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칼럼은 <프레시안>에 실린 지난 3월 6일자 칼럼이다.  시의성이 다소 떨어지는 소재일지 모르겠지만, 윤장호 하사의 죽음은 채 2달이 못 되었다. 세간에서 많이 잊혀진 듯한 느낌인데, 이 칼럼을 뒤늦게 소개하는 나로서는 윤장호 하사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들을 되 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누가 그 청년을 바그람에 보냈는가
  [김명인 칼럼]'영웅론'을 부르는 국가주의 2007-03-06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미공군기지 위병소 앞에서 한국군 다산부대 소속 통역병 윤장호 하사가 아프간 무슬림전사의 자폭공격을 받고 사망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머리 속 생각보다는 며칠 후 징병신체검사를 받게 되는 스무 살짜리 아들(무척 잘생겼다.)을 하나 두고 있는 보통 아버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생리적 아픔이 먼저 저릿하게 고개를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왜 하필 그 한 명이 너여야 했느냐'던 윤 하사 부모의 절규가 무엇보다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아들을 군대에 보낸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은 하나같을 것이다.)
  
 
 
 
 
 
 
 

  베트남 전 종전 이후 한국군의 외국에서의 첫 전사 사례라고 하는 윤 하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두고 지난 일주일 동안 많은 말들이 있었다. 미국 유학파 엘리트 청년의 죽음 자체를 안타까워하는 말들, 해외파견 한국군부대의 안전대책 미흡을 성토하는 말들, 위기지역에서의 조기철군을 주장하는 말들…. 해외 파견병력의 전면철수를 주장하는 견해도 적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애도의 분위기 속에서 파병의 불가피성은 수용하되 기본적으로 비전투병력인 해외 파견 한국군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고 그럴 경우 철군을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 여론의 큰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큰 흐름 속에서 애국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목소리들도 적지 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우선 윤 하사를 영웅시하는 상당수의 네티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파견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군 입대 자체를 피할 수도 있었던 그가 아프가니스탄 근무를 자원했다가 불의의 죽음을 당했으니 그는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조국의 부름을 받아 목숨을 바친' 영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부 네티즌들의 분위기 위에서 한 신문은 이를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자이툰 부대 소속으로 이라크에 자원 파견되는 몇몇 고위층 자제들의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쥬'적 실천과 한데 묶어서 미화하기에 이른다.
  
  물론 윤 하사가 이런저런 핑계로 병역을 기피하거나 입대를 하더라도 편안한 특기와 근무처만 찾아가는 특권・고위층 자제들이나 유학생들과 비교할 때 '윤리적으로' 올바른 청년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으며 이를 조금 과장해서 '영웅'이라 부르는 것도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조국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는 데에 이르면 그것은 설사 수사학적 과장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있다. 그것이 병역은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성한 의무이고 국가가 요구하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위험한 것이다. 거기엔 국가가 개인보다 언제나 우선한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개인과 국가의 관계, 국가주의의 맹점들을 고종석의 글에서도 읽을 수 있다. 병역의 의무에 대한 비판은 한홍구, 박노자 등에 의해서 계속 비판되어져 왔던 부분이기도 하다.)
  
 
 
 
 
 
 
 
 

  국가이성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국가가 보편타당한 인류적 감각에 비추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올바르지 못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보다 더 많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사회의 구성원들은 늘 국가의 정책과 노선을 감시하고 견제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국가의 판단이 그른 것이 분명한데도 그 판단에 따라 자신을 희생한다면 그는 현명한 국민, 바른 시민이 아니라 일개 노예적 신민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윤하사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부에서 일고 있는 '영웅론'에는 국가와 그 구성원 사이의 이런 이성적이고 민주적 관계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짚어두고 싶은 것이 있다. 흔히 병역의 의무를 국민의 절대의무로서 신성시하고 있는데 이른바 병역과 관련된 헌법상의 국민적 의무라는 것은 '국방・교육・ 근로・납세의 의무' 중의 하나인 국방의 의무이지 병역의 의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병역의 의무는 국방의 의무의 한 하위 범주일 뿐이라는 것이다. 국민은 국가가 외침에 의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병역에 복무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수단과 노력을 동원하여 국가를 방어할 의무가 있지만, 그것이 곧 병역의 의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 병역의 의무는 국방의 의무와 배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지만 국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면서 국민에게 병역을 강제하고, 그 침략전쟁으로 말미암아 거꾸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그때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국가를 지키는 국방의 의무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라를 지킨다'는 범위를 벗어나 외국에 군대를 보낸다는 것은 그 어떤 명분을 갖다 붙인다 해도 '국방의 의무'와는 무관한 일이다. 또 다른 한 신문은 우리가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이만큼 컸고, 세계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해외파병은 불가피하다고 강변하면서 역시 윤 하사를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애국청년'이라 부르고 있다. 국제사회에 진 빚을 갚는 것도 좋고 세계시장을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파병 이외에, 그것도 미국이 저지른 아름답지 못한 전쟁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한 파병이라는 방식 이외에 그러한 국제적 기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그 신문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면, 우리는 정말로 전쟁을 원하지 않는 나라이고 평화를 원하는 민족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다시 생각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냉전적 적대의식 속에서 수십년 째 60만 대군을 유지해 오고 전체 GDP 대비 3%에 육박하는 예산을 군사력의 유지 강화에 쏟아 부어 오는 동안, 우리사회는 알게 모르게 평화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남북간 긴장완화로 국방상 위험요소가 분명히 줄어들고 있는데도 여전히 군사력 강화는 절대과제이며,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이젠 어느새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8개국에 2500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군사력 수출국이 되어 있는 것이다. 군사력은 어느 정도 이상 팽창하면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평화와 대립하게 되어 있다. 군사력을 외침으로부터 국가사회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수준으로만 유지하고 그 필요량을 부단히 줄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군사력은 팽창하고 팽창한 군사력은 속성상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위기상황을 늘 요구하게 되어 결국 평화를 위협하게 된다.
  
  과연 한국은 이러한 군사력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인가? 불행히도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군사력 절대주의적 사회분위기는 거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평화적이고 적대적인 세계인식과 폭력숭상의 문화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윤 하사의 선임병으로 아프가니스탄 다산부대에 근무했던 한 청년이 한 일간지 기고에서 술회한 대로 우리는 오래 전부터 '무력과 호전성과 전쟁과 침략을 정당화하고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젖어 왔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군대를 양성해 왔다. 이런 사회는 여전히 불안하고 위험하다. 평화적이지 않다.
  
  평화는 무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사회, 평화가 최고의 가치가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통해서 지켜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구성원 간에 이런 합의를 공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기는커녕 국익의 이름 아래, 국가주의의 그림자 아래 이런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윤 하사라 불리는 한 청년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숭고하고 영웅적인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다.
  
