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월 10일이다. 경향신문에서 마련한 좌담을 옮겨온다. 차분히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서 혁명 20년 후 오늘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6월혁명 20년, 민주화 20년]“‘제도적 민주’쟁취한 시민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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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은 한때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정치·노동·인권 등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를 진전시켰다. 이전과는 판연히 다른 사회였다. 그 사이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한국사회를 뒤덮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사회를 87년 체제라고 칭했다. 87년 체제는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의 성취와 한계를 모두 담고 있다. 우리는 6월항쟁으로 무엇을 얻고, 잃었는가.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은? 진보와 보수 진영의 학자들과 함께 우리 사회를 진단했다. 좌담은 8일 오후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조운찬 문화1부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사회 = 20년전 6월항쟁은 개인의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나.
김명인 교수 = 당시 출판사에서 근무했는데 4·13호헌조치 발표한 후 5월부터 6월까지 한달반 동안 매일 서울시청 일대에 출근했다. 6월항쟁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못했을 책과 평론을 썼다. 6월 열기와 함께 평론에서 내가 제기했던 문제가 결합된 충일한 경험이었다.
조희연 교수 = 6월항쟁의 열기에 취해 따라다니던 수준이었다. 그때 느낀 건 내가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전에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예상못했던 것처럼 6월항쟁 때에도 군부정권이 붕괴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6월항쟁을 통해 국민들이 공포로부터 해방됐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국전쟁 후 정권에 가위눌린 삶, 자기규율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삶이었는데 이런 공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김일영 교수 = 당시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으며 막 강의도 시작했다. 반(半)사회인이어서 매일 현장에 나간 건 아니었고 절반 정도 시위에 참여했다. 6월항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어느날, 강의를 끝내고 버스 타고 집에 가다가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내려 한동안 같이 시위대를 쫓아 다니면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윤평중 교수 = 미국 유학중인 관계로 현장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학교에 한국신문이 하나 배달됐는데 6월항쟁 기사를 보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 출근했다. 그토록 한국 소식에 목말랐다. 텔레비전 뉴스에 간헐적으로 데모 풍경이 나오는데 우리의 모국은 뜨거운데 왜 이 사회는 모든 것이 차분할까 생각하며 괴리감을 느꼈다. 80년 ‘서울의 봄’ 때에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나이 드신 분들은 동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당시 시위 대학생들은 그분들을 설득하곤 했다. 그러나 87년에서는 설득을 통한 공감대 확산 자체가 불필요했던 것 같다. 민주화 국면에서 전체 국민이 한 몸이 됐고, 변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정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멀리 해외에서 상상하던 경험이 새롭다.
사회 = 6월항쟁을 어떻게 평가하나.
윤평중 = 경향신문에서 ‘6월혁명’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적절하다. ‘광주사태’가 ‘광주민중항쟁’으로 바뀐 것에서 보듯, 정명(正名) 즉 이름을 정확히 정의하는 게 중요하다. 6월항쟁은 6월 시민혁명으로 불러야 한다. 6월항쟁을 추동시킨 주체는 전두환 정권에 반감을 가진 시민과 기층 민중이었다. 조직가능한 시민들과 민중이 연합해 정치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또 평화적 수단으로 이루어낸 무혈혁명이었다. 흔히 6월항쟁을 두고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 역사를 긍정적·적극적으로 재해석한다는 측면에서도 시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조희연 = 항쟁이 아닌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혁명이라고 했을 때는 그것으로 정치변동이 일어나고 정치권력이 변해야 하는데 민선군부정권으로 이행했기 때문에 복합성이 있는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6월항쟁은 복합적 구성이란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진보진영에서는 6월항쟁의 실패·한계를 강조하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이 한국 사회발전에 미친 긍정적 부분은 적극 평가해야 한다. 6월항쟁은 군부정권을 역사에 묻었다는 점에서 성공했지만, 6·29선언에 의해 국민적 역동성이 크게 제한받았다. 이런 점에서 6월항쟁은 높은 수준의 성취이자 미완의 과제를 남긴 복합적 성격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김일영 = 6월혁명이라 하면서 그 앞에 ‘미완’이라고 붙이는 것은 어폐가 있다. 미완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민주화가 됐는데도 군부 잔당이 권력을 잡았고 사회경제적 실질 민주주의가 안됐다는 의미 같은데, 그때 이룩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의미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6월항쟁을 통해 쟁취한 민주헌법도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의의는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조희연 = 재미있는 쟁점이다. 6월항쟁을 최소주의적 요구의 관점에서 보면 완성된 혁명이라고 볼 수 있지만, 최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미완의 혁명이다. 20년 과정을 통해 지속되고 있고 여전히 남겨져 있다.
