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심성보 옮김 / 미토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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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교제도는 기회를 평등하게 한 것이 아니라 기회의 배분을 독점하고 말았다. - P. 29

시대를 초월해서 냉정하고 정확한 진단과 비판은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는 기분이다.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말들이지만 시대와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결코 만만찮은 선견지명을 느끼게 된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는 21세기 더욱 유효한 울림으로 들린다.

세상에 학교를 없애자면 참 많은 사람들이 일단 굶어 죽는다. 학교에 기대거나 기생하는 사람들이 인구의 절반쯤 될까? 잘못 접근하면 일리히의 주장이 반문명론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행복은 자건거를 타고’ 오는 것처럼 ‘학교 없는 사회’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다. 전일제 출석에 의한 획일적인 공교육를 실시하는 학교의 폐지를 주장하는 저자를 과격하게 볼 수도 있으나 이 책에서 조목조목 분석과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학교는 할말이 없어 보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학교에 몸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황당하게 들릴만한 저자의 주장은 뼈아픈 자기 반성이며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기초한다. 학교가 굴러가는 시스템이나 비효율적 보수적 관리 체계를 논외로 하더라도 학교 교육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교육을 ‘인적 자원’의 양성으로 보는 수단적 개념으로 국가가 통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학교교육의 맹신은 사회화 과정에서 배제와 수용이라는 결정적인 칼자루가 된다. 60년대 실천적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창한 아비투스와 더불어 학교교육도 사회의 계급을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부르디외나 아비투스가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겹침점이 많다. 특히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이라 일컬던 시대에 그 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계급 상승을 꿈꾸었겠지만,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지금과 같다.

저자는 학교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한다. 극단적 선언으로 들린다. 현실성이 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그가 말하는 비판의 초점을 눈여겨 보고 반성적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인의 능력과 인간적 본성을 떠나 학벌 위주의 사회가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모든 ''위선적인 공익사업'' 중에서 학교는 가장 교활하다. 고속도로망은 자동차의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뿐이었으나, 학교는 스펙트럼의 우측 끝에 몰려 있는 일군의 근대적 제도 전체를 창출해낸다.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낭만적이라고 일축할 정도로 끝내주는 것이겠지만 학교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즉시 냉혹하다든지 또는 제국주의자라고 공격받는다. - P. 106

날선 칼날 위에 서서 미래를 조망해 보아야 한다. 대학 진학을 위해 소모되는 사교육비와 전 생애를 통해 학교교육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따져보자. 공부를 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그에 대한 대안은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자. 국가의 존재처럼 학교의 존재는 무소불위의 권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고 기형적으로 교사의 권위와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문제와 처방은 다양하게 논의되겠지만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은 우리들이 학교 밖에서 학습한 것이다. 학교 아동은 교사가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때때로 교사가 있을 때라도 대부분의 학습을 자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대단히 비극적인 일은 대다수의 사라들은 전혀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결국 학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
누구나 학교 밖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들은 교사의 개입 없이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것, 느끼는 것, 노는 것, 저주하는 것, 정치에 관여하는 것 및 일하는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 P. 58

아동들이 학습한 것의 대부분은 결코 교사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다. - P. 59

어떠한 훌륭한 교사라도 잠재적 교육으로부터 학생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 P. 64


교사의 역할과 한계를 단적으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저자의 지적은 단호하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교사의 역할이 축소되는 이유와 저자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학생들이 교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과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한 회의에 공감한다. 책임 회피의 차원이 아니라 극단적인 신뢰도 철저한 불신도 모 위험하다.

현대의 학교를 기초로 하여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역설적이다. 학교의 교사가 재판관, 이데올로기스트 및 의사의 기능을 한 몸에 다 갖추어 가질 수 있?때 사회의 기본적인 양식은 원래 인생을 위한 준비과정 자체에 의해 왜곡되게 된다. - P. 62

어떠한 제도도 학교만큼 능숙하게 참가자들에게 현대 세계에 있어 사회의 원리와 사회의 현실 사이에 있는 깊은 모순을 은폐할 수 있는 장치는 없을 것이다. 학교는 세속적이며 과학적이고 또 죽음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합세하고 있다. - P. 80