  윤 하사의 죽음은 그가 아프가니스탄 근무를 자원했기 때문에 더 안타깝고 억울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 길로 가서는 안 된다고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특히 한국교회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오히려 기독교(개신교)에서는 이번 전쟁을 마치 성전처럼 여기고 있는 분위기다. 얼마전 기독교TV에서 개신교계 고위층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한국교회가 얼마나 잘못 가고 있는가를 절감한 적이 있다. 북한은 마귀요, 미국은 하나님의 나라고, 우리를 마귀로부터 지켜주는 형제국, 즉 형님나라이니까 우리가 잘해야 한다는 그런 망령을 떨고 있던 것이었다. 신도들의 '아멘'소리가 우렁찼던 것은 더욱 맘을 아프게 한다.) 그가 스물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에게 그것은 세계평화의 길도, 애국의 길도, 효도의 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교육과 문화가 그로 하여금 억울하고 허망한 죽음의 길로 향하게 했다. 며칠 뒤면 징병검사를 받고 한두 해 내로 입대하게 될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아들과 같은 세대의 한 청년에게 억울한 죽음의 길을 자원하도록 방치한 후회가 가슴을 친 지난 일주일이었다.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04-12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해 마땅한 것을 다시금 새겨주었어요. 잘 보고 갑니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www.pressian.com)에 김명인 교수(인하대 국어교육과)가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와 발맞추어 <金明仁 칼럼>란을 만든다. 여기서는 <프레시안> 뿐 아니라, 기타 매체에 기고한 김명인 교수의 글들도 걸리는 데로 옮겨오도록 한다. 얼마 전 김명인 교수의 칼럼을 모아 후마니타스에서 책으로 낸 적이 있기도 하다. 그만큼 김명인 교수의 칼럼은 읽음직스럽다.

 

 

 

 

<프레시안> 편집장의 소개글을 먼저 보도록 하자. 인상적인 부분이 꽤 있다.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한 '잠들지 않는' 예민한 지적과,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자신의 환부를 드러내 보일 정도의 치열한 자기성찰을 계속해 온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가 <프레시안>을 통해 그의 사유의 일단을 선보이게 됐다.
  
  <김명인 칼럼>이라는 문패 아래 대략 격주 간격으로 선보일 이 칼럼은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걱정하며,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지를 조근조근 따져보는 형식을 취할 예정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만들어나가야 할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초대의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이 이 일련의 칼럼들을 통해 우리가 늘 친숙하게 생각하는 화두 속에서 어느날 낯선, 다시 곱씹어봐야 할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잠들지 않는'이라는 수식은 그의 기행문집 『잠들지 못하는 희망』에서 따온듯 하다. 간단히 그의 저서들을 일별해 보자.

 

 

 

 

『희망의 문학』(1990),『잠들지 못하는 희망』(1997), 『불을 찾아서』(2000),『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2000),『조연현 비극적 세계관과 파시즘 사이』(2004)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2004) 등이 있고 공저로는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2002),『살아있는 김수영』(2005),『신영복 함께 읽기』(2006),『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6』(2006) 등이 있다.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 여수의 비극과 한류 사이에서(2007-02-15)

  여수 출입국사무소의 불법체류자보호소 화재로 그곳에 '보호'되고 있던 불법체류 외국인 아홉 명이 죽고 열여덟 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들은 가까이는 중국, 멀리는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은 아시안 이주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새로운 기회의 나라 대한민국이 가난하고 힘없는 그들에게 준 것은 결국 비참하게 죽을 기회뿐이었다.
  
  언론은 사건 이후 연일 보호시설의 열악한 인권실태와 가혹한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대책을 비판하고 있지만 획기적인 대책은 여전히 난망이고 죽은 이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사건은 곧 닥칠 추방의 운명에 지레 절망한, 한 재중국동포의 자포자기적 자해 방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그의 영혼은 육체적 죽음 이전에 이미 절망과 고통으로 먼저 질식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이들 모두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수에서의 절망과 이 땅의 아시아 담론
  
  아시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나라에는 아시아 담론이 꽃을 피우고 있다. 세계사의 피해자, 아시아의 지정학적 희생자라는 사실을 특권화하면서 오랜 일국적 피해망상과 과대망상 사이를 왕복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결엔가 아시아를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는 형편이 되었다. 세계화와 개방화의 덕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시아를 입에 올릴 때는 세계를 입에 올릴 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 세계는 아직도 따라잡지 못한 어떤 것으로서 여전히 선망을 수반하는 대상인 데 반해, 아시아는 우리와 대등하거나 우리에 못 미치는, 혹은 우리가 이미 앞질러버린 것에 대한 우월감을 수반하는 대상인 것이다.(이하 본문의 굵은 글씨는 옮긴이)
  
  그것은 이제 좀 먹고 살만해졌다는 것, 한국자본주의의 초과이윤 획득 혹은 이윤보전에 대한 욕망이 아시아의 상대적 저개발국으로 향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아시아는 이제 훌쩍 커버린 한국자본주의의 구체적 경쟁대상이거나 착취대상으로서 떠오른 것이다. 이른바 '한류 담론'이 대한민국을 발신자로 하고 아시아 각국을 수신자로 하는 새로운 문화전파론의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선진국' 일본에 대해서는 각축자의 포즈를 취하고 다른 아시아 각국들에 대해서는 전파자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자본주의의 이런 사정과 정확한 아날로지를 이루고 있다.
  
  지식인사회의 아시아 담론도 그 내밀한 맥락은 이와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시대에서부터 오랜 동안 일국적 사유의 질곡 속에 갇혀 있던 진보적 담론들이 아시아를 발견하고 획득하게 된 맥락 역시 한반도를 이른바 '세계 근대사적 모순의 결절지점'으로서 인식론적으로 특권화하고, 그 토대 위에서 아시아를 관념적으로 대상화한 데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대안담론 구성이라는 맥락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이 아시아를 논할 때 무의식적으로 일본과 중국을 일차 파트너로 상정하고 그 나머지를 부차화하는 것, 즉 아시아를 관념 속에서 위계화하는 것이 한류를 포함한 한국자본이 아시아를 위계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반면에 지식인 간의 네트워크의 수준을 넘어서 아시아 민중의 연대를 사유하고 행동하는, 보다 실천적인 아시아 담론들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사유의 중심은 한반도에 놓여 있게 마련이고 네트워크의 이니셔티브 역시 한국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경험을 '수출'한다는 발상과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아시아 담론에선 왜 식민주의의 냄새가 날까?
  