김명인 =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한다. 해방직후부터 6월항쟁까지는 정상적 의미의 근대 부르주아 민족국가 형성이 지연됐다. 전쟁도 있었고 쿠데타도 있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6월혁명을 계기로 자유주의 부르주아 권력의 헤게모니가 약간 해체됐다. 군사독재 잔재가 정권을 잡았다고 하지만 큰 변화가 있었다. 봉건식민지·냉전체제를 청산했고, 기본권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제도적·절차적 민주주의도 확보했다. 다만 과거 유제의 청산은 현재 진행중이다. 하지만 근대 부르주아 민족국가 형성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최종의 과제인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문제다. 미완이라면 6월항쟁 전개 과정 중 훨씬 높은 먼 수준의 문제제기를 추구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변신 등 세계적 전망 아래서 문제를 봐야할 필요가 있다.
사회 = 6월혁명이라고 했지만,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미흡한 게 많지 않은가.
김일영 = 6월항쟁은 조직화해서 일으킨 혁명이 아니고 이전부터 계속돼 오던 힘이 분출된 것이다. 6월이 지나 7, 8월 노동자 투쟁이 있었지만 시민혁명으로서의 성격은 6·29 선언 이후에 싹 사그라들었다. 그 다음엔 주도권을 양김(김영삼·김대중)이라는 정치권에 자발적으로 위임했다. 이를 두고 시민들이 의식화가 덜 되어서 그랬다고 말하는 것은 지식인의 오만이다.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씨가 당선돼 미흡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시민들 생각에는 큰 손해 없이 길을 닦은 것으로 본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의 눈으로 봤을 땐 그 자체로서도 혁명이다.
윤평중 =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이 왜 타협할 수밖에 없었나를 보면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다. 미국의 반대라는 게 명백한 주요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당시 전두환 일당을 비롯, 군부지도자까지도 계엄령으로 시위대를 무력진압하는 것을 꺼렸다. 나는 그게 광주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계엄령을 발동하면 광주보다 수십배나 큰 사태가 불가피하다고 군부 핵심부도 판단했을 것이다. 광주정신의 전국적 형상화, 한국 민주화의 축적이 87년이란 분기점에서 굉장한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6월항쟁은 한국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조희연 =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참여정부 실패 등에서 보이는 민주주의 위기 현상이 있는 것 같다. 이것 역시 6월과 연결된다. 6월항쟁에서 정점에 이른 반독재 투쟁을 통해 민중은 민주주의를 정립시켰다. 반면 보수세력은 6월항쟁에 이르는 동안 개발독재를 통해 자본주의를 정립했다. 나는 6월항쟁을 계기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전쟁’이 시작됐다고 본다.
이후 20년의 전쟁기간 동안 이 땅의 자본주의 세력이 민주주의를 형식화하는 속도와 민중이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속도를 볼 때 후자의 속도가 느렸던 것이 아닌지 싶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위협받고 있는 게 민주주의다. 87년 6월에 획득한 민주주의가 20년후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사회 = 6월항쟁은 87년 체제를 낳았다. 87년 이후 20년간 한국사회의 성격은.
