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해설을 쓴 서영채 평론가는 이 책을 두고 “지적인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것을 통한 공감력이 포스트 계몽 시대에 유효한 새로운 계몽의 양식일 수 있으리라”고 마무리했다. 최은영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안다. 최은영 작품이 보여주는 따뜻한 유대의 정서와 온기가 지금 문학에서 간과되거나 희박한 것들이라는 암시다. 우리는 더 참신함, 독창성, 사회 비판적인 책임 의식까지 지닌 전투적이며 영리한 소설을 계속 요구해왔다. 이건 한국 문학의 경향만도 아니다. 어디 어디 문학상을 받은 소설을 선전할 때 저 요구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니까 말이다. 최은영 작품들은 자체의 의미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위치에 있어서 지금, 바로 지금 더 의미 있다. 최은영 작품을 읽기 전까지 이 중요한 실종을 잊고 있었다.    
    

 

 

이 소설집을 읽기 전에 도스또예프스키 『백치』를 읽었다. 두 작품을 나란히 읽은 것은 아프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내가 받은 인상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역부족을 느끼며 이 글을 쓴다. 도스또예프스키는 『백치』를 러시아가 아닌 해외에서 구상하고 집필까지 마쳤다. 유물론과 과학적 합리주의, 니힐리즘의 팽배 그러한 서구 유럽의 영향 속에서 혼란스럽고 병들어 있는 러시아와 인간의 회생을 꿈꾸며, 도스또예프스키는 고심 속에 ‘백치’라는 상징적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모두가 너무 쉽게 얕잡아보고 이용하려 들며 비웃지만, 미쉬낀은 가난한 기사이자 돈키호테이고 유로지비이자 러시아적인 그리스도이며 백치라서 모두를 사랑하려 했고 누구라도 마침내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모두가 자기의 이익과 사상을 내세우기 급급할 때 미쉬낀은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쪽을 기꺼이 택했다. 모두가 창녀라고 멸시하는 나스따시야의 영혼을 살폈고 결혼으로 구원하고자 했고, 살인자를 사형함으로써 대갚음하는 사회가 되는 것에 분노했고,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에게도 사기를 치는 이에게도 우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누구와도 적도 라이벌도 원수도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가장 닮지 않은 로고진의 죄의 현장에서 눈물 흘리며 아파하다가 영영 백치가 되어 버린다. 누구보다 강력한 매력에도 작품에서 가장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백치 미쉬낀의 ‘희생과 환대’의 의미는 이 현실에서도 아직 유효하다.
    
도스또예프스키는 『백치』를 완성하기 두 해 전인 1867년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을 읽고 ‘최근 10년 동안의 세계 문학 작품 중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도스또예프스키는 『백치』에서 여성의 인권에 대해 자주 거론하며 주인공 중 하나인 나스따시야가 자주적인 여성의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에 공을 많이 들였다. 하지만 보바리 부인처럼 나스따시야도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고 만다. 한 마디로 요약하기 곤란한 대작들을 이렇게 스케치하는 것은 매우 빈약하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도스또예프스키가 소설을 쓰던 즈음에서 지금 최은영이 소설을 쓰는 이 시기까지의 흐름을 보려는 것이다. 리얼리즘 문학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반영할 수 있다고 여기며 계몽이나 오락의 수단이 되는 것에 부응했다면, 20세기에 들어서며 과학과 기술의 지나친 영향력, 세계 대전을 목도한 모더니즘 문학은 정치, 사회, 종교, 도덕, 과학 전 분야에 이의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문학의 특징인 주관적 경험과 실존적 개인주의, 예술적 탐구는 필연적 수순이었다고까지 생각된다. 역사에서 필연 운운은 손쉬운 계산법이지만 빈자리를 채우는 과정을 보는 것은 이런 기시감을 일으킨다. 『보바리 부인』도 『백치』도 당시 문학 사조에 국한해 보기 어려운 여러 특징들을 함축하고 있다. 고전이라는 무소불위의 힘 때문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가지는 물음표들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보바리 부인은 물론이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아직도 우리 주위 인간의 모습이다. 어째서 인간의 행복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토록 어려운가. 왜 백치 미쉬낀은 모두가 필요로 하지만 여전히 누구도 쉽사리 될 수 없는 인간형인가. 그런데 지금, 내 눈에 최은영은 그들의 장점과 시대적 고민들을 계승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최은영 작품에 나타나는 인간의 곤궁한 처지, 하나의 해법이자 종교적이기까지 한 여성적 유대의식, 도스또예프스키가 『백치』를 통해 전달하려던 메시지가 곳곳에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도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씬짜오, 씬짜오」, 86쪽)