  이처럼 한국에 있어서 아시아는 일종의 신개지이자 프론티어리즘의 대상으로 다가와 있다. 그리고 이런 신개지론, 프론티어리즘의 배후에는 알게 모르게 내셔널리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고, 그것은 조금 더 발전하면 일종의 식민주의의 논리와도 맥을 같이하게 된다. 식민주의의 본질은 차별화이며, 차별화는 상호주체성 없는 대상화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아시아 담론의 무의식에는 많건 적건 식민주의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자리에서 나는 아시아의 연대라는 것은 '고통의 연대'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제국주의 지배와 식민주의의 질곡이라는 공통의 역사경험이 현재의 아시아 민중의 삶을 여전히 위협하고 식민화하고 있다면 아시아적 연대의 토대는 바로 그러한 식민화가 산출하고 있는 삶의 구체적 고통들을 함께 나누고 그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데에 있다는 뜻이다. 그럴싸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도 여전히 관념적이고 어쩐지 성에 차지 않는다. 왜냐 하면 아시아적 고통은 어디 평양에 있고, 오키나와에 있고, 반다아체에 있고, 스리랑카에 있고, 티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여기 바로 한반도의 바로 내 코 앞에서 먼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정작 나는 그것을 제대로 나의 문제로 삼아 씨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시아는 우리 눈 앞에, 우리 코 앞에 있건만…
  
  북한사람, 조선족, 중국인, 몽골인, 베트남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미얀마인, 네팔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우즈베키스탄인…. 이처럼 수많은 아시아 민중들이 지금 바로 우리 곁에서 살인적 초과노동을 하고 착취당하고 손가락 잘리고 사기 당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도망다니고 밀입국하고 단속되고 '보호'되고 추방되고 때론 도둑질도 하고 살인도 하고 방화도 하고…,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바로 여기 아시아 속의 '대한민국'이 있고, 대한민국 속의 아시아가 있는데 우리의 아시아 담론들은 어디를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아시아 담론을 운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속의 아시아와 아시아 민중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의 신흥강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식민과 피식민 관계가 매일매일 연출하고 있는 이 적나라한 수라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이 안에서 아시아적 고통에 대한, 아니 세계적 규모와 차원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 바탕 위에서 아시아적 연대를 수행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모든 아시아 담론은 본질적으로 식민담론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아시아 담론, 즉 우리 안의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적 인식들에 대한 비판을 이미 박노자 교수가 해온 바 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특히나 동남아 및 아프리카, 아랍인 노동자에 대한 인식에서 우리가 얼마나 냉혹하고 비인간적인지 그 실상들을 박노자 교수는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 싶다. 이를 통해 '우리 아시아'적 연대가 일어날 수 있길 희망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04-1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명인 교수님의 이름과, 황해문화 이름이 콱! 박히네요. 잘 읽고 가요~

멜기세덱 2007-04-1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자주 들러 읽어주세요...꾸준히 올리려고요...ㅎㅎ
 
 전출처 : 로쟈 > 박노자가 본 한미FTA

레디앙에 실린 박노자와의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한미FTA에 관한 것인데, 그밖에 다양한 관심사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나로선 북한 체제와 민노당에 대한 그의 견해에 공감한다). 이미 우리시대의 논객이자 국외자적 지식인으로 자리잡았지만, 박노자는 가라타니 고진이 인용하고 있는 바로 ‘non-Jewish Jew’(비유대적 유대인)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혹은 ‘non-Korean Korean’(한국인이 아닌 한국인). 그런 입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요긴하며 필수적이다. 그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한미FTA 관련인지라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레디앙(07. 04. 09) 한미FTA 정치사회적 겨울 온다

"미국과 한국의 시장을 통합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정책을 수립할만한 여지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떤 세부적인 혜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떤 정책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환영하는 것 같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박노자 교수는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지배층이 한미FTA를 추진하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한미FTA 협정이 체결되면 우리 사회는 미국식 모델 외에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될 것이라면서 "사회와 국가의 장기 보수화, 일종의 정치사회적 겨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 이라고 전망했다. 박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를 들먹이고 진보적 슬로건을 하나의 어법으로 이용하면서 일부 민중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국가를 미국형 사회모델, 한 편에는 소수의 부유층과 고소득층과 중산층 상층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70-80%나 되는 빈곤층과 준빈곤층, 몰락 중인 하급중산층이 있는, 민중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사회모델로 몰아가고 있다"고 노 대통령을 비판했다.

박 교수는 한미FTA의 효과로 소비자 잉여가 증대될 것이라는 논리에 대해 "소비자가 바로 노동자다. 소비하려면 우선 벌어들여야 하는데, 직장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이고 있는 공무원 '퇴출 쇼'가 그런 것인데, 일종의 시범케이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모델이 공고화된다면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공포의 나날이 될 것"이라며 "당장 다음 달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연속일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노 대통령에 대해 대단히 신랄했다. 그는 "(노 대통령같은) 그런 자들이 장기적으로 한국 민중에 가장 위험하다. 카멜레온처럼 기만책을 대단히 잘 구사한다. 일부 민중층을 포섭하는 언어적 수법에 능하다. 또 자수성가한 민중 출신이다. 그런 사람이 민중운동을 파괴하는 데는 가장 쓸모가 있다"고 맹비난했다.

박 교수는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진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분별하면서 자신과 노 대통령을 진보로 규정한 데 대해 "조기숙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이화여대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 중에 교수가 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수 많은 시간강사들, 수 년 동안 시간강사 일을 해온 사람들, 상당수는 정규직 교수에 비해 능력 좋고 업적 좋은 사람들, 조기숙 선생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다"고 꼬집었다(*이러한 '맡바닥' 사정은 조교수보나 박교수가 훨씬 잘 아는 듯 보인다). 

박 교수는 이번 대선과 관련해 "지금 같아선 극우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것이 뻔해 보인다"면서 "(민주노동당이) 그것을 막을 수는 없어도 제대로 저항해서 수 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극우 세력과 제대로 투쟁하면서 한국의 보수화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지만 "요즘 민주노동당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담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문제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먼저 당이 젊은층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은) 80년대 운동권의 보수적이고 서열위계적인 문화가 강하다. 양성평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많지 않나 싶다"면서 "20대 여학생이 친근하게 대하기 굉장히 힘든 구조"라고 지적했다. 또 비정규직 노동자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당 지도부나 국회의원 후보 선출시 비정규직에 쿼터를 부여하는 것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심상정 의원이 제안한 비정규직 대상의 당원 가입 특례안에 대해서도 "일리 있는 제안"이라고 호응했다.

