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그림 - 우리는 모두 무너진 적 있다

우리는 무서운 그림을 왜 그릴까요.

그 원인으로 화가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 우울증을 동반한 정신병을 자주 거론하기도 하죠. 사람에 따라 매우 큰 요소이기도 할 겁니다.

저는 더 큰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성 본능(에로스)과 자기 파괴를 향한 죽음 본능(타나토스)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죠. 기질적으로 어두운 이미지를 더 좇는 사람도 있겠고, 상황이나 환경, 병으로 인해 타나토스 성질이 우성(優性)으로 표출될 수도 있겠죠.

아름다움을 즐기고 추구하는 만큼 어두움을 즐기고 추구하는 심리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이리언을 디자인한 Hans Rudolf Giger의 작품들에서 두 성질의 연결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Hans Rudolf Giger (Swiss. 1940-2014)

Alien Monster

 

 

 

무서운 그림에 대한 터부와 혐오는 그간의 예술 환경 요인도 따져 봐야 합니다. 감각보다 이성을 중시한 인류가 도덕적 잣대로 아름다움을 善으로 보려 했다는 점은 간과되어서 안 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바니타스(Vanitas, 덧없음) 같이 종교적 관념도 합세하죠. 공포를 이용한 회화와 전통이 꽤 오래 이어져 왔습니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는 서사가 아니었다면 기독교가 그토록 강력한 힘으로 작동했을까요. 인간의 가장 큰 공포인 죽음을 거머쥔 힘이죠.

 

종교적 영향과 반대로 살펴볼 면도 있는데요. 예술은 늘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고 표현하려 했습니다. 현대 들어 더 강력해졌죠. 종교의 힘이 약화되고 인간과 개인의 지위와 표현의 자유가 커진 영향도 있을 겁니다.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죽음과 불멸은 인간이 관심을 거두지 못하는 영원한 주제입니다밝든 어둡든 아름답든 추하든 알 수 없는 이미지와 힘에 끌리는 건 인간의 본능이며 이 자체가 예술의 속성입니다. 

  

가치 판단의 문제도 있습니다. 실물 그대로를 추구하는 미메시스 사상이 우리 환상일 뿐이라는 게 드러난 지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회화가 사실에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좋다고 여겨왔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형태와 색이 뭉개진 인상파 그림이 등장했을 때 얼마나 멸시를 당했나요. 존재하지 않는 무서운 재현을 시도하는 그림은 더욱 좋아할 수 없겠죠.

 

좋은 작품은 불쾌하거나 무서운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창작자도 수용하는 우리도 이 비밀스러운 그림들에 대해 극복하려 하고 조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수긍할 수 없더라도 무서운 그림의 존재 의미는 있을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미술가의 창조력을 극구 칭찬한 바 있다. 회화를 예찬하는 찬송가 『파라고네(Paragone)』가운데에서, 그는 화가를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의 태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주(主)'라고 부른다. "만약 화가가 자신이 사랑할 만한 미인을 보고 싶다면, 그는 자기 힘으로 그들을 불러낼 수가 있으며, 만약 무섭거나 어리석거나 우스꽝스럽거나 정말 동정할 만한 괴물들을 보고 싶다면, 그 자신이 그들의 주군이며 신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위 글에서 다 빈치는 화가의 창조력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미인을 그리는 것과 괴물을 그리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뭔가 얘기를 하다 마는 거 같은데, 이후 얘기는 공부를 더 해야 구체화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쯤에서 마칠게요. :)

ㄱ님이 궁금해하는 회화와 심리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은 아마도  E. H. 곰브리치《예술과 환영》 아닐까 싶습니다. 덕분에 저도 잊고 있던 이 책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Gheyn, Jacques (Jakob) de II (Dutch, approx. 1565-1629)

"Death and the Woman", 1600, pen

 

 

 

 

 

 

Artemisia Gentileschi(Italian, approx. 1593-1653)

"Judith Slaying Holofernes", 1612-21

 

 

 

 

 

Henry Fuseli (Swiss; practiced in England, 1741-1825)

"Nightmare (The Incubus)", 1781-82

 

 

 

 

 

 

Odilon Redon(French,1840-1916)

"Caliam" , 1881

 

 

 

 

 

 

Leon Spilliaert (Belgian, 1881-1946 )

"Autoportrait au miroir",1908

 

 

 

 

 

 

Zdzislaw Beksinski (Poland, 1929-2005)

 "Embrace"

 

 

 

 

David Lynch (네, 그 영화감독)

"Man Talking", 나무패널에 혼합재료, 68.58×78.74c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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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5-30 07: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음, 요즘같은 시대에 아름다움을 선으로 보는 관점과 선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관점 중, 어느 쪽이 더 많은(혹은 큰) 문제를 야기할까요??

AgalmA 2017-05-31 04:12   좋아요 5 | URL
˝예쁘면 다 돼˝라는 표현도 있듯이 일상에서는 아름다움과 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 기준이 많이 붕괴되어서라고 볼 수도 있겠죠.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견이 나올 수 있고 상대적인 거다! 말하면 더 진척되기도 어렵죠.

