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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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안에서조차 영원히 시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아니 삶은 어떤가.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공시적 상상력은 저절로 만들 수 없다. 삼십 대 초반의 한국계 미국인 김주혜는 아홉 살에 이민 간 이방인이다.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으나 역사를 들여다보며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낸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국인에게 다소 식상한 호랑이라는 문학적 알레고리는 오히려 세계 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여전히 동방의 작은 나라, 그 전통과 문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이야기에 주목한 사람들보다 그 이야기를 잘 풀어낸 작가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까, 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었다. 시대순으로 나열된 역사적 사건들, 익숙한 이름으로 번역된 인물들의 성격, 이야기의 구조와 스토리 전개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제 너무 많은 책들 사이를 헤매며 중첩되고 반복되는 사실, 구조, 캐릭터에 노출됐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새로움보다는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책들이 반갑다는 점에서 작은 땅의 야수들은 한국인의 여집합에 해당하는 독자들에게 적당해 보인다. 아니다, 이 시대를 들여다보지 않은, 이제 막 역사와 소설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당대를 들여다보게 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겠다.

1918년에서 1964년에 이르는 연대기적 서술에 부합하는 사건들은 꼼꼼한 고증과 디테일에 신경 쓴 흔적이 눈에 띈다. 87년생 미국인이 쓴 소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몰입을 방해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을 담아낸 소설이다. 1964년을 그린 4부는 후일담처럼 읽힌다.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에서 반복하는 시대라서 식상한 게 아니다. 잊을 수 없는 시간,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다만 그때, 그 사람들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관점은 계속 변할 것이다. 무용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는 말에 매혹됐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나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 같은 책들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퍼즐을 맞추고 시간과 공간을 재현하며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는 다리를 잇는다.

인간의 삶이, 아니 인류의 역사를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텍스트는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각각의 자리에서 유기적인 고리를 형성한다. 그것이 문학이든 역사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예술이든.

김주혜는 한 겨울 흰 눈과 호랑이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한반도의 고난과 시대적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각각의 인물이 누구를 닮았든 중요하지 않으며 외교관의 아내가 남편 친구와 불륜을 저질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혜석의 이야기가 뒤섞여 등장해도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는 대신 하나의 커다란 변화와 흐름으로 읽어내는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실존 인물과 작은 시기적 오류를 따지는 건 소설을 재미없게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유미리의 『가족 시네마』, 이민진의 『파친코』처럼 외부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들은 자전거를 타고 국경을 넘는 유럽 작가들의 상상력과 차이가 많다. 건널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즐거움이 현실적 비극과 닿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은실과 단이, 옥희와 연화, 정호와 한철, 김성수와 이명보, 야마다 겐조와 이토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 오늘을 만든 근원을 확인하는 실존적 고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겨우 백여 년 동안 우리에겐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 아니, 지금은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루가 일생인 하루살이만큼 찰나에 불과한 각자의 생은 무엇을 향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소설가는 시간의 갈피를 접어 새로운 공간과 인물을 창조하여 독자들에게 녹슨 청동 거울을 들이민다. 흐릿한 형체를 둘러싼 배경 혹은 확신에 찬 자신을 다시, 오랫동안 들여다보라고. 어떤 형태로든 시간은 흐르고 모든 사람은 무덤을 향해 전력 질주를 멈추지 않을 것이며 세상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앞으로 나아가며 밤이 찾아오고 또 해가 뜰 것이다.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 첫 문장

언어 자체가 옥희를 유혹했다. 옥희는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순서로 나열하면 자기 내면의 모습도 마치 가구를 옮기듯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한 마리 춤추는 나비처럼 언어 속을 누볐다. 내면에 쌓이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그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가는 데도 외부에서는 누구도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없었다. - 68쪽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한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 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아의 상승과 확장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말이다. - 388쪽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림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 415쪽

연화는 거침없이, 결의에 차서 울었다. 다시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려야 하는 사람처럼 울었다. - 536쪽