박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대선 레이스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면서 "대중적인 호소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한미FTA 문제가 주제였지만, 한미FTA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다른 이슈들로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한 박 교수의 분석은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박 교수는 북미관계와 관련, "북한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 남한까지 견제할 수 있는 카드는 미국"이라며 "북한은 미국이 허락만 한다면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미국이 허락한다면 북한의 자체 식민화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미국 자본과 남한 자본, 일본 자본에게 자기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북한 지배층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분석에서 보듯 북한의 현 지배층에 대해 박 교수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러니 북한의 지배층을 추종하는 운동권 내의 일부 경향에 대해 박 교수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지는 능히 짐작되는 바다. 그는 '탈북자' 문제와 관련, "남한 운동 진영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탈북자를 체제 부적응자나 심하면 배신자로 규정해서 왕따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면서 "주사파를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점이다. 본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면서 무슨 놈의 민족주의인가. 이건 조선민족이 아니라 북조선이라는 국가를 위주로 놓고 생각하는 아주 악질적인 국가주의"라고 맹비난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7일 낮 12시부터 성균관대학교 야외 휴게실에서 약 90분에 걸쳐 진행됐다. 인터뷰를 마치고 혜화역으로 가는 길에 보니 대학로에선 한미FTA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한미FTA 협상이 타결됐다. 어떻게 평가하나.

= 자세한 평가는 세부 내용을 봐야 가능할 것 같다. 정부는 개성공단 문제와 관련해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앞으로 대중국 정책 방향에 따라 결정될 문제다. 

- 한미FTA 특위 열린우리당측 간사인 송영길 의원은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 설치 건을 놓고 "동북아에서 경쟁력 있는 통일경제의 꿈"을 말했다.

= 송영길 의원이 말하는 경쟁력이라는 건 60~70년대 한국식 성장모델의 재판이다. 한국 노동자 대신 북한 노동자를 저임금 착취 모델로 몰아내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섬유제품 등을 미국에 팔아 60~7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기적을 재현해 보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북한 정권이 한국 자본의 대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 북한 지배집단의 동향을 보면 여기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이렇게 되면 북한 노동자들은 한국 자본과 북한 지배집단이라는 대리인에 의해 이중착취 상태에 놓일 것이다. 북한 민중이 절대적 기아사태를 면하면 다행이지만 이중착취 구조에서 생활수준도 크게 개선되지 못할 것이고, 결국 지금과 같은 무권리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송영길 의원의 기대대로 된다고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송 의원의 기대대로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이 이란 침략 계획을 실행하지 않고 보류한다면 다시 한 번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잠재적 경쟁 상대인 중국을 약화시키는 집중적인 포위 프로젝트에 착수할 확률이 높고, 그 한 부분이 북한 때리기다. 북한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종속변수다. 중국의 대국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에 따라 미국의 북한 때리기는 언제라도 재개될 수 있다.

- 미국에겐 대중국 정책이 상수라는 얘긴데.

= 그렇다.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유전처럼 약탈할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미국에게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교두보다. 이는 열강정치에서 확인된 지 오래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1901년부터 협상을 했는데, 당시 러시아측 요구가 뭐였느냐면 39선 이북 지역의 중립화였다. 한반도 북부지역을 일본 영향권과 대륙 영향권 사이의 완충지대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 중국이 북한을 보는 것도 당시 러시아의 시각과 같다. 당시 일본, 그리고 현 미국 세력의 영향권과 대륙 세력의 영향권의 충돌의 문제이지 북한 자체를 특별히 미워할 것도 없고 북한을 공격해서 얻을 것도 없다.

- 송영길 의원은 운동권 출신이고 햇볕정책의 신봉자다.

= 햇볕정책이라는 것이 북한의 지배집단을 잘 포섭하자는 얘기 아닌가. 싸우자는 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을지 몰라도 한국 지배계급의 자기 위주 발상이다.

- 구여권에 있는 운동권 출신 인사들 가운데는 한미FTA와 남북관계 개선을 같은 궤에 놓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 지금 정부와 구여권이 팔아 먹을 수 있는 건 북한 문제밖에 없다. 복지정책은 내세울 게 없고, 부동산 값도 잡히지 않고 있다. 민생파괴와 농업파괴는 한미FTA로 이미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도시의 30~40대 화이트칼라, 농민, 노동자들에게 팔아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유일한 게 북한 문제다. 이들은 진보적 지지층에 먹힐 수 있는 북한문제와 전혀 먹히지 않을 것 같은 한미FTA를 묶어서 강매하려는 것이다. 북한과 잘 되기를 원하면 한미FTA를 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속아넘어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 그런 단기적 속셈 말고 통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구상의 일단을 비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 만의 하나 미국이 앞으로 10~15년간 중국을 대상으로 침략과 포위 전략을 쓰지 않을 경우 북한은 동북아에서 일본 이상의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북한은 이 지역에서 가장 취약한 국가다. 제일 약자다. 북한은 중국에게서 투자도 받고 원조도 받고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종속적인 관계가 되어 가고 있고, 이는 북한 지배층으로선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 남한까지 견제할 수 있는 카드는 미국이다. 북한은 미국이 허락만 한다면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미국이 허락한다면 북한의 자체 식민화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 미국 자본과 남한 자본, 장기적으로는 일본 자본에게 자기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북한 지배층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다.



- 한반도 남쪽 진보진영은 어떤 각도에서 통일문제에 접근해야 하나.

= 한반도 진보진영에겐 나쁜 전통이 하나 있다. 외부에서 이상향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다. 처음에는 소련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러시아 혁명의 파급 효과로 구성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러시아는 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적 성격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30년대 이후로는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됐다. 그런데 한국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스탈린주의 및 러시아 혁명의 왜곡과 반동화를 비판한 사람이 없다.

중국만 해도 진독수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 트로츠기(*트로츠키) 전통이 생건 건 90년대 초반이다. 소련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숭배 대상이었는데, 이게 나중에 엄청난 재앙을 낳았다. 그리고 수십년 후인 80년대 남한에서 그 비극이 재연됐다.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착각했고, 소련이나 동독을 희망으로 여겼다. 이것이 운동권 문화를 왜곡시켰고 운동권 붕괴의 원인이 됐다.

동구권이 붕괴된 후 이런 환상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북한을 대상으로 해서는 지난 20년대부터 있어왔던 이상향 찾기의 욕망이 계속 투사되고 있다. 이른바 주사파들 사이에 이런 경향이 강하게 존재한다. 운동권은 이를 완벽하게 버리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고 대중화될 수 없다. 남한 대중은 북한의 실체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운동권에서는 계속 비현실적인 환상들을 붙들고 있다. 이것이 운동권 전체가 대중화될 수 없는 이유다.

- 소위 좌파 진영도 이렇다 할만한 대북 접근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겠나.

= 최적의 방향은 북한 민중이 혁명적인 노선으로 가는 것이다. 북한 지배계급에 대한 민중적 혁명이 한반도 정치를 급진화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기대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최선의 방향을 얘기하기 어렵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에 기대를 거는 것이 민중 진영의 유일한 길이 아닌가 싶다. 이런 기대가 일정한 현실성이 있는 이유는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민중의 계급적 각성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전국 조직이 없어 그렇지 적어도 지역적으로는 노동자의 저항이 강해지고 있다. 민중 저항에 참여하는 사람만 해도 지난해 300만명이 넘었고, 저항의 방법도 급진화되고 있다.

