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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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아우라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인류 문학의 거장 마르셀 프루스트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기 전에 사전 정보를 최대한 차단하고 오로지 텍스트 자체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맛보려고 노력한다. 현대 문학과 달리 고전은 두 가지 시점으로 바라본다. 첫 번째는 ‘당대성’이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힌 사회, 역사적 배경과 문화, 사상적 토대가 고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는 ‘현대성’이다.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살아가는 나의 관점이다. 이해와 공감, 재미와 감동은 문학의 가장 큰 효용이지만 내가 즐길 수 없다면 굳이 책장을 넘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지극히 사적인 허구적 자서전 또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유대인 배척주의, 드레퓌스 사건 등은 당대에 가장 첨예한 사회적 이슈였다. 한 사회의 가치판단, 집단적 무의식은 오랜 전통과 문화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지향점,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로 판가름 난다. 프루스트가 어떤 이념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소설은 아니다. 다만 무엇을 쓸 것인지, 또 어떻게 쓸 것인지에 관한 거대한 자전적 작품론 혹은 작가론으로 읽히는 건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이 갖는 형식과 내용 때문이다.

1부 ‘스완 부인의 주변’은 파리 샹젤리제의 겨울이 배경이다. 화자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스완 부인을 바라보는 관점,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2편 ‘고장의 이름-고장’은 발베크의 여름이 배경이다. 1부에서 작가 베르고트가 화자의 글쓰기 혹은 작가로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면 2부에서 화가 엘스티르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이는 게 아니라 인상파 화가는 ‘빛’에 의해 보이는 대상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이 질베르트와 어떻게 달라지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이행하는 과정,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스완과 귀족을 상징하는 게르망트와의 관계 혹은 대립은 1800대 후반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을 벨 에포크가 아닌 조용한 변화와 갈등의 시대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물론 철저하게 그리고 지극히 사적인 기억 혹은 추억 속에서 반추하는 방식을 선택한 프루스트의 독특한 서술과 묘사, 어마어마한 만연체 문장, 사건과 감정에 대한 표현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독창성과 개성을 드러낸다. 문체가 곧 작가다. 그런 면에서 프루스트의 아우라는 곧 문체에서 나온다고 느꼈다.

신흥 부르주아 vs 전통 귀족 계급의 갈등과 대립의 서사의 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거대하고 지루한 문체에 함몰된 독자가 읽어내는 것은 베르뒤랭 부인과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차이가 아니라 전기와 전화가 보급될 19세기말 유럽 사회를 바라보는 프루스트의 고현학이다. 콩브레에서 샹젤리제를 거쳐 발베크에 도착한 프루스는 유아에서 소년으로 그리도 이제 청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자기 삶의 주체로 홀로 선다. 인상파 화가로 등장하는 엘스티르는 “원인부터 설명하지 않고 우리 지각이 받아들이는 순서에 따라 사물을 제시”한다는 말로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한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관점이 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 혹은 선택과 판단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세상에서는 ‘인식’보다 ‘지각’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교집합은 아닐까 싶었다. 인상파의 명암대비가 세계를 당시 세계를 보는 유럽인의 눈이었다면 또 다른 관점으로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는 화가도 있었으나 결국 프루스는 인상파의 위대함이 ‘시간’ 속에 숨어있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의 흐름이 곧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편은 그렇게 ‘시간’이라는 주제와 꽃과 소녀들의 대비를 통해 프루스트의 화양연화 혹은 자기 삶의 벨 에포크 시대를 그려낸 건 아닌지 모르겠다.

