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카시지 - 세계문학전집 18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2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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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골수적인 소녀의 이기적 망상, 그에 휩쓸린 가족의 붕괴, 외로움과 성적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 딜레마, 전쟁에 참여한 남성을 통해 본 인간의 집단 광기와 폭력 등의 소재가 이언 매큐언『속죄』(2001)와 무척 유사하지만,『카시지』의 원조는 오츠 자신의 1996년작 『멀베이니 가족』이다. 그 소설은 1970년대 이상적 가정이었던 멀베이니 가족이 강간 범죄로 이십여 년 동안 해체와 고립을 거쳐 용서와 화해를 위해 다시 모이는 과정을 그린 것인데, 『카시지』는 다른 시대 다른 변주라고 하겠다. 감옥의 열악한 환경, 사형 제도, 이라크 전쟁의 폐해, 페미니즘적 인권 문제 등이 이 소설에서 또 다른 감상 포인트다.

이 세상은 각자의 세계에 갇힌 자들이 모여 만드는 감옥이자 행복을 누릴 수도 있는 실험의 장이라는 것. 그것은 애초에 선악으로 말할 수 없다.

어떻게 힘이 자존심만큼이나 빨리 몸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지 끔찍했다.

인턴은 이곳이 미친 곳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상황의 표면, 테두리와 윤곽만 보았기 때문에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겉만 봤다.
누군가의 자존심—자부심, 진실성—권력—아주 살짝만 건드려도 즉각적인 반발이, 광적인 반발이 튀어나왔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무수한 개별적 발걸음.
제논의 역설을 고쳐 말하면 그랬다. 사람은 유한성 속에서 무한성과 마주한다. 당연히 머리가 조각조각 흩어질 것이다.

선善을 알면 선한 일을 하고 싶어진다.
선을 모르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9학년 때 크레시다는 플라톤을 읽었다. 아버지의 대학교재였던 얼룩지고 두꺼운 『플라톤의 대화 선집』에 「공화국」 「법률」 「향연」이 있었다.
성실한 학생이었던 아버지가 책에 밑줄을 긋고 설명을 적어놓은 부분을 발견하는 것은 열네 살 소녀에게 황홀한 일이었다. 다른 교재들처럼 이 책 표지 안쪽에도 메이필드, Z라고 적혀 있었다.
「메논」의 한 대목 옆에는 빨간 펜으로 질문이 적혀 있었다. 소크라테스 진심일까? 「메논」은 미덕에 대해, 또 악을 알면서도 악을 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청년 메논의 대화였다. 교육받은 적이 없지만 기초적인 기하학 지식을 가진 노예 소년이 등장해, 지식이 ‘자연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기억이라고 이야기한다.
「메논」의 교훈은,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탐구, 모든 지식은 이미 기억된 것을 상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간을 멈추는 건 순리를 거스르는 거야. 시간을 멈추려고 애쓰는 건. 당신이 그랬잖아, 플라톤의 우매함은 그가 시간을 ‘멈출’ 수 있다고 믿었던 것, 변하는 것은 선할 수 없다고 믿었던 거라고. 하지만 우리 삶은 변해, 제노. 신은 우리가 변하지 않고 남아 있길 바라지 않으실 거야. 우리 딸이 우리 인생에서 사라진 건 하느님 계획의 일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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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9-14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시지>에 철학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는 못 읽었습니다만, 영화 <Atonement>는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납니다. AgalmA님 많이 바쁘셔서 그런지 뜸하게 뵙는 듯 합니다. 추석연휴 잘 보내세요!^^:)

AgalmA 2019-09-15 00:21   좋아요 1 | URL
뜸하다뇨ㅎ <독보적> 이벤트에 발맞추고자 요즘 하루 한 번씩은 북플 꼭 들리고 있는데요 ㅎ;
제 개인 시간에 더 집중하려 하기 때문에 예전만큼 다른 분들 서재 마실은 자주 하지 않아 그렇게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오가다 보면 서로 살아있는 신호가 되는 거겠지 저혼자 쿨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겨울호랑이님도 연휴 잘 보내십시오. 이제 하룻밤 지나면 이 꿀 휴식도 아듀네요. 허허)))