옥희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작별을 고한다 해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수평선 너머 점이 되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상대를 향해 멈추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 540쪽

노년이란, 인생의 모든 행복이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아닌 이미 지나간 날들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 552쪽

삶을 위해 지불하기에 죽음은 아주 작은 대가였다. - 552쪽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 603쪽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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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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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떤 형태로든 우울하다’라는 80년대식 감정의 과잉 토로가 아니라도 자기 안에 함몰되는 건 선택이 아닐 때가 많다. 세상에는 기이한 일들이 차고 넘쳐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하고, 합리적 이유로 포장된 주관적 판단과 고집으로 한여름의 열기를 삼키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은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한숨을 틔워준다. 쉬어가라고 다독이고, 잊으라고 토닥거린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위로와 기대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견디게 하는 힘을 주는 소설은 언제나 반갑다.

내용과 방법에 따라 어떻게 분류하든 개별 독자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 모든 소설에 몰입하기는 어렵다. SF가 집중하지 못하는 독자, 연애 소설에 하품하는 독자, 역사 소설에 열광하는 독자 등이 그렇다. 김기태의 소설은 ‘현실’을 담고 있다. 개연성 혹은 핍진성이 소설의 미덕 중 하나라면 유머 코드를 장착한 소설가는 군계일학일 터. 각자의 입맛에 따라 좋은, 아니 재밌는 소설의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고 하나의 단편 혹은 장편 소설에 모든 요소를 버무려 재미가 배가 될 리 없다. 방심하고 종이에 손을 베일 때가 있다. 그렇게 허를 찔러 독자의 폐부를 찌를 만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 또한 많지 않다.

김기태의 단편들을 읽으며 몇몇 소설가를 떠올렸으나 이름을 지웠다. 비교가 아니라 온전히 김기태가 창조한 소설의 세계를 그대로 음미하면 그뿐이다. 실감나게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굳이 ‘세태 소설’이라는 구분이 필요치 않다. 찰스 디킨스와 빅토르 위고, 발자크와 도스토옙스키 또한 당대의 현실을 묘사하고 재해석하며 풍자하고 패러디하는 즐거움으로 아주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기쁨과 슬픔, 감동과 위로를 건넸다. 그밖의 많은 작가들 또한 그러하다. 보편적 개인의 내면 심리를 깊이 들여다보거나 사회적 사건과 당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 또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곧 ‘나’이며 ‘너’이고 ‘우리’에 해당하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다. ‘그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재미도 없지 않으나 대개 비참하고 신산스런 현실을 견디는 사람들, 구별 지어 금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평온한 일상에서 위기를 맞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모두 내 이야기고, 네 인생이며, 우리들의 삶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개 ‘역사’로 분류된다. 히스토리he-story.

기록은 재미와 교훈을 함께 전한다. 권진주와 김니콜라이, 표제작에서 두 사람을 인터내셔널로 그렸으나 오히려 매우 동일한 집단에서도 심리적 거리와 생각의 차이는 북극과 남극만큼 하나가 되기 어렵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얻는 안도의 한숨 혹은 이 정도면 그래도 견딜만하다는 위로를 얻기도 한다. 무관심과 침묵은 ‘나타懶惰와 안정’을 선물한다. 굳이 김수영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세상 모든 바다」를 지나 「전조등」을 켜고, 「보편 교양」을 갖춰 「무겁고 높은」 곳에 도달하긴 어렵다.

BTS 응원하려고 군대(ARMY)에 가는 사람, 《나는 솔로》에 출연 신청을 하는 사람, 네이버에서 최저가로 구입할 물건을 검색하는 사람……. ‘내 얘긴가, 친구 닮았네’ 친근한 주인공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들게 한다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 평범함이 무려 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는가. 아니 각자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화려한 학벌, 선망하는 직업, 높은 연봉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소설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건 매번 삶의 가치 혹은 진정성 같은 것들이다.

