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원 아침달 시집 2
유진목 지음 / 아침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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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흑백사진이 49페이지에 걸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사람의 일생 혹은 여러 사람의 인생이 겹쳐 있다. 마지막 두 장은 종려나무 사진이다. 그리고 시가 이어진다.

 

 

 

 

21

종려나무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고, 그중에 어떤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는 자주 고개를 숙였고, 남몰래 주먹을 쥐었고, 그러다 하품을 하였고, 이대로 끝이 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지루함을 견디며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다른 것이 아닌 그는 종려나무인 것이 좋았다. 길고 가느다란 잎과 뾰족한 끝이. 찌르기 전에 꺾이는 무력함이. 천천히 말라가는 목숨이. 때로 휩쓸리는 삶이. 여럿이 모여 있으면 징그럽기도 한 것이 좋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도 그는 어깨를 움직여 그것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바람이 부는 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을 속이며 계속해서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어떤 사람은 종려나무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사람은 휘파람을 불었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그는 불면에 시달렸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가까스로 잎사귀를 모으고 잠이 들었다. 그럴 때 함께 밤을 지샌 바다도 그랬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나중에는 돌아누울 힘도 없어 보였다. 그는 바다에 있을 때보다 산에 있을 때 자신을 건강하게 여겼다. 다시 한번 떠나기에 앞서 깊은 숨을 쉬었다. 그는 잠자코 서서 바다의 종려나무에서 산의 종려나무로, 낮의 종려나무와 밤의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시 전문)


   
이 시집을 읽으며 다른 종려나무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졌다.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1991).

어렵게 찾아갔는데도 친어머니가 만나는 걸 거부해 돌아가던 아비. 아비는 종려나무숲을 한참 걸으면서 친어머니가 궁금해할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 애증의 시퀀스와 묘하게 어울리는 시가 이 시집에도 있다.
   
   

24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는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어머니는 베란다에서 벤자민에 물을 주고 있다. 나는 어항의 물이 줄어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어머니, 물이 줄어든 것 같아요. 어머니는 벤자민에 주고 남은 물을 어항에 따랐다. 어항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손자국이 남잖니.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니의 벤자민은 길고 두껍고 무성했다. 어쩜 이렇게 잘 자랐을까요?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래요. 어떨 땐 좀 징그럽더라구요. 그래요? 어떨 땐 그래요. 마냥 좋지만은 않아요. 나는 벌써 얼마나 죽였는지 몰라요. 벤자민을 죽인 사람은 나뿐일 걸요. 나도 처음엔 여러 번 죽였어요. 자꾸 죽으니까 싫더라구요.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나 싶고 왜 그렇잖아요. 어머니는 벤자민 바구니를 천장에 매달 때 발꿈치를 들어 키를 높였다. 어머니, 제가 걸어 드릴까요? 어머니는 괜찮다고 말한다. 나중에, 나중에 해주렴.

그때는 집에 어항이 있었다. 다른 집에도 어항이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물고기는 한 마리만 남아서 구석에 가라앉아 있었다. 모서리를 두드리면 조그만 입을 뻐금였다. 언제부터 이랬니? 모르겠어요. 이제 곧 죽겠구나.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는 다시 떠나고 싶었다.

(시 전문)



아비와 친어머니’가 끊을 수 없는 에토스(이 글에서는 ‘어느 사회 집단의 특유한 관습’이라는 뜻으로 씀)적 관계라면, 함께 시계를 보며 1분을 공유한 뒤 짧은 기간 연인이 된 ‘아비와 소려진’은 파토스로 묶인다. 아비에게 버림받고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복도에서 거리에서 서성이던 소려진. 그리고 아비는 그녀에게서도 이 지상에서도 영영 사라진다. 소려진을 사랑했던 경관이 우연히 아비의 임종에 있었던 광경까지 이 시집에도 《아비정전》의 첫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다른 버전 같은 시들이 있다.   
   
   
   

28

형광등의 불이 두어 차례 깜빡인다.

제가 고쳐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들어 형광들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런 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제 돌아가 달라고 말했습니다. 돌아가요. 다시는 오지 말아요. 그때는 왜 그랬을까요? 그는 싸구려 볼펜의 머리를 딸깍이고 있다.

방은 이따금 어두워졌다가 밝아졌어요.

여자의 인중은 깊고 노여웠습니다.

그런 건 절대로 잊을 수가 없더군요. 갈라진 모양이 불길했어요. 어떻게 하면 자신을 전부 맡길 수 있을까요? 이제 나는 더 이상 줄 것도 없고……. 그는 손이 가는 대로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 그런 뒤 비가 왔을 겁니다. 여잔ㄴ 노랗게 질린 얼굴로 울면서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지나쳐 갔어요.

(시 전문)



25

그해 여름에 그는 옆 방에 사는 남자가 궁금했다. 랜드로바 봉투에 든 와이셔츠를 보고 이런 건 이제 필요 없다며 돌려 보내는 걸 본 뒤로

여자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서 있었다. 한참을 그러더니 영수는 잘 있어요 하고 울먹였다.

그는 여자가 랜드로바 봉투를 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것도 보았다. 플라타너스 아래로 버스가 오고 버스가 가고 여자는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그는 방에 누워 영수는 잘 있어요 하고 말해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옆 방이 비어 있었다. 그는 그가 영수에게 갔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영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하고 방문을 닫았다.

어쩌다 미친 연놈을 들여가지고. 씨팔. 문에 귀를 대고 서 있었다.

여름이 끝나면 죽을 것이다.
매미처럼 울다 잠이 들었다.

