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노조 운동 20년 - 쟁점과 과제
조돈문.이수봉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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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7년 이후 20년에 걸치는 세월 동안 노동운동이 거쳐온 길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글 13편을 모은 책이다. 한두 개의 글을 빼고는 전반적으로 훌륭한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후반부에 실려 있는 오건호와 조돈문의 글은 나처럼 노동운동(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노총)의 주체와 전망에 대한 미더움이 급감하고 있는 이들의 관심을 좀더 붙잡아 두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사실 전망에 대해 더 많은 궁금함이 생기긴 했지만, 언젠가부터 증폭되어온 노동운동에 대한 냉소의 상당 부분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나의 이 냉소가 물론 어려운 과정에서 투쟁에 나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냉소는 아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무력함이 미안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모순과 착시
1987년 6월 항쟁 직후 전국에서 터져 나온 “노동자 대투쟁”은 제도정치 영역에서 확보된 민주화를 사회 전반의 영역과 개별 사업장으로 확장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곧 정치영역의 민주화가 대중투쟁을 통해 독재정권의 반응을 끌어낸 것이었다면, 노동자 대투쟁은 그 정치적 영역의 민주화를 다시 대중투쟁을 통해 확산시켜 (국가와 자본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 유지될 수 있었던) 폭압적 노사관계를 민주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체로 참여한 이 민주화 확장 투쟁에서 민주노조 건설은 당시 노동자들이 당면한 핵심 과제였다. 노동자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자본 측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당시 15.7%에 그쳤던 노조 조직률은1989년 19.8%에 이르게 된다. 수치상의 변화는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그 와중에 기존 한국노총 소속 어용 노조들의 민주노조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나 89년 정점을 이루었던 노조 조직률은 이후 하강을 거듭하며, 2004년에는 11%에 이르게 된다 (354). 수치만 놓고 보아도 민주화 이전보다 더 못한 조직률이고, 내용을 들여다 보아도 민주노조 건설에 성공했던 정규직 노조들이 고용 불안 위협 속에서 비정규직에 등을 돌리고 개별 자본에 종속당한 사례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민주노조의 타락은 분명히 관찰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가속화된 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었다. 신자유주의화의 시발을 언제부터 잡을 것인가는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전반적인 산업구조 조정으로 인해 여성의 노조조직률은 전체 정점인1989년이 아니라 1987년 말 이미 정점(15.3%)에 도달한 후 꾸준히 하락했다는 점(강인순: 354)이나 비정규직 비중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점(김성희: 307)을 보면, 비정규직 증가와 노조조직률 하락의 문제는 민주노조 건설의 성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경제위기 이전에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곧 87년 이후 노동운동은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의 동시진행이라는 모순적 역사경로 속에 발전해 온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민중운동 진영에게나 일반 시민들에게 일종의 착시 현상을 동반하였다 (이수봉: 228; 조돈문: 463). 곧 먹고 살기는 빠듯한데, 군사독재도 무너뜨린 마당에 노동자들이 맨날 파업해서 국가경제가 거덜난다는 자본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일반 국민들이 동조하면서 노동운동에 ‘집단 이기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게 된 것이다.

전투성 게임과 제도성 게임
199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노사관계의 제도화 경향은 국가와 한국노총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준: 88-89; 노중기: 403-405). 국가는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통제권을 새로이 확보하기 위해, 한국노총은 상실한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사정 3자 협의 틀을 필요로 하였다. 자본 측은 국가의 엄호 속에 일방적 우위 관계에 있던 노사관계를 노동 측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이 협의 틀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히 꺼려하였다. 민주노조 측은 이 사회적 합의 실험에 참여와 불참을 반복하였다. 어쨌든 전투성 게임과 함께 제도성 게임에도 노동운동이 참여하게 된 것은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라면 성과였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와 자본에게는 지배와 착취의 정당성을 새로이 확보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

제도성 게임의 장이 전무하였던 87년 당시 노동운동의 전투성 게임에 상대적으로 동조적이었던 시민들은 경제위기 이후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가속화된 사회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더불어 진행된 일방적 정리해고에 대한 생존권 사수 차원에서 저항했던 노동자들의 전투성 게임에는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다 (조돈문: 475-476).