겨울호랑이 2019-09-15 09:02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자신에게 필요한 시간이 무엇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독서 시간 되시길 바라며 남은 연휴 잘 마무리 지으세요!^^:)

카알벨루치 2019-09-15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역시 분주히 열심^^명절 잘 보내셨죠? 건강 잘 챙기시고 편안한 밤 되세요~

AgalmA 2019-09-15 23: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님도 연휴 동안 충전에 좋은 시간되셨길. 일교차가 심한데 감기 조심하시고요.
 
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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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읽는다는 사람치고 자기 책을 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다.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면 당신은 어떤 콘셉트로 꾸릴 것인가. 요즘은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각광받는 직종으로 뜨고 있고, 인공지능의 위협 속에서도 인간의 크리에이터 능력이 강점으로 떠오를 거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 책의 저자나 편집자의 장점도 편집 디렉터에 있다고 본다. 이 책은 1부(게으르게)-2부(불편하게)-3부(엉뚱하게)-4부(자유롭게)-5부(광대하게)-6부(행복하게)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이야기 흐름으로 맞춰져 있다. 또한 골방에서 자기 세계를 고심하는 창작자에서 출발해 시대를 바꾼 스티브 잡스의 인식 전환의 메시지로 끝나는 구성이라 수미쌍관도 잘 맞는다. 편집자의 노고에 저자가 매우 감사했을 거 같다. 

늦게 꽃 핀 대가들의 일화, 게으른 성격 한탄, 커피 같은 기호식품의 소비에 폼도 곁들이는 우리 심리,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과 아쉬움 등 공감대를 형성하는 카페 수다처럼 진행되어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꽃핀다"의 의미는 유명해지는 것보다도 자기 분야에서 스스로 인정할 만큼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결지의 뭔가를 이뤄서 극소수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거나 생각을 전환시키고, 장기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ㅡ 「늦게 꽃핀 대가들」

 

 

저자만의 시각이 곳곳에 초코칩처럼 박혀 있다. 영화 「패터슨」에서는 패터슨이 건장한 백인 남성이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삶의 여유에 대해서 생산적인 프로 불편러로서 말한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 지적도 여러 챕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해자’를 ‘패배자’로 경멸하는 강자숭배적 사고 &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인정의 거부 &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합리화해서 공정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으려는 경향(「피해자를 비난하는 심리」), 폭력을 탐닉하는 세계(「타인의 고통에 대한 잔혹한 호기심」), 희생양으로 유지되는 사회(「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어머니의 심장 이야기’가 싫다」, 「고기를 좋아했건만」), 사회안전망 없는 국가에서 가족주의 폐해(「차마 두고 갈 수 없어서?」), 예술계의 성폭력(「“틀을 깨라!”가 이상하게 쓰일 때」), 통념을 깨는 영화 감상기(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케빈에 대하여」,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 삶의 의미를 삐뚤게 찾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파레이돌리아,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먹방의 전통」, 「셀럽, 욕을 먹어서라도 되리라」 등.

주제에 맞춰 소스가 정말 잘 짜였다고 생각하는 에세이가 몇 편 있는데 그중 「사랑을 거절할 권리도 있소이다」는 이렇다. 저자는 극혐하는 3대 속담으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를 거론한다. 일방적인 사랑을 미화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신화에서부터 조반니 보카치오 단편 소설집 『데카메론』(1351)까지 엮으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400년 전 세르반테스의 생각보다 케케묵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야지 강요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럴진대, 왜 오로지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 말했다는 이유로 내 뜻을 억지로 굽혀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까? (…) 나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고독을 선택했습니다. (…) 나는 그것을 그에게 얘기했습니다. 욕망이 희망으로 지탱된다고 한다면, 나는 그리소스토모(상사병으로 죽은 청년)에게 아무런 희망도 준 적이 없으므로, 나의 잔인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집착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ㅡ 세르반테스 『돈키호테』에서 마르셀라의 말