(시 전문)


 
《아비정전》은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아 외로움을 겪었음에도 타인에게 같은 아픔을 주며 모두가 징그럽게 모여 있으면서도 무력하고 뾰족한 자신의 잎을 감출 수 없이 종려나무처럼 존재하던 영화였다. 한 시대의 독특한 감수성, 청춘에서 전체 삶으로 확장되는 삶의 고통과 구도적 고행을 보여줬던 왕가위와 또 겹치는 종려나무가 있다. 헤르만 헤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발표했다. 유명한 작가인 그가 굳이 익명으로 책을 발표한 이유는 자신의 명성과 위치를 내세워 말하기보다 동년배가 말하듯 젊은이들의 정신적 방황을 공감하고 위로하고 싶어서 였다고 했다.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명문장과, 《아비정전》에서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곤 한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라는 명대사는 어떤 흐름을 짐작게 한다. 헤세의 작품은 고독과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지만 1900년부터 죽음에 이른 1962년까지 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과 에세이에서 젊은이의 정신적 방황을 공감하고 위로하고자 한 작가 의도도 고려해야 하고, 고행 속 종교적 해탈을 자주 그렸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으려는 희망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저 대사는 초극 의지가 느껴진다. 20세기의 헤세와 달리 21세기로 넘어가는 즈음의 왕가위 작품은 그런 초극성을 꿈꾸지 않는다. “발 없는 새” 대사를 한 뒤 장국영이 그 유명한 맘보춤을 추듯이 꿈과 희망은 저 먼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만 존재한다. 《아비정전》의 또 다른 명대사처럼 말이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됐으니.” 기억은 우리 머릿속에서 무수히 변조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가장 기억하려는 것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영원의 속성을 지닌다. 기억 작용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27

잘못 기억하는 거예요. 나는 그런 적이 없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자꾸만 나보고 그러는 거예요. 정신을 차리라고. 천벌을 받는다고. 보세요. 내 손을 가져다가 자기 목을 이렇게 해요. 차라리 죽이라는 거예요.
(중략)
여자는 간다고 말하고 싶었다.
기다리지 말라며 문을 닫고 싶었다.

(시 부분 인용)


  
이 시집을 여는 문장은 이렇다.
“이른 아침 그는 식물원으로 들어갔다. // 해 질 녘 그가 식물원에서 나왔을 때는 / 전 생애가 지나버린 뒤였다.”
  
식물은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의 형태와 닮은 꼴을 나타내는 프랙털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생명력의 강인함과 순환을 보여주지만, “발 없는 새”가 있을 수 없듯이 물과 대기와 빛 없이 살 수 있는 식물도 없다. 식물은 식물로서 슬픔을 표현할 테지만 인간은 슬픔을 소설로 시로 영화로 모든 수를 동원해 가장 강력하게 인간으로서 표현하며 사라진다.       


32

살면서 가장 슬펐을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사람은 왜 그런 걸 궁금해하냐고 해요. 나는 몇 번 째냐니까 몇 가지 떠오르는 일이 있나 봅니다.

무슨 생각해?

그는 가지 끝을 떨구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너처럼 고운 빗을 가지고 있었어. 그걸로 내 머리를 빗겨 주었거든. 널 보면 그때 생각이 나.

그건 마치 바람이 불어서 네가 흩어지는 것과 비슷한 거야.

그는 좋았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무 아래 서 있었습니다.


   
ps)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려는 건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서 왕가위 감독이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찍은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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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9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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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2018 제9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작 모두를 ‘윤리’라는 스펙트럼에 모을 수 있다. 그래서 전체가 비슷비슷하게 느껴졌고 각각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음에도 기존에 비슷한 소재와 접근법이 있었던 게 겹쳐져서 신선도가 떨어졌다. 심사평은 9회를 맞은 이 상에 대단히 자부심을 내보였지만 이 7편의 선정이 심사 위원의 취향과 역량 탓인지 2017년 발표된 한국 단편의 역량의 바로미터인지 나는 의심만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피터 싱어는 『더 나은 세상』에서 2011년 철학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데렉 파피트 《중요한 것에 관하여》(국내 미출간)를 언급하며, “이 책은 윤리적 객관주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궁금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적인 위협을”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성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말해주며, 우리의 내재적 욕망과 기호는 이성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피트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1+1=2’가 참(진실)이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미래의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그런 동기나 욕망을 갖고 있고, 미래에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는 무관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동기도 갖고 있다(비록 그게 항상 결정적인 동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자명한 규범적 진실이야말로 윤리학에서 파피트가 주장하는 객관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윤리적 객관주의를 반대하는 주요한 반론 중 하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지와 미혹으로 비난할 수 없는 철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약 임마뉴엘 칸트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조차 우리가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행동에 이견을 보인다면, 과연 객관적 진실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반론에 대한 대응으로, 파피트는 객관적 윤리에 대한 자신의 변론보다 훨씬 더 과감한 주장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이론인 칸트의 도덕 이론,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존 로크(John Locke),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및 현대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 스캔론(T. M. Scanlon)의 사회계약론, 그리고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을 살펴보면서 칸트의 이론과 사회계약론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수정된 이론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공리주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결과주의(Consequentialism)의 한 가지 형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민정 「세실, 주희」는 ‘J-세실-주희’ 라는 세 여성이 민족주의와 젠더 사이에서 어떤 삶과 선택을 했는지, 그 속에서 상대가 원한 바 없는 어떤 곤경을 주는지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성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유비적이고 주요 사건도 상동(相同)한다. 사대주의적이며 서구 문화의 향유자인 J를 동경하고 따르던 주희는 그녀와 함께 뉴올리언스 축제에 갔다가 어쩐지 J의 의도로 혼자가 되고 마는데, 마초적인 남성들에게 성 모욕을 당한다. 더 점입가경은 그때 자신의 영상이 ‘쌍년’이란 꼬리표로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가 그녀는 이 해결을 위해 전전긍긍한다. J와 주희의 관계처럼 한류 아이돌 문화를 동경해 한국으로 온 세실과 직장 동료인 주희는 언어적 문화적 우위에 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해 왜곡해 받아들이며 살아온 세실을 주희는 우연찮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집회에 섞이게 만들면서 앞서 J-주희의 상황을 재현하고 만다. 뒷날 세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건 누구의 잘못이 될까. 옳고 그름의 경계를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진실의 본질은 뭘까. 파피트와 싱어의 고찰에서 보듯 우리는 각자가 가진 ‘윤리적 객관주의의 모호성’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킬 정답을 도출하기 어렵다. 이 단편의 해설을 맡은 이은지도 이 어려움을 잘 정리해 말했다.

