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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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을 쓴 서영채 평론가는 이 책을 두고 “지적인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것을 통한 공감력이 포스트 계몽 시대에 유효한 새로운 계몽의 양식일 수 있으리라”고 마무리했다. 최은영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안다. 최은영 작품이 보여주는 따뜻한 유대의 정서와 온기가 지금 문학에서 간과되거나 희박한 것들이라는 암시다. 우리는 더 참신함, 독창성, 사회 비판적인 책임 의식까지 지닌 전투적이며 영리한 소설을 계속 요구해왔다. 이건 한국 문학의 경향만도 아니다. 어디 어디 문학상을 받은 소설을 선전할 때 저 요구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니까 말이다. 최은영 작품들은 자체의 의미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위치에 있어서 지금, 바로 지금 더 의미 있다. 최은영 작품을 읽기 전까지 이 중요한 실종을 잊고 있었다.    
    

 

 

이 소설집을 읽기 전에 도스또예프스키 『백치』를 읽었다. 두 작품을 나란히 읽은 것은 아프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내가 받은 인상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역부족을 느끼며 이 글을 쓴다. 도스또예프스키는 『백치』를 러시아가 아닌 해외에서 구상하고 집필까지 마쳤다. 유물론과 과학적 합리주의, 니힐리즘의 팽배 그러한 서구 유럽의 영향 속에서 혼란스럽고 병들어 있는 러시아와 인간의 회생을 꿈꾸며, 도스또예프스키는 고심 속에 ‘백치’라는 상징적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모두가 너무 쉽게 얕잡아보고 이용하려 들며 비웃지만, 미쉬낀은 가난한 기사이자 돈키호테이고 유로지비이자 러시아적인 그리스도이며 백치라서 모두를 사랑하려 했고 누구라도 마침내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모두가 자기의 이익과 사상을 내세우기 급급할 때 미쉬낀은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쪽을 기꺼이 택했다. 모두가 창녀라고 멸시하는 나스따시야의 영혼을 살폈고 결혼으로 구원하고자 했고, 살인자를 사형함으로써 대갚음하는 사회가 되는 것에 분노했고,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에게도 사기를 치는 이에게도 우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누구와도 적도 라이벌도 원수도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가장 닮지 않은 로고진의 죄의 현장에서 눈물 흘리며 아파하다가 영영 백치가 되어 버린다. 누구보다 강력한 매력에도 작품에서 가장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백치 미쉬낀의 ‘희생과 환대’의 의미는 이 현실에서도 아직 유효하다.
    
도스또예프스키는 『백치』를 완성하기 두 해 전인 1867년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을 읽고 ‘최근 10년 동안의 세계 문학 작품 중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도스또예프스키는 『백치』에서 여성의 인권에 대해 자주 거론하며 주인공 중 하나인 나스따시야가 자주적인 여성의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에 공을 많이 들였다. 하지만 보바리 부인처럼 나스따시야도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고 만다. 한 마디로 요약하기 곤란한 대작들을 이렇게 스케치하는 것은 매우 빈약하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도스또예프스키가 소설을 쓰던 즈음에서 지금 최은영이 소설을 쓰는 이 시기까지의 흐름을 보려는 것이다. 리얼리즘 문학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반영할 수 있다고 여기며 계몽이나 오락의 수단이 되는 것에 부응했다면, 20세기에 들어서며 과학과 기술의 지나친 영향력, 세계 대전을 목도한 모더니즘 문학은 정치, 사회, 종교, 도덕, 과학 전 분야에 이의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문학의 특징인 주관적 경험과 실존적 개인주의, 예술적 탐구는 필연적 수순이었다고까지 생각된다. 역사에서 필연 운운은 손쉬운 계산법이지만 빈자리를 채우는 과정을 보는 것은 이런 기시감을 일으킨다. 『보바리 부인』도 『백치』도 당시 문학 사조에 국한해 보기 어려운 여러 특징들을 함축하고 있다. 고전이라는 무소불위의 힘 때문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가지는 물음표들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보바리 부인은 물론이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아직도 우리 주위 인간의 모습이다. 어째서 인간의 행복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토록 어려운가. 왜 백치 미쉬낀은 모두가 필요로 하지만 여전히 누구도 쉽사리 될 수 없는 인간형인가. 그런데 지금, 내 눈에 최은영은 그들의 장점과 시대적 고민들을 계승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최은영 작품에 나타나는 인간의 곤궁한 처지, 하나의 해법이자 종교적이기까지 한 여성적 유대의식, 도스또예프스키가 『백치』를 통해 전달하려던 메시지가 곳곳에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도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씬짜오, 씬짜오」, 86쪽)


“곰의 이야기를 들을 때 엄마는 곰이 되어서 곰에게 이야기하는 이모의 모습을 봤다. 곰아, 밥 먹어. 그 말을 하고 엉엉 우는 이모의 모습을 바라봤다. 곰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면 이모는 세상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후로도 죽은 개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곤 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잃고 나서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던 이모의 모습을.
엄마는 이모를 사랑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100쪽)


““성경은 천국을 언급하지만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죠. 정직하게 말해서 그곳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인식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수사가 대답했다.
“인간의 인식이 제한적이라는 것에는 저도 공감해요. 하지만 상상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선 잘 모르겠네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도 있나요? 상상에 제한이 있나요?” 카로가 다시 물었다.
“글쎄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상을 하든 천국은 그 상상을 뛰어넘는 상태일 겁니다. 천국에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 천국은 영혼의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수사가 말했다.
(중략)
슬플 때, 불안할 때, 화가 날 때, 누군가가 내 마음을 쥐고 흔들 때, 나는 그 이름들을 그저 간절하게 불렀고,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현실의 고통에서 나를 분리시켜줬다. ‘원시지구’로 시작해서 ‘여러 종류의 발굽이 있는 동물’까지 중얼거리고 나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준 것 같았다. 그럴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중략)
“그 눈물에는 떠난 이들에 대한 감미로운 애정이 담겨 있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 아무런 조건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생활을 함께했다는 행복. 그 지속될 수도, 반복될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함께 존재했다는 행복. 그 눈물은 고독이 없었던 시간에 대한 애도였다.”
(「한지와 영주」, 179쪽)