 

 

한국 사회 비판도 지치지 않고 나온다. 『동국세시기』와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에서 반대되는 예시를 가져와 며느리 등골 휘게 만드는 한국의 명절 문화를 비판하는 「왜 우리 명절은 재미없을까」, 조선 시대 「평생도」를 보며 성공한 삶의 기준과 양상이 여전히 획일적이라는 「엄친아와 비교강박의 역사」, 질문 없는 사회를 만드는 문화에 대해서는 「나대면 맞는다? ‘잘난 척’이 욕인 사회」, 결벽증적인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벚꽃 논란과 비틀린 민족주의」, “‘규율사회의 복종적 주체’로서 남 눈치를 보는 동시에 ‘성과 사회의 성과 주체’로서 ‘나 자신이 인정하는 나’가 되어야” 하는 한국 사회의 복합적 문제에 대해서는 「“뭐든지 될 수 있어”의 피로와 뜻밖의 위로」, 세계 주요 박물관에서 한국 섹션의 빈약한 모습을 보며 한국이 “우리 전통의 우수성”에 취한 은둔자는 아닌가 자문하는 「국뽕과 국까 사이에서」, ‘블랙페이스(Blackface)’를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는 한국의 인종차별 의식의 빈약함을 꼬집는 「선택적 세계화의 민낯」,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여성이 ‘하향선택결혼’을 하면 해결될 것처럼 풀었던 한국의 인식 문제를 비판하는 「경제학 농담으로 푸는 저출산 해법」 등등 익숙한 이야기들이 한눈에 보이게 모이니 읽는 내내 한숨도 지치지 않고 쉬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핵심은 중심을 갖추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꿔나가는 삶을 살라는 거다. 불교 경전 『열반경』에서 복을 주는 여신(공덕천)과 화를 내리는 여신(흑암천)이 한 쌍으로 다니듯이, 겨울과 봄 / 죽음과 삶 /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가 맞물려 있듯이 우리는 희비와 고락의 굴레에서 내내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살아있는 한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그런 삶 속에서 우리는 매일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삶을 채워나가는데 급급할 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부터 우리는 제대로 점검해봐야 한다. 꿈이 광대하든 소박하든 이건 정말 게을러서는 안 될 문제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에서 한 승려는 "행복을 목적이라고 믿는 게 첫째 실수다."라고 답해 준다. 자연스럽게 겪는 좋은 감정의 경험들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영국 행동과학자 폴 돌런은 비슷한 듯 다른 의견을 낸다. 행복은 막연히 추구하거나 파랑새처럼 재발견하는 게 아니라, 즐거움과 목적의식의 경험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는 견해다."

ㅡ 「행복도 경쟁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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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9-08-05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요!!! 저도 돈키호테 보면서 마르셀라 편 볼 때 진짜 분노했어요. 싫다는데 그 사랑을 안 받아줬다고 비난받다니... 저도 이 책 읽고 있는데 리뷰 고맙습니다 ㅎㅎ 오멜라스 관련 내용 얼른 읽고 싶어요.^^

AgalmA 2019-08-09 07:08   좋아요 0 | URL
일상어로 진행되어서 금방 읽게 되더군요^^ 너무 오래전에 <돈키호테> 읽어서 이 부분이 아주 생소해서 아, <돈키호테> 어서 읽어야지 했습니다^^;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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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는 <시대의 연극(Theater der Zeit)>지와의 인터뷰(『이름/기타맨』, 지만지 고전선집)에서 하이너 뮐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다고 했다. “문화의 상황은 죽은 자와의 교류 방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래된 집’은 포세에게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삶을 조종하는 것은 정체성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관계들”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가족과 집은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무대이다.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도 그랬다.

