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교육급수)과 10일(공인급수)에 사단법인 한국어문회와 한국한자능력검정회에서 주관하는 제37회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이 있다. 오늘(17일)부터 원서 방문접수 기간이다. 인천에는 몇 개의 고사장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인하대학교다. 인하대학교 고사장은 우리 과에서 위촉을 받아 한자시험을 진행한다. 여타 고사장은 일부 서점 등에 위탁하여 접수를 진행하지만, 인하대학교 고사장은 고사장 자체에서 일괄적으로 접수까지 도맡는다. 인하대학교 고사장의 총관리감독은 한국어문회 이사인 우리 과 교수님께서 맡으시고, 그 실무는 내가 맡는다. 그래서 오늘은 그 실무 중 하나의 방문접수를 시작했다.

접수를 나 혼자서 맡기에는 학과 업무도 봐야하고 아무래도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2명의 접수도우미를 둔다. 그간 졸업한 후배들을 불러 썼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모두들 일을 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과 후배들 중에 휴학 중인 애들을 쓰기로 했다. 2놈을 불렀는데, 오늘 1놈 밖에 오지 않았다.

접수는 응시 지원자들이 원서를 작성해 가져오면 수험번호를 발급하고, 수험번호와 고사장, 시험일자를 원서에 기록한 후 응시료를 받고 수험표를 나눠주는 일이다. 우리 고사장에서는 600~700 명 가량을 방문접수로 받는데, 대부분이 접수 첫날 오전에 몰린다. 한 두명 씩이면 상관이 없는데, 여러 명이 몰르고, 게다가 일부 학원에서 다량으로 원서를 접수시켜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접수가 지연되기 일수다. 일부 개인접수자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기존 2명이 접수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이쯤에서 나까지 나서서 개인접수자들을 별도로 접수받기도 한다. 전화도 빗발친다. 그런데 한 놈이 안 왔다. 2명이 진행해도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닌데, 한 놈이 안 왔다는 사실은 날 당황케 했다. 전화도 해보고 문자도 해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어이하리, 한 놈과 내가 달라붙어 접수를 받는 수밖에는 없었다.

9시에 시작되어야 할 접수는 9시 10분쯤부터 받기 시작했다.(사실 오늘 나도 늦잠을 자서 거의 9시가 다 돼서야 출근을 했다. 부랴부랴 접수를 시작한 셈이다.) 쉴 틈이 없었다. 1시간 쯤 지나서부터는 일부 학부모들(응시자의 대부분이 초등학생이다. 대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서 접수를 한다.)이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묵묵히 접수를 받는 수밖에. 어지간하면 1~2장 정도만을 접수하는 사람을 먼저 받으면 될 것 같지만, 아침부터 순서를 기다린 사람들은 또한 불만을 터트린다. 그러면 혼란만 가중되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시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접수만을 기계적으로 받았다. 오늘 접수도우미를 맡게 된 후배녀석은 처음하는 일이라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시키는 일만 할 뿐이다. 그러니 나는 접수를 받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후배녀석을 닥달하며 정신이 없었다. 12시 30분이 되어서야 늘어서 있던 접수자들의 줄이 끝났다. 약 3시간 반 동안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지도 못했다.

접수 받는 내내, 전화벨은 계속 울려댔다. 전화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또 다른 후배녀석에게 월요일 아침에 일찍 좀 오라고 해 놓았는데, 그놈은 감기에 걸려 낮 12시에 일어났단다. 이상하게도 지겹게 보이던 놈들도 오늘은 쥐새끼 한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전화벨은 울려대고, 아주머니들은 아우성대고, 수험번호 따느라 혼란스럽고, 응시료 계산하느라 낑낑대고, 하여간 복잡다단한 하루였다.

12시 반, 오전 접수를 마감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하니, 내 안의 분노가 치밀었다. 하다못해 전화라도 한 통 해 줘야되는 것 아닌가? 몇 번을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오후에 후배를 통해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아프단다. 그것도 어디까지 제3자를 통한 정보다. 고지곧대로 믿기가 어렵다. 죽을 병에 걸린 것인가? 그건 아니길 바라지만, 그래도 화가 난다. 그 전에 후배놈을 시켜 문자를 보내라고 했다. "앞으로 내 눈에 띄면 죽는다고." 농담으로 들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는 설마 내 눈에 띄어도 죽이지는 않겠지만, 욕 한 바가지는 해주지 않을까 싶다. 정말 아프지 않으면 말이다.