비판을 위한 비판, 대안 없는 비판에 대해 우리는 냉정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학교를 폐지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렇다면 매년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 현실과 끊임없이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에 대한 방법들이 학교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백년대계인 교육에 관한한 모두가 전문가이다. 그렇다면 학교 자체에 대한 비판과 관심은 당연하지 않은가. 국가 수준의 교육의 목적과 개인의 행복과 유리된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문제제기를 통해 개선될 것인지 아니면 경쟁과 이기적 욕심으로 버텨 볼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결정에 달려있다. 단순한 시선과 지엽적인 해결책으로 한방에 풀어낼 수 없더라도 현실적인 대안들을 내놓아야 할 시기는 벌써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도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06122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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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0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획기적이네요.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아이가 적응을 못하고 겉돌때마다 제가 생각했던 내용들이 들어있어요.
우리 애한테 과연 학교나 선생님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생각해왔고
과감히 학교를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아이는 학교에 안가면 큰일나는줄 알아요.
그런 사회에서 저도 살아왔기에 아이의 두려움을 잘 알지요.

짱꿀라 2006-12-2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 자체와 선생님은 필요하다고 보여지는데........
아이들이 가정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생활이라고 할까요.

드팀전 2007-03-2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익숙하여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학교.
학교라는게 선구적 비판자들에 의해 기존 체제를 안정화 시키고 반란의 싹을 가라앉히고 순응하는 자들의 홈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또한 계급의 재생산 역할까지...오늘 한겨레 신문에도 농촌 아버지와 강남 아버지의 학력 비교기사가 실렸지요.새삼스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내용인지라...
딜레마가 좀 있어요.학교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무정부주의적 방식으로 교육제도를 거부하기 힘들다는 점이지요.좀 더 자유로운 세계를 위해 결국 공교육이 개선되야하는데 그것도 결국은 국가 기구의 양보를 담보해야하고 양보라는 형태로 또 다른 포섭이 이어지는 것이니까...

sceptic 2006-12-21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래 집단과의 사회화나 교사의 역할 모델도 중요하긴 하지만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집단적 학교교육에 대해 일리히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타협과 양보라고 할 순 없지만 지금 학교교육 제도 자체를 폐지하자는 것은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반성적 성찰은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오늘 아침 한겨레에서 이 관련 기사를 봤습니다. 학교교육을 통한 계급의 고착화가 가장 큰 문제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도 변화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팀전 2006-12-2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얽힌 실타래입니다.교육문제는.
(<미국민중사>를 읽다보니 이반 일리치의 <디스쿨링 소사이어티>.위의 책이 언급되더군요.70년대 교육계에서 시도된 탈제도화 논의 중 한권으로..)
^^ 그냥 웃는 이야기인데 '제도 변화를 통해 해법을 찾자'는 -표현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말을 저 역시 도망갈 때 없으면 생활 현장에서 가끔 쓰는데...쓰면서도 참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님의 말씀이 틀렸다거나 이상하다는게 아니라..그 표현을 제가 가끔 쓰면서 혼자 속으로만 '결국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단 이야기군' 하며 꿀꿀해 하던 제 모습이 떠올라서 이야기해봤습니다.

sceptic 2006-12-2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고 하신 이야기지만 웃을 수 만은 없는 지적 맞습니다...^^ 무책임해 보이지만 개인의 능력에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모두의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공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실적 대안을 찾고 온몸으로 모든 문제들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적당한 핑게가 아니라 모두가 안고 있는 서민들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사한 문제가 터지거나 작은 참여나 실천의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의견을 보이는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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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은 심장을 동경하듯이 인간의 유전자에는 폭력이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영화 <뮤직박스>를 거쳐 <인생은 아름다워>, <베를린 천사의 시>,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난 주로 각색된 이미지를 통해 아우슈비츠를 기억했던 것이다. 사실에 바탕을 둔 역사적이고 체계화된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에 대해 공부하지 못했다. 이 책 저 책을 통해 단편적으로 혹은 인상적으로, 피상적으로만 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현실이고 나의 역사 인식의 한계이다.

그래서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아픈 기억을 훑어내듯이, 차마 감았던 눈을 다시 뜨듯이 지나간 시간을 들여다 볼 때가 있다. 간접적인 추체험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대학에 들어가 광주 비디오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그러했다. 이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절규와 혼돈으로 가득했으며 비관적 전망으로 암울했다. 지금도 기본적인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과장일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살아 숨쉬는 보고서이다. 그녀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뒤 1933년에 프랑스에 망명한 뒤 1941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 대전의 포화를 피해 떠난 수많은 유대인 중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 지식인 계층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논쟁거리는 여전히 잠재워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말미에 언급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이다.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이 개념은 아이히만 개인의 문제에서 인류에게 내재해 있는 보편적 원리의 개념으로 바꿔버린 데 있다.