 

 

1부는 요한네스가 태어나는 풍경이다. 2부는 늙은 요한네스가 잠에서 깨어나는 걸로 시작한다. 집은 한 인간이 세상에 속하고 속하지 않게 되는 중요한 장소다. 누군가 떠나고 또 다른 이가 그곳에 살게 되듯이 인간의 몸과 역사도 비슷하다. 사람의 삶은 비슷비슷하고 그들이 사는 바다와 일상도 반복의 연속이다. 어부 올라이와 마르타 사이에 태어난 요한네스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처럼 어부인 요한네스는 에르나와 결혼해 태어난 아이 중 하나에게 올라이라는 이름을 준다. 요한네스의 친구 페테르의 아내 이름은 마르타다. 파도에 이름을 붙일 수 없듯 이름도 사람에 잠시 머물다 간다. 그러나 이 하루는 어쩐지 모든 것이 깃털처럼 가볍고 고요하고 너무 다르다. 온통 이상한 일뿐이다. 페테르는 살아있을 때와 좀 다르고 수시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페테르에게 돌을 던져 몸을 통과하는 걸 봤지만 이상하게 적응이 된다. 요한네스는 친구인 페테르가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예전처럼 조업을 하러 바다로 가고 하루를 같이 보낸다. 예전에도 겪은 적이 있는데 낚시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미끼가 가라앉지 않는다. 흠모했지만 주인집의 아이를 배 인연이 되지 못했던 죽은 노처녀 페테르센도 만난다. 죽은 아내 에르나도 여러 번 만난다. 기이한 하루를 보낸 뒤 마침내 요한네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석양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난 자네가 보이는걸, 요한네스가 말한다

몸을 잠시 되돌려받았어, 자네를 데려올 수 있도록, 페테르가 말한다

이제 고깃배를 타고 떠나자고, 그가 말한다

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말한다

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먼, 페테르가 말한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하네스가 묻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만 어떤 죽음에 대해서도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다. 또, 죽음은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진실은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욘 포세는 죽음이 삶을 말하는 방식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소설에서는 내용과 형식도 일치한다. 이 소설엔 마침표가 없다. 당신은 바로 위 인용에서 마침표가 없다는 걸 눈치챘는가?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걸 눈치채는 순간은 모두 다르겠지만 죽음만큼 극명한 사건이 있을까. 행간을 가득 채우는 침묵과 언어의 정제는 노르웨이 피오르 해변에서 살아온 욘 폰세의 정서에서도 기인했겠지만 누구도 삶에서 승리자일 수는 없다는 그의 멜랑콜리 사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범신론에 가까운 무신론을 드러내는 요한네스의 아버지 올라이의 마음에서도 나타난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신은 홀로 이 세상과 인간들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래 여하튼 존재하기야 하지만, 창조과정에서 방해를 받은 거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는 아마도 무신론자인 것이다, 그는 믿음의 서약을 지킬 수 없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척할 수도 없다, 보고도 못 본 칙, 이해하고도 이해 못 한 척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아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며, 말이라기보다 어떤 고민일 테니까, 굳이 말하자면, 그의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 아니다, 누군가 세상에 등 돌릴 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 그래 이상하게, 그는 그런 식으로 한 개인은 물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거리의 악사가 훌륭한 연주를 할 때, 그는 그의 신이 말하려는 바를, 조금은 들을 수 있다, 그래 그럴 때 신은 거기 있다. 좋은 음악은 세상사를 잊게 해주니까, 하지만 사탄이 이를 좋아할 리 없으니, 정말 훌륭한 악사가 연주를 하려 하면, 그는 늘 많은 잡음과 소음을 준비한다, 정말 끔찍하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저 방 안에서, 어린 요한네스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어린 요한네스, 그의 아들, 이제 그의 어린 아들은 이 험한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 겪는 가장 힘든 싸움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의 몸속에서 나와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자애로운 신뿐만 아니라 미약한 신이나 사탄과도 연결되어 있으니, 아니, 이제 부질없는 생각들은 그만둬야지, 이게 대체 뭔가, 원 정말이지, 그래그래, 그렇게 생각하며 올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요한네스는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죽는 순간도 알지 못했다. 딸 싱네와 마주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은 만남인가 이별인가. 하나이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차이가 없는 삶의 리듬 속에 모든 것이 고요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욘 폰세의 언어는 압축된 닫힌 텍스트인데도 이상한 소통과 부재가 넘실거린다. 이 파도는 낯설지 않으면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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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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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없이 우리는 이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 ‘의식이 없다’라는 통보를 받을 때 우리가 참담해지는 이유이다. 줄리언 제인스는 “의식은 모두 언어는 아니지만 언어로 생성되고 언어로 접근된다”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문예반 선후배 사이였던 상희와 다언은 시를 쓰고 싶어 했지만 그리하지 못했다. 상희와 다언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다언은 ‘참회록’ 비슷한 걸 쓰고 있다고 말했다. 십육 년 넘는 시간을 아우르며 과거를 회상하는 이 소설의 주요 화자가 다언이니 이 책이 그 결과물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시인이 된 사람은 가장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윤태림이다. 불안과 우울, 죄의식으로 가득한 채 구원을 바라는 심리 상담과 시의 내용이야말로 참회록이지만 온전한 의식이라 볼 수 없다. 이렇게 된 데에는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있다. 알다시피 죽음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과거완료라 더 난공불락의 요새다. 어떻게 접근하든 더 많은 의미와 의문을 낳는다. 해언의 의문의 죽음도 그랬다.