“내가 병자도, 선배가 망자도 아니었던 그때, 우리는 아직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때.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다.
(중략)
노래가 끝나고 테이프가 회전하는 소리를 듣다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율라가 나를 보며 애써 웃고 있었다. 노래는 끝났고, 우리에게는 선배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유람선 난간에 기대서 다리와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주기로 했다. 그건 율라와 나의 첫 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
(「먼 곳에서 온 노래」, 210~211쪽)


“딸을 품에 안으면 모든 통증이 누그러졌고 다음날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났다. 세상의 누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밝고 예쁜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길 것인가.
그 시절은 갔지만 여자는 미카엘라에게서 받은 사랑을 잊지 못했다.”
(「미카엘라」, 221쪽)


아이들에게 아이다움을 때론 변덕스럽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든 속한 구성원으로서의 소임과 책임을 지우고, 문학뿐 아니라 무엇이든 이래야 한다고 각자의 요구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가 마음 둘 곳도 쉴 곳도 있을 리 만무하다. 누가 무엇이 우리를 어떻게든 해 줄 수 없다는 낙담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찾고 떠돈다. 그런데 여기 어떤 자리가 있다. 외톨이들이 만나서 서로를 치유해나가려는 세계, 언어와 나이와 성별 등 차이가 더 많은 인물들이 서로를 통해 보는 공간이 곧장 독자에게도 마련되는 자리, 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가 선뜻하지 못하는 앞으로도 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뉘우침과 사과와 용서, 배려 등 많은 정서들의 해변. 그래서 최은영의 작품이 모으고 발산하는 공감의 힘은 글로 이뤄진 이해타산적인 작법과 계산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결코 한자리에 모여 웃지 못하던 할아버지와 엄마와 주인공을 함께 찍은 쇼코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아주 오랜 시간 뒤에 아프게 그 자리를 툭 보여주듯 최은영 작품 속에서 고리들은 미약하지만 강렬한 감동을 준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사라져야 할 것들과 만나서는 안 될 사람과 일이 셀 수없이 많은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곳이 변두리가 아닌 중심으로 빛나는 곳에서 나도 당신도 웃는 모습이면 좋겠다. 그런 영혼의 상태일 땐 울어도 웃는 모습일 것이다. 하나하나 소중하게 이름 부르고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소설 속에서조차 어렵긴 하지만 우리는 죽을지언정 찾는 걸 포기한 적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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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06-14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영채 평론가의 저 말 와닿네요. 확실히 최은영 작가는 정서적인 것을 건드리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AgalmA 2018-06-16 10:16   좋아요 0 | URL
단점이나 한계도 보이지만 장점이 그걸 상쇄할만큼 강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곧 신간 나온다고 들었는데 어떤 식으로 발전하고 있을지 기대됩니다. 최근 <악스트>에 실린 단편 「상우」도 꽤 괜찮게 읽었거든요. 보통의 얘기인데도 잔상을 많이 남기는 매력의 작가인 건 분명해요.

겨울호랑이 2018-06-14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가면서 남들이 세운 벽, 우리가 만든 벽으로 인해 우리가 만나는 세계는 점점 좁아만 가는 것을 느낍니다.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이들은 처음 만나도 놀이터에서 곧잘 노는데 말이지요. 우리의 편견을 깨지 않는한 우리의 고립감은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AgalmA 2018-06-16 10:23   좋아요 1 | URL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매일 다짐씩이나 하며 임하는데도 참 쉽지 않아요~_~; 다 때려치고 싶고 죽일듯이 미워지는 게 또 삶인지라....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의 상처와 감정이 계속 나를 감싸고 있어 정말 쉽지 않고 괴로울 때도 많고요. 타인들도 이렇겠지요. 아파도 상처받아도 마음을 닫는 건 결국 모든 걸 포기하는 선택이 되겠죠. 그런 막다름에 다다르지 않게 서로 도와야하는데.....
저는 계속 ˝어렵다 정말 어렵다˝만 염불처럼 중얼거리며...~_~

겨울호랑이 2018-06-16 10:34   좋아요 1 | URL
저는 그냥 아플 때면 ‘아픈가보다‘ 하고 몇 번 혼자 토닥거리다, 곧 툭툭 털어버리는 것 같아요. 상처는 아마 저와 계속 있을 것이기에 부정할 수 없지만, 이 녀석은 좀 ‘관종‘인 듯 해서 평소에는 생까며 살아갑니다.ㅋㅋ 너무 단순하지요... ㅜㅜ

AgalmA 2018-06-16 10:40   좋아요 1 | URL
그 ‘툭툭‘ 능력을 제게 좀 파세요ㅜㅜ! 아픔은 제 세계의 중력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제가 중력의 속도를 벗어나는 괴력의 블랙홀에 강한 매력을-,.-; 저는 이런데서 단순하지요-_- 생활을 바꿀 생각은 않고 머리로만 좇아....에휴

겨울호랑이 2018-06-16 10:45   좋아요 1 | URL
뭐 대단할 것은 없고 영화 <메멘토 모리>에서 나오는 초단기 기억 저장 능력이라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머리가 복잡해질 때는 땀 흘리는 운동을 추천드려요^^:) 활기차게 땀과 함께 안 좋은 기억도 날려보내심은 어떠신지... 아니면 가까운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오래전 절판되어 만나길 포기했던 옛 친구와 뜻밖의 만남을 기대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AglmA님께서는 커피 좋아하시니 커피 있는 매장이 좋겠군요...ㅋㅋ 제가 더 신났네요...