히틀러나 괴벨스, 아이히만으로 대표되는 개인들의 경악할만한 범죄 본능이나 야만적 폭력성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저자의 개념이 얼만큼 커다란 후폭풍을 일으켰을지는 짐작이 간다. 어쨌든 정치 철학의 지평을 연 그녀의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쉽게 읽히는 책이라는 데 위안을 가지고 책장을 열었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비밀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다음 해에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독일인 변호사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받지만 교수형에 처해진다. 예정된 수순을 밟듯 진행된 재판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mankind of crime)와 인간성에 대한 범죄(humanity of crime)라는 미묘한 관점을 짚어내는 저자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인다. 그녀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미국에서 이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날아간 저자의 생각은 <뉴요커>에 게재된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이히만을 통해 국가 권력에 의한 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450만에 600만으로 추정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학살의 책임을 몇몇 개인에게서 찾는다는 것 또한 희극에 가깝다. 유리 상자 안에 들어앉아 원숭이처럼 살아남은 자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아이히만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먼저 확인하게 되는 것이 이 책의 의미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과정과 방법은 이 책에서 부수적으로 다루어진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서 확인된 사실들을 재삼 언급하지도 않는다. 15여년이 흐른 후에 뒤늦게 체포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저자에게 새로운 의미로 보여졌을 것이다. 미국에서 건너간 그녀의 시선은 동족을 살해한 살인자의 재판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아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여기에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볼 일이다.

전체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추방, 수용, 학살로 이어지는 3, 4, 5장이 잘 알려진 내용이고 나머지 부분들은 아이히만의 활동과 행동 반경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헝가리, 스로바키아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이 참여한 이송과 학살센터에 관한 증거와 증언들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아이히만에 대한 판결과 항소 그리고 처형으로 끝을 맺는다.

한 번 시도된 악은 반드시 인류에 의해 재발할 수 있다는 그녀의 후기가 섬뜩하게 읽힌다. 난징 대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등 헤아릴 수 없는 학살의 예가 있다. 얼마나 죽었나가 문제가 아니라 왜 죽였냐가 문제다. 명분이 무엇이든 방법이 어떠하든 여전히 계속되는 폭력과 살인은 어쩌면 인간의 원죄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교훈만이 아닐 것이다. 예루살렘에 나타난 아이히만을 바라보며 우리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아이히만을 말이다.


06113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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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악의 평범성 : 희생양 제의 뒤 추악함들에 대한 묘사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006
    from Fly, Hendrix, Fly 2009-07-07 14:48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한길사 PD저널 헨드릭스의 책읽기 2009년 7월 4일 지행네트워크의 예사인(예술, 사상-사회, 인문) 세미나의 두 번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한길 그레이트스트 북스에서 나온 책을 완독했다. 책은 손의 질감과 눈으로 느끼는 두께보다 훨씬 빽빽했다. 다른 사회과학서를 읽을 때 보통 시간당 100페이지를 읽는 데, 이 책은 시간당 30페이지 읽기가 쉽지 않..
 
 
짱꿀라 2006-12-0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악에 대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시는군요. 기독교에서는 악이란 과녁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던데요. 저는 아직도 악이란 정말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올해도 좋은 일 많이 생기시고 잘 마무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sceptic 2006-12-0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12월이니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소리 들립니다. 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kleinsusun 2006-12-0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치와 아우슈비츠를 "각색된 이미지"로만 갖고 있어요.ㅠㅠ
미루고 있었던 책인데, 님의 글을 읽고 보관함에 넣었어요. 감사합니다.^^


sceptic 2006-12-02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말씀을요...많이 긴장하지않고 편안하게 읽어볼만 합니다. 즐거운 독서하세요.
 
자본을 넘어선 자본 리라이팅 클래식 2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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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순히 돈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다. 누구도 사회구조와 경제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무렵 중상주의자들에 의해 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절대군주의 국가에서 경제적 수단에 의한 연구가 경제학의 기초가 되어 애덤스미스에 이르러 정치경제학은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다.