중국 민중들이 중산계급과 지배계급의 개발연대에 대한 정치적 반대노선으로 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 저항의 분위기가 맨 바닥에서 형성되고 있다.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 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북한 민중이 그간 얼마나 속았으며 지배계급의 전략에 어떻게 놀아났는가 각성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런 각성에는 위험성도 따르는데, 남한 사회에 대한 미화로 빠져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천국이라는 인식이다. 탈북자들이 대개 극우적인 성향을 띠는 것도 이런 이유다. 북한 지배계급에 대한 반항심이 남한 지배체제에 대한 동경으로 잘못 흘러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남한 민중세력이, 남한 지배체제와 북한 지배체제를 동시에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혹은 그런 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에 도움되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는 남한 운동 진영이 탈북자를 철저히 외면한다. 탈북자를 매개로 북한 민중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줄 수 있을 텐데도 그렇다.

남한 운동 진영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탈북자를 체제 부적응자나 심하면 배신자로 규정해서 왕따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 이건 대단한 손실이다. 인간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건 물론이고. 주사파들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점이다. 본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면서 무슨 놈의 민족주의인가. 이건 조선민족이 아니라 북조선이라는 국가를 위주로 놓고 생각하는 아주 악질적인 국가주의다.

- 어느 강연에선가 한미FTA를 '제2의 을사늑약', 이런 식으로 비유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청와대가 반대진영을 쇄국론자로 몰아붙이는 논거 중 하나가 '어떻게 한미FTA를 을사늑약과 비교하느냐' 하는 것이다.

= 나는 물론 한미FTA가 을사늑약과 같다고 보지 않는다. 하나의 비유였을 뿐이다. 그 비유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에 반대했다. 주요 각료는 찬성했지만 황제가 반대했다. 지배층 중에서도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대한 반대가 있었던 셈이다. 자기 사유물처럼 국가가 남의 손으로 넘어가니까 고종으로선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미FTA는 좀 다르다. 한국의 지배계급 전체가 한미FTA를 찬성할 뿐더러 끌고 가고 있다. 대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기업에 종속된 중소기업도 환영하고, 고소득 전문직종에 있는 사람들도 환영한다. 이들 엘리트들이 한미FTA를 환영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공고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의 시장을 통합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정책을 수립할만한 여지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떤 세부적인 혜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나라에서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떤 정책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환영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한미FTA 협정을 체결하면 부유세 같은 정책을 시행하는 게 어려워질 것이다. 미국에 없는 정책을 한국에서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료보험도 자기 부담 위주로 가는 완성되지 못한 제도로 남거나 미국처럼 민간보험 위주로 퇴보할 수 있다.

미국이 하나의 모델이 되면 교육의 공공성도 흔들리기 쉽다. 아직까지 3불정책이 유지되고 있고, 평준화 정책을 탈피하고 싶어도 국민 불만을 생각해서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한미FTA가 체결되면 모든 학교가 귀족학교와 빈민학교로 나뉘는 시스템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 지배층의 새로운 유토피아다.

- 한미FTA를 찬성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적 사회정책의 역진불능성에 대한 기대에 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 한국이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은 굳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도 많다. 일본 모델도 있고 서유럽 모델도 있다. 서유럽 모델 중에선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모델 등이 있는데, 국가를 통한 재분배가 위주가 된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선 북구식 복지국가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여론조사 해보면 상당히 높게 나온다. 그런데 한미FTA로 인해 이런 모델에 대한 모색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사회와 국가의 장기 보수화, 일종의 정치사회적 겨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 정부는 한미FTA 찬반 논쟁을 '개방이냐, 쇄국이냐'는 구도로 몰아가고 있다.

= '개방이냐, 쇄국이냐'는 구도는 허구적이다. 조선 말기의 경우 강화조약 이전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1%가 안됐다. 지금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한미FTA를 하지 않더라도 80%에 달한다. 한미FTA는 쇄국의 반대어로서의 개방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시장과 미국 시장을 높은 수준으로 통합하는 문제이고,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국가사회 발전모델을 미국식 모델에 종속시키는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를 들먹이고 진보적 슬로건을 하나의 어법으로 이용하면서 일부 민중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국가를 미국형 사회모델, 한 편에는 소수의 부유층과 고소득층과 중산층 상층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70~80%나 되는 빈곤층과 준빈곤층, 몰락 중인 하급중산층이 있는, 민중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사회모델로 몰아가고 있다.

- 한미FTA로 피해를 입게 될 70~80%의 민중층 가운데 상당수가 이 협정을 찬성하고 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다. 한국은 국가와 보수적 재벌과 미디어가 영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나라다. 보수신문의 한미FTA 보도를 보면 가히 대국민 선전선동, 대국민 홍보 수준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개발주의 신화가 강하다. 70년대 개발주의가 특정 시기에 일정 부분 성공한 면이 있고, 박정희 시대의 이런 성공 신화를 미디어들이 재생산하고 있다. 한미FTA에 대한 찬성 여론은 '박정희 신화처럼 해보자'는 분위기에 도움을 얻은 것 같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개발은 외자와 차관, 무역 위주의 개발이었고 지금과 같은 시장통합적 개발은 아니었다. 박정희 개발주의가 일정 부분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시장통합을 하지 않고 미국 재벌로부터 한국시장을 보호한 데 있다. 이게 성공비결이라면 비결인데, 한미FTA는 이 부분을 무시하고 시장통합으로 가는 것이다.

- 불리한 여론지형을 극복하고 반대론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 아직 협상은 체결된 것이 아니다. 미국쪽 사정 때문에라도 협정 체결은 지지부진해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협정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을 계층과 지역이 존재한다. 반대 여론을 커지게 하자면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얘기해야 한다. 농민들이야 너무 분명하니까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지만. 도시근로자들도 일부의 고소득 전문가층을 빼고는 장기적으로 혜택보다 피해가 많을 것으로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식 모델이 강하게 도입되면 우선 직장의 안정성부터 흔들릴 것이다. 한미FTA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소비자잉여를 자주 얘기하는데, 소비자가 누군가. 바로 노동자다. 소비하려면 우선 벌어들여야 하는데, 직장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그 효시로 보이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이고 있는 공무원 '퇴출 쇼'가 그런 것인데, 일종의 시범케이스로 봐야 할 것이다. 장차 공공부문 시장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 모델이 공고화된다면 한국에서 직장생활은 공포의 나날이 될 것이다. 당장 다음 달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연속일 것이다. 서울시의 공무원 '퇴출 쇼'를 보면서 궁금한 건 왜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나 하는 것이다. 인권침해 요소가 대단히 큰 일 아닌가. 근무태만 같은 분명치도 않은 근거로 한 개인의 직장 안정성을 파괴하는 것이 법적으로 유효한가도 따져봐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수 많은 다른 직장에서도 태만과 무능을 이유로 노동자들이 퇴출될 것이다.