AgalmA 2018-06-16 10:5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오전에 땀흘리고 운동하시고 지금 알라딘 오프매장에서 셀렉 중이신 거 아녜요ㅋ! 뭔가 상당히 경험적인 말씀이신 듯 하여ㅋㅋ 언젠가 알라딘에서 그 귀했던 사드 <소돔 120일>이 떼로 깔려 있던 거 보고 실소했던 기억 재밌었죠ㅎ 저는 주말에 일할 예정이라 어떻게든 짬을 내 놀 궁리를 하고 있ㅎ; 이게 인간이죠. 그쵸? ㅎㅎ

겨울호랑이 2018-06-16 10:54   좋아요 1 | URL
그럼요. 인생 뭐 있나요?ㅋㅋ 주말에는 힘들고, 주중에 틈을 내서 직장 근처 매장을 가는 편입니다.ㅋ 바쁘게 일 마무리하시고, 자신을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인생의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96
신철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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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라는 관계에서 원인인 나와 네가 그럴 의사가 없다면 제3자인 구원 투수를 기대하긴 어렵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상징적 의미가 그러하고 거기 다른 누군가를 둘 수 없듯이. 그럴 수 있었다면 종증조모처럼 아아머니나 어버니라 부르는 누군가 있었을 것이다. 역할극을 하듯 바깥은 그러하고 우리 안은, 누군가를 마음에 둔다는 것은 상대의 절대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가장 원하지 않는데도 들어오고 무너진다. 애초에 이 만남은 우리가 아주 먼 궤도를 도는 별들이라서 가능한 짜릿함이었는지 모른다.
"너와 나의 국경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외곽으로 가는 택시」)
    
우리는 공명통이었다. 아이가 자신을 보고 웃을 때 자연스레 마주 웃는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걸 진화적 사회본능이라고 차갑게 내뱉더라도 우리를 감싸는 온기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주고받음이 너무도 계산과 거래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그 감각을 많이 잃었다. 그만큼 우리의 공허도 절망도 커졌다.
“나는 너를 채우고 너는 내게서 빠져나간다./우리는 번지면서 더욱 뚜렷해진다”(「데칼코마니」)
“어제는 서로에게 몸을 주고 마음을 얻었다/오늘은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 몸을 잃는다”(「밤은 부드러워」)
    
“내가 얼마나 메말랐기에 너는 그처럼 밀려오는가”(「해변의 진혼곡」)처럼 사방은 너무도 건조해 모래가 이 시집 가득 휘날리는데, 더 이상 흩어질 곳이 없어 "그때부터 우리는 벽"(「벽」)이 되려 했다. 궤도를 따라 도는 행성처럼 움직이는 벽이다. 실밥이나 모래 같은 끊어지기 쉬운 결로 "점성의 독방"(「벽」)을 만들어 "하루종일 벽을 따라 걷는 독방의 수인"이 되는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지옥'(「검은 방」)만은 거부하기 위해. "어떤 짐승도 가만히 엎드려 재앙을 기다리지 않"(「단종」)기에.
    
이 시집엔 모래만큼 비만큼 가볍고 흩어지기 쉬운 "구름" 오브제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자연이다. 현실 속에 구름이 늘 떠있듯 꾸밈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봐야 할 정도다. "지구가 생기고 난 뒤 한 번도 멸종된 적이 없는 구름"(「무지개가 뜨는 동안」)과 우리는 무척 닮기도 했고, '지구의 자전의 속도로 흐르고 중력을 겪는 것'(「공회전ㅡ동식에게」), "살점을 떼어내며 형체를 잃어가는"(「기생」) 마지막도 마찬가지니 구름과 우리는 가족 같다. "서로의 등뒤에서 눈이 내려도 돌아볼 것 같지 않은 사람들"(「등과 등 사이」)이기도 하면서 "같은 표정에 도달해야만"(「기념사진」) 벗어날 수 있다는 듯이 모여서 웃다가 먹구름처럼 뭉쳐 한 덩어리가 되는 증오와 슬픔을 겪는 것도 변함없다. "링거줄 같은 비행운이 한참 공중에 떠"(「손톱이 자란다」) 있는 걸 보지 않은 자 없고 타인의 죽음을 겪어보지 않은 자도 없다.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슬픔의 자전」) 하듯 우리는 대체로 누구에게도 초대받지 못한 아이로 자라 어른이 되고,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연인 뭐가 되든 다 잃어서 처음 태어났던 순간처럼 혼자로 돌아간다. 어쩌면 성취가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잃고 슬퍼 봐야만 사람이 되는지도 모른다. 눈물과 물방울이 왜 이렇게 닮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과 마음속에 사람이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라고 말하는 「검은 방」 등 세월호 관련 시들, “우비를 뒤집어쓰고 등을 돌린 채 직사의 물대포를 맞고 있는 사람이 있다/ 죽은 물고기를 씻어내는 수돗물처럼 얼음 탄환이 쏟아진다"라고 말하는 「연기로 가득한 방」 등 집회와 투쟁 관련 시들은 이 세계의 모든 슬픔과 폭력을 직시하려는 마음속에서 탄생했다. 그의 2011년 등단작 「유빙」부터 그러한 징후가 가득했다. 앞서 얘기한 「검은 방」 과 「연기로 가득한 방」 이 이 시에 이미 계시되어 있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중략)…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ㅡ「유빙」
    
그럼에도 누가 누군가에게 천사도 구원 투수도 되지 못한다. 그런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것들이 모두 모이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잡는 것이 아니기에 우연이다. 내가 지금 당신의 한 손을 부여잡는다 해도 반드시 “다른 손은 빈손이 된다.”(「생각의 위로」) 그래서 우리는 왼뺨도 내밀고, 모두가 모두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기도도 한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우리는 암모나이트처럼 몸을 말고”(「구급차가 구급차를」) 밑바닥으로 낙하하길 바라기도 하고,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눈물의 중력」)이 되어 모든 통과를 거부하고 싶기도 하다. “손톱이 손등을 파고들 만큼 간절한 기도도/팔을 날개로 바꾸지는 못”(「구급차가 구급차를」) 했으니까. 그러나 울음이, 기도가, 투쟁이, 시가 이 행성을 구하고자 하는 공명통으로 해처럼 달처럼 나타나는 것은 중단되지 않는다. “체온을 잃지 않기 위해 점점 뾰족”(「밤의 드라큘라」)해지기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마음을”(「연인」) 보내고도 서럽지 않을 별이 되어야 하겠다. 사람이 되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한승석 & 정재일 - 자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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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6-10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좋네요!!^^