동원과 설득
오늘날 국가와 자본과의 수세적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국민들마저 등을 돌려버린 사회적 고립 속에서 노동운동은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1987년 당시 노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와 사회 민주화라는 대중적 요구의 합치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단결된 노동자의 동원을 통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현재는 국가와 자본의 개별화 공세 속에서 연대, 단결, 조율을 달성하는 것도 어렵고 설령 이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를 통한 노동자들의 동원이 국민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곤 한다. 조돈문(481)은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기업별 노조 체계 아래에서 전투적 노조 운동을 전개해 온 우리 민주 노조들은 ‘동원의 논리’에 익숙하지만 국민 여론을 향한 ‘설득의 논리’ 경험이 별로 없다. 따라서 국민 여론을 견인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전투주의는 보수 언론에 의해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되기 쉬우며, 성공적인 투쟁 동원의 파괴력이 자본과 정부에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시민들에게는 불안을 안겨줄 수 있고, 특히 위치적 권력(positional power)이 큰 네트워크 산업의 경우 불편함을 인내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보수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쉽게 호응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된 노동운동의 문제는 경험 부족과 기업별 노조체계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점은 오늘날 노동운동이 한편으로 동원의 논리에 기반한 전투성 게임을 유발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재편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책임성을 담보한 제도성 게임을 요구하는 민주화 양자 간의 내재적 모순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485-6).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신병현은 사라진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을 새로이 형성해 나갈 것을, 노중기(429)는 (1)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산별노조 건설, (2) 정치세력화, (3)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연대 구축을 핵심 과제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제들은 모두 동원의 주체 형성과 관련되어 있을 뿐, 설득의 논리를 어떻게 증진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함하지 않는다. (노중기는 세 가지 과제 중 정치세력화를 가장 관건적 요소로 꼽으면서, 설득의 논리를 진보정당을 통해 성장시킬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조돈문 식으로 하자면, 동원의 논리와 설득의 논리, 전투성 게임과 제도성 게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사회공공성 투쟁을 통한 새로운 운동 주체 형성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답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글은 오건호의 글이다. 그는 개별 작업장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의 이해를 중시하는 운동으로서 사회공공성 운동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 공공적 서비스는 비록 자본주의 체제일지라도 시장과 이윤 논리에서 벗어나 생산∙공급되어야” 하며, 이 “사회공공적 영역이 시장 논리에 지배되어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진보 운동의 핵심 과제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공공적 서비스는 개인의 ‘구입 능력’이 아니라 ‘생활 필요’에 맞추어 제공되어야 한다”(384)는 그의 참으로 멋진 말은 “고타강령 비판”에서 “능력에 따른 생산과 필요에 따른 분배”의 미래 세상을 그렸던 맑스의 인식을 사회공공 서비스의 영역으로 도입하여 현재의 “시장화∙이윤화 대항투쟁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현시기 노동운동이 설득의 논리를 개발하는 데에, 그리고 진보정당이 재구성을 통해 언젠가 다시 도약하는 데에 있어 사활이 걸린 과제라고 생각한다.

긴장과 약간의 아쉬움
서로 다른 지은이들의 여러 글들이 실려 있고, 상당수의 글들이 이들의 더 큰 저작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초점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책 전체의 짜임새는 근래 본 국내의 편집서 중에서 꽤 훌륭한 편이다. 그런데 글들마다 약간의 긴장이 엿보이기는 한다. 제도성 게임과 전투성 게임을 동시에 슬기롭게 사용해야 한다는 조돈문과 전투적 노조주의는 당시 노동운동의 합리적 대응 결과였다는 노중기 사이에는 극한적인 의견 차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긴장을 감지할 수 있다. 또 개별 글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김성희의 글은 비정규직의 비중 변화라는 측면에서 1980년대 중반이 결정적이었다는 중요한 주장을 제시하면서도, 주요 내용을 각주에 나온 저서를 참고하라는 식으로 넘어가는데, 너무 불친절하다. 신병현은 노동자 계급 형성 과정에서 선진활동가 문화가 노동자 대중문화와 유리되어 엘리트주의로 빠져 하위문화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적 장소들이 사라졌다는 점을 잘 분석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현장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소를 형성해야 한다는 그의 결론은 다소 안이하게 느껴져서 용두사미스러웠다.

이수봉의 글은 도입부터 행간의 뜻을 읽어 달라며 필자로서 독자에게 참으로 무례한 부탁을 하더니, 다소 중구난방으로 느껴지는 글을 썼다. 전반적으로 “짱나”(238)는 글이었는데, 결론은 이거다. “정규직의 이해 관계와 결부된 사회구조 자체의 근본적 변혁, 이른바 혁명을 [정규직 노동자] 자신의 이해로 설정할 수 있다”(254)고. 물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또 민주노총 중앙과 현장 노동자 사이에 끼어 열심히 살고 있는 정규직 현장 활동가들을 탓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이수봉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이진경과 네그리 식의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여 하는 말이 고작 이거라면, 이수봉은 이진경과 네그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난 별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노동의 자본에 대한 형식적∙실질적 포섭을 넘어 “활동 일반이 자본에 의해 기계적으로 포섭”되어 (노동 과정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인간 활동으로부터 자본이 “사회적 잉여가치”를 추출한다는 이진경의 핵심 논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이진경의 논리는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하는 공공연금 조성을 요구하는 오건호의 논리와 훨씬 더 잘 부합한다. 오건호와 이수봉의 글 사이에는, 조돈문과 노중기 사이에 존재하는 실강이 아니라, 태평양 바다가 존재하는 것처럼 읽힌다. 이수봉의 요구대로 행간을 읽자면, 내가 마음이 비뚤어져서 그런지, 민주노총 중앙 책임자의 변명으로밖에 안 읽힌다. 정말 힘들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편히 앉아 투정하듯 비판하는 것이 참으로 호사스럽게 느껴져 정말 죄송하다. 그렇지만 이수봉이 요구하는 징후적 독해를 통해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민주노총 중앙의 변명, 그리고 민주노총이 직면하고 있는 갑갑한 현실과 그의 욕망 사이의 괴리와 그것의 힘겨움일 뿐이다.

사족
나는 ‘노동해방’을 믿지 않는다. 그건 ‘천국’과 같은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이 맑스의 저작에 거의 안 나오듯, 천국에 대한 언급도 성경에 거의 안 나온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깡패짓을 하고 있는 일부 광신도들을 시민들은 외면한다. 혹 “노동해방” 구호도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은 유한자로서 인간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을 찾고 종교에 귀의한다. 혹은 정말 훌륭한 인품을 지닌 종교인을 만났을 때 그를 따른다. 노동자들은 나약한 개별 노동자로서 억울함에 처했을 때 단결하여 계급 운동을 전개한다. 혹은 훌륭한 노동운동가를 접했을 때, 노동운동에 대한 의혹을 조금씩 거둔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노동해방이 있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천국이나 노동해방은 내부자의 동원에는, 특히나 한 때 내부자였다가 동요하는 이들을 다루는 데에는 아주 약간의 효과를 얻을 지 모르지만, 외부자의 설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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