10년 동안 번역에 매달린 프루스트 전공자 김희영은 해설에서 “작가의 창조적 자아는 그 도덕적 인격이나 겉모습, 즉 사회적 자아와는 다르다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소설이라고 평가한다. 스완과 오데트, 베르고트와 엘스티르, 질베르트와 알베르틴 혹은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철저한 주관적 변용을 통해 재해석된다. 그러나 당대를 함께 했던 실존 인물과 현실은 관계 형성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사건과 사고를 설명하거나 이것이 그대로 문학적 알레고리로, 때로는 웅숭깊은 은유로 발현되는 것은 프루스트 읽기의 또 다른 재미이자 진입장벽으로 독자들에게 깊이 읽기를 강요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크레이프 케이크를 떠오르게 한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와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4권을 읽은 후의 감상이겠으나 정성스레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의 질감을 느끼게 한다. 똑같은 층위의 반복일지라도 또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아직 멀고 긴 시간 여행이 기다리고 있겠으나 7편의 소설이 따로 또 같이 읽혀도 무방하다. 어차피 한 인간의 일생도 찰나에 불과하며 어떤 시간의 단면도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않는가. 사랑과 이별과 망각의 고통이 이 작품의 주된 리듬이라면 이제 겨우 사랑과 이별의 크페이프 한 조각을 시식했을 뿐이다. 읽기는 어려우나 여운은 길고 입맛은 몸에 남을 듯하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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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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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객관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다 똑같은 수준으로, 필수불가결하게 중요한가요? -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22쪽

예쁜 사람보다 귀여운 사람을 좋다. 예쁜 건 꾸밀 수 있으나 귀여움은 사람이나 사람의 본질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남자든 여자든 후천적 노력으로 멋진 몸을 만들고 메이크업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도 있으나 귀여움은 나이브한 상태 혹은 타고난 특성에 가깝다. 귀여움을 연기할 수는 없다. 타고난 아름다움을 폄훼하는 게 아니라 귀여움에 관한 생각일 뿐이다.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는 대체로 시간을 견딜 수 없지만 귀여운 사람은 세월을 뛰어넘는다. 어떤 형용사가 빚는 이미지는 개인마다 다르게 갈무리되며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려워 사회적 언어로 공감하기도 쉽지 않다. 시니피앙에 의해 형성되는 시니피에 또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니, ‘예쁘다’와 ‘귀엽다’를 구별하거나 차이를 드러내는 일은 부질 없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를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물이 끓는 비등점, 곡률이 바뀌는 변곡점을 지나면 부분적으로 각개 약진하던 기술들이 통합되어 혁명적 변화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너지 효과를 예상하는 건 첨단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쉽지 않다. 오히려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역할에 충실한 과학자보다 가당치 않은 상상력으로 미래를 보여주는 예술가들에 의해 인류는 진보를 거듭해온 것처럼 보인다.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가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모욕일 수 있으나 스스로 ‘당대 인간의 삶과 사회’에 방점을 찍고 있는 장강명의 소설은 그래서 상상적 현실을 가능케 한다. ‘월급사실주의 소설가, 단행본 저술업자’라는 소개가 반가운 이유다.

프로필 사진의 보정이나 인공지능 어플 사용으로 외모를 마사지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면 각자의 눈에 어플을 활용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세상 그 자체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장치, 모든 사람을 멋지게 바꿔주는 도구가 있다면 모두가 윈윈 게임이 아닐까. 외모 콤플렉스 따위가 없는 세상도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표제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사소하지만 실현 가능한, 매우 현실적인 접근이라서 오히려 신선했다. 미래는 알 수 없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도 불안을 숙명으로 안고 사는 현대인에게 그들–예술가 혹은 과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가늠할 수 있는 내일을 예고 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에 무관심한 건 아닐까. 어차피 각자 보고 싶은 걸 보고 믿고 싶은 걸 믿으니까. 팩트 체크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 사실을 압도하는 일상이 오히려 불편한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사회 현상에 기인한 소설가의 상상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의 삶과 사회를 고민한다. 단편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오마주이자 패러디이며 재해석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문제의식은 종횡무진 시공을 초월하지만 결국 ‘인간과 사회’에 천착한다. 우리는, 아니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 시대정신을 말하는 사람은 정치적이며 밥그릇을 쳐다보는 사람은 근시안이다. 허나, 우리가 사는 세상과 오늘의 현실은 정치적 근시안과 ‘을’들의 전쟁으로 피가 튄다. 자신의 계급 이익과 무관한 맹목적 지지와 비난이 초래하는 결과가 참혹하다.