AgalmA 2018-06-14 16:23   좋아요 1 | URL
반갑네요! 저도 그장소님 좋아해요*-.-*)....난데없는 고백.
이 무슨 시츄에이션)))

[그장소] 2018-06-15 00:10   좋아요 1 | URL
ㅎㅎㅎ우리 사랑 이대로??? ㅎㅎㅎㅎ
 

촘스키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는 생득적 특성을 알아볼 수도 있지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도 있다. 일명 ‘변형 생성 문법’으로 불리는 언어학적 연산은 구조 의존적이다. 외적 표출을 위한 감각운동 접합면에 있지 않고 개념-의도 접합면에 있는 언어들이 그에 해당한다. 이에 따르면 의사소통은 언어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언어·사고의 대부분은 수면 아래에서ㅡ서로 다른 두 개의 대상에 외적으로 작용하여 또 다른 형태를 생성하거나, 하나의 대상 안에서 내적으로 작용하여 또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는ㅡ‘병합’을 하거나 어느 한 곳에서 발음된 구절이 그 위치는 물론이고 다른 위치에서도 해석이 되는 ‘전치displacement’ 속에 있다.
그렇다면 우연은 그런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인가.

 

 

“우리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말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내에 온갖 종류의 조용한 정보들이 흡수된다. 성별, 대략적인 나이, 사회 계층, 출생지, 심지어는 그 사람의 피부색까지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눈을 뜨고 마음속으로 그린 이미지가 실제의 인물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그 두 가지는 비교적 근접할 때가 아닐 때보다 더 많지만, 때로는 전혀 틀리는 경우도 있다.”
    
“그때까지 나는 항상 일반화를 하려는, 사물들 사이에서 그것들의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을 찾아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특별한 사물들의 세계로 뛰어드는 중이었고, 그것들을 말로 일깨워 즉석에서 감각적인 데이터로 불러내는 일은 내가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투쟁이었다. 에핑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플로베르를 시켜 자기를 밀고 돌아다니게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플로베르도 때로는 단 한 문장을 옳게 쓰려고 몇 시간씩 애를 쓰면서 골머리를 앓지 않았던가! 나는 사물을 정확히 설명해야 되었을 뿐 아니라 단 몇 초 내에 그 일을 해야 했다.”
    
“세상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로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입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뜻이 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 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얼마나 멀리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 거리는 6, 7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와 손실이 생겨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구에서부터 달까지의 여행이 될 수도 있었다.”


ㅡ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

 

촘스키의 생성 문법을 보여주는 문장이 가득한 『달의 궁전』을 읽으며 나는 하루키를 떠올리다가 심보선을 떠올리다가 연상의 동굴을 자주 만났다.
특히 심보선의 시 「브라운이 브라운에게」는 폴 오스터 『달의 궁전』 변형 생성 문법 같다.
심보선 시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끝날 일이지만 재미 삼아 인간의 특징답게 복잡하게 이 글을 쓴다.
두 작품이 연결되는 우연성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뉴욕 시가 배경, 주인공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에게서 자라다가 어머니 사망 후 고아가 돼 삼촌에게 길러진 가정 상황, 비밀스러운 뜻의 이름(Then Brown(「브라운이 브라운에게」), 마르코 스탠리 포그(『달의 궁전』)) 등등.  
    


두 작품 다 우연히 가지게 된 포춘쿠키의 문장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브라운이 브라운에게」에서 덴 브라운은 <희망은 그대 영혼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다>란 비관주의적인 문구를 발견하고 고객 관리 담당자에게 문의한다. 이 사건 추적 속에 덴 브라운은 행운의 메시지 작가와 불행의 메시지 작가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고안된 ‘불량품’이 오히려 장인적 고뇌의 산물”이라는 역설에 감동하며 자신이 사실 그 불행의 글귀들을 모으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작가 이름이 Brown Gee라는 것에서 필연을 느끼고 자신의 비밀을 말한다. 포춘쿠키 속에 불행의 메시지를 몰래 넣는 Brown Gee는 폴 오스터 『거대한 괴물』에서 폭탄 테러를 벌이는 아나키스트적인 인물 ‘삭스’ 소심 버전으로도 읽히는데, Brown Gee가 Then Brown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둔 채 이 시는 끝난다. 심보선은 우연을 우연인 채 남겨두려 한 거 같다. 그러나 폴 오스터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다.
    
    
『달의 궁전』은 마르코 스탠리 포그, 솔로먼 바버, 토머스 에핑 삼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은 서로가 가족인 줄 모르다가 사실을 너무 늦게 알게 된다. 마르코 스탠리 포그가 본 포춘쿠키 점괘는 포그 - 테슬라 - 에핑을 연결하고 있다.

 

“테슬라의 자서전인 『나의 발명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책은 원래 그가 1919년 〈전기 기술〉이라는 잡지사에서 출판한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문을 서너 페이지쯤 읽다가 거의 1년 전쯤 달의 궁전의 쿠키에서 나온 점괘와 똑같은 문장을 보게 되었다.
〈태양은 과거이고, 지구는 현재이고 달은 미래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쪽지를 지갑에 넣어 두고 있었는데 그 말이 테슬라, 에핑에게 그처럼 중요했던 바로 그 테슬라가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나에게는 그 우연의 일치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어 보였지만 정확히 어째서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마치 내 운명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 때마다 알아듣지 못할 말로 바뀌는 것 같았다. 중국의 점괘가 든 쿠키 공장에서 일하는 어떤 노동자가 테슬라의 책을 읽었던 것일까? 아무리 보아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그때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그 특별한 메시지가 담긴 쿠키를 고른 사람이 하필이면 왜 나였을까? 나는 그 일로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의 접합이어서 이상한 음모라든가 예견적인 신호, 전조, 찰리 베이컨의 세계관과 유사한 세계관 같은 어떤 미친 듯한 대답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테슬라에 관한 에세이를 그만두고 우연의 일치라는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지만 거기에서 많은 진척을 보지는 못 했다.”