사실 “너 뭐 돼?”라는 질문 앞에서 쭈뼛거리지 않기 힘들다. 뭐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들을 떠올려 보면 정말 그것이 뭐가 되는 이유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아무도 몰라도 스스로는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위선이든, 허위든, 가식이든, 거짓이든 세상과의 불화보다 무서운 건 자신과의 불화다. 온전히 ‘나’로 살지 못하는 마음은 신발 속에 든 돌을 빼내지 않고 걷는 것처럼 불편하다.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사람들은 귀신같이 포장지와 알맹이를 구별한다. 인생이 그리 쉽고 세상이 만만하면 누가 소설을 읽고 쓰겠는가.

김기태의 응원과 위로를 보내는 방식은 독특하다. 아니 그가 독자를 쓰다듬기 위해 소설을 썼을 리 없을 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렇게 읽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김기태의 소설은 「깊이에의 강요」로 괴로워하는 독자는 없을 터.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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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거짓말
장석남 지음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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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서,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 또한 죽은 시인이다”라는 네루다의 말을 다시 만났다.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이 떠올랐다. 장석남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마다 제목만으로도 한 통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절에 대해 브레히트를 인용한다. 현실을 넘어선 시와 소설도 나름의 목적과 가치가 있겠으나 허공에 서서 세상이 아름답다거나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시는 더 이상 읽히지 않는다. 그것이 반드시 삶의 본질, 인간적 욕망, 사회적 자아에 관한 성찰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겠으나, 포장지를 걷어내고 생의 비루함과 현실적 삶을 예리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면 시가 시로 읽히지 않는다. 더 이상.

표제작 「내가 사랑한 거짓말」은 ‘나’와 ‘사랑’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선언처럼 들린다. 물론 가식 없는 인생, 거짓 없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마는. 다시, 시를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아니, 그럴 수 있으리라. 누구든. 언제든.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

나는 어느 날 사타구니가 뭉개졌고 해골바가지가 깨졌고

어깨가 쪼개졌고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

거짓말, 사실적인……

그러나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그렇게 내가 사랑한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민다

나는 하나의 정원

한창 보라색 거짓말이 피어 있고

곧 피어날 붉은 거짓말이 봉오리를 맺고 있다

거짓말을 옮기고 물을 준다

새와 구름이 거짓말을 더듬어 오가고

저녁이 하늘에 수수만년 빛을 모아 노래한다

어느 날 거짓말을 들추고 들어가면

나는 끝이다

거짓말

내가 사랑할 거짓말

거짓이 빛나는 치장을 하고 거리를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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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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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많은 소설가들이 짧게 쓸 시간이 없어 길게 쓴다. 클레어 키건의 첫 소설을 인상깊게 느꼈다. 읽었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담았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번역문장이 이러하니 원문을 읽는 독자들이 어떻게 흔들렸을지 짐작이 간다. 단단하고 반짝이는 작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진 문장들. 힘겨운 일상과 반복적인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불가해한 힘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1980년대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실화를 사실적으로 고증할 필요는 없다. 일제 강점기 대부도 선감원은 1982년까지 복지시설로 운영됐으며, 대한민국의 삼청교육대도 1980년대의 일이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어떤가. 머나먼 유럽 어느 나라의 시대적 사회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해 이 소설을 읽는 한국인은 많지 않았으리라. 소설을 능가하는 오늘의 현실은 영화보다 극적이고 드라마보다 커다란 반전이 계속된다.