맑스는 이러한 청치경제학을 통해서 자본이 집적한 거대한 부의 본질이 바로 노동자들의 노동이라는 점을 보았으며, 바로 그러한 사실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야기하는 요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았다.

맑스의 자본(Das kapital)은 이러한 토대에서 생산된 최고의 저작으로 일컬어진다. '청치경제학 비판'에서 비롯되어 '자본'으로 완성된 그의 이론은 후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론 맑스도 그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서 헤겔의 이론을 수용하고 새로운 전망과 비판을 내놓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인간과 인간이 모여 살아가는 이 사회의 구조를 자본과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경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본'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 결국 우리의 위치, 아니 나의 의미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자본의 힘을 절감하며 노동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다른 형태이기는 하나 맑스의 주장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체제 전복의 불온한 사상으로 매도되기 이전에 맑스의 '자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연구가 거의 불가능했던 우리 사회의 레드컴플렉스는 그 실체를 더욱 깊숙히 감추어 두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나처럼 무식한 노동자들에게 자본에 대한 거부감과 자본가에 대한 저항을 위한 이론적 무기의 역할만을 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처한 현실과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사회 현상들을 본질에 대해 고민할 재료들을 던져준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진경은 맑스의 자본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현실적인 이행운동'이 자본주의 외부에서 무수히 창출되고 시도되기를 열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전은 '영원성'이 부여되어 현재적인 문제설정들에 일조하고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며 살아 숨쉬는 유기체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고전이 지닌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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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7색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인터뷰 특강 시리즈 1
홍세화,박노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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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에 관한 허다한 책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교양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 생활이나 학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행과 문화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지식과 교양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다. 교양의 내용은 시대 또는 민족에 따라 달라지는데, 적어도 유럽문화권에 있어서는 이제까지 그리스·로마적인 교양의 이념이 일관하여 계승되었다. 고전 그리스에서의 '파이디아(paideia:교육)' 이념이 헬레니즘을 거쳐 그리스도교 세계로 계승되어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교양이 확립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진정한 교양은 미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변화와 진보를 화두로 한 교양을 의미한다. 협소한 의미가 될 수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교양의 영역과 내용이 달라진다면 고려해 볼만한 일이다.

  한겨레신문사에서 2003년 3월에 <한겨레21> 창간 10돌 기념 이벤트로 '인터뷰 특강-21세기를 바꾸는 교양'을 진행했다. 이 강연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 ‘21세기를 바꾸는 교양’이다. 강연자는 박노자, 한홍구, 홍세화, 하종강, 정문태, 오지혜 다우드 쿠랍 등 7인의 아웃사이더 전사들이다. 실제로 박노자와 홍세화는 격월간 진보잡지 <아웃사이더>의 편집위원이다. 이들의 특강을 놓친 것이 아쉬웠는데 뒤늦게 책으로 만난다.

  현장의 분위기와 대면 접촉이 아닌 활자화된 내용의 한계가 아쉽긴 하지만 7명의 색깔이 분명하고 압축된 흐름으로 읽힐 수 있겠다. 아쉬운 것은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나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나를 배반한 역사>등 강사들의 책을 읽지 않았거나 평소 관심이 없던 독자들이라면 짜증섞인 비판이 나올법도 하다. 다소 수박 겉핥기식 교양 강의 수준으로 비춰질 수 있을 정도의 내용으로밖에 요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홍세화, 박노자, 한홍구의 강의 내용이 그렇다. 하종강의 강의는 들을때마다 박카스처럼 마음을 다지게 하고 오지혜의 강의는 친근하고 쉽게 다가온다. 쉽게 접하기 힘든 전쟁기자 정문태의 강의와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룬 쿠탑의 강의 내용이 새롭다. 진짜 교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평등 의식이나 정의감은 학습이나 훈련의 결과이거나(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취하는) 행동이 아니라 본성으로 타고나는 것’이라는 지적이 뼈아프다. 본성을 지켜가는 것조차 힘든 사회가 되는게 아니라 평등의식과 정의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옳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겁니다. 자신의 부채를 어느 쪽으로 펼쳐야 할지 항상 고민하면서 살자는 겁니다. “나는 권력과 자본 그리고 노동자 사이에서 공정하게 중립을 유지할 거야.” 우리 사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어느 것이 가치 있는 삶이겠어요?’ - 하종강의 강의 중에서

  누구든 쉽게 말할 수 있다.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실천해 나가자고. 진보적 딴따라 오지혜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러나 쉽지 않은 것이 실천이다. 양심에 귀기울이고 행동과 실천, 참여와 나눔으로 삶의 모습과 자세를 생활 속에서 조금씩 바꿔 나갈 수 있기를 스스로 다짐해 본다.