ㅡ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려고만 한 포그,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재창조한 에핑, 포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혼돈 속으로 뛰어들었고 자신의 비대한 몸과는 다른 특별한 세계를 창조한 바버. 이 세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운이 좋았고 어떤 지점에서는 운이 없었다. 자신을 도와준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지만 상실을 자초하는 포그,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일확천금을 얻었음에도 불구, 맹인, 외톨이라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 속에서 산 에핑, 뛰어난 지성이 있었지만 초비만이라는 육체적 결함,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사랑이 죽음의 원인이 되기까지 한 바버.
포그가 공원에서 노숙인으로 살면서 깨달음에 이르는 장면과 바버가 자신의 육체를 받아들이는 장면, 황무지에서 은자의 동굴을 발견하고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에핑의 일화는 폴 오스터가 우연으로 배치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재창조되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아주 작은 포춘 쿠키만 하든, 공원이든, 황무지든, 머릿속이든.

 

 

“나는 전날보다 조금씩 조금씩 더 더러워지고 더 너저분해지고 더 혼란스러워져서 차츰차츰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과 달라졌다. 그러나 공원에서는 자의식이라는 짐을 지고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공원은 내게 문턱, 경계선, 내면과 외면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길거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식으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공원은 나에게 내면적인 삶으로 돌아가 순전히 내면적인 관점에서 나 자신에 전념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하늘을 가릴 지붕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내면과 외면 사이의 평정을 확립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원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어쩌면 그곳은 정말로는 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피난처가 없었던 내게는 그곳이 집이나 거의 진배없었다."
ㅡ 포그 편
    
“그는 낯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건 무시하고 구경거리가 되는 고통에 덤덤해지는 법을 배우면서 그 몇 달을 보냈다. 매일 아침마다 그는 러시아워의 유클리드 가를 따라 걸어가면서 자신을 시험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반드시 웨이예 공원으로 나가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입을 쩍 벌리고서 쳐다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자기에게 쏟아지는 눈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외톨이, 자신의 비틀거리는 의식을 헤치고 터벅터벅 걷는 둥근 달걀 모양의 단세포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효과가 있어서 그는 더 이상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혼돈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그는 마침내 솔로몬 바버, 내로라하는 중요한 인물, 자신을 극복하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가 되었다.”
ㅡ 바버 편
    
“나는 그걸 해 봤고 지금은 그게 모두 내 머릿속에 있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황무지 한가운데서 혼자 몇 달 몇 년 씩 살아 봤지…. 일단 그러고 나면 평생 동안 그걸 절대로 잊지 못해. 나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어.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로 돌아가 있으니까. 거기가 요즘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아무도 없는 곳 한가운데로 돌아가서……."
ㅡ 에핑 편

 

 

에핑은 바버가 자식인 걸 알았지만 만나지 않았고, 포그가 자신의 손자인 걸 알지 못했다. 알았기에 행복하지도 않았고 몰랐기에 불행하지도 않았다. 바버는 부재했던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듣고 분노도 행복도 느끼지 못했지만 포그가 자신의 아들인 걸 알고 행복과 슬픔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포그는... 연인 키티, 바버, 에핑에게 그는 늘 미숙한 자였다. 에핑처럼 외적인 성취로 자신을 위장하지도 못했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자기 삶의 미스터리를 집요하게 파헤쳐 역사학자로서 지적 성취를 이룬 바버처럼 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우리 대부분은 포그를, 덴 브라운을 닮았다는 것을.
우리는 브라운 지가 작성한 글귀를 다르게 작성할 수도 있고 덴 브라운과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태양과 지구와 달의 관계를 다르게 볼 수도 있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인식 한계 속에 있다. 촘스키는 인지 능력의 한계가 지식 추구의 걸림돌만 되는 게 아니라 뉴턴의 중력 발견이 그 이후를 뒤바꿔 놓았듯 전혀 다른 걸 발견할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우연이 필연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연히 발견한 것들이 우리 삶을 극적으로 바꿨던 것에 더 주목해야 하리라.

촘스키의 아나키스트적인 면모와 폴 오스터 세계 속에 아나키즘이 오늘은 특별하게 보인다. 우연하게도.
    
오늘 내게 온 포춘쿠키는 이 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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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6-03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의 5개 숫자는 로또 번호일까요? 5개까지 가르쳐 주고 나머지 1개를 안가르쳐 주는 것을 보면 1등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비극이 될 수 있음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됩니다.ㅋㅋ

AgalmA 2018-06-03 21:58   좋아요 1 | URL
네. 행운의 숫자래요. 로또 같은데 쓰라고 그런 듯ㅎ;
아이고, 겨울호랑이님 농담을 참 비극적으로 하시네요ㅋ

NamGiKim 2018-06-0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 책 읽어보고 싶군요.