아름다움보다 선이 좀더 골치아픈 개념 같은데요. 아름다움은 정적인 느낌이 강한데 선은 동적인 행위의 힘이 더 실린다고 생각합니다.

구제하려는 선한 행위가 의존성 낳는다 비난도 하지 않습니까. 이 경우에는 선을 아름답게 보지 않는 예라고 할 수 있겠죠.

요즘 팩트, 팩트 엄청 따지는데 같은 팩트로도 서로 다르게 보거나 서로 다른 팩트로 이게 진실이다 말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결국 케바케가 답이 되는 것 같다는...

흡족한 답은 못 드린 거 같지만 흥미로운 질문 주셔서 재밌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5-30 08: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AgalmA님 덕분에 그림에 나타난 공포, 환영 또는 추(醜)의 이미지와 배경에 대해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네요. 저도 AgalmA님의 그림을 보다가 보니 어두운 이미지를 그리는 화가의 심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화가는 어두운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을 외면으로 형상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와 같이 외면으로 형상화시키면서 내적 안정을 느끼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제가 그림을 못그리는 관계로 추측만...ㅋ) 그렇다면, 화가는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느끼겠구나...(정말 그런가요?) 반면, 감상자는 결과만 보기에 어두움만 보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조금 더 나가서, ‘음악/문학 감상‘은 작가와 감상자가 과정-결과를 공유하는 반면, ‘미술 감상‘은 결과만 보여지기에 감상이 더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어요..ㅋ AgalmA님의 그림 덕분에 여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다만, 앞으로 무서운 그림은 납량 특집으로 부탁드립니다..ㅋㅋ 뉴스공장과 함께 즐거운 아침 보내세요.

AgalmA 2017-05-30 08:51   좋아요 3 | URL
이 글에는 안 올렸는데요. 괴기스러운 그림의 대가로 잘 알려진 프랜시스 베이컨 경우는 카타르시스적 창조보다 이념적 표출에 더 가깝기도 해요. ‘고통받는 인간은 고기다‘ 하면서 인간을 정육점 고기처럼 전시한 그림들이 상당히 많죠. 이 글 본문에서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인용한 내용에 더 가까울텐데, 일명 무서운 그림 제작자 상당수는 세계를 전복하는 창조자로서의 역할에 더 심취했던거 같아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 경우만 해도 창조로 인한 갈등이 더 크죠. 카타르시스는 그린 뒤에 오는 것이지 선제 조건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니까요.
겨울호랑이님은 심성이 고우셔서 너무 좋은 쪽으로 보시는 거 아닌가요ㅎ 뭐, 제가 삐딱하게 보는 거랄 수도 있겠죠ㅎ;
그럼 전 이만 취침/
즐거운 하루 되세요^.^

cyrus 2017-05-30 0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빈치의 스케치북에 보면 여러 개 그려진 그로테스크한 얼굴 그림이 있어요. 그렇다면 다빈치는 자신이 말한 대로 ‘신‘이 되었군요. ㅎㅎㅎ

기거의 그림을 보면서 달리가 창조한 이미지가 생각났어요. 달리는 인간의 신체 부위를 길게 늘어뜨려서 그렸거든요. 그 형체가 음경을 닮았어요. 달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대상을 에로스(달리의 연인 갈라)와 타나토스(형의 죽음)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요.

AgalmA 2017-05-31 03:53   좋아요 0 | URL
다빈치 스케치들 보면 신이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 때 고심하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죠ㅎ

달리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대상을 잘 잡아 내셨네요. 달리 그림은 거의 대부분이 성적이죠. 특히 그런 화가들이 있습니다.

2017-05-30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5-31 03:55   좋아요 1 | URL
댓글로 간단히 쓰기가 어려운 주제더라고요. 재밌기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자니 머리가 아프기도 했죠. 이렇게 한 번 정리해보고 다음에 고쳐나갈 기회가 또 오겠죠^^ 감사합니다.

2017-05-30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음 글남깁니다. 만들어낸 작가들의 노력과 작품과는 별개로 보는이는 거기에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은 좋은게 아니지 싶기도 합니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느낌이 강하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도 있구요.

물론, 직업적으로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라면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읽을 글이 정말 많군요!

AgalmA 2017-05-31 04: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산 너머 산이 되는 비평류 별로 안 좋아하는데 생각을 풀어나가다 보면 구덩이 파기가 되더군요ㅎ;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어떻게든 풀지 않으면 답답해서요; 염려와 당부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이 좀 많죠ㅎ; 즉흥적으로 쓸 때도 많은데 되도록 허투로 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2017-05-30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6-06 16:39   좋아요 1 | URL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했어요.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고 지금 제 생각을 정리해 보는 기회였습니다. 역시 부족한 게 많더군요.

생활의 욕구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물질적으로 그걸 풀려고 하는 건 삶의 수순 같기도 합니다. 폭력물, 선정물로 효과적인 대리만족으로 끝낸다면 좋을 텐데 선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꼭 있죠. 초자아의 제어 미숙만의 문제는 아니겠죠... 이것도 한 번 생각해 볼 거리인데 이 생각으로 또 밤샐까 겁나서 다음으로^^
늘 좋은 말씀과 생각거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