 

“세실이 소녀상의 의미를 모르듯이 그 순간의 의미를 주희는 ‘모른다’. 이 무지한 투사의 이미지에 우리는 열광하는 동시에 곤혹스러워해야만 할 것이다. 주희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가 이데올로기에 대적하는 순간을 영원히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세실, 주희」는 언제 어떻게 무엇을 향해 투쟁해야 하는지 안다고 착각하는 이 시대의 주체들이 처한 곤경을 가리켜 보이는 서사로서 값한다. 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우리를 비참하게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를 더욱 직면해야 할 것이다. 주희가 그러했듯이.”

본심 심사위원이었던 이장욱의 평도 귀담아 둘 만하다.
     

“박민정의 「세실, 주희」를 읽으며 다시 확인했다. 오늘날 소설이라는 장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공인된 사실을 재확인하고 알리는 일보다는, 그 올바름의 위태로움 속으로 들어가 더 예각화된 고통과 갈등을 마주하는 쪽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나는 이 단편이 그런 소설적 사유의 사례라고 느꼈다.”

 


『2017 제8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대상 「고두」에서도 그랬지만 임현에게 ‘윤리’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의식이다. 이번 수상작 「그들의 이해관계」도 그랬다. 정의와 윤리 문제에서 꼭 거론되는 ‘한 사람과 다수의 죽음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게 옳은가’ 같은 문제가 등장한다. 한 여자(해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살아남게 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수해를 받은 이들은 안도에 그치고 만다. 한순간에 사라진 이 존재에 대해 유독 죄책감에 시달리는 두 사람이 있다. 여자를 고속버스 휴게소에 두고 떠나버린 운전기사와 해주의 남편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운전기사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이전 선택도 있었기 때문에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주의 남편은 해주와 성격 차이로 인해 끝없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조목조목 거론하고, 해주가 여행을 떠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음을 이유로 밝히며 「고두」의 윤리교사처럼 기만적인 면을 드러낸다. 해주가 죽은 이유를 파헤치는 것조차 자기 위안을 위해서다. 물론 이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아버지 표도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피한 이반보다 윤리적 죄책감은 덜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해관계」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서 우연이라고도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요소가 달랐다면 한 가지만이라도 달랐다면 그녀는 살았을까. 그래서 임현은 결정론적 물리법칙보다 확률적 양자역학 속 인간을 더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로 존재했다가 그중 가장 낮은 확률의 나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되지 못한 무수한 또 다른 나를 떠올리다 보면 그들도 어딘가에서 지금의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나로부터 한참 떨어진 뒤에도 내가 되지 못한 것을 두고 후회하고 그것으로 소설도 쓰고 그러는 걸까. 진짜 그렇다면 거기도 뭐, 별거 없네. 그 별것 아닌 것으로 나를 너무 낭비했다.

   그럼에도 만약, 내가 나를 미리 알고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때도 나는 여전히 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의 나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대신 미래의 나는 평범하고 성실하게 늙어가면서 앓는 질병과 처방받은 약품의 성분으로 나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수도꼭지의 온도를 조절하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할 것이고, 매번 왼쪽부터 먼저 닳는 신발이라든지, 길 한가운데 버려진 양말 같은 것을 발견하며 이건 또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나 궁금해할 것이다. 어딘가 서로 닮은 것들을 바라보며 ‘너무 나 같네’ 하고 적적해하겠지. 아니더라도 내게 없던 장면들을 상상하고 나랑 비슷한 누군가를 등장시키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쓴 거의 대부분의 것들도 이미 그렇게 쓰인 셈이다.”
ㅡ 임현, 작가노트

우리는 이런 소설을 읽을 때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기 힘들어졌다. 이 사건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우리는 국민적 미궁 속에 빠져 버렸다. 누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어서 언제까지라고 할 수 없이 고민 속에 숙연해진다. 다수가 그래야 한다고 말하면 너무 윤리 강요적일까.   
    


김세희 「가만한 나날」은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시뮬라크르(가상)에 함몰된 인간의 한 예를 보여준다. 경진은 블로그 마케터로 가짜 블로그를 만들어 첫 직장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자기 전공을 살린 만족감에 도취한다. 그런데 자신이 광고한 ‘뿌리는 살균제(옥시 사건)’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속은 줄도 모르고 외려 경진의 안부를 걱정하는 피해 이웃의 쪽지에 경진은 자기방어부터 생각한다. 혹시나 책임 소지가 있지 않을까 싶어 자신의 실수를 고민하고 상관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아무런 죄책감을 받지 않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행동도 상관과 다르지 않다. 속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정들었지만 자신의 과오가 남아 있는 블로그를 지워 버린다. 책임을 전가하기 쉬운 이런 사회 구조에서 현실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이런 선택을 자주 한다. 그러나 알고리즘으로 복잡하게 얽힌 콘텐츠 생태계처럼 아무리 지운들 우리는 살아오며 남긴 자신의 수치를 확실히 피할 수는 없다. 적성 갈등과 업무 무능력으로 퇴사했던 직장 동료를 우연히 만난 경진은 진실을 살펴볼 생각도 없이 가짜 블로그가 자기 적성에 맞는다며 우월성을 과시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깨닫는다. 정정하고 싶지만 동료는 이미 떠났다. 우리는 어디까지 부인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어디까지 사과해야 하며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한계와 미진할망정 잠정 결론이라도 그을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매우 다른 윤리의 지형에서 헤맨다.
선정적인 작품으로 논란이 많았던 D. 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제목을 따와 경진이 만든 채털리 부인 블로그 얘기를 잠깐 짚고 가자. 이 작품은 숱한 에로물의 전범이 되기도 했고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지배 계급의 성적 억압과 위선을 잘 다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채털리 부인’은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경진에게 ‘채털리 부인’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 테지만 그걸 쉽게 가져왔고 쉽게 소비한다. 우리의 성과 욕심과 고민 없음이 의미를 지워버리는 결과만 남는다. 누구라도 이런 게 없을 리 있나. 이런 공통점은 서로에게 고백할 수도 없다. 세상은 그래서 가만-기만한 나날, 가만-기만한 사람들로 넘쳐나는지도 모른다. 문제가 생기면 외면하거나 도망치면서 홀로 삭이면서.
   