AgalmA 2018-06-04 18:35   좋아요 1 | URL
아직 안 읽어 보셨다면 언어에 대한 책을 읽어 보시면 더 좋겠죠.
<촘스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는 촘스키의 최신작 <불평등의 이유> 읽기 전에 워밍업으로 읽은 건데요. 지금의 불평등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노력, 아나키즘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방향성이 어떻게 나왔는지 그림이 잡히더군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의미 아닌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레이트 헝거로 세팅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 단편에 없는 이야기를 더 추가해 메타포를 더욱 부각했다. 세상의 끝 이를테면 아프리카까지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 해미는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을 만나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얘기를 듣는다. 단순히 배가 고픈 자를 리틀 헝거,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를 그레이트 헝거라 칭한다. 앞으로 팔을 뻗어 춤추는 리틀 헝거는 무아지경 (삶의) 춤 속에 점점 팔을 위로 쳐드는 그레이트 헝거로 변모한다. 그레이트 헝거가 리틀 헝거가 되는 역방향도 분명 있겠지. 그러나 그것을 참을 수 있을까.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종수의 아버지는 그 역방향의 말로 중 하나다. 아내가 아이들을 두고 도망가게 만들고,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한다. 급기야 그는 감옥까지 가고 만다. 그에게 늘 의미는 자존심이었고 이제 금고에 꼭꼭 숨겨둔 수집 칼 정도로 남아있다. 
해미가 배우는 팬터마임도 하나의 의미 게임이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고 말하며 그녀는 허공에서 귤을 깐다. 하지만 그 말은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는 차마 없다고 생각할 수 없기에 거기 무엇이 있다고 지독히 생각한다. 공상허언증자들은 자신의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쉽게 믿도록 만든다. 종수는 해미로부터 전혀 모르는 기억들을 전해 듣는다. 학교 다닐 때 그가 해미에게 못생겼다고 한 게 유일한 말이었다는 것, 어렸을 때 해미가 우물에 빠진 걸 발견한 자신이 그녀를 구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는 소릴 듣고 어느 틈엔가 믿는다. 그녀의 말은 교묘했다. 죄책감을 유발하거나 구원자의 이미지를 씌워 상대를 옭아매는 강력한 언술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언어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자다. 문창과를 나오고도 어떤 소설을 써야 될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거짓이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그 속에 조금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해미는 아프리카 사막의 노을을 보며 죽는 건 무섭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종수는 그 말과 의미를 깊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의미는 그렇게 쉽게 종결되지 않는다. 성냥불을 긋듯 냉정한 한 마디가 날아온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은 그녀의 눈물을 보며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벤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위대한 개츠비가 그러했듯 비밀스럽게 살며 다른 사람의 의미를 하품하며 감상하는 자, 요리를 스스로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하며 즐기는 자,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2달에 한 번씩 의식처럼 태우는 자.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벗어난 그는 있다 와 없다 사이의 의미망과 다른 의미망이 있다. 

 

 

*

“그게 불필요한 건지 어떤지는 자네가 판단하는 거군.”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곳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비와 같은 거죠. 비가 온다. 강이 넘친다. 무언가가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합니까? 보세요. 저는 절대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전 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시 존재?”
“즉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도쿄에도 있고, 동시에 튀니스에도 있다. 야단치는 것도 저고, 용서하는 것도 접니다. 이를테면 그런 겁니다. 그런 균형이 있는 거죠. 그런 균형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물림쇠 같은 겁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스르르 풀어져서 말 그대로 조각조각 날 겁니다.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 존재가 가능해지죠.”

ㅡ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중 

 

 

도덕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도덕을 유지하기 위해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벤의 행동은 해미의 귤 까기 팬터마임과 같은 행위다. 벤과 해미의 차이는 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반면 해미는 극단으로 치우치며 균형을 전혀 잡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종수는?
벤과 해미는 가벼운 나들이 삼아 종수가 소똥을 치우고 있는 파주로 찾아온다. 노을 속에 대마초에 취해 옷을 벗고 그레이트 헝거처럼 팔을 들어 올려 춤을 추던 해미의 맘을 종수는 이해하지 못한다. 창녀나 그렇게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춘다고 그녀 뒤에서 지근거리며 쏘아붙인다. 이후 해미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해미를 사랑하게 된 종수는 그녀의 실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 번 생긴 의미는 쉽게 떨쳐 낼 수 없다. 의미의 야누스 같은 의심도 마찬가지다. 종수는 그의 집 근처 비닐하우스를 태웠다는 벤의 말을 의심한다. 그가 매일 새벽 서둘러 동네를 둘러봤기 때문이다. 종수는 벤에 대한 의심이 점점 더 커진다. 그녀 집이 낯설게 정리된 모습, 해미가 아프리카를 갔던 동안 종수가 밥과 화장실 청소를 맡았으나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고양이를 벤이 데리고 있는 듯한 느낌, 벤의 집 화장실에 여자들이 남기고 간 소지품 중에 종수가 해미에게 줬던 시계가 있는 것 등등 종수는 그녀의 실종을 벤과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 해미의 집에서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종수는 이와 다른 '동시 존재'가 되고자 한다. 벤도 사라지게 만드는 것.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무수한 대상 영역들이 의미장 속에 무한히 맞물려 있어 우리가 그것을 동시에 다루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의미장 안에 나타난다. 우리의 인식을 현실로 끌어낼 때 그것은 행위로 나타난다. 
최초의 뿌리는 종수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벤에 대한 시기와 좌절감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자신은 그녀의 집에서 몰래 수음을 하는 처지인데 벤은 원한다면 해미는 물론 어떤 여자도 유혹할 수 있는 능력과 여유를 가지고 있어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를 응징하는 처벌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벤을 죽이고 그의 페라리 속에 자신의 모든 옷을 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자신의 트럭으로 걸어간 종수는 다시 태어난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의미와 의심 속에서 재가 된 자. 스스로 빈 집이 되고 빈 우물에 들어가기를 선택한 자. 거기에 어떤 빛이 어떤 의미가 들어올까.  그 결말이 그가 쓰게 된 소설이나 상상일 뿐이라고 해도 그가 선택한 의미는 남는다.  
해미의 집은 남산 타워를 향해 있는 북향이었으나 낮 한순간 남산 타워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잠시 들어온다. 그곳에 머무른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희망의 빛으로 어떤 이는 너무도 부족한 빛으로 여겼을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후자이지 않을까. 그레이트 헝거. 지금 당신은 어떤가. 어떤 빛을 보는가. 어떤 의미를 꿈꾸는가. 당신의 의미가 당신의 삶이며 죽음이다.   

 

 

 

 

 

 

 

 

 

 

 

 

윌리엄 포크너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를 읽고...

짐작대로 이창동 《버닝》의 아버지(분노 조절 장애, 남부의 가난한 소작농, 군인 전력, 폭력적인 남성성)는 포크너에게서 가져온 것이었다. 중요한 건 이 시대 기성세대 한국 남성과 왜 이다지도 비슷한가 하는 점이다. 그 원인을 본성이냐 쉽게 변하지 않는 가부장제 환경이냐 분리해서 보기보다 차라리 그 다일 것이다. 이창동이 포크너의 큰 테두리에서 디테일에서는 하루키를 가져오고 마지막에 자신의 화룡점정을 찍었듯이.

