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대학엘 들어가고, 이리저리 방황도 했다. 그러는 사이 군대라는 몹쓸 곳에도 다녀왔고, 현실과 나 자신에 대한 체념일지도 모르지만, 현재 나에게 주어진 여건에 최선이나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복학을 했고, 무사히 졸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졸업 후 2년을 현실에 대해 허송세월했고, 책이나마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10년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숫자놀이에 재질이 없다. 10년이니 100년이니, 하물며 투투데이니 백일 기념일이니 하는 것을 썩 탐탁해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엇을 기념하고 기억한다는 것, 어떤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의 흐름 뒤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에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구분지어 놓은 서른이란 나이에 서러워지는 것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10년이란 감상에 빠져드는 것이니, 이것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닌 것으로 봐서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줄곧 듣지만, 내가 보는 내 주변의 '강산'들은 그리 썩 변한 바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는 많이 변했다. 많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났다. 내가 느끼는 변한 바 없음은 그 생겨남이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심 밖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내가 느끼는 10년이란 세월의 무상함은 간혹 씁쓸함이다. 그나마 보이던 자그마한 서점이 자취를 감춰버린 것, 매일 같이 들르던 단골 당구장이 1년 넘게 문을 닫고 있다는 것 정도. 그런 사라짐의 씁쓸함 외에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이미 오래 전에 접어두었다. 문득 당구장 사장님의 병환에 차도가 있는지 궁금해 진다.

늘 같은 곳에 있으면서 많은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변화로 느끼지 못하는 무딘 감각의 탓일지도 모르겠다. "큰 소리는 잘 들리지 않으며 큰 모양은 형태가 없다[大音希聲, 大象無形.]"는 노자의 말처럼,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살아 온 나로서는 어떤 거대한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현재까지는 여전히 '강산'의 10년 변화를 절감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 문득 떠오른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었다는 장자의 이야기처럼 중요한 것은 마음인지 모르겠다. 강산이 변한 만큼 나 스스로도 내가 알 수 없는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변하는 세월 속에서 10년 전의 나만을 생각하고 세상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것도, 세상의 변화에 나 또한 체념하며 아무런 반성 없이 사는 것도,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내가 놓아야 할 것과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할 것,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10년의 세월을 바라보아야 하겠지?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은 변하고, 나도 변하고, 우리는 모두 변하지만,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그와 함께 이제는 버려두고 나아가야할 삶의 아집이나 편견들도 많을 것이다. 내가 지난 10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허심탄회 하는 것은 일전의 어떤 충격 혹은 만남 때문이다. 정확히 10년의 학번차가 나는 새내기와의 뜻밖의 만남, 그것이 주는 충격이 컸기에 나는 지난 10년을 묻게 된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조교이니, 해마다 신입생들을 줄곧 만난다. 다들 내 후배이니 만큼 애정이 크다. 그와 함께 새로운 사람들을, 젊고 신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은 기쁨이면서 어려움이다. 그러나 이번의 아주 사소한 대면에서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간혹 이맘때 쯤에, 입학이 결정된 신입생들이 한 둘 학과사무실에 찾아오기도 한다. 학생증 발급 신청 때문이 주된 이유다. 며칠 전에 내가 만난 새내기도 그런 이유로 학과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의 대량의 학생증 발급을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일괄 접수하고 발급한다. 그러니 그렇게 미리와서 학생증 신청을 해도 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학과사무실을 찾아 온 그 새내기는 헛걸음을 했으니 불만스러웠을 게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새내기에게 내가 이러한 사정을 친절히 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불손하다거나 한참 어린 후배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한 것 같지는 않다. 있는 그대로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답변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새내기는 들어올 때도 그랬지만 나갈 때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만이 그 마지막 표정이었던 것이 다를 뿐이다. 그 새내기가 학과사무실을 나가면서 어디서 '퍽' 소리가 났다. 나와 내 후배였던 한 친구가 깜짝 놀랐다. 그 새내기는 사라졌고, 우리는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났던 것인지를 곧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새내기가 줄곧 들고 있었던 것이 종이컵이었고, 사무실 안쪽 문 옆에 놓여있던 쓰레기통에 힘차게 뿌리치고 나가버렸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남겨진 나와 내 후배는 한참을 멍했다. 그 후배는 뭐 저런 게 다 있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나 이제 어떻해야 할까?'를 걱정했다. 그 새내기는 나를 선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은 좋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일종의 싸가지 없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후배로서 선배에게 보여야할 싸기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간혹 우리가 은행이나 동사무소엘 가더라도 그 새내기처럼 행동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나는 그런 종류의 싸가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그 새내기에는 좀 부족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처음 만난 10학번 차이의 신입생 후배에게서 느낀 첫인상이다. 그래서 더욱 걱정인 것은, 내 후배 08학번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로 이것이 작용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선배와 후배를 나누고 후배는 선배에게 깎듯하게 예의바르고 무조건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만남과 관계에서는 기본적 예의가 필수적인 것이 아닌가? 내가 처음 만난 그 새내기 친구에게서 그런 예의 없음을 본 것이 08학번 전부에 대한 편견으로 작용할 것이 두렵다. 그런 친구들에게 내가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도 걱정이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생각을 10년의 세월로 넓혀간 것은, 좀 다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모든 08학번들이 그 새내기와 같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10년 전의 나와, 아니 1년 전의 07학번 후배들과는 많이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 친구들과 앞으로의 1년을 지내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가짐도 많은 부분에서 변화하고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척 어려울 것 같다는 데서 오는 어떤 두려움이 크게 일어난다.