「사이보그의 글쓰기」와 「데이터 시대의 사랑」은 「아스타틴」의 상상력과 결이 다르다. 지극히 현실에 바탕을 둔 상상과 기대와 욕망에 바탕을 둔 현실은 차이가 크다. 일곱 편의 단편이 한 권으로 묶이면서 이 소설집은 현실적 SF, 아니 작가의 주장대로 ‘STSscience, Technology, Society SF’라고 불러도 좋겠다. 명칭이야 어쨌든 과학 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고민하는 문학적 상상력은 충분히 의미가 있고, 다분히 매력적이다. “과학기술은 이제 여러 영역에서 실존적 위기를 일으키고 있고, 나는 문학이 여기에 대응해야 하며,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며 장강명은 소설이 나갈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장강명의 등단작 장편소설『표백』, 르포『당선, 합격, 계급』등 지속적으로 그의 시선이 놓인 자리와 관심사가 사회학적 상상력과 닿아 있다. 문학의 역할과 기능이 모호해진 시대다. 소설보다 재밌는 게 넘치는 세상이다. 문학의 종언을 외치는 대신 문학의 변신과 지평의 확대를 모색하는 작품을 기대하는 건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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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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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언제나 인간의 현실 원칙을 넘어선 자리에서 욕망과 쾌락을 방기한다. 그것이 사회적 가면으로 가려진 자기 본능이든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든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간극 혹은 공감은 2차적 효과에 불과하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110년 전에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 드러내고 싶었던 욕망 등은 기억 혹은 과거라는 안타까운 한계 속에 갇혀 아름답게 유영한다. 그것은 오롯이 쓰는 자의 행복과 자유에 기인한 고백과 독백에 불과하지만, 읽는 자의 내면에 호응하는 순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선택적 기억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추동하는 힘이 된다. 쓰는 자의 경험과 무의식 속에 허우적거리던 읽는 자의 아득한 기억들은 제멋대로 춤을 추고 현실 속에 과거를 소환하며 미래를 가로질러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기이하고 생생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

따뜻한 차 한잔과 마들렌 과자 혹은 바니시 냄새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현재의 나를 온통뒤흔드는 트리거로 작동하며 기억과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 지금-여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후미각과 후각 혹은 시각과 청각 등 몸의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을 나이브하게 드러낸다. 감추고 숨길 수 없는 조건반사처럼 각자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시간의 옷, 세월의 두께를 어찌하지 못한다. 한 인간의 언어와 비언어, 반언어들이 모여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듯 그것을 담아내는 육체는 즉물적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명한 ‘나’의 모습이다. 몸이 계급이다. 몸은 영혼을 지배한다. 그래서 몸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지표로 작동한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에 담긴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간은 헤아릴 수 없다. 한나절 혹은 며칠 동안의 상념일 수도 있고, 글을 쓸 당시까지 반추한 자기 삶의 기억일 수도 있다. 소설의 옷을 입고 있으나 콩브레라는 지명이 실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스완도 마찬가지다. 프루스트가 질베르트를 통해 느낀 마음, 즉 뇌의 반응과 몸에서 벌어진 감각적 변화가 없었다면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을 설명할 이유가 없다. 유대인이며 동성애자 문학청년이었던 작가의 인종과 성적 취향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에 대한 해석과 실명으로 드러난 인물들, 뱅퇴유나 코타르, 비슈로 추정되는 인물 찾기 놀이는 호사가들의 즐거움일 뿐 읽는 자의 즐거움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플롯과 스토리를 따라가며 글의 의미와 프루스트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의미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고 외친 이유와 무관하게 때때로 읽는 자는 읽히는 대로 읽는 즐거움 그 자체를 포기하고 인터넷 정보나 유튜브를 뒤적이는 우愚를 범한다. 문학을 읽는 즐거움은 해석과 분석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읽는 자의 내적 갈등과 불안 혹은 행간을 뛰어넘는 상상과 의도적 오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은 제멋대로 읽기면 충분할 때가 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흥분과 열기가 가라앉은 다음 평정심은 되찾으면 그때서야 사랑인지 욕정인지 ‘생각’해 보는 일과 달리 프루스트의 소설은 망설이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몸을 맡겨도 나쁘지 않다. 문화적 환경, 역사적 배경, 사상적 토양이 다른 영국 작가가 지구 반대편에서 겪은 유년 시절과 스완의 사랑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떻게 읽혔는지 기록하는 일은 부질없다. 프루스트는 “작품의 표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내적 고향은 동일하며 따라서 작가란 엄밀한 의미에서 단 한 권의 작품밖에 쓸 수 없다.”라는 주장했다. 7편까지 읽고나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1편을 읽은 느낌은 낯설고 기이한 경험이라는 것일 뿐이다. 개인적 자아인 아니마와 아니무스 vs 사회적 자아인 페르소나의 치열한 사투가 이 작품의 본질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 존재를 해체하려는 집요한 시도와 죽음이 무의미한 삶에 대한 저항 행위라면 이렇게 시간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일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는 첫 문장을 ‘오랜 시간 불면에 시달리며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는 각주에 동의할 수는 없다.

