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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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씀,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한 생애가 필요하다. 자기 범죄를 부인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을 ‘용서’하는 일은 종교인도 어렵다. 타인을 향한 서운함에서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을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처리할까. 인간의 본능에 가까우며 가성비 최고라는 ‘뒷담화’가 정답일까. 문제는 알고 외면하는 사람보다 무엇이 잘못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인지부조화로 극복하는 인간이 더 심각하다. 물론 이 유형에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모두 포함된다. 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두려움과 혐오에 맞서는 대중 행동은 보복과 증오가 아니라 희망, 화해,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포용적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 아닐까 싶은 회의가 든다. 넓게는 정권 교체마다 반복되는 과거 청산 혹은 정치 보복에서 좁게는 연인과 친구, 가족은 물론 직장동료, 지인에 이르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적절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문화와 관습에 따라 법률로 처벌하거나 공동체의 암묵적 질서로 배제하거나 개인적으로 보복하거나...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법’이라는 부제에 낚이지는 않는다. 그런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 개싸움을 하는 시대에 혼자 우아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가 진흙을 던지는 데 우아하게 대처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폭력을 폭력으로 이길 수는 없다. 개같은 상대를 개가 되어 물 수도 없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은 ‘두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두려움의 군주제’라는 원제 뒤에는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우아하게 건너는 법’ 따위를 언급한 적조차 없다.

현대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불안해지고 계급과 계층 간의 갈등이 속출하며 기후 변화가 미래의 불안을 경고하는 시대를 지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그것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해석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철학자의 경고다.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그럴듯한 포장지로 자기를 감쌀 때, 타인을 향한 혐오에 내 일이 아니라며 침묵할 때, 상대를 공격하고 제거함으로써 두려움을 해소할 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희망’을 떠올린다.

이 책은 주로 미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으나, 준거 집단을 미국으로 삼는 대한민국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들이다. 정치적 분노, 차별과 혐오, 시기와 비난, 성차별과 여성 혐오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살피고 분석하는 글이 부족한 현실에서 돈벌이에 혈안이 된 유튜버만 날뛴다. 분석과 해석이 아니라 감정의 배설과 증오 마케팅이 판을 친다. 이런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차분한 시간, 넓은 안목과 사유의 도구를 제공하는 마사 누스바움의 태도는 시종 일관 차분하지만 날카롭다.

논리를 갖춘 객관적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숭고함이다. 글을 읽는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관점과 태도가 냉정하고 합리적일 때 비로소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감정적 선동이나 정답을 제시하는 오만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하든 마찬가지다. 겸손과 성찰은 기본이며 조심스런 태도로 좌고우면해야 실수를 줄이고 자기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사유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 글은 어떤 형태로든 아름답다. 편안하게 읽히지만 뼈를 때리는 문장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깊이 사고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두려워하고 비난하기란 쉬운 선택지다. -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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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때가 오면 - 존엄사에 대한 스물세 번의 대화
다이앤 렘 지음, 황성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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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늙고 모두 죽는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선택의 영역이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삶의 목적과 가치, 방법과 태도는 오롯이 개인이 선택한다. ‘성공한 삶’, ‘만족스런 삶’의 기준도 다르지 않다. 그 선택과 기준에 따라 ‘좋은 삶’이 결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전제를 부정할 수 없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만큼, 아니 때로는 좋은 삶보다 더 중요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불로장생의 꿈은 유토피아처럼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인간의 꿈이다. 그러나 노년과 죽음을 피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이앤 렘은 80이 넘은 나이에 ‘나의 때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여러 사람에게 묻는다. 남편이나 아내와 사별한 사람, 말기 암 환자와 주치의, 호스피스 종사자, 존엄사 지지자와 반대자 등 스물 세명의 인터뷰이에게 저자는 ‘죽음’을 묻는다. 아니 죽음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질문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 쉽지 않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노화방지 혹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비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은 없다. 대개 나이로 생의 마지막을 짐작하지만, 죽음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그렇다면 마이클 헵의 말대로 평소에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응급실, 중환자실, 각종의료기기, 요양병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공식처럼 여겨지지만, 당사자, 가족, 주변인들의 생각과 감정은 제각각이다. 나, 너, 우리 죽음은 어디까지 왔을까. 가족과 친구, 연인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타인의 죽음을 앞에서 삶의 허무 대신 ‘나’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닐까.