“그곳을 나온 이후 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으나 어쩐지 펼쳐볼 마음이 일지 않는 책.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ㅡ 김세희 「가만한 나날」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과 윤리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오는 현대 작가로 나는 필립 로스와 미셸 우엘벡을 바로 떠올린다. 이 수상 작품집을 읽으며 미셸 우엘벡을 자주 생각했다. 예술이 작품의 뼈대 모티프가 된 최정나 「한밤의 손님들」, 임성순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의 풍자성도 그렇고, 최정나의 ‘가족 해체’는 미셸 우엘벡 『소립자들』, 뉴에이지를 끌어들여 기괴하게 빠지는 『어느 섬의 가능성』의 시도가, 임성순이 보여준 ‘자본주의와 중심 없는 해체에 빠져든 예술’은 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가 떠올랐다. 특히 『지도와 영토』는 스위스에서 상업화된 안락사 소재가 나오는데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미 이런 접근과 고민들은 있어왔다. 없는 게 이상하겠지만. 최정나, 임성순, 정영수가 한국적으로 잘 요리했고 문체와 스타일이 다른 게 칭찬받을 점이라고 해도 예상되는 결말과 정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내 인상이다.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자기 과잉과 자기 함몰적인 기존의 퀴어물과 크게 차별성이 있지는 않다. 질주하는 욕망, 현실 부적응, 일탈 속에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로 끝나는 엔딩은 42년 전 나온 퀴어 문학의 고전이라고 할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1976)에 비해 청출어람이 되지도 못했다. 박상영도 류를 의식했던지 작가 노트의 제목을 “한없이 평범한 날들”이라고 붙였던 게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타개점이 잘 보이지 않는 성소수자 처지, 한국적 상황, 현재 시대 반영 등을 감안해야 하는 것일까. 동시대적이라는 면에서 재미와 공감할 부분이 많지만 나는 이 작품의 ‘문학적 평범성’에 아쉬움이 많은데 신형철 평론가는 “‘실패를 반복하는’ 패기 넘치는 찬가”라고 격찬하니 생각의 온도차만 느낄 뿐이다.
또 짚고 싶은 게 심사 총평에서 신수정 평론가가 박상영과 김봉곤을 비교하며 박상영을 우위에 둔 너무나 주관적인 평가에 불만스럽다.

 

"나는 박상영의 내레이션에 푹 빠져 그가 풀어내는 기나긴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버렸지만 이 소설의 과잉에 질려버린 것도 사실이다. 이토록 많은 디테일들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설도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일기나 페이스북 낙서처럼 휘갈기는 김봉곤의 스타일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두 사람 다 자전성이 많이 반영된 퀴어 문학을 보여주는 작가다. 퀴어 성향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 두 사람은 영화와 음악에 대한 관심도 많아 작품에 적극 활용하는 것도 비슷하고 둘의 등단 시기도 2016년이라 비교가 많이 되는 듯하다. 그러나 신수정 평론가가 김봉곤을 ‘일기나 페이스북 낙서처럼 휘갈기는 스타일’이라 폄하하며 박상영을 추어올리는 건 부당하게 보인다. (김봉곤이 신춘문예, 박상영이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 등단자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아니길 바라며...) 김봉곤의 소설을 여러 편 읽어보며 김봉곤의 문체와 스타일이 그가 관심 가진 작가들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질의 비교는 제쳐두고 롤랑 바르트, 이인성 같은 작가들처럼 그의 소설에서 파편적이면서 단상적인 자조와, 스토리보다는 의식의 흐름처럼 가고자 하는 면을 자주 발견한다. 그런 작중 인물들을 통해 이성만이 아닌 심리와 정서를 자극하는 내밀하고 강렬한 문장들을 만나 한 방 맞고는 한다.

 

 


박상영과 김봉곤이 주류 문학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퀴어 파라 그런 거 같은데, 라이벌 구도로 만들지 않았으면 싶지만 인간 특징이 또 비교라...... 주목할 것은 해설을 맡은 노태훈의 말처럼 퀴어 문학은 자신만의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고, 다시 그 작가를 자연인으로서의 개인과 분리하여 예술가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층위를 나누어 예술을 분석하는 태도를 객관적이며 또 진보적인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비롯한 ‘미투 운동’의 폭발적인 전개 양상을 감안한다면 예술을 작품 그 자체로서만 평가하는 관점에는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럴 때 퀴어적이라는 것은 삶과 예술이 구별될 수 없다는 감각에서 특별해진다. ‘가짜’ 정체성으로는 ‘진짜’ 예술의 영역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가장 첨예하게 인식하는 집단이 퀴어이고, 그들은 그 진정성(authenticity)을 무기로 기존의 예술에 균열을 가한다.”

요즘 철학, 과학, 문학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두되는 경향이라든가 전 세계적인 화두라 할 수 있는 공동체의식과 분배, 성차별과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 ‘윤리’는 인류가 끝까지 고민하게 되는 문제의식 같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머무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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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7-20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은 작가상이라 현재 우리 주변의 과제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에 낯설지 않은 주제가 흥미롭습니다.^^:) 우리의 현재 이슈가 문학 작품에 녹여 들어가는 맛이 있을 것 같네요!

