야 하는 책, 마르크스를 싫어해도 제대로 알고 싫어하려면 읽어야 하는 책, 마르크스를 좋아한다면 무조건 읽어야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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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4 : 육체의 고백 나남신서 201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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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겨울잠 양식. 봄이 올 때쯤 다 볼 수 있을까? 역자 오생근씨는 이제 차분히 [감시와 처벌] 오역들이나 좀 교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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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니체전집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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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피한 번역. 우상의 황혼과 안티크리스트는 2015년 아카넷에서 나온 박찬국 번역과 비교해보면 가관임. ‘재앙‘을 ‘숙명‘으로 번역하고, ‘징병‘을 ˝군인처럼 용감하게 만든다˝로 번역하는(181-2), 용감한 재앙 수준의 오역. 독서용이 아니라 장식용이라면 사도 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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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0~71년
미셸 푸코 지음, 양창렬 옮김 / 난장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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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푸코의 연관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강의록을 보고서야 비로소 <담론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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