36년 동안 300만 명이 넘는 청취자가 <다이앤 렘 쇼>를 들었다. 탁월한 진행자였던 저자는 팟캐스트와 북클럽을 운영하며 지낸다. 존엄사 지지자와 반대자들의 생각을 모두 담은 이 책은 가십거리 예능이나 현란한 말장난으로 가득한 팟캐스트와 결이 다르다. 사려 깊은 태도로 ‘의료조력사망’의 관점, 정책, 문제, 대안을 고루 다룬다. 미국 오리건 주가 최초로 자발적,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한 법률을 채택한 건 1998년이다. 이후 개인이 ‘의료조력사망medical aid in dying’을 이용해 자신의 고통을 언제 중단할지 선택하도록 허락한 곳은 현재까지 겨우 열 개 주와 워싱턴 DC뿐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아래 몇 개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료조력사망’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생각하는 안락사와 조금 다르다. 의사조력자살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구체적인 범위와 방법에 대해서는 문화, 종교, 나이, 직업 등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 순간이 ‘나’에게 닥쳤을 때를 생각해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책은 어떻게 죽을지에 관한 ‘방법’의 문제를 다룬다.

‘의료조력사(조력존엄사)’라고 하면 어감이 좀 다를까. 존엄사라는 말은 좀 나은가. 대한민국은 드디어, 올해 말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고령 인구는 지난해 말 993만 명에서 올해 말 1051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전체 인구의 19.2%에서 20.3%로 상승하는 것으로, 5명 중 1명이 고령자라는 의미이다. 연금, 정년, 주택, 의료, 복지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연계된 ‘초고령 사회’ 진입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대한민국이 늙고 있다.

이에 비해 2023년, 출생아 수는 23만 명이며 가임기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세)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의미하는 합계출산율은 0.72명이다. 한 해 30만명 정도 사망하는 대한민국에서 20여만 명의 아이가 태어난다. 교육, 경제, 국방 등 우리 사회 곳곳에 곧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대한민국의 인구는 줄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과정은 반복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디쯤 걷고 있을까. 각자의 나이, 종교, 직업, 학력, 재산 등에 따라 죽음을 맞는 방법과 태도가 다르겠지만 아름다운 마무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법적,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고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면 서둘러야 한다. 인구 감소만큼 심각한 초고령 사회를 맞이하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는 바로 ‘죽음’이다.

“내 가족, 주치의, 병원에 전합니다. 제가 정신적 또는 육체적 장애에서 회복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일 경우 인위적인 방법과 거추장스러운 수단들을 동원해 제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최후의 시련을 다스릴 수 있는 약물을 자비롭게 투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 임종 순간을 앞당기더라도 말입니다. 저를 아끼는 여러분들이 이 절박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이라고 느끼면 좋겠습니다.” - 320쪽

81세의 저자는 앤 모로 린드버그의 말을 인용하며 공감과 지지를 보낸다. 그러면서 마지막 인터뷰이로 다트머스 대학 의대생인 18세 손자 벤을 선택한다. “나는 의료조력사망이 필요하다고 믿고 나한테는 내가 죽을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그렇게 죽고 싶단다.”라며 이 책을 마무리 한다. 지식이 실천이 되고, 앎이 삶이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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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 감정의 연대기 1929~1939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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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은 19세기 3부작 마지막인 『제국의 시대』에서 20세기의 출발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규정한다.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유럽을 팽창시켜 세계를 연결했으며, 산업자본주의가 유럽을 본격적인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탐욕스런 제국주의의 확산은 자연스럽게 ‘벨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의 종말을 예고했다.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19세기를 마감한 인류는 이제 근대의 문을 닫고 현대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때 그 시절,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전성기,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우디 앨런은 《미드나잇 인 블루》(2012)으로 이 시대를 추억했고, 넷플릭스는 《트랜스아틀란틱》에서 발터 벤야민의 자살 등으로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슬픔을 담담하게 묘사했다. 플로리안 일리스의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은 10년 만에 내놓은 『1913년 세기의 여름』의 속편 혹은 후일담처럼 읽힌다. ‘감정의 연대기 1929~1939’라는 부제처럼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이 암흑의 시대, 증오의 시대를 건너는 법으로 그들은 ‘광기의 사랑’을 선택했을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한나 아렌트와 하이데거 뿐만 아니라 숱한 작가, 화가, 배우들이 등장하는 이 거대한 사랑의 연대기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핵인싸’들의 사랑을 꼴라주한다.