불은 다 타오르면 사라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혹은 무심히 타오르고 있는가. 그 심지가 우리 욕망이라는 게 가장 어려운 문제겠지. 자신마저 제어할 수 없는 고통. 일그러지며 타오르는 불길. 죽음조차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의 손아귀에서 굴려지는 주사위라는 게 끔찍하긴 하지. 불로불사에 대한 염원, 살인, 사형, 자살의 선택권을 생각해보라. 즉 착각하지 말자. 자연스러운 건 없다. 현상, 현상의 종합은 결론이 아니다. 결론은 우리 머릿속에나 있다. 꿈이나 환상, 이야기로 덮어버릴 수 없는 본질적인 의문이 항상 남는 재 속을 우리는 들여다본다. 우리는 불길이 아니라 재 위를 걷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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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22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를 들으니, <요한 복음>에 나오는 내가 주는 물은 생명의 물이라는 구절이 생각나네요. 석가탄신일에 <불경>의 말씀을 떠올렸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불경> 중에는 아는 말씀이 별로 없네요... ^^:)

AgalmA 2018-05-22 22:21   좋아요 1 | URL
성수는 안 먹어 보았고 저는 삼다수가 제일 좋더라는(딴소리쟁이)
어렸을 때는 석가탄신일에 절에 가서 촛농 떨어지는 거 맞으며 공짜밥 먹는 재미도 있었는데 어른되니 그런 재미난 게 없네요(여전히 딴소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유종의 미)...

겨울호랑이 2018-05-22 22:29   좋아요 1 | URL
AgalmA님께서는 불자셨군요. 성불하세요!^^:) 참, 수돗물은 역시 아리수지요 ㅋㅋ

2018-05-22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5-22 22:20   좋아요 1 | URL
영화 보셨나 봅니다^^...간만에 영화관 나들이였는데 이창동 감독 역시 실망시키지 않더라는^^b
그 놈의 의미로 죽기살기로 사는 거 이제 많이 내려놓았나 싶으면 또 뒤통수 맞고 하는 터라 제가 뭐 대단한 소린 못 하겠습니다ㅎㅎ;;;

2018-05-22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2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8-05-23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저도 나름 괜찮게 봤어요. 여러가지 다층적이고 확장적인 의미망을 그답게 잘 설계해두신 것 같습니다. 마지막 그것이 환상이라면 종수의 (불완전한) 성장이겠고, 현실이라면 종수의 파멸이겠습니다만..그 마지막의 미장센은..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에는..일단 지금 너무 배가 고프군요. 사무실에서 월급도둑질을 하며 배고픔을 달래야...

잘 지내시지요? AgalmA님이 아무래도 <버닝>리뷰를 쓰실 듯 하여 불쑥 들러봤더니 있네요. 좋은 봄날 되시기를..봄은 이미 많이 갔지만요.

AgalmA 2018-05-23 10:03   좋아요 1 | URL
와와~ 맥거핀님이닷!
역시 예리하신 맥거핀님!
박찬욱 감독처럼 원작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리는 걸 눈여겨 봐야겠죠.
마지막 미장센은 종수가 쓰기 시작한 소설의 스토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다층을 살리는 이창동 감독의 역량을 봐야지 스토리만 좇는 독법으로는 영화가 뻔해지기 쉽죠. 제 리뷰도 다층을 풍부히 살려내지 못했다는 생각이ㅠㅠ....
우리는 동시존재 아닙니까. 배도 고프고 의미도 고프고ㅎㅎ
맥거핀님도 분명 <버닝> 보시고 글을 쓰셨을 거 같은데 안 보여주시고ㅜㅜ....

레삭매냐 2018-05-2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버닝>에서는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는지 궁금하네요.

우리나라 감독들은 깐느하고는 연이 닿지
않나 싶습니다. 왠지 동양의 대표선수는
일본/듕귁 감독들이 죄다 쓸어간 느낌...

AgalmA 2018-05-25 21:31   좋아요 0 | URL
영화는 여성 캐릭터 스토리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요. 결말 처리가 이창동스러웠다고 할까요. 레샥매냐님이 하루키 단편에서 느끼셨던 맥아리없음이 아니거든요. 어찌 보면 결말의 미장센은 김기덕 감독과 유사하기도. <나쁜 남자>나 <피에타>류.

이창동 감독은 상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하지 않은 레벨로 이미 오르신~
 

 

"새의 등이 날개 속에 유폐되어 있듯 인간의 영혼은 언어 속에 유폐되어 있습니다"

           

내 그림이랑 딱 맞는 문장! 역시 우리는 통해!

 


샹탈 : 음악이 문학적 창작의 일부분이라는 건가요?

파스칼 : 그건 모르겠습니다. 둘이 나뉘는 게 아니에요. 방금 표현하신 창작자 혹은 창조자는 이 창작이라는 의미를 의식하면 안 돼요. 오히려 허튼소리, 어리석은 말, 스스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착란 들이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 그런 창조가 내 눈 밑에 어떤 매개체처럼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으니까요. 창조요? 전 그걸 한 번도 못 봤어요.

샹탈: 『음악의 증오』에서 "음악의 비밀스러운 기능은 소환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음악은 죽음 속으로 끌어들이는 미끼"라고도 하셨어요. 그러나 그건 또 『음악 수업La Leçon de musique』에서 옹호하신 것처럼 일종의 본국 송환, 복구, 수리 같은 거 아닙니까?

파스칼: 맞습니다! 두 책은 은근히 모순적이에요. 음악이 쉴 깊은 침대를 파다 보니 써진 책입니다. 음악과 언어의 상류에서, 그러니까 두 가지가 분화되기 이전에, 운문으로 쓰인 신화에 대한 기억이 탄생하기 이전에, 신들린 상태와 희생제 의식을 구분하는 춤이 탄생하기 이전에 언어는 순수 상태로 유인하는 미끼였죠. 음악-노래-언어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무엇을 위한 미끼입니다.