 

 

 

사망했기 때문에 원래 이름이었던 ‘혜은’으로 개명할 수 없었던 해언의 자리를 어떤 식으로든 되돌리려 했고, 해언의 독보적인 매력이었던 아름다움을 다언이 자신의 성형수술로 복원하려 했지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무턱대고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끝나는 게 삶”이듯 다언이 언니 해언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은 돌연하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해언의 죽음 관련자가 적당한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난쟁이 엄마와 누이동생만 있는 가난한 집 장남이라 새 신을 사지 못해 신을 직직 끌고 다니고 열두 살 때부터 푼돈을 벌며 학교에 다녔고, 열아홉 살에 살인 누명을 쓰고 경찰에게 매를 맞고 이웃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학교에서도 쫓겨난 뒤 군대에 가서 육종에 걸려 늦은 조치로 불구의 몸이 되어 세탁공장에 취직해 화상을 입으면서도 베테랑이 되었지만 육종이 폐에까지 퍼져 서른 살에 죽는 한만우의 인생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한만우우우 이 세사아앙 야속한 임아”의 가사 때문에 별명이 「한오백년」이었던 소년에게 단 한순간도 신의 섭리나 온정은 없었다.

한계도 기한도 없어 상상이 실제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다언의 참회가 이 소설의 처음이라면, 해언이 죽음으로 향해가던 그 길에서 교차했던 한만우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처음 느꼈을 낯선 희열의 순간이 이 소설의 마지막인 것은 바로 이어지는 「작가의 말」에서 이해된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을 수 없는” 사람 삶에 대한 연민. 평(平)하지 못한 삶의 복판에 있는 ‘당신의 삶이 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가의 상상은 거기서 멈춘다. 그다음 상상은 우리의 몫이다.

 

