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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의 ‘링컨’은 중의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열한 살에 사망한 소년 윌리 링컨의 영혼과 많은 사람들을 남북전쟁의 죽음으로 인도하는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소년의 장례식 하룻밤에 머문 묘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에 ‘바르도의 윌리 링컨’, ‘두 바르도에 있는 두 링컨’ 등 여러 가지 해석거리들이 나온다.
티베트 불교 용어인 ‘바르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죽음과 연옥의 상황을 다룬다는 걸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바르도’는 핵심 용어인데, 바르도는 ‘티베트에서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물게 되는 중간상태’를 일컫는다. 이 책은 사후세계에서 환생하기까지 49일간 머무르는 영혼을 인도하는 절차와 영혼이 취해야 할 방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죽은 자들 옆에서 그들이 좋은 길로 갈 수 있게 이 책의 게송을 계속 들려준다.
(※참고로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채 사장이 이 책을 아주 좋아했죠ㅎㅎ;)
이 책에 대한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단테적인 미국판 유령 발라드” 평가에 동감이다. ‘바르도’란 단어가 강력하지만 이 소설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바르도의 링컨』에 대한 영향력은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더 강하다. 아마 『바르도의 링컨』에 대한 호불호도 그런 유사성에 기인할 것이다. 고전 서사시의 운문 형식으로 인해 낯설고 불편한 가독성, 환상 소설 양식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운 전개 방식,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르포적인 글이 아닌 영혼들의 카니발리즘이 더 조명되는 데서 오는 실망 등등. 『신곡』은 보르헤스가 책 얘기만 하면 꺼낼 정도로 평생 극찬했는데, 인간이 죽음과 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한 이 책의 입지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 같다. 내가 『신곡』과 『바르도의 링컨』에서 느낀 유사점은 다음과 같다.
『신곡』은 단테가 42세이던 1307년경 쓰기 시작해 사망 직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열린책들 『신곡』 해설에 따르면, 단테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자기 작품을 대비되는 <코메디아comedia(희극)>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분석하는 <비극>이 고상한 주제와 인물, 문체를 다루는 것과 대비되게 그는 저승 여행이라는 세속적인 주제를 다뤘고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냈기에 그렇다. 또 단테는 중세 유럽 문인들이 쓰던 고상한 라틴어 문체가 아니라 피렌체의 민중의 언어인 <속어(俗語)>로 작품을 썼다. 『바르도의 링컨』에 나오는 영혼들이 쓰는 많은 속어, 비속어들은 현장감을 살리면서 작품의 리듬을 한껏 살리고 있다. 『신곡』이 기하학적 치밀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조지 손더스도 『바르도의 링컨』에서 영혼들의 어지럽게 토해내는 지껄임(서사시의 코러스와 유사)과 쌍을 맞춰 현실 속에서도 그런 대비 쌍(신문 기사, 인터뷰 글, 에세이, 편지 등등)을 가져와 배치했다. 소설을 서사 구조로 읽는데 길들여진 독자는 이런 불협화음 같은 형식이 매우 불편할 것이다. 유령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 낯선 형식을 즐긴다면 이 소설 읽기가 더욱 풍부해질 텐데…….
1290년 스물네 살에 사망한 첫사랑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단테는 『신곡』에서 그녀를 천국으로의 안내자로 그린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가장 사랑한 아들인 윌리 링컨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총명한 아이였다. 영혼이 된 윌리는 묘지에서 비루하게 머물고 있는 영혼들에게 ‘우리는 모두 죽은 자들’이며 죽음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가야 한다고 이끄는데 『신곡』에서 천국의 안내자였던 베아트리체 역할과 비슷하다. 윌리의 죽음은 아버지 링컨이 내전에 동원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심정을 제대로 통감하며 남북 전쟁의 대의를 재점검하는 계기로도 작동한다.
14세기 단테의 여러 상황이 19세기 초의 윌리 링컨과 에이브러햄 링컨과 오버랩되는 게 있어 흥미롭다. 윌리 링컨은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사망했는데 단테는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사망했다. 정치 생활에서도 단테와 에이브러햄은 어려운 처지였다. 단테는 피렌체 당파 싸움에 휘말려 정치적 망명을 해야 했고 평생 망명생활을 하면서 『신곡』을 썼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외모 폄하, 정치적 암투, 이해받지 못하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여러 상황에 대해 이 소설은 빠르게 전달한다. 윌리 링컨이 병에 걸렸을 때 공식 만찬을 열었던 것도 심한 조롱거리가 되었다. 가장 심한 것은 “워싱턴의 ‘갭 앤드 주스트’라는 쓰레기 신문에 만화가 실렸는데, 링컨 부부는 샴페인 잔을 들이켜고 소년(눈 대신 작은 X자가 그려져 있었다)은 열린 무덤 안으로 들어가며 “아버지, 나를 보내며 한 잔?”하고 묻는 내용이었다.”(p345) 어린 윌리가 사망한 즈음 북군의 사상자가 최대였던 도널슨 전투 사상자 명단이 발표되면서 여론은 매우 좋지 않았다. 작가는 당시 링컨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그린다.