샹탈: 당신에게 음악과 침묵은 어떤 관계인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파스칼: 침묵은 음악보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언어보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은 그것들에 드리워진 그림자입니다. 하나의 음계를 만드는 데 있어 고유한 음이 없듯이, 알파벳을 만드는 데에도 고유한 자음과 모음은 없습니다. 그것들에 선행하는 침묵 없이는요. 이 침묵이 반양립적인, 융합적인 매개물을 침묵하게 만듭니다. 옛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카오스라 불렀습니다. 신플라톤주의자와 조르주 바타유는 그것을 연속성이라 불렀습니다. 중세 서양의 기보 음악은 실레테silete를 동시에 고안해냈습니다. 실레테란 '침묵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개시되면서 연속선이 끊어집니다. 홍해가 둘로 갈라집니다. 그러면서 심장 한복판에서 (음악가들이 흔히 빈 마디라고 하는) 엇박자를 내듯 시간이 빠지고, 그러면서 숭고한 아타카를 던집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숭고한 늘임표 같은 피날레가 옵니다. 죽음이 성의 분화에 거의 맞닿아 있듯이, 침묵은 음악과 맞닿아 있습니다.

 

ㅡ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파스칼 키냐르의 말

 

키냐르의 말은 부유하는 듯하지만 언제나 악기들의 팽팽한 활 같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로 소환적이고 늘 복귀를 향하며 독자에게 던지는 미끼이다. 나는 환희에 차서 언제나 덥석 문다.
요 며칠 읽고 읽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사고의 본질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에서 논하던 언어의 속성을 떠올리며 이 불협에 심란해진다.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지속적인 범주화 덕분에 인지가 이루어지며, 모든 인지의 토대에는 (모든 것을 고정되고 엄격한 정신적 상자 안에 넣으려는) 분류와 달리 놀라운 유연성으로 사고를 가능케 하는 유추 작용을 통한 범주화라는 현상이 있다.

우리는 유추 작용을 통한 범주화 덕분에 유사성을 포착하고 새롭고 낯선 것에 대응하기 위해 그 유사성을 활용하는 능력을 얻는다. 또한 새롭게 접한 상황을 오래전에 접했으며 부호화되어 있고 기억 속에 저장된 다른 상황에 접목함으로써, 이전 경험을 활용하여 현재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유추 작용은 두뇌가 지닌 이런 능력의 초석으로서, 무작위로 예를 들자면 개, 고양이, 기쁨, 체념, 모순처럼 라벨이 붙은 개념뿐만 아니라 그때 나는 뜻하지 않게 문이 꽝 닫히면서 살을 에는 듯한 날씨 속에 집 밖에 남겨지게 되었다처럼 라벨이 붙지 않은 개념까지, 과거에 뿌리를 둔 풍부한 지혜의 창고를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간에 이런 개념은 매 순간 선택적으로, 거의 언제나 자각 없이 동원되며, 이 쉼 없는 활동이 우리가 처한 상황의 정신적 표상을 구축하여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고차원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어떤 사고도 과거의 정보 없이 형성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오직 현재와 과거를 잇는 유추 덕분에 생각할 수 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사고의 본질


호프스태터 & 상데, 월리스는 기본적으로 언어 문법이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촘스키 보편 문법을 따른다. 그들은 규칙과 질서로 세계를 재구성한다. 키냐르는 좀 다르다. 그가 언어와 음악의 중추라고 생각하고 강조하는 것은 카오스적인 침묵이다. 앞선 이들처럼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키냐르가 인터뷰에서  말하는 것은 유추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그렇듯 비밀로 감싼다. 어찌 보면 그가 어릴 때 음식을 거부했듯 극도의 거부 반응처럼 느껴진다.

 


상탈: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할 때, 화가가 어떤 것을 말할 때, 음악가가 어떤 것을 말할 때, 그것을 알지 못한다. 베르크하임 같은 도시가 쾰른이라 불리는 또 다른 도시와 지척임을 알고 나서, 당신의 아이를 키운 여인이 바로 거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순간 대단히 이례적이게도, 극히 사적인 어떤 영역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 순간은 언어에 선행했던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비로소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이며 그때 이뤄져서는 안 될 어떤 것이 내게 이뤄진 것 같아 보인다"라고 당신은 로익 주르댕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파스칼: 글쎄요, 직접적으로는…… 자기 고유의 광기에 대해서는 기만할 수밖에 없지요.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요…….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살았습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울부짖습니다. 다른 자들의 입술 위에 있던 국어를 배우기 이전의 외침, 누더기 같은 목소리 조각들이랄까요? 다른 자들의 입술 위에 있던 그 언어에 압도당해 무너지면서 이른바 언어의 습득이 시작됩니다. 서서히 안에서 모음을 발성하게 되고, 그게 군群을 이루면서 말을 하게 됩니다. 간헐적인 메아리 현상처럼요. 우린 그걸 의식이라고 부르지만 타자의 소리가 반향되는 겁니다. 획득 언어, 사회 언어는 우리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이어 그다음은 해선 안 됩니다. 이건 세상에 있는 그 누구와도 상관없습니다. 선행했던 야만성과 세계의 재판정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길들이기는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약, 코나투스conatus, 오렉Orexis 같은 것이 그 자체로 역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명명되어서는 안 됩니다.

 

ㅡ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파스칼 키냐르의 말

 

키냐르의 단호함. “의식은 획득 언어의 메아리 방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언어적으로 구축된 가공물이자 언어를 통한 재번역에 따라 완전히 변하는 오열이자 징후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감동적인 수사이지만 단순하게 보면 행동주의 심리학처럼 냉정하다. 그래서 그의 사유를 내가 더 좋아한 건지도 모르지만, 종국의 관점에 대해서 지금의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 같다. 나는 계속 언어를 좇는다. 이번 생에서만 하고 두 번 다시 안 하고 싶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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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10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 대한 접근태도를 정하는 문제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화권마다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언어의 보편성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언어(또는 문화)의 우생학쪽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AgalmA 2018-05-10 17:58   좋아요 1 | URL
늘 두 가지 이상의 상이한 대립이 있어서 항상 양쪽을 살펴야 해 진짜 골치 아파요. 키냐르는 또 다른 변수로 등장했다고 봐야겠죠. 침묵이라니! 항상 하던 소리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래서 촘스키가 생물학적 결정론자라며 우생학적이라고 비난을 듣기도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