AgalmA 2018-07-21 03:06   좋아요 1 | URL
낯설지 않아서 좀 식상하기도^^; 제가 문학을 읽는 건 현실적인 걸 보려는 목적은 낮거든요. 그런 건 뉴스나 다른 책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거라서...
 
물류창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10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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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창고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하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떠오른다. 슈뢰딩거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확률 문제를 말할 때의 역설이다. 미시 세계에서 하나의 전자가 확률적으로 위치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다면 물류창고는 거시 세계의 사물이라 그럴 수 없을까. 언어가 상징 기호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양자역학에서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관측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결정하듯이 언어에서도 서술자의 인식 행위가 대상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어의 특성상 읽는 자의 해석도 감안해야 하지만 대상을 선택하고 배치를 결정하는 서술자의 역할은 매우 크다. 그래서 나는 이수명의 물류창고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이수명의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무한증식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보르헤스) 같은 세계는 이번 시집의 첫 시에서도 바로 드러난다. “무덤 속을 미친 듯이 빙빙 돌았다”(「나의 경주용 헬멧」) 이수명 시는 늘 그렇듯 주체와 행위자, 공간 모두 모호하다. 무덤 속에서 빙빙 돈다는 자체가 불편한 모순을 체험하게 하는데 그렇다면 이 무덤은 누구의 것? 사실 이건 무덤이 아닐 수도 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 물건들이 계속 사라지고 증식하는 시공간은 이 시집 전체를 언어의 물류 창고로 보이게 만든다. 오늘과 밤을 잃었는데 오늘과 밤은 계속 온다(「밤이 날마다 찾아와」). 풀이 한 포기도 없는데 모두 모여 풀을 뽑는다(「풀 뽑기」). 죽음은 죽음을 죽인다(“모두들 죽음으로부터 다시 한 번 / 튕겨 나와 / 무언가로 죽음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디야 커피」). 최근은 점점 더 최근으로 갱신되지만 끝을 알 수 없다(「최근에 나는」). “이미 깨어 있어서 / 언제나 깨어 있어서 / 다시는 깨어나지 못해 아무도 나를” 깨울 수 없다(「물류창고」, 29페이지).
    
1부에 집중적으로 제시된 「물류창고」 열 편의 연작시 속에는 미시 세계의 파동과 전자들의 움직임들처럼 명확히 관측할 수 없는 것들로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 우리나 오늘과 내일의 구분도 중요하지 않고 연극을 하든 말이 안 되는 무슨 대화를 하든 큰 의미가 없다. 가야 할 배송 물건과 돌아온 반송 물건이 섞여 있는 중첩의 장소인 물류 창고니 이상할 게 무언가! “자신이 왜 그렇게 흰 목장갑을 끼고 있는지 몰라 장갑 낀 손을 내려다”(마지막 「물류창고」 시, 50페이지) 보는 이해 불가능한 상태만이 체셔 고양이의 미소처럼 남을 뿐이다. 
    
2부의 첫 시는 무한을 계산해내던 칸토어(혹은 칸토르)의 무한집합론이 연상된다.

“숲 속에서 네가 나왔는데 화분을 들고 서 있었는데 화분에는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너에게 말했지 화분은 단단하지 않다고 네가 붙잡는 대로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있다고 너는 말했지 시신을 찾는 사람들이 여태 숲속에 있어서 숲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시신이 텅 비어 있어서 시신에는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서 시신이 없다. 처음부터 없다. 하지만 시신을 찾는 사람들이 여태 숲속에 있어서 숲을 늘리고 늘려서 그렇게 숲을 들치고 마침내 시신이 발견되는 것이다. 시신으로 나를 몰아내는 것이다. 나는 없다. 처음에는 없다. 시신이 웃는다. 숲속에서 네가 나왔는데 너는 누구의 시신인가, 너는 화분을 어디에 놓으면 좋을지 묻는다.”

ㅡ 「너는 묻는다」 시 전문

애초에 없는 것을 만들고, 없음(시신) 속에 있음(숲)을 넣는 기묘한 상황! 이러한 역설 상황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늘도 거의 유사한 뒤통수로 돌아오는 중이다”(「녹지 않는 사람」). 안부는 돌고 돌아 내게 다시 묻고(「안부 기계」), 집은 연립으로 도달하며 알 수 없게 되고(「연립주택」), 모든 것이 노면 위를 지나가지만 우리는 상태와 순간만을 볼 뿐이며(「노면의 발달」), 눈이 오고 숱하게 겪었고 눈으로 보면서도 우리는 매번 놀란다(「투숙」). 우리는 그저 공처럼 개처럼 이상한 운동 상태에 있다(「오늘의 경기」, 「원주율」, 「머릿속의 거미」, 「계속」). 살아 있다면 우리는 정말 지쳐야 정상 아닌가. 
    
끝장을 바라고 있지만 이 운동을 아무도 멈출 수 없다. 3부의 시들은 그래서 더 절망스럽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하얀 직사각형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네모난 유리 창문들, 현관문들이 줄지어 있고 이불이 혼자 춤을 춘다. 기우뚱거리며 떨어질 듯 날아오를 듯 위태롭게 떠다닌다. 도약 중에 잠깐 접히다가 두 번 다시 같은 모양으로 접히지 않는다. 저 이불은 너무 많은 직사각형을 가지고 있구나,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이불은 어떤 소식도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먼지를 쏟아낼 뿐이다. 먼지들은 자리를 바꾸면서 떠돈다. 어떤 먼지는 다시 이불에 달라붙는다. 빙빙 돌면서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먼지 속에서 이불은 언제 멈출지 모른다. 무엇을 겨누지도 못하고 각도를 맞추지도 못하고 어떻게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혼자 춤을 출 뿐이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커다란 직사각형을 계속해서 흔들어대고 있다. 저 이불을 누가 그만

빼앗았으면”