“이 아이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그런데도 그 무게 때문에 내가 곧 죽을 것 같아.
이런 슬픔을 밖으로 밀어냈어. 한 삼천 번쯤. 지금까지. 오늘까지. 산더미. 같은 아이들. 누군가의 아이들. 그걸 계속해야 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라면 레버를 당길 수도 있지. 하지만 여기 내가 만들어낸 것의 한 소중한 예가 있잖아, 내 명령으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어떻게 하나. 중지시켜? 그 삼천 명을 손실 구덩이로 던져 넣어? 그러고서 평화를 간청해? 항로를 거슬러올라가는 위대한 바보, 우유부단한 왕, 영원한 웃음거리, 엉거주춤한 시골뜨기, 교활한 변절자가 돼?
이건 통제 불능이야. 누가 이걸 하고 있는 거야. 누가 그 원인이야. 누가 나타나서 이게 시작된 거야.
나는 뭘 하고 있지.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p221)
죽음 이후의 모습을 다루는 『신곡』과 『바르도의 링컨』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떤 식으로 지상을 마무리하며 떠나는지를 상상력으로 채워야 했기에 그 묘사에서 대단한 독창성을 발휘한다. 단테와 조지 손더스의 차이는 인물들에서 극명하다. 단테 『신곡』이 여행자가 관찰하는 영혼으로 소극적으로 묘사했다면, 조지 손더스 소설의 영혼들은 이 소설의 첫 시작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소설을 가득 채울 만큼 능동적이다. 바르도의 영혼들은 가톨릭이 연옥에 머무는 이유를 가리키는 일곱 가지 대죄인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방탕이라는 고전적 이유를 초과한다. 대부분 자신의 죽음과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 미련과 혼란 상태다. 흑인이라서 숱한 강간을 당했던 소녀에게 어떤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죽어서까지 흑인과 백인으로 나뉘어 차별하는 상황이라면 죽음과 현실이 뭐가 다를까.
바르도는 종교적이지만 조지 손더스는 영혼들을 죄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동등한 인간이었다. 그 중 로저 베빈스 3세와 한스 볼먼의 캐릭터 설정이 특히 맘에 들었다. 그들의 독특한 외양, 윌리 링컨이 이곳에서 고통받지 않게 도우려는 행동, 선행 뒤의 변화 등이 영화 장면처럼 그려지는데 이 소설에서 재밌는 장면들은 대개 이들에게서 나온다. 청렴하게 살았을 애벌리 토머스 목사가 왜 연옥에 머물러야 했는지 그 비밀을 추측해보는 것도 재밌는 설정이다. 영혼들이 그들에게는 불길하게 나타나는 빛, 그들에게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존재들의 영향으로 바르도를 떠나는 상황, 이곳에 머물며 파괴되어가는 모습 등은 현실 속 삶의 모습만큼 다양하고 절절하다.
"사실, 우리는 지루했죠, 아주 지루했죠, 계속 지루했죠." - 로저 베빈스 3세
"매일 밤이 참담하게도 똑같이 지나갔습니다." - 한스 볼먼
"우리는 그때까지 모든 나무의 모든 가지에 앉아봤어요. 모든 묘석을 읽고 또 읽었어요. 모든 길, 소로, 잡초가 우거진 길을 걸어봤고(달려봤고, 기어봤고, 거기 누워봤고), 모든 내를 건너봤어요 이곳의 네 가지 독특한 유형의 토양의 결이나 맛에 대한 포괄적 지식을 갖추게 되었어요. 우리 동포의 모든 머리 모양, 복장, 머리핀, 시곗줄, 양말, 멜빵, 허리띠의 철저한 물품 명세를 만들었어요. 나는 볼먼 씨 이야기를 수천 번은 들었고, 안됐지만, 나 자신의 이야기도 적어도 그만큼은 했어요." - 로저 베빈스 3세
(p178)
이 소설의 출발은 한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죽은 아들의 납골당에 자주 찾아가 그 주검을 안아주었다는 기사를 지인이 조지 손더스에게 전하는 순간 그는 링컨 기념관의 링컨 좌상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합쳐진 이미지를 떠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이미지는 구도 상으로 매우 흡사하다. 링컨 부자의 숭고한 모습은 소설 속에서 유령들을 깨우고 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유령들이 몰려드는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윌리와 에이브러햄 링컨은 서로를 결코 느끼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난다. 두 사람을 통해 많은 유령들이 죽고 살 의지를 가졌던 것과 달리. 삶과 바르도는 구조만큼 복잡하고 이상한 겹침의 미로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먼 길을 선택하면서도 어떤 존재로 있든 삶을 갈망하고 사랑하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향하는 방향이 죽음인지 삶인지 제3의 길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4세기에 단테가 그랬고 21세기 조지 손더스가 그렇듯 우리는 끝없이 이것을 이야기한다. 이 모든 건 우리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