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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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라는 시어를 보면 나는 이성복 시인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단연 돋보이는 시어가 아니었던가.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그해 가을」, 「1959년」 등등. 이성복의 ‘그해’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그날」)아하는 삶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정확한 지점이 있었다. 이제 '그해'는 박준으로 더 기억되는 시대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박준의 ‘그해’는 미인과 관련된 지극히 개인적인 시공간에만 쓰인다. 시공간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없음’의 지대다. 미인이 영영 떠나 화답을 바랄 수 없는 화자가 추도 연서(戀書)를 보내는 제사(祭祀)의 영역이다. 있었던 일이었지만 결코 완료는 되지 않을 것이기에 좋았었다고 말하지 않고 ‘좋았을’(「마음, 고개」, 「가을의 제사」)이라 말하고, ‘좋을’-‘들어가고 있을’-‘도착했을’-‘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숲」) 것이라는 가정 시제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물건을 새로 뜯지 못하는”(「잠의 살은 차갑다」) 버릇이 몸가짐처럼 되었다 말하듯이 죽음과 깊은 상실을 복기하는 특성은 박준의 독특한 시적 정황이 되었다. 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읽은 독자라면 더 잘 이해할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이 나오기 전에 나왔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산문집에서도 느꼈지만 그 특성은 이제 바깥을 보듬는 힘으로 더 넓어졌다. 가족부터 마을 사람들까지 두루 살피며 음식을 나눠 먹는 풍경이나 '새끼 거미'(백석「수라(修羅)」)가 가족을 잃을까 염려하던 백석 같은 그런 마음 말이다.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안과 밖」), “쌀은 평소보다 조금만 씻습니다”(「좋은 세상」-영아)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말이 박준의 시에서는 빛이 난다. 그는 어떤 빚이 있어 이런 빛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이 비슷한 상황을 우린 레이먼드 카버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도 만난 적 있다.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빵집 주인이 따뜻한 롤빵을 건넸고 그들이 그것을 먹으며 잠시나마 기운을 차리던 것을. 백석, 허수경, 박준이 시에서 건네는 음식 풍경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면서도 주변과 읽는 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과잉된 내적 발화와 온갖 작법의 실험으로 가득한 작금의 시들 속에 박준의 시가 이렇듯 인기를 끄는 것은 자신과 주변을 동등이 그리고 잔잔히 살피는 이 마음 씀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말을 하고 있음에도 박준의 시에서는 들으려는 귀가 더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인 거 같다. 그가 쓰는 형용사와 부사만 봐도 늘 대상을 더 살핀다. “불을 피우기 미안한(형용사) 저녁이 삼월에는”(「삼월의 나무」), “겨우(부사)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로 오고”(「84p」), “가. 그냥 가지 말고 잘(부사) 가.”(「사월의 잠」) 등등. 읽은 이를 놀라게 하고 뽐내며 이기려고만 드는 멋진 수사와 문장들은 사실 읽는 이에게 스트레스다. 세상과 문제점을 비판하긴 쉽지만 편안히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문장이야말로 한 수 위다. 이것은 어떤 시적 기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다. 이것은 몸가짐이고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배운다고 하고자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럴 수 있기까지의 시간과 경험을 모두 똑같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에게 시에게 요구만 할 게 아니라 시를 문장을 읽는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 좀 해보자. 시에 놀라운 발견과 전이(轉移)만 요구할 것도 아니고, 공감을 채워주는 서정만 바랄 것도 아니다. 혼잣말을 출판까지 할 이유가 없는 이상 시도 근본적으로 상대에게 전하는 말이다. 죽은 이에게 더 공손하듯 편지로써 더 공손하듯 시에서 시를 통해 더 그러하려는 박준은 한국시에서 귀한 미인(美人)이다. 자신의 말이 진정 바라는 사람됨을 전하고 있는지 마음을 담고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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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12-23 22:24   좋아요 0 | URL
남들보기에 제가 좀 오락가락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요ㅎ;; 어떨 땐 어려워도 매우 좋은 책이 있고, 어떨 땐 남들은 별 매력 못느끼는 평범한 책이 매우 좋을 때가 있어요^^; 제 감상을 적어나가며 나는 이런 게 좋았구나 정리하는 거지 제가 누굴 평가하고 요구할 만한 대단한 능력자는 아니죠;;;
응원 늘 감사하고 따뜻한 겨울되세요^^♧

서니데이 2018-12-19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AgalmA 2018-12-23 22: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당연히 서재의 달인이실 테죠.
서재 활동을 부지런히 못해 여러가지로 소원했는데 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12-20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