ㅡ 「이불」 시 전문

수도 서울은 삶의 장소가 아니라 ‘소멸’ 좌표에 더 가깝고(「여기서부터 서울입니다」), 아무리 부서져도 정작 갈 곳도 없고(「흥미로운 일」), 어지럽게 떠있다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덤불 가운데 식탁보」). “비는 길고 계속 길어서 모든 비가 이어져” 있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모든 것들은 바닥에 흩어져 있다(「나의 중얼거리는 사람」). “눈을 뜨는 순간 모두 찢겨져 뒤로 물러난 듯이”(「우리를 제외하고」) 이수명의 시들은 끔찍하게 갇혀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누구도 예외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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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7 07: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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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7-07 16: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수명 시인 데뷔 때부터 좋아해서 신간 나오면 늘 부리나케 찾아봤죠. 여전히 좋아요. 읽고 싶게 시를 쓰는 시인의 공이 크겠죠 :)
 

그간 좀 바빠서 [오늘의 음악] 소개를 못 했네요-,-)....아무도 안 기다리려나요ㅎ;

 

 

 

요즘은 한국 여성 보컬 맘에 드는 색깔이 많아 좋다. 어디고 그렇지만 음악 판도 참 부대낄 텐데 힘내라구~

잠 없는 꿈도 싫지만 꿈 없는 잠도 서운하다. 영감 없는 잠에서 깨어날 땐 꿈에서까지 막 살다 온 기분.

♪ Richard Parkers "삐에로"

motte "깊은 잠"

ALLS  "Quiet Place"

SOMA "Somablu"

 

 

Now, Now "Az" :상큼한 pop. 보컬 음색도 좋고 색깔 있어 좋다.

 

Lowrie "King" : 뭐야 뭐야 넘 멋지잖아! 관심 뮤지션 등록!

 

FirstAid "Holiday" : 한국에 이토록 고급진 일렉트로닉 뮤지션도 나오다니 기쁘다~ 스포츠 국위 선양보다 나는 음악신에서 이런 성과가 나오는 게 더 기쁘다!

 

veins "What Kills Me" : Adoy도 그렇고 잘 됐으면 좋겠는 인디 밴드♥ 2012년 헬로루키, 대한민국 라이브 페스티벌 금상도 받았다니 이미 잘 되고 있는 건가; 첫 정규앨범 나오면 대박 스멜이~ 라이브 보고 싶은 밴드!



 

● 비 오는 날 선곡

Tash Sultana [Salvation] (2018, indie, single, 여성 보컬)
이 가수 특히 이 곡의 보컬을 듣다 보면 어쩐지 조지 마이클이 생각난다.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정규 음반이 없다니!

KAYTRANADA [Kaytra To Do] (2013, 랩/힙합, 정규)
이런 그루브한 힙합류 좋더라~

Silex [Midnight Symphony] (2018, indie, single)
드림팝 느낌을 이토록 멋지게 구현하는 한국 뮤지션이 있었던가. Byul 생각도 스쳐가지만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 뮤지션의 빛나는 가치인지를 알리는 방증이지. 키치적이면서도 이런 스타일 음반을 일찍부터 선보였던 Sufjan Stevens 생각도 잠시 났다. 명반으로 꼽히는 [Illinois](2005)는 필청 음반 비 오는 날 들으니 뽀송뽀송하구만~ 최근 한국에서 입소문 인기였던 퀴어 영화 <Call Me By Your Name>에 그의 곡이 많이 들어갔다. 영화 음악 좋다는 평도 자자했는데 역시 이런 뮤지션의 곡을 넣을 정도면.

비도 오고, 차가 다 식었네....

 

 

 

 

 

 

 

 

 

 

 

● 바다 구경

 

지난번 통영 여행이 우중 고생이었기에 다시 한 번 도전~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으나 더웠다.
오랜만에 순방향 좌석의 기차를 탔다.

 

안녕, 반짝반짝, 바다, 사람... 모든 것이 다.
숙소에서 시원한 에어컨 속에 음악 가득 띵가띵가 휴식 후 밖으로....

 

 

 

 

 

허름한 밥 & 술집에 낙서가 명언!

 

 

 

 

 일찍 일어나 바다 구경하고 반신욕하며 시집 읽기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세상에서 내가 본 것은 아픈 사람들과 아프지 않은 사람들,
살아있는 것들의 끝없는 괴로움과
죽은 것들의 단단한 침묵들,
새벽하늘에 떠가는 회색의 찢긴 구름 몇 장,
공복과 쓰린 위,
어느 날 찾아오는 죽음뿐이다.

말하라 붕붕거리는 추억이여.
왜 어떤 여자는 웃고,
어떤 여자는 울고 있는가.
왜 햇빛은 그렇게도 쏟아져내리고
흰 길 위의 검은 개는 어슬렁거리고  있는가.
구두 뒷굽은 왜 빨리 닳는가.
아무 말도 않고 끊는 전화는 왜 자주 걸려오는가.
왜 늙은 사람들은 배드민턴을 치고
공원의 비둘기떼들은 한꺼번에 공중으로 날아오르는가.

 

장석주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1991)

 

 

 


 

「삼십 세 」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1981)

 

 

책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좋지만 좀 더 여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여행지에서도 돌아다니기보다 책을 읽는 중생이잖아ㅎㄱㅎ);;

일상도 인생에서는 여행이지만 짧은 인생, 반짝반짝할 여행 많이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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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3 0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3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07-03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저는 바닷가를 보면 뛰어드는 편이라, 위에서 바라보는 해변가가 아름다움을 미처 몰랐네요.ㅋ 그렇지만, 앞으로도 바닷가에서 놀듯 합니다. AglamA님의 음악을 기다리는 청취자로부터.