다언이 선택한 복수와 참회의 방식도 최선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2002년 해언을 잃었을 때는 “누군가 봄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듯이” 그랬지만, 2019년의 다언은 자신이 무엇을 잃는지 알고 있다. 신을 믿지 않더라도 아니 그래서 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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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도 못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3
김중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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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은 새 작품 집필에 들어갈 때마다 처음 같은 난관에 봉착한다고 토로한다.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탄생시키려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시인은 어떨까. 알다시피 시는 관찰과 묘사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시집은 단지 시 묶음이 되어서도 안 된다. 시는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를 짓는 창작이 아니다. 시적 자아가 있더라도 한 권의 시집은 시인이자 한 인간이 살아낸 삶의 여행기이자 기록의 변형이기도 해 우리는 소설보다 시를 더 진솔하게 느끼기도 한다. 시는 당위가 아니라 삶의 난처를 말하기에 우리의 공감을 더 끌어낸다. 세계를 보는 뛰어난 통찰을 드러낸 시의 선례가 있었기에 독자들은 시인에게 선지적 역할 부담을 지우기도 한다.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생활 시를 쓰며 만족하는 시인이 아닌 이상 시인으로 사는 건 죽을 맛일 거 같고 한 편의 시를 쓰는 건 지옥에서 보내는 한철이자 편지 같을 거 같다. 1993년 『황금빛 모서리』 시집 이후 김중식은 25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울지도 못했다』를 냈다. 첫 작품의 성공 이후 두 번째의 어려움을 말하는 소포모어 징크스란 말이 있지만 『울지도 못했다』를 읽고 나니 김중식 시인은 세 번째가 더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첫 시집에서 보여준 거침없는 비관주의를 25년간 이겨 내려 한 노력이 두 번째 시집에 역력한데, 종교적 응축으로 가득한 단장(短章)을 앞으로 효과적인 시어로 보여줄 수 있을까. 시인은 이런 의지를 밝힌다.

 

 

 

첫 시집에 대해 차창룡 시인이 “매우 실험적인 듯하면서도 시의 전통을 버리지 않았고, 시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자유로웠다. 구어체가 주류인 듯하면서도 문어체도 근사하게 구사하였고, 서정적이면서도 풍자적이고, 격정적이다가 자조적이다가 냉정해지거나 차분해지기도”(p108) 한다는 평에 나도 동의한다. 두 번째 시집에서도 그 성향은 변함없으나 구조화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차창룡 시인의 애정 어린 해설은 이 시집과 시인에 대해 좋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인간이 왜 종교, 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나는 자주 생각한다. 창작이 다른 세계의 구축으로 현실을 말하듯이 종교도 이 세계의 극복을 위해 제3자의 관점에서 필요한 좌표일지도 모르겠다. 2차원에서는 3차원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어느 차원의 어떤 존재로 있든 끝과 시작의 삶을 가진다면 고통의 번뇌를 피할 수 없으니 우리는 그것이 사라지는 천국이나 해탈을 희망한다.

시인은 “우는 이유를 잊을 때까지 우는” “우리는 가끔씩 울어야 한다”(「물결무늬 사막」)고 말하고 있다. 삶도 시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우리는 망각보다 더 심각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이유도 모른 채 '어떻게'에 골몰하며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깨달음이 어려운 것이겠지만. 부질없음, 덧없음, 그 극복에 대한 노력이 우리를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데 시를 쓴다는 것은 한층 더 어려운 힘이 필요하다.

“단 한 번의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이탈한 자가 문득」, 『황금빛 모서리』)

김중식 시인의 이 문장은 그의 시들의 함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지상에 건국한 천국이 다 지옥”이었고, “천국은 하늘에, 지옥은 지하에, 삶과 사랑은 지상에” 라고 했다. 삶을 지옥으로 보든 천국으로 보든 우리는 삶에서 삶으로 이동하며 끝도 이곳에서 맞는다. 울지도 못하겠을 때 시가 함께 있어 그나마 다행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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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7-12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이야기하는 종교들도 결국 인과율에 따라 죽음 이후의 삶이 결정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종교와 관계없이 현세의 삶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겠지요....^^:)

AgalmA 2019-07-13 03:45   좋아요 1 | URL
요즘 드는 생각이... 열역학 1, 2 법칙이 참 중요한 걸 말했다 싶거든요. 사라지는 건 아닌데 다르게 방출되며 엔트로피를 막을 수 없다는 게 대표적 인과율 아닌가 싶습니다. 그걸 인간적으로 해석할 건 아닌 것 같지만 살아 있는 상황에서는 중요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