김일영 = 민주화 20년 동안 예기치 못한 일이 두 가지 일어났다. 사회주의 붕괴와 세계화이다. 특히 97년 IMF 외환위기의 충격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조교수가 말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전쟁’도 탈냉전과 세계화 국면에서 전개됐다. 87년 체제보다 97년 체제가 더 문제다. 탈냉전과 세계화가 피부에 와닿은 것은 97년 이후다. 냉전구조는 김대중 이후에 해소됐다. 양극화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권이 집권한 후 훨씬 심각해졌다. 진보 진영은 87년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더 주목해 봐야 할 점은 97년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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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김일영·김명인·윤평중 교수가 지난 8일 6월항쟁을 주제로 좌담을 마친 뒤 경향신문사 인근 경희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성일기자 |
윤평중 = 87년 이후 한국시장자본제와 정치민주주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전쟁으로까지 표현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시장에 의해 왜소화됐다고 보는데 난 생각이 다르다. 6월 시민혁명은 성공했는데 7, 8월 노동자투쟁이 좌절한 이유를 다시 질문하고 싶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당시 발전 국면에 적합하지 않은, 중산층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최대치 요구였다. 기층과 시민 사이의 연대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남한 국가체제의 총체적 변혁을 지향하는 시도였다. 분단 상황에서 적절한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김명인 = 나는 견해가 좀 다르다. 돌이켜보면 당시 노동자투쟁의 요구수준은 높지 않았다. 지식인의 담론으로 치환하면 굉장히 높아 보이지만 노동기본권의 요구였다. 부르주아 체제 하에서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간 노동자계급이 방치돼 있다가 참여하고 포섭된 단계의 수준이다. 이게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왔다. 본질적이고 래디컬한 운동의 위기를 부른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 수준에 대한 평가는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20년 동안 민중을 포함한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삶이 행복해졌는가이다.
조희연 = 87년 체제가 확립시킨 민주주의를 97년 체제가 굴절시키고 한계지운 측면이 있다. 97년 외환위기는 개발독재 세력에게는 경제적 통치능력 고갈을 가져옴으로써 반독재 민주세력으로 하여금 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반면, 개발독재 세력이 내장하고 있었던 개방주의, 성장주의를 내면화시켰다. 외환위기 이후 민자당은 권력을 상실했지만, 동시에 경제위기 극복이란 이름으로 가장 급진적인 성향의 김대중정권이 친IMF적인 입장을 취한 점은 역설이다. 반독재세력이 집권하면서 오히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다.
사회 =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했다는 지적이 많다.
김명인 = 민주화 됐다고 하는데 삶은 계속 팍팍하다는 게 일반 대중의 인식이다. 거기에는 대중의 이중성도 작용한다. 성장과 배분 모두를 원하는데 둘을 함께 누리기란 어렵다. 한국 자본주의가 ‘87년 6월’을 계기로 얻은 것은 규제철폐와 시장자유주의다. 분배, 복지, 경제민주화가 같이 가야 하는데 시장 시스템이 과도하게 독점적이고 배척적이어서 바람직한 경제문화 형성을 억압한 것이다.
김일영 = 일반적으로 양극화의 심화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꼽는데, 나는 국가 능력의 저하를 더 큰 원인으로 꼽고 싶다. 경제성장도 하지만 분배도 개선하는 국가의 기본적 능력이 민주화 이후 더 떨어졌다. 지난 5년간 특히 심했다. 진보진영에서도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형용모순적인 말을 한다. 어떻게 보면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딜레마 해소방법은 신자유주의의 전면 거부가 아니다. 국가 통치능력을 대폭 키워야할 필요가 있다.
윤평중 =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무능과 무정견이 빚어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문제는 진보진영의 딜레마이기도 할 텐데, 시장의 규정력에 대항해 어떻게 자율자생적·시민사회적 공공성 지평을 확대시킬 수 있겠는가 하느냐이다. 국가 통치능력을 얘기했는데, 시장제도를 거부할 수 없다면 국가는 시장의 실패를 적극 보완할 수 있는 사회보장책 등을 최대한 강구해야 한다.
조희연 = 박정희식 경제개방 방식은 고용이나 시장의 절대적 팽창을 통해 양극화를 상쇄하는 효과가 있었다. 지금의 개방은 그 때와 다르다. 전세계적 경쟁을 기초로 하는 개방이다. 삼성전자가 잘 나간다 해도 우리 국민생활 전체에 미치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세계적인 경제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현재 세계체제가 규정하는 딜레마다. 그럼에도 주체의 문제는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중도 자유주의세력이 집권세력이 돼서도 박정희식 개방 마인드로 접근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개방과 폐쇄의 대립구도만으로 바라본 것이다. 2000년대 개방은 1960년대 박정희식 개방과 달라야 한다. 현재의 개방은 양극화를 동반할 수 있다는 냉철한 인식위에 그걸 상쇄하는 사회경제정책, 개방과 결합되는 분배정책을 펴야 한다. 87년 6월, 당시 거리에서 싸울 때는 개방이란 고민이 없었다. 6월항쟁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에게 개방은 새로운 도전적 위기다.