AgalmA 2018-07-03 08:04   좋아요 1 | URL
바닷가는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종일 날씨 변화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듯^^
곧 휴가가실 거 아녜요. 바다 가시는 겁니까? 연의랑 바닷가 간 사진 많이 찍어 보여 주세요~ 연의 무슨 패션일라나 벌써부터 궁금!
ㅡ연의 팬클럽 1인으로부터ㅎ

겨울호랑이 2018-07-03 08:10   좋아요 1 | URL
이번 여름은 일 때문에 못갈 것 같고, 가을에 움직일 것 같네요. 그 전에는 워터파크나 가야겠어요... 아마도 연의 튜브 끌고 같이 바다 괴물을 사냥하러 갈 것 같네요..ㅋㅋ

AgalmA 2018-07-03 08:14   좋아요 1 | URL
바다 괴물ㅋ 두 사람 지쳐 자는 모습이 벌써부터 연상되는ㅎㅎ 애들 에너지는 정말이지bb

겨울호랑이 2018-07-03 08:23   좋아요 1 | URL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둘이 잠잘 때 소리도 작품이라고 하네요.ㅋ 아빠 고래와 아기 고래라나요. 저도 못 들어봐 뭐라 평하기는 어렵지만요.ㅋㅋ

AgalmA 2018-07-03 08:25   좋아요 1 | URL
괴물 부녀라 괴물을 잡으시겠다는 거군요ㅋ 얌전하게 생기신 분들이ㅋㅋ 안 그랬음 큰일이지....후후

2018-07-03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3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8-07-03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여행이셨네요, 부럽습니다~^^
Tash Sultana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완전 반가운 걸요.
jungle이라는 곡도 재밌던데요.
그나저나 올여름은 락페 안 가시는 겁니까?
궁금했는데 관련 페이퍼가 없으셔서~.

AgalmA 2018-07-03 15:38   좋아요 1 | URL
tash 좋죠^^ 다른 곡도 다 특색있더군요~
요즘 락페 라인업이 영 안 땡겨서 막바지에 기분이 부흥하면 휙 갈지도요ㅎ;
 
[eBook] 미성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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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국제 정치학자로 널리 알려진 E.H. 카는 초기에 러시아사 연구에 몰두했고 첫 저서로 도스또예프스끼 평전(1931)을 썼다. 그가 도스또예프스끼의 특색 중 하나로 꼽은 이런 말도 눈에 띈다

“똘스또이의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지배적인 인상은 <공간감>이라고 최근의 한 비평가는 말한 바 있다.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의 효과는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닫힌 느낌을 주는 데 있다. 자연의 넓은 시야에 결코 눈을 두지 않는 그의 관찰력은 무한한 인간의 기상caprice에로 더욱 응축되어 간다. 대부분의 위대한 작가에게는 일종의 사색적 거리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생활에서도 작품에서도 대도시의 협소한 구속적인 긴장의 희생자였던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이러한 거리감이 전혀 없다.”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을 조금 읽어본 사람이라면 카의 이 날카로운 분석에 이마 탁~ 탄복하리라. 도스또예프스끼 소설 특히 장편 소설을 읽을 때 특히 폐쇄적인 답답함을 내내 느끼게 되는데, 인물들은 도시 속에 갇힌 쥐 같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공간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늘 사건이 초점이다. 소설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곳곳의 실제 사건들, 러시아 귀족계급의 괴리와 빈민들의 삶, 각 인물들이 추구하는 사상과 이념 그리고 내면이 그의 소설의 주요 뼈대다미성년경우 다른 소설에 비해 답답한 느낌이 더욱 심한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미성년인 아르까지 마까로비치 돌고루끼가 자신의 이념과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수기 형식으로 말하고 있어 더 그렇다. 귀족 아버지(베르실로프) 하녀 어머니(소피야) 사이에서 태어나 버림받다시피 자라온 아르까지는 로스차일드 같은 부유한 저명인사나 사교계의 삶을 꿈꾸면서도 모든 걸 버리고 은둔하는 삶을 꿈꾸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서사 구조가 인물의 내면처럼 요동치며 파편적으로 펼쳐지다 보니 서사 전개에 집중해서 읽는 독자나 도스또예프스끼 여타 소설에서 느꼈던 고도의 몰입감을 기대하고 읽는 독자라면 이 소설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해설을 보니 내 반응만 유독 그런 게 아니었다. 평론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작품. 1권까지는 그럭저럭 읽었는데 2권부터는 중반까지 고역이었다.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무슨 결론을 도출하려 가고 있는지 후반까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몰락이 기다리려나 하며 총총 따라갈 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나가게 만드는 힘은 스릴러와 탐정소설 같은 장치인 편지에 있다. 노공작 니꼴라이 이바노비치 소꼴스끼의 딸 까쨔를 부자(베르실로프와 아르까지) 동시에 흠모하고 있다. 상황은 묘하게 꼬여 있는데 노공작은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 베르실로프의 딸 안나와 결혼하려는 와중이다. 아르까지는 이복 누니인 안나에게도 연정을 품고 있다. 이쯤되면 막장 드라마-_- 재혼을 생각중인 까쨔가 아버지를 정신병자로 매도한 편지를 썼던 소문이 퍼지며 편지가 상황을 뒤바꿀 키워드가 된다. 이것을 누가 가지며 폭로하느냐 마느냐가 모든 소동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유로지비 면모와 유럽 견문 등으로 스스로 확립한 이념으로 매력을 발산하던 베르실로프가 까쨔와 내연 관계였고 그녀를 죽일 생각까지 품게 되는 절정부까지 도달하니 그 역시도 정욕과 파토스 속에 양가적인 미성년 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한편 문제의 편지를 가지고 있던 아르까지는 이를 이용한 사교계 진출과 모종의 복수도 꿈꿔보고, 베르실로프가 어머니에게 돌아가길 바라는 복잡한 심경 속에 선의로 행동하려 하지만 그의 치기가 뒤통수를 치고 만다. 도스또예프스끼에게서 자주 느낄 수 있었던 셰익스피어적인 플롯인데, 일련의 헛소동은 평탄히 마무리된다. 도스또예프스끼 소설 중 가장 밝은 결말 아닌가 싶다. 그의 소설에서 드문 성장소설이자 그의 소설 변천과 집합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도스또예프스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고독하면서도 자신의 공상과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 관 같은 방이나 빈곤 속에서 자신의 기개를 지키려 하는 고집, 거미 같은 이미지에 자신을 대입하는 것은 아르까지뿐 아니라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백치』의 이뽈리뜨 쩨렌찌예프,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 등등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 모습은 도스또예프스끼 자화상이기도 하다.