전작 『1913년 세기의 여름』는 신선함을 넘어 충격이라고 할 만큼 독특한 책이다. 현재형으로 장면을 포착하고 묘사하는 카메라 앵글처럼 저자는 한 편의 영화를 텍스트로 보여주는 듯하다. 장면 전환은 자연스럽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각 쇼트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느낌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실제 인물들의 일기, 편지, 잡지, 신문, 사진 등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시대를 재현했으니 마치 리얼리티 예능 혹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 플로리안 일리스가 선택한 구성과 문체의 힘은 강렬하다. 예술가, 철학자, 영화인, 정치인, 과학자 등 유명 인사들의 사랑은 특별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열적이지만 치졸하고 무책임하며, 때로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은 누구에게나 다를 바 없는 감정이다.

양다리와 불륜은 기본이고 약물 복용, 스와핑, 근친상간에 이르기까지 지고지순한 사랑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가학적 섹스에 이르기까지 100년 전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오늘보다 치열하고도 과격하다. 그야말로 ‘광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랑들, 시대를 핑계 삼은 일화들의 병렬적 배열과 교차 편집은 다시 한번 독자들을 매혹한다. 한 가지 함정은 등장인물들의 면면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전혀 없거나 그들의 글과 그림과 영화와 사상에 무관심하다면 이 책은 따분하고 지루한 역사극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올가 코사키에비치, 비앙카 비넨펠트, 마샤 칼레코, 헤미요 비나베르, 마를레네 디트리히, 메르세데스 드 아코스타, 그레타 가르보, 클라우스 만, 루트비히 마르쿠제, 토마스 퀸 커티스,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 클로드 클라라크, 토마스 만, 파블로 피카소, 도라 마르, 마리테레즈 발테르, 고트프리트 벤, 헤르타 폰 베데마이어, 엘리노어 뷜러, 프리드리히 빌헬름 욀체, 케테 폰 포라다, 틸리 베데킨트, 테오도어 아도르노, 그레텔 카르플루스, 막스 호르크하이머, 디트리히 본회퍼, 에버하르트 베트게, 베르톨트 브레히트, 헬레네 바이겔, 마르가레테 슈테핀,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루트 베를라우, 발터 벤야민, 안나 마리아 블라우포트 텐 카테, 올가 파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하인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빌리 와일더, 쿠르트 투홀스키, 엘제 바일, 리자 마티아스, 헤트비히 뮐러, 마리 게롤트투홀스키, 에리히 뮈잠, 첸츨,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리나 과나디니, 조세핀 베이커, 주세페 페피토, 아나이스 닌, 곤살로 모레, 위고 귀에, 헨리 밀러, 준 밀러, 루트 란츠호프, 알마 말러, 후고 폰 호프만스탈, 타마라 드 렘피카, 라울 쿠프너, 에리카 만, 마틴 굼퍼트, 구스타프 그륀트겐스, 막스 리버만, 알프레트 케어, 프란체스코 폰 멘델스존, 에리히 캐스트너, 헤르타 키르히너, 마르고트 슌랑크, 리 밀러, 맨 레이, 키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아우구스트 잔더, 프란츠 헤셀, 폴 엘뤼아르, 마리아 벤츠, 갈라,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부뉴엘, 군타 슈퇼츨, F. 