“곰의 이야기를 들을 때 엄마는 곰이 되어서 곰에게 이야기하는 이모의 모습을 봤다. 곰아, 밥 먹어. 그 말을 하고 엉엉 우는 이모의 모습을 바라봤다. 곰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면 이모는 세상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후로도 죽은 개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곤 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잃고 나서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던 이모의 모습을.
엄마는 이모를 사랑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100쪽)


““성경은 천국을 언급하지만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죠. 정직하게 말해서 그곳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인식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수사가 대답했다.
“인간의 인식이 제한적이라는 것에는 저도 공감해요. 하지만 상상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선 잘 모르겠네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도 있나요? 상상에 제한이 있나요?” 카로가 다시 물었다.
“글쎄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상을 하든 천국은 그 상상을 뛰어넘는 상태일 겁니다. 천국에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 천국은 영혼의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수사가 말했다.
(중략)
슬플 때, 불안할 때, 화가 날 때, 누군가가 내 마음을 쥐고 흔들 때, 나는 그 이름들을 그저 간절하게 불렀고,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현실의 고통에서 나를 분리시켜줬다. ‘원시지구’로 시작해서 ‘여러 종류의 발굽이 있는 동물’까지 중얼거리고 나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준 것 같았다. 그럴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중략)
“그 눈물에는 떠난 이들에 대한 감미로운 애정이 담겨 있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 아무런 조건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생활을 함께했다는 행복. 그 지속될 수도, 반복될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함께 존재했다는 행복. 그 눈물은 고독이 없었던 시간에 대한 애도였다.”
(「한지와 영주」, 179쪽)


“내가 병자도, 선배가 망자도 아니었던 그때, 우리는 아직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때.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다.
(중략)
노래가 끝나고 테이프가 회전하는 소리를 듣다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율라가 나를 보며 애써 웃고 있었다. 노래는 끝났고, 우리에게는 선배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유람선 난간에 기대서 다리와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주기로 했다. 그건 율라와 나의 첫 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
(「먼 곳에서 온 노래」, 210~211쪽)


“딸을 품에 안으면 모든 통증이 누그러졌고 다음날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났다. 세상의 누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밝고 예쁜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길 것인가.
그 시절은 갔지만 여자는 미카엘라에게서 받은 사랑을 잊지 못했다.”
(「미카엘라」, 221쪽)


아이들에게 아이다움을 때론 변덕스럽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든 속한 구성원으로서의 소임과 책임을 지우고, 문학뿐 아니라 무엇이든 이래야 한다고 각자의 요구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가 마음 둘 곳도 쉴 곳도 있을 리 만무하다. 누가 무엇이 우리를 어떻게든 해 줄 수 없다는 낙담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찾고 떠돈다. 그런데 여기 어떤 자리가 있다. 외톨이들이 만나서 서로를 치유해나가려는 세계, 언어와 나이와 성별 등 차이가 더 많은 인물들이 서로를 통해 보는 공간이 곧장 독자에게도 마련되는 자리, 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가 선뜻하지 못하는 앞으로도 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뉘우침과 사과와 용서, 배려 등 많은 정서들의 해변. 그래서 최은영의 작품이 모으고 발산하는 공감의 힘은 글로 이뤄진 이해타산적인 작법과 계산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결코 한자리에 모여 웃지 못하던 할아버지와 엄마와 주인공을 함께 찍은 쇼코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아주 오랜 시간 뒤에 아프게 그 자리를 툭 보여주듯 최은영 작품 속에서 고리들은 미약하지만 강렬한 감동을 준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사라져야 할 것들과 만나서는 안 될 사람과 일이 셀 수없이 많은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곳이 변두리가 아닌 중심으로 빛나는 곳에서 나도 당신도 웃는 모습이면 좋겠다. 그런 영혼의 상태일 땐 울어도 웃는 모습일 것이다. 하나하나 소중하게 이름 부르고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소설 속에서조차 어렵긴 하지만 우리는 죽을지언정 찾는 걸 포기한 적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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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06-14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영채 평론가의 저 말 와닿네요. 확실히 최은영 작가는 정서적인 것을 건드리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AgalmA 2018-06-16 10:16   좋아요 0 | URL
단점이나 한계도 보이지만 장점이 그걸 상쇄할만큼 강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곧 신간 나온다고 들었는데 어떤 식으로 발전하고 있을지 기대됩니다. 최근 <악스트>에 실린 단편 「상우」도 꽤 괜찮게 읽었거든요. 보통의 얘기인데도 잔상을 많이 남기는 매력의 작가인 건 분명해요.