  한 권의 책은 필자가 두명 이상일 때 깊이가 떨어지고 남는게 없을 수도 있다. 이번에 주문한 책들이 대부분 그렇다. 여러명의 공동 집필이다. 충분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가벼운 산책을 즐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200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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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세계를 뒤흔든 선언 1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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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물아홉 살의 청년 맑스와 스물일곱 살의 청년 엥겔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을 발표한다. 혁명의 해를 기억하기 위해 나는 ‘이판사판’으로 그 해를 기억했었다. 150여전에 발표된 선언의 혁명 정신과 계급 의식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유효하며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의미를 간직할 것이라고 믿는다.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공장체제로 인한 인간 소외는 <선언>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며,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는 맑스의 말은 <선언>의 기초가 된다. 역사 발전 과정 속에서 문제는 늘 행동과 실천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침묵하는 대중에게는 언제나 행동하는 혁명가가 필요하다. 인간의 삶과 사회의 불안정을 경제적 불평등과 자본의 소수 집중의 문제로 보았던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선언>을 시작했으며,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선언>을 끝맺고 있는 것이다.

  맑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맑스는 인간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고 그의 삶을 요약한 것처럼 인류의 삶에 결정적 <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1917년 혁명가 레닌에 의해 러시아에서 현실로 나타났고 뒤이어 마오에 의해 중국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구 유럽에서 도미노 현상처럼 실현되었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우리는 마지막 공산주의 혁명가로 기억한다. 선언의 현실은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와 1인 독재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고 이전의 상황보도 훨씬 더 지독한 고통을 인류에게 안겨 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두 번째 세계 혁명의 해였던 1968년의 실패 뒤로 맑스주의는 대학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제는 학문의 영역으로 남겨져 버린 느낌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둘 다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확신 속에서 <선언>은 작성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로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을 증대시킬 것이다.”라는 핵심 실천 강령을 통해 노동자 계급에게 <선언> 되었다. 원문에 나타나는 당시의 노동 계급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분명했고, <선언>의 대중성과 선동성은 지금까지의 어떤 다른 선언과도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이십대의 청년 맑스의 상징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평생을 이 선언에 대한 이론적 작업에 몰두한 것이 <자본Das Kapita>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혁명과 선언이라고 하기엔 그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유지 되는한 그의 선언은 언제나 유효하다고 믿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감추는 일을 경멸한다”고 원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맑스는 혁명을 역사 발전의 필연 법칙으로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견해를 밝히고 “현존하는 사회 ․ 정치 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혁명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

  선언 당시 혁명은 좌절되었으나 맑스와 그의 영원한 동반자 엥겔스는 한번도 역사 발전의 필연적 법칙을 의심하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시켜주고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혁명의 현장을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선언>은 혁명으로 가는 길만을 보여줄 뿐, 혁명 이후의 정치나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래서 위험하고 선동적인 인식되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뒤흔든 <선언>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가장 급진적으로 드러낸 문서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언>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도 나는 개인적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맑스가 제시한 꿈을 더 좋아한다. 그가 말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진정한 유토피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회제도나 경제 체제의 변화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맑스가 다시 살아나 오늘의 세계를 돌아본다면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불평등한 노동자 계급과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노동 현장에 투입되는 제 3세계의 현실을 맑스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계급 투쟁’의 역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할까 <선언>의 원문 마지막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극한 대립을 조장하는 선전선동의 구호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울분에 호소한 말이다. 인류가 역사 발전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면, 맑스의 <선언>이 더 이상 과거의 추억(?)이 될 수 있다면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하는 헛된 상상을 하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지도 모르는 불평등한 현실을 들여다본다.

  해제를 쓴 고병권의 마지막 평가로 이 책의 의미를 대신한다.

  나는 선언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은 위험한 책이자, 생산하는 책이며, 미래의 책이다. 그것은 위험한 복음이자, 혁명-기계이며, 영원회귀하는 유령이다. 하지만 누군가 하나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책’이다.



2005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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