스콧 피츠제럴드, 젤다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콘라트 아데나워, 니나 폰 레르헨펠트, 한나 아렌트, 하인리히 블뤼허, 귄터 슈테른, 마르틴 하이데거, 리자 폰 도베네크, 트루데 헤스터베르크, 하인리히 만, 넬리 크뢰거, 루디 카리우스, 알프레드 되블린, 욜라 니클라스, 볼프강 쾨펜, 쥐빌레 슐로스, 테아 슈테른하임, 몹사, 카를 슈테른하임, 파멜라 베데킨트, 르코르뷔지에, 에른스트 윙거, 루디 슐리흐터, 카를 슈미트, 프리드리히 홀랜더, 헤디 숍, 고트프리트 폰 크람, 바버라 허튼, 발터 그로피우스, 이제 그로피우스, 헤르베르트 바이어, 레니 리펜슈탈, 아네타 에버스베르크, 빌헬름 2세 황제, 헤르미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마르고트 폰 오펠, 유타 잠보나, 루트 알부, 프란츠 마르크, 오토 딕스, 케테 쾨니히,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마르가레테 카르플루스, 테오도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자크앙리 라르티그, 르네 페를, 빅토르 클렘퍼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프랜시스 스키너, 마르그리트 레스핑거, 탈레 셰그렌, 헤르만 헤세, 니논 돌빈, 프로이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로테 레냐, 폴 그린, 틸리 로쉬, 오토 폰 파세티, 쿠르트 바일, 에리카 네어, 샤를로테 볼프, 카테리네, 알마 말러베르펠, 구스타프 말러, 오스카 코코슈카, 발터 그로피우스, 프란츠 베르펠, 요하네스 홀른슈타이너, 하리 그라프 케슬러, 아르놀트 브로넨, 힐데가르트 폰 로소, 요제프 괴벨스, 마그다 크반트, 올가 푀르스터, 엘리자베트 폰 헤닝스, 쿠르트 폰 슐라이허, 쿠르초 말라파르테, 마그누스 히르쉬펠트, 리 시우 탕, 카를 기제, 쿠르트 볼프, 헬렌 볼프, 헬레네 모젤, 마농 네벨 두몽, 찰리 채플린, 폴레트 고다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니메트 엘루이 베이, 리처드 오즈번, 리온 포이흐트방거, 에바 헤르만, 롤라 제르나우, 마르타, 이오시프 스탈린, 나데즈, 몰로토프, 갈리아 예고로바, 셀린(루이페르디낭 데투슈), 실리 팜, 셀린, 로베르트 무질, 마르타, 아돌프 히틀러,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마르가레테 그룬, 게오르게 그로스, 에바, 요제프 로트, 안드레아, 알프레트 케어, 유디트, 엘제 라스커슐러, 카를 폰 오시에츠키, 구스티 헤히트, 비키 바움, 파울 클레, 막스 베크만, 릴리 폰 슈니츨러, 케테 폰 포라다, 헬데가르트 멜름스, 콰피, 라울 하우스만, 헤트비히 만키에비츠, 베라 브로이도, 빌리 브란트, 게르트루데 마이어, 아르놀트 쇤베르크, 마르크 샤갈, 맥스 베어, 막스 슈멜링, 아니 온드라, 올더스 헉슬리, 쥐빌레 베드포드, 빅토르 알로조로프, 지마, 메레트 오펜하임, 알베르토 자코메티, 쿨라우스 솅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낸시 큐너드, 헨리 크라우더, 슈테판 게오르게, 아비 바르부르크, 브루노 발츠, 젤마 페트, 바실리 칸딘스키, 구르트 폰 슐라이허, 리베르타스, 귄터 바이젠보른, 리하르트 폰 라파이, 하로 슐체보이젠, 프리츠 란츠호프, 브리기테 헬름, 후고 에두아르트 쿤하임, 알렉산터 클루게, 오스발트 슈펭글러, 아나톨 도브리안스키, 빌리 칠케, 요제프 로트, 이름가르트 코인, 슈테판 츠바이크, 헤르만 괴링,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에르나 실링, 에른스트 톨러, 크리스티아네 그라우토프, 미클로시 젠쿠트헤, 두르스 그륀바인, 조피 숄, 프리츠 하르트나겔, 엘리자베트,