겨울호랑이 2018-06-14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가면서 남들이 세운 벽, 우리가 만든 벽으로 인해 우리가 만나는 세계는 점점 좁아만 가는 것을 느낍니다.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이들은 처음 만나도 놀이터에서 곧잘 노는데 말이지요. 우리의 편견을 깨지 않는한 우리의 고립감은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AgalmA 2018-06-16 10:23   좋아요 1 | URL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매일 다짐씩이나 하며 임하는데도 참 쉽지 않아요~_~; 다 때려치고 싶고 죽일듯이 미워지는 게 또 삶인지라....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의 상처와 감정이 계속 나를 감싸고 있어 정말 쉽지 않고 괴로울 때도 많고요. 타인들도 이렇겠지요. 아파도 상처받아도 마음을 닫는 건 결국 모든 걸 포기하는 선택이 되겠죠. 그런 막다름에 다다르지 않게 서로 도와야하는데.....
저는 계속 ˝어렵다 정말 어렵다˝만 염불처럼 중얼거리며...~_~

겨울호랑이 2018-06-16 10:34   좋아요 1 | URL
저는 그냥 아플 때면 ‘아픈가보다‘ 하고 몇 번 혼자 토닥거리다, 곧 툭툭 털어버리는 것 같아요. 상처는 아마 저와 계속 있을 것이기에 부정할 수 없지만, 이 녀석은 좀 ‘관종‘인 듯 해서 평소에는 생까며 살아갑니다.ㅋㅋ 너무 단순하지요... ㅜㅜ

AgalmA 2018-06-16 10:40   좋아요 1 | URL
그 ‘툭툭‘ 능력을 제게 좀 파세요ㅜㅜ! 아픔은 제 세계의 중력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제가 중력의 속도를 벗어나는 괴력의 블랙홀에 강한 매력을-,.-; 저는 이런데서 단순하지요-_- 생활을 바꿀 생각은 않고 머리로만 좇아....에휴

겨울호랑이 2018-06-16 10:45   좋아요 1 | URL
뭐 대단할 것은 없고 영화 <메멘토 모리>에서 나오는 초단기 기억 저장 능력이라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머리가 복잡해질 때는 땀 흘리는 운동을 추천드려요^^:) 활기차게 땀과 함께 안 좋은 기억도 날려보내심은 어떠신지... 아니면 가까운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오래전 절판되어 만나길 포기했던 옛 친구와 뜻밖의 만남을 기대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AglmA님께서는 커피 좋아하시니 커피 있는 매장이 좋겠군요...ㅋㅋ 제가 더 신났네요...

AgalmA 2018-06-16 10:5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오전에 땀흘리고 운동하시고 지금 알라딘 오프매장에서 셀렉 중이신 거 아녜요ㅋ! 뭔가 상당히 경험적인 말씀이신 듯 하여ㅋㅋ 언젠가 알라딘에서 그 귀했던 사드 <소돔 120일>이 떼로 깔려 있던 거 보고 실소했던 기억 재밌었죠ㅎ 저는 주말에 일할 예정이라 어떻게든 짬을 내 놀 궁리를 하고 있ㅎ; 이게 인간이죠. 그쵸? ㅎㅎ

겨울호랑이 2018-06-16 10:54   좋아요 1 | URL
그럼요. 인생 뭐 있나요?ㅋㅋ 주말에는 힘들고, 주중에 틈을 내서 직장 근처 매장을 가는 편입니다.ㅋ 바쁘게 일 마무리하시고, 자신을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인생의 행복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