오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늦잠을 자서 부랴부랴 머리에 물만 묻히고 출근했고, 오자마자 한 놈이 안 온 덕에 쉴새없이 접수를 받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꼭 이럴 때 입맛이 없다. 출근하면서 배고파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한 가지 찝찝한 일이 그 전에 있었다. 찝찝한 일이라기 보단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야할까?

오전 밀린 접수가 끝나갈 즈음, 한 학부모가 한 장의 응시원서를 내밀었다. 수험번호를 발급하고 기록하고, 고사장과 시험일짜를 찍어 주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이가 휠체어를 타야 한단다. 책상을 별도로 준비해야 하고, 응시 급수에 상관없이 2층 이상은 곤란하단다. 이런 경우가 없었다. 순간 생각나는 것은 곤란하다였다. 아무래도 대학인지라 의자와 책상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어디서 분리된 책상을 공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누가 하는가? 내가 해야 한다. 어떤 규정이나 지침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고사장 여건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다른 고사장을 찾아보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알겠다고 했고, 원서 접수를 취소하고 나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다른 곳에 가서 접수를 하긴 하는데, 이 고사장에 접수 하겠다고 하면 다 해줘야 하는 거에요."

"다 해줘야 하는 거에요."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한국어문회 측에 연락을 했다. 장애인 응시와 관련된 규정이 따로 있느냐고. 별도 규정은 없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적용되는 규정에 따른단다. 장애인에 경우 1층에 시험장소를 배정하고, 필요할 경우 시험시간을 30분 이상 더 적용하고, 시각 장애인의 경우 시험지 등을 확대복사하여 제공하고, 별도 판단에 의해 고사실을 단독으로 배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차. 이런.

오늘 오후 내내 후배 놈이 안와서 내가 생고생한 걸 생각하면서 화가 났지만, 그것만으로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 해줘야 하는 거에요."란 말을 남기고 가신 그 아주머니가 내내 생각났다. 처음에는 '이거 문제 생기는 거 아니야'란 걱정이 앞섰지만, 이내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사실 받아주어야 했고, 받아 줄 수 있었다.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말이다. 상황이 좀 달랐으면, 그러니까 내가 좀더 여유있는 상황에서였다면, 받아줬을까?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 싶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 처음 직면했기때문에, 한 번 쯤 한국어문회 측에 문의를 먼저 구했을 수도 있었겠지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고사장 여건이 어려울 것같다는 핑계로 접수를 반려했다.

결국,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다. 후배 놈이 안 와서 짜증나고 성질나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다만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전 우리 학교의 장애인 관련 시설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내용을 페이퍼를 쓴 적도 있는 놈이, 어떻게 오늘과 같이 불학무식한 짓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오늘은 이것때문에, 하루 종일 부끄럽고 죄스럽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오늘 수고로운 발걸음을 돌리신 그 아주머니께 심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 아주머니께 또 한 번의 상처를 드린 것이 못내 죄스럽다. 그리고 모든 장애인들에게 사죄한다. 하느님은 이래서라도 계셔야지 싶다. 이런 놈을 어떻게든 벌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부끄럽다.

후배놈을 죽일지 살릴지, 아직 고민이다. 아무래도 내가 죽일 수는 없겠다. 한 대 패주기라도 하고 싶지만, 그렇게까지도 못할 일이고, 그래도 싫은 소리는 어쩔 수 없지 싶다. 그 전에, 나를 죽일지 살릴지부터 물어야 하겠다. 아무래도 살리기 어렵지 싶다. 아! 오늘 하루는 내 생애 가장 부끄러운 날로 기록돼야지 싶다. 이런 죽일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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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9-1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자기반성기능이 작동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세요. 그것조차 고장나면 곧바로 속물세계로 추락합니다.

멜기세덱 2007-09-18 01:21   좋아요 0 | URL
인생자체가 속물인생이에요.ㅎㅎ 반성을 하면 그걸 고쳐야되는데 말이죠.

심술 2007-09-1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자책하시진 말고 힘 내세요.

멜기세덱 2007-09-18 01:22   좋아요 0 | URL
자책아니라, 타책을 좀 받아야해요.^^;;

라주미힌 2007-09-18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잡한 심경 이해가 되네요...

멜기세덱 2007-09-18 01:22   좋아요 0 | URL
아직도 복잡합니다. 자야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