10년간 벌어진 당대의 문화사를 오로지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며 등장시킨 주요 인물들이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연애사가 계속 다른 인물들과 연결되어 중복을 피해 적다 보니 리스트가 이렇게 길어졌다. 아나이스 닌이 일기에 적은 것처럼 이들은 “죄가 아니다. 동정도 없다. 죄책감도 없다. 오직 사랑뿐.”(439쪽)라고 생각했을까. 희망 없는 시대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이었을까. 저자는 “1929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과거를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두들 그토록 정신없이 현재에 몰두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빛과 어둠, 선과 악,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겨를 없이 오로지 현재에 매몰된 채 사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듯하다.


플로리안 일리스는 『1913년 세기의 여름』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출간에 부쳐 “인생은 너무 짧고 프루스트는 너무 길다.”라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기억은 현재의 인식이나 유토피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프루스트가 남긴 위대한 유언이자 위로의 약속이다.”(502쪽)라며 기억의 심연을 파고드는 프루스트를 언급한다. 인간은 대개 자기 경험과 기억 속에 갇혀 산다. 그것이 사실과 달라도 상관없다는 듯, 자기 말과 행동의 변명으로 삼으려는 듯. 우리가 나무로 책을 만들어 도서관을 거대한 인공 숲으로 만드는 건, 인류의 생각과 감정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 안에서 유영하는 독자들은 무슨 희망과 기대가 있어서라기보다 그것조차 사라진 시대를 견디기 위함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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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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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Reader, Come Home, 2018년)보다 『책 읽는 뇌』(Proust and the Squid: The Story and Science of the Reading Brain, 2007)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10여 년 만에 원제 그대로 『프루스트와 오징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인간의 뇌는 책 읽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책을 읽고 싶지 않은 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독서는 본능에 반하는 훈련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뛰어난 창조성을 발휘해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토마스 에디슨,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앨버트 아인슈타인, 로댕, 앤디 워홀, 피카소, 안토니오 가우디 같은 천재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모두 ‘난독증’ 환자였다. 매슈 루버리는 『읽지 못하는 사람들』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읽기와 뇌과학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포스트 텍스트 시대를 위한 준비에 해당한다.

모든 학문적 성과가 그러하듯, 이전 시대의 누적된 연구 결과가 출발선이다. 인류문명이 단기간에 눈부신 발전은 거듭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축적된 뇌과학의 연구 성과 인간의 읽기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세하게 다룬다. 잘 읽는 비법을 찾아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판에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그 이유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난독증, 과독증, 실독증은 일종의 병리 현상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고 그 원인을 제거하면 다시 읽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공감각, 환각, 치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경질환 때문에 활자를 접할 때 문제를 겪는 독자들의 증언이 생생하다. 이들은 읽지 않는 게 아니라 읽지 못하는 것이다. ‘의지’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는 자기계발에 관심을 둔 사람이나 학습력 증진이 필요한 학생과 학부모에겐 논외다.

그러나 이해comprehension는 해독decoding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분석과 활용은 개인적인 소화 단계로 고급 독자들에게 주어지는 자연스런 선물이다. 흥미를 끄는 하나의 증상은 일반인들로 가당치도 않은 능력을 보여주는 서버트증후군이다. 사진을 찍듯 책을 암기하는 사람, 메모리칩처럼 책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 등 책 읽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능력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과유불급. 중용은 기준과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적당히’, ‘쉽고 재미있게 잘’하는 방법이다.