혹여, 내가 이 새내기들에게 자칫 무례한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고, 선배로서의 헛된 권위로 그들을 강압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내 기준에서, 선배의 생각과 행동을 강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내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간에 그런 부당함을 내가 저지른다면, 그 친구들에게 나는 며칠 전의 그 새내기처럼 인간적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인간으로 보여질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래서 1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 걱정이다.

"10년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 속에는 강산 이전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 전제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10년의 세월 뒤에 내가 만나는 08학번 친구들은 10년 전의 98학번 나보다, 어느 10년 세월 변한 강산 만큼의 변화된 인간일 것이다. 나도 10년의 세월을 따라 변했지만, 그렇게 변한 나는 이제 30대의 모습이고, 그들은 20대다. 세대 차가 분명 있을 테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인간적 관계에서 지켜지고 존중되어야 할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진중히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 지켜야할 예의를 사랑하는 내 후배가 될 08학번들에게 지켜주고 싶다.

어쩌면 장자와 나비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장자가 곧 나비고, 나비가 곧 장자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나 10년 후배나 다른 차원의 인간이 아닐 것이다. 세월이 변하고 강산이 변하고 인간이 변하더라도, 그 변화 속에 사는 내 마음을 어떻게 가져가는 가에 따라 삶은 달라질 것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 우선 내가 가져야할 마음 가짐은, 내가 며칠 전 첫 대면한 그 후배의 다소 무례함을 이해하고 잊는 것부터일지 모르겠다. 그것도 그리 쉬울 것 같지 않지만 말이다. 내일이면 08학번 친구들이 학교에 온다. 그들은 또 어떤 모습이고 새로움일지 설레고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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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2-1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08학번은 22일에 입학식을 한다네요. 아마도 21일 밤에 올라가야 할 듯...

멜기세덱 2008-02-19 09:35   좋아요 0 | URL
입학식을 그렇게 일찍해요?ㅎㅎ
아무튼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ㅎㅎㅎ
공부하다가 힘들면, 멜기세덱을 찾으라고도 전해주시구요...ㅋㅋㅋㅋ

순오기 2008-02-19 21:28   좋아요 0 | URL
원래 예비소집일이고 사흘뒤 OT, 3월 입학식이었는데, 지방생들 때문에 변경한 듯...감사하지만, 멜기님을 찾을만큼 힘들지 않기 바라는 엄마 마음 아시죠?^^

조선인 2008-02-1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의 간극 무섭죠. 그나저나 98학번이셨군요. 어맛, 어려라. ㅋㄷ

멜기세덱 2008-02-19 09:35   좋아요 0 | URL
아직, 철부지죠 뭐....ㅋㅋㅋ

마늘빵 2008-02-1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런 싸가지들 항상 있죠. 근데 해가 지날수록 점점 많아지는 거 같은 느낌입니다. 제가 나이를 먹고, 보수적으로 변해서라기보다는, 아해들이 점점 싸가지 없어지는거 같습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된 애들이 많아요. 00학번이었던 제 후배 하나도 그런 녀석이 있었어요. 동아리 후배였는데 교양수업 중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 교수님이 화가 났는지 학생 뭐하는거냐 어쩌고 했는데 얘가 적반하장으로 막 싸가지 없게 굴은거죠. -_- 그래놓고 저한테 와서는 자기는 잘못한게 없는양 궁시렁궁시렁하는거에요. -_- 어이가 없었습니다.

bookJourney 2008-02-19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는 나이 차이를 의심했는데, 꼭 나이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나이에 관계없이 기본적인 '인간됨'의 문제가 아닐런지 ... 가끔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