무능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사람이 언제나 보스일 것이고 보스가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유럽의 경우 노동자 해고사항은 노조와 경영자측의 협의사항이다. 노조의 동의 없이 노동자를 해고시키는 것은 유럽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반면 한국은 공무원노조를 국가가 인정도 않고 있다. 해고할 때 노조 동의는 커녕 아무 고려 없이 경영자의 판단으로 노동자를 무능력자로 규정해 왕따시켜 밀어내는 것은, 일본 영화 '배틀로얄'에 그려진 대로 약육강식이란 사회진화론적 이론을 현실화시키는 잔인한 쇼다. 



- 피해당사들이 협정 체결 후 어떤 피해를 입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실감을 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각도에서 지금까지의 한미FTA 반대 투쟁을 평가한다면.

= 민족경제론적 발상으로 협정을 반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일종의 애국주의적 기조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국제적 분업구조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분업구조가 복지망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 적용될 때 민중의 생활을 파탄시킬 것이라는 게 문제다. 우리가 미국 농민이나 중국 농민을 혐오할 이유는 없다. 예컨데 중국 농민이 생산하는 농산물이 한국에서 소비되는 것이 그 자체로 해악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구조에서 한미FTA가 체결될 경우 한국 농민층의 붕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고, 기댈수 있는 복지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사태를 맞을 경우 농민들의 삶은 파탄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점이다.

- 찬성측과 반대측이 공히 자신들의 논거로 드는 것이 있다. '국익'이다.

= 국익이라는 건 실체 없는 얘기다. 나라를 무엇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다. 만약 협정이 체결되면 일부 대기업은 득을 볼 것 같고, 거기에 하청화되어 있는 일부 중소기업들도 득을 볼 것이고, 귀족학교와 귀족병원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일부 고소득층도 득을 볼 것이다. 우리가 나라의 실체를 이 기업들과 이 고소득층으로 본다면 한미FTA는 국익에 부합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부자들만 사는 게 아니지 않나.

-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국익을 말한다.

= 한국에는 아직 국가의 신화가 강하다. 민중의 이득을 말하면 되고, 그게 훨씬 더 실체에 가까울텐데, 우리는 민중이라는 얘기를 고상하게 하려면 국가 얘기를 꺼내야 한다. 국가 없이는 고상하고 고매한 당위론적 담론이 서질 않는다.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아직 국가주의에 지배당하고 있다. 

- 국제적 분업구조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정부는 반대론자들에게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 내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대안은 한 국가 내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선의 궁극적인 대안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당장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안은 국제적인 신자유주의적 분업구조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재분배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 재분배 장치라는 건 농민들의 소득보전 같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부유세, 교육무상화, 의료무상화의 3대 조건이 충족된다면 한국은 그나마 민중들이 살만한 사회가 될텐데, 지금 전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

- 방금 말한 3대 조건이 충족되면 FTA도 가능하다는 의미인가.

= 이런 것들이 개선된 이후에도 굳이 FTA를 모색해야 한다면, 지역적으로 가까운 나라와 서로 민감한 부분을 100% 감안한 후에 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경우 잘 하면 노동시장까지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언어 배우기도 쉽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시스템이나 문화가 비슷하고. 한국 노동자들에게 선진국인 일본 노동시장 유입을 보장하는 그런 FTA라면 민중들에게 덜 해롭지 않을까 싶다.

- 진보진영 일각에선 대안적 FTA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다.

= 자본보다 민중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는 FTA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노동시장 진입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우라나라에도 불법 체류자가 많지만, 일본에서 불법으로 노동하는 한국 노동자들도 많다. 고생도 많이 하고 잡혀서 송환도 당한다. 한국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일본에 가서 노동하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협정을 맺더라도 우선적인 고려는 이런 것이 돼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 협정을 밀어붙이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몇 가지 물으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자칭 '유연한 진보'라고 한다.

= 그 사람 얘기 별로 하고 싶지 않다(웃음). 그런 자들이 장기적으로 한국 민중에 가장 위험하다. 카멜레온처럼 기만책을 대단히 잘 구사한다. 일부 민중층을 포섭하는 언어적 수법에 능하다. 또 자수성가한 민중 출신이다. 그런 사람이 민중운동을 파괴하는 데는 가장 쓸모가 있다. 한국 사람들이 노무현 열풍 같은 것을 다시 재현하지 않으려면 지배계급이 어떻게 민중을 기만할 수 있는지 철저히 학습해야 한다. 2002년을 생각하면 허무하다. 당시 주관적으로는 스스로를 진보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속 빈 이미지에 얼마나 놀아났는가. 이런 것이 재현되면 안 된다.

- 역시 유쾌한 질문도 아니고 유쾌한 답변도 나올 것 같지 않은데, 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했던 조기숙이라는 정치학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진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 그런 분류법에 따를 때 자신과 노 대통령은 진보다.

= 조기숙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이화여대에서 시간강사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 중에 교수가 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조기숙 교수와 같은 정규직 교수가 5만명 있고 시간강사가 6만명 있다. 지금의 구조에서 6만명 중 정규 교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한국 대학의 재정상황이나 운영 방향으로 볼 때 많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수 많은 시간강사들, 수 년 동안 시간강사 일을 해온 사람들, 상당 수는 정규 교수에 비해 능력이 좋고 업적이 좋은 사람들, 조기숙 선생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다. 한국 교수들 참 이상하다. 시간강사 한 달 벌이는 100만원 될까 말까 하고 조기숙 선생같은 정규직의 급여는 잘은 몰라도 300~400만원은 될 것 같은데(*확실히 잘 모르는 것 같다), 전혀 그런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없다. 희귀한 사람들이다. 시간강사들이 주당 시수도 훨씬 높고, 시간강사들이 많은 수업을 해가면서 적은 돈을 받으니까 정규 교수들이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건데, 말하자면 자신들이 하급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건데, 이런 데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한다. 희귀한 사람들이다(*박노자의 '진지함'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 노무현 정부를 파시즘에 가까운 정부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 (노 대통령은) 그냥 '쇼맨'이다. 쇼맨인데, 이 쇼맨의 특기가 뭐냐하면 민중진영의 일부를 포섭해서 무력화하는 것이다. 한미FTA 계기가 돼서 더 이상 이런 쇼맨들이 특기를 발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파시즘은.... 원래 한국 우파의 기본 심성이 파시즘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그의 동반자, 정적들도 다르지 않다.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더하면 더하겠지. 파시즘은 한국 우파의 기본 정서다. 국내에서 실행되고 있는 상당수의 법안들은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극우적이다. 이주노동자에 관한 법안 같은 것이 그렇다. 유럽 극우들이 꿈꾸고 있는 것이다. 

