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 바로읽기 - 백석 대표시 해설
백석 원작, 고형진 지음 / 현대문학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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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 그와의 인연은 조금은 남다르게 시작되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2학년이 되었을 때, 소모임으로 활동하던 시(詩)창작 동아리의 후배들이 성년의 날 선물로 백석의 시선집 한 권을 주었다.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유달리 흰 피부의, 요즘으로 치면 꽃미남, 완소남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준수한 외모의 한 청년이 겉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시와사회, 1997.)란 시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석이란 시인은 그리 잘 알려지 있지 못 했다. "분단에 의해 묻혀진 세계적인 천재 시인"이란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나에게 이런 백석은 그때까지의 여타 시인들과는 유독 다르게 다가왔다.

우선, 그의 외모는 너무 잘생겼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이전의 시인들 중에서는 백석처럼 잘 생긴 이를 찾아보지 못했다. '천재 시인'이라는 그 시집의 수식어와 겹쳐지면서, 이런 시인을 왜 아직까지도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 후 1930년대 후반의 짧은 활동과 분단 후 재북시인으로서 우리에게 '묻혀질' 수 밖에 없었던 사실 등등을 알게 되었다. 그 시집을 선물로 받고는 쉬엄쉬엄 묵혀두면서 틈틈이 읽어 갔다. 하지만 그의 시들을 읽어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못되었다. 무슨 암호같은, 외국어같은 평북지방의 방언들,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인 그의 시 형식들, 이를테면 끝없는 사물의 나열이라든가, 줄글과 같은 산문시형들로 시의 맛들을 찾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외모와는 사뭇 다르게 시들과 친해지기는 이런 난관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백석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을 이끌게 한 것은 그의 살아온 모습에서였다. 백석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두면서 틈틈이 그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는 와중에 그의 삶의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알게되었다. 이를테면, 자야 여사와의 첫 만남에서 다짜고짜 "당신은 오늘부터 내 마누라요."라고 말하던 백석의 모습들을 알게되면서 '아 이 백석이란 시인은 참 멋진 사람이었구나!'하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백석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구해 읽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다. 그에 대한 내력이라는 것은 해방 이후의 자취들 외에는 잘 알려진 것이 없었고, 그때까지의 백석 연구라는 것도 미진했기 때문이다.

백석이 해금되고 그에 대한 첫 연구가 바로 고형진의 「백석 시 연구」(고려대 석사학위논문, 1983.)다. 그 이후로 백석에 대한 연구가 대학의 논문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뿐, 그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작업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동순에 의해서 『백석시전집』(창비, 1987.)이 80년대 후반에 출간 되었고, 이후 김학동, 김재용 등에 의해서 전집들이 엮겨져 나왔으며, 백석의 시 전반에 대한 연구나 그의 삶의 이력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거의 없다. 몇몇 문학사나 시비평 서적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언급된 것이 전부일 따름이다. 그런 상황에서 백석에 대해 보다 세세히 안다는 것은 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건국대출판부에서 나온 <문학의 이해와 감상>시리즈 『백석』(박혜숙, 1995.)이란 작은 책 뿐이었다.

아직까지도 백석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고 대중적 인지도 또한 그리 높지 못하다. 현행 국어교과서나 문학교과서에서 몇몇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시들이 백석 시를 대표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다. 분명 뛰어난 작품들이긴 하지만(「여승」, 「여우난곬족」,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고향」) 백석시의 전반적 특징들이랄 수 있는 '엮음'의 방식, 토속어의 사용, 다양한 인간 모습의 형상화 등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백석에 대한 편협적인 이해에 그칠 수 밖에 없으며, 백석의 본연의 시적 성취를 알기에는 모자람이 너무 크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짓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도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닥불」전문)