“외부와 내부라는 것은 균형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인상 없이는 내부가 우위를 점한다는 게 위태롭습니다. 그러므로 신경과 상상력이 한 사람의 구성 요소 안에서 매우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도스또예프스키가 형에게 보낸 편지 중, E.H.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저 말은 이 소설에서 베르실로프(안드레이 뻬뜨로비치) 아르까지에게 한 말, 세묘노비치가 아르까지에게 쓴 편지, 그리고 세묘노비치의 입을 빌려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고자한 시대 통찰과 상통한다
     

“저는 안드레이 뻬뜨로비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 같은 인간, 당신처럼 〈고독한〉 젊은이에 대해서는 솔직히 불안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당신과 같은 정신적 특성을 지닌 젊은이는 적지 않게 있습니다. 또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 재능은 사실 언제나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어 나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한 특성은 몰찰린 같은 아주 비굴한 성향으로가 아니면,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감춰진 욕망 쪽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무엇보다도 먼저, 조화로운 질서와 〈점잖은 기품〉(당신의 용어를 빌려 말합니다)을 지향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감춰진 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젊음이란 이미 그것이 지니고 있는 열정만으로도 순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젊음의 열정이 뿜어내는 폭발적인 광기에는 어쩌면 바로 조화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과 진리를 향한 탐구 정신이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많지 않은 수의 동시대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그런 것을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도 모를 그런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사안들을 접하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조화와 진리를 겨우 발견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 한 가지 덧붙인다면 과거에는, 그렇다고 아주 오래전은 아니고 약 한 세대쯤 전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동정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그들은 거의 언제나 결과적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 계층과 아주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고, 그것과 융합하여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그들이 자신들의 활동의 첫 무대에서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무질서한 점이나 불안함, 그리고 가정 환경에서도 좋은 바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또 훌륭한 가문적 전통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교양의 배경이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들 스스로가 직접 그것을 추구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차차 그러한 것에 적응하고 그 가치를 존중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약간 다릅니다. 그들이 나중에 융합할 수 있는 대상이 지금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세묘노비치)


 어쩐지 지금의 불평등한 혼란 시국, 흙수저의 어려움에 처한 젊은 세대와도 맥이 닿는 말이지 않은가. 이 소설이 똘스또이 3부작 유년 시대, 소년 시대, 청년 시대를 의식하며 구상한 것이라고도 하나 이 성장소설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개인적 트라우마, 딜레마도 담겨 있지 않은가 짐작한다. 도박병이나 여러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성년적인 모습이 그의 현실적 페르소나로 읽히는 여지가 많다. 그리고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유럽의 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러시아 민족주의, 무신론자와 고행 수련자(유로지비) 면모가 결합된 베르실로프 캐릭터는 미성년』 이전 작품인  『백치, 악령』, 이후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계속 등장하는 설정이다. 이 캐릭터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인간 이상형의 좌절된 혹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내부 결함이 내재된 인간의 본모습으로 본 게 아닌가 싶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백치최종 원고 작업일 때 내 소설의 주요 생각은 지극히 완전한 사람을 그리는 데 있다 말했다. 백치 미쉬낀을 통해 예수적인 인간형을 이상적으로 제시했듯이미성년에서도 베르실로프를 통해 도스또예프스끼는 재차 실천적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도덕주의적 헌신을 추구하는 이상, 내 자신의 사상에 충실히 매진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실제로 나로 인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을 평생 동안 단 한 사람이라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지.
…(중략)…
다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나름대로 가장 숭고한 차원의 교양을 얻었다는 사람이 자신의 심오한 사상을 추구하는 사이에, 때로 완전히 현실적 문제에서 멀어져서 아주 폐쇄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냉담한 인간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아주 어리석은 사람으로 되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지. 그것도 처음에는 실생활에서만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사상적 측면에서까지도 그런 어리석은 천치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생활에도 진지하게 임해 단 한 사람이라도 정말 행복하게 만들 만큼 노력을 기울여야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고 본인 자신도 거듭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 있게 되겠지. 물론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설득력이 약하겠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다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습관이 된다면 아마도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게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것을 직접 체험해 보았고. 물론 처음에는 농담조로 시작했던 일이지만, 이 새로운 계율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켜 가면서 비로소 나는 가슴속에 깃들어 있던 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점차 견고해져 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어.”(베르실로프)

그런 대상으로 소피야를 떠올리고 데려오기까지 한 베르실로프는 우연히 만난 까쨔에게 숙명을 느끼고 정욕에 사로잡힌다. 이건 도스토예프스키의 내연 관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상과 현실, 내면과 외면의 조화는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 하나로도 어려운데, 음모와 돈과 명예의 탐욕까지 끼어들면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해진다.   

“고독 속에 스스로를 닫아 두지 마시오. 자신을 자연 앞에 내세워요. 조금이라도 더 외부 세계로, 외적인 사물로 몸을 내세우세요.”(도스또예프스키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 중, E.H.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도스또예프스끼를 읽으면 우리는 죄인 아닌 자 없고 백치이고 미성년이라는 메시지를 늘 읽게 된다.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단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하기도 힘든 이 삶, 스스로의 부조화를 곱씹으며 이제 도스또예프스끼 5대 장편 소설의 마지막 관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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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7-03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 완독을 응원하면서, 한편 부럽습니다. ^^

AgalmA 2018-07-03 02:03   좋아요 1 | URL
처음에 기세좋게 시작했다가 영 진도를 못 빼고 있었죠^^; 이북 덕을 좀 봤습니다ㅎ 목표하던 거 하나 끝낼 수 있어서 소확행이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