문해력에 관심이 모인다. 한자어가 우리말의 일상어 중 33%, 전문어는 60%가 한자어다. 물론 고유어도 고역이다. ‘심심한 사과’, ‘명일 회의 시간’, ‘사흘 후까지 보고서 제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일상생활이 어렵지는 않다. 단톡방에서 오가는 말을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살피는 동안 오히려 읽을 수 있는 사람들, 읽지 않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플레시는 읽기를 ‘특정 글자를 조합해 의미를 얻는 것’이라 정의했고, 메리언 울프는 “글로 쓰인 언어를 해독하고 이해하는 행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지각적 ․ 인지적 ․ 언어적 ․ 정서적 ․ 생리적 과정”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일기를 ‘활자에서 유도된 사고의 형태’라고 확장한다.

‘독서’가 아니라 왜 ‘읽기’인지에 대한 고민과 『읽기의 미래』를 조금 일찍 고민한 사람들도 있다. 미디어리터러시의 바탕은 무엇일까. 비판적 읽기가 가능하려면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읽지 못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다소 학술적인 용어와 사례 중심의 책으로 ‘노잼’ 등급으로 판정할 수 있으나 대개 잠시 출간되었다 사라지는, 많이 팔리지 않은 책들 중에 보석같은 책들이 너무 많다. 옥석을 가리는 안목은 독자의 능력이겠으나 각자 읽는 목적과 이유가 다르니 아무 책이나 ‘추천’ 딱지를 붙이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이 책의 마무리 ‘나의 방식으로 읽고, 살고, 나아갈 것’이라는 말은 ‘읽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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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것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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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게 가능한가. 예를 들어, 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엄마의 착각이 아이를 망친다. 식성과 습관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으나 성장 과정에서 생각과 감정은 하루가 다르게 차이가 난다.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는데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는 도시의 전설은 여전하다. 부모 자식뿐 아니라 연인과 부부 관계만큼 오해가 심각한 경우도 드물다. 많은 사람이 에리히 프롬을 소환하고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거라고 되뇌지만 내가 바라보는 그, 혹은 그녀는 자신의 기대와 거리가 멀거나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럴 리가 있다’는 게 디폴트 값이다. 리처드 니스벳의 탁월한 저서 『사람일까 상황일까』는 인간의 양면성을 상황 논리로 설명한다. 누구나 그럴 수 있고 사람은 앞뒤가 다르며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 건 특정 직역, 정치인, 행정가, 공무원, 과학자의 논문 정도가 아닐까.

사람을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전제로 데이비드 브룩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관점이 달라진다. 우리, 아니 당신이 믿는 인간 혹은 세계는 어떤가. 서로를 깊이 알면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넓어지냐고 묻는 저자에게 서로를 깊이 알면 다칠 뿐이라는 시니컬한 답을 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소셜 애니멀』부터 관계에 집중했다.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며 인생의 태도를 점검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적 영감과 성찰을 준다는 점에서 공상과학에 가까운 자기계발서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저자의 지향점과 전제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사례 중심으로 철학과 심리학, 문학과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소설과 영화를 가로지른다. 읽는 재미는 충분하며 인사이트도 충분하다. 모든 사람에게 ‘타인과의 관계’는 풀리지 않는 숙제다.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건, 사람마다 초점 자동 조절 기능으로 피사체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기능을 장착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기대고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소환하고 템플 스테이와 명상을 시도하기도 하는 걸까. 정답이 없으니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자기만의 ‘태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며 자기 정체성이다.

차이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견디고 조절해야 한다. 하나가 되려는 허튼 노력과 우리가 남이냐는 호소가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때로는 인맥과 인연을 강조하며 관계를 이용한다. 남이 하면 이기적 집단주의 카르텔, 내가 하면 처세술에 능한 성공한 인맥 관리일까. 정서적, 개인적 1차 관계와 공적 영역의 2차적 관계를 구분하는 공정한 세상, 합리적이고 평등한 사회는 ‘꿈’에 가까운 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최소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에서라도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를 익히며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간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지혜로움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조언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책이 그러하듯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개별 독자의 몫이다.

“사람들은 개인의 정신적 경험을 세상에 투사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감각기관과 개인사, 목표, 기대치에 의해서 특정한 지각이 형성되었음을 망각한 채, 자기의 정신적 경험을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라 착각한다.” - 프로핏/드레이크베어 『지각Perception』 재인용,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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