프루스트는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 마르셀로 추정되는 화자와 질베르트의 사랑이야말로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음악처럼 흐른다. 부질없는 묘사와 표현이 마르셀, 아니 화자의 감정을 전달할 수는 없다. 읽는 자는 자기 사랑과 감정에 취해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리면 그만이다. 남은 이야기가 무엇이든 ‘잃어버린 시간’이 ‘잃어버린 사랑’이라는 통속적 한 줄 요약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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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창비시선 491
유현아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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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겨울이라고 어는 건 아니다. 몸이 봄이라고 건강해지는 게 아니듯이. 찬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해가 지면 해가 지는 대로 오늘은 과거가 되고 어제와 조금씩 멀어진다. 오래된 기억은 추억으로 갈아입고 선택적으로 갈무리된다. 지나간 모든 일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그러나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현재를 지배하며 영혼을 잠식하고 미래를 채운다.

PTSD로 고통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억울함과 분노를 억압하거나 절망과 슬픔을 눌러 담은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다.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이라고 다독여도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시는 슬픔의 미학이다. 유현아의 슬픔은 다른 시인의 슬픔과 다르지 않다는 게 아니라 허무와 냉소, 슬픔과 고통, 절망과 분노의 틈으로 자라는 작은 희망 같은 걸 믿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시집을 뒤적이는 게 아닌가.

오늘의 달력

어제의 꿈을 오늘도 꾸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바닥 밑에 희망이 우글우글 숨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다

한 장을 넘겨보아도 똑같은 달의 연속이었다

못 하는 게 없는 것보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당신의 애인에게서 내일의 꿈을 들었다

서시에 해당하는 이 시에서 제목을 골랐다. 양경언은 해설에서 이 시집을 「사라지는 세상을 위한 시」라고 명명한 다음, “유현아의 시에서 희망의 얼굴은 바닥에서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면 희망은 디폴트 값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은 절망은 바닥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절망의 바닥을 뚫고 내려가려 애쓰기도 한다. 대책 없는 희망, 실현 불가능한 기대는 더 큰 절망을 예비하거나 엄청난 분노로 전환된다.

질문들

광장에서

오늘도 침묵이 침묵처럼 번지고 있다

거짓말들은 모여 거짓말이 되지 않는다

거품처럼 달아난 목소리는 지워진 경계처럼 낯설게 오다 도망친다

저녁이 되면 희미한 빗살무늬 기억이 켜지는 그곳에 치켜뜬 눈들이 박혀 있다

완벽하게 행복해,라는 대답은 새빨간 비문이다

입에서 수많은 물이 넘쳐흘러 도시를 습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에는 별 모양 하나가 반짝이며 광장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왔다

울음을 흡수하지 못한 별의 흉터가 하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도 침묵이 아니다. “완벽하게 행복해,라는 대답이 새빨간 비문”인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완벽하게’라는 수식어가 없어도 비문이 아닌 건 아니다. 게으른 햇살이 길게 눕는 아침과 금세 어두워지는 저녁이 멀지 않다. 울음을 흡수하지 못한 별들이 반짝이는 건 눈물 때문이 아니라 투명한 슬픔 때문이다. 외로움과 심심함을 구별하지 못하듯 슬픔과 눈물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흉터 난 자리마다 이유가 새겨지듯 애써 외면한 일들은 언제나 반드시 정면을 바라본다. 외로 튼 고개를 스칠 때마다 굳이 슬퍼할 이유가 없다.