김명인 = 국가능력보다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문제가 더 크다. 신자유주의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긴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무차별적이지 않다. 말레이시아부터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차폐막을 설정하며 길항하는 힘이 있었는데 우리는 지난 10년간 완전 무장해제 당했다. 한때 민주화와 신자유주의를 혼동하기도 했다.
김일영 = 준비없는 개방을 민주화로 착각해 외환위기를 맞았다. 일본을 한 번 보자. 일본은 고이즈미 총리가 집권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다. 경제가 되살아나고 실업률은 떨어졌다.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조건 속에서 국가와 정부가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성장에서 좋은 성과를 낳고 양극화 문제로 혜택이 흘러가게 만드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힌트를 일본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회 = 6월항쟁을 추동시킨 20년전 민중운동에 비한다면 지금의 시민운동은 위기에 처했다. 국가를 견제하는 역할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는데.
조희연 = 87년의 시대정신으로서 민주개혁에 가장 충실한 부흥자가 90년대 시민운동이다. 97년 체제 아래에서 87년 6월이 만들어준 시민들은 계급적으로 분열·분화하며, 양극화되고 있다. 시민운동은 이를 직시하며 어떻게 시민운동의 의제로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노력해야 한다. 무차별적 시장화에 대항하는 공공성 의제가 더 중요하게 부각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지역·지방의 풀뿌리 시민운동을 재발견하는 게 필요하다.
김명인 = 시민운동은 실종된 국가기능을 복원해 내는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다. 또 시민진보세력은 포스트-캐피털리즘(자본주의 이후)을 생각해야 한다. 자본주의 이후를 대비하는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시민사회, 시민운동은 국가와 유착이 강해져 그런 탄력을 잃어버렸다. 소수자, 환경, 민중자치 등의 문제를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는 게 현실이다.
윤평중 = 87년 체제를 시민혁명의 결과라고 규정한 것과 접맥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시장의 규정력이 파도처럼 휩쓸면서 한국 시민사회의 대응능력을 왜소화시키는 걸 본다. 김대중 정부 이후 특히 노무현 정권에서 진보적 시민운동 진영이 소수정권의 확대전략에 적극 동참, 또는 부역하면서 시민없는 시민운동으로 전락했다. ‘시민이 부재한 시민단체’라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확대 재생산했다. 시민단체의 자생성이 크게 훼손됐다. 보수든 진보든 시민사회 자율성과 공동성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프로그램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국가기능을 복원하고, 시민사회 지평을 21세기 맥락에서 시민의 현실적 피부에 와닿는 실천프로그램으로 조직화해야 한다.
사회 = 노무현 정부는 87년 체제의 정점에서 태어났다. 87년 체제 속에서 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김일영 = 87년 이후 잃은 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존중이다. 민족, 민중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개인에 대한 존중으로서의 자유주의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지난 20년동안 민주화 이후에 어떻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킬까 하는 문제에만 사로잡혔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정말 잘 하려면 ‘민주화 이후의 자유주의’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김명인 = 6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점이다. 모더니티(근대성)가 결핍돼 있다. 자유주의적 감각은 굉장히 중요하다. 90년대 문학에서 개인을 발견했는데 이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는 그것을 변질시켰다. 모처럼 발견한 ‘개인’이 무한경쟁의 주체로만 규정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철학이 빈곤하다는 점이다. 한국사람이 현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이 없다. 남은 것은 신자유주의적 경쟁뿐이다.
윤평중 = 노무현 정권은 앞뒤가 맞지 않는 날림정권이다. 평가대상이 된다는 자체가 부끄럽다.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폐해가 막대하다보니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시장도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나의 이익이 당신의 이익이 되는 기반이 확대재생산되고 절차주의적 형평성이 시장주의의 성숙과 더불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시장이 갖는 순기능까지 눈을 감는 것은 곤란하다.
조희연 = 나는 노무현 정권을 타자화된 문제로 보기보다는 진보적 지혜를 풍부하게 하는 타산지석으로 삼고 싶다. 20년전 6월항쟁의 한 구성요소였던 중도자유주의 저항주체가 집권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가 노정권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독재세력과는 다른 개방전략을 고민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자폐적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노정권이 성찰적 정치세력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했는데 그렇게 못해 안타깝다.
〈정리 임영주·김기범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