- 이번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나.

= 지금 같아선 극우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게 뻔해 보인다. (민주노동당이) 이를 막을 수는 없어도 제대로 저항해서 수 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극우 세력과 제대로 투쟁하면서 한국의 보수화를 제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민주노동당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담하다.

-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문제가 뭔가.

= 당은 정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데, 당 사업의 중심에 정파갈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이 서있는 것 같이 보인다. 결국 이 갈등에 에너지가 소모되면서 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20~30대층, 학생이라는 미래의 노동자를 흡수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젊은 노동자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당의 문화 자체가 20-30대 위주가 아니지 않나. 80년대 운동권의 보수적이고 서열위계적인 문화가 강하다. 양성평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많지 않나 싶다. 예컨데, 20대 여학생이 민주노동당을 친근하게 대하기 굉장히 힘든 구조다.

- 학생들은 민주노동당을 어떻게 보나.

= 40대 운동권 아저씨들이 거드름 피우는 곳으로 보는 것 같다(웃음). 80년대 운동권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얻어 작은 수령님 노릇하는 아저씨들의 놀이터, 이렇게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이래서는 성공 못한다. 당은 더 민주적이어야 하고, 미시적 문화도 젊은층과 여성 위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노르웨이 사회당이나 좌파를 보면 20대 국회의원도 있다. 민주노동당은 지도층이 40대 후반 아닌가.

- 다른 문제는.

= 당은 비정규직을 포획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당의 중심에 비정규직이 없다.

-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얼마 전 심상정 의원은 비정규직 지분을 높이기 위한 당원 가입 특례를 제안한 적이 있는데.

= 일리 있는 제안이라고 본다. 또 당 지도부를 뽑을 때 비정규직에 일정한 쿼터를 할당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회의원 후보를 뽑을 때도 여성 쿼터처럼 비정규직 쿼터를 주는 방안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비정규직이 당 사업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힘들 것 같다. 비정규직의 투쟁이 있는 곳마다 민주노동당이 달려가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기본일테고. 

- 당에 조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 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게 있다. 그 이론을 받아들이진 않더라도 '다함께'라는 그룹의 활동 자체는 생산적인 것 같은데, 당내에서 그 분들에 대한 반감이 강한 이유가 뭔지 이해하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다함께'의 활동 가운데 마음에 드는 부분은 탈북자에 대한 태도다. 민중진영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대상인데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그들은 하고 있다. 북한 정권에 대한 태도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 반대 등은 다함께 이데올로기에 찬성하지 않아도 충분히 동의가 될만한 활동인데, 왜 당에서는 '다함께'를 왕따시키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이론에 찬성을 하지 않는 것은 않는 것이고. 나만 해도 트로트키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아무튼 나름의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동지들인데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얼마 전 <레디앙>에서 정성진 교수의 책을 놓고 오간 논쟁도 그렇다. 물론 정 교수의 논리에 몇 가지 점에서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적대적으로 몰아세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특히 기사의 댓글들에서 확인되는 '다함께'에 대한 적대감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다함께'는 섹트적이지만 내부 문화가 비교적 민주주의적이고 학생을 확보하는 능력도 좋다. 당이 '다함께'의 활동방식에서 배울 것도 많다고 본다.

- 당내 대선 경쟁은 관심 갖고 보나.

= 유심히 보고 있다. 대중적인 호소력이 제일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은 대중성이 생명 아닌가. 나중에 그 사람의 정치노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선은 대중적인 호소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07. 04. 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라딘의 사이렌 쿠폰 여신의 유혹에 못이겨 지름신이 강림하시고, 지름신의 말씀은 곧 주문이 되어 신용카드 번호를 누르게 하시니, 내게 임한 지름신의 축복은 책이 되어 쌓이니, 쌓이는 책만큼이나 먼지도 쌓아가나니 지름신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호 이런, 3말에서 4월초 알라딘이 쿠폰을 쏟아내더니 기어코 지름신이 수시로 강림하셨다. 사서 쌓아 둔 것만 벌써 태산이 되버렸는뎅, 웬걸 쿠폰여신은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나를 유혹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를 구입하시는 분께, <눈먼 자들의 도시> 증정+1천원 할인 쿠폰!
 
기간 : 2007년 3월 30일 금요일 ~
 
증정도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비매품 페이퍼백 도서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때부터 주제 사라마구는 나에게 이 책 사라 마구 부추기더니, 결국 마구 샀다.

<눈뜬 자들의 도시>가 나와서 또 유혹하기를 <눈먼 자들의 도시>를 준다는데, 천원 쿠폰까지 주니, 게다가 주위의 평도 좋고 해서 덜커덩 샀다. "사라 마구"

거기다 추가적립금 2000원 받아야 하니 이쿠폰 저쿠폰 마구담아 50000원 만들어서 냅다 질렀다. 지름신의 축복이 내게 족하도다.

그런데, 오늘 책을 받고 실망 조금 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덤으로 준다기에 마구 샀건만, 날라온 증정본 <눈먼 자들의 도시>는 비매품 손바닥 만한 미니사이즈였던 것이다. 이럴 수가! 그래서 이런 사기가 있나 하고 다시 이벤트 안내를 봤더니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증정도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비매품 페이퍼백 도서입니다. "

그래도 초미니 사이즈라고는 말 안했잖아~~~엥~

쿠폰과 증정본에 눈이 멀어 "사라 마구 사라 마구" 유혹에 못이겨 지름신이 강림한바, 내 죄가 심히 크니, 누가한테 하소연 할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던 차에, 후배 녀석에게 너 보라고 줬더니, 뜻밖에 좋아는 걸 보니, 다소 울분이 가시는 느낌이 든다. 하여간에 책 선물은 좋은 것이여...ㅎㅎ

어쨌든 <눈뜬 자들의 도시>를 샀으니, 내 성질이 <눈먼 자들의 도시>를 사지 않고는 안배기니, <눈먼 자들의 도시>도 천원짜리 쿠폰을 뿌리고 있다. 지금. 내 주제(에) 사라 마구의 유혹을 어찌 뿌리칠까? 고민이 큰 밤이다. 쿠폰 날짜가 얼마 안 남았으니....ㅠㅠ;;

 

 

 

 

이 책 쿠폰이 아마 13일까지던뎅....얼마 전에 강준만이 또한 나를 강하게 자극했으니,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전 18권이 쿠폰 10000원과 아래 책 세권을 덤으로 통째준단다...