그래서, 어쩌면 1980년의 영국이 아니라 2025년 한국으로 치환해도 부족함이 없다. 개별 사건과 상황들을 차치하더라도 거대한 권력 혹은 종교 혹은 기득권 앞에서 무기력한 개인을 들여다 본다. 과연 그것은 사회 구조와 제도의 문제일까, 아니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개인들의 노력과 용기의 문제일까.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처럼 긴장한 단어와 문장들은 나른한 봄날 오후의 햇살처럼 반복적이고 평화로운 일상과 대비된다. 잠시도 멈출 수 없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빌 펄롱과 아내 아일린에게 세라는 전혀 다른 존재였을 것이다. 소설의 결말이나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소설은 문체가 보여주는 힘을 극대화하여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편 소설에 장편보다 긴 여운을 새겼다. 5% 미만의 체지방을 유지한 군더더기 없는 몸을 상상했다. 불필요한 수사, 감정적 형용사와 부사가 아니라 주인공의 갈등과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단순한 서사가 오히려 자극적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는 가능한가. 아니, 이토록 중요한 본질을 외면한 채 삶은 계속될 수 있을까.

황동규는 「즐거운 편지」에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라고 썼다. 사소한 일은 위대한 일의 다른 이름이다. 사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함이다. 이처럼 사소한 일은 이보다 소중한 일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이름으로 명명되든 이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는 구체적 진술이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상징적 암시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뀌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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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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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수의 작가보다 고요한 다수의 작가에 주목하는 독자들이 많다. 존 윌리엄스와 헷갈릴만큼 줄리언 반스의 목소리는 반옥타브 낮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들린다. 우연히 소설과 미술책 몇 권을 읽다가 제목에 ‘우연’이 들어 있어 손이 갔다. 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보다 같은 제목의 황인숙 시집을 먼저 읽은 것처럼 닐이 시간을 거슬러 엘리자베스 핀치를 추억하며 그의 삶을 추적하자 문두스가 파라두를 따라 가는 여정이 먼저 떠올랐다. 어차피 소설이 누군가의 삶, 어느 순간의 진실, 어떤 공간에 비밀을 밝히는 것이라면 인간과 시간과 공간이 어떻세 서로 다르게 조합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여기-나’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학에서 ‘문화와 문명’을 가르치는 엘리자베스 핀치Elizabeth Finch(EF)는 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다. 강의를 듣던 닐은 EF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간 일년에 두 세번쯤 75분 정도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는다. 두 번 이혼했으며 자식이 셋인 닐은 EF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에게 그녀가 책과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EF의 오빠 크리스토퍼 핀치와 친구들에게 EF에 관해 묻는다. 그러다 율리아누스와 에픽테토스를 만난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인용하며 서른 한 살에 죽은 J(율리아누스)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은 액자 속의 액자처럼 소설의 중층 구조를 이룬다. 그가 살던 시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톺아보는 이야기는 EF의 생각을 추론하는 형식으로 작중 화자 닐이 서술한다.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하게 들린다. EF와 닐 그리고 크리스토퍼 핀치와 닐의 친구들 몇몇이 등장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EF도 닐도 아니다. 두터운 액자 속에 엽서만한 그림처럼 율리아누스가 놓여 있다. 저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만한 작은 사건과 한 인간에 대한 오해. 가정법으로 후회를 곱씹는 어리석음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줄리언 반스는 EF를 통해 율리아누스 혹은 이후의 수많은 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안다고 달라지나. 모른다고 불행한가. 활자를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가들에게 매료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흔들림없는 편안함은 침대가 과학이라 외치는 어느 가구 회사의 슬로건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를 숙명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의 꿈인지도 모른다. 이미 정해진 길을 걷고 싶다면, 이미 결정된 미래를 알고 살던 시대를 우리는 이미 통과하지 않았던가. 자유를 누리려면 불안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법이다. 배교자로 낙인찍힌 율리아누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왜 타인을 향한, 아니 다른 종교에 대한 분노와 멸절을 누가 가르쳤을는지 묻고 있는 줄리언 반스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반종교,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EF와 닐의 이야기로도 충분하고 율리아누스가 아니어도 소설은 성립한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EF 삶이든, 고대 로마의 황제 이야기든, 남은 생을 또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닐이든 상관없다. 비온 뒤에 해가 떴고 우리도 또 내일을 살아야 할 테니, 소설 속의 인물들과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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