"이 시는 백석이 시도한 엮음의 표현형태가 또 하나의 새로운 미학적 기능을 발휘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모닥불의 현장을 묘사하면서 작품의 의미를 구축해나가는 시의 제작과정이 신선하여, 그의 개성이 분명하게 과시된 또 하나의 문제작으로 꼽을 수 있다."(186쪽)는 고형진의 언급에서처럼 이 시는 단순한 나열인 것 처럼 보이는 사물들, 인간 군상들의 열거를 통해 묘한 시적 성취를 이루어낸다. 이런 방식들을 고형진은 '엮음'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판소리 사설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표현형태와 비교하면서 백석 시에 나타나는 모더니티한 모습에 전통적 명맥을 부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백석이 김소월보다 뛰어나도고 할 수 있는 점이 이것으로 근대적인 시의 형식과 전통적인 정서와 표현방식들을 절묘하게 접합시키면서 뛰어난 시적 성취를 이뤄낸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츰
  나어린 안해는 첫아들을 낳었다

  인가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즞는다

  컴컴한 부엌에서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적경」전문)

백석은 시적 장치에 무척이나 예민했었던 것 같다. 그의 시들이 무수한 나열의 시에서 오는 지루함이 아닌 것은 그가 곳곳에 다양한 시적 장치들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장치가 바로 제목이다. '적경'이란 말은 "고요한 경지의 경계, 또는 고요한 상태'라는 의미다. 한 폭의 수채화같은 이 시에 백석은 '고요함'을 부여하면서 '시의 정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만든다. 또 다른 시를 보자.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멧새소리」전문)

기묘하다고 할 것이다. 시 어디에도 멧새는 등장하지 않는다. 명태와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자신의 초라하고 외롭고 쓸쓸한 모습을 부각시킨다. 여기에 교묘한 시적장치로서 배경음악을 추가시킨다. 추운 겨울 명태 사이를 오가며 찍찍 짹짹 울어대는 '멧새소리'를 떠올려 보면, 이 시의 묘미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백석의 뛰어남을 볼 수 있는 시들은 많다. 그 중에서도 그의 연애시편들도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그는 정열적인 사랑을 한 만큼, 뛰어난 연애시편들도 엮어내고 있다. 외지로 떠돌면서 삶의 고노와 외로움들을 읊어낸 시편들, 어린 날의 추억들과 평북지방은 여러 문화적 일상적 모습들을 한편의 동화처럼, 신화처럼 엮어내고 있는 시들 모두가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고형진의 『백석시 바로읽기』는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백석의 시들 중 60여 편을 골라 각각의 시에 섬세하고 세밀한 해설을 붙여주고 있다. 백석시를 읽어내는데 가장 애를 먹이는 평북 방언들에 대한 저자의 주석도 친절하다. 사실 해설이라는 것은 자유로운 시 감상에 방해가 될 소지가 크다. 이 책의 작업들도 그런 염려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백석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장벽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이 책이 충분히 해 줄수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친절하고 세밀한 해설이 장점이면서, 이 장점을 독자들이 적절히 부분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값지다고 할 것이다. 이 책으로 백석에게 매료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아직까지 백석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다. 백석이란 뛰어난 시인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할 의무가 우리의 문학자들에게는 있다. 백석이 가지는 시와 삶의 매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충분히 호소력 있음을 나는 느낀다. 일례로 그의 삶과 사랑은 한편의 영화로 만들기에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의 시와 삶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대중적으로 백석을 알리는 작업들이 활발히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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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5-14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집에 있는데 아직 못 읽어 봤어요^^;
여담이지만 백석시를 읽으면 왠지 배가 고파지기도^^

멜기세덱 2007-05-15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시에는 참 먹을거리가 많이 나와요..ㅎㅎ 국수가 먹고 싶어지는군요...ㅎㅎ

apple 2008-04-25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뵙습니다. 질문이 있어서요.
저, 이 책에서 "컴컴한 부엌에서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끊인다"로 나오나요?
혹시 "끓인다"가 아닌지 여쭙습니다.

멜기세덱 2008-04-25 23:30   좋아요 0 | URL
명백한 오타네요.ㅎㅎ 죄송합니다.

승주나무 2008-04-26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서을 엄청 좋아해서.. 백석 시 용어사전 같은 거를 옆에 놔두고 초록색 형광펜으로 단어를 칠하고 밑에 각주를 쓰면서 봤던 거 같아요. 그렇게 단어찾고 새기면서 봤던 책은 김유정과 백석이 처음일 듯 ㅋㅋ
이 책 좋은 것 같아요. 멜기 리뷰가 더욱 물이 오른 것 같네~~
요즘 많이는 안 쓰는 것 같지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