때때로 찬 바람이 불어야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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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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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라고 생각하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카뮈는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그래서 자살할 거니?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너무 유명한 문장이라 마치 그 책을 읽었다고 믿고 싶은 책 중의 하나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아닐까. 무용하고 희망 없는 반복적 노동과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많아진다. 너는 그런 고민을 하는 거 보니 배가 부르구나,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뭐 별거 있냐, 등의 대답부터 세계 평화와 인류 구원이 자기 삶의 목적인 사람까지 사는 이유와 방법은 80억 인구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각자 나름대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생의 가치를 찾기 위해 고민한다. 그러나 아무도 찾은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숱한 철학자와 종교인 등 선각자들의 이야기도 정답이 아니다. 난 너와 다르고, 너는 또 그와 다르니 하나의 진리와 방법을 찾았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 몸부림치는 사람은 어떤가. 하나의 도그마는 시지프가 산정으로 밀어 올리는 바위보다 무겁고 단단하다. 절대 굴러떨어질 리 없다는 믿음이 반대편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고 신념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집단학살, 제노사이드의 역사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뒷담화에서 패거리 문화까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무리 짓기와 구별 짓기는 세상을 사는 방법이며 본능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묻는다.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려 고민했던 카뮈의 생각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지금-여기에 당도해 있는 건 또 어떤 의미일까.

시지프가 형벌을 받는 이유는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그 형벌은 대다수 현대인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지루한 반복과 노동의 수고로움이 시지프의 형벌과 닮았기 때문이다. 루틴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카나리아 같은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언젠가 끝날 생에 대한 소중함을 위해 ‘질’보다 ‘양’의 축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선택, 누군가의 노력, 누군가의 경험이 비교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싶다. 재벌 회장의 하루와 11월의 따스한 햇살 한줌을 찾아 자리를 옮기는 노숙자의 하루가 다르지 않다는 데 동의할 수 있겠는가.

1인 가구가 급증하며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편의점 도시락과 클릭 몇 번이면 집앞으로 배달되는, 동네마다 빠르게 번지고 있는 반조리 식품은 우리 삶의 부조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과정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조리된 음식을 원한다. 조리되지 않은 음식이 아니라 희망과 죽음이 서로 응수하며 벌이는 비인간적 유희가 바로 부조리다. 침묵하는 세계와 열정적인 인간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거리가 부조리다. 의미 없는 인생, 무의미한 세계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색을 입히고 의미를 부여하며 각자의 길을 걷는다. 자살로 시작한 카뮈의 이야기가 행복한 시지프를 떠올리며 마무리되어 당황스럽긴 하지만 반항하는 자가 자유를 얻고 생의 열정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대표적 저작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쓴 프란츠 파농은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의 의미는 비판적 접근을 내포한다. 따라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이미 등급 외 인생이 마련된 카뮈의 고민은 어쩌면 자기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닌 듯하다. 1차 세계대전에서 병을 얻어 일찍 죽은 아버지와 거의 듣지 못해 침묵의 세계를 안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아이에게 삶은 계란이 아니라는 이유,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거대한 인 삶의 ‘부조리’에 관한 에세이는 자살에 관한 성찰로 시작되어 희망을 거쳐 행복한 시지프의 이미지로 끝난다. 텍스트의 난이도, 독해의 어려움을 치워두면 결국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부조리만 남는다. 부조리한 인생이든, 부조리한 사회든 조리에 닿지 않는 일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헛되고 헛될지 모른다. 우리가 통제하거나 알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햇빛이 반짝여 총을 쏘아버린 뫼르소도, “이 세상의 악이란 거의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배움이 없는 선의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라는 베르나르 리유의 선언도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카뮈의 생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자유의지를 믿는 인간이라면 시지프가 밀어 올린 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추론하는 대신, 만약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표현은 사고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존재는 허망한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등등. 분량은 짧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 텍스트. 아포리즘 같은 문장 하나하나를 붙잡고 며칠씩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라서 가까이 두고 들여다 볼만한 책이다. 카뮈의 다른 저작들이나 생애와 사상, 실존주의와의 차이점, 이 책에서 거론하는 철학자와 다른 작가들의 작품까지 들여다볼 수 없더라도 시지프의 어깨와 뺨에 밀착된 차갑고 단단한 바위의 질감과 무게는 느껴지지 않는가. 그 고통과 슬픔 혹은 반항과 행복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건 결국 거울을 보는 것처럼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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