 

 

 

 

이 이벤트는 18일까던가....아~~~ 지름신이여~~~지름신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04-1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격이 상당하겠는걸요. 저는 못 본 척 하렵니다.

멜기세덱 2007-04-1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본 걸 어찌하겠습니까! ㅎㅎ
 
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를 아는가? 잘 알다시피 그는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프로메테우스가 건내준 이 불로 인해 인간은 밝은 세상, 곧 文明의 세계를 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코카서스 산중에서'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얻었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윤동주, 「간」부분)

고종석. 그는 프로메테우스가 아직도 저 '코카서스 산중에서' 간을 쪼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21세기의 서막에서 불이 아닌 '코드'를 훔치고 있다. 인류가 불로써 개안(開眼)을 얻었다면 새로이 맞이하는 세 번째 천년에는 새롭게 변화할 세상과의 접속이 필요한 것일까? '코드'가 맞아야 '접속'이 가능할 터이다. 이 '불확실한' 21세기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접속'하여 생존의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코드'가 필요하다. 이 코드를 고종석이 훔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제우스의 응징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기억하는가? 온갖 악과 질병과 고통이 온 세상에 퍼져나갔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대가라나. 이 상자가 닫혔을 때 그 안에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 고종석이 '코드'를 훔친 대가는 무엇일까? 그의 '우둔과 경박'에 대한 비난과 질타일까? 인류에게 주어질 또다른 판도라의 상자일까? 그 둘 모두일수도 있겠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미리(먼저) 생각하는(아는) 자'란 의미를 갖고 있다. '선지자(a prophet)'라고 옮길 수 있을 터이다. 선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곧, 예언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예언자이기도 하다.

"모색은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모색이 일반적 전망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의지나 욕망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망은 일종의 예언이다."(8쪽)

고종석은 여기서 21세기를 모색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예언'이다. 그는 조심스러워 하지만, 그가 훔쳐내고 있는 '코드'는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이며, 따라서 그는 프로메테우스이길 자처한 것이다. 곧 우리 에피메테우스들을 일깨우는 선지자요, 예언자가 된 것이다. "너무 구체적인 예언은 엇비슷하게 맞추었더라도 꼬두리를 잡히기 쉽다. 추상적으로 두루뭉실하게 얘기함으로써 도망갈 구멍을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이 슬기롭다."며 넋두리를 부리긴 하지만 말이다.

'예언'하면 아무래도 노스트라다무스가 생각이 난다.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지금도 자신들을 예언자라고 떠벌이지만, 아직까지 노스트라다무스란 이름을 따라 올 자는 없어 보인다. 고종석 자신의 훔쳐낸 그 '코드'의 비밀들이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유효하게 된다면, 그를 이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고'스트라다무스 라고. 그럼 '고'스트라다무스 고종석이 펼치는 21세기의 예언들을 맛보는 것이 좋겠다.

고종석이 21세기의 '코드'를 훔쳐내려는 발상은 아무래도 그 자신에게서 온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 앞서서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먼저 21세기를 예언했다. 『21세기 사전』(1998)이 그것인데, 지금은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에서 품절이다. 구해 보고 싶어도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크 아탈리의 예언이 어떤 것인지는 고종석이 언급하는 정도밖에는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썩 신통치는 않은 모양이다. 신통한 것이었다면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아탈리의 21세기 예언을 살짝 보면 "갈기갈기 터지고, 희희낙락하고, 야만적이고, 행복하고, 무분별하고, 기괴하고, 살아내기 어렵고, 해방적이고, 소름끼치고, 종교적이고, 세속적이고 … 그것이 21세기일 것이다."라는 식이다. 고종석은 얼핏 그 말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21세기도 틀림없이 모순의 시대일 것이다." '모순의 시대'라!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고, 둘 다 일 수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즉, 갈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인데, 애초에 21세기를 예언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이 책 『코드 훔치기』는 '책 앞에'를 써놓고는 더는 자판을 두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모순의 시대'란 역설에서 무언가 특별한 의미찾기를 그는 '모색'하고 있다.

그의 예언은 앞서 그가 피할 구멍을 미리 파놓은 듯 한 넋두리와는 다르게 구체적이면서도 단호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첫 장에서부터 그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단호히 점친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첫때, 사회주의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형태로서다. 사회주의 '체제'의 부활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 … 둘째, 그 살아남는 사회민주주의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조스팽식 사회주의에 가까울 것이다."(22~3쪽)

이런 단호함 속에도 피할 구멍은 파놓는 치밀함도 엿보이긴 한다. 이것은 그의 명석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단호함 속의 치밀함은 허무맹랑한 예언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치밀함'은 그가 단호하게 예언할 수 있도록 그의 사고의 끈을 잡아 물고 늘어지고 있기도 하다.

21세기에는 '개인주의 혁명'을 완성해야할 시기로 명명한다. 곧 개인들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는 21세기 시대의 정신 또한 부여한다. 곧 "더불어서 살겠다는 정신"이다. 그런가 하면 '여성 해방'에 대한 모색도 보인다. 이런식이다. 그는 예언하면서 명령하고, 시대의 정신을 부여하고, 모색한다. 그럴때에 21세기는 가치있어지고, 그 가치에 접속할 수 있는 '코드'를 고종석은 훔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40여개의 테제 속에서 21세기를 예언한다. '자연과 문명'의 미래를 예견하고, 지식인의 운명을 점치며, 민주주의를 모색한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그 많지 않은 테제를 통해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인류가 붙들어야 할 가치들을, 구체적인 사안들에서부터 거시적 정신과 사고까지 다양한 '코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예언들은 간혼 낭만적 여린 심성도 느껴진다. 문학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것임을 예견하면서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류"라고 제시한다.

사회주의를 말하고, 개인을 말하며, 우리와 타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사회생물학에도, 문학, 권력, 종교, 언어, 노동, 민족주의, 생태주의, 교육, 문화와 정치, 전쟁, 도시, 세대, 생명공학, 마리화나에까지 이 많은 것들을 한 예언자 고종석이 말하고 있다. 그가 이 시대 프로메테우스인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명석함과 박식함, 그리고 이 시대 인류에 대한 따뜻한 애정,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함, 그리고 그의 모색 속에 들어있는 '의지'와 '욕망'들을 통해 볼 때 그가 훔친 이 코드들은 믿음직스러운 예언임에 분명할 듯하다. 그것은 고종석이 '고'스트라다무스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믿거나 말거나, 그가 훔쳐 낸 '코드'로 우리 나중 안 자들은 동이 튼 21세기의 새벽 이때에 일찌감치 새로운 시대로 접속해 보는 것 어떠하겠는가? 분명한 것은 아무도 '선배 저널리스트의 우둔과 경박을' 비웃지는 못 할 것이란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